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래의 소설 <Aloft> 의 주인공 제롬은 쉰아홉살 미국 남자다. 그는 여자친구를 걸고 필사의 테니스 시합을 제안한 연적 앞에 선 자신을 이렇게 생각한다.
"this fifty-nine-year-old idiot...killing himself on the court"
(오십 아홉의 바보같은 자식, 테니스 코트에서 죽으려고 작정한...)
제롬의 여자친구가 보기에도 이 두 남자의 테니스 시합은 철부지 소년들이나 벌일 충동적 기싸움에 불과했다. 그걸 제롬 스스로도 모르는 바 아니었겠지만, 그의 소년적 감성(또는 감정)이 그의 물리적 나이를 지배하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물리적 나이와 감성적 나이의 관계는 어떤걸까. 아직 채 스물이 못된 마일스란 청년에게 말하는 '나이 먹음'에 대한 제롬의 생각은 이렇다.
"You have to understand something here, buddy. You've got another twenty-five years before you're that age, so it's hard for you to fathom. But it's going to go quick. Before you even know it, you'll know up and suddenly your buddies will have beer guts and will be getting gray all over and they'll be talking about sex but not in great anticipation, but with dread."
(이걸 알아야되, 자넨 스물 다섯이 되기도 전에 또다시 스물 다섯살을 먹게 될꺼야. 스물 다섯살이 어떤 건지 그 깊이를 알기도 전에 말이지. 재빨리 가버리는 거라구. 그 나이를 채 실감하기도 전에, 어느 순간 나이를 더 먹고 자네 친구들이 술독에 빠지고, 머리카락 하얗게 덮히고, 여자얘기를 지껄여 대지만 뭔가 그럴듯한 여자관계를 가지지도 못한채 그저 벌벌떨기만 하는 거지)
"I'm not trying to scare you. That'll only be the surface. But what I'm really saying to you, Miles, is that, mostly, you won't change. At least not in the way you think of yourself. You'll stay in a dream, the Miles-dream."
(자넬 겁주자고 하는 얘기가 아냐. 이건 그저 맛뵈기에 불과해. 내가 진짜 해주고 싶은 말은 말야, 마일즈, 대체로 자네는 절대 변하지 않을꺼라는 말이지. 최소한 자네가 생각하는 어떤 모습으로는 말이야. 자넨 그저 환상, 그러니까 '마일스의 꿈' 속에 머무르게 될꺼라고)
"The Miles-dream. Maybe you'll have more than one. It's like this. You'll have an idea of yourself being a certain age, and for years and years when people ask you'll still think you're twenty-five, or thirty-five, or whatever age that seems right to you because that will be the truth of your feeling inside."
('마일스의 꿈.' 어쩌면 그 꿈은 하나 이상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런거지. 자넨 자네가 어떤 특정한 나이의 사람이란 생각을 갖게되는 거야. 몇년이 흐르고 또 흐른 후에, 사람들이 자네 나이를 물어봐도 자넨 여전히 자네가 스물 다섯이나, 아님 서른 다섯이라고 여기는 거지. 아님 그게 어떤 나이이든 그 나이가 자네에게 딱 맞다고 생각하는 거야. 왜냐하면 자네 마음속의 감정이 정말 그럴꺼거든)
물리적 나이 쉰 아홉의 제롬이 생각하는 그 자신의 감성나이는 서른 둘이나 서른 셋 쯤이다.
마일스가 제롬에게 묻는다.
"What, were you getting a lot of pussy back then?"
(그땐 많은 여자랑 놀아났던가 부지?)
"I wouldn't put it that way, exactly."
(그런 말을 하는게 아냐, 이놈아!)
"Yo, I was just kidding! I'm just fucking with you, man. But hey, you were happy, right?"
(에이~, 농담이야 아저씨~. 그저 장난 좀 해보려고 한거야. 그래도, 그땐 -제롬의 감성나이 서른몇 시절- 행복했다는 말이지? 그지?)
"Actually not really too happy, either."
(사실 별로 그리 행복하지 않았어. 그때도 말이지...)
이 소설은 여느 미국 환타지 소설이나 충격적 소재의 사실주의 소설과는 다르다. 특별한 소재도 없고 사건도 없다. 이 꽤 긴 장편소설을 이어가는 그럴듯한 소재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소설은 그 몇개의 소재들을 부추기기 위해 시시콜콜한 생각과 대화가 있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시시콜콜한 생각과 대화를 펼쳐 놓기 위해 사건들이 존재하는 식이다.
오십 아홉살 먹은 미국 남자가 생각하는 건 뭘까? 영웅? 범죄자? 청소년 희롱? 애정행각? 이 소설엔 이에 해당하는 그 어떤 내용도 없다. 제롬은 한국인 아내가 자살한 이후 오랜 세월동안이나 자기 아이들을 끔찍히 아끼며 돌보아준 여자친구 리타에게 청혼조차도 못하고 주저하는 남자다. 위로는 아버지도, 아래로는 딸과 아들에게도 그저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는. 충동적으로 경비행기 타는 법을 배우고 경비행기 훈련을 받은 첫날 충동적으로 경비행기를 사버린, 그런 아무 것도 아닌 남자다.
그런 제롬이 이야기하는 '나이 먹음'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절묘하게 사실적이다.
텍사스에서 오년을 살고 미국에 온지 육년째 되는 해 미시건으로 온 나는, 중학교때 절친 했던 친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애는 대학때 미국으로 와 시카고에서 변호사일을 하는 친구다. 같은 미국에 살아도 텍사스에서는 만나는 일을 꿈도 꿀 수 없었지만 미시건에 오니 시카고는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고 일년도 못된 사이 우린 벌써 세 번이나 만났다. 그애를 만나면 내 나이는 열 댓살의 소녀가 된다.
평소의 '꼼미의 꿈 나이' 인 '서른 살' 보다도 한참 어린 나이가 되어 버리는 거다. 그래서 시카고 그애 집, 그애의 아이들과 내 아이들이 시끄럽게 쿵쾅거리는 소리 사이를 비집고 그애가 만들어내는 음식 냄새며, 그애의 엄마다운 목소리가 외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거다.
오늘은 서재 이곳 저곳을 돌다, 시인 최승자의 신간을 평한 어느 서재지기의 글에서 이와 똑같은 내용을 발견했다. 최승자 시인도 제롬이나 나처럼 '승자의 꿈 나이'를 지니신거다.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 최승자, '참 우습다' 전문
사실, 이런 '꿈나이'를 갖고 사는 건 제롬이나 최승자나 나뿐만 아닐테다. 장담컨데, 서른이 넘어선 모든 이들일 것이다.
덧말: 알라딘에서 찾아 보니 한국 번역서로는 <가족1, 2> 로 출판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