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강의에서 읽은 대목이다. 영문학 연구의 발흥 과정을 짚으면서 문학은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라는 걸 이글턴은 웅변한다. 사실 따져보면 이글턴의 책이 여느 문학이론입문서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이 영문학 연구의 발흥(1장)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오래전에 처음 읽을 때는 건너뛰기도 했던 장인데 지금은 가장 재미있게 읽게 되는 장이다.

이글턴은 영국이 산업화된 근대사회로 진입한 이후(19세기 중반 이후), 종교가 사회적 구심점(사회적 접합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문학이 그 역할을 대신하도록 요청받았다고 설명한다. 영국은 병들었고 영문학이 영국을 구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것이 영문학이 떠맡은 이데올로기적 임무다. 근대영국이 근대의 표준이 된 것처럼(프랑스대혁명 이후엔 프랑스와 지분을 나눠갖는다) 영문학은 근대문학의 기준이 된다. 19세기 영문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다(그런 생각에서 봄학기부터 1년간 영문학 다시 읽기를 진행한다. 제인 오스틴부터 D.H. 로렌스까지).

문학은 여러 면에서 이러한 이데올로기사업에 적합한 후보자였다. 문학은 개방적이고 ‘교화력있는‘ 분야로서 정치적 아집과 이데올로기적 극단주의에 효능있는 해독제를 제공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문학은 내전이나 여성의 억압이나 영국 농민층의 토지로부터의 축출과 같은 자질구레한 역사적 사건들보다는 보편적 인간가치들을 다루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에 대한 더 높은 통제권과 인간다운 삶의 조건에 대한 노동계급의 사소한 요구들을 우주적 원근법 안에 놓는 데 봉사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운이 좋으면 노동대중으로 하여금 영원한 진리와 미를 고상하게 명상하는 가운데 그러한 사소한 문제들을 망각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 영국 교사들을 위해 만든 빅토리아시대의 한 편람에 쓰인 대로 영문학은 "모든 계급들의 공감과 동포의식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빅토리아기의 어떤 작가는 문학이 "근심과 일과 언쟁으로 찬 인간의 천한 생활에서 대하는 소란과 소동, 소음과 혼란"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이 만나 공동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청명하고 빛나는 진실의 영역"을 열었다고 말한다. 문학은 하층계급을 하나 이상의 관점 즉 그들의 것 외에 고용주들의 관점을 인정하도록 설득하면서 다원주의적으로 사고하고 느끼는 습관이 그들의 몸에 배도록 할 것이었다. 문학은 그들에게 부르조아문명의 도덕적 부를 전달할 것이며 중산계급이 성취한 업적들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줄 것이었다. 그리고 독서는 본질적으로 고립되고 관조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문학은 하층계급이 지닌 집단적 정치행동에로 이르는 불온한 경향을 억제할 것이었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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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바다‘의 둘째권 <달리는 말>을 강의에서 읽었다. <봄눈>의 기요아키가 죽은 지18년 지난 시점인 1932년, 유일한 친구였던 혼다 시게쿠니는 중년(38세)이 되었고 항소원(지금의 고법) 판사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검도 시합장에서 이누마 이사오라는 청년을 보게 되는데, 기요아키 집안의 서생이었던 이누마 시게유키의 외아들이자 <달리는 말>의 주인공이다. 이사오가 기요아키의 환생이라는 사실을 혼다가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연작의 궤도로 진입한다.

환생이라고는 하지만 이사오는 기요아키와 달랐다. ˝이누마 소년에게는 기요아키의 아름다움이 결여된 대신 기요아키에게 결여돼 있던 용맹이 있었다.˝ <봄눈>이 기요아키가, 황족과 결혼하게 된 사토코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면, <달리는 말>은 사랑에 눈도 뜨기 이전의 이사오가 <신풍련사화>라는 책에 현혹돼(신풍련은 1876년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금지하는 페도령에 반발해 메이지 정부에 맞섰던 무사 무리다) 쇼와의 신풍련을 시도하는 이야기다.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은 이사오가 학생들로 구성된 조직을 만들어 백색테러(요인 암살)를 기획한다.

인용문은 이사오가 <신풍련사화>에 빠져 현실을 오판할까 염려한 혼다가 그에게 보낸 편지다. 흥미로운 건 작가 미시마가 혼다와 이사오 가운데 어느 편에 서고 있는지다. 검에 대한 믿음으로 새로운 봉기를 기획하는 이사오의 모습에 <우국>의 작가 미시마가 어른거리지만 동시에 이사오에게 ˝순수성과 역사의 혼동˝을 경계하라고 충고하는 혼다 역시 미시마의 분신적 인물이다(이 충고를 이사오는 냉소적으로 받아들인다). 미시마의 우익 성향을 표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지목되지만, <달리는 말>은 이렇듯 서로 충돌하는 입장도 대조해서 보여준다. 미시마-이사오와 미시마-혼다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서로 다른 관점의 말을 동시에 제시하기(비록 미시마의 최종 선택은 이누마 이사오적인 것이었지만). 이것은,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경우가 그렇듯, 작가의 미덕이 아니라 소설이란 장르의 미덕이다...

젊은이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순수성과 역사의 혼동입니다. <신풍련사화>에 경도된 당신에게서 제가 위험을 느낀 것도 그 점입니다. 어디까지나 역사는 전체이고 순수성은 초역사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쓸데없는 노파심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당신에 대한 저의 충고이자 훈계입니다. 어느새 나도 젊은이를 보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르치려 드는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물론 이건 당신의 명민함을 믿기 때문이며, 아무런 기대도 없는 청년에게 이렇게 장황한 충고를 하진 않을 겁니다.
당신이 검도 시합에서 보여 준 숭고한 힘, 당신의 순수함과 정열에는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으나, 동시에 나는 당신의 지성과 탐구심을 한층 신의(信倚)하므로, 당신이 학생으로서 본분을 잊지 않고 연찬에 힘써 나라에 유용한 인재가 되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사카에 오게 되면 꼭 찾아 주세요. 언제나 환영합니다.
또한 훌륭한 아버지가 계시니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만, 혹시 마음에 남는 문제가 있어 상담할 사람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 응할 테니 주저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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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작가 츠쯔젠의 대표작 <어얼구나강의 오른쪽>(2005)을 강의에서 읽었다. 중단편 대상의 루쉰상을 세 차례 수상한 작가이니(유일하다는 것 같다) 단편에도 일가견이 있는 작가이지만 아무래도 나는 장편소설의 성취에 더 관심이 있는데 마오둔상(2008년) 수상작으로서 <어얼구나>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는 작품이다.

˝나는 어원커의 여인이다. 우리 부족 마지막 추장의 여인이다.˝라는 소개로 시작하는 긴 이야기가 아래 인용문으로 마무리된다. ‘나‘는 어원커족의 한 씨족/부족(우리렁)의 거의 한세기에 걸친 역사의 체험자이자 목격자이다. 마르케스 소설의 ‘마마 그란데‘ 같은 여성(<백녀의 고독>에서의 우르슬라). 어원커족은 순록을 치는 산악유목민으로 이들이 사는 지역이 어얼구나강의 오른쪽(우안)이다(이 강의 좌안은 러시아 땅으로, 어원커족, 러시아어로는 에벤키족이 어얼구나강 양안에 산다. 어얼구나강의 러시아어 이름은 아르군강).

지리적/공간적으로는 소수민족 서사에 해당하지만 어원커족 이야기는 역사적/시간적으로 농업혁명(정주화) 이전 단계의 삶을 재현하는 의미가 있다. 국가라는 정치공동체, 상업시장 혹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등장하기 이전 단계의 세계. 가라타니 고진의 용어로는 호수적 교환양식이 지배적이며, 신앙면에서는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애니미즘과 대립하기 이전 단계의 샤머니즘, 성경에서라면 에덴 신화 이전의 세계)이 공존하는 세계다.

소수민족문학으로서 <어얼구나>는 정착민으로 편입되면서 사라져가는 소수민족의 민족지를 대신한다. 그것이 이 소설의 특수성이라면, 다른 한편으로 <어얼구나>는 보편적인 인류사의 첫 단계를 재현한다. 그것은 ˝하늘나라와 인간세상이 구분˝되지 않는 세상이었다. <어얼구나>를 계기로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 하늘나라와 인간세상은 언제부터 구분(분리) 되었는가? 소수민족문학 범주 바깥에서 다시 읽게 되면, <어얼구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은폐하고 있는 본래적 삶의 모습을 엿보게 해준다.

달이 떴다. 하지만 둥그렇지 않다. 반달이다. 백옥처럼 휘황하다. 몸을 구부리고 있는 자태가 마치 물을 마시는 새끼 사슴 같다. 달빛 아래 산 바깥으로 난 길을 나는 우울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안차오얼이 다가와 나와 함께 그길을 바라본다. 그 길에 트럭이 남겨놓은 바퀴자국이 있다. 내 눈에 바퀴자국은 상처자국 같다. 갑자기 그 길 끝에서 흐릿하게 잿빛 그림자가 나타난다. 곧 순록의 은은한 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그 그림자가 우리 야영지와 점점 가까워진다. 놀란 안차오얼이 소리를 지른다.
"아테, 하모니카가 돌아왔어요!"
감히 내 눈을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방울소리가 점점 청아하게 들려온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본다. 달은 나를 향해 달려오는 흰 순록 같다. 고개를 돌려 가까이 다가오는 순록을 바라본다. 순록은 지상에 떨어진 반달 같다. 내 눈에서 눈물을 흐른다. 나는 더 이상 하늘나라와 인간세상을 구분할 수 없다. - P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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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를 강의에서 마저 읽었다. 대학 1학년때 김붕구 선생 번역본(문예출판사)으로 읽은 뒤 정명환 선생 번역본(민음사판, 1998)으로 두어번 읽은 듯싶다(아무래도 한주 강의에서는 소화하기 어렵고 두 주 이상이 필요하다는 걸 이번에 다시 확인했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4장 ‘1947년의 작가의 상황‘을 제쳐놓으면 핵심은 3장의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이다. 1장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2장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는 3장의 질문을 다루기 위한 빌드업 과정이다.

질문의 형식 때문에 흔히 앙가주망 문학론이 작가의 역할과 책임만 강조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사르트르가 작가의 자유만큼 강조하는 것이 독자의 자유이다(독자의 앙가주망이 빠진다면 작가는 헛바퀴만 돌리는 게 된다). 즉 문학적 소통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고매한 협약‘이며 문학은 둘의 공동 창조다. 그러한 조건하에서 ˝문학은 영구혁명중인 사회의 주관성˝이라는 명제가 도출되며 유효성을 획득한다(‘주관성‘은 김붕구 번역본에서 ‘주체성‘으로 옮겨졌다). 그에 답하는 우리의 질문. 우리가 지금 그런 문학을 갖고 있는가, 혹은 그런 문학을 갖고자 하는가?

그러나 문학이 자유의 이러한 상호보완적인 두 양상을 결합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작가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작가의 글을 읽게 될 독자 역시 모든 것을 변혁할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이 없어질 뿐 아니라, 모든 독재가 철폐되고 사회 기구가 늘 새로워져야 하며, 질서가 굳어지기 시작하면 부단히 해체되어야 하는것이다. 한마디로 해서, 문학은 그 본질상 영구혁명중에 있는사회의 주관성이다. 그러한 사회에서의 문학은 말과 행동의 이율배반을 지양(止揚)할 것이다. 하기야 문학이 행동과 똑같은 것이 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작가가 그의 독자에게 대해서 ‘행동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작가는 다만 그들의 자유에 호소할 따름이며, 그의 작품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독자가 무조건적 (無條件的)인 결심에 의해서 그의 작품을 자기의 것으로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자각을 하고 자기를 비판하고 변신해 가는 사회에서는, 글로 쓰인 작품은 행동의 한 본질적 조건, 즉 반성적 의식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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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의 마지막 대작 ‘풍요의 바다‘의 첫권 <봄눈>을 읽었다. <금각사>와 함께 일본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혔다는 작품(대외적으로도 미시마는 무라카미 하루키 이전 일본문학의 간판이었다. 다니자키와 가와바타보다도 더 많이 번역돼 더 많이 팔렸다). 다이쇼 초기를 시대배경으로 후작 집안의 미남 후계자 기요아키와 백작의 딸 사토코의 로맨스를 다룬 소설이다(사실 ‘소설‘이라기보다는 ‘로망스‘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다니자키의 ‘소설‘ <세설>과의 차이다).

사토코의 구애적 제스처를 무시하던 기요아키가 그녀가 황족과 결혼하기로 결정되자(천황의 칙허까지 떨어진다) 갑자기 ‘급발진‘하는 이야기. 이유는 절대적 불가능성에 매혹돼서다. 성장기를 같이 보낸 사토코가 한순간 금지된 여자가 되자 구애의 대상으로 탈바꿈한 것이다(기요아키는 비로소 사토코를 열렬히 사랑한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요아키는 열세살 때 메이지 천황 행차 행사에서 비전하의 옷자락을 들어주는 시동 역할을 하다가 우아한 아름다움에 매혹됐었다. 절대적인 불가능성의 매혹.

타협적인 세계의 서사로서의 소설은 이러한 매혹을 감당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봄눈>이 소설을 초과하는 이유다. ‘풍요의 바다‘ 4부작(결과적으론 미시마의 긴 유서다)을 완결지으면 미시마 자신이 한갓 소설가를 초과하게 된다. 그 자신이 절대적 불가능에 매혹된 또다른 기요아키, 아니 원본 기요아키였다.

기요아키에게 환희를 안긴 것은 불가능이라는 관념이었다. 절대적인 불가능. 사토코와 자신을 잇는 실이 예리한 날붙이로 끊어 버린 거문고의 줄처럼, 솟구치는 단현의 비명을지르며 칙허라는 빛나는 칼에 베여 버린 것이다. 그가 어린 시절 이후 오래도록 되풀이해 온 우유부단함 속에서 비밀스레 꿈꾸고 남몰래 바라 온 사태는 이런 것이었다. 옷자락을 들며 올려다본 봄의 흰 잔설 같던 비전하의 목덜미, 우뚝 솟은 채 접근을 거부하던 비길 데 없는 그 아름다움은 그가 품은 꿈의 발원지, 그가 지닌 바람의 성취를 똑똑히 예언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불가능성. 이것이야말로 더없이 뒤틀린 자신의 감정에 변함없이 충실해 온 기요아키가 스스로 초래한 사태였다.
그러나 이 환희는 어찌 된 일인가. 그는 음침하고 위험하며 무서운 환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에게 단 하나 진실한 것, 그것은 방향도 귀결도 없는
‘감정‘만을 위해 살아가는 일… 그런 삶의 방식이 마침내 그를 소용돌이치는 환희의 어두운 못 앞에 데려다 놓았다면, 남은 일은 그 못에 몸을 던지는 것뿐일 터였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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