철학자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그린비, 2010)은 '3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놓기도 했고 알라딘에서야 따로 소개가 필요없지만, 저자 인터뷰기사를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 '우리 몸에 맞는 철학'이란 문제의식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경향신문(10. 03. 02) “동서양철학도 우리 몸에 맞아야”  

소장 철학자 강신주씨(43)는 철학자이면서도 적지 않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대학에서의 공식 직급은 ‘시간강사’이지만 강단에 얽매이지 않는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강연, 동서양 철학사상을 끌어다가 일상의 현실에 대입시킨 저술로 그는 인문학, 특히 철학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겐 꽤나 유명한 저술가다.

 

강씨가 최근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이라는 대담한 부제가 달린 <철학 vs 철학>(그린비출판사)을 출간했다. 단독 저서로는 14번째의 책이다. 이 책은 본문만 820여쪽, 인명사전·개념어사전·더 읽을 책 등 부록을 합하면 900쪽이 넘는다.   

철학사의 고전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 펑유란(馮友蘭)의 <중국철학사>를 서가에서 밀쳐버린다는 목표에서 출발한 <철학 vs 철학>은 구성부터가 독특하다. 1부 서양편, 2부 동양편으로 나누어 사물의 본질·행복·사유재산·사랑·언어·윤리·깨달음 등 56개 주제를 세우고, 해당 주제에 서로 대립적인 시각을 보인 동서양 철학자 112명을 등장시켰다. 각 장은 해당 주제에 대한 문제 제기에 이어 2명의 철학자를 소개하고, 마지막에는 강씨의 해설과 비평으로 구성돼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도 되고, 끌리는 주제부터 뽑아서 읽어도 된다.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지난 20년 동안의 모든 것을 이 책에 쏟아부었다는 강씨. 지난달 26일 그가 기획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출판기획집단 ‘문사철(文史哲)’ 사무실에서 만난 강씨는 두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개념어사전을 만드느라고 20일 동안 컴퓨터에 매달려 있었더니 탈이 나고 말았습니다. 안과에 갔더니 결막염이라고 하더라고요.”

한국의 철학계에 던져지는 비판 가운데 흔한 것이 저자는 없고, 평론가·수입상만 넘쳐난다는 것이다. 강씨 역시 그 비판에 동조했다. “외국의 사상을 수입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옷을 수입한다면 긴 곳은 자르고, 짧은 곳은 이어서 우리 몸에 맞게 해야 하는데 선배들은 긴 옷을 그대로 입고 다녔어요. 오히려 옷을 건드리면 안된다고 했죠.”

강씨는 <철학 vs 철학> 역시 “평론가적 글쓰기의 완결판”이라고 했다. 하지만 20년 공부의 매듭을 짓고 새로운 공부의 출발점으로 삼은 이 책에서 동서양 철학을 ‘우리의 것’으로 재창조하는 가능성을 탐색했다. “신채호 선생이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된다’고 개탄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을 빌리자면 서양철학 혹은 서양철학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서양철학 혹은 우리의 동양철학이 되어야 합니다.”

강씨는 이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오히려 철학의 주변부에서 살아온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했다. 강씨는 책의 서두에 “우리는 서양철학의 중심지도 아니고 동양철학의 중심지도 아닌 제3의 공간에서 살아왔다. 이런 악조건이야말로 우리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제3의 시선으로 인류의 철학사를 다시 조망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라고 썼다.

강씨가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는 자유와 희망, 미래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고 삶에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철학이다. “철학은 인간에게 미래와 희망을 심어주는 부류와 우울하고 체념하게 만드는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양쪽을 모두 보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논쟁을 하도록 함으로써 전자를 제 위치에 복원시키고자 했습니다.”

책을 집필하는 동안엔 사흘 글을 쓰고 하루는 등산을 한다는 강씨는 “<철학 vs 철학>의 에필로그까지 쓰고 나니 허탈감과 함께 ‘이제 뭘하지?’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고 말했다. 엄살이 섞여 있는 듯했다. 그의 머리와 몸은 이미 올 여름 1차분이 출간될 <제자백가> 시리즈로 옮아가고 있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을 12권으로 총망라하는 큰 작업이다.(김재중기자) 

10. 03. 01. 

 

P.S. 저자의 책이 14권이라고 하는데, 내가 둘러본 건 절반쯤 되는 듯싶다. 제일 처음 읽은 건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태학사, 2004)으로 저자가 장자 철학 전공이며 대단히 활달한 문제의식과 문체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속되게 말하면 그는 '장(자)빠'이고 '노(자)까'이다). 연이어 읽은 게 <장자 & 노자>(김영사, 2006)이고,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그린비, 2007)은 출판사의 의뢰로 출간 이전에 읽어본 기억이 있다.  

 

저자는 <공자 & 맹자>(김영사, 2006), <회남자 & 황제내경>(김영사, 2007) 등의 책도 썼는데, 두 사람을 대조시키는 아이템은 이 시리즈를 쓰면서 착안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전환점이 아니었을까 싶은 책은 <철학, 삶을 만나다>(이학사, 2006)이다. 평이한 제목 때문에 별로 주목하지 않다가 나는 나중에야 장서에 포함시키게 됐다.  

 

실제로 <철학, 삶을 만나다>란 저작 자체가 대중 강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듣기에 저자는 대학 바깥에서 오히려 더 유명한 철학자이다. 그런 강의와 연계하여 낸 책들이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네시스, 2009),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동녘, 2010) 등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달에도 그의 강의는 아트앤스터디 인문숲(http://www.artnstudy.com/inmoonsoop/Lecture/default1003.asp?lessonidx=off_sjooKang02) 등에서 접할 수 있다. <제자백가> 시리즈의 일부도 포함하고 있는 강의인 듯하다.  

P.S.2. 한편, 인터뷰 내용에서 흥미를 끌면서 핵심적인 대목이라 생각되는 것은 이런 주장이다.   

"우리는 서양철학의 중심지도 아니고 동양철학의 중심지도 아닌 제3의 공간에서 살아왔다. 이런 악조건이야말로 우리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제3의 시선으로 인류의 철학사를 다시 조망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서양철학도 아니고 동양철학도 아닌 '제3의 공간'과 '제3의 시선'이 과연 가능한지, '서양철학' '동양철학'이란 이분법이 유지될 수 있으며 실체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여하튼 저자의 작업구도는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은 짐작에 연세대 철학과의 스승인 박동환의 계보를 따른 것이다. 박동환 교수는 단촐하게도 <안티호모에렉투스>(길, 2001),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고려원, 1993), <서양의 논리, 동양의 마음>(까치, 1987) 등 세 권의 저서만을 남겼는데, 읽은 지 오래됐지만 나로선 서양/동양, 논리/마음이라는 이분법이 투박하게 여겨졌고, <안티호모에렉투스>에서 주창하는 '3표이론'이 괴이하게 생각됐다.  

하지만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을 보면 저자는 21명의 한국 시인들과 짝지은 철학자들 가운데 한국인으로는 '오직 박동환 한 명'만을 포함시키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20세기에 철학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라곤 박동환 한 명뿐이라는 뜻도 된다(<철학 VS 철학>의 마지막 장은 '한국에서 철학은 가능한가?'란 주제로 '박종홍과 박동환'을 대질시킨다. 박종홍은 소위 '서울대 철학'의 태두다). 이를 '입증'하듯 <안티호모에렉투스>에서 한 대목을 인용했다.  

서양철학에 대해서도 동양철학에 대해서도 한국 사람은 다만 관망하고 모방할 뿐인 그래서 만들지 못하는 주변의 제삼자다. 오늘 벌어지는 현대 철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주변에 놓인 자에게는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주변에 놓인 자는 일시적으로 실현된 패권의 진리가 아니라 그것이 모두 무너져 흩어진 다음에도 남아 있을 원자의 진리를 구한다. 패권의 진리를 거부하는 그는 생명의 원자, 다름 아닌 모나드 곧 생명 개체의 깊이에 새겨진 억 년의 경험과 기억을 감각에 다가오는 영원의 접점, 현재에서  재현한다.

철학에서 한국인은 제삼자이고 주변인이다, 그는 패권의 진리를 거부한다, 정도가  내가 읽을 수 있는 문장이고 나머지는 요령부득이다. 이 정도면 나는 철학의 경지를 넘어선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풀이는 이렇다.  

"박동환은 한국인이 항상 주변에 놓여 있는 제3자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에 따르면 동양철학을 대표하는 중국철학이 한반도에 들어왔을 때 한국인은 그것을 관망하고 모방할 뿐이었습니다.(...)그렇지만 박동환은 중국철학과 서양철학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 이면에는 더 심오한 것이 있었다고 강조합니다. 일시적으로 번갈아가며 패권을 잡은 역사적 진리들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될 생명의 논리를 한국인들이 따라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박동환은 한국인이 가진 집요한 생명력의 기원을 찾습니다. 모든 도시의 철학, 모든 문명의 패권이 소멸해도 한국인은 도시 바깥의 논리, 즉 생명체가 가진 근원적인 삶의 논리를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으로 대변되는 도시의 논리는 문명이 붕괴되었을 때 꿈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박동환에 따르면 한국인의 삶과 사유 속에 흐르는 생명의 논리는 문명이 붕괴되어도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410쪽) 

'철학적 시읽기'란 타이틀에 걸맞게 시적인 문장으로 구성돼 있지만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다(나는 한국인이 아닌가?). 열심히 등산을 하여 저자와 같은 수준의 '고도감'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아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역시나 연세대 철학과를 나온 김상봉 교수 또한 <나르시스의 꿈>(한길사, 2002)에서 20세기의 한국인 철학자로 함석헌과 함께 박동환을 꼽은 바 있다. 철학자 박동환에 대해 호의적인 편인데, 그럼에도 <안티호모에렉투스>에 대해선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오래 전 기사를 옮겨놓는다. 제삼자이자 구경꾼의 눈으로 보기에 철학자들의 세계는 오묘하고도 오묘하다...   

교수신문(02. 06. 03) 철학자들의 논쟁이 아름다운 『안티호모에렉투스』

작년 초반에 아무런 장식도 없고 저자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안티호모에렉투스’라는 철학책이 발간됐다. 저자는 박동환 전 연세대 교수(철학)로 저자가 바라보는 독특한 개념의 철학사가 집약된 책이다. 지금 이 책이 잔잔한 화제를 낳고 있다. 아니 화제라기보다, 이 책을 둘러싼 팽팽한 긴장의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지난 22일 문예 아카데미에서 박동환 교수와 김상봉 교수가 바로 이 책 ‘안티호모에렉투스’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박 교수의 저작에 김상봉 교수가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것.

3표 이론으로 정리한 세계 철학사
박 교수 스스로 정립한 평생의 철학적 물음은 과연 동양(철학)은 서양(철학)과 다른 논리구조를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집약될 수 있다. 서양철학과는 다른 동양의 논리구조가 무엇인지, 더 나아가 중국철학과도 다른 한국인의 사유구조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평생의 과제였던 것이다. 박 교수는 이런 사유를 집약해 ‘3표’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세계 철학사를 재규정했다. 여기서 ‘표’란 한 문화에서 “명백한 지향의 표적 또는 탐구의 공통 준거가 되는 것”을 말한다.

거칠게 3표 이론을 요약하자면, ‘1표’는 고대 그리스에 샘을 두고 있는 서양철학을 ‘2표’는 고대 중국에서 연원한 중국철학을, ‘3표’는 “철학사 없는” 유럽과 중국 이외의 지역 사람들의 사유를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서양문명의 모임살이의 형식은 ‘正體爭議’이며, 중국철학의 그것은 ‘集體不爭’이다. 정체쟁의란 동일성을 보존하고 모순을 배제함으로써 존재의 자기 일관성과 동일성을 보존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서양철학의 근본 기반이 된다. 집체부쟁이란 동일성의 원리와 반대로 모든 개별자의 존재 의미가 개체가 놓여 있는 배경인 “분리 불가능한 집체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런 개념 규정을 통해 동일성의 법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호모에렉투스’라 불리는 고생인류가 등장한 시기부터 이미 인간의 의식 속에 자리 잡았다고 주장한다. 이쯤 되면 이 책의 낯선 제목도 이해가 될 듯 하다.

박 교수의 論究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철학과는 다른 한국의 철학을 개념화하고자 한다. 한국 철학은 3표로 분류되는데, 여기서 3표의 존재방식은 바로 ‘붙음살이’이다. 이는 자연생태의 존재방식으로 이들에게는 해답의 논리는 없으나 ‘물음의 논리’가 있다. 세계를 동일성의 법칙이나 相反常性의 논리로써 파악하는 대신 이들은 세계를 하나의 암호상자로 이해하면서 끊임없이 그 “암호상자로부터 오는 신호음에 귀를 기울인다.” 철학이 일찍 성립한 서양 혹은 중국과는 다르지만, 그 이외 사람들에게도 삶의 양식이나 삶의 전략이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철학이란 ‘생명형태’의 한 가지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양심과 절망 사이의 긴장 부재
김상봉 교수 역시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가를 탐구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고 또 그를 위해서는 우리와 타자의 차이를 밝혀야 한다는 점에는 박 교수와 견해를 일치한다. 그러나 박 교수의 논의에 대해 “주체의 개념을 무책임하게 포기했고, 타자의 개념에 문제가 있다”라고 비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안티호모에렉투스’의 문제는 주체뿐 아니라 타자도 없다는 데 있다는 것. 이런 문제 때문에 우리 삶의 양식을 도시 문명 밖에 두는 비약을 범했고, 비판의 대상으로 떠오른 인간의 자기중심주의가 ‘왜’ 문제임을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의 문제제기는 더욱 근본적인 곳을 향한다. “박 교수의 이전 사유에는 ‘절망의 철학’과 ‘양심의 논리’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안티호모에렉투스’에는 더 이상 양심과 절망 사이의 긴장된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오직 절망의 의식만이 과도하게 극단화돼 있고, 양심은 자연적 필연성에 짓눌린 절망의 의식 아래서 철저히 침묵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저자에게서 실천적인 측면이 사라지고 형식적인 논의만 남는 것이 아니가하는 우려다.

이런 논평자의 해석에 대해 박 교수는 3표에서 발생하는 타자 이해방식을 친절하게 다시금 설명했다. “3표의 타자 대응 또는 방식은 생명의 고유한 탐구 활동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개체들은 그 출연 시점으로부터 지금까지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힘, 타자에 대해 도전하며 그것을 통제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근본적으로 대결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으며 인식할 수 없는 힘 [ ]으로서 받아 들인다.” 즉 3표에 타자 인식이 없다는 것은 잘못된 비판이라는 설명이다. 인간 삶의 실천적인 측면을 결코 간과하고 있지 않다는 대답도 저자는 빠뜨리지 않았다. 저자인 박 교수는 윤리·도덕의 실천에 앞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려는 시도를 앞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개념화 작업을 우선하고 그 이후 실천적인 부분을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박 교수의 입장이다.

철학 뿐 아니라 모든 학문에서 학문의 실천적 책임과 이론화 작업의 간극은 주요한 화두로 인식돼 왔다. 박동환 교수와 김상봉 교수의 논쟁도 이런 측면에서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덧붙인다면, 퇴임 선배 철학자가 세대와 위계를 뛰어넘어 젊은 철학자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자기 물음을 발전시켜나가는 이 광경이 우리 학계의 논쟁 문화를 한 계단 더 성숙하게 만드는데 ‘아름다운’ 기여를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속적인 논쟁을 통해 자기 사유의 주름을 다듬겠다고 밝힌 박 교수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논의를 재구성할 것인지 궁금하다.(이지영 기자)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고세운닥나무 2010-03-02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동환은 근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보며 알게 됐는데,문장의 난삽함이 요설의 지경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현대한국철학사를 말할 때 김영민과 그의 스승인 윤노빈을 꼽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노빈의 저서가 그의 기구한 인생 때문에 한 권만 우리에게 남아있지만 그 책이 주는 무게감은 소홀히 여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연세대 철학과 출신들에 너무 후한 점수를 주는 것 같기도 하구요. 위 책에서 김상환 교수를 격찬하던데, 김상환도 연세대 출신이죠.

로쟈 2010-03-02 23:03   좋아요 0 | URL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김상환 교수의 책은 저도 좋아합니다...

비로그인 2010-03-02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쪽에 우석훈이 있다면 철학쪽엔 강신주라고 해야겠네요. 그 다산성은 정말 오묘합니다. 제가 아는 로쟈님 광팬이 문학쪽에서 로쟈님도 제몫하시길 바란다네요. 후끈한 찜질방 열기만 못해도 끈끈하게 성원을 보탠다고.

로쟈 2010-03-02 23:10   좋아요 0 | URL
끈끈한 압력 같은데요.^^;

mirror 2010-03-02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철학계의 문제는 수입상과 평론가들만 넘쳐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수입과 평론조차도 제대로 못해왔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게으른 학자들은 아예 공부를 안 하고, 좀 부지런하고 재주가 있는 학자들은 한가지 분야에 천착할 생각을 하지 않고, 대가인양 여러가지 잡다하게 건들다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의 상황이었습니다. 90년대 이후에서야 기본에 충실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죠. 이것은 철학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 것입니다. 거의 모든 인문사회과학들이 다 그러하죠. 우리는 이제서야 기본을 조금이나마 따라가고 있는데, 박종현 선생의 플라톤 번역이라던가, 백종현 교수의 칸트 번역이 그런 실례들입니다. 고전들의 번역조차 제대로 안 되어 있는데, 무슨 독창적 철학입니까? 아마도 동양철학의 번역이 서양철학의 번역보다 상황이 더 낫다고는 말 못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서양 철학을 통합한다고요? 희망과 미래를 주는 철학이라고요? 아마추어 문필가들이나 하는 소리들입니다. 대중들을 상대로 글을 쓰는 사람은 그에 맞게 말하면 됩니다. 대중용 작가가 대가인양 떠벌이는 것은 과대광고입니다. 김용옥의 과오는 대중작가이자 엔터테이너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자신이 아주 대단한 철학자인양 과대광고를 했다는데 있습니다. 김용옥처럼 동양철학자들은 가끔 망상에 빠지는 것이 특기인가 봅니다. 자신의 본분에 맞는 광고멘트를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박동환 교수는 연대교수였고, 김상봉 교수도 연대에서 학부 석사까지 했습니다. 당연히 재학 당시 박동환은 연대 교수였죠.
박정희와 전두환의 우리식 민주주의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김일성의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것도 있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식'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 중 긍정적 평가받는 것이 있나요? 특히 이념이나 제도 중 그런 것이 있기나 합니까? 기술적으로 우리 상황에 맞추는 것 이외에 이념이나 제도를 우리식이라는 서술어를 붙여서 수정한 것은 대개 부정적인 결과만을 낳았습니다. 계파 보스 몇몇이 모여서 총리를 결정하는 일본식 민주주의란 열등한 민주주의 형태일 뿐,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식' 철학이라는 것이 왜 있어야 하나요? 기원 다시 말해 '원조'라는 것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것은 한국사람들 특징인데, 이것은 부정적인 결과는 낳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철학에서 우리식 찾는 것은 반도체와 자동차에서 다른 나라를 앞지르듯이 다른 나라에서 그런 상품 내놓으니까, 우리도 내놓아야 한다는 경쟁논리까지 더해진 것 같아, 더욱 괴이합니다. 철학과 이념에서마저 우리식을 즐겨찾는 이 집착의 끝이 무엇이 될지 참으로 걱정입니다.

로쟈 2010-03-02 23:14   좋아요 0 | URL
저는 철학 문필가의 대중적 글쓰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백종현 교수의 말대로 전문철학은 '소수'가 하는 것이니까요. 다만, 대단한 '한국철학'이 가능할 것처럼 자부심을 가질 만한 단계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일단 '한국어'가 그러한 철학적 사유를 감당할 수 있는지, 그런 한국어를 우리가 갖고 있는지 의문이어서요...
 

어젯밤에 대니얼 레비틴의 <호모 무지쿠스>(마티, 2009)를 읽다가 '아인 랜드(1905-1982)'란 이름을 다시 보게 됐다. 이런 구절이다.    

진실로 영성을 갈구하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혼란한 상황들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지만 전통적인 종교제도가 암무런 도움을 주지 않을 때, 사람들은 요가, 불교, 아인 랜드, 밥 딜런, 조운 바에즈, 레넌 앤 매카트니, 제포슨 에어플레인의 음악, 그리고 때로는 약물에 손을 내밀었다.(86쪽)

그리고 '아인 랜드'란 이름에만 각주가 붙었는데, 그건 그만큼 우리에겐 '생소한' 이름이란 뜻이겠다. "러시아 태생의 미국 소설가이자 철학자로 그녀의 합리적 개인주의 사상은 오늘날 미국의 자유주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가이면서 단순한 통속작가가 아니라 미국사회의 철학적 토대를 보여준 철학자라고도 하지만 우리에겐 낯설다는 것은 아직 우리의 '미국 따라하기'가 충분하진 않다는 뜻도 되겠다. 그녀의 대표작인 <아틀라스>가 미국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책인지는 마이클 셔머가 <진화경제학>(한국경제신문, 2009)에 적어놓은 대목이 잘 말해준다. 

나는 <아틀라스>가 대단히 주목할 만한 책임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1991년 의회도서관과 '이달의 북클럽'이 독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 무엇이었는지 설문조사한 결과 성경 다음으로 이 책을 꼽은 적이 있다.(28쪽) 

 

     

언젠가 <아틀라스>(민음사, 2003)를 읽어보려다가 너무 방대한 분량인데다가 이미 절판된 책이라 제쳐놓았는데, 그녀의 또다른 대표작인 <마천루>(광장, 1988)는 아직 살아있기에 바로 주문을 넣었다. 미국식 개인주의를 가장 잘 대변하는 작가이고 작품이라면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과 소비에트 소설과 비교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게다가 러시아 출신 아닌가! 러시아 이름으론 '알리사 지노비예브나 로젠바움'이다. 이름에서도 유대인이란 걸 알 수 있다. 요컨대, '러시아 태생의 유대계 미국 작가'이다.   

다시금 검색하다 보니 아인 랜드는 앨런 그린스펀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하고, <마천루>는 첼리스트 장한나가 '내 인생의 책'으로 꼽기도 했다. 원제는 'The Fountainhead(근원)'이지만, 이 작품을 원작으로 1949년에 만들어진 킹 비더 감독의 영화가 국내에 <마천루>로 소개돼, 그렇게 굳어진 듯하다(킹 비더는 헐리우드판 <전쟁과 평화>(1956)의 감독이기도 하다. 오드리 햅번이 주연했던 그 영화다). <마천루>는 작년 11월 서울 광화문 미로스페이스에서 열린 제1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의 개막작으로도 상영됐다. 이 영화제를 소개한 기사와 함께 장한나씨의 칼럼을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대략 어떤 작가이고 어떤 책인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주간한국(09. 11. 19) 건축, 영화를 만나 도시를 증언하다

미국 자본주의의 이상 <마천루>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영화제의 개막작은 킹 비더 감독의 1949년작 <마천루 The Fountainhead >다. 아인 랜드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건축 영화의 고전이다. 하워드 로크라는 천재 건축사가 기존의 건축적 관행, 대중적 취향에 맞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나간다는 내용.

하워드 로크는 단지 고집스러운 건축사가 아닌, 미국식 자본주의가 상정하는 이상적 개인이다. 단순한 쾌락에는 좀처럼 현혹되지 않으며 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이 극대화된 인물. 소설 <마천루>의 한 구절은 그의 건축적 이상을 잘 드러낸다.

"저의 규칙은 이렇습니다. 하나의 재료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다른 재료로 결코 만들 수 없다. 두 개의 재료가 똑같은 것은 없다. 지구상에 두 개의 장소가 똑같은 곳은 없다. 두 개의 건물이 똑같은 용도를 가진 것은 없다. 용도와 장소와 재료는 형태를 결정한다. 중심이 되는 하나의 아이디어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으면 합리적이거나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는 모든 세부 사항을 결정한다. 건축물은 인간처럼 살아 있다. 건물은 그 자체의 진실과 그 자체의 유일한 주제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자체의 유일한 용도에 맞게 사용된다. 사람은 자기 육체의 조각을 빌리지 않는다. 건물은 혼을 빌리지 않는다. 건물을 만든 사람이 건물에 혼을 주고, 그 혼을 표현할 모든 벽과 창문과 계단을 결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철학자이기도 한 작가 아인 랜드는 <마천루>가 출간된 지 25년이 지난 후 덧붙인 서문에서 자신의 소설의 목적은 "이상적인 사람과 그런 사람이 가능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밝히며 주인공인 하워드 로크의 "의지의 힘"을 찬양하고 있다.

나아가 이런 사람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외부적 조건으로서의 "자유롭고 생산적이며 합리적인 체제, 무간섭주의인 자본주의 사회"를 옹호한다. '건축'이라는 행동이자 산물은 이런 이상향의 메타포인 셈이다. 소설 <마천루>가 일종의 미국사회의 철학적 토대로서 논의되어 온 배경이다.

아인 랜드 자신은 소설 속 어떤 인물이나 에피소드도 실재와 관련이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하워드 로크의 엄격하고 간명한 캐릭터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사"라고 칭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와 엮여 이야기되어 왔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2000년 미국건축가협회에서 선정한 '20세기 10대 건축물' 중 넷이 그의 작품일 정도로 미국 건축사를 대표하는 인물. 독창적인 풍모로 여전히 세계를 매혹시키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대자연과의 유기적인 어우러짐을 구현한 낙수장 등이 대표작이다. 기하학적이면서도 유기적인 그의 건축 형태와 철학은 창조자를 꿈꾸는 많은 건축사들의 롤모델이기도 하다.(박우진기자)  

 

매일경제(10. 01. 15) 첼리스트 장한나 "나의 가능성을 믿고 전진하라" 

2010년을 맞이하며 새해에는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나'라는 화두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지휘자의 길을 가면서 무엇보다 '타협'과 '비전'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됐다. 타협이란 현재 상황에 맞게 내 비전을 현실적으로 조금씩 고쳐나가는 과정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쉽게 만족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반면 비전이란 뚜렷한 목표이자 모든 것을 걸고 노력할 만한 절대적인 가치가 아닐까. 문득 미국 금융정책가 앨런 그린스펀의 정신적 지주였던 러시아 작가 에인 랜드(Ayn Rand)가 쓴 소설 '더 파운튼헤드(The Fountainhead)' 서론 중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내가 만드는 영광이 하나의 환상이 아닌, 진짜이며 살아 있는 현실로 보고 싶다. 어딘가에도 나 말고 그것을 원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불가능한 비전을 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자기 자신을 불태워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영혼도 연료가 필요하다. 그것도 마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구는 많은 사람과 그들 비전에 충분히 적용되는 것 같다. 이 책은 '모든 값진 비전은 불가능한 꿈이 아닐까'라는 생각과 동시에 '인간이기에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게 심어줬다. 고등학교 졸업 선물로 수학 선생님께 받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 책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개인 목적을 위해 부딪히는 복잡한 구성과 끝없는 극적 긴장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주인공들은 건축과 언론에 몸담은 사람들이다. 저마다 자신만의 처지와 약점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개인적인 욕망과 이윤을 위해 가차없이 행동한다. 비겁한 사람, 약은 사람, 약한 사람,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사람, 남을 잘 조정하는 사람, 비도덕적인 사람…. 

작가가 만들어낸 이 복잡하고 각진 사회 속에도 그가 정의한 이상적인 인간형이 있다. 바로 자기 비전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건축가 하워드 로악(Howard Roark). 그는 건축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건축한다. 굽히지 않는 의지 때문에 대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사회에서도 따돌림을 당한다. 하지만 결코 자기 가치와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오늘이 힘들다고 내일을 타협하지 않는다. 냉정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자신이 정한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그리고 서서히 그의 곁에는 하나 둘씩 그의 비전을 믿고 응원하는 친구들이 생긴다.

하지만 그 믿음이 항상 진실할 수 있을까. 혹시 오만은 아닐까.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인간의 가능성에 한계를 정할 능력도 권리도 없다. 최선과 최고, 이상을 위한 비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면 충분히 가능한 마음자세인 것 같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진정한 문명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원천은 바로 '자아(ego)'에서 비롯된다는 사상을 전한다. 자기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고 나를 위한 마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철학이다. 이상적인 인간은 자신만을 위해 일을 하지만, 이상적인 최고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문명 발전의 근원이 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책 제목을 원천 또는 근원을 뜻하는 단어 '파운튼헤드'로 정했다.

물론 현실 속에서 로악처럼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뚜렷한 비전이 있다면 모든 행동은 그 불가능할 것 같은 비전을 이루는 디딤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니체가 쓰고 랜드가 동의했듯 행동이 아닌 믿음이 가장 결정적인 것이다. 그 누구도 인간의 가능성에 한계를 정할 수는 없다. 그 가능성을 믿고, 그 믿음을 통해 불가능한 비전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갖고 새해를 시작해 본다.  

10. 02. 09.



P.S. 찾아보니 그린스펀이 랜드 여사에게 얽매여 있는 걸 조롱하는 이미지도 눈에 띈다. 아인 랜드의 책은 국내에 몇 권 더 소개돼 있다.  

 

<자본주의의 이상>(자유기업센터, 1998), <철학,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자유기업센터, 1998)와 <낭만주의 선언>(열림원, 2005) 등이 그것인데, 나는 <자본주의의 이상>과 <낭만주의 선언>의 저자가 같은 사람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각각 저자가 '에인 랜드'와 '아인 랜드'로 표기돼 있다). 무심코 지나쳤는데, 레닌주의도 공부하는 김에 아인 랜드에 대해서도 공부를 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아니나 다를까, 우리의 지젝은 아인 랜드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해놓은 게 있군!)...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eonjoo 2010-02-0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언급하신 "진화경제학"의 프롤로그에서도 저자 셔머가 '아틀라스'에서 받은 영향을 서술하고 있더군요. 지적하신 우리의 '미국 따라하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로쟈 2010-02-09 13:37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언제 아인 랜드를 찾아봤나 했더니 그 책을 읽다가였습니다.^^ 다시 보니 거기선 '에인 랜드'라고 표기했네요...

blanca 2010-02-09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장한나 인터뷰에서 저 책을 보고 엉뚱한 제목으로 검색해 보다 번역이 안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렸었는데 있었군요. 다른 얘기지만 장한나의 독서량과 깊이도 상당한 것 같아요. 보관함에 넣어두어야 겠습니다. 철학자이면서 소설가. 게다가 유태계 러시아 태생의 여류작가가 쓴 건축가의 이야기라니 기대가 많이 됩니다.

로쟈 2010-02-09 14:24   좋아요 0 | URL
'에인 랜드'도 '러시아 작가'리고 해놓았는데, 로스트로포비치의 영향인지 러시아문학도 많이 읽습니다.^^

아포지 2010-02-09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이 First as Tragedy, then as Farce에서 아인 랜드를 언급하는데, 다른 책에서도 언급을 하나요? 최근 가장 뜨거운 미드 중 하나인 Mad Men에는 미스 랜드가 여러 번 언급되기도 합니다. 더불어 북미에서 어린 남자애들이 아주 잘 혹하는.... 특히나 알파독일 경우엔..더욱 더 선봉하게 되는 그런 작가인 것 같습니다.

로쟈 2010-02-10 09:47   좋아요 0 | URL
온라인에서 검색이 됩니다. 아마 그 책에 삽입되었을 수도 있을 듯하고요. '알파독'이란 표현을 쓰나 보군요. 덕분에 알았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2-09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인 랜드는 엘리트 덕에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철학을 갖고 있죠.만약 엘리트들이 파업을 하면 전세계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습니다.저는 랜드의 주장은 전쟁 때 보병소총수는 전사해도 금방금방 충원이 되지만 파일럿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비슷하다고 봅니다.<마천루>의 주인공이 바로 그런 엘리트이고 주변의 잡것들은 봉황의 뜻을 모르는 참새들이다...그거죠.

로쟈 2010-02-10 09:46   좋아요 0 | URL
엘리트주의인데,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뭔가가 있나 봅니다...

13jkng 2011-07-15 23:01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 아인 랜드의 소설이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이유는 엘리트주의이기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을 엘리트의 경지로 이끌어 올려 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Atlas Shrugged 에서 보면은 주인공들이 특권 계층이라기 보다는, 그리고 보편적인 hero, heroine의 느낌이 난다기 보다는 그저 공감할 수 있는, 비틀어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묘사되기 때문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Dagny와 Hank둘 다 경제적으로 부층에 해당하기 때문에 약간의 반발(?)을 살 수도 있지만, 소설에서 glorify되는 다른 캐릭터들을 보면 거의 노동자들이거든요. 그리고 사실상 Dagny나 Hank 같은 기업가들도 노동자이죠. 자기가 할 일을, 즉 머리를 쓰는 일을 노동자들이 근육을 쓰는 것만큼 열심히 한다는 면에서 말이에요.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엘리트주의에 적합한 philosophy는 아닌 것 같아요. 저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냥 지나가다 보이길래 느낀 거 몇 마디 적어봅니다 :)

심술 2010-02-09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인 랜드랑 얽힌 기억 몇 개
1.맨 첨 아인 랜드를 알게 된 건 우연히 잠 안 오는 어느 날 새벽 텔레비전에서 본 Passion of Ayn Rand 라는 영화에서였어요. 쎅씨한 헬렌 미렌 여사께서 아인 랜드였죠.
2.언젠가 요새는 활동이 거의 없는 나귀님 서재에서 나귀님이 나도 아인 랜드를 좋아하지만 고급 무협지로서 좋아하지 누구누구처럼 랜드를 시대의 선구자로서 신봉하는 건 아니다 라고 썼던 거 같아요. 누구누구가 누구였는진 이제 잊었어요.
3.언젠가 강유원이 쓴 글에서 아인 랜드가 미국인에게는 인기 있는 작가인지 몰라도 나랑은 영 안 맞는다 라는 대목을 만난 거.
4.갑자기 기억이 더 안 나는군요.

로쟈 2010-02-10 09:45   좋아요 0 | URL
저도 강유원시 글은 전에 읽었습니다. <아틀라스>에 대해서였죠. 결정적으로 너무 두꺼운 책이죠.^^;

sophie 2010-02-10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천루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로쟈 2010-02-10 09:45   좋아요 0 | URL
아직 절판되지 않았습니다...
 

서른을 넘는 고비에선가 나대로 짠 독서계획에서 '역사'와 '동양 고전' 쪽은 40대가 되면 읽기로 한 분야다. 너무 방대한 분야이기도 해서 시간적으로나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가 없다고 판단해서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서 어느새 40대가 되고도 두 해가 더 지났다. 사실 재작년부터 은근슬쩍 준비는 해오고 있는데, 최근에는 중국사와 일본사 책들을 조금씩 긁어모으고 있다. 어디까지나 교양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대로의 안목과 주관 같은 걸 10년쯤 후에는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부분적으론 중국과 일본의 근현대사 책을 몇 권 읽는 것이 올해의 목표이긴 하지만, 그와 병행하여 전체적인 그림도 그려보는 게 유익하면서도 필수적이다. 염두에 둔 책은 '통합적 지구사'를 표방한 신시아 브라운의 <빅히스토리>(프레시안북, 2009), 그리고 남경태의 '종횡무진 세계사' <역사>(들녘, 2008), 최근에 나온 시릴 아이돈의 <인류의 역사>(리더스북, 2010) 등이다. 모두 중학생 정도면 읽을 수 있는 책이다(중학교 때부터 세계사를 배우니까).       

시릴 아이돈은 <찰스 다윈>의 전기 작가로도 유명하다는데, 뜻밖에도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 책이다. <찰스 다윈>(에코리브르, 2004). 그리고 <인류의 역사>에 이어 <인류의 약사>(2009)란 책도 최근에 펴냈다. 분량도 비슷해서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인류의 역사>(원제는 <인류 이야기>. 곰브리의 <서양미술사>의 원제가 <미술 이야기>인 것과 비슷하다)에 대해서는 아래 소개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세계경제(10. 01. 16) 끝없는 전진? 숨겨진 퇴보!… '역사 발전론'에 경종

인류는 어떻게 진화해왔고 미래는 과연 낙관적인가. 인류가 거센 변화의 물결에 휩싸이면서 과거 인류는 어떻게 걸어왔는지 관심이 더 커지고 있다. 이 책은 15만 인류역사에서 전개됐던 도전과 좌절, 공존과 충돌, 발전과 퇴보의 사건들을 짚어본다. 



인류의 기원, 신석기 혁명, 종교의 탄생, 제국들의 흥망성쇠, 수레바퀴부터 인터넷까지 인간의 발명, 정치사상, 기술혁명 등 문명사의 패러다임을 바꿨던 주요 장면을 45개로 나눠 인류의 발전사를 추적했다. 전체적인 내용은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아시아 역사도 상당 부분 할애됐다. 특히 인간 생존의 물질적 토대가 된 두 가지 변화인 정주농업과 산업혁명을 깊이 다뤘다. 신석기 시대 세계 곳곳에서 등장한 정주농업은 문명의 근원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인간은 특정 지역에 정착해 촌락을 이룰 때까지 농사를 짓지 못했기 때문에 촌락은 진정한 의미에서 문명의 근원이라고 저자는 본다. 저자는 18세기를 전후해 유럽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을 신석기 혁명에 버금갈만한 획기적인 사건으로 본다.

산업혁명 자체가 순차적 과정의 결과가 아니라 행운의 변수를 가진 힘들이 뒤섞여 상호작용을 일으킨 결과였다고 파악한다. 단편적인 역사 지식을 하나의 큰 줄기로 엮어냄으로써 독자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는게 저자 시릴 아이돈의 말이다.

저자는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행복과 불행, 진보와 퇴보의 반복된 과정으로 파악하면서 중단없는 전진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고 믿는 역사 발전론에 경종을 울린다. "역사학도라면 누구나 지난 15만년간 인류가 겪은 퇴보의 횟수에 놀라고,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거대한 힘을 지닌 자연 앞에서 미래를 운운하기 앞서 머리를 낮추는 자세부터 가져야 할 것이다"

인류 역사는 수많은 성공의 역사며 무한질주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발상지인 아프리카에서 전세계로 퍼져나간 인류는 달나라에도 한 발을 내딛고, 복제 동물을 만들어내며,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바로 눈앞에서 현실로 이뤄지고 있고 그 속도는 체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지고 있다.

하지만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류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불어닥칠 가능성은 높아진다. 정치갈등, 종교갈등, 환경오염, 각종 범죄, 유행병 등 난제가 숨어있다. 저자는 다가올 미래를 낙관할 수만없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인류는 그간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적지않은 실패를 경험했고, 같은 실책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군비제한이나 지구 온난화처럼 인간의 힘으로 해결가능 한 문제들을 슬기롭게 풀어가는 것이 당면과제라고 강조한다. 화산폭발, 지진, 치명적 전염병과 같은 것들이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은 불가항력적인 요인이었다면 산업혁명에 따른 부작용,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 두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초래된 비극,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빈부격차등은 그 인위적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언자는 과거'라는 바이런의 말을 확인하는 작업이다.(정승양기자)  

10. 01. 31.  

P.S. 책은 참고문헌 해제도 포함하고 있어서 유용한데, 개설서로서 저자가 격찬하고  있는 책 두 권이 인상적이다. 하나는 얼마전에 번역돼 나온 <지도로 보는 타임스 세계 역사>(생각의나무, 2009). 리처드 오버리 편집인데, 2004년에 나온 6판을 평하면서 아이돈은 이렇게 적었다.  

"지도와 역사 백과사전의 결합물이라 할 수 있는 탁월한 책이다. 새 책은 새 책대로 비싸기는 해도 그만한 값어치가 있고, 헌책도 값이 싸므로 횡재를 만나는 셈이다." 

국역본의 경우 두 권의 한정특가가 18만원이니 '비싸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다. '잠자코 '헌책'을 만나는 '횡재'를 기다려야 할까. 보통 이런 유형의 책은 도서관에서도 자료실용이어서 대출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두번째 책은 J. M. 로버츠의 <펭귄판 신 세계사>(2004). 2004년에 4판이 나왔고, 2007년에 5판(증보판)이 나왔다. 분량은 1200쪽이 좀 넘는다. "현존하는 세계사 대요 중 가장 우수한 책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라는 게 아이돈의 평이다. <타임스 세계역사>도 나올 정도니까 이 책도 한국어판을 기대해봄직하다...   

P.S.2. <찰스 다윈>의 저자이기도 하니까 시릴 아이돈이 <인류의 역사>를 쓰면서 염두에 두었을 책은 <인간의 유래>일 것이다(책에서 두 차례 언급된다). 국역본 <인간의 유래>(한길사, 2006)가 나와 있지만, 새 번역본이 나온다는 소식도 있어서 나는 구입을 미뤄놓고 있다.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바다출판사, 2009)는 제목부터 <인간의 유래>를 뒤집어놓은 것이라 나란히 읽어볼 만하다(적어도 나란히 꽂아두어야 한다). 80년대에 범양사에서 출간된 바 있는 책인데, 재미 작가 김은국 씨가 번역에 참여한 점이 이채롭다.  

P.S.3. '인류의 역사'라고 약간 비틀어서 그렇지 '세계사'라고 하면 읽을 책들은 한정없이 늘어난다. <식민주의 흑서>(소나무, 2008)가 나왔을 때 관심을 갖게 된 마르크 페로의 <새로운 세계사>(범우사, 1994), 청소년들에게도 권장할 만한 사이토 다카시의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뜨인돌, 2009), 그리고 최근에 나온 캔디스 고처 등의 <세계사 특강>(삼천리, 2010) 등도 모두 리스트에 포함시킬 만하다. 일단은 갖고 있는 책들부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펠릭스 2010-02-01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류의 역사를 어디에서부터 읽어야 되는가를 생각하게 되더군요. 아프리카역사부터 읽어보는 것이 나을듯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총론적인 역사 흐름을 다시 읽고 각론적인 지역과 부분적인 역사를 분야별로 읽어내는 힘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로쟈 2010-02-01 14:55   좋아요 0 | URL
마르크 페로의 책이 아프리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요즘 '거대사'들도 보통 그렇고요...
 
2010년 학술출판 트렌드

이번주 한겨레21의 별책부록으로 실린 글을 옮겨놓는다. 아직 지면으론 보지 못했는데, 2010년의 인문출판 트렌드에 관한 글을 청탁받고 쓴 것이다. 한데 구성을 보니 초점은 '트렌드'가 아니라 '키워드'였다. 인문서부터 자기계발서까지 2010년의 '출판시장 키워드' 다섯 가지를 꼽고 있는데, 결과적으론 '역사와 그 반복'이 내가 고른 키워드가 됐다. 다른 필자들과 달리 출간예정 리스트를 잔뜩 나열한 건 이미 교수신문에 게재됐던 리스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 피해가기 어려웠다. 나머지 키워드는 '장편소설' '프로슈머' '연예인 실용서' '실패하지 않는 삶' 등이다(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6609.html 참조).  



한겨레21(10. 01. 22) 인문서부터 자기계발서까지, 출판시장 키워드 5 

2010 키워드① 역사와 그 반복 

사회학자 김홍중 교수의 <마음의 사회학>(문학동네 펴냄)에 따르면, 우리 시대는 ‘생존’을 무엇보다도 소중한 가치로 설정하는 사회적 합의를 달성했다. ‘생존이 부끄러움이 되는 감수성’을 ‘진정성’이라고 부른다면,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그 진정성이 유효할 수 있는 환경과 토대를 상실했다. 그래서 가장 절박한 관심이 ‘진정한 삶’이 아니라 ‘목숨 그 자체’가 돼버렸다. 하지만 경제불황과 맞물려 2009년 한 해 경제·경영서와 자기계발서의 인기가 급격하게 하락한 것은 반전의 한 조짐이다. 우리는 생존보다 더 소중한 것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2010년 출간 예정 인문·사회과학서들에 거는 기대이다.  

생존보다 더 소중한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기에 올해는 비단 한-일 관계뿐만 아니라 자연스레 우리의 지난 100년사를 더듬어보게 한다. 따라서 올해의 트렌드라면 아무래도 역사와 그 반복이 될 듯하다. 먼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산 이들이 준비했던 근대국가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그들이 꿈꾼 나라>(돌베개)나 강제병합 전후의 사정을 짚어줄 <대한제국흥망사>(돌베개)가 눈길을 끄는 책이다. 일제시대사 쪽으론 경성제국대학의 의의를 해부한 <식민권력과 근대지식>(서울대출판문화원)과 <식민지 검열의 역사적 성격>(소명출판) 등도 드물게 다루어진 주제라 관심을 모은다.

한국전쟁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기에 현대사 분야에서도 기대작이 없지 않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펴내는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역사비평사)이나 염인호의 <또 다른 한국전쟁>(역사비평사), 박찬표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본 한국현대사>(후마니타스), 김종엽의 <분단체제와 87년체제>(창비), 서동진의 <한국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창비) 등이 우리가 살아온 모습을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임지현·백영서 등 한국의 대표적인 인문학자들을 인터뷰해 1990년대 이후 한국 인문학의 지형을 탐색한 <세기말 한국 인문학의 지각변동>(그린비)도 필독 범주에 넣을 만하다.

번역서들의 면면도 화려한 편이다. 마르크스의 <자본>(길)이 새로 완간되고,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길)이 새 번역본을 얻는 것 외에도 사회심리학자 미드의 주저 <정신, 자아, 사회>(한길사)와 독일의 개념사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전 5권·푸른역사)이 번역돼 나올 예정이다.  

화려한 번역서의 면면
철학·이론 분야에서는 슬라보예 지젝의 책이 <처음은 비극으로 다음은 희극으로>(창비) 외 여러 권 소개될 예정이고,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민음사), 가라타니 고진의 인터뷰 <정치를 말한다>(도서출판b),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도서출판b) 등이 우리말 번역본을 얻는다. 독창적인 데리다 연구서인 아즈마 히로키의 책은 김상환의 <데리다와 들뢰즈>(창비)와 같이 읽어봄직하다.  

10. 01. 22.  

P.S. 특집에는 '2010 이런책이 보고 싶다' 코너도 있는데, 소설가·문화평론가·편집자 등이 속내를 드러냈다. 읽어보니 이쪽이 더 재미있다(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6603.html). 거창하게도 나는 '시대의 벽화와도 같은 책'을 읽고 싶다고 적어보냈다. 

Cover: In 1926

특정 연도, 시대의 벽화와도 같은 책

다윈 탄생 200주년이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2009년에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은 ‘1989년’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연말에야 크리스 하먼의 <1989년 동유럽 혁명과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붕괴>(책갈피 펴냄)가 출간된 정도였고, 이마저도 재간본이다. 영어권에서 동유럽과 소련의 현실사회주의 붕괴 과정을 다룬 책들이 다수 쏟아져나온 것과 비교하면 우리의 관심사는 그들과 전혀 다른 건가 싶기도 하다. 한 박자 늦은 것이긴 하지만, 2010년에라도 읽어볼 수 있을까.  

특정 연도에 대한 역사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인문학자 한스 굼브레히트의 주저작 <1926년: 시대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기>(1997)란 걸 알게 되면서다. 500쪽이 넘는 이 두툼한 책을 읽어볼 엄두는 내지 못했지만 이런 종류의 책이 번역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아, 더듬어 올라가면 국내에 소개된 책 가운데는 중국사학자 레이 황의 <1587 아무 일도 없었던 해>(가지않은길 펴냄)도 꼽아볼 수 있겠다. 명나라 만력제의 한 치세를 다루지만 한 시대와 국가제체에 대한 총체적인 조감도를 매혹적으로 펼쳐 보이는 책이다.

우리의 경우 ‘1950년대’나 ‘1960년대’ 같은 식으로 한 시대를 다룬 책들은 더러 있었다. 여전히 ‘시대’나 ‘체제’가 우리의 주된 코드이자 키워드이다. 하지만 조금 더 세밀하게 접근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1960년’에 대한, ‘1980년’에 대한 책, 개인의 일상적인 삶의 감각과 시대정신과 국제사회의 변동이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 보여주는 ‘시대의 벽화’와도 같은 책을 이제는 우리도 가져봄직하다. 당장 올해에 그런 걸 읽을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로군.


댓글(4) 먼댓글(1)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2010년 출판시장, 인문서부터 자기계발서까지
    from 뻥 Magazine 2010-01-23 12:23 
    2010년 주인공은 누규~ [2010.01.22 제795호] 인문서부터 자기계발서까지, 출판시장 키워드 5   한겨레21에 난 2010년 출판시장 트렌드 기사다. 필진에 로쟈님 글도 있고 내 책도 언급되었다. 하루에 한 번씩 내 책 모니터링을 하면서 다양한 시선을 목격한다. 책을 읽지 않고 쓴 혐의가 짙은 서평도 보고, 읽었지만 주마간산으로 읽은 서평도 있다. 어떤 독자는 너무 꼼꼼하게 분석을 해서 나를 놀래킨 독자도 있다. 작가
 
 
다크아이즈 2010-01-22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 시장 키워드에 점자책 사진이 우뚝 서 있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페이퍼가 제게 너무 어려워 접수 못할 땐 이렇게 엉뚱한 수수께끼를 홀로 풀다 가곤 한답니다. ^^*

로쟈 2010-01-22 23:28   좋아요 0 | URL
아, 그건 그냥 기사에 있는 걸 가져온 거예요. 짐작엔 '더듬어본다'는 의미이지 싶네요...

펠릭스 2010-01-23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극화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인문.사회학 관련서 출판 및 독서의 증가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봅니다(책속에서만 어떤 방법을 찾으려다 실패한 것인지 모르지만). 현재 도시간 경쟁은 일회성(소비성) 에너지 분출장을 마련하는데 집중해 있습니다. 도시의 발전을 위해 초대형(복합기능) 도서관을 만들어 운영하겠다는 뜻은 미루어진듯(표심을 잡지 못함) 합니다.고급화된 영양공급으로 육질화된 에너지 분출은 개인간의 소비경쟁을 더 부른듯 합니다. 더 높은 양질의 삶을 위해 인문학적인 희망도 중요하지만 양극화로 절망적인 개인이 자가 발전할 수 있는 관련 프로그램들이 많이 운영되고 참여 했으면 좋겠어요 <희망의 인문학/얼쇼리스/이매진>.

로쟈 2010-01-23 12:37   좋아요 0 | URL
'인문학적 희망'보다는 '정치적 변혁'이 필요하겠지만, 전자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사상누각이 되기 쉽다는 것도 목격해온 바이죠. 이중의 전략이 그래서 필요하다는 생각이예요...
 
로쟈님께

피터 싱어의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산책자, 2009) 인용을 놓고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접했다. '전업 블로거'가 아닌 나로서는 모든 이견에 답하고 해명할 여유를 갖고 있지 못하지만 간단하게 보충 설명을 해본다. 내가 이해하는 '피터 싱어의 윤리학'에 대해서다.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사례를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만 환원하게 되면 사안은 단순하다. "매일 수천 명의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을 사는 데 돈을 쓴다. 이것은 부도덕한 일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할까?"가 싱어의 문제의식이고, 그는 적정 수준의 이타심을 발휘함으로써, 구체적으론 기부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간 '책임'을 떠맡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의의 많은 부분은 그 '적정 수준'을 어떻게 산출할 수 있는지에 할애된다.   

대략 그 정도의 주장이라면 별로 새로울 것도, 대단할 것도 없다. 우리의 도덕적 직관에 위배되지도 않는다. 바지가 젖고 지각하는 것 정도의 '비용'으로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윤리적 행위란 게 '참 쉽죠'라고 말할 수 있다(불매운동도 바지가 젖는 걸 감수하는 것 정도에 비유할 수 있는가?). 하지만 '연못에 빠진 아이 구하기'가 아니라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아이 구하기'나 '철로에 떨어진 아이 구하기'라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분도 계실 테지만, 양의 다소나 일의 경중에 대한 판단은 기본 판단이다). 이런 경우엔 계상되는 '비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선택'의 문제가 대두된다. 특히나 문제적인 것은 그러한 선택이 제로섬 상황에서의 선택일 경우다(이 글 또한 다른 원고를 써야 할 시간을 빚내서 쓰고 있다).  

싱어는 <이 시대에 윤리적으로 살아가기>(철학과현실사, 2008)에서 윤리적 선택/결정의 표준적 모델로서 '활차의 문제'를 소개한다. 그의 공리주의적 윤리학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기에 참고해볼 만하다. '활차의 문제'의 표준형과 그 변형은 각각 이렇다.  

<표준형> 당신이 활차를 발견하였을 때 활차는 선로를 따라 다섯 명을 향해 돌진하고 있으며, 당신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철도 선로 옆에 서 있다. 만약 선로를 따라 활차가 계속 돌진할 경우 다섯 명은 모두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러한 다섯 명이 목숨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활차가 옆 선로로 이동하도록 전철기를 움직이는 것이다. 이 경우 활차는 오직 한 명의 목숨만을 앗아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변형> 활차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선로 근처에 서 있지 않고 선로 위의 인도교에 서 있다. 당신은 활차를 다른 선로로 이동시키지 못한다. 당신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다리에서 활차 앞으로 뛰어내려 자신을 희생할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활차를 멈추기에는 너무 체중이 가벼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당신이 모르는 당신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몸무게가 매우 많이 나가는 사람이다. 활차가 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몸무게 많이 나가는 모르는 사람을 활차 앞으로 밀어서 떨어뜨리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밀어서 떨어뜨린다면 그는 죽게 되겠지만 다른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다소 억지스런 상황 설정이지만, 철학자들이 즐겨 쓰는 사례라고 하니까 각각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답해보시길. 조사에 따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두 가지 상황에 대해서 다르게 판단한다고 한다. 표준형에서는 비록 한 사람을 죽게 만들더라도 전철기를 움직여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믿는 반면에, 변형에서는 비록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자신이 모르는 사람을 밀어 떨어뜨려 죽게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차이를 요약하면 우리는 '선로상에서 전철기를 움직여서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야기하는 관념'과 '우리의 손으로 누군가를 밀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관념'에 대해 서로  다른 정서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뇌 활동 부위에 대한 fMRI 영상 촬영을 통해서도 확증되었다. 이 반응 차이는 어째서 생겨났을까? 싱어의 설명은 이렇다.     

인도교의 경우 우리가 진화하고 있던 무한히 긴 시간 동안 있었을 법한 유형의 상황이다. 반면, 표준적인 활차의 경우는 오직 지난 세기 혹은 두 세기 동안에나 가능했던 누군가의 죽음을 초래하는 방식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물려받은 형태의 정서 반응에 어떤 영향을 미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 오직 200년 전에야 가능했던 방식보다는 100만년 전에 가능했던 방식으로 내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에 도덕적인 중요성을 부과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답할 것이다. 

싱어의 공리주의적 입장은 단호하게 한 사람의 목숨보다 다섯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더 윤리적이라고 본다(이러한 윤리이론에 대한 강력한 도전은 나치 수용소에서 두 아이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했던 '소피의 선택'이다). 그러한 윤리적 판단이 계산가능하다고 보는 관점이 그의 실천윤리학을 떠받치고 있는 토대다(윤리적 판단의 계산가능성). 그리고 그러한 윤리의 실천은 인간의 진화적 본성 혹은 도덕적 직관과 때로 충돌할 수 있지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 또한 그의 핵심적인 주장이다(이 때문에 낙태와 안락사를 옹호하는 그의 입장은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독일에서는 그의 강연이 공식적으로 금지돼 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한 사람을 돕는 것이 모든 사람을 돕는 게 되는 상황'(넌제로섬)인지, '한 사람을 돕는 것이 다른 사람에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선택적 상황'(제로섬)인지 판단해볼 필요가 있다. 싱어를 참조하자면, 이러한 판단에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절대적인 근거가 되지 못한다. 알라딘 불매운동이 단순하게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 '도움을 주느냐, 마느냐'의 문제라면 사안은 단순하다. 김종호씨 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궁극적으로 모든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첫걸음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은 그런 관점에서 가능할 수 있다. 알라딘 대신에 교보나 예스에서, 혹은 동네서점에서 구입하는 것, 혹은 아예 책을 구입하지 않는 것을 '바지 젖는 것'을 감수하는 선의의 행동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도움을 줄 것인가'의 문제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부당해고가 불법행위라면 당사자가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듣기에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떤 법적 구제/ 보호가 가능한지 나로선 알지 못한다. 구두로 알라딘의 인사담당자가 '장기근무'를 약속했지만,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이 또한 얼마만큼의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피해 당사자가 여러 경로를 통해 공개적으로 항의했기 때문에 대부분 묻혀진 다른 사건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적어도 김종호씨는 이 사건에서 사회적 약자이지만 '말하는 주체'로서 행동했다. 외로운 투쟁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투쟁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그럴 능력도 갖추고 있다.  

알라딘측 해명은 3월과 9월 신학기 특수 때문에 한시적으로 인력 수요가 발생하며 이 때문에 임시직 고용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적시 인력 수급이 어려워 인력 도급업체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고, 이것이 인터넷서점에서는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 그러한 임시직 고용이 불가피하다면 문제는 그 사실(근무조건)을 피고용인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거나 속인 것이다. 법적이건 도의적이건 나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알라딘측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지느냐에 대해선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담당자나 대표가 이런 사정과 함께 개선의지를 밝혔다. 내가 '관망'이라고 표현한 건 그런 의사 표명이 앞으로 어떻게 이행될지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그건 당장 올 3월 신학기가 되면 알 수 있을 터이다. 불매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그 이상의 구체적이고 확실한 조처를 요구하는 듯한데, 그것이 더 효과적인 방식일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다른 예이지만, 지난해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은 나름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론 성공적이지 못했다. 불매운동의 가장 심각한 타격을 소위 진보언론이라는 한겨레와 경향이 떠안게 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하지만 좋은 뜻으로 벌인 일이니까 결과는 할 수 없는 노릇일까? 뒤집어 말하면, 불매운동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것이 아닐까? 광고 비중이 너무 큰 언론시장에서 바람직한 변화라면 광고의 비중을 약화시키고 대신에 구독자 비중는 늘리는 것이었을 터이다. 대안언론으로서 구독자 중심의 진보언론을 우리가 갖기 위해서는 신문 구독료가 최소 2-3배에서 최대 10배까지도 인상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에게 그런 비용을 부담할 용의가 있는가?       

한 대학신문의 대담 자리에서 불매운동에 대한 불만을 피력했지만, 나는 그런 견해를 노골적으로 밝히진 않았다. 그것은 나의 사적인 의견으로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대담의 모든 내용이 기사회되진 않는다. 그리고 나는 불매운동이 급진좌파적 포지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건 다른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상식적이지만, 불매운동은 리버럴한 포지션에 더 가깝다). 때문에 그 기사를 옮겨오면서 필자의 확인을 받지 않은 기사에 대해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시한 바 있다. 그래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지만 내친 김에 나의 '다른 생각'을 조금 더 분명히 해두고 싶다.  

무엇이 불매운동의 성공일까? 알라딘이 '악덕기업'으로 낙인 찍히고 불매운동 가담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알라딘이 손실을 더이상 감당하지 못해 백기를 드는 것일 테다. 그렇게 '알라딘 길들이기'가 성공한다면? 알라딘은 한 사람의 해고자도 없이 모든 직원이 정규직화되는 '이상적 기업'이 될 수도 있겠다(인간의 얼굴을 한 알라딘!). 인심을 쓰는 김에 임금도 동종 업계에선 최고 수준으로 대우해주기로 하자. 하지만 그 비용은? 조유식 대표가 사재를 다 털어서 마련해야 할까? 그것만으론 턱도 없을 터이고, 아마도 매출이 지금 두 배 정도 된다는 예스만큼 늘어나거나 그 이상이 돼야 할 터이다. 그건 거꾸로 우리가 현재의 두 배 이상 알라딘에서 책을 구매할 용의가 있느냐를 묻는 것과 같다.  

그게 다소 무리하다면, 현행 10%의 신간 할인율을 포기하고 정가대로 책을 구매할 의사가 우리에게 있는가? 그러니까 공정무역과 윤리적 소비 운동이 대개 그런 것처럼 다른 서점보다 더 비싸더라도 알라딘에서 구매할 용의가 있는가? 그렇게만 하더라도 마진률이 상당히 좋아질 것이고(내가 알기로 알라딘은 후발업체라서 출판사로부터 예스보다 2% 정도 더 높은 가격에 공급받는다), 직원들의 고용안정과 복지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알라딘측과 이용자(알라딘너) 간에 대타협 같은 것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거라고 본다(그 가능성에 대해선 물론 낙관하기 어렵다). '불매'라는 부정적 인센티브 대신에 긍정적 인센티브를 통해서 변화를 유도하는 거라면 나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의사가 있다. 현재로선 책을 두 배 더 구입하기 어렵지만, 10% 할인을 포기하고 구입할 용의는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의 포지션은 불매운동에 반대한다기보다는 불매운동이 불충분하며 좋은 결과를 낳기 어렵다고 보는 쪽이다. 그건 바람이 완력을 발휘했지만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한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리고 덧붙이자면, 나는 알라디너로서, 꾸준히 플래티넘을 유지하고 있는 알라딘 고객으로서 나 스스로도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그동안 할인 가격에 당일배송 등 알라딘의 서비스가 좋아지는 만큼 근무자들의 노동조건은 더 나빠졌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더라도 이제 와서 "알라딘, 어떻게 그럴 수 있니?"라고 정색하긴 어렵다. "예스나 교보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라딘은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내가 '순수한 가장'이란 말로 가리키고 싶었던 뜻이다.  

나는 잔소리 듣는 걸 싫어하지만 남에게 잔소리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도 어색한 상황을 만들기보다는 그냥 결별을 선택하는 편이다. 오래 참지만 미련은 두지 않는다. 나는 알라딘과 결별할 수순까지는 아직 아니라고 본다. 불매운동에 참여하시는 분들이 알라딘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이 어느 만큼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 1/10 정도면 한번 더 기회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단, 그 경우엔 우리가 '바지가 젖는 것'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부담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로쟈님 문제'가 불거지는 바람에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하나는 그래도 '파워 블로거'라는 사실. 방문자수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 말고 내가 느끼는 '파워'는 추상적이었다. 한데 이번 일로 '안티 로쟈' 전선까지 생기는 걸 보고서, 또 거기에 동조하는 분들이 많은 걸 보고서 비로소 그 '파워'란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그게 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 그렇잖은가. 공연한 오해와 적대감도 만만찮으니 내가 6년간의 블로거 생활로 무슨 덕을 쌓은 것인지 심각하게 회의할 수밖에 없다. nobam님은 이렇게 적었다.  

보통 책 좀 읽었다 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가 부닥친 현실에서는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게다가 자기 사회적 위치에 대한 강박이나 뭐라도 써야 된다는 압박감 때문에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을 엉뚱하게 적용하여 빈축을 사는 딱한 경우가 많습니다.(...) 로쟈님의 이번 글을 읽다 보니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어 계시고 논리적으로도 너무 망가져 있는 게 눈에 띕니다.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저 사태와 동떨어진 푸념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중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갈피를 못 잡"고 헤매다 "빈축을 사는 딱한 경우"이고, "많이 위축되어" 있는 데다가 "논리적으로 너무 망가져 있는" 한심한 모습이 지금의 '로쟈'다. 그런 '로쟈의 푸념'을 한번 더 늘어놓는다. 짐작에, 이번엔 '입원가료 요망'이란 글들이 올라오지 않을까... 

10. 01. 02. 

P.S. 새해엔 알라딘 서재에 노출되지 않게 하겠다고 했지만, 이번 글은 '응답'의 성격이어서 예외로 해둔다...


댓글(14) 먼댓글(1)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로쟈님께 2
    from nobami 2010-01-02 19:52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시간이 별로 없으니 간단하게 쓰지요. 피터 싱어가 공리주의적 입장(공리주의적 근본주의라고 해야 할지)에 대한 부분은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거칠게 '한 명을 구하기보다는 다섯 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피터 싱어의 경우를 이번 사태에 적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과연 이 상황이 제로섬 게임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로쟈님께서는 현재 알라딘 불매운동이 제로섬 상황
 
 
비로그인 2010-01-02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감사합니다. 저는 사실 책을 그리 많이 읽는 사람도 아니고 피터 싱어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아닙니다. 따라서 피터 싱어가 단호히 한 사람보다 다섯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옳다라는 입장을 가진 학자라는 것은 로쟈님의 말씀이 옳으시겠지요, 하지만 로쟈님은 피터 싱어의 윤리학에 관해서는 잘 설명해주셨지만 본인이 인용하신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의 일부분이 왜곡되어 해석되었다는 제 의문에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인용하신 부분 가운데 "하지만, 생각해보자. 국제아동기금 자료를 보면, 매년 거의 1천만 명에 달하는 5세 이하의 아동이 빈곤 때문에 죽는다." 라는 부분의 '하지만'은 앞의 간략한 사례에 비추어 우리는 당연히 위협에 처한 아이를 돕는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 당연한 윤리적 의무를 너무나 간단히 도외시하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빈곤으로 죽어가고 있다, 라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로쟈님의 해석은 좀 다른 듯 합니다. 이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피터 싱어의 윤리학에 대한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아, 기우에서 하나 덧붙입니다. 제 페이퍼를 안티 로쟈 공작의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하하. 제가 로쟈님의 페이퍼를 읽고 든 감정은 그냥 '의아함'이었으니까요.

로쟈 2010-01-03 14:21   좋아요 0 | URL
해석 차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안티 로쟈'는 아니시라면 다행입니다.^^;

yoonta 2010-01-0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어보니 두 분 다 맞는 듯해요. 로쟈님은 물에 빠진 열 명의 아이를 구하는게 물에 빠진 한 명의 아이를 구하는 것이 한 명의 아이를 구하는것과 동일한 기회비용이 든다면 전자를 하는것이 낫다는 싱어의 윤리를 설명하기 위해 위 구절을 인용하신 것 같고(불매운동사례에 소급시켜보면 김종호씨 개인을 위한 불매운동을 경계한다는 의미겠지요. 싱어의 책에서는 물에빠진 한명과 열명을 비교하진 않네요) 님은 책의 문맥에서는 싱어의 물에 빠진 한 아이 사례는 구두 한 켤레 사는 비용이면 한 아이 생명을 구할수있는 "물에빠진 아이상황"에서는 당연히 나서면서 왜 비슷한 비용을 들여 저개발국가의 보다 많은 아이들을 위한 기부에 나서지 않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사례로 싱어가 그것을 예로 든 것이 아닌가 하는 것 같아요. 책의 문맥상 괴물님의 이해가 맞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로쟈님 식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딱히 틀린것 같지도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싱어는 동일한 비용이 들었을때 최대한 다수에게 돌아가는 윤리에 대해서 말하고있으니까요.

로쟈 2010-01-03 14:22   좋아요 0 | URL
사실 싱어의 주장은 시혜적 차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현실적'이긴 하지만, '기만적'이기도 합니다...

마태우스 2010-01-02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대가 누구든간에 비난을 들어먹을 때, 서재질을 확 때려치우고 싶어지지요.
저도 몇번이나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이딴 애한테 이딴 말 듣고 이짓을 계속해야 돼?"라는 생각이 마구 들었어요.
그때마다 전 '서재는 인생과 같다. 다시 태어날 수 없다'며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하지만 서재를 인생과 같다고 보는 대신 "내가 여기 아니면 갈 데 없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탈퇴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너무도 쉽게 서재를 그만둘 수 있지요.
로쟈님이야 어딜 가셔도 잘 사시겠지만,
저같이 배움에 목마른 중생들을 위해 이곳에 계셔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님을 공격하는 소위 '안티로쟈'들이 알라딘 마을의 주요 멤버들은 아니잖습니까?
그분들이 원하는 게 알라딘이 문을 닫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불매운동의 불씨가 사그라드는 걸 님을 공격함으로써 만회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계속 응답을 해봤자 끝이 없을 듯하니,
이제 하시고 싶은 일을 하시길 권해 드립니다.

2010-01-02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1-02 23:48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
마태우스님의 이와 같은 감정적인 발언이 서재 동네를 감정싸움으로 몰고 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로쟈님에 대한 의견을 한꺼번에 '안티로쟈'라 지칭하는 표현도 지나치십니다. 또한 '알라딘 마을의 주요 멤버'라는 표현도 도대체 근거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서재에서 눈에 띄게 잘 놀던 사람들을 '주요 멤버'라 지칭한다면, 말없이 알라딘에 좋은 콘텐츠를 보태주고 있거나 가끔이라도 나타나 좋은 말 해주는 사람들은 뭐가 됩니까. 알라딘이 그렇게 배타적인 공간이었던가요.
'불매운동의 불씨가 사그라드는 걸 님을 공격함으로써 만회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불매운동 폄하 발언에 해당되십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요. 이렇게 서로를 폄하하고 배격하는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이 과연 로쟈님에게 도움이 된다고 보시는지요. 제가 불매운동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 댓글 역시 마태우스님께 감정적으로 시비 거는 걸로 생각하실까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만. 저는 알라디너들 간에 감정싸움 나는 게 가장 피곤하고 괴로운 사람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마태우스 2010-01-04 13:50   좋아요 0 | URL
blackone님, 님은 제 분류에의하면 주요멤버가 아닙니다. 궁금해하시기에 답변드립니다

꼼미 2010-01-03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글보다는 이번 글이 훨씬 더 명료하고 로쟈님의 의견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특히, "'불매'라는 부정적 인센티브 대신에 긍정적 인센티브를 통해서 변화를 유도하는 거라면 나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의사가 있다. 현재로선 책을 두 배 더 구입하기 어렵지만, 10% 할인을 포기하고 구입할 용의는 있다는 말이다"란 입장표명을 일찍 분명히 밝히신 후에 다른 이야기들을 해왔다면 어땠을까('기둥 뒤에 공간 있어요..'처럼 이미 수십번 말씀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예를 들어 로쟈님과 알라딘과 관계) 되면 한번에 내치기 어려운게 사람살이인 것 같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부르조아의 한계니 계급성의 문제니 하는 걸 논하는 것도 그런 것 때문이겠지요. 로쟈님 책에 그런 말이 있던데, 러시아도 우리나라도 '적이 분명했던 시대에 드러나지 않았던 진보진영간의 차이가 시대가 변하면 드러나고 그 속에서 알력과 갈등들이 불거지는 거다' 이번 알라딘내 논쟁을 보면서 그 말이 떠오르더군요. 그 속에서도 길은 찾아야 하는 거니까. 로쟈님이 계속 고민하고 의견을 밝히는 모습 전 좋습니다.

꼼미 2010-01-03 04:32   좋아요 0 | URL
로쟈님 마음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만, 그냥 해오시던 대로 들어오는 사람들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하면 어떠신가요. 로쟈님도 알라딘도 글을 읽는 누구라도 부대끼며 조금씩 더 성숙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로쟈 2010-01-03 14:23   좋아요 0 | URL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는 게 좋을 듯해서요.^^;

바밤바 2010-01-0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어에 나오는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란 고사가 생각나네요.
로쟈님은 지금 '덕'을 쌓은게 맞는지 고민하시는 듯 보이네요.
헌데 이렇듯 로쟈님을 아끼는 사람이 많으니 '덕'이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듯 합니다.
계속 좋은 글 써주세요.^^ 화이팅이요!

로쟈 2010-01-03 14: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네, 덕과 함께 부덕도 쌓은 듯해요.^^;

2010-01-03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