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학술출판 트렌드
이번주 한겨레21의 별책부록으로 실린 글을 옮겨놓는다. 아직 지면으론 보지 못했는데, 2010년의 인문출판 트렌드에 관한 글을 청탁받고 쓴 것이다. 한데 구성을 보니 초점은 '트렌드'가 아니라 '키워드'였다. 인문서부터 자기계발서까지 2010년의 '출판시장 키워드' 다섯 가지를 꼽고 있는데, 결과적으론 '역사와 그 반복'이 내가 고른 키워드가 됐다. 다른 필자들과 달리 출간예정 리스트를 잔뜩 나열한 건 이미 교수신문에 게재됐던 리스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 피해가기 어려웠다. 나머지 키워드는 '장편소설' '프로슈머' '연예인 실용서' '실패하지 않는 삶' 등이다(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6609.html 참조).

한겨레21(10. 01. 22) 인문서부터 자기계발서까지, 출판시장 키워드 5
2010 키워드① 역사와 그 반복
사회학자 김홍중 교수의 <마음의 사회학>(문학동네 펴냄)에 따르면, 우리 시대는 ‘생존’을 무엇보다도 소중한 가치로 설정하는 사회적 합의를 달성했다. ‘생존이 부끄러움이 되는 감수성’을 ‘진정성’이라고 부른다면,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그 진정성이 유효할 수 있는 환경과 토대를 상실했다. 그래서 가장 절박한 관심이 ‘진정한 삶’이 아니라 ‘목숨 그 자체’가 돼버렸다. 하지만 경제불황과 맞물려 2009년 한 해 경제·경영서와 자기계발서의 인기가 급격하게 하락한 것은 반전의 한 조짐이다. 우리는 생존보다 더 소중한 것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2010년 출간 예정 인문·사회과학서들에 거는 기대이다.


생존보다 더 소중한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기에 올해는 비단 한-일 관계뿐만 아니라 자연스레 우리의 지난 100년사를 더듬어보게 한다. 따라서 올해의 트렌드라면 아무래도 역사와 그 반복이 될 듯하다. 먼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산 이들이 준비했던 근대국가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그들이 꿈꾼 나라>(돌베개)나 강제병합 전후의 사정을 짚어줄 <대한제국흥망사>(돌베개)가 눈길을 끄는 책이다. 일제시대사 쪽으론 경성제국대학의 의의를 해부한 <식민권력과 근대지식>(서울대출판문화원)과 <식민지 검열의 역사적 성격>(소명출판) 등도 드물게 다루어진 주제라 관심을 모은다.
한국전쟁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기에 현대사 분야에서도 기대작이 없지 않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펴내는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역사비평사)이나 염인호의 <또 다른 한국전쟁>(역사비평사), 박찬표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본 한국현대사>(후마니타스), 김종엽의 <분단체제와 87년체제>(창비), 서동진의 <한국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창비) 등이 우리가 살아온 모습을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임지현·백영서 등 한국의 대표적인 인문학자들을 인터뷰해 1990년대 이후 한국 인문학의 지형을 탐색한 <세기말 한국 인문학의 지각변동>(그린비)도 필독 범주에 넣을 만하다.
번역서들의 면면도 화려한 편이다. 마르크스의 <자본>(길)이 새로 완간되고,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길)이 새 번역본을 얻는 것 외에도 사회심리학자 미드의 주저 <정신, 자아, 사회>(한길사)와 독일의 개념사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전 5권·푸른역사)이 번역돼 나올 예정이다.


화려한 번역서의 면면
철학·이론 분야에서는 슬라보예 지젝의 책이 <처음은 비극으로 다음은 희극으로>(창비) 외 여러 권 소개될 예정이고,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민음사), 가라타니 고진의 인터뷰 <정치를 말한다>(도서출판b),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도서출판b) 등이 우리말 번역본을 얻는다. 독창적인 데리다 연구서인 아즈마 히로키의 책은 김상환의 <데리다와 들뢰즈>(창비)와 같이 읽어봄직하다.
10. 01. 22.
P.S. 특집에는 '2010 이런책이 보고 싶다' 코너도 있는데, 소설가·문화평론가·편집자 등이 속내를 드러냈다. 읽어보니 이쪽이 더 재미있다(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6603.html). 거창하게도 나는 '시대의 벽화와도 같은 책'을 읽고 싶다고 적어보냈다.


특정 연도, 시대의 벽화와도 같은 책
다윈 탄생 200주년이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2009년에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은 ‘1989년’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연말에야 크리스 하먼의 <1989년 동유럽 혁명과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붕괴>(책갈피 펴냄)가 출간된 정도였고, 이마저도 재간본이다. 영어권에서 동유럽과 소련의 현실사회주의 붕괴 과정을 다룬 책들이 다수 쏟아져나온 것과 비교하면 우리의 관심사는 그들과 전혀 다른 건가 싶기도 하다. 한 박자 늦은 것이긴 하지만, 2010년에라도 읽어볼 수 있을까.


특정 연도에 대한 역사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인문학자 한스 굼브레히트의 주저작 <1926년: 시대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기>(1997)란 걸 알게 되면서다. 500쪽이 넘는 이 두툼한 책을 읽어볼 엄두는 내지 못했지만 이런 종류의 책이 번역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아, 더듬어 올라가면 국내에 소개된 책 가운데는 중국사학자 레이 황의 <1587 아무 일도 없었던 해>(가지않은길 펴냄)도 꼽아볼 수 있겠다. 명나라 만력제의 한 치세를 다루지만 한 시대와 국가제체에 대한 총체적인 조감도를 매혹적으로 펼쳐 보이는 책이다.
우리의 경우 ‘1950년대’나 ‘1960년대’ 같은 식으로 한 시대를 다룬 책들은 더러 있었다. 여전히 ‘시대’나 ‘체제’가 우리의 주된 코드이자 키워드이다. 하지만 조금 더 세밀하게 접근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1960년’에 대한, ‘1980년’에 대한 책, 개인의 일상적인 삶의 감각과 시대정신과 국제사회의 변동이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 보여주는 ‘시대의 벽화’와도 같은 책을 이제는 우리도 가져봄직하다. 당장 올해에 그런 걸 읽을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