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공지다. 봄학기에 판교현대백화점에서 진행하는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의 전반부(3월 2일-30일 매주 수요일 오후 3시 30분-5시 10분)는 '셰익스피어 다시 읽기'로 진행한다(https://www.ehyundai.com/newCulture/CT/CT010100_V.do?stCd=480&sqCd=003&crsSqNo=2313&crsCd=203006&proCustNo=P01238568).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기를 고려한 것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포함한 4대 비극을 읽을 예정이다. 번역본은 따로 지정하지 않지만, 가장 많이 읽히는 점을 고려하여 민음사판을 주로 인용할 예정이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1강 3월 02일_ <로미오와 줄리엣>

 

 

2강 3월 09일_ <햄릿>

 

 

3강 3월 16일_ <오셀로>

 

 

4강 3월 23일_ <리어왕>

 

 

5강 3월 30일_ <맥베스>

 

 

이어지는 후반부 강의에서는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부터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까지를 다룬다(https://www.ehyundai.com/newCulture/CT/CT010100_V.do?stCd=480&sqCd=003&crsSqNo=24&crsCd=203006&proCustNo=P01238568).

 

6강 4월 06일_ 나쓰메 소세키, <도련님> 

 

 

7강 4월20일_ 루쉰, <아Q정전>

 

 

8강 4월 27일_ 다자이 오사무, <사양>

 

 

9강 5월 04일_ 조지 오웰, <1984>

 

 

10강 5월 11일_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16. 01. 31.

 

P.S. 이번 봄학기에는 대구점에서도 격주로 '로쟈와 함께 있는 셰익스피어' 강의를 진행한다(https://www.ehyundai.com/newCulture/CT/CT010100_V.do?stCd=460&sqCd=019&crsSqNo=8260&crsCd=203006&proCustNo=P01238568). 3월 11일부터 5월 27일까지 매월 2, 4주 금요일 오후(2시-4시)에 진행되며, 작품은 순서대로 <로미오와 줄리엣><베니스의 상인><햄릿><리어왕><맥베스><템페스트>, 여섯 편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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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즈 2018-03-2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강의도 부탁드려요...


로쟈 2018-03-28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 강의는 종료됐고요. 다른 저녁강의는 태그의 ‘강의‘를 클릭해보시길.~

이지영 2020-04-05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광교 갤러리아 백화점 강의는 취소 되었어요..이제 일정이 없는건가요?

로쟈 2020-04-05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 여름에 개강할 수 있습니다.
 

예고한 대로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 새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15년 전에도 매우 시의적인 책이었지만 현시점에서는 필수적인 책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취지로 적은 옮긴이의 말의 일부다...

2003년 가을 처음 방한했던 슬라보예 지젝은 이후에 자주 한국을 찾아 우리에겐 친숙한 명사 철학자가 되었다. 아마도 대중적 인지도에서 그보다 더 상위에 있을 동시대 철학자는 <정의란 무엇인가>(2009)의 마이클 샌델 정도일 것이다(샌델도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이 있던 2010년에 방한하여 한국 독자들과 만났다). 2012년과 2013년에 연이어 방한했던 지젝은 2016년(경희대 특강)과 2018년(광주 비엔날레)에도 강연차 한국을 찾았고 팬데믹 이후에는 비대면 강연과 칼럼 등을 통해 독자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그뿐인가. 지난 15년간 국내에서 출간된 지젝의 책은 공저를 포함하면 50권 가까이에 이른다. 지금 시점에서 지젝에 대한 소개가 따로 필요하지 않은 이유다.

다만 2003년 처음 대면했을 때 50대 중반이었던 지젝이 지금은 80에 더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 30대에 그의 책을 처음 읽은 독자가 어느덧 50대 후반이 되었다는 사실은 새삼 감회를 느끼게 한다. 이제 지젝은 61세에 생을 마친 헤겔보다 훨씬 늙은 철학자가 되었다. 하지만 나이에 대한 감상은 독자만의 것인지도 모른다. 노철학자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지만, 2026년의 지젝은 변함없이 생산적이다(독자로서의 나는 여전히 그를 따라잡지 못한다). 새로운 글들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며 책의 목록을 늘려가고 있다. 지난해말 펴낸 <양자 역사(Quantum History)>만 하더라도 얼마나 자극적인 제목인가. 거기에 더하여 아마도 칼럼 모음집 <자유주의 파시즘> 등이 올해 근간으로 예고돼 있다. 모두가 한국어판으로 나옴직한 기대작들이다. 이런 책들이 대기하고 있음에도 거의 20년 전 책을 다시 펴내고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답변은 그렇다, 이다. ‘폭력‘이라는 화두가 여전히 유효하며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어서 그렇다.

어째서 그런가. 흔히 말하는 대로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플랫폼을 매개로 한 ‘테크노봉건주의(Techno-feudalism)’로 탈바꿈했다. 민주주의의 가교로 간주되던 디지털 공간은 일반 지성을 사유화하여 지대를 추출하는 약탈의 장으로 변모했다. 지젝이 구조적 폭력이라고 명명한, 눈에 보이지는 않는 폭력이고 전쟁이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 폭력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안팎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 트럼프 시대의 미국이 견본이다. 지젝의 폭력론은 이렇듯 눈에 보이는 폭력과 보이지 않는 폭력을 망라해서 폭력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갖게 한다. 지금 <폭력>을 다시 읽는 일은 지젝이 제시하는 폭력의 삼각 구도—주관적 폭력, 상징적 폭력, 구조적 폭력—를 2026년이라는 좌​표 위에서 다시 배열하려는 시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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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9년 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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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의 <폭력>(21세기문화원, 2026) 개정 번역판이 나온다. 초판은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로부터 15년만이다(지젝의 원서는 2008년에 나왔다). 개정판에 붙인 서문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지젝이 이 책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공리는 단순하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폭력적’이라고 인지하는 바로 그 배경, 곧 ‘비폭력적 정상 상태’야말로 가장 잔혹한 객관적 폭력이 작동하는 장이라는 사실이다. 주관적 폭력이 평온한 수면 위에 던져진 돌맹이라면, 객관적 폭력은 그 수면 자체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압력이다. 우리가 뉴스 속의 가시적 폭력에만 매혹되는 한, 그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은폐된다. 지젝의 폭력론을 다시 읽는 것은 가시적 폭력을 우회하여 그 배후의 구조를 식별하려는 하나의 인식론적 훈련을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지금 시점에서 이러한 시작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오늘날의 국제 정세는 폭력에 대한 지젝의 문제 설정이 단순한 철학적 도발이 아니라,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임을 보여 준다. 이를테면 2025년 말 러시아가 발표한 ‘오데사 회랑’ 문제를 복기해 볼 수 있다. 일부 언론은 이를 러시아의 완화 조치나 인도주의적 개방으로 보도했지만 지젝은 칼럼에서 그 명칭 자체가 수행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주목한다. 공해상에 설정된 이 ‘회랑’은 실질적으로는 식량 유통을 특정 권력의 통제 아래 두는 장치이며, 그것을 ‘개방’이라 부르는 행위는 권력의 행사를 은폐하는 언어적 장치일 따름이다. 이때 폭력은 더 이상 총칼을 동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통 경로와 시스템의 조건 자체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구조적 폭력으로 탈바꿈한다. 인도주의라는 외양은 오히려 인도주의조차 무기화될 수 있음을 시사할 뿐이다.

​기술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상징적 폭력도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생성형 AI와 거대 테크기업들은 온라인에 축적된 인류의 집단적 지식, 곧 ‘일반 지성’을 포획하여 지대 추구의 자원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사유는 점차 데이터의 형태로 환원되고, 해석과 판단의 기능은 알고리즘으로 외주화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매끄러운 인터페이스는 바로 이 상징적 거세를 은폐하는 표면이다. 우리는 지금 ‘이해 없는 지식’이 증식하는 시대, 다시 말해 정신 자체의 조건이 근본적으로 변형되는 국면에 들어서 있다. 사유의 주체가 사라진 자리에 확률적 예측만이 남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징적 폭력의 상황이다.

​정치적 차원에서는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새로운 유형의 권력이 법과 규범의 수호자가 아니라 그것을 외설적으로 전유하는 주인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그는 거짓말과 모욕을 통해 지지자들과 일종의 향유를 공유하며, 규범의 밑바닥에 잠재해 있던 욕망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급기야는 네타냐후의 이스라엘과 합작한 이란 전쟁을 통해서 광기적 폭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우리 세계는 가장 중증의 광인이 통제권을 장악하고 의사 행세를 하는 정신병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지젝의 진단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진실은 이러한 우파 포퓰리즘의 득세가 단순히 대중의 무지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히려 경제적·구조적 폭력을 방치한 채 도덕적 우월성에 안주했던, 지난 시기 자유주의적 정치의 한계가 역전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지젝은 진작에 ‘종말의 시대에 살기’라고 표현했는데, 종말은 더 이상 비유나 수사가 아니다. 우리가 이미 ‘자정 이후’의 시간 속에 들어와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다가올 파국을 예견하는 단계에 있지 않다. 오히려 파국의 내부에서 그것을 사유해야 하는 조건에 놓여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사태를 성급히 해결하려 하기보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후퇴하는 것. 『폭력』과 함께 우리가 시도해 볼 수 있는 인식의 지연, 인식을 위한 지연이다. 그러나 이 지연은 무력함이 아니라, 대타자의 보증이 사라진 시대에 조건을 재구성하기 위한 전제다. 진정한 의미의 ‘행위’는 바로 그러한 조건에서만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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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6-04-0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판을 중고로 구해놓고 읽지 않았는데, 그냥 개정판을 구해야겠군요...
 

칼 세이건(1934-1996)의 <코스모스>(1980)를 강의에서 읽는다(그러고 보니 올해가 세이건 사후 30주년이다. 관련한 책이 나올 수도 있겠다).45년 전에 나온 학원사판(1981)으로 처음 읽었던 것 같다. 두툼한 책을 다 읽진 못하고 독후감을 썼던 기억이 있다. 후에 나온 사이언스북스판(2004년)을 갖고 있지만 이번에 강의차 새로 구입했다. 올 2월말에 찍은 121쇄다. 여전히 과학베스트셀러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기야 1980년 출간 이후 전세계적으로 4000만부 이상 판매된 걸로 추정되는, 교양과학서 최대 베스트셀러다.

강의에선, 3회에 걸쳐 나눠서 읽기에 전13장 중 4장까지 먼저 읽고자 했으나 오늘 강의는 2장을 읽던 중에 끝났다. 아무래도 칼 세이건의 생애와 <코스모스> 출간의 의의 등 다뤄야 할 아이템이 많아서 예견했던 바다. 홍승수판으로는 처음 읽는 셈인데 대부분의 문장이 무난하게 읽힌다. 그럼에도 앤 드루얀에게 바치는 헌사를 포함해 몇 문장은 오역이거나 부정확한 번역이어서 께름직했다. 121쇄를 찍도록 교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놀랍다.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약 600년 동안 인류를 우주의 바다로 이끈 지적 모험을 잉태하고 양육한 곳이다. 그러나 그 대리석 도시의 위용과 영광의 흔적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피지배층이 느꼈던 배움에 대한 두려움과 그들이 겪어야 했었던 지배층으로부터의 억압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로 옛 알렉산드리아의 영광은 대중의 기억에서 거의 완전히 지워지고 말았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지극히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다. 번성 초기에는 마케도니아 병사가, 좀후대에 와서는 로마의 병사들이 우글댔다. 알렉산드리아의 전성기에는 이집트의 사제, 그리스의 귀족, 페니키아 선원, 유대인 상인, 인도와 사하라 사막 남쪽의 지방에서 온 아프리카 방문객 같은 다양한 사람들이-노예 계층의 막대한 인구를 제외하고 대체적으로 같이 어울리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았다.˝(55쪽)

1장에서 알렉산드리아에 대해 언급한 부분(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학자들 얘기로 넘어간다). 세번째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Oppression and the fear of learning have obliterated almost all memory of ancient Alexandria.˝

˝피지배층이 느꼈던 배움에 대한 두려움과 그들이 겪어야 했었던 지배층으로부터의 억압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로 옛 알렉산드리아의 영광은 대중의 기억에서 거의 완전히 지워지고 말았다.˝

당장의 비교에서 알 수 있지만, 짧은 원문을 길게 풀어서 옮겼는데(상당한 의역이다) 애꿎게도 뜻은 정반대가 되었다. ‘억압‘과 ‘두려움‘의 주체를 잘못 보았기 때문에 빚어진 오역이다. 번역은 억압의 주체(지배층)와 두려움의 주체(피지배층)를 분리했는데, 원문에 의해 지지되지 않을 뿐더러 역사적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직역하면 ˝권력의 억압과 배움에 대한 공포가 고대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거의 모든 기억을 말살해버렸다.”가 될 텐데, 여기서 억압은 권력의 억압일 터이고 공포는 피지배층의 배움에 대한 지배층의 공포일 것이다.(기록에 따르면 잦은 내전과 화재, 종교적 불관용이 도서관 파괴의 원인이었다).

고대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세이건의 이어지는 서술은 길지 않으면서도 예리하며 음미해볼 만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우리가 잃어버린 건 도서관만이 아니다. 그 도서관을 낳은 도시, 하나의 세계, 하나의 문명이다. 석기시대 운운하며 야만적 권력이 폭주하는 즈음에 다시금 ‘사라진 도서관‘을 애도한다. 알렉산드리아에 새로 건립됐다는 도서관도 언젠가 들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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