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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한국일보 문화란에 '요즘 시'의 경향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오늘이 '시의 날'인 걸 기념해서인 듯한데, 며느리도 모를 법한 이 날의 유래는 이렇다고: "11월1일은 제19회 '시의 날'이다. '시의 날'은 우리나라 현대시의 효시로 알려진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 11월 잡지 '소년' 창간호에 실린 것을 기념해 1986년 제정됐다." 1986년이면 전두환 정권하이다. 5공 때 이어령 선생이 문화부 장관을 한 적도 있으니 그 분 아이디어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딱 이어령표 마인드의 산물 같다. 어쨌거나, 그런 날이 벌써 19번째이건만, 무슨 행사를 벌인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시시한 날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저런 기념일을 챙기는 건 문화부 기자의 본분에 충실해 보이며, 덕분에 나는 아침부터 '요즘 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연예인들만한 사이즈로 지면에 오른 요즘 시인들의 면면들을 구경해볼 수 있었다. 혹 기사를 지나쳐버린 분들을 위해서 내용을 정리하고, 생각할 거리를 챙겨두도록 한다.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는 우리 시의 새로운 경향을 짚"고자 하는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요즘 시(詩)가 어려워졌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시인 평론가들조차 불편함을 토로할 정도다. 한 두 사람 한 두 편의 돌출적인 현상이 아니라, 최근 등단했거나 한 두 권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뚜렷한 경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경향을 다른 말로는 '엽기시'라고 한다.

 

 

 

 

얼마전 미당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되었는데, 수상자는 작년에도 시인들이 뽑은 최고작을 쓴 바 있는 문태준 시인이며 수상작은 <누가 울고 간다>이다. 짧은 시이므로 옮겨본다.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특별히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는 소품인데, 사실 이런 정서와 리듬감, 시상 전개 등이 한국 서정시의 주류를 형성해왔다(문태준 이전에는 장석남이 있었다). 기형도 이후에, 혹은 장정일, 유하 이후에 여전히 이러한 시가 씌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퇴행'이면서도 '관례'이다. 유구한. 그리고 그런 시인과 시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당연해 보인다. 2000년도 이후에 나는 시도 쓰지 않고 읽는 것도 게을리 하고 있지만(나는 시에 대한 '기대'를 거의 접었다) 요즘 동태를 보아하니 그 사이에 꽤 특이한 젊은 시인들이 여럿 등장한 모양이다. 세태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문학적 성감을 찾아나선 이들의 이름은 김행숙 황병승 김민정 김근 김언 이민하 김이듬 등이다. 기사에는 8명의 시인들이 8인방처럼 거명돼 있는데, 요약하면 1:8이요, '문태준과 아이들' 혹은 '문태준과 엽기들'이다. 이들을 차례로 호명해보자.

 

 

 

 

 

 

 

 

 

 모두가 올해 데뷔시집이나 새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이다. 김이듬, <별모양의 얼룩>(천년의시작, 2005); 진수미,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문학동네, 2005); 김근,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 김언, <거인>(랜덤하우스중앙, 2005); 이민하, <환상수족>(열림원, 2005);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열림원, 2005);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 2005); 김행숙,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5)

(평론가 이장욱에 의하면) '외계어'로 시를 쓰는 이들은 (평론가 권혁웅에 의하면) 우리 시단의 '미래파'이다. 물론 이들이 떼로 몰려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외계인들끼리는 소통가능한가?) 하여간에 앞에서 인용한 문태준류의 시와는 달리 알아먹을 수 없다는 것이 이들 시의 특징이고 특장이다. 기자도 이 점을 표나게 지적하고 있다: "그 변화의 선두에 김행숙(35) 시인의 비교적 짧은 시 ‘달무리’를 보자. “그의 진동이 그에게 후광을 만든다. 그가 문둥이같이 뭉개질 때/ 배는 출렁이고 있었다. 내가 깔고 누운 파랑은 나를 통과한 그의 뒤편일까? (중략) 그의 뭉개진 코가 킁킁대며 누구니? 누구니? 묻고, 다시 물을 때// 아으, 부풀어 오르는 한 그루 버드나무.” 그의 시는 이성적 사고체계로 스며들지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과 느낌, 환상ㆍ분열적 내면 풍경에 철저히 기대고 있는 듯하다. 전통 서정시의 독법에 따라 어떤 의미나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고 무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실 알아먹을 수 없는 시가 문학사에 새로운 건 아니다. 이미 1930년대의 이상이 '욕먹는' 시 <오감도>를 썼다. 195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시'를 쓴 조향 시인 같은 분도 있었고(<조향 전집>(열음사, 1994)),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나 이승훈 시인의 비대상 시들도 다 낯선 시들이었다. 그렇다고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는 주류적인 시였나?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요즘의 '엽기시' 경향에 대해 특별히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만, 최근의 나온 시집들이 주된 경향을 이루면서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띌 뿐. 더불어, 현란한 이미지들이나 수사의 국적, 계보, 혹은 전통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게 이채로울 뿐. 해서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 

"이들 시의 메커니즘은 다양하다. 빛이나 공기 입자의 산란처럼 어지럽게 좌충우돌하는 사유의 혼종성, 세계와 자아의 대립과 반영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 성적ㆍ관능적 환상과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상징 등….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 시어들이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김행숙 시인은 문학적 감성의 변화를 말한다. “어떤 시는 시인/평론가보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이 오히려 뜨겁게 반응합니다. 폭 넓게 소통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좁은 대신 깊이 소통하는 층이 분명히 있어요.” 그는 그것을 생물학적 세대차이라기 보다는 차별화한 문화체험에서 비롯된 문화적 세대차이일 것이라고 말했다."(강조는 나의 것) 참고로 기자가 나열하고 있는 찬반론은 이렇다. 

이들 시에 대한 비판도 있다.

-문학의 본령이 문자언어를 통한 소통이다. 암호에 가까운 자의적 기호와 자폐적 무의식의 흔적들이 어떻게 문학인지 모르겠다.

-환상이 없는 문학은 없다. 두보의 시에도, 카프카의 글에도 환상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삶의 리얼리티를 상실한 채 머리(환상) 속에서 떠오른 느낌들을 시적 긴장 없이 풀어놓은 것 같다.

-하나 하나의 작품을 놓고 보면 참신하지만 모아놓고 보면 시를 형성하는 문법이나 문장을 엮는 방법 등이 흡사하다. 일종의 유행 같다는 생각이다.

그에 대한 반론이다.

-나는 말쑥하고 균형 잡힌 시를 혐오한다. 안정감 있고 깨달은 자는 침묵하면 좋겠다. … 나는 내가 쓴 시에 관해서 말하기가 뭐하다. 낯설고 잘 모르겠고, 몰라서 쓴다.… ‘노력’해야 한다면 그때는 안녕.(김이듬, ‘시와 반시’여름호-현대시와 퇴폐)

-시단에서 유일하게 죄악인 것이 있다면 바로 다양한 꼴을 못 보아주는 태도이다. 시적으로 봐도 그렇고 생물학적 측면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태도다.… 자신 안에 스스로 잡종의 비율을 높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김언, ‘웹진 문장’ 10월호-우리 시의 다양성과 새로움)

-아름다움은 움직이는 거다. …최근 시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논거로 삼은 자리는 절대로,항구적인 진리의 자리가 아니다. 차라리 최근 시들이 진리로 간주되어온 그 자리를 비판의 대상으로 겨누고 있다고 말해야 옳다. (권혁웅 비평집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

긍정적인/전향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경향을 바라보는 세 평자의 의견:

-황현산(고려대 불문) 교수는 “한국 현대시단의 양대 흐름을 형성했던 농경사회적 정서와 도시적 정서의 굳은 틈을 비집고 서울의 하위정서 혹은 지방도시적 정서들이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는 듯하다”며 “하기에 따라서는 향후 2~3년 내에 우리 시단의 지형도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의 문제와 관련, 그는 “승리한 자의 말은 상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소통되지만, 억압 받는 자는 말 한 마디 하기도 힘들고 하더라도 타박 당하기 일쑤”라며 “하지만 그 말은 우리가 반드시 소통해야 할 말“이라고 말했다.

-2003년 김행숙씨의 첫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사)의 해설에 이장욱(시인ㆍ소설가ㆍ평론가)씨는 “우리가 도달해가는 현대시의 어떤 징후”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쓴 바 있다. 이제 그 징후는 좋든 싫든 하나의 도도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경향이 우리 현대시의 다양성을 확장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지배적 경향을 형성할 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최근 낸 비평집에서 이들 젊은 시인들의 경향을 ‘미래파’라 명명한 권혁웅(시인ㆍ평론가)씨는 “60년대의 김수영, 80년대의 이성복이 당대 시단에 충격을 준 것처럼, 이들 시가 낯설고 불편한 것은 새로운 미학과 세계관을 한 발 앞서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먼 훗날, 이들의 작품이 낡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이들의 작품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할 날이 올 것이다.”(‘미래파’ 171쪽)

이어서 기자는 두 편의 시를 예시하고 있다. 나의 독후감으론 황병승과 진수미의 예시된 시는 종류가 좀 다르다. 그것은 시가 그 독법에 있어서 어느 만큼의 논리를 허용하는가, 혹은 어떤 종류의 논리를 요구하는가에 달려 있다. 더불어, 시의 난해성이 시적 주체의 개성과 연관되는 것인지, 아니면 개별성 이전의 전주체성(presubjectivity)과 연관된 것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요즘 시'를 한번 읽어보시라. 그리고 해독/해석해 보시라. 나의 생각은 조만간 다른 자리에서 정리해두도록 하겠다.

▲ 커밍아웃 / 황병승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 그러다가 어느 날 / 진수미

유방은 부풀어오른다 터질 듯이 고요한 프로펠러
갈증을 느낀 비행선이 그림자를 몰고 나타난다.
보라색 태양일랑 내가 오려냈다오.

승냥이들이 거품 무는 파도가 쫓아오고
내장 없는 배의 항로를 걱정하는
어머니, 이 배에 앓는 항구가 누워 있어요.

사랑스런 임차인들아,
나는 그들에게 돌려줄 것이 있다오.

당신의 장기를 물어뜯는 거리의 개들
적선은 더 큰 바람을 부를 거예요.

소유를 짤랑이는 열쇠와 함께
집달리들이 득달같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냉장고는 머리가 깨져 시큼한 국물을 지리는데
벌레들이 바람의 커튼을 흔들며 날아올라요.

뒤엉킨 서랍의
껍질 벗고 교미하는 실뱀 한 꾸러미,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05. 11. 01.

P.S. 다시 생각해보니까, '시의 날'은 5공때 문공부 장관을 지낸 정한모 시인의 '작품' 같다. 이어령 선생은 노태우 정권때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확실하진 않지만, 내 기억이 말해주는 건 거기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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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11-0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빈께서 다녀가셨네요.^^ 저도 가끔 검은비님의 그림 구경을 하는데, 제가 참견할 형편이 못되더군요. 그림을 보는 만큼 보듯이 시도 읽는 만큼 읽으면 되는 거 아닐까요...

파란여우 2005-11-0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계어로 씌여지는 시에 외계어로 반응하는 정서가 요즘 시가 아닌가해요
퍼 갑니다^^

로쟈 2005-11-01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밝히겠지만, 유사-외계시들도 더러 눈에 띕니다. '더듬거리며 말하기' 혹은 의미를 다리 절게 만드는 것은 (들뢰즈식의) 소수문학적 전략으로 유효하지만, '트렌드'는 언제나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의 문학장, 문학제도와 무관한 문제도 아니구요. 시집들이 모두 얌전하게, 시인 누구누구의 시집 뭐뭐로 출판되는 것 자체는 전혀 '소수적'이지 않은 현상이며, 지극히 이해 '잘되는' 현상입니다.

urblue 2005-11-01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 갑니다.
시는 잘 모르나 아는 시인의 이름이 언급되었군요.

kimji 2005-11-0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라 하기에는 울림까지 포함되어 있어 그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라는 인사로 대신하겠습니다. 가을, 시 읽기 좋은 계절이라는,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주억거리면서-
(첫인사,이지요? 두루두루 종종 뵙겠습니다,라는 인사도 동봉하면서- )


로쟈 2005-11-01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쓴 것도 별로 없는데, 많이들 내왕하시는군요. 제가 쓰는 분량을 점점 줄여야겠습니다.^^

도서관여행자 2005-11-01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퍼갈게요 ^^

검둥개 2005-11-01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퍼가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 (꾸벅)

페일레스 2005-11-01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지금껏 쓰시는 분량도 모자르십니다. 흐흐. ^ㅡ^

깜소 2005-11-02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저두 퍼갈께요..

로즈마리 2005-11-02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착한 시들에 짜증이 잔뜩 났었드랬어요. 말그대로 순 깨달음의 시들. 그렇다고 젊은 시들의 외계성이 과연 좋은가..역시 의문입니다. 젊은 피들의 치열함이 의미있게 형상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로쟈 2005-11-02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이렇게 시에 관심이 많으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시 얘기도 가끔 올려야겠네요...

젠틸레냐 2005-11-10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퍼갑니다.^^
 

 

 

 

 

"들뢰즈와 '하나의 삶'"에 이어지는 브리핑이다. 지난번에 나는 <들뢰즈 커넥션>의 5장 전반부(143-163쪽)를 주로 검토대상으로 삼아서 이 책의 번역과 교정이 좀더 꼼꼼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에 유감을 표했었다. 하지만, 이어서 제시한 일부 오역의 사례들이 그러한 유감/결론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란 반론도 제기됐었다. '부당한 지적'이란 역자의 반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능하다. 그러한 반론에 답함과 동시에 내가 근거없는 유감을 표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금 밝혀두기 위해서 5장의 나머지 후반부(163-192쪽)에서의 '오역', 혹은 번역에 대한 나의 '이견'을 제시하도록 한다(시간/분량 관계상 내용에 관한 정리는 생략한다. 해서 이 글은 '브리핑 없는 브리핑'이 될 것이다). 참고적으로 말해두자면, 다른 장들보다 더 많이 눈에 띄는 건 사실이지만, 특별히 5장에만 오역이 집중돼 있는 것은 아니다. 

-163쪽. "우리는 우리 자신을 라이프니츠의 '모호한 아담' 또는 스피노자의 '독자적 본질'로 보거나 또는 각자 하나의 무의식을, 독자화하는 불특정의 무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만 한다." 여기선 굵은 글씨 부분이 더 들어가야 한다.

-164쪽. "저 '특성없는' 자들은 '자신을 재인지'하기 위한 직접화법을 더 이상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직접화법'은 'direct speech(narration)'이 아니라 'straight narratives'를 옮긴 것인데, 둘이 같은 뜻인지 의문이다. '직접적인 이야기(서사)'란 뜻 아닌가? 이어지는 문장: "이 상황에서 복잡화하는 만남은 사건들이 펼쳐지는 기본절차로서의 동일시하는 재인지를 대체한다." 원문은 "In this situation, complexifying encounter replaces identifying recognition as a basic procedure through which events unfold."(92쪽) 'A replace B as C'는 'A가 B를 대신해 C의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사전에 다 나온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는 'A=복잡화하는 만남', 'B=동일시하는 재인지', 'C=사건들이 펼쳐지는 기본절차'이다. 역자는 B와 C를 동일시해버렸는데,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내다버린 격이다.

-164쪽 마지막 문장. "따라서 들뢰즈는 '타자들과의 구체적인 관계'에 대한 사르트르의 초상에 대해 쓸데없는 열정이라고, 불가능한 재인지를 향한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원문은 "Thus he[Deleuze] takes issue with Sartre's portrait of  'concrete relations with others' as a futile passion, rooted in a desire for an impossible recognition, saying that it preserves the very notion of subject and object(...)"이다. 역자는 '사르트르의 초상'을 'concrete relations with others'으로만 봤는데, 나는 "Sartre's portrait of  'concrete relations with others' as a futile passion, rooted in a desire for an impossible recognition"까지라고 본다.

'take issue with'는 '-와 의견이 맞지 않다', '대립하다'란 뜻이며,  'take A as B'처럼 'A를 B로 간주하다'란 뜻으로 쓰이지 않는다(사전에 그런 용례가 없다). 더구나 '부질없는 수난(futile passion)'이나 '불가능한 인정을 향한 욕망(desire for an impossible recognition)' 같은 건 사르트르의 관용구 아닌가? 따라서 다시 옮기면, "들뢰즈는 '타자와의 구체적 관계'를 불가능한 인정을 향한 욕망에 뿌리를 둔 부질없는 수난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트르트식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역자에 따르면, 사르트르가 '타자들과의 구체적인 관계'에 대한 '쓸데없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설마 '타자의 지옥'을 얘기한 사르트르가 그랬을까?

-170쪽. "들뢰즈가 '상대적 탈영토화'라 부르는 것에서처럼, 뭔가 그것을 역동일성이나 역국가로 '보상'하는 것이 필요할지라도 말이다." 원문은 "(...) it is necessary to 'compensate it with a counteridentity or counternation, as in what he calls 'relative deterritorialization'"(96쪽) 'compensate A with B'는 'A를 B로 상쇄하다'란 뜻이다. '-에 대해서 보상하다'에 해당하는 것은 'compensate for'이다. '보상'과 '상쇄'를 동의어로 본다면 할 수 없지만.

-170쪽.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걸맞지 않은 것"은 "not to be unworthy(indigne) of what happens to us."을 옮긴 것인데, 'not'은 어디로 간 것인지? 이 스토아학파적인 '실천적 물음'은 4장에서도 한번 나왔었다.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걸맞지 않게 되지 않을 수 있는가'"(100쪽) "how 'not to be unworthy of what happens to us.'"(51쪽) 같은 원문을 옮긴 것인데,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걸맞지 않은 것'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걸맞지 않게 되지 않는 것'이 같은 뜻인가? 뒷문장이 맞게 옮긴 것이지만, 우리말로서는 '괴이하다'.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걸맞지 않을 수 없는가"로 옮길 수는 없는 것일까?

-175쪽. 푸코와 관련된 대목들에서 역자는 'disciplinary'를 '분과적'이라고 옮겼는데, 푸코의 텍스트를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미심쩍다. 가령 각주 39)에서 "푸코에게 도시 인구통계학의 문제는 분과의 형성을 야기하는 문제들의 핵심 원천이다."라는 문장은 "For Foucault, problems of urban demography supplied a key source of the problems that led to the formation of the disciplines."(161쪽)을 옮긴 것인데, 역자는 62쪽에서 'disciplines'을 '훈육'이라 옮긴 바 있다("들뢰즈는 푸코가 훈육 분석에서 진단했던 것과는 다른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물론 단어의 뜻은 문맥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것이지만, 나는 이 두 문맥이 서로 다른 것인지 의심스럽다. 같은 각주에서 'the politics of health'를 '보건의 정치학'이 아닌 '건강의 정치'로 옮긴 역자의 감각을 믿어야 하는지도.

-179쪽에서 흄의 개념 'conventions'를 (앞장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협약'으로 옮겼는데, 이 또한 맞는 것인지 궁금하다(흄의 책을 찾아 읽어야 하나?). 흄은 자아(self)라는 걸 '나'라고 말하는 습관에서 파생된 '사회적 협약'의 산물로 보는데, '협약'보다는 '관습'이란 역어가 더 적당한 것이 아닐까?(즉 '자아'는 '관습'적인 것이다) 들뢰즈가 경탄하는 게 "흄이 이렇게 고전적인 계약이론에서 벗어나서 그 대신 정부의 '신뢰성'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방식"이라고 한다면, '협약' 개념이 어떻게 고전적인 '계약이론'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인지? 영국 경험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로선 상식에 근거하여 그런 의문을 갖게 된다.

-179쪽. 하단부에서 폭력에 관한 대목들인데, "이 잠재적 폭력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이해관계나 선택들의 다소간 '합리적인' 배열을 통해 단순하게 정착될 수 없는 문제다." 같은 문장은 우리말로 이상하지 않은가? "폭력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단순하게 정착될 수 없는 문제다."? 물론 '정착되다'는 'be settled'의 번역인데, ('be settled down' 정도라면 모를까) 여기서는 '진정되다' '가라앉다' 정도의 뜻이겠다. 그런 정도의 수단들로는 진정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 이어지는 문장: "공동체도 사회도 그것을 포함할 수 없는 것이다."("neither Gemeinschaft nor Gesellschaft can contain it.") 여기서 '그것'은 '폭력의 문제'이다. 폭력의 문제를 포함할 수 없다? 우리말로 이상하면 한번 더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contain'은 '포함하다'란 뜻 외에도 '억제하다(restrain)'란 뜻을 갖고 있으며, 여기선 그런 뜻이어야 말이 되지 않을까?

-183쪽.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국가의 기원으로 보는 '홉스의 허구(fiction)'는 '홉스의 가설'로 옮기고 싶다. 이건 그냥 내 취향이다.

-186쪽. 칸트에 관한 내용인데, "칸트는 '법' 및 복종에 대한 법의 '정언적' 요청의 주위를 '선'이 돌고 있는 것으로 보자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그런 복종에서 '도구적' 세계로부터의 자유의 원천 또는 목적이나 그것의 '가언적 명령을 발견한다." 원문은 "He[Kant] proposed to see the Good as revolving aroung the Law and its 'categorical' call for obedience, finding in such obedience the source of a freedom from the 'instrumental' world or ends and its 'hypothetical' imperatives."(107쪽) 문제가 되는 것은 finding의 목적어이다. 역자는 'the source of a freedom or ends and its 'hypothetical' imperatives' 전체를 목적어로 보았지만, 나로선 'the source of a freedom'만 finding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나는 '도구적 세계'와 '목적들 및 그 가언적 명령들'을 동의어로 보는 것이고, 정언적 명령에 대한 복종에서 칸트는 그러한 것들로부터의 '자유의 원천'을 발견했다는 얘기. 역자를 따르자면, '그런 복종'(=정언적 명령에의 복종)에서 '가언적 명령'을 발견한다는 것이 되는데, 말이 되는 것인지? 적어도 내가 아는 칸트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다(상식을 '상투적 지식'으로 정의하는 역자는 의견이 다를 수 있으므로 나의 무지를 깨우쳐 주시기 바란다). 

-187쪽. 안티고네 얘기인데, "가령 우리는 안티고네를 개별적 법들이나 도시의 선에 항상 앞서는 이 '법'과 우리가 그것에 영향을 미치려 할 때 일어나는 일을 극으로 표현한 여성 인물이라고 읽을 수 있다." 원문은 "one might read Antigone, for example, as a feminine figure who dramatizes this Law that always precedes the particular laws or the good of a city, and what happens when one tries to act upon it."(108쪽) 역자는 'act upon'을 '영향을 미치다'로 해석했는데(물론 그런 뜻도 있다), 여기서는 문맥상 '-에 따라서 행동하다'란 뜻이다. <안티고네>는 여주인공이 개별적인 법(law) 혹은 도시의 선에 반해서 그 대문자 법(Law)에 따라 행동하려고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극화한 작품이므로...

비록 주의하고자 했지만, 사소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지적들, 그래서 부당하고 편파적인 지적들을 이 글은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171쪽에서의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자면) 부득불 "타자를 위해 말하는 것의 무례함(indignity of speaking for others)"을 또한번 범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무례함'은 잘못된 '표상'이나 '동일시'에 묶이지 않는 "나와 우리를 말하는 새로운 습관(new habits of saying I and we)"을 우리가 발명해내기까지는 감수해야 하는 성질의 것인지도 모른다. 혹 역자의 주변에 예의바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좀 무례한 이들도 있었더라면, 역자의 바람대로 <들뢰즈 커넥션>이 들뢰즈 사상에 대한 '중요한 입문서' 역할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런 역할이 포텐셜로만 머물고 만 것 같아서 거듭 유감스럽다...

05. 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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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5-09-11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요일에 왠일이십니까? 쏟아지는 바쁜일 때문에 학교에 나오신 것인지?
대문의 그림이 바꼈군요.

로쟈 2005-09-1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락까지 싸들고 왔습니다(흑흑)... 그림은 러시아 출신 화가 야블렌스키의 얼굴 시리즈입니다. 아주 오래전 러시아 아방가르드 전시회때 어느 미술관에서 전시된 적도 있었던 듯. 제가 좋아하는 그림들입니다...

armdown 2005-09-20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잘 보내셨는지요...언급하신 몇몇 대목들은 명백한 잘못으로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부당하고 편파적인 지적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제 홈페이지에서 몇 가지 언급을 하려다 말았는데(건강이 심히 좋지 않아 한 달 이상을 거의 외부 활동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아직 이 자리에서도 반론 또는 답변을 달기는 어렵군요. 제가 편파적이라 한 까닭은, 이 책 원서 자체가 담고 있는 많은 오류들을 하나하나 잡아내며 번역한 '공'(이것이 과를 용납케 하는 빌미가 되지는 않지만)은 전혀 언급도 없이 '과'만을 언급해서 독자들이 오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기대가 컸기에 실망이 크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고, 제 불찰이기에 앞으로 더 잘하도록 격려하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지적 중에서 받아들일 만한 것들은 제 홈페이지를 통해 공지할 터이니 그것을 답변으로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쟈 2005-09-22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이 안 좋으셨군요. 속히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역자의 '공'에 대해서 제가 둔감했다면, 제가 '원서 자체가 담고 있는 많은 오류들'을 짚어낼 만한 안목을 갖고 있지 않아서일 겁니다(제가 발견한 건 원서 인명에서의 오타가 하나 교정된 것뿐입니다). 이 점은 양지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되는데, 그러한 '많은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라이크만이 책은 '좋은 책'이며 훌륭한 입문서인가요? 더불어, 원저자의 오류가 교정된 대목에서는 역자가 개입해서 지적하고 교정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 아닐는지요?(독자가 역자의 '공'을 스스로 헤아려야 한다는 건 일반적이지 않은 요구 같습니다.) 역주가 적게 붙어 있는 번역서도 아닌데 말입니다...
 

 

 

 

 

라이크만의 <들뢰즈 커넥션>(현실문화연구)을 읽기 시작한 지 좀 됐지만, 아직 다 읽지는 못했다. 진도가 더디게 나가는 건 내가 따로 전공 관련 논문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죽죽 읽어나갈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들뢰즈 철학 전반에 대한 매우 압축적이면서도 수준높은 개관을 제공해주는 책임에는 틀림없지만, 적어도 편하게 읽히는 내용은 아니며 번역 또한 그러하다. 책에 대한 리뷰와 함께 번역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보기로 한 바 있지만, 그게 예상보다 많은 견적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몇 차례 나누어서 다루어야 할 듯하다. 당장에 다룰 건 제5장 '삶'이다. 한동안 덮어두었다가 다시 읽게 된 장이기도 하지만(그래서 기억이 용이하다), 번역에서 가장 문제적인 '실수'를 포함하고 있기에 먼저 짚어둘 필요가 있어서이기도 하다.  

역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들뢰즈 전문가이지만, 아쉽게도 이 번역서는 그의 '명성'에 그닥 도움이 될 듯하지 않다. 독자적인 번역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자유/권리이겠지만, 그러한  자유/권리가 다른 역자의 사례이지만 '존 라이크만'의 또다른 책, <건설들(Constructions)>을 '존 라흐망' 의 <들루즈건축>(접힘펼침, 2004)으로 옮기는 수준이 되면(<들뢰즈 커넥션>의 22쪽에서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그 책이다), 그러니까 비유컨대, '들뢰즈'를 '들루즈'로 옮기는 식이 되면, 문외한들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비록 들뢰즈 철학이 '들뢰즈'라는 고유명사가 함축하는 '인격'이나 '주체'에 대해서 심히 부정적이라 하더라도 말이다(그런 들뢰즈의 정신에 충실하자면, 우리는 그를, 들뢰즈라는 다양체를 '들뢰즈' '들루즈' '들러즈' '들레즈' '델레우즈' 등으로 매번 다르게 호칭해야 될지도 모른다).

역자의 '실력'을 십분 인정한다고 할 때(그렇게 쉬운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들뢰즈 커넥션>은 출간 이후 계속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있는데, 거기엔 역자에 대한 '신뢰'와 입문서에 대한 '기대'가 반영돼 있을 것이다).다), 이 책의 후반부 작업이 좀더 꼼꼼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그건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 2005)를 읽으면서 느꼈던 바이기도 하다).  가령, 145쪽에서 '기존의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inattributable)'에 병기된 영어 단어는 'unattributable'의 오타이다. 이게 발견일 것도 없는 것이 152쪽에 '설명할 수 없고'란 말이 다시 나오면서 이번엔 'unattributable'로 병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단어는 대세의 차이는 없더라도 '귀속시킬 수 없는' 정도의 뜻 아닌가 싶다.  

언어학의 '화용론(pragmatics)'를 '화행론'으로 일관되게 옮겨주는 것은 역자의 고집이자 권리일 테니까 넘어갈 수 있다. 그걸 때로 '실천학'이라고 옮기는 것도 '실천(praxis)'이란 말에 '아주 약한' 철학자/지식인들의 편향성을 반증하는 것으로 역시 그냥 넘어갈 수 있다.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을 들뢰즈의 '실천주의'라고 부르는 것도(이상은 24쪽 역자주). 하지만, 이런 식의 '자유'가 통용/허용되기 위해서는 다른 데서 뭔가 '제 실력'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세심함이나 치밀함 같은 것 말이다. 한데, 153쪽에서 '비인칭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례로 들고 있는 "it is dyng."이란 문장을 '그것이 죽어간다'라고 옮긴 것은 눈을 의심하게 한다. 바로 뒷페이지에서 '말하고 있다(it is talking)'이나 '이야기하고 있다(it is saying)'로 옮겨진 문장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러니까 'it's raining.'에서와 마찬가지로) 'it is dying.'의 'it'은 비인칭 주어인데 말이다.

물론 어떤 번역이 무오류적으로 완전무결할 수는 없지만, 뭔가 과감한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번역이라면 좀더 꼼꼼하게 재검토/교정 작업을 진행했어야 하지 않을까? 다소 성의가 부족해보이는 이 번역서에서 결국 '사건'이 터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161쪽에서 "들뢰즈에게는 그런 '가족주의'는 아무것도 설명하는 바가 없다." 앞에는 '그런 가족주의'에 해당하는 내용이 뭉텅으로 누락돼 있다. 오이디푸스 비판과 관련한 대목이어서 유심히 원서를 읽고 대조해보기 위해 번역문을 살펴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한두 줄도 아니고, 어떻게 열줄이나 누락될 수 있는 건지 신기했지만, 하여간에 이 또한 교정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실수일 수도 있으리라(하지만, 최종교정의 책임은 누가 지는가?).

빠진 대목은 이렇다: "The problem with psychoanalysis is that having discovered such presubjective 'powers,' such complicating impersonal 'virtualities' of our libidinal bodies and their 'vicissitudes' in our lives, it enclosed them with a new system of 'personalizing' identification - that of the family and the 'images' of familial persons, as if the unconscious were only a kind of deficient identification within the family order."(90쪽) 우리말로 옮기면, "정신분석학의 문제는 우리의 리비도적 몸체의 복잡한 비인칭적 '잠재성'과 우리 삶에서의 그 '변화과정' 같은 주체 이전의(=前주체적) '역량들'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역량들을 '인칭화하는' 새로운 동일시 체계로 덮어버린 데 있다. 즉, 가족의 체계, 가족 구성원이라는 '이미지들'의 체계로 말이다. 마치 무의식이란 게 단지 가족 질서 내에서의 일종의 불완전한 동일시 정도밖에는 아니라는 것처럼." "들뢰즈에게는 그런 '가족주의'는 아무것도 설명하는 바가 없다."라는 건 거기에 이어져야 한다.

제5장에서 저자는 제4장에서 다룬 다양체/다양성(multiplicity)의 문제를 이어받아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들뢰즈/가타리의 강령적 선언을 풀이하면서 시작한다. 즉 '다양의 실천학'(=다양성의 화용론)에 의해 제기되는 물음은 차라리 "우리의 뇌는 새로운 비표준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말할 수 있도록 항상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면 과연 무엇이어야만 하는가"로 재정식화될 수 있다. 이러한 소수언어의 화행론(=화용론)은 들뢰즈에게서 더 넓은 (범주의) '실천철학(practical philosophy)'에 속한다. 왜냐하면, "다양체들은 특정 사회집단이나 개인으로서의 우리보다 앞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순서적으로 먼저, 그리고 더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

다시 말해, "다양체들은 사회가 우리를 나누어놓는 그램분자적 방식보다 앞서며, '인격들'이나 '주체들'이라는 우리의 바로 그 관념들보다 앞선다."(144쪽) '그램분자'라는 건 흔히 '몰'로 번역돼왔던 것이며, 나에겐 몰이란 표현이 익숙하다. 그러니까 화학에서 '분자/몰'의 대립구도를 들뢰즈는 '다양체/인격들 혹은 주체들'이란 구도로 변주하고 있는 것. 분자들이 보여서 몰을 구성하듯이, 인격들(혹은 주체들)을 구성하는 건 다양체들이다(여기서 분자운동과 다양체들의 복잡화, 곧 주름운동은 등가적이다). 해서, 중요한 것은 "동일성보다는 다양체의 견지에서 생각하는 것, 그리고 다양체를 만들거나 건설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인격, 행위, 믿음 등 실천적 개념들의 폭(=범위)을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재고한다는 것이고 의심한다는 것이다. 왜? 그것들은 다양체의 사태와 운동을 설명하기는 부적합한 너무 큰 범위의 개념들이기 때문이다(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휘두르는 격이다)

"우리가 자신과 서로서로를 '다양'하다고, 또는 '다양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많은 분명한 동일성들이나 자아들을 갖고 있다고 상상하는 게 아니다."(145쪽) "더 일반적으로 말해 들뢰즈는 다양체 개념으로써 개인과 사회, 공동체(=공동사회)와 사회(=이익사회), 현대성과 전통 등의 구분에 기반한 사회학에서 벗어나 다른 종류의 물음을 제기하고자 한다." 여기에 새롭게 도입되는 것이 '군중(crowds)'을 대신하는 '무리(packs)'이다. '무리'라고 옮겨져 있는데, 한팩 두팩할 때의 'pack'은 패거리'나 '떼거리'란 뜻이며, 군중이라는 몰(그램분자)에 비하면 분자적 수준의 단위이다. 들뢰즈/가타리의 미시정치니 분자정치/분자혁명은 바로 이런 단위의 차원, 하위주체적이고 하위집단적인 차원에서 정치를 사고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들뢰즈는 다양체와 다양체의 시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는 도시의 문제, 즉 뇌와 도시의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도시'를 정치적인 것에 대한 전통적 관념 속의 '국가'와 대립시킨다."(148쪽) 들뢰즈식의 대립구도가 여기서 하나 더 추가되는데, 그것은 '도시/국가'라는 구도이다. 다양체적 포텐셜의 계열체를 구성하는 분자, 무리, 도시 등은 모두 현실의 배아, 곧 잠재성의 영역이고, 들뢰즈는 모든 문제를 바로 그러한 수준에서, 현실(화)의 이전 단계에서 다시 사고하고자 하는 것. 그러한 수준/단계의 이름이 그것이 '삶(the life)'에 대립하는 '하나의 삶(a life)'이다. 거기서 부정관사 a는 이 삶의 불확정성, 불완료성을 지시하는바, 그것은 개별적인 삶으로 숙성/완숙되기 이전의 포텐셜로서의 삶이고 잠재성으로서의 삶이다. 들뢰즈의 철학은 그러한 '하나의 삶'이 갖고 있는 역량을 예찬하며 이를 적극 보존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고의 빌미를 들뢰즈는 흄에게서 가져온다("들뢰즈에게는 이러한 점이 흄이 정식화한 '정체성의 문제'가 갖고 있는 힘이다"). 즉, "우리의 자아나 '정체성'은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니며, 정말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라는 바로 그 관념이 일종의 철학적 허구인 것이다."(150쪽) 알다시피, 들뢰즈의 첫 철학서는 흄 연구서인 <경험론과 주체성>(1953; 씌어진 건 1947년)이며, 라이크만을 읽으며 내가 새삼 깨달은 바는 들뢰즈에게서 '경험론'이 갖는 의의인바 나는 흄의 경험론을 통한 들뢰즈 읽기가 들뢰즈 철학의 가장 쉬운 입구이지 않나라고 생각한다(이게 내 '경험론'이다). <들뢰즈 커넥션>의 제2장 '실험'이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다룬다(들뢰즈의 경험론에 대해서는 조만간 따로 정리해둘 예정이다). 여하튼, 그러한 아이디어에 결정적인 어시스트를 해준 건 들뢰즈에게선 베르그송의 (지속으로서의) 시간이었고, 영화였다.

영화에서의 시간-이미지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양체는, 혹은 '하나의 삶'은 '개체 이전의' 또는 '개체 이하의' '독자성'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래서 이것은 영어에서 'it's raining.'의 'it'처럼 비인칭적인 '판'에서 다른 독자성들과 연결된다. "다양체는 항상 구성된 자아나 의식적 인격으로서의 우리를 능가하며, 바로 그것들과 그것들의 다른 가능성이야말로 우리가 서로 타인이나 타자(autrui)라고 표현하는 것이다."(151쪽)

이어지는 대목에서 '서술(predications)'이란 역어는 흔히 'narrative'를 연상시키므로 좀 부적합하지 않나 싶다. 다른 대목들에서 '술어'로 옮겨진 것이 이 대목에서만 '서술'의 뜻을 갖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사실 역자는 첫페이지(21쪽)에서 'predication'을 '말의 풀이'라고 옮겼는데, 이 또한 교정과정에서 통일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손을 덜 보았다는 것은 같은 페이지의 '확인(identification)'의 경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후에 'identification'은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모두 '동일시'로 옮겨졌으며, 첫 대목만 '확인'의 뜻을 갖는다고 보기 어렵다(물론 뜻이야 거기서 거기지만).  

하여튼 "우리의 삶은(...) 결코 '설명되지(explicated, 펼쳐지지)' 않은 타자들과의 복합에 돌입할 수 있도록 충분히 불특정하고 모호해야 한다."(151쪽) 여기서 'explicated'는 괄호 속에 병기해 놓은 대로, '펼쳐지다'란 뜻으로 옮겨지는 게 낫겠다. 이 '주름(pli)'의 번역과 관련해서는 <차이와 반복>(민음사, 2004)에서의 용례(705쪽)를 적극 참조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역자가 기피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라이크만의 지적대로, "들뢰즈는 implication, explication, replication, complication, perplication 등 접힘, 또는 '주름'과 관계되는 단어들을 취해 놀이"(115쪽)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인용문의 '복합(complication)'도 취지를 살리자면, '온-주름운동'으로 옮길 수 있지 않을까? '복합'은 너무 밋밋하며 멋쩍다.

해서, "정말이지 그것이 모호하거나 특유화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잠재적으로 '하나의 삶'은 우리에 관해 가장 특유하거나 독자적인 것, 스피노자의 용어로 말하자면, 우리를 독자적인 본질로 만드는 것이다."(151쪽) 여기서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의 삶'이며, 이런 경우 우리말 지시대명사의 어법에 맞지 않는다. 소위 번역투인데, '그것이'가 빠지는 게 우리말로는 자연스럽다(의미전달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제의 일'을 좀더 이어서 한다. 그 사이에 역자께서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라이크만의 책이 고급 입문서이긴 하지만, 로도윅 같은 평자의 지적대로, "들뢰즈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데 나로선 동의하며, 그건 라이크만을 읽는 게 들뢰즈를 읽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는 걸 암시한다. 들뢰즈의 원서를 번역할 수 있는 역량이라면, 라이크만의 책을 옮기는 것 정도는 가뿐하게 해치울 수 있을 거라는 게 나의 예상이었고 내가 이 책을 서점에서 보자마자 사든 이유였다. 한데, 정말 의외로 잘 읽히지 않았다!(혹 역자는 술술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들뢰즈에 대한 나의 사전지식이 부족할 수도 있겠지만(그래도 평균치는 넘을 것이다), 라이크만의 책은 그런 독자들을 위한 것이 아닌가?

나는 무엇이 문제일까라는 원인에 대해서 따져보았고, 결론은 번역이 예상만큼 친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글의 서두에서 앞질러 지적한 건 그러한 결론이며, 이후에 제시하는 건 그 근거들이다. 너무 오버한 결론인가 아닌가는 그 근거들이 다 제시된 연후에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이리라. 부분적으론 오역에 대한 지적이라기보다는 의견 차이 정도를 언급하는 정도일 수도 있다. 그런 (사소한) 대목들까지 나열하는 것은 거꾸로 역자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반영한다. 그런 거 저런 거 다 넘어갈 수 있는 정도라면, 나로선 '김재인'이란 브랜드를 특별히 선호하거나 평가할 이유가 없다(그의 번역서인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 1998)를 나는 높이 평가하며, 그 책이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한 걸 기이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내가 역자에게 드리고 싶은 질문은 과연 이것이 자신의 역량을 다 쏟아부은 최선을 다한 번역인가, 하는 점이다. 이 글이 길어지는 건(물론 오역만을 지적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만, 역자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겠다.

계속 내용으로 들어가면, (번역과 무관하게) "우리의 삶은(...) 충분히 불특정하고 모호해야만 한다."(151쪽)에서 모호하다(vague)란 표현은 '불확정적이다'란 뜻으로 이해하는 게 알기 쉽다(고 나는 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삶! "'우리에 관해 개별적'이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특유한 것'은 따라서 인격적이거나 의식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존재하고 함께 존재하는 데 있어 설명할 수 없고 서술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84쪽) 원문은 이렇다: "'What is peculiar to us' without being 'particular about us' is then nothing personal or conscious, but on the contrary, something unattributable, unpredictable in our being and being together."(84쪽)

여기서 particular(개별적인)와 대조적으로 쓰인 peculiar(특유하다)는 것은 singular와 같은 뜻이다. 개별성은 일반성의 짝개념이며, 고진에 따르면, 단독성(=독자성)이 보편성의 짝개념이다. 들뢰즈가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이 독자적인 것의 영역, 단독성의 영역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인격적이거나 의식적인 것과 무관하다는 것. 그것은 그런 것들로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며, 예측할 수 없는 무엇이다(역자는 unpredictable을 '서술할 수 없는'으로 잘못 옮겼다. 'unpredicatable' 정도로 본 모양인데, 사실 그런 단어는 사전에 없다). 내가 이해하는 바대로 다시 옮기면, "우리에게 '개별적인 것'이 아닌 '독특한 것'이란 인격이나 의식과는 전혀 무관한 차원의 것이다. 반대로 그것은 우리의 존재와 그 결합에 있어서 뭔가 귀속시킬 수 없는, 예측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이렇듯 "의식적인 인격체인 우리보다" 앞에 오는 독자성을 들뢰즈-라이크만은 '멋진 비인칭성'이라고 부르고 '4인칭 단수'라고 부른다(하이데거식의 전통 형이상학이 '3인칭 단수의 철학'이라면, 들뢰즈의 철학은 '4인칭 단수의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4인칭 단수는 아무도 그것을 말하지 않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든 말해지는 것 안에 존속한다."(154쪽) 그리고 이러한 비인칭성은 (하이데거의) 세인(=세상사람들; das Mann)의 소외니 비진정성을 뜻하는 게 아니라 독자화의 조건이 되며, 삶의 가벼워짐과 그 가능성이 된다(155쪽). 여기서 '삶의 가벼워짐'은 'lightening-up of life'의 번역인데, 'lightening-up'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light up이란 표현과 관련해서) '빛나게 하다'는 뜻이 아닌가 한다.

155쪽 각주 20)에서 "우리는 그것을 다다이즘의 '기계' 개념(기계와 회귀의 결별과 더불어)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논의에서도 발견한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기계와 회귀의 결별'이란 게 무슨 뜻인지 역자에게 묻고 싶다. 다다이스트의 기계 개념에 관한 원문은 "the concept of Dadaist 'machines'(with their uncoupling from recurrences)"인데, 여기서 'recurrences'의 뜻은 '회귀'가 아니라 '반복'이다. 짐작에 다다이스트들이 고안해낸 '기계'라는 것은 한번만 써먹을 수 있는 기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반복사용이 불가능한 기계(그런데 '기계'다!). 그러니까 "다다이스트들의 (반복사용이 불가능한) '기계' 개념" 정도로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56쪽에서 'biopolitical formation'을 '생명정치적 형성체'로 옮겼는데, 이건 의견차이이겠지만, 푸코와 아감벤 등에서 중요한 개념인 'biopolitics'는 '생체정치'란 역어가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소문만 무성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가 조만간 번역출간되면 자세히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진도는 비인칭성까지 나간 것 같은데, 거기에 덧붙이자면, "들뢰즈의 생각에, '문학'이라 불릴 만한 값을 하는 것 안에는 개체화가 우리의 삶에 등장하는 방식을 그리는 비인칭적 '개체화'를 표현하려는 시도가 있다."(157쪽) '비인칭적 개체화'는 'impersonal individuations'의 번역이다. 이제 이어지는 건 아주 '멋진' 방식으로 비인칭적인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해명. 무의식은 "의식적 인격으로서의 우리보다 앞서는 다양체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종의 '실천학(=화용론)' 혹은 배치(agencement)를 요구한다. 이 배치란 건 '나'와 '우리' 같은 인칭대명사에 기반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자신의 '계열' 및 계열의 '잠재성'이라는 관념과 연결시키려 노력했다. 이른바, 리비도적 잠재성.

"그래서 '하나의 삶'의 실천적 문제는 그런 리비도적 잠재성들에 어떻게 도달할 것이며, 우리와 특정 사회적 또는 문화적 질서와의 동일시보다 앞서는 방식으로 그것을 한데 모으면서, 그것들을 어떻게 맨앞에 놓을 것인가라고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159쪽, 강조는 나의 것) "들뢰즈는 다른 가능한 관계들의 잠재성이라는 견지에서, 또는 아버지의 '부정'에서 단순히 파생될 수 없는 비인칭적 개체화라는 견지에서 (사회질서의) '바깥'을 이해하려 했다." 여기서 '아버지의 부정'은 'a father's 'no''의 번역인데, '아버지의 금지'라고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하다. 아버지가 '안돼!(No!)"라고 금지시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견지에서 들뢰즈는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억압가설을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억압하기 때문에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는 이 다른 인칭화된 방식으로 우리의 욕망들을 살기 위해 억압하거나 망각하며, 이것이 우리의 삶을 각각 욕망의 독자적 복합체로 만든다."(160쪽) 해서, "우리 각자가 '하나의 삶'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과 우리 각자가 하나의 무의식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따라서 똑같은 것에 이른다." 이어지는 설명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들뢰즈식의 이해이다.

160쪽에서 '우리의 특이성(peculiarities)의 분자적 배가'에서 '배가(倍加)'는 'multiplication'의 번역인데, 왜 이 대목에서만 '배가'로 옮겨지는지 궁금하다('배가'란 말 그대로 '두 배로 만든다'는 뜻 아닌가). 일반적으론 '증식' 정도로 옮겨질 텐데.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따라서 가령 들뢰즈는 '남자 아니면 여자다'라는 보통의 '다수적' 모델에서 떠나 모든 사람이, 심지어 여성조차도 통과해야 하는 '여성-되기'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Thus, for example Deleuze talks of a 'becoming-woman' that everyone, even women, must go through in departing from normal or 'majoritarian' models of what is to be a man or woman." 여기서, "normal or 'majoritarian' models of what is to be a man or woman"은 "남자가 아니면 여자다라는 보통의 다수적 모델"이라기보다는 "남자다, 혹은 여자다라고 (규정)하는 표준적인, 다수적인 모델"을 뜻하는 게 아닐까?

161쪽, "오히려 생성은 그 어떤 것의 모방이나 재현도 아니기에, 동일시라는 바로 그 항들을 이동시키고 복잡하게 만든다."에서 '동일시라는 바로 그 항들'은 'the very terms of identification'을 옮긴 것인데, '동일시의 바로 그 항들'의 오역이다. 'terms'와 'identification'이 동격이 되려면 수가 일치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마지막 문단: "우리는(...) 우리와 사회질서의 동일시를 그 삶들의 결핍 속에서 그런 동일시가 상정하는 역할이라는 견지에서 이해해야 한다." 원문은 "We should understand our identifications with a social order in terms of the roles they assume within the unfolding of our singular, indefinite lives (...)"

먼저, 'assume'는 여기서 '상정하다'가 아니라 '떠맡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주 재미있는(?) 오역이 등장하는데, '결핍'은 도대체 무얼 옮긴 것일까? 곰곰이 따져본 결과 역자는 아마도 'indefinite'(불확정적인)를 'in deficient'로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착시'가 말해주는 것은 역자가 문장을 거의 직독직해 수준으로 옮겼을 거라는 점. 즉, 이런 오역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며, 내 실력으론 불가능하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으며, 이 또한 나로선 역자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빌미가 된다.  

들뢰즈는 우리에게 무의식적 욕망 그 자체에 대한 다른 그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리비도적 잠재성들이 펼쳐져 보이는 이 공식적 판의 견지에서, 무의식적 욕망을 '건설주의적'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나는 역자의 무의식적 '결핍'이 불확정적이고 건설적인 삶의 '조성판'에서 재배치되기를 바란다. 번역의 자기동일성으로부터 탈피해서 말이다. 더 좋은 번역의 잠재성들을 현실화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해야 할 사람은 누구보다도 역자 자신일 테니까...

05. 09. 07 - 08.

 

 

 

 

P.S. 나머지 다른 장들에 대한 지적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교정일'이 나의 직업은 아니므로). 내가 보기에 들뢰즈 입문서로서 더 평이한 것은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 2004)이다. 이 역시 사소한 오역이 없지 않지만, <들뢰즈 커넥션>보다는 무난하게 읽히며 더 넓은 범위를 다룬다(저자가 문학전공자라서 들뢰즈 문학론에 대한 설명이 좀더 자세하다). 콜브룩에 따르면 라이크만의 책은 '수준높은 개관(advanced overview)'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초급'용은 아닌 것이다. 그런 콜브룩의 책에 비해서 라이크만의 책이 월등히 많이 팔려나간다는 것은 우리 독자들의 수준이 초급은 아니라는 얘기도 된다. '전문가들'이 좀더 긴장할 만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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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9-07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리스트에만 모셔두길 잘한 듯...ㅡㅡ;; 로쟈님이 이렇게 무료봉사 하시는데 출판사나 역자가 로쟈님에게 사례금이라도 드려야하지 않을 지...

armdown 2005-09-07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입니다. 부당한 지적이 많아 조금만 해명하겠습니다. 특히 둘째 문단의 내용은 왜 넣었는지 모르겠네요. 실제로 제가 빼먹은 부분이 있어서 그런 잘못은 큰 불찰이겠으나, 그밖의 다른 대목들은 사소한 지적이거나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셋째 문단의 지적은 원문을 확인해보기 바랍니다. 원문이 얼마나 난삽하게 씌었는지를 변명으로 삼진 않겠습니다. 역자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지만, 사소한 사항이나 중대한 해석의 변경은 따로 논의할 부분이지 '잘못'이라고 지적하기엔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닐까요. 토론의 문제는 토론의 문제로 남겨두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로쟈 2005-09-11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께/ (의견차이가 아닌) '부당한 지적'에 대해서는 다시 지적해주시면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위 '브리핑' 형식의 글이어서 좀 길어졌는데, 제가 좀 '세게' 말한 건 한편으로 이 책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덧붙여, 세번째 문단에서 'unattributable'의 오타 문제는 원문을 확인해보라고 하셨는데, 이미 다 확인하고 지적한 것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원서는 MIT에서 나온 2000년판이며 번역대본과 다를 거 같지 않습니다. 81쪽을 다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해당되는 문장의 원문은 "Only then do we see the practical problem of making visible and thinkable what is 'unattributable' and new in what is happening (...) to us."입니다.

2005-09-08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09-08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니다님/ 지젝에 관한 거군요. 얼마전에 읽은 기사입니다. 그런데, 필자가 여자분인 줄은 오늘 알았습니다.^^

2005-09-08 1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브리티 2005-09-09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삶은(...) 결코 '설명되지(explicated, 펼쳐지지)' 않은 타자들과의 복합에 돌입할 수 있도록 충분히 불특정하고 모호해야 한다."(151쪽) --> explicated를 굳이 pli의 말놀이에 따라 '펼쳐지지'로 할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요. [시네마]에서는 이걸 '구분불가능함(묘사의 차원에서)'과 함께 '설명불가능함(서사의 차원에서)'으로 번역하고 있고, 맥락상 설명불가능함이 더 맞더라구요.
로쟈님 말씀대로 하면 "우리의 삶은(...) 결코 <펼쳐지지 않은 타자들과의 온-주름운동에 돌입할 수 있도록> 충분히 불특정하고 모호해야 한다."가 되는데, 아무리 윤문을 해도 알아먹을 수 없는 문장이 되어버리잖습니까...--;;

로쟈 2005-09-09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문을 제기하신 대목의 원문은 "Our lives must be indefinite or vague enough to include such potential for other worlds of predications or individualizations, and so enter into complications with others that never fully 'explicated'."입니다.

먼저, 'predications'이라는 건 서사와 무관하며, 여기서는 'individualizations'과 등가어입니다. "술어들 혹은 개인화라는 다른 세계들을 구성할 만한 포텐셜을 충분하게 포함하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완전히 다 펼쳐지지 않은 다른 삶들과 함께 펼쳐지기(=온주름운동) 위해서는 우리의 삶은 미결정적이고 모호해야(=불확정적이어야)만 한다." 정도의 뜻이라고 봅니다. 알아먹을 수 없지는 않은 듯한데요...

니브리티 2005-09-09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렇군요...원문까지 같이 병기하니까(생략없이) 이해하기 쉽네요.
 

작년 연말부터의 개인적인 인연 때문에 벤야민 얘기를 자주 하게 된다(<모스크바 통신>에 그런 내용들이 좀 들어가 있다). 또 자주 얘기하다 보니 남들에게는 어느새 유사-전문가처럼 비치기도 하는 모양이다(물론 나는 벤야민에 관한 유사-전문가적 ‘에세이’이라면 웬만큼은 쓸 수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자면, “벤야민의 매력 앞에서는 자석처럼 끌리거나 몸서리치며 거부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니 벤야민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독자가 벤야민이란 이름을 자주 들먹이며 벤야민 읽기에 나서는 것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자연현상’에 가깝다. 마치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비록 몸서리치며 거부하기보다는 ‘대세’를 따르기로 작정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벤야민 읽기가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벤야민에 대한 짤막한 글을 한편 쓰기 위한 필요 때문에 최근에 몇 권의 벤야민 책을 뒤적거렸는바(“웰컴 투 벤야민베가스!” 참조), 물론 재미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나로선 곤욕이었다. 이유는 물론 다소간 부적절하고 무성의해 보이는 번역들 때문. ‘벤야민’이란 원(原)텍스트 자체도 난해하다고 하지만, 거기에 ‘우리식 번역’의 불가해성까지 겹쳐지게 되면 웬만한 지력(知力)으로는 감을 잡거나 읽어내기 힘든 수준이 된다. 남들 수준의 웬만한 지력만을 소유한 나로선 당연히 버벅댈 일인 것이고. 해서, 그런 하소연을 담게 될 이 편지는 유감스럽지만 ‘즐거운 편지’가 아니라 ‘괴로운 편지’가 될 것이다. 

 


 

 

 

 

 

 

“웰컴 투 벤야민베가스!”에서 벤야민 읽기의 길잡이로 내가 제시한 텍스트들은 아도르노의 <발터 벤야민의 초상>과 아렌트의 <발터 벤야민>, 그리고 숄렘의 <한 우정의 역사>인데, 이 중 아도르노의 텍스트는 (물론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깊이 있으면서도 상당히 난해하다(아렌트와 숄렘의 텍스트는 상대적으로 읽기 편하다). 짧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역본을 참조하여 반나절 이상을 꼬박 투자해야 했다. 아도르노 전공자의 번역인 만큼 아도르노의 난해성은 십분 전달하고 있는 번역인데, 그런 만큼 좀더 읽기/이해하기 편한 번역은 될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대로 읽기 편하게 고쳐 읽으려면 상당한 견적이 나오는지라 여기서는 그냥 한 대목만 지적하기로 한다.


국역본 <프리즘>의 276쪽. “이러한 강령은 그의 미완성 대표작에 대한 논평에서 다음과 같이 공식화되었다. ‘영원한 것은 아무튼 어떤 이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옷에 달린 한 조각의 레이스다.’” ‘미완성 대표작’이라는 건 <파사젠베르크> 곧,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인용문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대한’ 논평이 아니라 <아케이드 프로젝트> ‘안에 들어 있는’ 벤야민의 메모/노트이다. 일부러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관련한 대목을 꼽았는데, 이런 식으로 조금씩 틀어지는 대목들이 국역본에는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


가령, 288쪽에서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볼 수 있듯이 먼지나 플러시천 같은 최소한의 객체 혹은 초라한 객체들을 편애하는 그의 태도는 관습적 개념망의 그물코 사이로 빠져달아나는 것들, 혹은 지배정신이 너무도 도외시 하여 성그한 판단 이외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모든 것들에 매료되는 기술과 상호보완적이다.” 흔히 ‘대상(들)’로 번역될 단어가 왜 ‘객체(들)’로 옮겨졌는지는 의문이다(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객체들’? 물론 ‘사소한 대상들’을 뜻할 것이다. 283쪽에서는 ‘사물화(reification)’을 ‘대상화’로 옮겨놓았는데,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상식적이지 않다. 프루스트에게서의 ‘비의지적 기억(involuntary memory)’을 ‘본의 아닌 기억’(289쪽)으로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역시나 불가능하지 않지만 촌스럽다. 가뜩이나 복잡해서 각도가 잘 나오는 아도르노의 문장들을 독해하는 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식으로 ‘갠세이’해서야 되겠는가?(해서 아도르노의 텍스트는 따로 브리핑을 필요로 한다.)

 

 

 

 

아도르노에 비하면 <맑스주의의 향연>의 저자 마샬 버먼은 아주 친절하며, 번역 또한 깔끔하다(‘맑스주의의 모험(Adventures in Marxism)’이란 원제가 ‘맑스주의의 향연’으로 바뀐 것은 이해할 만한 조처이다. ‘모험’이란 표현이 혹시나 反맑스주의적 함의를 전달하지 않을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런 ‘모험’을 감수하지 않은 것이 바람직한 선택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비록 벤야민을 다루고 있는 12장에서 서평대상으로 삼고 있는 3권의 책 가운데 두 권은 국내에 소개돼 있지 않지만(한 권은 하버드대학에서 새로 나온 선집의 1권이다) 신뢰할 만한 저자 버먼은 능숙한 솜씨로 벤야민에 관한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가령, 벤야민의 ‘유별난’ 파리(프랑스) 애호증에 대해서 버먼은 (벤야민 자신은 소원한 관계로 간주했지만) 아버지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본다. “벤야민의 인자한 아버지는 파리에 산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베를린 집에서도 늘 파리에서 사는 것처럼 지냈다. 그 결과 벤야민은 별다른 노력 없이 프랑스의 언어와 문화에 통달했다.”(335쪽) 그리하여 “하이네 이후 프랑스 문화 속에서 이처럼 철저하게 편안함을 느낀 독일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런 개인사적 맥락 외에 버먼은 독일과 프랑스 간의 역사적 맥락 또한 짚어준다. “프랑스 계몽운동 이후 프랑스혁명 이전까지 적어도 두 세기 동안, 파리는 조상 대대로 독일의 다른 한 쪽이었다.” 마지막은 구절은 “Paris has been Germany's ancestral Other.”를 옮긴 것인데, “파리는 조상 대대로 독일의 타자였다.” 정도가 낫겠다. 여기서 ‘타자(Other)’란 쉽게 말하면 “나에게 없는 걸 갖고 있는 놈”을 뜻한다: “독일인들은 언제나 파리를 자기들에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 두 가지의 주요한 근원으로 여겨왔는데, 섹스와 유행이 그것이다.”(336쪽) 여기서 ‘섹스와 유행’은 ‘Sex and Style’을 옮긴 것이다(하긴 독일은 자동차는 잘 만들지만, 우리 생각에도 포르노나 란제리와는 인연이 없어 보인다).


해서 “수많은 독일 고유의 정치학(독일 사상에서 창조적이며 풍성한 것, 그리고 망상적이며 위험한 것)은 섹시하고 멋들어진 친구 바로 옆집에 사는 고상한 얼간이라는 독일 국민의 집단적인 불쾌감에서 생겨난다.”(참고로, 이와 유사한 지적은 <낭만주의의 뿌리>에서 이사야 벌린도 반복하는데, 벌린은 역사적 낭만주의의 발상지가 독일이며 그 뿌리는 독일 국민의 집단적인 열등감이라고 주장한다.)


거기서 다시 벤야민으로 돌아오면, 자, “자신을 독일 토박이 얼간이로 여기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독일인답지 않은 멋쟁이로 인정받는 벤야민이라는 사람을 상상해보라. 이 독일인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 따르려 했다고 생각한 독일 문화와 왜 조화하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내내, 벤야민은 독일 문화를 독일인보다 더 잘 아는 유태인이며, 또한 ‘계몽의 도시’(=파리)에 훌륭하게 적응하고 자기 집처럼 너무 편하게 지낸 멋쟁이라고 미움을 샀다.”(336쪽) 자주 언급되는 벤야민의 양가성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비록 눈이 휘둥그래지는 파리에서는 촌뜨기/얼간이였지만, 베를린에서는 멋쟁이로 통할 수 있었던 것. 그런 의미에서도 그는 ‘걸어다니는 모순덩어리(a walking contradiction)’였다.


버만이 벤야민의 전기에서 또 한 가지 강조하는 것은 젊은 시절 가장 절친했던 친구이자 시인이었던 프리츠 하인레의 자살과 그에 대한 벤야민의 (찬양적) 태도이다. 이것을 그는 1940년의 자살과 연관지어 생각한다(벤야민은 이전에도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다). 흥미로운 건 자살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하여 벤야민과 루카치를 비교해볼 수 있다는 버만의 제안이다: “벤야민과 루카치를 비교해볼 만한 한 가지 방법은 둘 다 젊은 시절에 자살을 모면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에게 대단히 소중한 사람이 죽었을 때 몹시 좌절했다. 하지만 루카치는 자신이 늘 자책했던 첫사랑의 자살을 조금도 현명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반면 벤야민은 가장 친한 친구의 자살을 언제나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것으로 본다.”(349쪽 각주1) 이러한 지적은 매우 시사적인데, 나는 그런 관점에서 루카치와 벤야민을 비교하는 글을 구상중이다(더 잘 쓸 수 있을 버만이 아직 쓰지 않았다면).

 


이런 유익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는 <맑스주의의 향연>의 번역은 별로 흠잡을 구석이 없다(다른 번역들이 이 정도만 되더라도 ‘읽을 만한’ 세상이다!). 옥의 티라면 ‘문학 상식’이 약간 부족한 것. “도대체 어떻게 벤야민이, 그 사람들은 자신을 자기들의 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체스판의 기사 이상으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341쪽) 원문은 “How could Benjamin have thought that these people would see him as any more than K. trying to break into their Castle?”(246쪽) 여기서 암시적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은 카프카의 소설 <성>이고, K는 그 소설의 주인공 건축기사이다. 역자는 아마도 K를 Knight(기사)의 약자 정도로 보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break into'는 ‘무너뜨리다’가 아니라 ‘침입하다’란 뜻이다.


‘문학 상식’ 운운하는 것은 내가 읽은 다른 장들에서도 그런 류의 오역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기병대>의 러시아 작가 ‘이삭 바벨(Isaac Babel)’을 ‘아이작 바벨’로 옮긴 것도 그렇고, 루카치를 다룬 장에서 <죄와 벌>에 등장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친구 ‘라주미힌(Razumikhin)’을 ‘라주미킨’으로(각주에서는 한술 더 떠서 두 번이나 ‘라추미킨’으로) 옮긴 것도 사소하지만(?), 인명(人名) 경시의 사례들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정도면 ‘괴로움’을 말할 수 없다. 애초에 내가 ‘괴로움’이란 표현으로 염두에 둔 책은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이다. 전공자가 옮긴 데다가 외견상 아주 얌전해 보이는 책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내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이 번역의 ‘무지함’이라기보다는 ‘무성의함’인데, 그 ‘무성의함’이라는 게 어떤 걸 말하는 것인지 좀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시간상/분량상 다른 자리를 마련하겠다...

 

05. 0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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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내놓은 이야기를 마저 하도록 하겠다. 생각보다 견적이 많이 나올 듯하지만, 최대한 줄여서. 역시나 제목은 (이미 언급했던 대로) 속임수이다.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바람에 '부담스런' 제목을 달게 됐지만, 지난번에 속으신 분들이 또 속지는 않을 것이므로 양해의 말을 덧붙이지는 않겠다. 이런저런 번역에 대해서 참견하는 일이 어쩌다가 내가 즐겨하는 일처럼 돼 버렸지만,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 그냥 책을 읽는 것이다(우리말 책이면 더 좋고). 물론 좋은 책을. 책읽을 시간도 부족한데, 자꾸 이런 참견들을 늘어놓는 것은 그렇게 마음놓고 읽을 수 있도록 책들이 나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제만 하더라도 나는 도서관에서 몇 달 전에 주문해두었던 책으로 힐리스 밀러의 <문학에 대하여>(동문선, 2004)를 대출해왔다... 이하의 내용은 너무 길어진 듯해서 '참을 수 없는 번역의 부끄러움'이란 제하에 따로 리뷰란에 옮겨놓았다. 참고하시길... 하여간에 그래서, 좋은 책 읽을 시간의 상당 부분을 나는 나쁜 책들에 대한 불평으로 채워넣고 있다. 이것도 쓸데없이 예민한 독자의 업보라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상황이 호전되는 것으로 보상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여간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마저 읽어보기로 한다. 그렇다고 진도가 막나가는 것도 아니다(왜 그런지는 지난번에 설명했다). 지난번에 한 문장을 읽은 데 이어서 오늘도 고작 한 단락을 읽게 될 것이다. 어디냐면, #3의 마지막 한 대목이다. 먼저, 5종의 우리말 번역을 차례로 나열해 보겠다.

-"화보가 들어있는 신문이나 주간뉴스 영화가 제공해주고 있는 복제사진들은 그림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그림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서로 엉켜있는데 반하여 복제사진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로부터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분위기(=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현대의 지각 작용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이 세상에 있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지각작용의 감각이 너무나 커졌기 때문에 지각작용은 복제를 통하여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찾아내고 있을 정도이다. 이론의 영역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통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는 것이 직관의 영역에서도 그래도 나타나고 있다. 현실이 대중에 적응하고 또 대중이 현실에 적응하는 현상은 사고의 면에서는 물론이고 직관의 면에서도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하나의 발전과정이다."(반성완)

-"화보나 주간뉴스에서 쉽게 느낄 수 있듯이 복제는 사진(그림)과 뚜렷이 구별된다. 후자(그림)에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얽혀 짜여 있지만 반면 전자(복제)에는 일시적인 것과 반복가능성이 들어 있다. 대상의 껍질을 벗긴다는 것 즉 아우라의 파괴는 감각의 표지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동일한 유의 것에 대한 감지의 의미'는, 복제품을 수단으로 하여 일회적인 것에서도 그것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되었다. 대중을 향한 실재의 방향 자세나 실재를 향한 대중의 방향 자세는 사고나 직관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하나의 과정이다."(차봉희)

-"확실히 사진잡지나 뉴스 영화에 의해 보여지는 복제는 육안으로 보는 모습과는 다르다. 전자에서 일시성과 반복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후자에선 유일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껍질로부터 대상을 떼어내는 것, 즉 영적 분위기(=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에 있어서 '사물의 보편적 동질성에 대한 감각'이 복제라는 수단을 통해서 심지어는 유일한 대상으로부터도 그 동질성을 추출해낼 수 이는 정도에까지 달하게 되었다는 표시다. 이것은 이론 분야에서 점점 더 커가는 통계의 중요성으로도 나타나지만 지각의 영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대중에 대해 현실을 적응시키는 것 혹은 현실에 대해 대중을 적응시키는 일은 지각에서와 같이 사고에 있어서도 무한한 연구영역을 지닌 과정이다."(이태동)

-"그리고 화보가 실린 신문과 주간 뉴스가 마련해주는 복제는 분명 그림과는 다르다. 일시성과 반복성이 전자(복제)에 아주 긴밀하게 얽혀있다. 껍질로부터 대상을 분리해내는 것, (즉) 아우라의 파괴는 (우리시대) 지각의 특징이거니와 지각의 '세계 속에서의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 커져서 그 감각은 복제를 수단으로 삼아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획득해낸다. 따라서 이론의 영역에서 점점 증대하는 통계로서의 의의로서 두드러지는 것은 직관적인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대중에 대한 실제의 적응과 실제에 대한 대중의 적응은 직관에 대해서 만큼이나 사유에 대해서도 무한한 범위의 과정이다."(강유원팀)

-"그림이 실린 신문이나 주간 뉴스가 늘 준비해 가지고 있는 재생산(복제)는 오해의 소지없이 그림과는 구별된다. 그림 속에선 일회성과 지속이 서로 밀접하게 엉켜 있다면 복제 속에선 일시성과 반복가능성이 그렇게 서로 엉켜있는 것이다. 사물을 그 외피로부터 풀어내는 것, 아우라의 파괴가 '오늘날' 지각의 표지다. 세계에 존재하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그 지각의 감성은, 그 지각이 재생산(복제)을 수단으로 하여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얻어낼 수 있을 정도로 자라나버렸다. 그리하여 이론의 영역에서 통계학의 중요성의 증가가 드러내주는 것이 시각적인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현실이 대중을 향하고 대중이 현실을 향하는 것은 사유를 위해서도 직관을 위해서도 무척 넓은 영향력을 갖는 경과이다."(김남시)

이에 해당하는 독어 원문(주어캄프 전집본)과 영역본(하버드대 선집본)의 단락은 각각 아래와 같다.

-"Und unverkennbar unterscheidet sich die Reproduktion, wie illestrierte Zeitung und Wochenschau sie in Bereitschaft halten, vom Bilde. Einmaligkeit und Daur sind in diesem so eng verschränkt wie Flüchtigkeit und Wiederholbarkeit in jener. Die Entschälung des Gegenstandes aus seiner Hülle, die Zertrümmerung der Aura, ist die Signatur einer Wahrnehmung, dern >Sinn Für das Gleichartige in der Welt< so gewachsen ist, daß sie es mittels der Reproduktion auch dem Einmligen abgewinnt. So bekundet sich im anschaulichen Bereich was sich im Bereich der Theorie als die zunehmende Bedeutung der Statistik bemerkbar macht. Die Ausrichtung der realität auf die Massen und der Massen auf sie ist ein Vorgang von unbegrenzter Tragweite sowohl für das Denken wie für die Anschauung."(1-2권, pp. 479-80) 


-"And the reproduction, as offered by illustrated magazines and newsreels, differs unmistakably from the image. Uniqueness and permanence are as closely entwined in the latter as are transitoriness and repeatability in the former. The stripping of the veil from the object, the destruction of the aura, is the signature of a perception whose 'sense for sameness in the world' has so increased that, by means of reproduction, it extracts sameness even from what is unique. Thus is manifested in the field of perception what in the theoretical sphere is noticeable in the increasing significance of statistics. The alignment of reality with the masses and of the masses with reality is a process of immeasurable importance for both thinking and perception."(1권, pp. 255-6) 

여기에 러시아어본을 더 참조하겠지만, 러시아어의 키릴 문자들마저 여기에 옮겨오지는 않겠다. 번역문들은 보통 5-6개의 문장으로 구성돼 있다.  첫번째 문장의 요지는 영어로 하면, reproduction(Reproduktion)과 image(Bilde)는 다르다/구별된다는 것('구분된다'가 아니다).  대략 '복제'와 '그림' 사이의 구별로 옮겨져 있는데(이태동 역에서, 'image'를 '육안으로 보는 모습'이라 옮긴 것은 불필요한/부정확한 의역이다), 나라면 '복제 이미지'와 '그림' 사이의 구별 정도로 해두겠다.  영어의 newreels을 반성완과 이태동은 주간뉴스 영화라고 옮겼고, 다른 번역들은 그냥 '주간뉴스'라고만 했는데, 이건 러시아어본과도 대조해 보건대 전자가 더 정확하다(그러니까 과거 '대한뉴스'처럼 영화관에서 상영된 뉴스인 것).  

두번째 문장은 그 '복제 이미지'와 '그림' 간의 차이에 대한 것이다. 후자(=그림)의 특징은 일회성(유일성)과 지속성이고, 전자(=복제 이미지)의 특징은 일시성과 반복(가능)성이다(강유원팀 역에서는 댓구의 전반부가 누락됐다).

세번째 문장은 그림 대신에 복제 이미지가 넘쳐나는 기술복제 시대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건 한마디로 대상으로부터 일회성과 지속성이라는 '껍질/외피'를 걷어낸 '아우라의 파괴'이다. 거기서 물론 '껍질'로 은유된 것은 '아우라'인바, 나는 Hülle(싸개/외피)의 역어로 영어본의 'veil'이 더 맘에 든다. 즉, 나라면, "대상으로부터 베일을 걷어내는 것, 즉 아우라의 파괴가 우리시대 지각의 특징이다" 정도로 옮겨두고 싶다. 그 '우리시대'의 내용은 관계사를 통해서 설명되는데, '세계에서 동질적인 것에 대한 취향'이 날로 증가하여(그건 기술복제시대 '대중의 취향'이다, 나는 Sinn(sense)의 역어로 '감각' 대신에 러시아어본을 따라 '취향'으로 옮기고 싶다) 이젠 일회적인 것에서까지 복제를 통해서 동질적인 것을 뽑아내고자 하는 시대이다.

네번째 문장(차봉희 역에서는 누락되었다)부터는 오늘의 주제와 연관된 것이므로 조금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다시 나열해 보면 이렇다(인용문의 강조는 모두 나의 것이다).

-"이론의 영역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통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는 것이 직관의 영역에서도 그래도 나타나고 있다."(반성완)

-"이것은 이론 분야에서 점점 더 커가는 통계의 중요성으로도 나타나지만 지각의 영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이태동)

-"따라서 이론의 영역에서 점점 증대하는 통계로서의 의의로서 두드러지는 것은 직관적인 영역에서도 나타난다."(강유원팀)

-"그리하여 이론의 영역에서 통계학의 중요성의 증가가 드러내주는 것이 시각적인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김남시)

-"So bekundet sich im anschaulichen Bereich was sich im Bereich der Theorie als die zunehmende Bedeutung der Statistik bemerkbar macht."(독어본)

-"Thus is manifested in the field of perception what in the theoretical sphere is noticeable in the increasing significance of statistics."(영어본)

현대에 와서 통계학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동질적인 것에 대한 취향의 우세/증가에 따라) 세계가 그만큼 동질화, 평준화되었다는 뜻이겠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통계란 건 사실 무의미하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복제 이미지'의 증가로 대별될 수 있는 지각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될 수 있다, 는 게 내가 이해하는 이 문장의 요지이다.

여기서 굵은 글씨로 강조한 대목들은 모두 'anschaulichen Bereich'의 번역인데,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에서는 에누리없이 지각의 영역(the field of perception)이라고 옮겨진 것이(이태동 역은 영어본을 중역한 것이기에 이에 따르고 있다) 대개의 국역본에서는 '직관의 영역'이라고 옮겨지고 있다. 뒤에 나오지만, 독어의 Anschauung이 보통 '직관'으로 옮겨지지만(특히 칸트철학의 용어로 굳어져 있다), 그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영어의 view이다. 내가 아는 몇 안되는 독어단어 Weltanschauung이 Welt+anschauung으로 구성된바, worldview, 곧 '세계관'이란 뜻을 가질 때의 그 '관(觀)'이 Anschauung의 우리말 뜻인 것. 그것이 비록 '직관'이란 뜻도 갖는다고 해도 이 문맥에서는 좀 뜬금없다(영어의 perception이나 러시아어의 vosprijatie는 '직관'과 무관한 단어들이다. 참고로 '직관'을 나타내는 영어의 'intuiton'은 '식스 센스'란 뜻을 강하게 가지며, instinct와 동의어이다).

김남시를 제외한 다른 번역자들이 '직관의 영역'이라고 자동적으로 번역한 것은 그 단어를 철학용어로 이미 접수하고 있기 때문인 듯도 하고, 앞에서 '지각'이라 옮긴 'Wahrnehmung'과 변별해주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Wahrnehmung과 Anschauung에 대해서 영어/러시아어본은 전혀 아무런 주저없이 '지각'이라고 옮긴다). 하지만, 우리말에서 직관과 지각이 동의어로 취급될 수 없는 한, 이 대목에 적합한 역어는 '지각'이다(혹은 김남시처럼 '시각'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어차피 문제되고 있는 건 '시지각'이니까). 그건 이어지는 마지막 문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이 대중에 적응하고 또 대중이 현실에 적응하는 현상은 사고의 면에서는 물론이고 직관의 면에서도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하나의 발전과정이다."(반성완)

-"대중을 향한 실재의 방향 자세나 실재를 향한 대중의 방향 자세는 사고나 직관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하나의 과정이다."(차봉희)

-"대중에 대해 현실을 적응시키는 것 혹은 현실에 대해 대중을 적응시키는 일은 지각에서와 같이 사고에 있어서도 무한한 연구영역을 지닌 과정이다."(이태동)

-"대중에 대한 실제의 적응과 실제에 대한 대중의 적응은 직관에 대해서 만큼이나 사유에 대해서도 무한한 범위의 과정이다."(강유원팀)

-"현실이 대중을 향하고 대중이 현실을 향하는 것은 사유를 위해서도 직관을 위해서도 무척 넓은 영향력을 갖는 경과이다."(김남시)

-"Die Ausrichtung der realität auf die Massen und der Massen auf sie ist ein Vorgang von unbegrenzter Tragweite sowohl für das Denken wie für die Anschauung"(독어본)

-"The alignment of reality with the masses and of the masses with reality is a process of immeasurable importance for both thinking and perception."(영어본)

먼저, 여기서 'realität'를 '현실' 대신에 '실재'(차봉희)나 '실제'(강유원팀)로 옮긴 건 현실성이 떨어져 보인다. 문장의 마무리에서도 '무한한 연구영역을 지닌 과정'(이태동), '무한한 범위의 과정'(강유원팀)이나 '무척 넓은 영향력을 갖는 경과'(김남시) 등은 모두 초점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점은 이러이러한 것이 (우리시대의) 사유와 지각에 있어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중요성을 갖는,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과정이라는 것. '이러이러한 것'의 내용은 영어본을 따르자면 대중과 현실의 alignment(제휴/손붙잡기)이고, 러시아어본을 따르자면 상호 orientatija(정향)이다.   

이 마지막 문장의 속임수는 사실 'Anschauung'이라 할 만한데, 앞에서 '시각(적인 영역)'이라고 옮겼던 김남시조차도 이 대목에서는 '직관'이라고 옮기고 있다. 이건 거의 직관적인 번역들이라고 할 만한데, 이태동만이 유일하게 '지각'이라고 옮긴바 그가 '직항로'를 따라서, 곧 독어에서 바로 옮긴 것이 아니라 영어를 중역한 탓에 오역을 면할 수 있었다는 건 아이러니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번역은 '직항로'로 가는 게 합당하며 중요하지만 샛길들도 무시하지 말고 참조하라는 것이다(직항만을 믿고 가다가는 간혹 삼천포로 직행하는 경우들이 없지 않기 때문에)...

이로써 몇 시간을 투자해 한 문단을 읽었다. 다른 일들도 밀려 있는 탓에, 글의 나머지 부분들은 언제 다 읽게 될지 기약할 수 없다. 그저 믿을 만한 좋은 번역 '하나'를 갖고 있지 못한 탓에 번역의 '직항로' 시대(이윤기의 표현)에도 우리의 읽기는 '우회로'만을 따라가야 한다. 여름날 모스크바의 산책로 같은 길은 우리의 책읽기에서 언제쯤 마련되는 것인지...   

05.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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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y 2005-07-14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벤야민 공부를 하게 되는군요. 나머지 부분도 계속 하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제게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벤야민을 잘 모릅니다만, 여기에 제시된 독일어 원본과 번역들에 기초해서 몇 마디 거들어볼까 합니다.

먼저 세 번째 문장에서 독일어 gewachen은 오타가 있었나 봅니다. (한글 번역 모두와 영역이 채택하고 있는) 커졌다, 자랐다 등의 뜻이 되려면 gewachsen이 되어야 하지요.

그런데 이 경우 감각(Sinn)이 커진다거나 자란다는 이야기가 썩 잘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로쟈님의 오타가 아니라 독일어 텍스트가 gewachen으로 되어 있다면, 벤야민 자신의 실수가 있었고 번역자들이 이것을 gewachsen으로 읽었다는 이야기겠죠. 하지만 이 경우 다른 가능성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벤야민이 (깨어났다는 뜻의) gewacht라고 써야 할 것을 gewachen이라고 썼을 가능성입니다. (독일인들도 범할 수 있는 실수입니다.) 이 가능성에 따라 세 번째 문장을 번역하면, “사물에서 외피를 벗겨내는 것, 아우라의 파괴는, 세계 내의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 깨어나서 (“깨어나서”가 싫으면 “각성되어”로 번역해도 좋겠지요), 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에서 조차도 동질적인 것을 획득해 내는 지각 방식의 특징이다.”가 되겠습니다. (einer Wahrnehmung에서 einer를 좀 강하게 “일종의” 정도의 의미로 읽었습니다.)


그 다음에 직관이냐 지각이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직관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우선 독일어 Anschauung은 어원적으로 직접(an) 보는 것(schauen)을 의미하고 우리말 직관이 여기에 어원적으로 일치합니다. 물론 어원과 별개로 직관의 의미가 무엇인가가 사실은 더 중요한 문제이겠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직관 항목을 찾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직관03 (直觀) [-꽌] 「명」「1」『교1』감관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음 2」『철』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 ≒직각03(直覺)

여기에서 1번 뜻은 정확하게 지금 문맥의 Anschauung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직관이라는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직관이라는 번역어가 단순히 틀렸다고 할 수 없다는 것뿐 아니라, 지각이라는 번역어보다 낫다는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우선 일반적으로 이야기해서 원어에서 다른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할 수만 있다면, 번역에서도 다른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좋습니다.

보다 중요하게는 지각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는 경우, im anschaulichen Bereich / im Bereich der Theorie, für das Denken / für die Anschauung에서의 대구가 그다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각의 영역/이론의 영역, 사유/지각 보다는 직관의 영역/이론의 영역, 사유/직관 의 대구가 더 분명하지요. 이론과 사유는 매개적인 인식방법이고 직관은 비매개적인 인식방법이니까요. 벤야민 자신도 이러한 대구를 염두에 두고 Wahrnehmung이라는 표현에서 Anschauung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realität을 현실로 번역하는 것은 좀 뜬금없어 보입니다. 벤야민이 III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 대상과 자연적 대상이므로, 이 문장에서 그는 실재와 대중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Tragweite는 직역하면 사정거리라는 뜻입니다. 중요성이라는 뜻을 비유적으로 가질 수도 있으나, 문장의 맥락에서 보면, 사유에서나 직관에서나 무제한적인 사정거리를 가지는 과정, 즉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지금의 글을 읽으면서 제가 받은 느낌 한 가지는 영어 번역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을 것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Wahrnehnumg과 Anschauung을 구별없이 perception으로 번역한 것은 그렇다쳐도, Bild(그림)을 image로 번역한 것은 명백한 오역으로 보입니다.

로쟈 2005-07-14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하신 오타는 고쳤습니다. 오타가 어딘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그게 공연한 수고를 끼쳐드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Anschauung의 역어에 대해서는 국어대사전을 인용하셨는데, 그것이 현재 '통용되는' 의미인지는 의문입니다(제가 보기에, 인용하신 두 가지 정의는 서로 양립되기 어려운 동음이의어로 처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감관의 작용을 통해 지식을 얻는 것과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파악하는 게 어찌 동일할 수 있을까요? 제가 '지각'과 '직관'이 동의어가 아니라면이라는 단서를 단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인터넷에서 제공하는 국어사전이나 백과사전에서 일반적으로 정의하는바는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이며(그래서 직각(直覺)이 동의어로 제시됩니다), 이는 영어의 intuition에 대응하는 걸로 설명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직관'이란 말에서 제가 떠올리는 바입니다. 만약에 그런 뜻이 제거된 상태에서 정의하신 첫번째 의미만을 전달할 수 있다면, 저는 '직관'이란 역어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지각'이란 역어를 선택하게 됩니다.

한편, 불어역에서는 'la réceptivité'로 옮긴다고 하는데, '지각을 통한 수용'의 측면을 드러내주는 듯합니다. 제가 강조하고픈 것은 그러한 지각이나 감관을 '통한' 인지입니다. 그리고, 지각의 영역/이론의 영역보다 직관의 영역/이론의 영역이란 대구가 더 분명하다고 하시면서, "직관은 비매개적인 인식방법"이라고 하셨는데, 그때의 '직관'이 바로 1번이 아닌 2번의 뜻입니다(때문에, '직관'이란 역어를 제가 오역이라고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장과 관련하여 '현실'이란 번역이 뜬금없다고 하셨는데, 문맥상 동질적인 것에 대한 '대중'들의 취향과 (기술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뽑아내는 게 가능해진 '현실' 사이의 상호작용, 상호연루를 뜻한다고 저는 봅니다. '역사적 대상'과 '자연적 대상'이 이 단락의 키워드라는 건 이해하기 어려우며, '실재와 대중 사이의 관계'라는 표현도 저로선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Tragweite'의 경우, 제가 인용하지 않은 다른 영역본에서는 'scope'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그걸 제가 인용한 새 영역본에서는 importance라고 의역함으로써 뜻을 좀더 명확하게 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러시아어본도 마찬가지입니다. perception이란 역어는 두 번역본에 공통되며, 러시아어본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역어를 쓰고 있습니다. 영어나 러시아어로 똑같이 옮겨지는 독일어가 오역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제가 공감할 수 없습니다.

image는 아시다시피, 우리말 '이미지'보다는 더 광범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나름대로 벤야민 전문가들이 선택한 역어이므로 저로선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Bild는 상(像) 정도의 의미로 아는데, image가 거기에 대응하지 않는다는 지적이신지요? 영역본의 '명백한 오역'에 대해서는 제가 지적하거나 판별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paby 2005-07-14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트 이래 독일 철학에서 직관이라고 할 때는 대개 감각적 인식을 의미합니다. 감각적 인식이 개념을 통해서 매개되지 않은 인식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때문에 Anschauung이 직관으로 번역되고요.

참고로 독일어 Anschauung은 우리말 직관의 1번과 2번 뜻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덕적 직관 같은 것을 이야기할 때, 독일어에서 innere Anschauung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realität (또 영어에서 reality도) 지금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의 현실을 의미할 수는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영어로 current situation 정도의 의미죠.) 제가 이해하기로는 마지막 문장은 대중적 취향에 실재를 맞추는 것, 실재에 대중적 취향을 맞추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제가 없는 경우는 실재가 일회적인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대중의 취향을 만족시켜줄 수 없겠지요. 하지만, 복제를 통해서 실재가 반복화되고 대중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죠.

Tragweite가 importance로 번역되는 것이 왜 뜻이 더 명확하게 해 주는 것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뜻을 잘못 전달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Bild는 이 맥락에서는 그냥 picture 같습니다. image는 특별히 일회적이지도 지속하지도 않지요. 반복적이고 비지속적인 image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로쟈 2005-07-14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독어의 경우 지각이나 직관을 한 단어로 쓰지만(권리와 법을 한 단어 droit로 쓰는 불어처럼) 한국어의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데리다의 <불량배들> 같은 경우 역자는 '주권자'를 "권리를 중단시킬 권리는 가진 자"라고 옮겨놓았더군요. 당연히 "법(혹은 헌정, 영어로는 law)을 중단시킬 권리(영어로는 right)를 가진 자"라고 옮겨져야 합니다. 불어에서는 아마도 같은 단어일 테니 '권리를 중단시킬 권리'라고 옮기는 게 무슨 잘못인가라는 반문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말로는 오역입니다.

지각과 직관을 뜻을 다 갖는 'Anschauung'의 경우도 비슷하지 않나 싶은데, 판단은 paby님이 하시기 바랍니다. 비근한 예이지만, 주어, 주어, 주제 등을 뜻하는 영어 단어 subject의 경우도, 그 우리말 역어들이 의미론적 가족유사성을 갖고 있지만, 문맥에 따라 다르게 번역해 주어야 혼동이 없습니다. Anschauung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갖고 있다는 건 제가 처음부터 전제로 한 것이며, 저는 이 대목의 문맥상 '지각'이 보다 타당한 역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실재'란 말은 저와 다르게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원본이란 뜻의 '실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경우 복제를 통해서 '반복화'된 것도 실재인가요? 저로선 서로 다른 텍스트를 읽고 있는 거라고 밖에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paby 2005-07-14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말씀드린 것은 우리말 직관도 독일어와 똑같이 두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누군가가 "우파"라는 번역어에 대해서 영어의 right이 이 경우는 오른쪽이 아니라 보수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파"라는 번역어는 오역이고 "보수파"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해 보죠. 이 경우, 우리말에서 "우"도 "보수적"의 뜻을 같는다고 지적하는 것이 적절한 대응이겠지요.

제가 이야기하는 실재는 사물, 사태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reality라는 말이 가지는 가장 중립적인 의미죠.

로쟈 2005-07-1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복되는 얘기지만, 다른 외국어 번역들의 사례들을 두고 보건대, (1)여기서 Anschauung은 '감관/지각을 통해 매개되는 인지'를 뜻하며, (2)우리말 '직관'은 비록 Anschauung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의미를 다 갖는다고 하더라도, '비매개적 인식'이란 뜻을 일차적으로, 그리고 더 강하게 갖기 때문에(저는 첫번째 뜻은 특수하게 사용된다고 생각하며, 지각과 직관이 일상어적 의미상으론 양립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3)이 경우에 적합한 역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한 지인에 다르면, 이 대목의 이태리어역은 'l'intuizione'인데, 짐작하시겠지만, 영어 단어 'intuition'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instinct의 뜻을 강하게 갖는 영어의 intuition과는 다르게 이태리어 'l'intuizione'는 'sensation'[sensazione]의 뜻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말씀은 이런 문맥에서라면 이탈리아어 'l'intuizione'을 intuition으로 영역하는 것도 일종의 오역이라는 것입니다(각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역이 다른 것이죠). 'Anschauung'과 '직관'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reality에 대해서는 말씀드린 대로, 저와는 다르게 이해하고 계신데, 제가 이해하는 reality의 가장 중립적인 의미는 '현실' 내지는 '현실성'입니다. '실재'는 말 그대로 real existence를 가리키는데, 그것이 어떤 사물의 실재, 우리의 감관/인지와는 무관하게 실제로 존재함을 뜻하는 걸 넘어서 '사태의 총체'까지 의미하는 단어인지는 의문입니다. 사태란 "일이 되어가는 형편이나 상태"를 뜻하며(흔하게는 영어의 situation), 그것은 심리적인 상황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한국어 '실재'는 그런 의미를 모두 포괄하지 않습니다.(덧붙여, 우리말에서 '우파'와 '보수파'는 동의어입니다. '우익보수'나 '보수우파' 등의 조어가 그래서 가능합니다. '지각'과 '직관'도 동의어인가요?)

paby 2005-07-14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nschuung이나 직관이나 기본적인 뜻은 비매개적 인식입니다. 비매개적인 인식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독일어에서나 우리말에서나 1과 2의 뜻으로 갈려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죠.

이태리어 번역에서 percezione가 아니라 intuizione로 번역한 것은 우리말에서 지각이 아니라 직관으로 번역한 것과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reality 문제는 너무 문제가 확대될 것 같아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정도로 마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좀 지엽적인 문제였으니까요.

yoonta 2005-07-15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와 관련하여 철학소사전(동녁)을 참고해서 몇자 적어봅니다.
지각에도 두 가지 의미가 가능합니다. 첫째: 지각(wahrnehmung)은 감각을 바탕으로 성립하지만 개별적 감각들의 단순한 결합이 아닌 질적으로 새로운 감각적 반영이다..라는 정의가 있고요..둘째: 독어로 perzeption인 지각은 좁은 의미의 지각으로 의식에 이르지 못한 "지각의 한부분"을 말합니다. 즉 이 지각은 "무의식" 상태에 머물러 있는 "지각"입니다...
그리고 직관도 두가지로 나뉘는데요. 첫째: 직관(anschauung)은 감각 지각들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들을 총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때문에 "감각적 직관"과 같은 용어도 사용가능합니다. 즉 이 때의 직관은 지각을 통해 "매개적"으로 "인식된" 직관이라는 것이지요..독어사전에서는 "바라봄" "관조" "관찰"등으로도 해석됩니다.
반면 두 번째의 직관(독intuition)은 어떠한 매개없이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특별한 인식행위을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매개적" 성격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비매개적 직관은 일부 철학자에겐 신비적이면서 비합리적 인식방법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위의 문제와 관련하여..본문 속의 직관을 두 번째가 아닌 첫 번째 즉 지각을 통한 "매개적" 인식방법으로 본다면(독어로도 분명히 "intuition"이 아닌 "anschauung"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 두 번째의 번역어로 착각할수있는 두번째 직관(intuition)보다는 첫번째의 직관(anschauung)으로 해석가능한 "지각"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본문과 관련하여도 영화같은 것을 보는 행위는 지각(시지각)을 통해 인식을 얻는 행위이므로 더욱 그렇겠지요..이렇게 정리해서 본다면 anschauung을 보는 paby님의 해석(anschauung을 intuition으로 이해하는 해석)에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다시한번 이야기하면 매개적 직관 혹은 바라봄(anschauung)과 비매개적 직관(intuition)은 독어에도 분명히 구분되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지각을 좁은 의미의 무의식적 지각으로 보았을 때(두번째의 지각) 그것은 anschauung과도 그리고 intuition과도 다른 것입니다..그런데 벤야민은 이런 의미의 지각을 의미한 것같지는 않고 따라서 제가 생각하기에 제일 적절한 방식은 그냥 번역어를 직관(anschauung)혹은 "바라봄"으로 한 다음 그 의미를 분명히 하는 역주를 다는 것 같군요...직관(anschauung)을 직관으로 번역한 것 자체는 사실 큰 잘못은 아니니까요..anschauung을 intuition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우리나라에서의 "직관"의 불분명한 사용이 문제인 것이지요...그렇지 않고 차선책으로 로쟈님 말씀대로 지각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역시 이것도 무의식적 지각이 될수 있으니 온전한 번역어는 아니지요..역시 역주가 있어야 됩니다...(강유원씨나 김남시씨의 번역에서도 정확히 wahrnehmung은 지각으로 anschauung은 직관으로 번역해 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어로 intuition을 직관으로 번역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오히려 영감 혹은 육감이 정확할 듯 합니다..이렇게 "영감"intuition(영어도 독어와 똑같이 intuition임)을 직관으로 해석하는 원인에는 아마도 영어로는 anschauung과 intuition의 구분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지금다시 찾아보니 anschauung에 해당되는 영어단어는 perception이고 intuition에 해당되는 단어는 intuition이군요..때문에 이태동씨가 perception을 지각으로 번역한 것은 어떻게 보면 오역이라고 할수있습니다... )


기타 현실이냐 실재냐의 문제도 현실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20세기적인 상황적 성격의 묘사가능성 때문에 다시말해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가능한 영화라는 매체의 현실적 상황 속에서 영화를 보는게 가능하다라는 점에서 실재보다는 현실이 더 적절한 번역어 인 것 같네요..

단 제가 참조한 철학소사전(동녁)의 의미구분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구분이 아니라면 이야기가 또 틀려질 수도 있으니..그냥 참조만 해주시기 바랍니다. ^^

로쟈 2005-07-15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페이퍼를 쓰기 전에 일역본을 확인해보고자 했지만, 도서관 실종도서여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일역본이 의미있는 것은 아시다시피 '지각'이나 '직관'이니 하는 우리말 철학어/학술어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된 용어들이니까요.

제 견해는 이렇습니다. (아마도 일본어) '직관'에는 '바라봄' 혹은 '바로 봄'이란 의미의 직관[직꽌]이 있고, 감관의 매개 없이 바로 깨달음, 즉 직각이란 의미의 '직관'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한자 조어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두 의미는 파생관계에 놓여 있을 법한데, 저로선 감관의 매개성 유무를 놓고 볼 때 두 의미가 두 개의 단어로 처리되어야 하지 않나 싶고, 우리말에서 '직관'의 최근의 용례들은 이 중 두번째 의미로 굳어져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당초 독어 anschauung의 대응어였는지는 모르겠으나(일어를 경유한) 현재는 영어intuition의 대응어로 굳어지는 것이죠. 일반론이지만, 말의 의미는 용례(usage)에 의해서 결정되며 따라서 변화합니다. 벤야민 번역문에서 '직관'이란 말을 독어 anschauung의 역어로 수용할 수 있는 독자(두 분 같은 경우)라면 오해의 소지가 적겠으나 일반 독자라면 이 번역문을 바로 이해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는 번역에서 이해가능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문학작품이라면 사정이 약간 다르지만) 이 경우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 그렇듯이 '지각'이란 역어가 적합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번역에서 100% 대응하는 역어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하며, 무의미합니다(그런 경우엔 번역이란 '과정' 자체가 불필요하니까). 더 나은 번역, 더 이해하기 쉬운 번역을 시도할 따름입니다.

어쨌든 의견 차이가 그닥 좁혀지진 않았더라도 생각할 꺼리를 제공해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한가지, yoonta님의 견해중 "anschauung에 해당되는 영어단어는 perception이고 intuition에 해당되는 단어는 intuition이군요..때문에 이태동씨가 perception을 지각으로 번역한 것은 어떻게 보면 오역이라고 할수있습니다."는 제가 이해할 수 없군요.

독영사전을 찾아보셨다면 아시겠지만, anschauung의 뜻으로 intuition은 뜨지 않습니다. 우리와는 사정이 다른 것이며, perception이란 역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들은 (영어권 화자나 연구자의 지적이 아닌 이상) 저로선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언어'감각'이란 건 그닥 단순한 게 아니니까요...

paby 2005-07-15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 제 해석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 해석이 아닙니다. 저는 일관적으로 "직관"이 1번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직관"이라는 번역어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지요. 저는 위에서 "칸트 이래 독일 철학에서 직관이라고 할 때는 대개 감각적 인식을 의미합니다. 감각적 인식이 개념을 통해서 매개되지 않은 인식이기 때문이지요."라고 이야기했지요.

직관과 사유의 대비, 즉 개념을 통해 매개되지 않은 인식과 개념에 의해 매개된 인식 사이의 대비는 칸트 이래 독일의 철학적 전통에서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넓게 보면 이 전통에서 벗어나 있지 않을 벤야민도 이런 대비에 익숙했을 테고요. (참고로, 불어 번역에서 Anschauung을 감관을 통한 수용의 의미로 번역했다는 것도 바로 이것이 개념을 통해 매개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수용한 것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킨 번역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현실이라는 번역어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현실이라는 단어가 "20세기적인 상황적 성격의 묘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벤야민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바에 따르면) 실재를 대중에게 맞추는 일이 (예를 들어 기술적 복제 따위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바로 20세기의 현실이지요.

paby 2005-07-15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저도 번역에서 이해가능성을 매우 중시 여깁니다. 그런데 사실 1번 뜻의 직관이라는 말은 철학용어로 매우 흔하게 통용되고 있는 표현입니다. 근세철학 개론 수업만 들었어도 이런 의미의 직관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벤야민 번역자들이 고심하지 않고 그냥 직관이라고 옮긴 것이죠. 단언하건대, 번역자들 중 누구도 직관이 2번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번역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독일어 Anschauung이 1번 뜻을 가지는 경우 직관으로 번역되니까요. (오히려 Anschuung이 2번 뜻을 가지는 경우가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고민의 대상이 되겠지요.)

물론 철학과 관련없는 사람들이 일상언어에서 직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이런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문맥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직관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일상적 의미의 직관을 사용할 때, 이것을 사고와 대비시키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참고로 제가 인용한 표준 국어 대사전은 국립국어연구원에서 2001년 cd로 발행되었고, http://www.korean.go.kr/000_new/50_dic_search.htm# 에서 단어찾기가 가능합니다.)

paby 2005-07-15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로 영어에서도 직관의 1번 뜻을 intuition이라고 옮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칸트 번역에서는 대개 그냥 intuition을 쓰지요. 물론 독영 사전에도 있습니다. Langenscheidts의 Anschauung 항목에 마지막으로 등재된 intuition은 분명 칸트 철학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저도 벤야민의 영어 번역에서 perception을 쓰지 말고 intuition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한글 번역의 경우에도 지각이라고 쓰는 것이 오역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다만 "직관"이 오역이라는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 그리고 "직관"이 "지각"보다 오히려 나은 번역이라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 제일 좋은 번역만이 오역이 아니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yoonta 2005-07-15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내용을 보면서 다시한번 놀랍게 느끼는게 독일어가 가지는 정확한 개념사용입니다..우리말에서나 영어에서도 거의 구분없이 사용되는 지각도 그렇고 직관도 그렇고 독어에서는 정확하게 구별하여 사용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독어의 그 놀라운 조어능력이란...-_-

로쟈님 댓글 중에 좀 이해 안되는게 제 말은 이태동씨가 anschauung을 perception으로 해석한 영어본을 근거로..percption을 지각으로 번역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지
anschauung을 perception으로 번역한 영역자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어에서는 지각으로서의 perception과 직관으로서의 perception이 구별없이 사용되는 듯한데(불확실함. 확인해주실수 있는분 부탁바랍니다-_-)..이 때문에 이태동씨가 직관을 지각으로 번역한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영어에서는 지각perception(독wahrnehmung 혹은 perzeption)과 직관perception(독 anschauung)을 어떻게 구분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맥에 따라 파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사실 직관이라는 용어가 intuition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일반인의 경우에는 주로 '영감'이해되지 않나요? 그것을 직관으로 보는 경우가 오히려 저희들 처럼 철학공부좀 한 사람들테나 많은것 같은데요? 뭐 통계가 나와있는 건 아니니 누가 맞다고 할수는 없겠네요..그리고 paby님의 글을 다시보니 제가 좀 오해한 부분이 있네요..지송^^
독어에서도 anschauung이 intuition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엄밀한 철학적 개념구분은 아니겠지요? 벤야민의 글도 분명 anschauung과 intuition은 구분하여 쓴 것으로 보여집니다. 지각wahrnehmung과 직관anschauung을 구별한것 처럼 말이지요..

로쟈 2005-07-16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by님과는 의견/입장 차이만을 확인하게 되는군요. 그리고 yoonta님, 제가 본 사전들에서 영어의 perception은 직관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더불어, 제가 참조한 러시아어본에서도 해당 독어는 영어와 마찬가지로 '지각'으로 옮기고 있으며(이 러시아어 단어도 '직관'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저로선 5종의 국역본보다는 서로 일치하게 옮기고 있는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을 더 신뢰할 수밖에 없군요.

그리고 매번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훌륭한 외국어가 아니라 둔감한 한국어입니다. "우리말에서나 영어에서도 거의 구분없이 사용되는 지각도 그렇고 직관도 그렇고 독어에서는 정확하게 구별하여 사용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리고 하신 건 다소 의외인데, 현재의 혼선을 낳은 건 독어 anschauung의 중의성이니까 말입니다...

yoonta 2005-07-17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rception [psépn]
n.
1 지각(知覺)(력, 작용); 인식, 인지(認知), 이해; 직관, 직시
2 지각되는 것, 지각 대상; 【법】 취득액, 점유 취득, 징수 ((임차료 등의))
3 견해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지각> 그리고 <직관> 눈에 안보이시나요?
다음 영어사전에서 찾은 겁니다.. 사전이 틀렸다고 한다면 할말 없구요..

기타 독영사전을 찾아보면 perception은 wahrnehmung이라고 나오고 독한사전을 찾아보면 perzeption은 지각이라고 나옵니다.(교학사독한사전) wahrnehmung은 지각이라고 나오고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perception을 anschauung의 역어로 영어권에서 사용하는가 안하는가인데요..
für das Denken wie für die Anschauung..
for both thinking and perception...
님이 직접 인용하신 벤야민독어본과 영어본입니다..
정확히 perception을 anschauung으로 옮기고 있고요..(anschauung이 직관이라는 것은 또 이야기할필요 없겠죠? )

그리고 혹시나 해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영어본을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In whatsoever mode, or by whatsoever means, our knowledge may relate to objects, it is at least quite clear that the only manner in which it immediately relates to them is by means of an intuition.
보시는 바와 같이 직관을 intuition으로 번역했군요...다른 영어본볼까요..
IN whatever manner and by whatever means a mode of knowledge
may relate to objects, intuition is that through which it
is in immediate relation to them,....
역시 직관을 intuition으로 번역했습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직관anschauung을 intuition으로 영역했다는 것은 이번에 확인했고요...그러나 이 칸트에서의 intuition이 영감(비매개적 직관)이 아니라는 점은 동의하실겁니다..

그런데 perception이 지각에 쓰이는 건 분명한데 직관에 쓰이는지는 불분명하다는 식으로 위 댓글에서 제가 말했으니...anschauung이 intuition으로도 영역될 수있다는 점을 이번 기회에 확인한 셈이 됐네요..

따라서 지금까지의 정보로만 기초로한다면 perception은 wahrnehmung으로는 사용하지만 anschauung으로는 적어도 칸트책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벤야민책은 예외).. 그러나 한국어 번역에서의 perception에는 직관도 있다는 점입니다..

직관과 관련해서는...
직관은 두가지의미로 사용가능한데.
(칸트적) 직관anschauung은 영어로 벤야민책에서는 perception으로...
칸트책에서는 intuition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직관(영감)은 영어로 역시 intuition입니다..
이처럼 영어에서는 직관을 두가지 의미에 모두 intuition을 사용합니다..

결국 이번 혼동이 온 원인에는 anschauung을 번역하는데 perception으로도(벤야민영어본)....intuition(칸트순수이성비판영어본)으로도 사용하는 영어해석상의 혼용 혹은 perception을 지각 혹은 지관으로 번역하는 한국어해석의 혼용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보고요.. anschauung을 1번직관과 2번직관으로 섞어쓰는 독어의 혼용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매번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훌륭한 외국어가 아니라 둔감한 한국어입니다. "우리말에서나 영어에서도 거의 구분없이 사용되는 지각도 그렇고 직관도 그렇고 독어에서는 정확하게 구별하여 사용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리고 하신 건 다소 의외인데, 현재의 혼선을 낳은 건 독어 anschauung의 중의성이니까 말입니다..."

제가 둔감한 한국어 감각을 가졌다는 요지의 말씀이신데...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지 영 기분이 나쁘군요..설사 제가 정말로 둔감했다고 하더라도 꼭 "둔감한 한국어"라는 식으로 표현하여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셔야 했나요?

직관을 1번직관과 2번 직관 구분없이 intuition으로 (때로는 perception으로)사용하는 영어(혹은 한국어)때문에 혼선이 온것인가요....칸트적 의미의 직관은 어김없이 anschauung으로만 사용하고 영감으로의 직감은 intuition으로 사용하는 독어의 "중의성"때문에 혼선이 오는 것인가요?

제 말투가 특별히 님께 기분나쁘게 한 부분은 없었던 것으로 믿습니다. 전 다만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했을 뿐이고요..
그것에 잘못이 있는것 같다면..차근차근 지적해주면 그만 입니다..(적어도 님글을 관심읽게 읽고 댓글다는 사람한테 보일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꼭..둔감한 한국어.......라는식으로 말씀하셔야만 했나요?

로쟈 2005-07-17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nschauung이 특히 칸트에게서 '직관'으로 번역된다는 얘기는 제가 처음부터 한 것입니다("특히 칸트철학의 용어로 굳어져 있다). #3은 처음부터 지각과 관련하여 현대에서의 아우라의 파괴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저는 이 대목에서 anschauung의 역어가 '지각'이 더 타당하며,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도 그렇게 옮기고 있다고 했습니다. 독어본에 비추어 영어본의 오역들을 지적하실 만큼(이 경우 러시아어본도 오역입니다) 훌륭한 외국어 실력을 보여주셨는데, 저로선 왜 '지각'과 '직관'이란 우리말 의미의 차이가 감지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었을 따름입니다(intuition을 '지각'으로 옮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perception을 직관이라고 옮기진 않지요. 문제는 anschauung의 경우 두 가지 의미를 다 갖고 있기에 문맥에 따라 가려써야 한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둔감한 한국어'란 표현으로 기분 나쁘게 해드렸다면 죄송하군요. 그런 뉘앙스가 없지는 않지만, 제 의도는 yoonta님의 독일어 예찬에 호응하기 위해서 학문어로서 한국어 자체가 갖는 '둔감함'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물론 저로선 아이러니를 담은 것이니 이래저래 불쾌하실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 yoonta님을 겨냥한 건 아니라는 걸 밝혀둡니다(그리고 제 브리핑에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이 특이하게도 모두 '알라디너'는 아니시더군요. 설마 제 서재에만 들르시는 건 아니시겠죠? 가면의 소통이 아닌 쌍방향 소통이라면, 서로간에 오해를 줄이고 이해의 폭을 늘릴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비슷한 공부를 하고 계신 거라면 가끔은 페이퍼도 써주시기 바랍니다...).

일요일의마음 2005-07-17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은 '알라디너'는 댓글 달 수가 없네요-_- 읽고나면 그냥 어리벙벙해져서리^^

로쟈 2005-07-18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외계'에서 오신 분들이 무섭습니다.^^

yoonta 2005-07-1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 말이 꼭 맞다는 의미에서 글을 쓴 것은 아니고..이렇게 볼수도 있지 않느냐 차원에서 댓글쓴 것이니 굳이 로쟈님 견해에 안티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쨋든 로쟈님글을 계기로 생각지 못했던 용어들에 대한 정리는 확실히
한 셈이 됐네요..

그리고 저 외계인 아닌데요-_- 제가 페이퍼나 리뷰등을 쓰지 않는건 이곳을 알게 된것도 비교적 최근이고 글을 쓸만한 내공도 못되고 해서..유보하고 있는 중입니다.
근데 꼭 페이퍼를 써야 '알라디너'가 되는건 아니지요? ^^

로쟈 2005-07-19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유령이신가요?^^ '알라디너'라는 건 이 공간에서 '거주'한다는, 그래서 먹고 자고 하면서 생활하는 티를 낸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yoonta님의 서재는 '청정지역'이더군요. 저는 '생활'에 내공이 필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외계는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 '거주'하신다면, 굳이 알라디너가 되실 필요는 없지만, 하도 자주 방문하시길래...

yoonta 2005-07-19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은 댓글 다는 중에도 나온다고 봅니다..페이퍼등을 써서 교류하는게 물론 정석이긴 하겠지만..그렇지않다고 로쟈님이 손해?본다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제가 님 서재에 자주방문하는 건 그만큼 님글이 저한테 재미있어서 아니겠습니까.. 로쟈님 이야기 듣다보면 왠지 괜히 제가 님 서재에 와서 물만 흐려놓는 사람이 되는것 같네요.. 댓글은 앞으로 자제하도록 하지요..

로쟈 2005-07-20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의 자제를 부탁드린 건 전혀 아닌데, 오해가 있으신가 봅니다(그리고 약간은 흐린 물에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 서재는 '청정지역'이 아니므로 마음껏 휘저으셔도 됩니다.^^). 저로선 '특별한'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기 때문에 '교류'에 대한 바람을 가져보았을 뿐입니다. 제게도 '재미'를 나누어주시길 바랍니다...

2005-08-02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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