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그린비, 2010)은 '3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놓기도 했고 알라딘에서야 따로 소개가 필요없지만, 저자 인터뷰기사를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 '우리 몸에 맞는 철학'이란 문제의식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경향신문(10. 03. 02) “동서양철학도 우리 몸에 맞아야”  

소장 철학자 강신주씨(43)는 철학자이면서도 적지 않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대학에서의 공식 직급은 ‘시간강사’이지만 강단에 얽매이지 않는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강연, 동서양 철학사상을 끌어다가 일상의 현실에 대입시킨 저술로 그는 인문학, 특히 철학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겐 꽤나 유명한 저술가다.

 

강씨가 최근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이라는 대담한 부제가 달린 <철학 vs 철학>(그린비출판사)을 출간했다. 단독 저서로는 14번째의 책이다. 이 책은 본문만 820여쪽, 인명사전·개념어사전·더 읽을 책 등 부록을 합하면 900쪽이 넘는다.   

철학사의 고전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 펑유란(馮友蘭)의 <중국철학사>를 서가에서 밀쳐버린다는 목표에서 출발한 <철학 vs 철학>은 구성부터가 독특하다. 1부 서양편, 2부 동양편으로 나누어 사물의 본질·행복·사유재산·사랑·언어·윤리·깨달음 등 56개 주제를 세우고, 해당 주제에 서로 대립적인 시각을 보인 동서양 철학자 112명을 등장시켰다. 각 장은 해당 주제에 대한 문제 제기에 이어 2명의 철학자를 소개하고, 마지막에는 강씨의 해설과 비평으로 구성돼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도 되고, 끌리는 주제부터 뽑아서 읽어도 된다.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지난 20년 동안의 모든 것을 이 책에 쏟아부었다는 강씨. 지난달 26일 그가 기획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출판기획집단 ‘문사철(文史哲)’ 사무실에서 만난 강씨는 두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개념어사전을 만드느라고 20일 동안 컴퓨터에 매달려 있었더니 탈이 나고 말았습니다. 안과에 갔더니 결막염이라고 하더라고요.”

한국의 철학계에 던져지는 비판 가운데 흔한 것이 저자는 없고, 평론가·수입상만 넘쳐난다는 것이다. 강씨 역시 그 비판에 동조했다. “외국의 사상을 수입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옷을 수입한다면 긴 곳은 자르고, 짧은 곳은 이어서 우리 몸에 맞게 해야 하는데 선배들은 긴 옷을 그대로 입고 다녔어요. 오히려 옷을 건드리면 안된다고 했죠.”

강씨는 <철학 vs 철학> 역시 “평론가적 글쓰기의 완결판”이라고 했다. 하지만 20년 공부의 매듭을 짓고 새로운 공부의 출발점으로 삼은 이 책에서 동서양 철학을 ‘우리의 것’으로 재창조하는 가능성을 탐색했다. “신채호 선생이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된다’고 개탄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을 빌리자면 서양철학 혹은 서양철학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서양철학 혹은 우리의 동양철학이 되어야 합니다.”

강씨는 이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오히려 철학의 주변부에서 살아온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했다. 강씨는 책의 서두에 “우리는 서양철학의 중심지도 아니고 동양철학의 중심지도 아닌 제3의 공간에서 살아왔다. 이런 악조건이야말로 우리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제3의 시선으로 인류의 철학사를 다시 조망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라고 썼다.

강씨가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는 자유와 희망, 미래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고 삶에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철학이다. “철학은 인간에게 미래와 희망을 심어주는 부류와 우울하고 체념하게 만드는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양쪽을 모두 보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논쟁을 하도록 함으로써 전자를 제 위치에 복원시키고자 했습니다.”

책을 집필하는 동안엔 사흘 글을 쓰고 하루는 등산을 한다는 강씨는 “<철학 vs 철학>의 에필로그까지 쓰고 나니 허탈감과 함께 ‘이제 뭘하지?’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고 말했다. 엄살이 섞여 있는 듯했다. 그의 머리와 몸은 이미 올 여름 1차분이 출간될 <제자백가> 시리즈로 옮아가고 있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을 12권으로 총망라하는 큰 작업이다.(김재중기자) 

10. 03. 01. 

 

P.S. 저자의 책이 14권이라고 하는데, 내가 둘러본 건 절반쯤 되는 듯싶다. 제일 처음 읽은 건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태학사, 2004)으로 저자가 장자 철학 전공이며 대단히 활달한 문제의식과 문체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속되게 말하면 그는 '장(자)빠'이고 '노(자)까'이다). 연이어 읽은 게 <장자 & 노자>(김영사, 2006)이고,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그린비, 2007)은 출판사의 의뢰로 출간 이전에 읽어본 기억이 있다.  

 

저자는 <공자 & 맹자>(김영사, 2006), <회남자 & 황제내경>(김영사, 2007) 등의 책도 썼는데, 두 사람을 대조시키는 아이템은 이 시리즈를 쓰면서 착안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전환점이 아니었을까 싶은 책은 <철학, 삶을 만나다>(이학사, 2006)이다. 평이한 제목 때문에 별로 주목하지 않다가 나는 나중에야 장서에 포함시키게 됐다.  

 

실제로 <철학, 삶을 만나다>란 저작 자체가 대중 강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듣기에 저자는 대학 바깥에서 오히려 더 유명한 철학자이다. 그런 강의와 연계하여 낸 책들이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네시스, 2009),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동녘, 2010) 등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달에도 그의 강의는 아트앤스터디 인문숲(http://www.artnstudy.com/inmoonsoop/Lecture/default1003.asp?lessonidx=off_sjooKang02) 등에서 접할 수 있다. <제자백가> 시리즈의 일부도 포함하고 있는 강의인 듯하다.  

P.S.2. 한편, 인터뷰 내용에서 흥미를 끌면서 핵심적인 대목이라 생각되는 것은 이런 주장이다.   

"우리는 서양철학의 중심지도 아니고 동양철학의 중심지도 아닌 제3의 공간에서 살아왔다. 이런 악조건이야말로 우리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제3의 시선으로 인류의 철학사를 다시 조망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서양철학도 아니고 동양철학도 아닌 '제3의 공간'과 '제3의 시선'이 과연 가능한지, '서양철학' '동양철학'이란 이분법이 유지될 수 있으며 실체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여하튼 저자의 작업구도는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은 짐작에 연세대 철학과의 스승인 박동환의 계보를 따른 것이다. 박동환 교수는 단촐하게도 <안티호모에렉투스>(길, 2001),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고려원, 1993), <서양의 논리, 동양의 마음>(까치, 1987) 등 세 권의 저서만을 남겼는데, 읽은 지 오래됐지만 나로선 서양/동양, 논리/마음이라는 이분법이 투박하게 여겨졌고, <안티호모에렉투스>에서 주창하는 '3표이론'이 괴이하게 생각됐다.  

하지만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을 보면 저자는 21명의 한국 시인들과 짝지은 철학자들 가운데 한국인으로는 '오직 박동환 한 명'만을 포함시키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20세기에 철학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라곤 박동환 한 명뿐이라는 뜻도 된다(<철학 VS 철학>의 마지막 장은 '한국에서 철학은 가능한가?'란 주제로 '박종홍과 박동환'을 대질시킨다. 박종홍은 소위 '서울대 철학'의 태두다). 이를 '입증'하듯 <안티호모에렉투스>에서 한 대목을 인용했다.  

서양철학에 대해서도 동양철학에 대해서도 한국 사람은 다만 관망하고 모방할 뿐인 그래서 만들지 못하는 주변의 제삼자다. 오늘 벌어지는 현대 철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주변에 놓인 자에게는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주변에 놓인 자는 일시적으로 실현된 패권의 진리가 아니라 그것이 모두 무너져 흩어진 다음에도 남아 있을 원자의 진리를 구한다. 패권의 진리를 거부하는 그는 생명의 원자, 다름 아닌 모나드 곧 생명 개체의 깊이에 새겨진 억 년의 경험과 기억을 감각에 다가오는 영원의 접점, 현재에서  재현한다.

철학에서 한국인은 제삼자이고 주변인이다, 그는 패권의 진리를 거부한다, 정도가  내가 읽을 수 있는 문장이고 나머지는 요령부득이다. 이 정도면 나는 철학의 경지를 넘어선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풀이는 이렇다.  

"박동환은 한국인이 항상 주변에 놓여 있는 제3자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에 따르면 동양철학을 대표하는 중국철학이 한반도에 들어왔을 때 한국인은 그것을 관망하고 모방할 뿐이었습니다.(...)그렇지만 박동환은 중국철학과 서양철학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 이면에는 더 심오한 것이 있었다고 강조합니다. 일시적으로 번갈아가며 패권을 잡은 역사적 진리들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될 생명의 논리를 한국인들이 따라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박동환은 한국인이 가진 집요한 생명력의 기원을 찾습니다. 모든 도시의 철학, 모든 문명의 패권이 소멸해도 한국인은 도시 바깥의 논리, 즉 생명체가 가진 근원적인 삶의 논리를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으로 대변되는 도시의 논리는 문명이 붕괴되었을 때 꿈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박동환에 따르면 한국인의 삶과 사유 속에 흐르는 생명의 논리는 문명이 붕괴되어도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410쪽) 

'철학적 시읽기'란 타이틀에 걸맞게 시적인 문장으로 구성돼 있지만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다(나는 한국인이 아닌가?). 열심히 등산을 하여 저자와 같은 수준의 '고도감'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아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역시나 연세대 철학과를 나온 김상봉 교수 또한 <나르시스의 꿈>(한길사, 2002)에서 20세기의 한국인 철학자로 함석헌과 함께 박동환을 꼽은 바 있다. 철학자 박동환에 대해 호의적인 편인데, 그럼에도 <안티호모에렉투스>에 대해선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오래 전 기사를 옮겨놓는다. 제삼자이자 구경꾼의 눈으로 보기에 철학자들의 세계는 오묘하고도 오묘하다...   

교수신문(02. 06. 03) 철학자들의 논쟁이 아름다운 『안티호모에렉투스』

작년 초반에 아무런 장식도 없고 저자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안티호모에렉투스’라는 철학책이 발간됐다. 저자는 박동환 전 연세대 교수(철학)로 저자가 바라보는 독특한 개념의 철학사가 집약된 책이다. 지금 이 책이 잔잔한 화제를 낳고 있다. 아니 화제라기보다, 이 책을 둘러싼 팽팽한 긴장의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지난 22일 문예 아카데미에서 박동환 교수와 김상봉 교수가 바로 이 책 ‘안티호모에렉투스’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박 교수의 저작에 김상봉 교수가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것.

3표 이론으로 정리한 세계 철학사
박 교수 스스로 정립한 평생의 철학적 물음은 과연 동양(철학)은 서양(철학)과 다른 논리구조를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집약될 수 있다. 서양철학과는 다른 동양의 논리구조가 무엇인지, 더 나아가 중국철학과도 다른 한국인의 사유구조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평생의 과제였던 것이다. 박 교수는 이런 사유를 집약해 ‘3표’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세계 철학사를 재규정했다. 여기서 ‘표’란 한 문화에서 “명백한 지향의 표적 또는 탐구의 공통 준거가 되는 것”을 말한다.

거칠게 3표 이론을 요약하자면, ‘1표’는 고대 그리스에 샘을 두고 있는 서양철학을 ‘2표’는 고대 중국에서 연원한 중국철학을, ‘3표’는 “철학사 없는” 유럽과 중국 이외의 지역 사람들의 사유를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서양문명의 모임살이의 형식은 ‘正體爭議’이며, 중국철학의 그것은 ‘集體不爭’이다. 정체쟁의란 동일성을 보존하고 모순을 배제함으로써 존재의 자기 일관성과 동일성을 보존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서양철학의 근본 기반이 된다. 집체부쟁이란 동일성의 원리와 반대로 모든 개별자의 존재 의미가 개체가 놓여 있는 배경인 “분리 불가능한 집체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런 개념 규정을 통해 동일성의 법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호모에렉투스’라 불리는 고생인류가 등장한 시기부터 이미 인간의 의식 속에 자리 잡았다고 주장한다. 이쯤 되면 이 책의 낯선 제목도 이해가 될 듯 하다.

박 교수의 論究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철학과는 다른 한국의 철학을 개념화하고자 한다. 한국 철학은 3표로 분류되는데, 여기서 3표의 존재방식은 바로 ‘붙음살이’이다. 이는 자연생태의 존재방식으로 이들에게는 해답의 논리는 없으나 ‘물음의 논리’가 있다. 세계를 동일성의 법칙이나 相反常性의 논리로써 파악하는 대신 이들은 세계를 하나의 암호상자로 이해하면서 끊임없이 그 “암호상자로부터 오는 신호음에 귀를 기울인다.” 철학이 일찍 성립한 서양 혹은 중국과는 다르지만, 그 이외 사람들에게도 삶의 양식이나 삶의 전략이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철학이란 ‘생명형태’의 한 가지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양심과 절망 사이의 긴장 부재
김상봉 교수 역시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가를 탐구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고 또 그를 위해서는 우리와 타자의 차이를 밝혀야 한다는 점에는 박 교수와 견해를 일치한다. 그러나 박 교수의 논의에 대해 “주체의 개념을 무책임하게 포기했고, 타자의 개념에 문제가 있다”라고 비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안티호모에렉투스’의 문제는 주체뿐 아니라 타자도 없다는 데 있다는 것. 이런 문제 때문에 우리 삶의 양식을 도시 문명 밖에 두는 비약을 범했고, 비판의 대상으로 떠오른 인간의 자기중심주의가 ‘왜’ 문제임을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의 문제제기는 더욱 근본적인 곳을 향한다. “박 교수의 이전 사유에는 ‘절망의 철학’과 ‘양심의 논리’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안티호모에렉투스’에는 더 이상 양심과 절망 사이의 긴장된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오직 절망의 의식만이 과도하게 극단화돼 있고, 양심은 자연적 필연성에 짓눌린 절망의 의식 아래서 철저히 침묵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저자에게서 실천적인 측면이 사라지고 형식적인 논의만 남는 것이 아니가하는 우려다.

이런 논평자의 해석에 대해 박 교수는 3표에서 발생하는 타자 이해방식을 친절하게 다시금 설명했다. “3표의 타자 대응 또는 방식은 생명의 고유한 탐구 활동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개체들은 그 출연 시점으로부터 지금까지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힘, 타자에 대해 도전하며 그것을 통제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근본적으로 대결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으며 인식할 수 없는 힘 [ ]으로서 받아 들인다.” 즉 3표에 타자 인식이 없다는 것은 잘못된 비판이라는 설명이다. 인간 삶의 실천적인 측면을 결코 간과하고 있지 않다는 대답도 저자는 빠뜨리지 않았다. 저자인 박 교수는 윤리·도덕의 실천에 앞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려는 시도를 앞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개념화 작업을 우선하고 그 이후 실천적인 부분을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박 교수의 입장이다.

철학 뿐 아니라 모든 학문에서 학문의 실천적 책임과 이론화 작업의 간극은 주요한 화두로 인식돼 왔다. 박동환 교수와 김상봉 교수의 논쟁도 이런 측면에서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덧붙인다면, 퇴임 선배 철학자가 세대와 위계를 뛰어넘어 젊은 철학자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자기 물음을 발전시켜나가는 이 광경이 우리 학계의 논쟁 문화를 한 계단 더 성숙하게 만드는데 ‘아름다운’ 기여를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속적인 논쟁을 통해 자기 사유의 주름을 다듬겠다고 밝힌 박 교수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논의를 재구성할 것인지 궁금하다.(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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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3-02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동환은 근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보며 알게 됐는데,문장의 난삽함이 요설의 지경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현대한국철학사를 말할 때 김영민과 그의 스승인 윤노빈을 꼽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노빈의 저서가 그의 기구한 인생 때문에 한 권만 우리에게 남아있지만 그 책이 주는 무게감은 소홀히 여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연세대 철학과 출신들에 너무 후한 점수를 주는 것 같기도 하구요. 위 책에서 김상환 교수를 격찬하던데, 김상환도 연세대 출신이죠.

로쟈 2010-03-02 23:03   좋아요 0 | URL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김상환 교수의 책은 저도 좋아합니다...

비로그인 2010-03-02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쪽에 우석훈이 있다면 철학쪽엔 강신주라고 해야겠네요. 그 다산성은 정말 오묘합니다. 제가 아는 로쟈님 광팬이 문학쪽에서 로쟈님도 제몫하시길 바란다네요. 후끈한 찜질방 열기만 못해도 끈끈하게 성원을 보탠다고.

로쟈 2010-03-02 23:10   좋아요 0 | URL
끈끈한 압력 같은데요.^^;

mirror 2010-03-02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철학계의 문제는 수입상과 평론가들만 넘쳐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수입과 평론조차도 제대로 못해왔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게으른 학자들은 아예 공부를 안 하고, 좀 부지런하고 재주가 있는 학자들은 한가지 분야에 천착할 생각을 하지 않고, 대가인양 여러가지 잡다하게 건들다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의 상황이었습니다. 90년대 이후에서야 기본에 충실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죠. 이것은 철학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 것입니다. 거의 모든 인문사회과학들이 다 그러하죠. 우리는 이제서야 기본을 조금이나마 따라가고 있는데, 박종현 선생의 플라톤 번역이라던가, 백종현 교수의 칸트 번역이 그런 실례들입니다. 고전들의 번역조차 제대로 안 되어 있는데, 무슨 독창적 철학입니까? 아마도 동양철학의 번역이 서양철학의 번역보다 상황이 더 낫다고는 말 못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서양 철학을 통합한다고요? 희망과 미래를 주는 철학이라고요? 아마추어 문필가들이나 하는 소리들입니다. 대중들을 상대로 글을 쓰는 사람은 그에 맞게 말하면 됩니다. 대중용 작가가 대가인양 떠벌이는 것은 과대광고입니다. 김용옥의 과오는 대중작가이자 엔터테이너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자신이 아주 대단한 철학자인양 과대광고를 했다는데 있습니다. 김용옥처럼 동양철학자들은 가끔 망상에 빠지는 것이 특기인가 봅니다. 자신의 본분에 맞는 광고멘트를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박동환 교수는 연대교수였고, 김상봉 교수도 연대에서 학부 석사까지 했습니다. 당연히 재학 당시 박동환은 연대 교수였죠.
박정희와 전두환의 우리식 민주주의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김일성의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것도 있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식'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 중 긍정적 평가받는 것이 있나요? 특히 이념이나 제도 중 그런 것이 있기나 합니까? 기술적으로 우리 상황에 맞추는 것 이외에 이념이나 제도를 우리식이라는 서술어를 붙여서 수정한 것은 대개 부정적인 결과만을 낳았습니다. 계파 보스 몇몇이 모여서 총리를 결정하는 일본식 민주주의란 열등한 민주주의 형태일 뿐,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식' 철학이라는 것이 왜 있어야 하나요? 기원 다시 말해 '원조'라는 것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것은 한국사람들 특징인데, 이것은 부정적인 결과는 낳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철학에서 우리식 찾는 것은 반도체와 자동차에서 다른 나라를 앞지르듯이 다른 나라에서 그런 상품 내놓으니까, 우리도 내놓아야 한다는 경쟁논리까지 더해진 것 같아, 더욱 괴이합니다. 철학과 이념에서마저 우리식을 즐겨찾는 이 집착의 끝이 무엇이 될지 참으로 걱정입니다.

로쟈 2010-03-02 23:14   좋아요 0 | URL
저는 철학 문필가의 대중적 글쓰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백종현 교수의 말대로 전문철학은 '소수'가 하는 것이니까요. 다만, 대단한 '한국철학'이 가능할 것처럼 자부심을 가질 만한 단계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일단 '한국어'가 그러한 철학적 사유를 감당할 수 있는지, 그런 한국어를 우리가 갖고 있는지 의문이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