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인'이라 하면 무슨 별종 같지만 암튼 책을 좋아하는 독서인들이라면 빙긋이 미소를 지을 만한 책이 출간됐다. 정수복의 <책인시공>(문학동네, 2013). 사회학자이면서 한때 방송인이었던 저자는 '걷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보태자면 '읽는 사람'이기도 하다. 책의 부제는 '책 읽는 사람의 시간과 공간'이다. '책 읽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제목의 '책인'인 것(조어 자체는 '책 만드는 사람'을 뜻할 수도 있다). 

 

 

 

저자가 서두에 '독자 권리 장전'을 붙인 게 눈에 띄면서 재미있는데, 나도 언젠가 읽은 다니엘 페낙의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 2004)에 나오는 '독자의 절대적 권리 선언'을 보완한 것이다. 좀 밋밋한 제목을 베르나르 베르베르 버전으로 바꾸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독자 권리 장전'쯤 되겠다. 그 권리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책 제목은 <책을 읽을 권리>라고 해도 무방했겠다. 언제(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나(장소에도 구애받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권리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저자는 17가지의 권리를 나열한다. 설명은 생략하고 항목만 나열하면 이렇다.

 

1. 책을 읽을 권리

2. 책을 읽지 않을 권리

3. 어디에서라도 책을 읽을 권리

4. 언제라도 책을 읽을 수 있는 권리

5. 책을 중간중간 건너뛰며 읽을 권리

6.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7. 다시 읽을 권리

8.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9. 많은 사람이 읽는 책을 읽지 않을 권리

10. 책에 대한 검열에 저항할 권리

11. 책의 즐거움에 탐닉할 권리

12. 책의 아무 곳이나 펼쳐 읽을 권리

13. 반짝 독서를 할 권리

14. 소리내서 읽을 권리

15. 다른 일을 하면서 읽을 권리

16. 읽은 책에 대해 말하지 않을 권리

17. 책을 쓸 권리

 

저자의 말대로 이것은 '시안'이다. 그래서 '상대적이며'란 말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사실 이런 권리라면 남못지 않게 누리고 있는 터여서(남용 수준이라고 할까) 마치 '나의 권리'를 읽는 듯하다. 이 가운데 <책인시공>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 주로 '어디에서라도 책을 읽을 권리'와 '언제라도 책을 읽을 권리'다. 제1부 '책을 읽는 시간'이 후자와 관련된 것이라면, 제2부 '집 안에서 책을 읽다'와 제3부 '집 밖에서 책을 읽다'는 모두 전자와 관련된 것이다. 개인적으는 '집 밖에서 책을 읽다'에 한몫 거들고 있어서 반가운데 저자가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의 한 대목을 인용해서다. 

 

김훈의 책을 읽는 가장 좋은 장소는 어디일까? 내 경험에 의하면 저녁시간에 좀 한산한 시내버스이다. 나는 십년도 더 전에, <풍경과 상처>에 맨처음 실린 글이 책으로 묶이기 전에 바로 그 저녁 버스 안에서 읽었고, 읽으면서 황홀했다. 지방 소도시에서 방위생활을 하다가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서 산 책의 말미에 그 글이 붙어 있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던 것인지. 나는 <자전거 여행>의 마지막 부분을 에어콘이 고장 나 창문을 열어 놓고 달리는 저녁 버스의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읽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책장을 넘기며 그의 글들을 읽을 때, 나는 이 세상에 그만 안 있어도 좋을 듯했다. 

 

요즘 버스 안 조명이 그리 밝은 편은 아니지만, 여하튼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으로 책장을 넘기며 달리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그 정도 행복은 누릴 권리가 우리에겐 있다...

 

13.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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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0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즘 알라딘의 핫이슈는 도서정가제 문제인데, 책은 왜 존재할까, 를 넘어서 책값은 왜 존재할까, 란 질문을 던진다. 다행히 이번주 프레시안에 이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기사가 올라왔다. 많은 분들이 참고하면 좋겠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125152618§ion=03). Q&A 기사 가운데 알라딘과 관련한 대목은 이렇다.

 

 

Q. 도서 정가제 문제는 "출판계 대 서점계"의 이익 갈등 문제인가요?

A. 알라딘이 '도서 정가제 강화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내고 김영사·창비 등 유력 출판사들이 알라딘에 출고 정지 선언을 내리면서 문제가 '출판계 대 (온라인) 서점계' 찬반 논쟁으로 비화되고 있지만 다수는 이 구도에 의문을 제기한다. 서점도 회사별로 이해관계와 전망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의 유통 구조는 서점계 내부적으로도 '강자'에 유리하게 짜여 있다며 업계 4위인 알라딘이 칼을 빼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출판사 관계자들도 있었다. 홈페이지 메인에 띄웠던 도서 정가제 반대 성명에 대해서는 불쾌감을 표시하면서도, "(각종 할인 이벤트가 금지될 경우) 스스로 고사될 거라는 강한 위기감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번에 유력 출판사들이 내린 출고 정지 결정은 상당 기간 지속될 강수라는 전망이 많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업계 1,2위 서점이었다면 그 출판사들도 출고 정지 조치까지는 못 내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 역시 "책을 안 읽거나 구입하지 않는 현실이 실질적인 과제인데 마치 도서 정가제를 통해 출판사에 조금 더 유리하냐, 서점에 조금 더 유리하냐의 논란으로만 번져가는 게 지극히 소모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출판사로 대표되는 제작사와 서점으로 대표되는 유통업자 양쪽 모두 공동운명체적인 성격"이 있고, 함께 힘을 합쳐 위축된 독서 생태계를 발전시키는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데 현재의 논란이 마치 출판사와 유통업자들이 반목하는 갈등으로만 비치는 게 불만이라고 했다.

'출판계' 역시 한목소리로 여겨지지만 그 안에서도 누군가는 관심이 없고, 누군가는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한다. 중소 출판사 종사자들은 "그렇다고 도서 정가제를 강화해서 어떤 회사가 가시적인 '이득'을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피곤하고 힘든 과정이 산적해 있지만 자사의 이득보다는 '대의'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출판인회의에 이름을 올린 한 중견 출판사의 편집자는 "오히려 가만히 있어도 잘 굴러갈 출판사들이 왜 굳이 총대를 메겠는가"라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정리하자면, (1)중소서점과 출판계의 위기 상황이 계속되고 있고,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도서정가제의 강화가 만능의 해결책은 아니더라도 필요한 첫 조처다. (2)도서정가제가 강화되면 할인을 통한 가격경쟁력으로 독자를 유인해오던 온라인서점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데, 그중에서도 (업계 4위로 입지가 불안정한) 알라딘이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업계 5위였던 리브로가 지난해에 문을 닫았다). (3)도서정가제를 강화할 경우 출판계의 소모적 할인경쟁은 다소 완화될 수 있지만 중소서점이 되살아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도서정가제가 새로운 독자를 만들어내는 게 아닌 이상 온라인서점 이용자들이 오프라인서점으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는데, 과연 그렇게 될까).

 

독자로서 혹은 도서구매자이자 알라딘 이용자로서 개인적인 생각을 적자면, 신간의 경우 10% 할인을 인정하는 한 현재의 '도서정가제'란 말은 이름과 실제가 맞지 않는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법률적으로는 '재판매가격유지제도'이고 내용적으로는 '구간별 할인율 제한제도'다. 정말 중소서점을 살리려고 한다면 신간 할인율을 전면 철폐해야 한다. 온라인서점의 편익을 고려하면 구매자가 돈을 더 지불하고 구입하는 게 온당하다(최소한 택배비를 서점이나 출판사에 전가하지 말아야 한다. 요즘은 사실상 책값에 반영돼 있기도 하지만).

 

그리고 구간의 경우에는 중고서적과 비슷하게 서점마다 자율적인 할인율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는 출간 이후 18개월이 지나면 구간으로 간주하는 듯한데, 가령 3년이 지난 책은 50% 할인을 하든지 90%를 하든지 출판사나 서점에서 알아서 결정하라는 것이다. 대신에 18개월로 하든, 2년, 혹은 3년으로 하든, 신간에 한에서는 책에 명시된 가격이 그대로 판매가가 되도록 하는 게 '도서정가제'라고 나는 생각한다(그리고 적극 지지할 용의가 있다). 알라딘도 출간되자 마자 50% 할인하는 쓰레기 같은 책들을 팔아서 살아남느니 차라리 경쟁력 있는 온라인 중고서점의 길을 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물론 모든 일에는 반전이 가능하다. 완전 도서정가제를 도입하더라도 대부분의 책을 어차피 알라딘에서 구입해야 하는 나 같은 독자가 그대로 남아 있는 한(각자가 분발해서 수입을 좀 늘리는 수밖에 없겠다. 책값을 충당하려면), 알라딘도 부동의 업계 4위 정도는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욕심 부리지 말고 오래 가는 서점이 되길 바란다. 동네서점이 없어진 지 오래라(단골이라고 내게는 10%씩 할인해주던 서점이 20년전에는 있었다) 따로 마음을 줄 만한 서점도 없다...

 

13. 0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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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랜만에 교보에 들렀다가 구입한 책은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의 사회>(새물결, 2012)이다. 엊그제 영역본이 배송된 김에 국역본도 구하러 나간 것이기도 했다(영역본의 경우 올 10월에 <사회의 이론>이란 제목으로 1권만 나왔다. 한국어본이 먼저 나온 셈!). 매장에는 진열돼 있지 않아서 직원에게 문의하고서야 비닐포장된 두 권의 책을 받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독일 사회학의 거두이자 라이벌인 하버마스와 루만의 사회이론을 비교해보고 싶은 욕심을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는데(이들의 차이는 러시아 인문학자 바흐친과 로트만의 차이와 견줄 만하다), 대표작이 번역돼 나왔으니 안 읽어볼 수도 없다(최소한 꽂아두기라도 해야 할 터이다). 루만의 책들은 그간에 주섬주섬 모아놓긴 했지만 본격적인 독서는 미뤄둔 참이다.
 
그런데 책을 보니 <사회의 사회>는 'New Directions 총서'라는 새로운 기획의 하나였다(총서의 발간사는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너를 짊어져야 한다."는 파울 첼란의 유언으로 시작한다). 9권 정도의 책이 총서 목록에 올라와 있는데, 모두 관심을 갖고 있는 저작들이라 기대가 된다. 2013년에 몇 권이나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입을 뗀 셈이니 연이어 쏟아지면 좋겠다. 라캉의 <에크리>와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근대의 정당성> 등의 타이틀이 들어 있는데, 영어본을 기준으로 해서 미리 예고편 리스트를 만들어본다. 

 

 

 

먼저 라캉의 <에크리>가 세 권짜리로 나오는 것으로 돼 있다. 영어본의 경우에도 브루스 핑크의 완역본이 지난 2006년에야 나왔고 러시아어본도 아직 안 나와 있는 책이다(세미나의 경우는 러시아어본도 여러 권이 출간돼 있다). 국내에는 이미 <에크리> 소개서, 입문서들이 여럿 나와 있다. '에피타이저'는 충분한 셈이니 이젠 '메인'을 맛볼 차례다.

 

 

 

루만의 책으론 <사회의 법>도 리스트에 들어 있다. <사회체계로서 법>과 같은 책인지는 모르겠지만. 참고로 루만 사회학에 대한 소개로는 <쉽게 읽는 루만>(한울, 2012), <니클라스 루만으로의 초대>(갈무리, 2008) 등이 나와 있다.

 

 

 

헤겔 전문가이자 저명한 공동체주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의 <자아의 원천들>과 <세속의 시대>도 목록에 들어 있다. <자아의 원천들>은 논문을 준비하면서 10년쯤 전에 일부를 참고하기도 했던 책인데, 번역된다니 반갑다. 찰스 테일러의 철학에 대해선 방한 강연집인 <세속화와 현대문명>(철학과현실사, 2003)을 참고할 수 있다.

 

 

 

이젠 국내 독자들에게 친숙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대표작 <홀로코스트와 모더니티>도 목록에 들어 있다(<모더니티와 홀로코스트>란 원제의 순서가 바뀌었다). 그리고 독일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근대의 정당성>과 <세계의 독해가능성>도 기대를 모으는 책인데, <세계의 독해가능성>은 아직 영역본도 나오지 않은 듯싶다. 그리고 끝으로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개정된 제목으로 다시 나온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시리즈의 책은 아니지만 아래 지젝의 책 몇 권이 내년에는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나올 전망이다.

 

 

 

2013년의 책들에 대해 미리 인사를 전한다. "Welcome to the Park's Land!"

 

12.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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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구입했지만 다른 일들 때문에 주말에 손도 못댄 책이 현대사학자이자 '현재사학자' 한홍구 교수의 <장물바구니>(돌아온산, 2012)다. '정수장학회의 진실'이란 부제가 책의 내용을 확연히 드러내준다. '정수장학회의 모든 것'이라고 붙여져도 좋았을 책이다. 지난주 한겨레21의 서평기사를 읽고 구입했는데, 주말 기사를 간추리면 이렇다.

 

  

이 책은 ‘정수장학회 통사’라고 불러도 좋다. 정수장학회의 뿌리 격인 부일장학회의 설립자 김지태의 출생(1908년)부터 오늘날의 정수장학회 사회환원 운동까지 100년 넘는 세월을 다룬다. 핵심은 역시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부일장학회 강탈 과정이다. 법원은 최근 김지태 유족의 소송에서 “국가의 강압”이 있었다고 밝혔지만, 김지태와 주변인들이 당한 일을 보면 강압이란 말은 차라리 고상하다. “연행·유치된 첫날 중정(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박용기가 군 야전복을 입고 권총을 차고 들어와 ‘우리 군이 목숨을 걸고 혁명을 하였는데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재산은 우리의 것이다’라고” 겁을 주었다는 증언은 서부활극 같은 당시 분위기를 생생히 전한다. 지은이는 “인질강도 사건”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다음으로 “한강 이남의 최고 부자”라는 김지태한테서 왜 하필 땅 10만평과 함께 그가 세운 <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부산일보>를 빼앗았는지다. 이 세 언론사들은 이승만 정권 말기의 1960년 3·15 부정선거 항의 시위를 생중계하고,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김주열군 주검 사진을 크게 싣는 등 당시에는 엄두를 내기 어려운 용감한 보도 활동으로 “세계적 특종”을 했다. 4·19 혁명 뒤 장면 총리는 부산문화방송이 “혁명의 선봉”이었다며 표창했다. 언론의 위력과 이용 가치에 주목한 박정희는 이 3개 언론사를 빼앗아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장학회에 담은 셈이다. 책 제목 <장물 바구니>는 그래서 나온 표현이다.(한겨레)

'장물바구니'의 의미도 '정수장학회의 진실'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박근헤 후보부터가 일독해볼 책이겠다. 21세기 대선에서도 여전히 '죽은 박정희' 혹은 유신의 망령과 싸워야 한다는 현실이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김재홍의 '박정희 시리즈'도 읽어보면 좋겠다.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책보세, 2012)와 <박정희의 후예들>(책보세, 2012)에 이어서 <박정희 유전자>(개마고원, 2012)가 출간됐다. 박정희에 관한 누군가의 상식을 교정해주고, 또 누군가의 상식은 보강해주는 책들이다. 월요일 아침에 생각이 나서 간단히 적었다...

 

12.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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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아침에 현직기자들의 책을 손에 들었다. 서화숙 한국일보 선임기자의 칼럼집 <민낯의 시대>(클, 2012)와 임지선 한겨레 기자의 <현시창>(알마, 2012)이다. 기자가 저자라는 점 말고도 공통점이라면 제목의 의미를 책을 들춰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는 점(현시창이 '현실은 시궁창'의 준말이라고).

 

 

<민낯의 시대>에서 저자가 던지는 물음은 사뭇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를 떠올리게도 한다. "왜 어떤 나라는 점점 더 발전하고 어떤 나라는 멈추고 어떤 나라는 심지어 뒷걸음치기까지 하는 걸까." 이런 물음을 갖게 한 것은 물론 최근 5년간 벌어진 뒤걸음치기, 민주주의의 퇴행이다.

최근 5년 사이에 한국 사회는 다시 뒷걸음치고 있다. 그것도 민주적으로 선출한 정부에 의해 민간인 사찰이 일어나고 자유로운 언론활동이 수사대상이 되고 최고권력층의 불법이나 탈법은 검찰이 제대로 수사조차 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위공직자들의 도덕 수준은 불법과 탈법이 일상이 되어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걸러지지 못할 정도로까지 떨어졌다. 김영삼 정부(1993-1998) 때 대통령 아들을 구속 수사할 수 있었던 검찰은 그로부터 15년이 지나서 불법이 드러난 아들에 대해 서면질의로 수사를 덮었다. 북한 또다시 가장 위험한 적이 되었다.(5-6쪽)

저자가 압축해놓은 대로 권력층의 불법과 탈법이 일상적이다 보니 더이상 '자극'이 되지 않는 시대가 우리 시대다. 개탄할 만한 현실이지만 저자는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가치전도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역사발전의 디딤돌이 될 거"라고 믿어서다. "겉으로는 공동체 중심을 지향한다고 말하고 글 쓰지만 실제 삶은 자기 이해관계에 빠져 있던 이들이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게 오히려 잘됐단 것이다. 왜 그런가.

실제로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서 겉으로는 공익을 표방한 이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논의들이 쳇바퀴만 돌았던가. 그러니 모두가 가면을 벗고 정체를 드러낸 이후에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진짜 논의가 가능해진다. 한국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민낯을 드러내는 과정은 뼈아프지만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로 인해 삶과 말이 일치하는 진짜 지식인, 진짜 지도자들도 모습을 드러낸다.(7쪽)

그것이 '민낯의 시대'가 갖는 의의다. "누구든 어떤 집단이든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옳을 때에만 옳다고 해줄 시대"가 바로 민낯의 시대다. 더이상 가면을 쓰지 않으니 가면에 속을 염려가 줄어든 시대. 하지만 낙관은 아직 이르다. 저자는 2009년 2월 12일자 칼럼에서 이렇게 쓴다.

정작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부동산 투기를 하고 편법 증여를 받고 논문 조작을 하는 맨얼굴이 다 드러났는데도 이들을 정부각료로 내세우는 정부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각료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낸 세금으로, 국가 전체를 위해 일하라고 기용되는 사람들이다. 추악한 맨얼굴이 드러났는데도 각료로 기용하는 것은 범죄행위임을 이명박 정부는 알아야 한다.(90쪽)

하지만 우리도 이젠 안다. 그걸 알 만한 정부라면 이명박 정부가 아니다. 아니 아무리 범죄행위라 하더라도 "그게 어때서?"라고 대꾸하는 게 이명박 정부다. 우리가 챙길 수 있는 건, 챙겨야 하는 건 'MB의 추억'(http://www.youtube.com/watch?v=eqr0QyOywbo)과 함께 'MB의 교훈'일 뿐이다.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런 시대를 한번 더 반복해서 살게 될 것이다.

 

 

<현시창>은 한겨레21의 '인권OTL' 시리즈로 이름을 떨친 임지선 기자가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현장에서 마주친 내 또래 청춘들에 관한 기록"이다. 사회부 기자의 취재거리가 될 만한 청춘이라면 대충 어림짐작이 가능하다. 막다른 길로 내몰려 살인을 하거나 자살하게 된 청춘들이다. "노동, 돈, 경쟁, 여성" 등의 키워드가 이들 청춘의 고통을 집약한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좋은 데 취직한다는 학벌사회, 초등학생들까지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경쟁에 미친 사회, 자존심도 인권도 포기한 채 일하길 강요하는 직장문화, 안전장치 하나 없이 일해야 하는 후진적 노동환경, 돈이면 다 된다며 상위 1퍼센트의 품격을 만끽하라는 물질만능사회, 남편과 아버지가 폭력을 휘둘러도, 직장 상사가 성희롱을 해도 도움받기 어려운 가부장제 사회에서 청춘 개개인은 고통받고 있다.(6쪽)

그래서 나온 푸념 혹은 절망이 '현시창'이다. 절망에 빠진 청춘들에 대한 위로는 요즘 차고 넘친다. 하지만 저자는 그보다 더 필요한 게, 더 중요한 게 현실의 직시라고 본다.

너무 많은 이들이 청춘을 위로하고 치유한다고 나서는 세상이다. 나는 스물네 건의 사연을 내보이며 이래도 세상이 이들에게 "힘내라"는 말을 건넬 수 있겠냐고 반문하려 한다. 이것은 철수와 영희,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나 혼자 잘살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청년이 미래에 대한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사회는 '나쁜 사회'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7쪽)

두 여성 기자의 칼럼집과 보고서는 에둘러 말하지 않는 미덕이 있다. '민낯의 시대'와 '시궁창 현실'을 직시하게끔 한다. 변화는 그 이후에 가능하다고 그들은 믿는다. 나 또한 그렇게 믿는다...

 

12. 11. 04.

 

 

 

P.S. 기자들의 책을 언급하다 보니 최근 시사IN 기자들이 다시 펴낸 <다시 기자로 산다는 것>(시사IN북, 2012)이 생각난다. <기자로 산다는 것>(호미, 2007) 이후 어느새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창간과 관련한 비밀스런 이야기들과 취재 과정의 뒷담화가 넘쳐난다. 눈물도, 웃음도 있다."고 소개된다. 올해는 사옥도 이전했다고 하는데(주진우 기자의 공이 크다고 들었다) '진짜 언론'이 결국은 승리한다는 걸 보여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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