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그렇게 적으니 뭔가 운동하는 기분이 든다(페이퍼 운동?). 자전거 타기의 즐거움을 다룬 책이 출간되었기에 나머지 책들도 덩달아 떠올려본 것인데, 로버트 펜의 <자전거의 즐거움>(책읽는수요일, 2015)이 계기다. 원제를 보니 '자전거의 모든 것'이다. '자전거 레이서'들이 환호할 만한 책.

 

자전거를 타고 전 세계 5개 대륙, 50여 나라, 4만 킬로미터를 달린 남자, 자전거 마니아가 본업이고 작가는 부업이라 말하는 자유인, 자전거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을 사랑할 줄 아는 남자. 이 모두가 로버트 펜의 별칭들이다. 그런 그가 새로운 자전거를 원했다. 자신과 함께 늙어갈 수 있고,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자전거, 바로 ‘꿈의 자전거’였다. 자전거 특유의 리듬이 창조하는 사고의 공간, 내리막을 질주하는 자유로움, 목표에 도달했을 때의 만족감, 바람과 영혼이 빚어내는 고독과 자유처럼, 자전거 타기의 즐거움에 대한 탁월한 묘사야말로 이 책의 최대 장점이다.

자전거 책들, 가령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읽으면서나, 읽기 전에 읽어보면 딱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전거의 즐거움을 다룬 책은 자연스레 '걷기'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끈다. 생각나는 책들이 있어서인데, 다비드 르브르통의 <걷기예찬>(현대문학, 2002)과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책세상, 2014). 뛰기(달리기)의 모든 것을 다룬 책으로 토르 고타스의 <러닝>(책세상, 2011)까지도 손이 뻗칠 수 있겠다. '한편의 세계사'란 부제에 걸맞게 700쪽이 넘는 책. "노르웨이의 작가이자 민속학자인 토르 고타스가 달리기를 주제로 쓴 문화사 책. 방대한 자료를 바탕 삼아 역사적 사실과 신화, 전설 사이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달리기의 역사를 면밀히 추적한 이 책은 풍부한 사례와 명쾌한 문장으로 문화사 읽기 특유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걷기와 달리기, 자전거 타기가 대등한 신체활동인 듯싶지만, '운동'의 느낌이 확연한 것은 역시나 '달리기'다. 그리고 달리는 사람들도 그 점을 잘 의식하고 있는 듯싶다. 조지 쉬언의 <달리기와 존재하기>(한문화, 2003)이 증거다. '존재하기'란 말이 옆에 붙어서 어색하지 않은 건 달리기밖에 없지 않을까. 

저자 조지 쉬언은 심장병 전문의이자 러너이다. 그는 의사 생활을 하는 틈틈이 달린 것이 아니라, 의사라는 직업을 대신할 다른 직업으로 달리기를 선택했다. 이 책은 싸구려 대회셔츠를 입고, 주머니에 한 푼도 넣지 않고 생활하며, 고통스러운 자신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점차 러너가 되어가는 자신을 관찰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기에 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여러 차례 마라톤경기 완주 경력을 갖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문학사상사, 2009)이다. 그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슈팅 라이크 베컴'을 패러디한 알렉산드라 헤민슬리의 <러닝 라이크 어 걸>(책세상, 2014)도 달리기를 시작하려는 이들이 참고할 만한 책. '달리기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란 부제는 하루키 책을 패러디한 듯하다.

<러닝 라이크 어 걸>은 자신 없는 몸매로는 절대 딱 달라붙는 러닝복을 입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마라톤 풀코스를 뛸 것도 아닌데 왜 달리기 연습까지 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 힘겨운 하루를 마무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코 트랙을 계속 도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한 평범한 여성이 특별한 재능 없이도 계속해서 달릴 수 있음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담긴 이 책에는 달리려는 마음을 쉽게 포기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대한 훌륭한 지침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폐나 관절의 상태가 달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나로선 그냥 이야기로서만 즐길 따름이다. 남은 선택지는 걷기와 자전거 타기인데, 거실에 있는 '자전거'를 오늘은 몇달 만에 타봐야겠다(설마 몇 년만인가?)...

 

15.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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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질문은 아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절반의 인류, 곧 남성이 나머지 절반에 대해서 한번쯤은 던졌을 법한 질문이니까. 크리스티안 자이델의 <지구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지식너머, 2015)을 펼쳐서 조금 읽어보다가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하나는 저자의 '여성 체험' 실험이 생애 처음으로 (추위 때문에) 밴드 스타킹을 구입하면서 우발적으로 떠올린 발상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에 여성 분장 사진이 한 장도 실려 있지 않다는 것.

 

 

독어판 원서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독자에 대한 서비스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또 검색을 해봤다. 그리고 물론 손쉽게 찾았다.

 

 

여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이델이 보여주는 한 가지 방법은 여자-되기다. 여자처럼 입고 말하고 행동하다 보면, 여자다운 생각이 떠오를지 누가 알겠는가.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방법은 같은 제목의 영화 원작 소설인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푸른숲, 2013)에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떠올리는 생각.

마치 아이처럼, 나는 그녀의 두개골을 열고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그녀의 생각들을 잡으려고 애쓰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에이미, 무슨 생각 하고 있어? 내가 우리의 결혼 생활 중에 제일 자주 했던 질문이다. 비록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소리 내어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다음의 질문이 세상의 모든 결혼 위에 먹구름처럼 떠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 무슨 생각 하고 있어? 뭘 느끼고 있어? 당신은 누구지? 우리가 서로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앞으로 무슨 짓을 하게 될까?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데이비드 핀처의 <나를 찾아줘> 역시 그런 질문들과 함께 시작한다. "당신,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우리가 서로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라는 질문.

 

 

이런 질문을 속으로 던질 때 아내 에이미(로자먼드 파이크)의 정확한 응시가 마음에 든다(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 가운데 하나다). 초점이 없는 듯하면서 복잡한 심경과 사랑에 대한 갈망, 그리고 회의까지도 담은 듯한 시선이다(소설도 빨리 읽어야 하는데, 꽤 두껍다).

 

여장 남자라는 설정 때문에 떠올린 건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다. 원작은 루스 렌들의 단편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봄아필, 2015).

 

 

죽은 절친의 남편(데이빗)의 비밀이 복장도착자라는 것인데, 그는 여성처럼 옷을 입고 행동할 때 행복해 한다. 크리스티안 자이델과 만나서, 두 사람이 '여자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대담을 나눠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책으로 돌아오면, <지구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은 제목과 달리 내용이나 편집이 썩 어필하는 책은 아니다. 어쩌면 "여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란 질문 자체가 별로 대단찮은 질문인지도 모른다. 여자들은 그런 질문이나 품고 있는 남자들이 오히려 딱해 보일지도 모를 일이므로...

 

15. 02. 19.

 

 

P.S. 여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남자들은 무슨 딴생각을 하는지 궁금한 독자라면 앨런과 바바라 피즈 부부가 쓴 책들이 유익할지도 모르겠다. 몸짓언어(보디 랭귀지) 전문가들인데, 이들은 남녀의 몸짓을 넘어 생각까지도 대충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게 가능한 것은 물론 남자나 여자나 뻔하기 때문이다. 뻔하지 않은, 예외적인 남녀를 제외하면 대개 저자들의 사정권을 벗어나지 않는다. 뻔한 남자나 여자를 만날 때는 꽤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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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눈 뜨고 처음 읽은 글이 (문자 메시지와 메일을 제외하면) 중앙일보에 실린 소설가 김훈의 '새해 특별 기고'다(http://joongang.joins.com/article/265/16832265.html?ctg=). 제주에 있는 선배가 새해 안부와 함께 읽어보라는 문자를 보내와서 찾아 읽은 글이다. 세월호 사건과 그 이후를 다루고 있어서 <눈먼 자들의 국가>(문학동네, 2014)를 바로 떠올리게 했다. 유민이의 유품으로 돌아온, 물에 젖은 6만원 얘기는 유민 아빠 김영오의 <못난 아빠>(북앤리브로, 2014)에 나온다고. 여러 대목에서 작가의 통탄에 공감하게 되는데, 특별히 개인적으로는 '골든타임'에 대한 지적을 반복하고 싶다. 그래서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2014년 4월 16일의 참사 이후로 사태를 바라보는 이 사회의 시각은 발작적인 분열을 일으키며 파탄되었다. 슬픔과 분노를 온전히 간직해서 미래를 지향하는 동력으로 가동시켜야 한다는 시각과 그 슬픔과 분노를 매우 퇴행적인 소모적인 것으로 여겨 혐오하는 시각이 교차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4월, 5월까지는 전자의 시각이 우세했으나 6월 4일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적지 않은 재미를 보고, 이어 7월 30일 재·보선에서 여당이 압승하자, 후자의 시각이 주류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슬픔과 분노에 오랫동안 매달려 있는 것은 경제 살리기에 해롭다는 것이 그 혐오감의 주된 논리였다. 세월호에서 놓친 골든타임이 경제회복의 골든타임으로 살아났고 거기에 이념의 날라리들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사실 4·16참사 이후에 경기는 장기 침체에 빠졌고, 정부의 부양책은 힘을 쓰지 못했다. 모두들 슬프고 분하면 경기는 침체되는 것이니까. 슬픔과 분노가 경기침체의 원인이라는 말도 결국은 동어반복이다. 어찌 헌 옷을 벗듯이, 헌신짝을 벗어버리듯이 마음의 일을 벗어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돈 많고 권세 높은 자들이 큰 죄를 저질러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형량을 줄여서 선고하고, 형기 중에도 특별사면, 일반사면, 집행정지, 가석방, 병보석으로 풀어주는 무법천지를 나는 자유당 때부터 보아왔고 자유당은 지금도 특별사면 중이다. 죄형법정주의는 무너졌고 경제는 합리적이고 규범적인 토대를 상실했다.

 

재벌의 불법을 용인해야 경제가 살아나고, 정당한 슬픔과 분노를 벗어 던져야만 먹고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말은 시장의 논리도 아니고 분배의 정의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속임수일 뿐이다. 법치주의가 살아 있어도 법이 밥을 먹여줄 리는 없고, 밥은 각자 알아서 벌어먹어야 하는 것인데, 법치주의를 포기해야만 밥을 벌어먹기가 수월해진다면 이 가엾은 중생들의 밥은 얼마나 굴욕적인 것인가.

"세월호에서 놓친 골든타임이 경제회복의 골든타임으로 살아났고"란 대목이다. 인명구조에서 쓰던 '골든타임'이 (다분히 의도적인) 용도전용 결과 경제회복이나 정치개혁 같은 말과 어울려 쓰이는 조어가 돼버렸다. 어느 사이엔가 관련 기사들에 자주 등장하는 '골든타임'이 그래서 내겐 가장 역겨운 시사용어가 되었다. '지금밖에 없는 이 기회를 놓치시겠습니까?'라고 미소를 지으며 겁박하는 게 '골드타임'론이다. 놓치면 후회할 거라는.('마지막 기회!'란 말은 홈쇼핑 전용어이기도 하군.)

 

<눈먼 자들의 국가>의 표제글에서 소설가 박민규가 잘 정의한 대로 세월호는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밝혀져야 하는 것은 이 사건과 사고의 진상이다. 혹은 그 둘 사이의 관계다. 김훈의 표현으론 이렇다. "세월호가 침몰한 사건과 그 모든 배후의 문제를 다 합쳐서 세월호 제1사태라고 한다면, 제1사태 직후부터 이 나라의 통치구조 전체가 보여준 붕괴와 파행은 세월호 제2사태다. 이것은 또 다른 난파선이다. 제1사태와 제2사태는 양태는 다르지만 뿌리가 같아서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구분할 수 없는데, 과거의 제2사태가 오늘의 제1사태로 터져 나오고, 오늘의 제2사태가 미래의 제1사태를 예비하고 있다."

 

세월호특별법에 따른 위원회가 사고/사건의 진상과 책임을 어디까지 밝혀낼 수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나는 그 조사결과가 박근혜정부의 마지막 기회, 곧 골든타임이라고 생각한다. 김훈의 바램은 이렇다.

우리는 새로 생기는 위원회를 앞세워서, 세월호를 끝까지 끌고 가야 한다. 위원회가 동어반복으로 사태를 설명하지 말고 그 배후의 일상화된 모든 악과 비리, 무능과 무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공생관계를 밝히는 거대한 사실적 벽화를 그려주기 바란다. 그리고 유민이의 젖은 6만원의 꿈에 보답해주기 바란다. 나는 사실 안에 정의가 내포되어 있다고 믿는다.

왠지 결과가 눈에 다 보이는 듯하지만, 그들에게도, 눈먼 자들에게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국민지지 회복의 '골든타임'이 어떤 것인지 그들도 여실히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 2015년이 그렇게 밝았다...

 

15.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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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노 시게키의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교유서가, 2014)에서 본문보다 먼저 펴본 곳은 '독서안내'다. 서양 정치사상에 대한 개관(산책)을 읽은 뒤에 "서양 정치사를 좀더 폭넓고 깊이 있게 공부해보려 할 경우에는 어떤 책들을 읽으면 좋을까?"란 질문에 대한 자문자답.

 

 

전체적인 개관으로 저자가 '강추'하는 책은 사사키 다케시의 <민주주의라는 이상한 시스템>(2007)이다. 절판된 책이긴 한데, <교양으로 읽어야 할 절대지식>(이다미디어, 2004)의 편자가 사사키 다케시다. 1942년생으로 도쿄대학교 총장까지 역임한 인물인데, 프로필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플라톤과 정치><현대 미국의 보수주의>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1967년생인 우노 시게키가 도쿄대 법학정치학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걸 고려하면 얼추 사제지간이 아닌가 싶다. 우노 시게키는 현재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교수로 재직중이다(대학교수와 연구소교수가 분리돼 있는 건가?). 아무튼 도쿄대에서 줄곧 서양 정치사상을 강의해온 인물들이라면 기꺼이 소개됨직하다.

 

 

이러한 입문서를 제쳐놓으면 좀 묵직한 저작들이 나온다. 저자가 가장 강력하게 추천하는 저자는 J. G. A. 포칵(존 그레빌 에이가드 포칵)과 퀸틴 스키너. 스키너에 대해서는 언젠가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주저는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1>(한길사, 2004)와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2>(한국문화사, 2012)다(학술명저번역 총서로 나온 번역본은 중간에 전담 출판사가 바뀌어서 이상한 모양새가 돼버렸다). 거기에 덧붙여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푸른역사, 2007)를 추천하는데, 현재는 절판된 상태다.

 

 

그리고 또 가장 기본적인 텍스트로 추천되는 책이 포칵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나남, 2011)이다. 이미 학계에서는 정평이 나 있는 책이어서 군말이 필요하진 않다. 한국어판의 소개는 이렇다.

J.G.A. 포칵(존스홉킨스대 명예교수)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주며 공화주의 논쟁이 새롭게 타오르게 했던 명저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피렌체 정치사상과 대서양의 공화주의 전통>이 초판 출간(1975) 이후 35년 만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역되어 발행된다. 마키아벨리즘을 전공한 부산대 사학과 곽차섭 교수가 수년 동안 번역작업에 매진한 결과로, 이 책을 둘러싼 지난 수십 년간의 논쟁에 대해 포칵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2003년 판의 저자 후기가 포함되어 있다.

스키너의 책들은 다 구입해놓았지만 포칵의 책은 보류하고 있었는데, 문학과 정치(유토피아 사상)를 다루는 강의도 내년에 계획하고 있어서 겸사겸사 읽어보려고 한다. 이번 겨울이 좋을까.

 

스키너와 포칵의 책은 '프롤로그'와 관련한 추천도서이고 각 장마다 추가되는 책들이 더 있다. 당장은 서양 정치사상사를 바라보는 전체적인 시각과 이론에 대해 관심이 있는지라 <마키아벨리언 모멘트>와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두 권만 언급해둔다. 이 책들을 읽기 전에 물론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을 일독해두는 게 필요하겠다.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넘어가기 전의 가벼운 워밍업이라고 할까... 

 

1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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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잠시 들여다본 책은 개정 번역판으로 나온 <안티 오이디푸스>(민음사, 2014)다. 예판시 주문을 했고 며칠전에야 펭귄판 영역본과 함께 배송받았다(영어판을 따로 갖고 있지만 바로 찾을 수가 없어서 펭귄판도 같이 주문했다). 이전 번역판과는 달리 미셸 푸코의 영어판 서문 '비-파시스트적 삶의 입문서'가 서문격으로 번역돼 있어서 일단은 다행스러웠다(물론 이 서문을 읽다가 책을 덮는 독자들도 많이 있으리라). 그리고 예의 아주 유명한 서두를 읽다가 오래 전에 쓴 페이퍼가 생각났다. 2005년 7월에 쓴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이다(즐찾 300이 넘은 걸 기념하여 쓴 페이퍼인데, 그 후 거의10년이 지났고 현재는 5660명이다. 한 세월이 지나간 듯한 느낌이다). 새 번역본이 20년만에 나온 김에, 거의 10년 전 페이퍼도 다시 읽어보는 의미에서 옮겨놓는다. <안티 오이티푸스>의 첫 대목에서 '그것'에 대한 해석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번에 나온 김재인판의 번역은 이렇다.

 

그것(Ça)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때론 멈춤 없이, 때론 단속적으로. 그것은 숨 쉬고, 열 내고, 먹는다. 그것은 똥 싸고 씹한다. 이드(le ça)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오류더냐? 도처에서 그것은 기계들인데, 이 말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그 나름의 짝짓기들, 그 나름의 연결들을 지닌, 기계들의 기계들.  

다음 단락부터는 2005년의 글이며, 빌미로 삼은 김항의 글은 <말하는 입과 먹는 입>(새물결, 2009)에 수록돼 있다. 한편 새 <안티 오이디푸스>의 판권면에 책의 1판 1쇄가 1997년 4월 25일에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994년에 나온 만큼 3년이 누락되었다. 1994년에 첫 번역본이 나왔다는 사실은 '옮긴이의 말'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이런 착오가 발생한다는 건 놀랍다. 편집자가 너무 무신경했다...

 

브리핑 거리들은 정말로 널려 있지만, 책상에서 제일 먼저 손에 잡힌 건, 혹은 가장 만만하게 눈에 띈 건 김항의 "말하는 입과 먹는 입"(<세계의문학>, 2005년 여름호)이다(사실은 데리다의 "이론을 좇아서"란 글을 염두에 두었지만 아직 다 읽지 않았다). 필자는 동경대학교 박사과정에 있는데, 히로마쓰 와타루의 <근대초극론>(민음사)를 우리말로 옮긴바 있고, 나는 <세계의 문학>지에서 그의 글을 두번째로 읽게 되었다. 국가와 폭력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글은 생각보다 견적이 많이 나온다. 제대로 검토하기 위해서 참조해야 할 저자들이 여럿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룰 수 있는 건 그냥 글의 서두뿐이다. 이 서두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서두이기도 하다. 

"그것(Ça)은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흐르며, 때로는 멈추면서, 도처에서 그것은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호흡을 하고, 그것은 열을 내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싸고, 그것은 섹스를 한다. 그럼에도 '한데 싸잡아 그것(le ça)'이라 불렀으니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도처에서 이것은 여러 기계들이다. 게다가 결코 은유가 아니다. 이것들은 서로 연결하고, 접속하여 기계의 기계가 되는 것이다."

이 문단에 대한 필자의 해설: "여기서 '그것(Ça)'은 입이다. 호흡하고, 열을 내뿜고, 먹는 입. 항문과 연관되고 성기를 빠는 입. 이렇게 다른 기계와 연결된 기계인 입을 '그것(le ça=Es)'이라 부른 일, 즉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에 해당하는 '그것'이라 싸잡아 부른 것은 잘못이었다. 입을 대표하는 입 일반은 없기 때문이며, 입은 항상 무언가에 연결된 기계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가만이 입을 그것(Es)이라 부르며 안심한다."(강조는 나의 것)

 

이 대목을 읽고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몇 년 전의 '논쟁(?)'이다. <문학과 사회> 2002년 여름호에 이종영의 "파시스트 들뢰즈와 가타리가 반(反)파시즘을 말하다"란 글이 실렸고(이 글의 풀-버전은 <내면성의 형식들>(2002)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파시즘과 반(反)파시즘'이란 보론으로 들어가 있다), 이어서 이를 반박하는 김재인의 글 "파시즘과 비인간주의 사이에서 외면당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가을호에 게재됐다. 이 논쟁의 핵심(즉, 들뢰즈/가타리가 파시스트냐 아니냐)은 여기서의 관심사가 아닌데, 다만 흥미로웠던 건 인용한 대목에서 '르 싸'의 해석을 놓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자신이 엉터리 번역본인 국역본 <앙띠 오이디푸스>를 참조하고 있다고(그러니까 <안티 오이디푸스>를 제대로 읽지 않았으며 당연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김재인에 대해서 이종영은 독자들/친구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었다: "김재인 씨는 <앙띠 오이디푸스> 한글판의 번역이 엉망이고 ‘위서’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김재인 씨가 사례로 제시한 내용은 저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김재인 씨는 <앙띠 오이디푸스> 한글판에서 잘못된 번역의 대표적 사례로 <앙띠 오이디푸스>의 첫 문단을 듭니다. 즉 한글판에서 ‘이드’(Id, das Es)로 옮겨놓은 첫 문단의 ‘싸’(ça)가 ‘이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앙띠 오이디푸스> 첫 문단의 ‘싸’(ça)는 명백히 ‘이드’입니다. 왜냐하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숨쉬고 뜨거워지고... 똥누고 성교를 하는’ ‘그것’에 대해 말한 후, ‘그것’을 정관사를 붙여 ‘르 싸’(le ça)라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그들은 정관사 ‘르’를 강조합니다... 김재인 씨는 이 첫 문단의 ‘그것’이 ‘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똥누는 것은 토악질을 하는 것이고 성교는 하는 것은 키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러한 자의적 해석을 하는 사람이 과연 <앙띠 오이디푸스>를 최명관 씨보다 더 잘 번역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갑니다."

 

이에 대해서 김재인은 이렇게 반박한바 있다: "내 주장을 반복하면 이렇다. 들뢰즈-가타리가 ‘르’를 떼어야 한다고 했을 때 이는 ‘의도적인 혼동’을 염두에 두고서 그렇게 한 것이다. 즉 프로이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또는 프로이트를 혼동시키기 위해.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프로이트는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수 정관사를 쓴 것은 더더욱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수 부정관사를 써서 ‘des ça’라고 했어야 옳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양체요 리좀이다. 그래서 첫 문단의 그것이 ‘입’을 가리킨다는 점은 명백하다. 나는 모든 ‘그것’이, ‘그것’ 일반이 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입은 그것의 한 사례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 첫 문단의 서술을 잘 읽어보면 이 점은 명백하다(절대로 자의적 해석이 아니다). 이런 해석을 제시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강조는 나의 것)

 

그리고 이제 김항이 두번째인 듯하다(하지만, 이 '독특한 해석'의 반복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나로선 이 서두에서의 '그것(Ça)'이 어떻게 '입'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자못 궁금하고 신기하지만 두 사람이나 이런 '독특한' 해석(처음 김재인이 그러한 견해를 제시했을 때, 그것은 그 자신의 말대로 '유일무이한' 해석이었다. 전세계를 통틀어서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항만 빼놓고)을 제안/지지할 때는 정색하게 된다. 정말로 '입'이 열을 내면서, 먹으면서, 똥을 싸고 섹스를 하는가? 아마도 김재인/김항은 토악질=똥으로 오랄섹스=섹스라는 비유적 등식화를 여기서 추가적으로 요구하게 될 듯하다(정신분석학이 모든 게 '그것=입'의 문제라고 주장하며 오랄섹스에 대해 근심하는 학문인가? 정신분석가만이 입을 그것(Es)으로 부르며 안심한다? 나는 어떤 정신분석가들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들뢰즈/가타리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은유/비유를 혐오한다(이것들은 은유가 아니다!). 고로 똥은 똥이고 섹스는 섹스다.

 

김항의 인용/번역문에서 바로 제시돼 있듯이, "도처에서 이것(Ça)은 여러 기계들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유방이나 입은 이 기계들 가운데 하나이다. 상식적으로 읽을 때, 들뢰즈/가타리는 이 (욕망하는)기계들을 통칭해서 그것(독어로 Es/ 불어로 le Ça/ 영어로 Id)이라고 정신분석학이 명명한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계들의 복수성을 일반화하고 단수화하는 것이기 때문에(반복하지만, '기계들'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더불어 그것은 '입'이라는 단일한 기계가 아니라, '기계들'이다). 물론 이어지는 대목에서 보듯이, 식욕상실자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기계' '말하는 기계' '숨쉬는 기계' 어느 것(=기능)이 될지 불확정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이 '기계들'의 대용어나 통칭어가 될 수는 없다.

 

김재인은 "나는 모든 ‘그것’이, ‘그것’ 일반이 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입은 그것의 한 사례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맞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맨처음 '그것'은 입이 아니다. 김항은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에 해당하는 '그것'이라 싸잡아 부른 것은 잘못이었다"라고 말했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내가 아는 정신분석학에서 입을 무의식(=그것)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두 유능한 연구자의 입에서 왜 이런 '독특한' 주장이 반복되는 것인지 다시금 궁금하고 신기하다...

 

여기까지가 2005년에 쓴 것이다. 문득 생각이 나서 역자의 견해가 그간에 변함이 없는지 알고 싶었지만 책에는 따로 역자의 주석이 붙어 있지 않다. 분량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가이드북' 형식의 책을 따로 펴낼 예정이라 한다. 그래서 좀더 기다려봐야겠지만, 여전히 같은 견해라면, 나로선 또 계속 궁금하고 신기할 듯하다(프로이트가 '그것'을 '이드'라고 부름으로써 '욕망 기계들'을 부당하게 축소했다는 게 내가 이해하는 들뢰즈의 입장이다).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가 적은 소회는 이렇다.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여러 강의도 진행했고 논문들도 썼지만, 옮긴이 자신도 내용을 충분히 숙지했는지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다만 외국에서 간행된 저술들과 논문들 그리고 국제 학술대회에서 접한 강연과 대화를 통해, 아직 <안티 오이디푸스>는 현 시점에서 세계적으로 충분히 이해된 책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확인은 특별한 자신감으로 다가왔으며, 번역 작업을 이쯤에서 마쳐도 되리라는 결심을 굳히게 했다. 언제까지 혼자서만 읽는 텍스트로 놔둘 수는 없으며,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모든 이가 공유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요컨대 역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어판 <안티 오이디푸스>는 '자신 없음'과 '특별한 자신감' 사이에 놓여 있다. 독자의 관점에서는 어떨까? 그에 상응하여, 한국어로 읽을 수 있을지 여전히 자신이 없지만, 이번에는 분명 읽을 수 있으리라는 특별한 자신감도 든다. 내년쯤에는 결과를 알 수 있으리라...

 

1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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