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기획회의(299호) 말미에 실린 발행인의 말은 '어느 출판평론가 이야기'란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서재에 자주 드나든 분이라면 '어느 출판평론가'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1)의 저자이면서 지난주에 세상을 떠난 최성일 씨이다. 한기호 소장이 그의 책 다섯 권을 한권으로 묶어서 펴내게 된 사정을 밝히고 있는데, 마지막에 적은 "지금이라도 그가 당장 병마를 뚫고 벌떡 일어나 이 작업을 계속 진행해주기를 간절히 기원한다"는 바람이 무망하게 돼 안타깝다.   

개인적으론 저자와 아무런 면식이 없지만 그래도 책으로는 인연이 없지 않다. 그것은 그가 2009년 여름 예스24 웹진에 실은 에밀 시오랑(Emile Cioran, 1911-1995) 리뷰에서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를 언급하고 있어서이다. 시오랑을 매개로 해서 한번은 인연이 닿았던 셈이니 '최성일-시오랑-로쟈'라고 불러도 과하지 않겠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루마니아 태생의 작가 에밀 시오랑을 리뷰하기로 마음을 다잡자마자 벽에 부딪혔다. 시오랑의 지명도가 다소 떨어지거나 무단·중복 번역된 그의 책 대부분이 절판 상태라 그런 건 아니다. 나를 멈칫하게 한 것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이현우 지음, 산책자, 2009) 에필로그의 한 대목이다. “국역본들을 읽고 제대로 된 시오랑론을 쓴다는 건 치기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나대로의 시오랑론을 꿈꾸었으되, 아직 완성하지 못하는 이유이자 변명이다.” (...)

내 셈법이 정확하다면, 에밀 시오랑 편은 내가 1997년 이맘때부터 쓰기 시작한 번역서를 중심으로 엮은 외국 사상가와 저자 리뷰의 195번째 글이다. (국내 저자 리뷰를 더하면 200번째가 된다.) 같은 형식의 글을 오래 썼다 하여 품질까지 보장하진 않는다. 다만 꾸준히 써 온 덕분에 이력은 붙었다.

로쟈의 한국어판 시오랑에 대한 불신은 원제목과 동떨어진 번역서 제목에서 기인한다. 내 수중에 있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한 우리말로 옮겨진 시오랑의 책은 5종이다(편역서 한 권은 제외). 시오랑의 대표작은 얼추 번역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말 제목으로는 어떤 책이 옮겨졌는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 또 다양한 이름 표기 방식은 혼란을 가중한다.

“에밀 시오랑의 이름은 루마니아어 발음에 따라 ‘치오란’이라고도 표기되는데, ‘찌오런’은 조금 과도해 보인다. 루마니아 태생이긴 하지만 20대에 프랑스로 건너와 시오랑이 평생 산 곳은 파리다. 그리고 외국어로 글을 써야 하는 운명에 대해서 비통해 하긴 했지만 시오랑은 프랑스 체재 이후에 대부분의 에세이를 루마니아어가 아니라 새로 배운 프랑스어로 썼다.”(<로쟈의 인문학 서재>, 406쪽)

저자의 시오랑 읽기의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었다는 게 뒤늦게 부듯한데, 저자가 실마리로 삼고 있는 것은 수전 손택의 시오랑론이다. 이 역시 처음에 이 블로그에, 그리고 나중에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실은 글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 에필로그를 통해서야 수전 손택의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이병용·안재연 옮김, 현대미학사, 2004)에 “영어권 최초의 본격적인 시오랑론”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손택의 두 번째 평론집 국역본을 갖고 있지만 그런 줄 몰랐다(이 책은 손택의 이름을 수잔 손탁으로 표기). 그도 그럴 것이 손택의 에세이 표제인 「반(反)자기사고-찌오런에 관한 고찰」만으로는 이게 시오랑론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루마니아 철학자 에밀 찌오런의 경우, 우리식 표기법으로는 에밀 치오런으로 해야 하나, 그곳 원래 발음인 ‘찌’와 우리식 표기인 ‘치’의 차이가 심해 이 경우는 원음에 가깝게 표기했다.”(‘역자 후기’)

수전 손택에 따르면, 정치적으로 시오랑은 보수주의자다. 시오랑에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은 생육 불가능의 흥미 없는 관점이다. 때문에 과격한 혁명에의 희망을 그는 성숙한 정신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상기시킨다. 시오랑은 “루마니아 태생인데, 그곳의 저명한 지식인 망명자 대부분이 비정치적이거나 노골적으로 반동적이었다.” 젊은 날 에밀 시오랑은 극작가 으젠 이오네스코, 신화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와 함께 루마니아 문학의 새로운 기대주로 여겨졌는데, 엘리아데는 파시즘에 부역한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엘리아데는 적어도 파시즘 성향이었다.

손택은 시오랑을 높이 평가한다. 시오랑은 “진정한 역량을 지닌 현역 저술가 중에서 가장 ‘섬세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의 하나이다. 뉘앙스, 아이러니 그리고 정제(精製)는” 시오랑 사고의 본질이다. 나는 시오랑에게서 ‘역설의 중첩’을 본다. 미국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 마냥 다리를 두 번 꼰달지.

그리고 이어지는 건 저자만의 시오랑 리뷰, 시오랑론이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역설의 중첩' 혹은 '복잡한 혼합체'라는 키워드로 시오랑 철학의 핵심을 간추리고 있다. 그의 솜씨를 음미해본다.  

에밀 시오랑은 고립무원의 괴팍한 사상가가 아니다. 손택은 시오랑을 키에르케고르, 니체, 비트겐슈타인로 이어지는 전통의 계승자로 본다. “이와 같은 후기 철학적인 현대적 철학 전통은 전통적인 형식의 철학적 화법은 이미 붕괴되어 없어졌다고 하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들에겐 아포리즘, 수기, 메모 같은 불완전한 화법과 우화, 시, 철학적 이야기, 비평적 해석 같은 위험을 무릅쓴 화법이 주된 가능성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수전 손택이 “단절된 논증”이라고 표현한 시오랑의 방법론은 라 로슈푸코나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객관적 아포리즘과는 구별된다.

“그의 에세이가 제공하는 것은 진단(diagnosis)이다. 정통 요법은 아니지만, 자신의 생활이 하나의 객체, 하나의 사물로 바뀌어 가는 것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정신적으로 좋은 취미로 인정해준다.” 손택은 시오랑의 “목적은 진단에 있다”는 것을 재차 강조한다.

격언집 <독설의 팡세>(김정숙 옮김, 문학동네, 2004)는 시오랑 철학의 핵심을 담았다. 시오랑 책의 한국어판으로는 드물게 저작권 표시란이 있는 이 책은 우대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책 말미에 실린 ‘에밀 시오랑 연보’에서는 시오랑, 이오네스코, 엘리아데 세 사람을 20세기 초중반 루마니아 문학의 새로운 기대주라고 언급한다.

시오랑은 여러 개념의 정의부터 남다르다. 자유는 “건강한 자들이 늘어놓는 억지”다. 슬픔은 “어떤 불행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갈증이다.” 절망은 “대담해진 불행이며, 선동의 한 형식이고, 조심성 없는 시대에 대한 하나의 철학이다.” 광기가 “확산의 경제학”이라면, “정신적 정상 상태는 폐쇄 경제학이며, 실패의 자급자족이다.”

내가 가장 공감하는 시오랑의 아포리즘은 이렇다. “예전에 철학자는 사색을 하되 글은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경멸 받지는 않았다. 인간이 효율성 앞에 무릎을 꿇은 이래, 천박한 인간들은 작품이라는 것을 신성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생산하지 않는 사람을 ‘실패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 ‘실패자’들이 바로 현자였을 것이다. 우리 시대를 구원할 사람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현자일 것이다.”

이제 겹치는 아이러니, 수전 손택의 표현을 빌리면 “복잡한 혼합체”를 살필 순서다. “우울함이 사라질까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이, 우울함이란 치유될 수 없는 것이므로 그의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크게 안도할 것이다.” 하나 더 보자. “더 큰 고통의 희망이 없다면 나는 이 순간의 고통이 영원한 것이라 해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시오랑은 80대 중반까지 삶을 이어 갔다. 세상을 비관한 그의 장수는 또 하나의 역설이다. “원할 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살고 있다. 자살이라는 가능성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자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자살의 유혹과 싸우는 데 들인 끈질긴 노력을 생각한다면, 나는 충분히 구원받고, 신(神) 속에 녹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시오랑은 자살을 반박한다. “우리의 슬픔에 그리도 기꺼이 봉사했던 이 세계를 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자살은 낙관주의자의 몫이다. “그들은 낙관주의자가 더 이상 될 수 없는 낙관주의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살 이유가 없으므로 죽을 이유 또한 없다.”

산문집 <절망의 맨 끝에서>(김성기 옮김, 에디터, 1994)와 <절망의 끝에서>(김정숙 옮김, 강, 1997)는 같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나중 번역된 책은 「부조리에 대한 정열」의 본문 글귀를 제목으로 삼았다. 먼저 번역된 책의 그 대목은 “절망의 절정에서”다.

<동구로 띄우는 편지>(김정숙 옮김, 이땅출판사, 1990)와 <세상을 어둡게 보는 법>(김정숙 옮김, 이땅출판사, 1992)은 한국어판 제목이 다른 같은 책이다. 앞서 나온 책은 표지에 원제를 부제목으로 썼고, 저자 이름은 ‘E.M. 치오란’으로 돼 있다. 다시 나온 책은 간기에 원제목을 알파벳으로 표기했다. 저자 이름은 ‘에밀 시오랑’이다. <내 생일날의 고독>(전성자 옮김, 에디터, 1994)과 <노랑이 눈을 아프게 쏘아대는 이유>(박현철 옮김, 산수야, 1995)는 다른 책이다. 앞의 책은 ‘명상집’을 내세운다. 뒤의 책은 산문집으로 보인다. “모든 것이 일시적인 이 세상에서 우리의 격언들은 사회면 기사 정도의 가치만 있을 뿐이다.”(<독설의 팡세>에서)

11. 07. 07. 

P.S.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의 미덕은 국내 소개된 저작의 목록을 거의 완벽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인데, 시오랑의 경우엔 중복을 포함해 7권이 나열돼 있다(나는 모두를 갖고 있다). 그중 <내 생일날의 고독>은 이번에 찾아보니 원제에 따라 <태어난 것의 잘못에 대하여>(실험출판사, 1981)로 먼저 소개된 적이 있다. 같은 역자의 번역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 구할 수 있는 시오랑의 책은 한권도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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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싸리 2011-07-07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최성일씨 돌아가셨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가 유작이 되겠군요.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는 쾌유기념 판매때 구입해놓긴 했는데요. 참 열정적이고 독특한 작업을 하신게 아닌가 싶어요...

로쟈 2011-07-08 18:21   좋아요 0 | URL
유례없는 작업이고, 앞으로도 혼자 하기는 힘들 듯해요...

비로그인 2011-07-07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깝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로쟈 2011-07-08 18:22   좋아요 0 | URL
네, 꼭 필요한 분들은 일찍 떠나시네요...

singing 2011-07-07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산하지 않는 사람을 실패자로 생각한다... 실패자가 현자였을 것이다...
별다른 소득없이.. 생산적이지 않은 하루하루다 싶었는데 그냥 좀.. 위로가 되네요..^^

로쟈 2011-07-08 18:22   좋아요 0 | URL
시오랑과 잘 맞으시나 봅니다.^^
 
한 중국인이 본 서구사상과 한계

얼마전부터 중국 근대 지식인들에 관한 책과 사회진화론에 관한 책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모으고 있는데, 계기가 된 건 옌푸(엄복)의 <천연론>(소명출판, 2008)과 <정치학이란 무엇인가>(성균관대출판부, 2009)를 지난달에 뒤늦게 발견한 때문이다. <천연론>은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지만지, 2009)의 중국어 번역이다. 그러니까 그걸 다시 우리말로 옮기는 건 '중역'인데, 그럼에도 이 중역이 의미가 있는 건은 옌푸의 번역이 갖는 역사적 의의 때문이다(때문에 '고전 번역'에 해당한다).  

 

구한말 지식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 량치차오(양계초)의 강권론적 자유론을 다룬 박노자의 논문에서 그 의의의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다. 

서구적인 담론에 포획되지 않을 수 없는 이러한 현실적인 조건에 1896년부터 또 하나의 이론적인 조건이 가미됐다. 1896년부터 그(량치차오)가 중국 사회진화론의 원조로 꼽히는 옌푸(1858-1921)의 영향권에 들어간 것이다. 옌푸가 번역한 헉슬리의 <진화와 도덕>(중국 서명 <천연론>, 1898년 발간)의 번역문 초고를 이미 1896년에 읽은 량치차오는 그때부터 옌푸식 사회진화론을 토대로 그가 현실론적으로 체득한 서구 중심주의적 담론을 이론화.이념화하기 시작했다.(<우승열패의 신화>, 132쪽) 

 

박노자는 '사회진화론의 원조'로 꼽긴 했지만 옌푸의 사상에 대해선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에 끼친 영향에 있어서는 량치차오가 더 앞서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량치차오의 경우는 <이태리 건국 삼걸전>(지식의풍경, 2001)을 1903년에 저술한 바 있고 이것은 다시 신채호에 의해 1907년 국한문 혼용으로 번역되었다. 옌푸보다는 더 강한 연결고리가 있는 셈이다.  

개인적으로 '엄복'이란 이름으로만 어설프게 기억하던 옌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그가 서양의 근대사상을 중국어로 옮긴 '최대 번역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1877년부터 2년 반동안 영국의 해군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옌푸는 부강한 영국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청일전쟁에서도 패배한 중국의 현실에 낙망한다. 그는 중국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영국의 사회사상가 허버트 스펜서의 자유사상과 사회진화론에서 그 활로를 찾으려고 했다.  

스펜서주의자이긴 했지만 저작이 너무 방대해(우리는 아직도 번역서를 갖고 있지 못하다) 먼저 번역한 것이 헉슬리의 <천연론>이었다(그는 스펜서의 입장에서 헉슬리의 진화론을 비판한다). 이 번역이 성공을 거두자 그는 연이어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1776), 스펜서의 <사회학 연구>(1873), 밀의 <자유론>(1859), 에드워드 젠크스의 <정치학사>(1900),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1748), 밀의 <논리학 체계>(1843) 등을 모두 번역한다. <천연론>을 옮긴 양일모 교수의 지적대로 "혼자서 번역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번역이었다."  

해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작업에 나선 것이고, 그것이 끼친 영향은 어떠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간략하게 참조가 되는 건 조경란의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삼인, 2003)이다. '중국에서 사회 진화론의 수용 양상'이란 논문이 포함돼 있어서인데, 이 글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간추린 것이다(이 학위논문은 <중국근대와 사회진화론>(문학과지성사)이란 제목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언급돼 있으나 어찌된 일인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사회진화론은 중국에 체계적으로 수용된 최초의 서양사상이며, 옌푸와 량치차오가 사회진화론을 소개하고 대중화에 힘쓴 사상가였다면 장빙린과 루쉰은 사회진화론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것을 극복해보고자 애쓴 인물들이었다(조선의 경우엔 유길준과 윤치호가 사회진화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며, 만해 한용운이 이를 극복하고자 애쓴다).    

그리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참고할 수 있는 책이 '옌푸와 서양'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벤저민 슈워츠의 <부와 권력을 찾아서>(한길사, 2006)이다. <천연론>의 역자 서문에는 역자가 대학원 세미나에서 "미국의 중국 연구를 대표했던 하버드대학의 고 슈워츠 교수의 위어난 엄복 연구를 배워가면서, 동양의 고전으로만 장식된 동양철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라는 언급이 나온다. 바로 그 '엄복 연구'가 바로 <부와 권력을 찾아서(In search of Wealth and Power)>(하버드대, 1964)이다(알라딘에서는 1983년에 나온 재판본을 구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에 대해선 출간시에 소개기사를 옮겨놓은 적이 있었지만 책을 구하지 않은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먼댓글로 링크해놓았다). 다행히 아직 절판되진 않은 상태여서 바로 구하긴 했는데, 번역이 유려하진 않다. 물론 이런 책 자체가 번역소개된 점은 일단 고무적이면서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루이스 하르츠 전 하버드대 교수가 붙인 서문의 제목이 '서양과 중국을 향한 새로운 시선'이 옌푸 사상이 갖는 의의를 요약하고 있는데, 첫문단은 이렇게 나간다.  

재능 있는 학자라면 자신이 연구하는 나라의 사람들은 명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이방인인 자신에게는 모국 문화와 비교되기 때문에 분명히 드러나는 그 나라 사상의 표상적인 면들을 밝힐 수 있다. 할레비가 영국인에게, 토크빌이 미국인에게 흥미를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자기발견의 경이감 때문이다.(35쪽)

원문은 이렇다. 

It is the genius of the foreign critic to bring to the surface aspects of thought implicit in the life of the nation he stduies but explicit for him because of the contrasts supplied by his own culture. It is a shock of self-discovery which makes Halevy interesting to the English, Tocqueville to the Americans

이방인이라서 외국의 비평가만이 포착해낼 수 있는 사상적 측면이 있다는 것이고 할레비와 토크빌이 그 사례라는 것. 그런데, 번역에서 두번째 문장은 주어와 목적어 관계가 뒤바뀌었다. "할레비가 영국인에게, 토크빌이 미국인에게 흥미를 갖게 된 것"이 아니라 "할레비가 영국인에게, 토크빌이 미국인에게 흥미를 끄는 것"이다. 그들의 시선을 통해 새로운 자기-발견의 경이(충격)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할레비'란 이름이 생소해 찾아보니 프랑스 역사가 엘리 알레비(Elie Halevy, 1870-1937)이다. 백과사전엔 "19세기 영국 역사를 가장 상세하게 기록한 <19세기 영국인의 역사>(6권, 1913~47)의 저자이다. 이 대작은 1815년 이후 영국의 정치·경제·종교 발전을 추적한 것이다."라고 소개된다. 토크빌은 물론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인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 알렉시스 토크빌(1805-1859)을 가리킨다. 그리고 중국인 옌푸도 서양인들에게 그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동시대의 사례로는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가졌던 의미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슈워츠 교수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인물은 영국의 고전적 자유주의 저술에 많은 관심을 두고 서양사상을 바라본 중국인 엄복이다. 그는 세기의 전환기에 유럽 사상가들의 저술을 중국어로 옮긴 인물이다.

옌푸의 번역 작업이 왜 서양인에게도 흥미의 대상이 되는가? 그것은 그가 '개인주의'나 '자유방임' 같은 당대 사상가들의 자기 이해를 제쳐놓고 '집단적 힘(collective energy)'이란 주제를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서구의 비평가들로선 한번도 주목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뭔가 새로운 '자기-이해'에 해당한다.   

아직 근대를 경험하지 못한 문화적 위치에 있었던 엄복은 당시 유럽 사상가들이 말한 '개인주의'나 '자유방임' 등은 차치한 채, 근대세계로 접어드는 유럽의 움직임을 반영하는 에너지를 다룬 그들의 저작에 매료되었다. 당시 서양 비평가들은 그 주체에 관심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러한 주제를 표헌하는 수단으로서 다른 개념들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물론 'energy'의 번역이긴 한데, '에너지에 관심을 갖다'는 말은 아무래도 어색하게 들린다. '힘'이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당시 서양 비평가들은 그 주체에 관심이 없었는데"는 "그 주제에 관심이 없었는데"로 교정돼야 한다. 여하튼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다른 관점에서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이 하버드 학자들이 본 옌푸의 의의다. 그리고 이어지는 지적에 따르면, 지금에 와서는 옌푸의 시각이 낯설지만은 않게 되었으며 서양의 자기 이해에 포함될 것이다. 유감스러운 건 이런 내용을 말하는 6행이 번역본에서 누락됐다는 점. 아래가 빠진 대목이다. 

But the West has drifted into a new position now, where its involvement with nations overtly experiencing the issue of 'modern history' cannot fail to inspire it to review that issue in its own intellectual past. It is likely that the perspective of Yen Fu will, in significant part, become in the end our own. 

<부와 권력을 찾아서>는 이제 손에 들었기 때문에 언제 완독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주제에 관한 책들, 동아시아와 미국에서의 사회진화론에 관한 책이 더 나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몇자 적었다.  

11. 06. 12. 

 

P.S. 박노자의 <우승열패의 신화>는 영어판으로도 출간됐다. 한국어판의 부제인 <사회진화론과 한국 민족주의>가 제목이다(애초에 <우승열패의 신화>에 실린 글의 절반 이상이 영어 논문을 번역한 것이었다). 더 소개됐으면 싶은 책은 <유럽과 미국 사상에서 사회진화론>과 <사회진화론과 미국사상>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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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6-13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용옥 씨가 방송강연에서 학위논문 스승이었던 슈워츠 씨에 대해 매우 존경심을 지니고 언급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슈워츠 씨의 또다른 저서<중국혁명과 모택동의 대두>(국내번역본의 제목은 중국공산주의운동사)에서도 첫장에 중국인들의 서양사상 수용의 역사를 담았는데 엄복에 대해 언급하고 있죠.

로쟈 2011-06-14 09:34   좋아요 0 | URL
<중국혁명과 모택동의 대두>도 번역돼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6-13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교재에 <~하다>가 아니라 <~하게 하다>로 외워야 하는 단어라면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interest,surprise이 들어있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로쟈 2011-06-14 09:35   좋아요 0 | URL
단순한 착오라도 뜻이 반대가 되니 난처한 경우죠...

파고세운닥나무 2011-06-14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국에서 옌푸와 동시대를 살았던 번역가 린슈(임서)를 공부할 생각입니다. 린슈는 서양의 문학작품을 번역했는데, 외국어를 전혀 알지 못했던 번역가였죠.
아무래도 비교문학쪽이다보니 번역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옌푸도 함께 공부하면 좋을듯 합니다.
물론 옌푸를 걸치고 넘어가면 해야할 공부가 꽤 많아지겠죠^^;

로쟈 2011-06-15 20:41   좋아요 0 | URL
유학을 나가시나 보군요. 좋은 공부 많이하고 돌아오시길.^^

파고세운닥나무 2011-06-16 22:00   좋아요 0 | URL
아무쪼록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격려 고맙습니다^^
 

엊저녁엔 성남도서관의 인문학강좌 마지막 강의가 있었다. 지난 중순에 섭외를 받고 3주 동안 세 차례에 걸쳐서 '고전 읽기의 즐거움'이란 주제와 함께 고골의 <외투>,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두 단편을 읽었다. 그리고 청탁을 받아서 겸사겸사 도서관소식지 '지식 정보의 샘'(48호)에 '인문학 멘토'란 글을 실었다. 새로 쓴 글은 아니고 <대학생이 된 당신을 위하여>(학이시습, 2010)에 실은 인문학 소개 글을 간추린 것이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란 주제의 도서관 강의에서 주로 활용하는 자료이다.

지식 정보의 샘(11년 봄호) 교양인의 첫걸음, 인문학을 배우다 

요즘 들어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도서관에서도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이 많이 생기고 있고요. 새롭게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신 분들도 많습니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신 분이 아니라면, 인문학이 무엇인가 얼른 감이 오지 않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번 봄 성남도서관의 초청으로 인문학 강좌를 갖게 된 김에 인문학 ‘초심자’ 분들을 위한 몇 가지 안내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인문학에 대한 간단한 ‘가이드’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인문학(人文學)이란 무엇인가요? 말 뜻대로 하자면 ‘인문’에 대한 배움이고 공부입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인문학은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서양의 라틴어로는 ‘스투디아 후마니타스(studia humanitas)’이고, 이 말의 번역어가 또한 ‘인문학’입니다. ‘후마니타스’란 본래 로마인들의 인문적 소양을 뜻하는 말이었으므로 ‘스투디아 후마니타스’란 그러한 인문적 소양을 갖추기 위한 공부를 가리킵니다. 보통 문법, 수사학, 시학, 역사가 그 공부의 내용이었다. 그것이 오늘날의 대학 편제로까지 이어져 보통 문학(文學)과 사학(史學)과 철학(哲學) 공부를 통칭하여 인문학 공부라고 합니다. ‘문․사․철’이라고 약칭하기도 하고요. 요컨대 인문학은 이 문․사․철에 대한 공부입니다.  

고전적인 의미의 인문학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인문적 소양을 함양하기 위한 공부를 뜻했지만 근대 학문체계가 형성되면서 ‘인문’학보다는 인문‘학’으로 방점이 이동하게 됩니다. 그렇듯 인문학의 각 분야들이 전문화됨에 따라서, 인문학은 인문적 교양을 뜻하면서 동시에 특정한 전공분야를 가리키는 말이 됐습니다. 전공으로서의 인문학 공부는 대학에서 주로 하는 것이니 여기서는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이 쓰는 말이긴 하지만, 먼저 교양이란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교양’은 ‘문화’와 함께 ‘culture’의 번역어로 사용되는데, 본래는 토지의 경작이나 가축의 사육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정신적 능력의 계발과 육성이나 교육이란 의미로 확장됐고요. 수련과 도야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교양의 이념은 ‘호모 쿵푸스’의 이념이기도 합니다. 공부는 원래 ‘쿵후(工夫)’란 말에서 왔으니, 호모 쿵푸스는 곧 ‘공부하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호모 쿵푸스의 또 다른 이름으로 ‘호모 부커스’, 곧 ‘책을 읽는 인간’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름들이 시사하는 것은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일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규정해주고 인간과 동물 간의 차이를 지정해주는 종차(種差)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양으로서의 인문학 공부란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얻는 과정이고 인간다움에 이르는 필수적 여정이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사실 이 질문 자체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곧바로 ‘인간다움’을 갖췄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으며, 그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거기서 ‘인간답다’는 우리말 뜻은 세 가지 정도로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 같다. 인간다움이란 ‘인간 같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곧바로 ‘같잖은 인간’이 있다는 걸 전제합니다. 둘째, 인간이 되다. 인간이란 ‘자라나는’ 존재이자 ‘되어가는’ 존재란 뜻이며,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덜 된 인간’도 있다는 것을 ‘인간다움’이란 말은 상기시켜줍니다. 끝으로, 인간으로서 제값을 한다. ‘인간다움’은 거꾸로 인간으로서 제값을 못하는 ‘값싼 인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또한 일러줍니다. 인문학 공부가 ‘그저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다운 인간’인가를 판별해주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그때 공부는 ‘인간 같기’ ‘인간되기’ ‘인간 값하기’를 위한 공부입니다. 교양으로서의 인문학 공부란 이렇듯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자기를 정립하고 확장하는 공부입니다.

자기 정립이란 말이 나왔는데, 조금 어려운 말인 듯싶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 명나라의 사상가 이탁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이 50 이전에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 뿐,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 일종의 자기비판이지만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삼을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명확한 주관과 생각 없이 남의 말을 따라 말하고 남의 의견을 좇아 짖어댄다면 이탁오의 자탄과 마찬가지로 ‘한 마리 개’의 처지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정립을 위한 인문학 공부란 ‘한 마리 개’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교양으로서의 인문학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육과 수련을 통해 앎과 행함을 일치시킨다는 의미에서 ‘몸으로’ 합니다. 이 ‘지행합일’의 정신은 사실 공자의 어록인 <논어>의 첫머리에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공자는 말했습니다. 거기서 배움(學)은 정신의 일이고 익힘(習)은 몸의 일입니다. 즉, 머리로 배우고 몸으로 익힙니다. 원래 ‘習’(습)이란 글자는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갯짓(羽)을 하는 모양을 나타낸다고 하므로, 어미 새에게서 비행하는 법을 배우고 처음 날갯짓을 하는 것이 바로 ‘습’입니다. 자신이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곧 배움의 기쁨이고, 학습의 즐거움입니다. 그것이 이론과 실천의 합일이고 일치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공부는 무엇보다도 ‘인문학습’이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학습을 실천하기 위한 방책의 기본은 ‘독서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단순히 책을 읽을 줄 안다는 의미의 독서력이 아니라, 인문고전과 교양서를 읽고 소화해내기 위한 독서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컨대, ‘문학작품 100권과 교양서 50권’ 정도를 각자의 독서 목표치로 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학작품’은 가벼운 읽은 거리가 아닌 ‘고전’이나 ‘세계명작’ 수준의 작품을 말하고, ‘교양서’는 인문․사회과학 교양서를 말합니다. 이런 분량의 책을 비교적 단기간(2년도 좋고 4년도 좋습니다) 동안 독파하는 것이 독서력 형성의 지름길입니다. 자기만의 목록을 만들 수도 있지만, 여러 권장도서의 목록을 참조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관련 교양강좌를 적극적으로 수강함으로써 독서를 ‘자발적 의무’로 강제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게 독서 경험이 축적되는 가운데 독서력이 붙고 독서에 자신감을 갖게 되면, 인문학 공부는 평탄해집니다. 다양한 수준의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독서력을 지속적으로 단련시켜나가는 일이 남을 뿐입니다.

흔히 인간의 욕구에는 위계가 있어서 생리적 욕구와 소속감, 자존심에 대한 욕구 등이 먼저 충족된 후에야 비로소 자아실현에 관심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과연 품위 있는 삶에 대한 욕구는 다른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이후에야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요? 기본적인 욕구 충족만을 관심대상으로 삼는 삶은 단순한 ‘생존’만을 지향하는 ‘벌거벗은 삶’입니다. ‘벌거벗은 삶’의 자리에서 인문학은 무의미한 사치이거나 장식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한 삶이며 품위가 결여된 삶입니다. 생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문학 공부입니다.  

11. 0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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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k2018 2011-03-31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성남도서관에서 강의를 들었던 학생(?)입니다.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몇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과 성향이 강한 사람이고 그래서인지 쉽게 드러나는 논리에 강한 편이고 반대로 보이지 않는 상징이나 부호에 약한 편입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왜 인문학에 쉽게 접근하지 못할까 하던 의문이 갑자기(?) 조금 해결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고전이나 명작에서 말하고자 하는 상징이나 해석에 쉽게 다가가지 못한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저 나름대로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의 강의 주제 선택이 수강자들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 걸까 그것이 내내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어서 소들고 질문하지 못했고 시간을 두고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좋은 강의 정말 고맙습니다.

로쟈 2011-03-31 12:54   좋아요 0 | URL
아, 어제 계셨군요.^^ 제 취지는 고전 작품을 같이 읽어본다는 거였어요. '경험'해보자 정도. 그리고 그런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고들 있는지 조금 보여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 독서가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면 다행인데, 좀 어려워하신 분들도 계실 듯하네요...

jhk2018 2011-03-31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나름대로 겹겹의 문 중에서 하나를 열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 말고도 거의 모두 그러리라 믿습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비스듬한 사선이 아니라 계단을 오르듯이 직각으로 올라가는 것. 선생님의 강의가 많은 사람에게 그렇게 관념이나 생각의 상승의 계기가 되리라 믿습니다. 앞으로도 수강의 기회가 있다면 달려 갈 것이고 책으로는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눈여겨 보겠습니다. 멀리서나마 화이팅 외쳐드릴께요.

로쟈 2011-04-03 08:37   좋아요 0 | URL
네,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감사한 일입니다. '계단' 하니까 성남도서관이 바로 떠오르네요.^^;

노이에자이트 2011-03-3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강생들과 함께 '외투'와 '바틀비'를 읽고 공부하는 방법이 궁금하네요.읽어오라고 과제 내주고 다음 시간에 토론을 하나요? 이런 강의를 안 들어봐서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모릅니다.

로쟈 2011-04-03 08:37   좋아요 0 | URL
읽어오시라고 하고, 그냥 작가와 작품에 대해 소개하는 식입니다. 토론식은 아니구요. 전달식 강의를 하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4-03 15:56   좋아요 0 | URL
잘 알겠습니다.

雨香 2011-04-01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사뭇 인문학과 교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독서력에 대해서도 생각할 게 많군요.

성남도서관이라 찍힌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열살 때 부터 군대가기전까지 제 독서를 책임져 준 곳입니다. (딱 그 때가 집안형편이 안 좋은 때라 책 한권 살 형편도 되지 않았죠.)한여름에도 땀을 뻘뻘흘리며 언덕을 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때는 40분 이상 걸어갔었던 기억까지...

고2때였던가 한번은 대출목록을 뒤져보는데 중3부터 고2때까지 대출권수가 260권 정도 되더라구요. 아마 이 때의 독서가 지금의 자양분이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물론 그 때의 책읽기는 깊이가 없었겠지만요) 고등학교때 한번은 도서관 서가에서 어떤 분과 부딪혔는데 담임선생님이셨습니다. 나중에 주례를 서주셨던...

지금은 (서울) 성동도서관과 비교적 책이 많은 분당도서관을 이용하는데 '성남도서관'이라는 글자에 꽂혀 주절거렸습니다.

로쟈 2011-04-03 08:39   좋아요 0 | URL
'도서관의 추억'을 갖고 계시군요. 대단한 '언덕'이던데요.^^
 

책상에 가득 쌓인 책을 약간 정리해서(다른 방으로 옮겨놓았다) 정면과 우측에 놓인 책상에 각각 한 뼘씩의 공간을 마련했다. 댓 권의 책을 펼쳐놓을 공간은 되는 셈이어서 마음도 그만큼 넓어진 듯하다. '여유' 공간이다. 당장 강의나 원고와 관련하여 읽어야 할 책들을 눈에 띄는 대로 앞쪽에 배치해 놓으니 무슨 전투대형 같기도 하다. 하긴 지식의 '사무라이'들은 이런 식으로 싸우는 것이지('사무라이'는 크리스테바의 용어다).   

몇가지 '전선'을 생각해보다가 '문학이론' 쪽부터 점검을 해보기로 했다. 러시아에서 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창비)의 러시아어본을 들고 온 게 직접적인 계기이긴 한데, 한편으론 '20년 주기설'에 따라(인생은 20년 단위로 반복된다는 설이다. 내 생각이 그렇다) 다시금 읽어볼 때도 됐다는 생각에서다. 학부 때 문학세미나 교사를 하면서 최소한 네댓 번은 읽었던 책인데, 이미 그때 읽은 책은 찾을 수 없어서 최근에 다시 구입했다(20년 전으로의 시간여행!)    

국역본은 1986년에 초판이 나왔고 이번에 산 건 2010년에 나온 22쇄다. 내친 김에 원서의 3판도 구했다(나는 초판 원서도 갖고 있다). 3판이라곤 돼 있지만 2008년에 나온 25주년 기념판이다. 1983년에 초판이 나왔고, 1996년에 개정판이 나왔으며(이건 번역본이 따로 있다), 개정판과 이 3판은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글턴의 기념판 서문이 더 붙었다. 아무튼 국내에서도 그렇고, 영어권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읽히는, 그러니 가장 성공적인 '문학이론 입문서'가 아닌가 싶다. 몇달 전에 나온 <이론 이후>(길, 2010)와 같이 읽으면 구색도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이론 이후>의 원서도 찾아봐야겠다). <문학이론 입문> 원서와 함께 대담집 <비평가의 임무>도 주문했는데, 이 책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이글턴의 신간은 제임슨, 사이드와 3인 공저로 낸 <민족주의, 식민주의, 문학>(인간사랑, 2011)이다. 정확하게는 아일랜드의 필드 데이 극단이 세 사람을 초청해서 개최한 강연회의 원고를 모아서 낸 책으로 '아일랜드와 모더니즘'이 적절한 부제일 거라고 역자는 말한다. 세 사람 모두 아알랜드의 작가/시인인 제임스 조이스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를 다루고 있다. 내친 김에 이글턴 자신이 '反자서전'이라고 부르는 회고록 <게이트키퍼(The Gatekeeper)>도 소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글턴의 책으로 한권 더 챙긴 건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경성대출판부, 2010)이다. 이 또한 최근에 원서를 구했다. 같이 읽을 책으로 고른 건 러시아 문학자 리디야 긴즈부르크의 <서정시에 관하여>(나남출판, 2010). 시 이론서를 읽는 것도 상당히 오랜만이다.  

 

시론과 시이론으로 살짝 방향을 튼다면 후고 프리드리히의 <현대시의 구조>(지만지, 2009)도 읽을 거리다(오래전에 <현대시의 구조>(한길사, 1996)로 출간됐던 책이다. 나는 이 한길사판을 갖고 있는데 지금은 소재 불명). 지난달에 러시아에 가보니 러시아어본도 나와 있길래 다시금 떠올린 책이다(이왕이면 사들고 올 걸 그랬다). 권혁웅의 <시론>(문학동네, 2010)까지 곁들이면 '보들레르에서 21세기 한국시'까지다.  

 

거기에 더 보태면, 자크 랑시에르의 <문학의 정치>(인간사랑, 2009)가 있다. 최근에 영역본이 나와서 다시금 읽어보려는 책이다. 그리고 읽는 김에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도 이번엔 완독해보려고 한다. 어지간한 지력과 지구력이 없다면 완독하기 어려운 책들이다. 이제, 문학이론과 관련하여 무엇이 남았을까.   

음,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8)도 다시 읽어봐겠다('1947년 작가의 상황'이 빠진 버전으로 20년쯤 전에 읽은 듯싶다). 러시아어본도 구해온 게 '자극'이 된다. 그리고 새로 나온 바흐친 선집들까지. 이 정도면 최소한 두달 이상은 버틸 수 있을 듯하다. 독서의 범위를 더 확장하는 건 중간시험 기간쯤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그맘때면 봄이 만개하겠군. 혹은 이른 더위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11.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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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3-06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간이 들러 눈팅만 하는데 오늘은 응원의 댓글 남겨봅니다.
소리없이 다녀가는 수많은 블로거들에게 도움을 주는 분이니까요.^^
이젠 제대로 봄이지요~~~~~~ 어제 양지쪽에서 발견한 봄까치꽃이 반가웠어요.

로쟈 2011-03-06 16:0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아직 아침저녁은 쌀쌀하지만 봄은 봄이지요.^^
 

해마다 연초에 교수신문에서 학술출판 전망기사를 옮겨놓곤 했는데, 올해는 조금 늦게 스크랩해놓는다(하지만 음력으로는 새해 첫날이다!). 기사 자체도 조금 늦게 올라오긴 했다. '미리보는 2011년 학술 출판 지형'과 '미리보는 2011년 학술저작들'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기대를 모으는 책들이 올해도 많이 눈에 띈다.   

교수신문(11. 01. 21) 문제작 '재번역' 바람분다...原典 해설은 쉽게  

2011년 학계가 내놓을 학술서들은 어떤 지형을 하고 있을까. 그간 꾸준하게 학술서를 출판해온 주요 출판사들을 취재한 결과, 올해 키워드는 ‘고전과 현대 문제작 번역’, ‘화제의 저자들 저작 번역’, ‘철학자 해부와 저작 재번역’, ‘중국’, ‘전통사상과 문화’, ‘식민지 근대화’ 등으로 갈라졌다. 특히 이 가운데 눈길을 끈 것은 ‘철학자 해부와 저작 재번역’이다.  

 

올해 학술 출판계에 감지되는 바람의 하나는 ‘재번역’이다. 이미 지난해 12월말 김성도 고려대 교수(언어학과)가 1996년 자신이 번역했던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민음사)를 전면 개정한 새로운 번역서를 내놓은 바 있다. 이른바 오역, 비문, 서지상 오류 등을 수정한 개정 번역 작업은 그만큼 국내 학계의 내공이 깊어져가고 있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민음사는 들뢰즈의『앙띠 오이디푸스』(김재인, 2월),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도 개정 번역판을 낼 계획이다. 후마니타스는 기왕에 번역된 바 있는 루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를 새롭게 선보일 예정이다. 앨버트 허쉬만의 『정념과 이해관계』도 재번역 목록에 올라 있다.  

 

다음 철학자를 해부하는 해설서의 약진이 예상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을 영역하며 들뢰즈 연구자로 널리 알려진 브라이언 마쑤미의 핵심 저작 『잠재계: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조성훈, 5월)가 갈무리에서 출간된다. 특히 마쑤미는 이 책에서 잠재계(virtual) 개념을 운동과 정동, 그리고 감각을 분석함으로써 잠재계 개념의 혁신을 이루고자 시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출판사는 또 에드워드 사이드를 깊게 읽는 시도도 선보인다. 발레리 케네디의 『에드워드 사이드』(김상률, 2월)가 그것이다. 사이드의 사유와 이론에 영향을 미친 요소들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세속성, 팔레스타인과 중동문제, 탈식민 이론 등 주요 쟁점을 검토한 책이다.  



무게를 유지하되, 원전 해설을 ‘쉽게’ 시도한 책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서광사는 플라톤의 대화편 원전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전의 예비 학습서로서 적합한『플라톤의 <대화편> 해설서』(김요한), 그리고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해설서』(존 프레스톤 지음, 박영태 옮김),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스 윤리학』해설서(크리스토퍼 와너 지음, 김요한 옮김)등을 선보인다. 창비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해설한 데이비드 하비의 책 『맑스 「자본」의 길잡이』(강신준, 상반기)를 계획했다. 2007년 『자본 1』강의 녹취록을 저본으로 삼은 해설서다.

이른바 ‘잘 나가는’ 사상가, 좀더 주목받을 필요가 있는 저자들의 저술 번역도 활기를 띌 것으로 보인다. 지난 해 ‘슬라보예 지젝’ 바람을 일으켰던 지젝은 올해도 여전하다. 인간사랑은 슬라보예 지젝과 마커스 가브리엘의 공저 『신화, 광기 그리고 웃음: 독일관념론의 주체성』(임규정, 3월)을 선보인다. 그린비는 2010년 알튀세르 사망 20주기를 맞이해 개최한 알튀세르 심포지엄의 결과물 『알튀세르 효과(가제)』(진태원, 장진범, 안준범 외 지음, 5월)를 출간한다. 알튀세르의 주제들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란 평이다.  



산책자는『왜 한나 아렌트인가?』(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5월)을 소개한다. 한나 아렌트의 적통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저자가 현대적 시각으로 아렌트의 삶과 저작을 해설한 책이다. 삼인은 서구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상관성을 분석한 인류학 분야의 역작 『개인주의에 관한 시론』(루이 뒤몽 지음, 이기라 옮김, 6월) 출간을 앞두고 있다.

국내 저술도 깊어질 전망이다. 도서출판 길은 막스 베버 전공자인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의 『막스 베버와 더불어 인문사회과학적 사유를』(6월)도 준비하고 있다. 제목 그대로 베버 연구의 결산이자 한국 사회학의 나아갈 바를 종합적으로 결집한 책이다. 이 출판사는 경성제대 출신으로 현대철학사의 첫 출발점의 모습을 한 박치우에 관한 연구서 『불화, 그리고 불온의 시대의 철학: 박치우의 삶과 철학사상 연구』(위상복 지음, 4월)도 내놓을 예정이다.(최익현 기자)    

교수신문(11. 01. 20) 신묘년 학술서 관통하는 키워드는?

2011년 신묘년. 학술서들이 연초부터 쏟아져나고 있다. 올해 어떤 책들이 얼굴을 내밀까.
꾸준히 학술서를 출간해온 출판사로부터 올해 출간 예정 목록을 받았다. 키워드로 정리한다면, ‘고전과 현대 문제작 번역’,  ‘화제의 저자들 저작 번역’. ‘철학자 해부와 저작 재번역’등이 우선 눈에 들어오는 열쇠말이다.
이어 다극화된 세계체제의 중추로 떠오른 중국과 관련한 ‘중국’ 키워드, 그리고 한국 전통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조명한 ‘전통사상과 문화’. 여전히 논쟁의 물꼬를 유지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 저작들’을 놓칠 수 없다.

고전과 현대 문제작 번역 강세
고전과 현대 문제작 번역은 지난 해 이어 꾸준히 강세를 보일 예정. 먼저 동녘의 고전 강의 시리즈가 눈에 뛴다. 노자, 장자, 맹자, 니체, 레비나스, 정치철학 등을 강의 형식으로 소개하는 기획이 있다. 도서출판 갈무리는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김호경, 4월)을 소개한다. 『윤리학』과 『정치론』을 통해 완성되는 스피노자의 급진적인 사상 체계가 시작되는 저작이란 설명이다. 스피노자를 우리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고전으로 평가한 셈이다. 역자의 꼼꼼한 해설이 덧붙여진다는 데 기대된다.

책세상은 『루소 전집』(고봉만, 김중현, 박호성 외)을 출간한다. 산책자에서 나올 루시엥 페브르와 앙리-장 마르탱의 공저 『책의 출현』(역자 미정, 11월)도 눈을 끈다. 이 책은 문자문화를 대량으로 공급하게 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책의 출현’을 경제사와 기술사는 물론 사회학과 인류학적인 축면에서까지 읽어낸 아날학파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도서출판 길은 헤로도토스의 『역사』(김종철, 6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김헌, 8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곽차섭, 8월), 키케로의 『연설가에 대하여』(안재원, 8월), 짐멜의  『돈의 철학』(김덕영, 하반기), 칸트의 『판단력 비판』(김상봉, 중반기), 칼 슈미트의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지위』(나종석, 4월), 자크 랑시에르의 『불화』(진태원, 4월),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예 지젝의 『철학 무엇을 할 것인가』(민승기, 5월) 등을 내놓을 계획이다. 모리스 블랑쇼 저작 소개도 계속 이어진다. 그린비는 『문학의 공간』(이달승, 1월), 『죽음의 선고』(고재정, 3월), 『다가올 책』(심세광, 4월) 『우정』(박규현, 9월)을 계획하고 있다. 이 출판사는 루쉰 전집 3권~ 6권 번역도 계속할 예정이다. 



2010년 출판 독서계를 뜨겁게 달군 책은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역시 그의 저작 『민주주의의 불만』을 동녘에서 준비하고 있다. 정치철학자 알랭 바디우 역시 꾸준하게 번역되고 있다. 이학사는 바디우의 『세기』(박정태, 1분기)를 계획하고 있다. 이 출판사는 바디우의 정치철학을 읽어낼 수 있는 『메카폴리티크』(홍기숙, 4분기)도 같이 준비하고 있다.

좌파 이론가 안토니오 네그리 번역을 빼놓을 수 없다. 갈무리는 『네그리, 제국을 말하다』(박서현, 6월)와 주세페 꼭꼬와 공동 저술한 『글로벌: 세계화 시대의 삶 권력과 투쟁』(조정환, 8월)-이 책은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에 놓고 다fms 세계의 가능성을 묻고 있는 내용이다 -문학평론가 체자레 카사리노와 대담한 『공통된 것을 기리며』(손지태, 10월)를 차례로 내놓을 계획이다. 네그리 철학의 주요 개념의 계보학을 세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을 듯하다. 여기에 이학사가 준비하고 있는, 정치의 새로운 문법을 중심으로 네그리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도자기 제작소』(신지은, 4분기)도 곁들일 수 있다.

다각적 시선 쏠리는 '중국' 화두
‘중국’의 부상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가운데, 2011년 우리 학계에서도 활발한 중국 연구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출판문화원의 『중국의 부상과 한반도의 미래: 상호인식과 전략적 선택』(정재호, 5월)은 향후 중국의 미래 궤적들을 여덟가지 시나리오로 나눠 그 가능성을 평가하고, ‘강대국화’의 구현을 전제로 한국이 가용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과 각각의 비용을 분석하는 책이다.

만음사가 준비한 『휘주 상인과 대운하』(조영헌, 3월)는 우리에게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주고 있는 중국을 알 수 있는 키워드로 명·청시대의 휘주 상인을 내세웠다. 이 출판사가 준비한 『키메라의 제국 청과 중국』(구범진, 9월)은 오늘날 중국이라는 국민국가는 청이라는 세계 제국이 남긴 유산 속에서 탄생한 역사의 산물이라는 시각을 담아냈다. ‘중국’의 역사적 탄생 기원을 더듬는 기획들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급부상에 놀란 미국과 중국은 어떤 관계를 유지할까. 이들의 대결이 궁금한 독자라면 소와당이 출간할 『제국의 전쟁-중국 대 미국』(프랑스와 랑글레 지음, 오정훈옮김, 4월)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화여대출판부는 중국 번역 철학의 정수만을 추려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왕빙친의 『20세기 중국번역사상사』(김혜림 외, 6월)을 내놓을 예정. 20세기에 홀동했던 번역 거장 10인의 번역 담론을 집중적으로 탐구한 이 책을 통해 근대 중국을 만든 문화적 배경을 읽어낸 수 있을 것이다.

해외 저작들의 번역 소개와 함께 학계 내부의 공력을 십분 발휘한 저술 작업도 활발한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전통사상과 문화를 조명하는 책들이 주를 이룬다. 서울대출판문화원의 『고려불교사연구』(최병헌, 3월)에 주목할 수 있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가 그의 제자들이 헌정한 책이듯, 이 책 역시 최병헌 교수가 남긴 논문들을 제자들과 학계에서 한 자리에 모은 것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한국 불교사를 근대적 학문으로 정립하는 데 헌신해 온 최병헌 교수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지식산업사가 내놓을 『한국불교사연구입문』(최병헌 외, 상반기)도 같은 맥락에 서 있는 책이다.

전통사상과 문화탐색 활발
소와당은 『풍석 서유구와 임원경제지』(유봉학 외 지음. 1월)를 내놓는다. 이 책은 임원경제지 시리즈의 학술적 의의를 서지학적, 역사학적 측면에서 연구한 책이다. 이어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위선지』(김일권, 2월)도 곧 선보인다. 임원경제지 시리즈 가운데 본리지, 관휴지, 만학지를 이은 4번째 책이다. 자연현상을 관찰해 기후를 예측하고 점을 보는 내용이다. 서울대출판문화원이 내놓을 조남현 서울대 교수의 『한국 현대 잡지 사상사』(4월)도 눈길을 끈다.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과 전개는 사실 ‘잡지’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2010년 특히 국문학계 젊은 학자들이 1930년대 잡지에 주목한 데는 그런 인식의 공유가 있다. 근대문학 형성에 관련된 잡지들을 일관성 있게 읽어내고, 이를 사상사적 차원에서 정리하는 작업은 문학사와 문화사를 더 풍요롭게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동국대출판부는 신민족주의 사학자인 손진태의 유고집 1, 2를 예고했다. 『조선 상고문화의 연구』, 『우리나라의 역사와 민속』(최광식 지음, 상반기)는 손진태의 미발표 원고 및 서간문과 엽서류를 엮어 만든 책이다. 같은 출판사의 『고조선 복식문화의 발견』(박선희, 상반기)는 상고시대 복식문화를 해명하고 복식학계에서 외면돼 온 고조선 복식문화의 기원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 논쟁적 작업이 될 것이다.

기존의 정태적인 분석을 넘어 한 장의 지도 이면에 놓여 있는 사회사적 맥락에 주목한 『조선시대 세계지도와 세계인식』(오상학, 상반기)가 창비에서 곧 출간된다. ‘지도’ 읽기가 새롭게 눈길을 끌고 있는 가운데, 어떤 인식의 지도를 펼칠지 기대된다. 이와 동녘에서 준비하고 있는 『전통건축 해체도』시리즈(김왕직), 『한옥발달사』(전봉희)등도 최근 일고 있는 ‘건축 읽기’ 바람 속에서 어떤 목소리를 담을지 주목된다.

식민지 근대 천착의 새로운 걸음
2010년이 한일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라는 점에서 식민지 유산 평가가 지난 한 해 주요한 의제였지만 논의가 충분치는 못했다. 올해 식민지 근대화와 관련된 저술 작업은 탄탄한 기초체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일제시대 조선 최대의 대기업이였던 화교기업 ‘동순태’ 분석을 통해 조선에 근대 경제체제가 성립하던 실정을 밝혀낸 소와당의 『동순태』(강진아, 6월)에 눈길이 쏠린다. 1907년에서부터 1945년까지 한국에서 발매된 유성기음반의 규모와 내용을 상세히 일람할 수 있도록 정리한 동국대출판부의 『한국유성기음반 문헌정보』(배연형 외, 1월)가 곧 나온다. 서지적인 정보와 음반 매체의 특성 이해, 나아가 시대적인 문화의 흐름, 음악사적 맥락까지 개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출판사가 준비한 개항 후부터 해방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의 농업변동과 농민·농업문제 연구를 중심에 둔 『한국 근대의 상업적 농업의 발달과 농업변동』(이윤갑 지음, 상반기)는 식민지 유제가 해방후 정치경제적 분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한 책이다.

1880년대 입헌군주제와 민주공화제라는 서양의 정치제도를 처음 접한 시기부터 해방의 꿈을 꾸며 혁명의 길을 모색했던 1940년대까지를 포괄한 근대국가건설론 『그들이 꿈꾼 나라』(박찬승·최균진 공저, 7월), 대한제국기의 복잡한 정세와 역사의 변동을 폭넓은 시야에서 조망한 『대한제국흥망사』(서영희, 8월)등이 돌베개에서 출간된다.(최익현 기자) 

11. 02.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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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2-03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올해도 열심히 일해야겠네요. 구해보고 싶은 책이 줄줄이 나오니...^^; <왜 한나 아렌트인가?>, <앙띠 오이디푸스>, <말과 사물>, <돈의 철학>, <철학 무엇을 할 것인가>를 1순위 구매목록으로 찜(!)합니다. 올 한 해도 건강하세요.^^

로쟈 2011-02-03 21:55   좋아요 0 | URL
'앙띠 오이디푸스'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또 나오는 건지 궁금합니다.^^;;

자꾸때리다 2011-02-03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밀뱅크의 책은 언제 나올까요? 사실 밀뱅크가 더 궁금해서 관심이 가는 책인데.

로쟈 2011-02-03 21:54   좋아요 0 | URL
상반기에 나오나 모르겠습니다...

sommer 2011-02-0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화, 광기 그리고 웃음: 독일관념론의 주체성'을 지젝과 공동저술한 이는 '마르쿠스 가브리엘'로 수정되어야 할 듯 합니다. 독일 철학자(1980- )이거든요.

로쟈 2011-02-03 21:54   좋아요 0 | URL
현재는 뉴스쿨 조교수로 있으니 꼭 '마르쿠스'라고 부르진 않아도 될 듯한데요. 80년생이면 정말 젊네요!..

푸른바다 2011-02-04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운 소식들이군요.^^ <과학혁명의 구조> 재번역 소식은 없나요? 이 책의 번역본도 참 문제가 많은 번역인데요. 해설서와 더불어 새 번역도 나오면 좋겠습니다.

로쟈 2011-02-06 12:08   좋아요 0 | URL
저작권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네요. 번역본은 두 종이 있었는데. 대학 1학년때 가장 난해하다고 생각했던 책의 하나였지요.^^;

릴케 현상 2011-02-06 0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제본하려고 빌린 책은 반납해야겠네요ㅎ

로쟈 2011-02-06 12:09   좋아요 0 | URL
번역본을 제본하시나요?^^

2011-02-06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6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7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