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행사가 없는 어린이날이지만 '어린이날 특집' 페이퍼를 적는다. 특집이라고 적으니 좀 거창한데, 그냥 어린이날이 빌미가 된 페이퍼다. 두 권의 평전을 나란히 적은 것은 대조가 되기 때문이다. 2007년 5월에 타계해 올해 10주기를 맞은 금아 피천득 선생과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연결되는 지점은 없다('키르케고르'는 표기가 고정되지 않은 가장 악명 높은 철학자다. '키에르케고르'와 '키에르케고어' 등이 난립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평전 제목을 따른다). 정정호의 <피천득 평전>(시와진실, 2017)과 임춘갑 교수의 <키르케고르 평전>(다산글방, 2007)이 두 권의 평전이다(이 역시 연결고리가 없는데, 나란히 독서거리가 되는 바람에 같이 묶이게 되었다).  



어떤 대조인가. "나이를 잃은 영원한 소년"으로 불리는 피천득 문학의 원형이 '어린이'인데 반해서 키르케고르는 "나는 일찍이 어린아이인 때가 없었다"고 탄식한, "태어날 때부터 늙은이었던 사람"이었다. 먼저, <피천득 평전>의 소개다. 

"타계 10년 만에 나온, 피천득 첫 평전. 피천득은 다난한 우리 근.현대를 온몸으로 겪으며 한국문학사에서 서정문학의 획을 그은 수필가이자 시인이다. 구십 평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테지만, 그의 작품은 시와 수필이 각각 100편 안팎으로 살다간 세월에 비해 적은 편이다. 게다가 내용도 짧고 단순해서 많은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쉽게 읽힌다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타계 10주년에 출간하는 이 평전은 금아의 삶과 문학을 따르고 싶어하는 제자 정정호 교수가 집필했다. 정정호 교수는 독자들이 피천득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구성과 전략을 달리했다. 피천득이 생전에 칭찬했던 새뮤얼 존슨의 <영국시인전> 구성을 따르되, 순서를 바꿔 Ⅰ부는 생애, Ⅱ부는 문학, Ⅲ부는 사상으로 구성했다."


알려진 대로 피천득 선생은 이양하 선생과 함께 영문학자이면서 대표적인 수필가다. 보통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인연'의 저자로 기억되는데, 고등학생 때 범우사판으로 두 분의 수필집을 읽은 기억이 난다(분량도 얇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어서 이 수필집 시리즈를 줄곧 가방에 넣고 다닌 기억이 있다. 물론 지금은 표지가 바뀌었다). 


문학평론집에서 간간이 피천득론을 읽은 적이 있지만(평전에 추천사를 붙인 김우창 선생의 피천득론도 포함해서) 이만한 규모의 평전은 처음 출간되었기에 뜻깊다고 생각한다. 어린시절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도 고등학생 시절로 다시 돌아가보는 시간 여행의 기회이기도 하다. 



<키르케고르 평전>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관심을 두다가 그 연장선상에서 다시금 생각이 미치는 바람에 몇 권의 관련서와 함께 구입한 책이다. 키르케고르의 주저들은 오래 전에 모아두었는데, 따져 보니 열독하지는 않았다(독서는 때가 있는 모양으로 책을 사들이는 때가 있는 반면에 비로소 읽게 되는 때가 있다).  

"키르케고르의 생애와 사상을 그린 평전. 키르케고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기본적인 입문서로 평가받는다. 키르케고르가 남긴 저서를 이해하기에 앞서 그의 고뇌에 찬 생애를 먼저 알아둘 수 있도록 구성하였으며, 키르케고르의 생애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큰 사건들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월터 라우리는 이 책을 쓰면서 자신이 쓴 또다른 키르케고르 평전 보다 부피가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지만 키르케고르의 글을 상당히 많이 인용하면서, 당대 정황과의 관계를 서술했기 때문에 키르케고르가 갖는 의미를 되새기는데 모자람이 없는 책이다. 과거 종로서적에서 출간되었던 것을 다시 편집하고 장정을 바꾸어 출간한 책이다."

바로 그 종로서적판도 나는 구입했더랬지만 완독하진 않았다가 이번에 다시 구입한 것. 저자 월터 아우리는 20세기 전반기에 영어권 키르케고르 번역과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전문 학자다. <키르케고르>란 방대한 저작을 1938년에 펴내고, 그 축약판으로 다시 펴낸 게 <케르케고르평전>(1942)이다. 한국어판은 1959년에 임춘갑 교수의 번역으로 처음 나왔다가 여러 차례 재간돼 지금에 이르렀으니 상당한 수명을 자랑한다. 



영어판도 마찬가지인데, 2013년판도 아직 살아있는 책이므로 평전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다. 라우리의 번역으로는 <공포와 전율>, <죽음에 이르는 병>, <그리스도교의 훈련> 등이 아직도 읽히는 영역본이다. 한국어 선집판으로는 아래의 판본들로 나와 있는 책. 



수집가의 입장에서 적자면, 같은 역자의 선집이건만 중간에 출판사가 바뀌는 바람에(시리즈 이름도 '케르케고르 선집'에서 '쇠얀 키에르케고어 시리즈'로 바뀌었다) 낭패를 본 대표적인 선집이다(같은 책을 고스란히 두번 사야 하는지?). 아무튼 돌이켜보니, 그렇게 낭패스러울 때쯤 키르케고르에 대한 관심이 식은 듯하다. 그렇게 꺼졌던 불에 잔불이 남았던지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코펜하겐에도 가보고 싶다는 열망에까지 이를지는 두고볼 일이다...


17.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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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부터 '현대철학 로드맵' 강의를 하면서 오랜만에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을 나란히 입에 올렸다. 읽은 지 오래 되었고 그간에 쌓인 책들도 있어서 '업데이트'가 좀 필요하다고 느끼던 차에 적당한 책들이 출간되었기에 몇 마디 적는다. 



먼저 뜻밖의 책은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평전 <하이데거>(북캠퍼스, 2017). 자프란스키는 에세이도 몇 권 번역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일급의 철학자 평전 저자다. 국내에 소개된 <니체> 외에 <쇼펜하우어> 평전이 있으며 <하이데거>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책이다(괴테 평전도 썼다).   



참고로 자프란스키의 에세이는 <인간은 얼마만큼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지호, 1998)가 처음 소개되었고 최근에는 <지루하고도 유쾌한 시간의 철학>(은행나무, 2016)이 추가되었다. 국내에는 확실한 독자층이 있는 것 같지 않지만(내가 예외인 건가?) 언제든 신뢰할 수 있는 저자다. 



하이데거에 관한 국내서로는 박찬국 교수의 책들이 가장 많이 나와 있다. 중복의 감도 있지만 한두 권 정도 독파하면 대략적인 그림은 그려볼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유감도 적자면 하이데거 번역서 몇 권이 절판된 채 다시 나오지 않고 있다. <철학 입문>(까치, 2006)과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까치, 2001) 은 갖고 있지만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까치, 2004)은 챙겨놓지 못한 터라 아쉽다(2004년에는 러시아 체류중이었다). 저작권 갱신이 안 되었던 것일까.



비트겐슈타인은 (하이데거에 비하면) 저작이 많지 않아서 전집 규모의 선집이 소개된 이후에도 일기 등이 계속 번역돼 나오고 있다. 그런 가운데 전공자이자 책세상판 선집 번역자인 이영철 교수의 가이드북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책세상, 2017)이 최근에 나왔다. 비트겐슈타인 입문서는 학부 때 여러 권 읽었고(국내서가 꽤 나와 있는 편이다) 그 후에는 손을 놓은 터라 다시 손에 들자니 감회마저 든다. 



아무튼 <전쟁일기>(읻다, 2016)나 <비트겐슈타인의 인생노트>(필로소픽, 2015)처럼 예전에는 못 듣던 책들까지 나오는 바람에 나도 최근에는 <초역 비트겐슈타인의 말>(인벤션, 2015)까지 구입했다. 주요 저작 외에 얼마나 더 읽어야 하는지 어림해보기 위해서다. 


 

독일문학에서 시작해서 오스트리아문학까지 살펴보는 게 올해의 강의 일정의 하나인데, 겸사겸사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 관한 책들을 자주 찾게 될 듯하다. 비트겐슈타인 관련서도 눈에 띄는 대로 따로 모아놓아야겠다...


17. 0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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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무거운 책들을 읽다가 머리도 식힐 겸 넘겨본 책이 KBS 다큐를 단행본으로 엮은 <명견만리>(인플루엔셜, 2016)다. 두 권짜리인데, 제목으로는 식별이 안 된다(처음엔 똑같은 책인 줄 알았다). 내가 읽은 건 '미래의 기회 편' 혹은 '윤리, 기술, 중국, 교육 편'이다.  

 

 

교육 편의 두 꼭지를 읽었는데, 이미 어디선가 본 내용이었다. 아마 방송 내용을 소개한 포털 기사를 읽었던 게 아닌가 싶다. '왜 우리는 온순한 양이 되어갈까'에서는 대학 교육의 문제점을 짚었고, '지식의 폭발 이후, 어떤 교육이 필요한가'에서는 주로 핀란드의 혁신 교육을 거울 삼아 우리 교육의 방향을 어떻게 재설정할 것인가를 다루었다.

 

많이 알려진 통계이지만 대학의 혁신을 고민하게끔 하는 지표부터 다시 확인해보자. 1990년대까지 40퍼센트도 채 되지 않았던 대학 진학률은 2006년에 82퍼센트를 찍었고 2010년대 들어서도 70퍼센트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대졸자 주류사회'라는 말을 낳았다). 이게 자연스러운 거냐, 하면 그렇지가 않다. OECD 국가들 사이에 압도적인 1위이고, 미국, 일본, 유럽의 대학 진학률보다 두 배 이상 높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고학력 국가인 셈이다.

 

그에 보조라도 맞추는 양, 비약적으로 치솟은 것이 등록금이다. 1975년부터 2010년까지 35년간 한국 대학의 등록급은 사립대가 28배, 국립대가 30배 이상 올랐다. 같은 기간 쌀값이 6배, 악명 높은 전세금이 11배 오른 것과 비교해도 얼마나 기록적인가를 알 수 있다(해서 우리는 평균 등록금이 미국에 이어서 세계 2위라나 뭐라나). 이런 시스템을 무던히도 버텨내고 있다는 점이 대단하지 않은가. 인내심이 강한 러시아 사람들을 일컬어 '노예의 영혼'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한국인도 그 못지 않다('개돼지'면 그보다 못한 건가?).

 

한데, 그 대가는 무엇인가. 왜 그토록 대학에 목을 매는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대졸자 평균 취업률 때문이다. 58.6퍼센트로 OECD 국가 중 꼴찌다. 그러는 와중에 이 취업률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거의 가장 비싼 등록금을 내고서는 취업도 보장 못하는 대학 졸업장 한 장 달랑 받아드는 셈이다.

 

대학 교육의 만족도가 떨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최재천 교수에 따르면 75퍼센트의 재학생과 졸업생이 대학 진학을 후회한다고 답했다. 이유의 대부분은 취업난이다. 대학이 '취업 준비소'로 전락했다는 자조는 이미 오래 전부터 듣고 있지만, 실상은 그 '준비소'도 안된다는 게 한국대학의 현실이고 문제점이다. 등록금 후불제라도 하지 않는 이상, 뭔가 바뀌어도 한참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흥분할 일은 아니다. 상황이 대충 이렇다는 건 다들 안다(대한민국에서 한 분 정도는 확실히 모르는 성싶지만). 그럼에도 엄청난 사교육비를 들여가며(사교육비 지출도 우리가 세계 1위다) 아이들을 입시와 스펙 경쟁에 내몬다. 그러면서도 최장시간 노동 국가였던 전력에(지금은 멕시코란다. 우리가 2등?) 걸맞게 한국은 최장시간 학습 국가다. 자랑은 아니다. 학습효율화지수를 따지면 우리는 바닥권이다(노동효율지수란 게 있다면 그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단순하게 생각해도 교육과 관련해서는 미래가 없는 나라다(다시 한번 '헬조선'이다). 하지만 변화가 가능할지는 미지수이고, 솔직히는 의심스럽다. '한강의 기적'을 낳은 핵심 요인으로 우리의 교육열이 곧잘 꼽히지만, 그 역시 유효 시한이 다 되었다는 느낌이다. 의지도 중요하지만, 오늘날 더 중요한 건 제대로 된 목표와 방향으로 보이기에. 

 

 

대학에는 왜 가는지, 미래의 교육은 어떤 것이어야 할지, 새삼 고민하게 된다. 고등학생 아이가 있다 보니 이게 또 남의 고민만은 아니라는 걸 연휴에 깨닫는다...

 

16. 0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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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동네답게 주말 알라딘 마을은 두 작가의 부고 소식으로 숙연하다. 오전에 차례대로 하퍼 리(1926-2016)와 움베르토 에코(1932-2016)의 서거 소식을 접했는데(한국에선 두 사람 다 '열린책들'의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두 작가의 독자라면 저마다의 소감이 없을 수 없겠다(알라딘은 발빠르게 추모의 공간도 마련했다). 나도 간단히 적는다(그다지 컨디션이 좋지 않은 편이라 길게 적을 수도 없다).

 

 

<앵무새 죽이기>(열린책들, 2015)의 작가 하퍼리는 바로 지난해 <파수꾼>(열린책들, 2015)이 55년만에 나온 '신작'으로 단연 화제가 됐었기에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부고 소식이 이르게 여겨진다. 나도 <파수꾼> 출간을 계기로 행사에도 참여하고 강의에서도 여러 번 다룬 터라 아직 기억이 생생하다. 조금 이르다 싶었던 하퍼 리의 전기 <나는 스카웃이다>(2008)도 이제는 충분히 읽어볼 만하게 되었다(나는 작년에 나온 보급판을 구입했다). 더 두툼한 평전이 나오기 전까지는 기본 전기의 역할을 해줄 듯싶다(아마 번역본도 곧 나오지 않을까). <앵무새 죽이기>와 <파수꾼>의 관계도 그렇고, 과연 하퍼 리가 과연 다른 작품은 남겨놓지 않았는지(젊은 시절 하퍼 리는 글쓰기에 대한 대단한 열정과 의욕을 표현한 바 있다) 궁금한데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지 두고봐야겠다.

 

 

움베르토 에코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가 기획한 <중세> 시리즈가 작년에 두 권 선을 보였고(전4권 시리즈다), 지난 달에는 그가 공동편집자인 <셜록 홈스, 기호학자를 만나다>(이마, 2016)가 재출간돼 여전히 '현역'이란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최근에 검색했을 때도 신간 소설이 나와 있어서(작년에 나온 <넘버 제로>라는 소설이다) 여전히 건재하구나 싶었다(84세이니 만큼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아무려나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 이르게 여겨지는 죽음에 에코의 책들도 돌이켜보게 된다. 우리시대의 르네상스인답게 다양한 관심을 가졌던 지성이지만 에코의 삶은 중세학자, 기호학자, 소설가라는 세 타이틀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대표 소설 <장미의 이름>은 그런 세 면모를 한 곳에 압축해놓은 작품. 개인적으로는 올 하반기에 강의에서 다루려고 얼마 전에 영어본도 새로 구입한 터이다(당연한 말이지만, 작가와의 만남이란 독서를 통한 만남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죽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충격은 제한적이다.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대로, 모든 저자는 책과 더불어 또 한번의 삶을 산다). 에코와의 '재회'가 벌써 기대된다.

 

 

내게 <장미의 이름>보다 더 인연이 깊은 책은 <기호학 이론>이다(열린책들판으로는 <일반기호학이론>. 문학과지성사판은 아직 절판되지 않은 게 의아할 정도로 번역이 좋지 않다). 대학원 시절에 몇몇 사람과 영어본을 번역하는 스터디를 했었기 때문에. 끝을 보진 못했지만 나로선 <기호학이론>을 꼼꼼하게 탐독하는 계기가 되었다.

 

 

에코의 책들이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으로 재구성돼 나오면서부터는 에코와의 사이가 애매해졌다. 중복되는 책들이 적지 않아서 이 시리즈 전체를 구입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혼자만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자연스레 '마니아'에는 끼지 못하는 게 돼 버렸다. 더불어 열독 시기도 지나갔다. 책이나 번역과 관련된 몇몇 타이틀이나 반가워한 정도. 어차피 그의 모든 책을 다 읽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은가('마니아'가 아니라면).

 

 

아마도 내가 마지막에 손에 들 법한 책은 <전설의 땅 이야기>와 <궁극의 리스트> 등이다. 내게는 제목이 '전설의 에코' '궁극의 에코'로도 읽힌다. 물론 아직 읽을 책이 많다는 건 독자로서 결코 손해가 아니다. 책은 저자만의 재산이 아니라 독자에게도 인생을 살아갈 두둑한 밑천이다. 그렇게 한몫 챙기게 해준 두 작가의 명복을 빈다...

 

16. 0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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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그렇게 적으니 뭔가 운동하는 기분이 든다(페이퍼 운동?). 자전거 타기의 즐거움을 다룬 책이 출간되었기에 나머지 책들도 덩달아 떠올려본 것인데, 로버트 펜의 <자전거의 즐거움>(책읽는수요일, 2015)이 계기다. 원제를 보니 '자전거의 모든 것'이다. '자전거 레이서'들이 환호할 만한 책.

 

자전거를 타고 전 세계 5개 대륙, 50여 나라, 4만 킬로미터를 달린 남자, 자전거 마니아가 본업이고 작가는 부업이라 말하는 자유인, 자전거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을 사랑할 줄 아는 남자. 이 모두가 로버트 펜의 별칭들이다. 그런 그가 새로운 자전거를 원했다. 자신과 함께 늙어갈 수 있고,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자전거, 바로 ‘꿈의 자전거’였다. 자전거 특유의 리듬이 창조하는 사고의 공간, 내리막을 질주하는 자유로움, 목표에 도달했을 때의 만족감, 바람과 영혼이 빚어내는 고독과 자유처럼, 자전거 타기의 즐거움에 대한 탁월한 묘사야말로 이 책의 최대 장점이다.

자전거 책들, 가령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읽으면서나, 읽기 전에 읽어보면 딱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전거의 즐거움을 다룬 책은 자연스레 '걷기'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끈다. 생각나는 책들이 있어서인데, 다비드 르브르통의 <걷기예찬>(현대문학, 2002)과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책세상, 2014). 뛰기(달리기)의 모든 것을 다룬 책으로 토르 고타스의 <러닝>(책세상, 2011)까지도 손이 뻗칠 수 있겠다. '한편의 세계사'란 부제에 걸맞게 700쪽이 넘는 책. "노르웨이의 작가이자 민속학자인 토르 고타스가 달리기를 주제로 쓴 문화사 책. 방대한 자료를 바탕 삼아 역사적 사실과 신화, 전설 사이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달리기의 역사를 면밀히 추적한 이 책은 풍부한 사례와 명쾌한 문장으로 문화사 읽기 특유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걷기와 달리기, 자전거 타기가 대등한 신체활동인 듯싶지만, '운동'의 느낌이 확연한 것은 역시나 '달리기'다. 그리고 달리는 사람들도 그 점을 잘 의식하고 있는 듯싶다. 조지 쉬언의 <달리기와 존재하기>(한문화, 2003)이 증거다. '존재하기'란 말이 옆에 붙어서 어색하지 않은 건 달리기밖에 없지 않을까. 

저자 조지 쉬언은 심장병 전문의이자 러너이다. 그는 의사 생활을 하는 틈틈이 달린 것이 아니라, 의사라는 직업을 대신할 다른 직업으로 달리기를 선택했다. 이 책은 싸구려 대회셔츠를 입고, 주머니에 한 푼도 넣지 않고 생활하며, 고통스러운 자신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점차 러너가 되어가는 자신을 관찰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기에 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여러 차례 마라톤경기 완주 경력을 갖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문학사상사, 2009)이다. 그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슈팅 라이크 베컴'을 패러디한 알렉산드라 헤민슬리의 <러닝 라이크 어 걸>(책세상, 2014)도 달리기를 시작하려는 이들이 참고할 만한 책. '달리기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란 부제는 하루키 책을 패러디한 듯하다.

<러닝 라이크 어 걸>은 자신 없는 몸매로는 절대 딱 달라붙는 러닝복을 입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마라톤 풀코스를 뛸 것도 아닌데 왜 달리기 연습까지 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 힘겨운 하루를 마무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코 트랙을 계속 도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한 평범한 여성이 특별한 재능 없이도 계속해서 달릴 수 있음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담긴 이 책에는 달리려는 마음을 쉽게 포기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대한 훌륭한 지침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폐나 관절의 상태가 달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나로선 그냥 이야기로서만 즐길 따름이다. 남은 선택지는 걷기와 자전거 타기인데, 거실에 있는 '자전거'를 오늘은 몇달 만에 타봐야겠다(설마 몇 년만인가?)...

 

15.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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