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노 시게키의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교유서가, 2014)에서 본문보다 먼저 펴본 곳은 '독서안내'다. 서양 정치사상에 대한 개관(산책)을 읽은 뒤에 "서양 정치사를 좀더 폭넓고 깊이 있게 공부해보려 할 경우에는 어떤 책들을 읽으면 좋을까?"란 질문에 대한 자문자답.

 

 

전체적인 개관으로 저자가 '강추'하는 책은 사사키 다케시의 <민주주의라는 이상한 시스템>(2007)이다. 절판된 책이긴 한데, <교양으로 읽어야 할 절대지식>(이다미디어, 2004)의 편자가 사사키 다케시다. 1942년생으로 도쿄대학교 총장까지 역임한 인물인데, 프로필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플라톤과 정치><현대 미국의 보수주의>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1967년생인 우노 시게키가 도쿄대 법학정치학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걸 고려하면 얼추 사제지간이 아닌가 싶다. 우노 시게키는 현재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교수로 재직중이다(대학교수와 연구소교수가 분리돼 있는 건가?). 아무튼 도쿄대에서 줄곧 서양 정치사상을 강의해온 인물들이라면 기꺼이 소개됨직하다.

 

 

이러한 입문서를 제쳐놓으면 좀 묵직한 저작들이 나온다. 저자가 가장 강력하게 추천하는 저자는 J. G. A. 포칵(존 그레빌 에이가드 포칵)과 퀸틴 스키너. 스키너에 대해서는 언젠가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주저는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1>(한길사, 2004)와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2>(한국문화사, 2012)다(학술명저번역 총서로 나온 번역본은 중간에 전담 출판사가 바뀌어서 이상한 모양새가 돼버렸다). 거기에 덧붙여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푸른역사, 2007)를 추천하는데, 현재는 절판된 상태다.

 

 

그리고 또 가장 기본적인 텍스트로 추천되는 책이 포칵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나남, 2011)이다. 이미 학계에서는 정평이 나 있는 책이어서 군말이 필요하진 않다. 한국어판의 소개는 이렇다.

J.G.A. 포칵(존스홉킨스대 명예교수)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주며 공화주의 논쟁이 새롭게 타오르게 했던 명저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피렌체 정치사상과 대서양의 공화주의 전통>이 초판 출간(1975) 이후 35년 만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역되어 발행된다. 마키아벨리즘을 전공한 부산대 사학과 곽차섭 교수가 수년 동안 번역작업에 매진한 결과로, 이 책을 둘러싼 지난 수십 년간의 논쟁에 대해 포칵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2003년 판의 저자 후기가 포함되어 있다.

스키너의 책들은 다 구입해놓았지만 포칵의 책은 보류하고 있었는데, 문학과 정치(유토피아 사상)를 다루는 강의도 내년에 계획하고 있어서 겸사겸사 읽어보려고 한다. 이번 겨울이 좋을까.

 

스키너와 포칵의 책은 '프롤로그'와 관련한 추천도서이고 각 장마다 추가되는 책들이 더 있다. 당장은 서양 정치사상사를 바라보는 전체적인 시각과 이론에 대해 관심이 있는지라 <마키아벨리언 모멘트>와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두 권만 언급해둔다. 이 책들을 읽기 전에 물론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을 일독해두는 게 필요하겠다.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넘어가기 전의 가벼운 워밍업이라고 할까... 

 

1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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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잠시 들여다본 책은 개정 번역판으로 나온 <안티 오이디푸스>(민음사, 2014)다. 예판시 주문을 했고 며칠전에야 펭귄판 영역본과 함께 배송받았다(영어판을 따로 갖고 있지만 바로 찾을 수가 없어서 펭귄판도 같이 주문했다). 이전 번역판과는 달리 미셸 푸코의 영어판 서문 '비-파시스트적 삶의 입문서'가 서문격으로 번역돼 있어서 일단은 다행스러웠다(물론 이 서문을 읽다가 책을 덮는 독자들도 많이 있으리라). 그리고 예의 아주 유명한 서두를 읽다가 오래 전에 쓴 페이퍼가 생각났다. 2005년 7월에 쓴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이다(즐찾 300이 넘은 걸 기념하여 쓴 페이퍼인데, 그 후 거의10년이 지났고 현재는 5660명이다. 한 세월이 지나간 듯한 느낌이다). 새 번역본이 20년만에 나온 김에, 거의 10년 전 페이퍼도 다시 읽어보는 의미에서 옮겨놓는다. <안티 오이티푸스>의 첫 대목에서 '그것'에 대한 해석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번에 나온 김재인판의 번역은 이렇다.

 

그것(Ça)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때론 멈춤 없이, 때론 단속적으로. 그것은 숨 쉬고, 열 내고, 먹는다. 그것은 똥 싸고 씹한다. 이드(le ça)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오류더냐? 도처에서 그것은 기계들인데, 이 말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그 나름의 짝짓기들, 그 나름의 연결들을 지닌, 기계들의 기계들.  

다음 단락부터는 2005년의 글이며, 빌미로 삼은 김항의 글은 <말하는 입과 먹는 입>(새물결, 2009)에 수록돼 있다. 한편 새 <안티 오이디푸스>의 판권면에 책의 1판 1쇄가 1997년 4월 25일에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994년에 나온 만큼 3년이 누락되었다. 1994년에 첫 번역본이 나왔다는 사실은 '옮긴이의 말'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이런 착오가 발생한다는 건 놀랍다. 편집자가 너무 무신경했다...

 

브리핑 거리들은 정말로 널려 있지만, 책상에서 제일 먼저 손에 잡힌 건, 혹은 가장 만만하게 눈에 띈 건 김항의 "말하는 입과 먹는 입"(<세계의문학>, 2005년 여름호)이다(사실은 데리다의 "이론을 좇아서"란 글을 염두에 두었지만 아직 다 읽지 않았다). 필자는 동경대학교 박사과정에 있는데, 히로마쓰 와타루의 <근대초극론>(민음사)를 우리말로 옮긴바 있고, 나는 <세계의 문학>지에서 그의 글을 두번째로 읽게 되었다. 국가와 폭력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글은 생각보다 견적이 많이 나온다. 제대로 검토하기 위해서 참조해야 할 저자들이 여럿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룰 수 있는 건 그냥 글의 서두뿐이다. 이 서두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서두이기도 하다. 

"그것(Ça)은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흐르며, 때로는 멈추면서, 도처에서 그것은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호흡을 하고, 그것은 열을 내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싸고, 그것은 섹스를 한다. 그럼에도 '한데 싸잡아 그것(le ça)'이라 불렀으니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도처에서 이것은 여러 기계들이다. 게다가 결코 은유가 아니다. 이것들은 서로 연결하고, 접속하여 기계의 기계가 되는 것이다."

이 문단에 대한 필자의 해설: "여기서 '그것(Ça)'은 입이다. 호흡하고, 열을 내뿜고, 먹는 입. 항문과 연관되고 성기를 빠는 입. 이렇게 다른 기계와 연결된 기계인 입을 '그것(le ça=Es)'이라 부른 일, 즉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에 해당하는 '그것'이라 싸잡아 부른 것은 잘못이었다. 입을 대표하는 입 일반은 없기 때문이며, 입은 항상 무언가에 연결된 기계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가만이 입을 그것(Es)이라 부르며 안심한다."(강조는 나의 것)

 

이 대목을 읽고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몇 년 전의 '논쟁(?)'이다. <문학과 사회> 2002년 여름호에 이종영의 "파시스트 들뢰즈와 가타리가 반(反)파시즘을 말하다"란 글이 실렸고(이 글의 풀-버전은 <내면성의 형식들>(2002)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파시즘과 반(反)파시즘'이란 보론으로 들어가 있다), 이어서 이를 반박하는 김재인의 글 "파시즘과 비인간주의 사이에서 외면당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가을호에 게재됐다. 이 논쟁의 핵심(즉, 들뢰즈/가타리가 파시스트냐 아니냐)은 여기서의 관심사가 아닌데, 다만 흥미로웠던 건 인용한 대목에서 '르 싸'의 해석을 놓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자신이 엉터리 번역본인 국역본 <앙띠 오이디푸스>를 참조하고 있다고(그러니까 <안티 오이디푸스>를 제대로 읽지 않았으며 당연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김재인에 대해서 이종영은 독자들/친구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었다: "김재인 씨는 <앙띠 오이디푸스> 한글판의 번역이 엉망이고 ‘위서’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김재인 씨가 사례로 제시한 내용은 저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김재인 씨는 <앙띠 오이디푸스> 한글판에서 잘못된 번역의 대표적 사례로 <앙띠 오이디푸스>의 첫 문단을 듭니다. 즉 한글판에서 ‘이드’(Id, das Es)로 옮겨놓은 첫 문단의 ‘싸’(ça)가 ‘이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앙띠 오이디푸스> 첫 문단의 ‘싸’(ça)는 명백히 ‘이드’입니다. 왜냐하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숨쉬고 뜨거워지고... 똥누고 성교를 하는’ ‘그것’에 대해 말한 후, ‘그것’을 정관사를 붙여 ‘르 싸’(le ça)라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그들은 정관사 ‘르’를 강조합니다... 김재인 씨는 이 첫 문단의 ‘그것’이 ‘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똥누는 것은 토악질을 하는 것이고 성교는 하는 것은 키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러한 자의적 해석을 하는 사람이 과연 <앙띠 오이디푸스>를 최명관 씨보다 더 잘 번역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갑니다."

 

이에 대해서 김재인은 이렇게 반박한바 있다: "내 주장을 반복하면 이렇다. 들뢰즈-가타리가 ‘르’를 떼어야 한다고 했을 때 이는 ‘의도적인 혼동’을 염두에 두고서 그렇게 한 것이다. 즉 프로이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또는 프로이트를 혼동시키기 위해.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프로이트는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수 정관사를 쓴 것은 더더욱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수 부정관사를 써서 ‘des ça’라고 했어야 옳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양체요 리좀이다. 그래서 첫 문단의 그것이 ‘입’을 가리킨다는 점은 명백하다. 나는 모든 ‘그것’이, ‘그것’ 일반이 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입은 그것의 한 사례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 첫 문단의 서술을 잘 읽어보면 이 점은 명백하다(절대로 자의적 해석이 아니다). 이런 해석을 제시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강조는 나의 것)

 

그리고 이제 김항이 두번째인 듯하다(하지만, 이 '독특한 해석'의 반복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나로선 이 서두에서의 '그것(Ça)'이 어떻게 '입'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자못 궁금하고 신기하지만 두 사람이나 이런 '독특한' 해석(처음 김재인이 그러한 견해를 제시했을 때, 그것은 그 자신의 말대로 '유일무이한' 해석이었다. 전세계를 통틀어서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항만 빼놓고)을 제안/지지할 때는 정색하게 된다. 정말로 '입'이 열을 내면서, 먹으면서, 똥을 싸고 섹스를 하는가? 아마도 김재인/김항은 토악질=똥으로 오랄섹스=섹스라는 비유적 등식화를 여기서 추가적으로 요구하게 될 듯하다(정신분석학이 모든 게 '그것=입'의 문제라고 주장하며 오랄섹스에 대해 근심하는 학문인가? 정신분석가만이 입을 그것(Es)으로 부르며 안심한다? 나는 어떤 정신분석가들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들뢰즈/가타리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은유/비유를 혐오한다(이것들은 은유가 아니다!). 고로 똥은 똥이고 섹스는 섹스다.

 

김항의 인용/번역문에서 바로 제시돼 있듯이, "도처에서 이것(Ça)은 여러 기계들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유방이나 입은 이 기계들 가운데 하나이다. 상식적으로 읽을 때, 들뢰즈/가타리는 이 (욕망하는)기계들을 통칭해서 그것(독어로 Es/ 불어로 le Ça/ 영어로 Id)이라고 정신분석학이 명명한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계들의 복수성을 일반화하고 단수화하는 것이기 때문에(반복하지만, '기계들'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더불어 그것은 '입'이라는 단일한 기계가 아니라, '기계들'이다). 물론 이어지는 대목에서 보듯이, 식욕상실자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기계' '말하는 기계' '숨쉬는 기계' 어느 것(=기능)이 될지 불확정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이 '기계들'의 대용어나 통칭어가 될 수는 없다.

 

김재인은 "나는 모든 ‘그것’이, ‘그것’ 일반이 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입은 그것의 한 사례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맞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맨처음 '그것'은 입이 아니다. 김항은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에 해당하는 '그것'이라 싸잡아 부른 것은 잘못이었다"라고 말했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내가 아는 정신분석학에서 입을 무의식(=그것)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두 유능한 연구자의 입에서 왜 이런 '독특한' 주장이 반복되는 것인지 다시금 궁금하고 신기하다...

 

여기까지가 2005년에 쓴 것이다. 문득 생각이 나서 역자의 견해가 그간에 변함이 없는지 알고 싶었지만 책에는 따로 역자의 주석이 붙어 있지 않다. 분량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가이드북' 형식의 책을 따로 펴낼 예정이라 한다. 그래서 좀더 기다려봐야겠지만, 여전히 같은 견해라면, 나로선 또 계속 궁금하고 신기할 듯하다(프로이트가 '그것'을 '이드'라고 부름으로써 '욕망 기계들'을 부당하게 축소했다는 게 내가 이해하는 들뢰즈의 입장이다).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가 적은 소회는 이렇다.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여러 강의도 진행했고 논문들도 썼지만, 옮긴이 자신도 내용을 충분히 숙지했는지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다만 외국에서 간행된 저술들과 논문들 그리고 국제 학술대회에서 접한 강연과 대화를 통해, 아직 <안티 오이디푸스>는 현 시점에서 세계적으로 충분히 이해된 책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확인은 특별한 자신감으로 다가왔으며, 번역 작업을 이쯤에서 마쳐도 되리라는 결심을 굳히게 했다. 언제까지 혼자서만 읽는 텍스트로 놔둘 수는 없으며,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모든 이가 공유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요컨대 역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어판 <안티 오이디푸스>는 '자신 없음'과 '특별한 자신감' 사이에 놓여 있다. 독자의 관점에서는 어떨까? 그에 상응하여, 한국어로 읽을 수 있을지 여전히 자신이 없지만, 이번에는 분명 읽을 수 있으리라는 특별한 자신감도 든다. 내년쯤에는 결과를 알 수 있으리라...

 

1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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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좀더 길다. <왜 당신은 동물이 아닌 인간과 연애를 하는가>(연암서가, 2014). 주로 피터 싱어의 책들을 번역해온 김성한 교수가 쓴 진화심리학 개설서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진화심리학의 이론과 응용 정도라고 해야겠다. 진화심리학에서 얘기하는 건 남녀의 성 특징 내지 성적 행동의 특징까지인데(이게 1부다), 저자는 이를 응용해서 '연애의 기술'까지 다루려고 하기 때문이다(여기까지가 2부). 그리고 할 걸음 더 나아가 연애 코칭에까지(3부는 '연애의 단계'다). 과감한 시도이면서 과욕으로도 보이는데, 저자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왜 동성애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남성은 여성에게, 여성은 남성에게 매혹을 느낄까? 왜 그들이 매혹을 느끼는 대상은 하필이면 동물이 아닌 인간 종의 이성(異性)일까? 노인이나 아기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도록 젊은 남성들을 교육한다고 그러한 남성들이 그들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게 될까? 왜 젊은 남성은 글래머인 젊은 여성의 나신을 보면 성적인 자극을 받게 될까? 왜 이 세상에서 성범죄를 저질러 전자발찌를 차는 사람은 거의 예외없이 남성들일까? 왜 누구는 연애하는 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데 왜 누구는 모태 솔로로 살아갈까? (4쪽)

이런 물음을 공유한다면 흥미를 갖고 읽어봐도 좋겠다. 저자가 특별히 배려하고 있는 듯한 '모태 솔로'라면 더더욱. 하지만 생물학적인 답변으로 '인간은 유성생식을 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에 이미 이성간의 매혹은 다 해명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좀 의아하긴 하다.

 

 

진화생물학 책은 입문서부터 대학 교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와 있고, 성의 진화 내지 성선택에 관한 내용도 많은 책에서 읽어볼 수 있다. 저자의 강점은 짐짓 시치미를 떼면서 '왜 당신은 동물이 아닌 인간과 연애를 하는가'란 질문을 던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더라도 연애 코칭에까지 나선 것은 좀 과도했다. 특히나 '헌신'이란 자질 혹은 덕목으로 많은 문제를 해명하려고 한다면 말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연애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바라는 특징인 '헌신'이다.(...) 필자가 진화심리학에서 말하는 남녀의 여러 특징 중에서 '헌신'만을 가지고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유는 첫째,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남녀의 생물학적 성 특징 중에서 연애를 잘 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것은 헌신 외에 마땅히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둘째, 만약 남성이 선호하는 여성의 특징 중에서 '헌신'처럼 상대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것이 있다면 이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책에서 소개한 남성의 생물학적 성 특징 중에는 이와 같은 특징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7-8쪽)

그러니까 재력이나 외모, 키, 체격 같은 다른 자질은 거의 결정되어 있는 걸로 보고, 그래도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 뭔가 개선할 수 있는 것이 '헌신'이라고 보는 듯하다(태도는 노력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인가? 통상 더 유리한 것은 '헌신하는 척'하는 게 아닐까?).

 

 

흠, 생각해보니 사례가 없진 않다. 좀 오래된 영화로 문성근, 김희애 주연의 <101번째 프로포즈>(1993)가 있었다. 어떤 내용이던가.

건설회사 계장인 구영섭은 99번이나 선을 봤지만 번번히 퇴짜를 맞는 노총각이다. 그러나 100번째로 첼리스트 정원과 선을 보게 된 영섭은 그녀가 자신에게 너무나 과분한 여자임을 알지만 그녀의 마음을 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죽은 약혼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정원도 성실하고 순수한 영섭의 사랑에 차츰 마음을 열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원이가 꿈에도 잊지 못하는 죽은 약혼자와 너무나도 흡사한 김준기라는 남자가 나타난다. 늘 정원과 세상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던 영섭은 준기의 등장으로 그녀를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고, 예감처럼 정원은 진정한 사랑과 과거의 기억의 혼돈 속에서 준기에게 마음을 돌린다. 영섭은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사법시험에 도전하고 시험에 합격하는 날 정원에게 자신의 결혼 반지를 받아달라 말하려고 하지만 시헙에 떨어지고 정원에게 주려던 결혼 반지를 강에 던져 버린다. 그러나 정원은 옛사랑의 기억보다 더 진실하고 소중한 또 하나의 사랑을 깨닫고 야간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영섭을 찾아간다.

기억엔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했던 것 같은데, 결말이 '영화적' 엔딩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헌신만 갖고서 자신에게 '너무나 과분한' 여자에게 대시하여 성공한 사례는 20년쯤 전에, 영화에서 한번 있었다고 할까(다시 생각해보니 이 영화의 주제는 문성근의 헌신이 아니라 김희애의 헌신이로군). 어째서 그런가. 사실 이 또한 진화심리학적 해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저자의 말대로 헌신은 연애하는 데 참고는 될지언정 결정적이진 않다. 연애 코칭으로선 치명적이지 않나 싶다.

 

 

'연애'라는 말의 용례가 제한적이어서 그렇지, '사랑'이나 '애정'으로 바꿔보면, '왜 당신은 동물이 아닌 인간과 연애를 하는가'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 당신은 동물이 아닌 인간을 사랑하는가' 혹은 '왜 당신은 동물이 아닌 인간을 좋아하는가'라고 바꿔보면 알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연애'는 속칭에서 그렇듯이 '성관계'를 뜻하는 정도로 한정되지만, 인간은 유별나서 또 '수간'이란 걸 버젓이 저질러왔다. 그런 사정들을 고려하면 책의 제목은 '왜 당신은 보통 동물이 아닌 인간과 섹스를 하는가' 정도로 눅여서 이해해야겠다. 아니 동성애자뿐 아니라 아무런 성욕도 느끼지 못한다는 무성애자까지 고려하면, '인간끼리의 연애'에 대해서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상당히 곤란하다. 진화심리학과 연애코칭을 결합하고자 한 시도에 대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유다...

 

14.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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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볼라가 한국에도 상륙한다면 모를까 백신을 맞힐 아이도 없기에 후나세 슌스케의 <백신의 덫>(북뱅, 2014)은 나와 무관할 책일 줄 알았다. 두 가지가 놀라운데, 일단 저자의 책이 국내에 상당히 많이 나와 있다는 점(나는 초면이다), 그리고 백신이 생각보다 문제가 많으며 심지어 음모론과도 연계된다는 점.

 

 

저자는 소비자문제 및 환경문제 평론가라고 소개되는데, 국내에 출간된 책만 해도 열댓 종에 이르고 그 가운데 작년과 올해에 나온 책이 일곱 권이다. 이 정도면 건강 분야에서는 손꼽히는 저자가 아닐까 싶다. 최근작 <굶으면 낫는다>(문예춘추사, 2014)의 메시지는 신선(?)하지만, <백신의 덫>의 주장은 섬뜩하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이 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던 백신의 어두운 이면을 들춘다. 병의 예방을 위해 맞는 예방접종의 각종 부작용 및 위험성을 경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미 소멸해 사라진 병이나 가볍게 앓고 지나갈 수 있는 병에 대해서도 무분별하게 백신 접종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꼬집으며 백신 신화가 탄생하게 된 경위와 실체를 파헤친다. 과도한 의료행위로 보이는 백신 접종이 아이를 가진 모든 부모의 의무처럼 일반화된 이유는 뭘까?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거대 제약회사다. 후나세 슌스케는 국민들의 건강을 챙기고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거대한 세력에 맞서 백신의 유해함을 제대로 알고 은밀히 추진되고 있는 강제적인 의료 시스템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신 접종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는 세력, 곧 거대 제약회사의 배후로 저자가 지목하는 '어둠의 세력'이 로스차일드와 록펠러 양대 가문이다. 잉글랜드은행과 미국 연방준비제도를 장악한 로스차일드 일가는 거의 모든 산업분야의 주요 기업도 소유하고 있는데, 제약쪽에선 화이자와 클락소 스미스클라인이 로스차일드계 기업이다(믿거나 말거나 세계의 부 가운데 7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는데(이런 책이야말로 해당 분야의 전문가 리뷰가 필요하다), 저자가 제기하는 충격적인 사실 가운데 하나는 백신을 통해 인구를 억제하려고 한다는 음모다. '인구 삭감을 위한 생물학 무기'로 백신이 사용되고 있다는 폭로다. 1990년대에 빌 게이츠와 데이비드 록펠러 등이 개발도상국의 예방접종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WHO를 통해서 신형 파상풍 백신을 지카라과, 멕시코, 필리핀 등에 공급했는데, 이 백신에서 hCG라는 호르몬 성분이 검출되었다. 파상풍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임신 저해 물질'이다. 결국 각국에서 이 백신에 대해서는 접종 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저자에 따르면 인구 삭감 계획은 '음모론'이 아니라 실제다. 1978년 빌더버그 회의에서 헨리 키신저는 "세계인구를 절반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고, 빌 게이츠도 2010년 한 강연에서 "현재 세계인구는 68억이며 90억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백신이나 의료, 생식 건강서비스(중절 등)를 잘 운용하면, 아마도 10-15%는 줄일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록펠러가의 니콜라스 록펠러는 "세게 인구는 적어도 절반으로 죽여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는데, 이 발언을 공개한 영화제작자는 2007년에 의문사를 당했다고. 게다가 CIA 극비작전 가운데는 아프리카 흑인들 사이에 내전을 부추켜서 서로 죽이게끔 한다는 것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백신 접종을 '의료 마피아'가 추진하는 '인구 삭감 계획'이라고 보는 저자의 관점은 상당히 충격적이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록펠러 가문의 사람들은 합성의약품을 절대로 먹지 않는다고). 음모론과 관련해서는 일본의 반핵평화운동가 히로세 다키시의 책들도 떠올리게 한다(세계를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에 대해서는 일본 저자들이 일가견을 갖고 있는 듯하다).

 

 

아무튼 그래서 덩달아 로스차일드가에 대한 책도 오전에 몇 권 주문했다. 니얼 퍼거슨의 <로스차일드>(21세기북스, 2013)와 프레드릭 모턴의 <250년 금용재벌 로스차일드 가문>(주영사, 2008) 등이다.

 

 

더불어, 이제 더 맞거나 맞힐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백신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건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따지면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주의를 요한다!). 로버트 시어스의 <우리집 백신 백과>(양철북, 2014)나 팀 오시의 <백신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어문각, 2006) 등이 가정 상비약처럼 집안에 챙겨놓을 만한 책. 아니 '상비약'이란 비유가 안 맞을지도 모르겠다. 후나세 슌스케의 <약, 먹으면 안된다>(중앙생활사, 2013)를 떠올려 본다면(의사나 약사들이 가장 싫어할 만한 저자일 듯). "약, 절대로 먹으면 안돼!"란 말을 대놓고 한다면, 혹 이런 대꾸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너, 약 먹었냐?"

 

14.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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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동녘, 2013)을 교재로 강의를 하게 돼 그밖에 참고할 자료도 더 찾아봤는데, 가장 최근에 나온 건 프레데릭 보름스의 <현대 프랑스철학>(길, 2014)이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이 사르트르부터 시작하는 데 반해서 <현대 프랑스철학>은 역시나 베르그손부터(개인적으로는 '베르그송'이란 표기를 더 선호하는데, 이젠 그렇게 표기하는 전공자들이 거의 없어졌다. 고유명사 표기에서 원음주의는 한 가지 기준일 뿐이고, 일관성이라는 면도 고려해야 한다).

 

 

베르그손에 관해서라면 최근에 나온 황수영의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갈무리, 2014)도 참고할 수 있는데, 입문서에 해당하는 책은 아니고 '깡길렘, 시몽동, 들뢰즈와의 대화'라는 부제대로 '심화' 단계에 해당한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에는, 이게 관행인가 약간 의문이 드는 '철학자'들도 포함돼 있는데, 통상 문학비평가로 분류되는 모리스 블랑쇼, 롤랑 바르트와 정신분석가로 자크 라캉,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그들이다. '철학'의 의미를 '사상'에 가까울 정도로 폭넓게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정작 폴 리쾨르 같은 경우가 빠진 게 특이사항. 교양강좌를 옮긴 것인 만큼 그래도 난이도가 얼마간 조정되어 있다는 게 장점이다(그렇더라도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읽어나가는 건 역시나 무리해보인다).

 

 

사실은 프랑스 현대철학에 대한 참고자료로 벵쌍 데꽁브(벵상 데콩브)의 <동일자와 타자>(인간사랑, 1990)를 먼저 떠올렸지만,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절판되긴 했지만 영어판과 러시아어판까지 나와 있을 정도로 정평이 나 있는 책. 1930년대부터 1970년말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영어본 제목은 <현대 프랑스철학>이다.

 

 

이와 함께 프랑스 구조주의 관련으로 읽어볼 만한 건 뤽 페리와 알랭 르노가 공저한 <68사상과 현대 프랑스철학>(인간사랑, 1995). 이 또한 절판된 지 오래된 책이지만 다시 찾아보니 영어판이 나와 있다. <60년대 프랑스 철학>이라는 제목이다. 구조주의와 그 이후를 다룬 책으로 보면 되겠다. 비슷한 시기를 다룬 책으론 크리스티앙 데캉의 <오늘의 프랑스 철학사상>(책세상, 1991)도 번역됐었지만 개인적으론 별로 재미를 못 본 책이다. 절판되지 않은 책으로 에릭 매슈스의 <20세기 프랑스 철학>(동문선, 1999) 정도가 유익했다.

 

 

찾아보니 영어본으로는 개리 거팅이나 앨런 슈리프트 같은 전공자들의 20세기 프랑스철학 가이드북이 나와 있다. 좀 부담스런 가격대여서 구입은 보류하지만 일단은 보관함에.

 

그밖에 구조주의 관련으르는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1-4>(동문선, 1998-2004)나 만프레드 프랭크의 <신구조주의란 무엇인가1,2>(인간사랑, 1998-1999) 등이 더 있지만 일반 독자의 독서 범위는 넘어서는 것 같아서 생략한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에서 <현대 프랑스철학> 정도를 독파한 연휴에 생각해볼 문제이지 싶다...

 

14.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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