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님께
피터 싱어의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산책자, 2009) 인용을 놓고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접했다. '전업 블로거'가 아닌 나로서는 모든 이견에 답하고 해명할 여유를 갖고 있지 못하지만 간단하게 보충 설명을 해본다. 내가 이해하는 '피터 싱어의 윤리학'에 대해서다.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사례를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만 환원하게 되면 사안은 단순하다. "매일 수천 명의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을 사는 데 돈을 쓴다. 이것은 부도덕한 일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할까?"가 싱어의 문제의식이고, 그는 적정 수준의 이타심을 발휘함으로써, 구체적으론 기부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간 '책임'을 떠맡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의의 많은 부분은 그 '적정 수준'을 어떻게 산출할 수 있는지에 할애된다.
대략 그 정도의 주장이라면 별로 새로울 것도, 대단할 것도 없다. 우리의 도덕적 직관에 위배되지도 않는다. 바지가 젖고 지각하는 것 정도의 '비용'으로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윤리적 행위란 게 '참 쉽죠'라고 말할 수 있다(불매운동도 바지가 젖는 걸 감수하는 것 정도에 비유할 수 있는가?). 하지만 '연못에 빠진 아이 구하기'가 아니라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아이 구하기'나 '철로에 떨어진 아이 구하기'라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분도 계실 테지만, 양의 다소나 일의 경중에 대한 판단은 기본 판단이다). 이런 경우엔 계상되는 '비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선택'의 문제가 대두된다. 특히나 문제적인 것은 그러한 선택이 제로섬 상황에서의 선택일 경우다(이 글 또한 다른 원고를 써야 할 시간을 빚내서 쓰고 있다).
싱어는 <이 시대에 윤리적으로 살아가기>(철학과현실사, 2008)에서 윤리적 선택/결정의 표준적 모델로서 '활차의 문제'를 소개한다. 그의 공리주의적 윤리학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기에 참고해볼 만하다. '활차의 문제'의 표준형과 그 변형은 각각 이렇다.
<표준형> 당신이 활차를 발견하였을 때 활차는 선로를 따라 다섯 명을 향해 돌진하고 있으며, 당신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철도 선로 옆에 서 있다. 만약 선로를 따라 활차가 계속 돌진할 경우 다섯 명은 모두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러한 다섯 명이 목숨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활차가 옆 선로로 이동하도록 전철기를 움직이는 것이다. 이 경우 활차는 오직 한 명의 목숨만을 앗아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변형> 활차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선로 근처에 서 있지 않고 선로 위의 인도교에 서 있다. 당신은 활차를 다른 선로로 이동시키지 못한다. 당신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다리에서 활차 앞으로 뛰어내려 자신을 희생할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활차를 멈추기에는 너무 체중이 가벼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당신이 모르는 당신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몸무게가 매우 많이 나가는 사람이다. 활차가 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몸무게 많이 나가는 모르는 사람을 활차 앞으로 밀어서 떨어뜨리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밀어서 떨어뜨린다면 그는 죽게 되겠지만 다른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다소 억지스런 상황 설정이지만, 철학자들이 즐겨 쓰는 사례라고 하니까 각각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답해보시길. 조사에 따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두 가지 상황에 대해서 다르게 판단한다고 한다. 표준형에서는 비록 한 사람을 죽게 만들더라도 전철기를 움직여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믿는 반면에, 변형에서는 비록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자신이 모르는 사람을 밀어 떨어뜨려 죽게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차이를 요약하면 우리는 '선로상에서 전철기를 움직여서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야기하는 관념'과 '우리의 손으로 누군가를 밀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관념'에 대해 서로 다른 정서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뇌 활동 부위에 대한 fMRI 영상 촬영을 통해서도 확증되었다. 이 반응 차이는 어째서 생겨났을까? 싱어의 설명은 이렇다.
인도교의 경우 우리가 진화하고 있던 무한히 긴 시간 동안 있었을 법한 유형의 상황이다. 반면, 표준적인 활차의 경우는 오직 지난 세기 혹은 두 세기 동안에나 가능했던 누군가의 죽음을 초래하는 방식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물려받은 형태의 정서 반응에 어떤 영향을 미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 오직 200년 전에야 가능했던 방식보다는 100만년 전에 가능했던 방식으로 내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에 도덕적인 중요성을 부과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답할 것이다.
싱어의 공리주의적 입장은 단호하게 한 사람의 목숨보다 다섯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더 윤리적이라고 본다(이러한 윤리이론에 대한 강력한 도전은 나치 수용소에서 두 아이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했던 '소피의 선택'이다). 그러한 윤리적 판단이 계산가능하다고 보는 관점이 그의 실천윤리학을 떠받치고 있는 토대다(윤리적 판단의 계산가능성). 그리고 그러한 윤리의 실천은 인간의 진화적 본성 혹은 도덕적 직관과 때로 충돌할 수 있지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 또한 그의 핵심적인 주장이다(이 때문에 낙태와 안락사를 옹호하는 그의 입장은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독일에서는 그의 강연이 공식적으로 금지돼 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한 사람을 돕는 것이 모든 사람을 돕는 게 되는 상황'(넌제로섬)인지, '한 사람을 돕는 것이 다른 사람에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선택적 상황'(제로섬)인지 판단해볼 필요가 있다. 싱어를 참조하자면, 이러한 판단에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절대적인 근거가 되지 못한다. 알라딘 불매운동이 단순하게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 '도움을 주느냐, 마느냐'의 문제라면 사안은 단순하다. 김종호씨 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궁극적으로 모든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첫걸음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은 그런 관점에서 가능할 수 있다. 알라딘 대신에 교보나 예스에서, 혹은 동네서점에서 구입하는 것, 혹은 아예 책을 구입하지 않는 것을 '바지 젖는 것'을 감수하는 선의의 행동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도움을 줄 것인가'의 문제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부당해고가 불법행위라면 당사자가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듣기에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떤 법적 구제/ 보호가 가능한지 나로선 알지 못한다. 구두로 알라딘의 인사담당자가 '장기근무'를 약속했지만,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이 또한 얼마만큼의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피해 당사자가 여러 경로를 통해 공개적으로 항의했기 때문에 대부분 묻혀진 다른 사건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적어도 김종호씨는 이 사건에서 사회적 약자이지만 '말하는 주체'로서 행동했다. 외로운 투쟁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투쟁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그럴 능력도 갖추고 있다.
알라딘측 해명은 3월과 9월 신학기 특수 때문에 한시적으로 인력 수요가 발생하며 이 때문에 임시직 고용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적시 인력 수급이 어려워 인력 도급업체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고, 이것이 인터넷서점에서는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 그러한 임시직 고용이 불가피하다면 문제는 그 사실(근무조건)을 피고용인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거나 속인 것이다. 법적이건 도의적이건 나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알라딘측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지느냐에 대해선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담당자나 대표가 이런 사정과 함께 개선의지를 밝혔다. 내가 '관망'이라고 표현한 건 그런 의사 표명이 앞으로 어떻게 이행될지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그건 당장 올 3월 신학기가 되면 알 수 있을 터이다. 불매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그 이상의 구체적이고 확실한 조처를 요구하는 듯한데, 그것이 더 효과적인 방식일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다른 예이지만, 지난해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은 나름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론 성공적이지 못했다. 불매운동의 가장 심각한 타격을 소위 진보언론이라는 한겨레와 경향이 떠안게 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하지만 좋은 뜻으로 벌인 일이니까 결과는 할 수 없는 노릇일까? 뒤집어 말하면, 불매운동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것이 아닐까? 광고 비중이 너무 큰 언론시장에서 바람직한 변화라면 광고의 비중을 약화시키고 대신에 구독자 비중는 늘리는 것이었을 터이다. 대안언론으로서 구독자 중심의 진보언론을 우리가 갖기 위해서는 신문 구독료가 최소 2-3배에서 최대 10배까지도 인상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에게 그런 비용을 부담할 용의가 있는가?
한 대학신문의 대담 자리에서 불매운동에 대한 불만을 피력했지만, 나는 그런 견해를 노골적으로 밝히진 않았다. 그것은 나의 사적인 의견으로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대담의 모든 내용이 기사회되진 않는다. 그리고 나는 불매운동이 급진좌파적 포지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건 다른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상식적이지만, 불매운동은 리버럴한 포지션에 더 가깝다). 때문에 그 기사를 옮겨오면서 필자의 확인을 받지 않은 기사에 대해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시한 바 있다. 그래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지만 내친 김에 나의 '다른 생각'을 조금 더 분명히 해두고 싶다.
무엇이 불매운동의 성공일까? 알라딘이 '악덕기업'으로 낙인 찍히고 불매운동 가담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알라딘이 손실을 더이상 감당하지 못해 백기를 드는 것일 테다. 그렇게 '알라딘 길들이기'가 성공한다면? 알라딘은 한 사람의 해고자도 없이 모든 직원이 정규직화되는 '이상적 기업'이 될 수도 있겠다(인간의 얼굴을 한 알라딘!). 인심을 쓰는 김에 임금도 동종 업계에선 최고 수준으로 대우해주기로 하자. 하지만 그 비용은? 조유식 대표가 사재를 다 털어서 마련해야 할까? 그것만으론 턱도 없을 터이고, 아마도 매출이 지금 두 배 정도 된다는 예스만큼 늘어나거나 그 이상이 돼야 할 터이다. 그건 거꾸로 우리가 현재의 두 배 이상 알라딘에서 책을 구매할 용의가 있느냐를 묻는 것과 같다.
그게 다소 무리하다면, 현행 10%의 신간 할인율을 포기하고 정가대로 책을 구매할 의사가 우리에게 있는가? 그러니까 공정무역과 윤리적 소비 운동이 대개 그런 것처럼 다른 서점보다 더 비싸더라도 알라딘에서 구매할 용의가 있는가? 그렇게만 하더라도 마진률이 상당히 좋아질 것이고(내가 알기로 알라딘은 후발업체라서 출판사로부터 예스보다 2% 정도 더 높은 가격에 공급받는다), 직원들의 고용안정과 복지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알라딘측과 이용자(알라딘너) 간에 대타협 같은 것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거라고 본다(그 가능성에 대해선 물론 낙관하기 어렵다). '불매'라는 부정적 인센티브 대신에 긍정적 인센티브를 통해서 변화를 유도하는 거라면 나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의사가 있다. 현재로선 책을 두 배 더 구입하기 어렵지만, 10% 할인을 포기하고 구입할 용의는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의 포지션은 불매운동에 반대한다기보다는 불매운동이 불충분하며 좋은 결과를 낳기 어렵다고 보는 쪽이다. 그건 바람이 완력을 발휘했지만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한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리고 덧붙이자면, 나는 알라디너로서, 꾸준히 플래티넘을 유지하고 있는 알라딘 고객으로서 나 스스로도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그동안 할인 가격에 당일배송 등 알라딘의 서비스가 좋아지는 만큼 근무자들의 노동조건은 더 나빠졌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더라도 이제 와서 "알라딘, 어떻게 그럴 수 있니?"라고 정색하긴 어렵다. "예스나 교보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라딘은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내가 '순수한 가장'이란 말로 가리키고 싶었던 뜻이다.
나는 잔소리 듣는 걸 싫어하지만 남에게 잔소리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도 어색한 상황을 만들기보다는 그냥 결별을 선택하는 편이다. 오래 참지만 미련은 두지 않는다. 나는 알라딘과 결별할 수순까지는 아직 아니라고 본다. 불매운동에 참여하시는 분들이 알라딘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이 어느 만큼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 1/10 정도면 한번 더 기회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단, 그 경우엔 우리가 '바지가 젖는 것'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부담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로쟈님 문제'가 불거지는 바람에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하나는 그래도 '파워 블로거'라는 사실. 방문자수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 말고 내가 느끼는 '파워'는 추상적이었다. 한데 이번 일로 '안티 로쟈' 전선까지 생기는 걸 보고서, 또 거기에 동조하는 분들이 많은 걸 보고서 비로소 그 '파워'란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그게 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 그렇잖은가. 공연한 오해와 적대감도 만만찮으니 내가 6년간의 블로거 생활로 무슨 덕을 쌓은 것인지 심각하게 회의할 수밖에 없다. nobam님은 이렇게 적었다.
보통 책 좀 읽었다 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가 부닥친 현실에서는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게다가 자기 사회적 위치에 대한 강박이나 뭐라도 써야 된다는 압박감 때문에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을 엉뚱하게 적용하여 빈축을 사는 딱한 경우가 많습니다.(...) 로쟈님의 이번 글을 읽다 보니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어 계시고 논리적으로도 너무 망가져 있는 게 눈에 띕니다.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저 사태와 동떨어진 푸념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중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갈피를 못 잡"고 헤매다 "빈축을 사는 딱한 경우"이고, "많이 위축되어" 있는 데다가 "논리적으로 너무 망가져 있는" 한심한 모습이 지금의 '로쟈'다. 그런 '로쟈의 푸념'을 한번 더 늘어놓는다. 짐작에, 이번엔 '입원가료 요망'이란 글들이 올라오지 않을까...
10. 01. 02.
P.S. 새해엔 알라딘 서재에 노출되지 않게 하겠다고 했지만, 이번 글은 '응답'의 성격이어서 예외로 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