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볼라가 한국에도 상륙한다면 모를까 백신을 맞힐 아이도 없기에 후나세 슌스케의 <백신의 덫>(북뱅, 2014)은 나와 무관할 책일 줄 알았다. 두 가지가 놀라운데, 일단 저자의 책이 국내에 상당히 많이 나와 있다는 점(나는 초면이다), 그리고 백신이 생각보다 문제가 많으며 심지어 음모론과도 연계된다는 점.

 

 

저자는 소비자문제 및 환경문제 평론가라고 소개되는데, 국내에 출간된 책만 해도 열댓 종에 이르고 그 가운데 작년과 올해에 나온 책이 일곱 권이다. 이 정도면 건강 분야에서는 손꼽히는 저자가 아닐까 싶다. 최근작 <굶으면 낫는다>(문예춘추사, 2014)의 메시지는 신선(?)하지만, <백신의 덫>의 주장은 섬뜩하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이 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던 백신의 어두운 이면을 들춘다. 병의 예방을 위해 맞는 예방접종의 각종 부작용 및 위험성을 경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미 소멸해 사라진 병이나 가볍게 앓고 지나갈 수 있는 병에 대해서도 무분별하게 백신 접종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꼬집으며 백신 신화가 탄생하게 된 경위와 실체를 파헤친다. 과도한 의료행위로 보이는 백신 접종이 아이를 가진 모든 부모의 의무처럼 일반화된 이유는 뭘까?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거대 제약회사다. 후나세 슌스케는 국민들의 건강을 챙기고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거대한 세력에 맞서 백신의 유해함을 제대로 알고 은밀히 추진되고 있는 강제적인 의료 시스템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신 접종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는 세력, 곧 거대 제약회사의 배후로 저자가 지목하는 '어둠의 세력'이 로스차일드와 록펠러 양대 가문이다. 잉글랜드은행과 미국 연방준비제도를 장악한 로스차일드 일가는 거의 모든 산업분야의 주요 기업도 소유하고 있는데, 제약쪽에선 화이자와 클락소 스미스클라인이 로스차일드계 기업이다(믿거나 말거나 세계의 부 가운데 7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는데(이런 책이야말로 해당 분야의 전문가 리뷰가 필요하다), 저자가 제기하는 충격적인 사실 가운데 하나는 백신을 통해 인구를 억제하려고 한다는 음모다. '인구 삭감을 위한 생물학 무기'로 백신이 사용되고 있다는 폭로다. 1990년대에 빌 게이츠와 데이비드 록펠러 등이 개발도상국의 예방접종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WHO를 통해서 신형 파상풍 백신을 지카라과, 멕시코, 필리핀 등에 공급했는데, 이 백신에서 hCG라는 호르몬 성분이 검출되었다. 파상풍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임신 저해 물질'이다. 결국 각국에서 이 백신에 대해서는 접종 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저자에 따르면 인구 삭감 계획은 '음모론'이 아니라 실제다. 1978년 빌더버그 회의에서 헨리 키신저는 "세계인구를 절반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고, 빌 게이츠도 2010년 한 강연에서 "현재 세계인구는 68억이며 90억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백신이나 의료, 생식 건강서비스(중절 등)를 잘 운용하면, 아마도 10-15%는 줄일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록펠러가의 니콜라스 록펠러는 "세게 인구는 적어도 절반으로 죽여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는데, 이 발언을 공개한 영화제작자는 2007년에 의문사를 당했다고. 게다가 CIA 극비작전 가운데는 아프리카 흑인들 사이에 내전을 부추켜서 서로 죽이게끔 한다는 것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백신 접종을 '의료 마피아'가 추진하는 '인구 삭감 계획'이라고 보는 저자의 관점은 상당히 충격적이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록펠러 가문의 사람들은 합성의약품을 절대로 먹지 않는다고). 음모론과 관련해서는 일본의 반핵평화운동가 히로세 다키시의 책들도 떠올리게 한다(세계를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에 대해서는 일본 저자들이 일가견을 갖고 있는 듯하다).

 

 

아무튼 그래서 덩달아 로스차일드가에 대한 책도 오전에 몇 권 주문했다. 니얼 퍼거슨의 <로스차일드>(21세기북스, 2013)와 프레드릭 모턴의 <250년 금용재벌 로스차일드 가문>(주영사, 2008) 등이다.

 

 

더불어, 이제 더 맞거나 맞힐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백신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건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따지면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주의를 요한다!). 로버트 시어스의 <우리집 백신 백과>(양철북, 2014)나 팀 오시의 <백신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어문각, 2006) 등이 가정 상비약처럼 집안에 챙겨놓을 만한 책. 아니 '상비약'이란 비유가 안 맞을지도 모르겠다. 후나세 슌스케의 <약, 먹으면 안된다>(중앙생활사, 2013)를 떠올려 본다면(의사나 약사들이 가장 싫어할 만한 저자일 듯). "약, 절대로 먹으면 안돼!"란 말을 대놓고 한다면, 혹 이런 대꾸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너, 약 먹었냐?"

 

14.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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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동녘, 2013)을 교재로 강의를 하게 돼 그밖에 참고할 자료도 더 찾아봤는데, 가장 최근에 나온 건 프레데릭 보름스의 <현대 프랑스철학>(길, 2014)이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이 사르트르부터 시작하는 데 반해서 <현대 프랑스철학>은 역시나 베르그손부터(개인적으로는 '베르그송'이란 표기를 더 선호하는데, 이젠 그렇게 표기하는 전공자들이 거의 없어졌다. 고유명사 표기에서 원음주의는 한 가지 기준일 뿐이고, 일관성이라는 면도 고려해야 한다).

 

 

베르그손에 관해서라면 최근에 나온 황수영의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갈무리, 2014)도 참고할 수 있는데, 입문서에 해당하는 책은 아니고 '깡길렘, 시몽동, 들뢰즈와의 대화'라는 부제대로 '심화' 단계에 해당한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에는, 이게 관행인가 약간 의문이 드는 '철학자'들도 포함돼 있는데, 통상 문학비평가로 분류되는 모리스 블랑쇼, 롤랑 바르트와 정신분석가로 자크 라캉,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그들이다. '철학'의 의미를 '사상'에 가까울 정도로 폭넓게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정작 폴 리쾨르 같은 경우가 빠진 게 특이사항. 교양강좌를 옮긴 것인 만큼 그래도 난이도가 얼마간 조정되어 있다는 게 장점이다(그렇더라도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읽어나가는 건 역시나 무리해보인다).

 

 

사실은 프랑스 현대철학에 대한 참고자료로 벵쌍 데꽁브(벵상 데콩브)의 <동일자와 타자>(인간사랑, 1990)를 먼저 떠올렸지만,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절판되긴 했지만 영어판과 러시아어판까지 나와 있을 정도로 정평이 나 있는 책. 1930년대부터 1970년말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영어본 제목은 <현대 프랑스철학>이다.

 

 

이와 함께 프랑스 구조주의 관련으로 읽어볼 만한 건 뤽 페리와 알랭 르노가 공저한 <68사상과 현대 프랑스철학>(인간사랑, 1995). 이 또한 절판된 지 오래된 책이지만 다시 찾아보니 영어판이 나와 있다. <60년대 프랑스 철학>이라는 제목이다. 구조주의와 그 이후를 다룬 책으로 보면 되겠다. 비슷한 시기를 다룬 책으론 크리스티앙 데캉의 <오늘의 프랑스 철학사상>(책세상, 1991)도 번역됐었지만 개인적으론 별로 재미를 못 본 책이다. 절판되지 않은 책으로 에릭 매슈스의 <20세기 프랑스 철학>(동문선, 1999) 정도가 유익했다.

 

 

찾아보니 영어본으로는 개리 거팅이나 앨런 슈리프트 같은 전공자들의 20세기 프랑스철학 가이드북이 나와 있다. 좀 부담스런 가격대여서 구입은 보류하지만 일단은 보관함에.

 

그밖에 구조주의 관련으르는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1-4>(동문선, 1998-2004)나 만프레드 프랭크의 <신구조주의란 무엇인가1,2>(인간사랑, 1998-1999) 등이 더 있지만 일반 독자의 독서 범위는 넘어서는 것 같아서 생략한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에서 <현대 프랑스철학> 정도를 독파한 연휴에 생각해볼 문제이지 싶다...

 

14.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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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쌓여 있는 수십 권의 책들을 정리하다가(정확하게는 정리하는 시늉을 하다가) 엊저녁에 손에 든 책은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 공부>(돌베개, 2014)다. 더불어 프랜스시 윈의 <자본론 이펙트>(세종서적, 2014)까지 꺼내와 나란히 펼쳤는데, <자본론>에 새삼 꽂힌 것은 짐작 가능한 대로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글항아리, 2014)의 실물을 이번주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예판만으로도 현재 종합베스트셀러 3위에 올라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토대'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는 관심의 반영이 아닐까).

 

 

<자본론 공부>에 서문에서 김수행 교수는 예상대로 <자본론> 공부의 의의에 대해서 짚었는데, 책을 마무리하던 시기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즈음과 겹쳤다. "아직도 '세월호 참사'의 교훈이 우리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 마당에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가장 과학적으로 끝까지 추적한 마르크스의 거대한 작품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가 서문의 첫 문장인 것은 그 때문이다.

 

<자본론>은 말 그대로 자본주의 사회의 형성, 발전, 쇠퇴, 멸망을 모두 설명하고자 한 책이고,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키거나 변혁하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본론>을 읽지 않을 수 없다(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수혜자들도 그들의 기득권을 더 공고히 하기 위해 <자본론>을 읽는다). "결국 지금의 이 '썩어빠진'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어야 할 텐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과학적인' 지식을 <자본론>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막바로 <자본론>을 펴드는 일은 조금 무모할 수 있다. <자본론 공부>와 같은 길잡이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저자로서는 <자본론>에 대한 가장 쉬운 설명을 제공하려고 했고, 실제로 '벙커 원'에서 진행한 대중 강의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청소년을 위한 자본론>(두리미디어, 2010)과 비슷한 난이도이지 않을까 싶다. 임승수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시대의창, 2012)와 새로운 시각의 접근으로 올여름에 좋은 반응을 얻은 와타나베 이타루의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더숲, 2014) 등이 <자본론 공부>의 친구가 될 만하다.  

 

 

책상을 정리하다가 지나간 신문들도 치우게 됐는데, 미뤄둔 일간지 리뷰도 눈에 띄었다. 7월 28일자 한겨레신문의 '책과 생각'란에 실린 케빈 올리어리의 <민주주의 구하기>(글항아리, 2014)에 대한 리뷰다. 제목대로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책. 기사의 일부를 발췌하면 이렇다.  

3억 인구를 통치하는 대규모 공화국에서 소수가 정책을 좌우한 탓에 미국에서는 각종 부패가 잇따랐다. 특히 경제적 문제가 시민평등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2003년 미국 조세감축안은 미국 상위 1%에게 연평균 4만5000달러의 세금을 줄여줬지만, 소득 하위 60% 사람들한테는 고작 연평균 95달러를 깎아줬을 뿐이다. 이는 미국 헌법이 지닌 태생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헌법 초안을 마련한 제임스 매디슨과 입안자들은 민주공화국을 창안했지만, 기업이익집단과 정치권이 야합한 특권층 부패를 막지 못했다.

 

대중은 정치에서 점점 배제됐다. 사람들은 쟁점의 상세한 부분을 탐구하지 않았으며 자기 경험에 기반해 섣불리 사안을 판단해버렸다. 정치가 일부 엘리트의 경쟁으로 전락하고, 여론이 상징과 유행어에 손쉽게 휘둘리게 된 까닭이다. 지은이는 미국 헌법이 초기부터 강한 정부, 대중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정부를 지향한 점을 비판하며 정치와 대중의 간극을 좁히는 방안을 탐구했다.

 

이에 올리어리는 대의제를 거부하고 직접민주주의를 도입하는 한편, 미국 전통의 토론인 ‘타운 홀’ 방식에 따른 인민원 제도를 실시하자고 제안한다. 435개 하원 선거구마다 지역민회를 설치하고, 파벌이나 비밀 후원에서 자유로운 배심 시스템과 비슷한 무작위 추첨에 따라 각각 100명의 대리인을 선출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모두 4만3500명의 인민원이 활동하게 된다. 민회는 핵무기, 국제무역, 복지 문제 같은 국내외 쟁점을 공론장에서 심의한다. 민회의 전국 네트워크인 인민원은 ‘양원제 입법부의 편향’을 교정해 인민주권을 회복하고 헌법적 균형도 맞출 수 있다. 이것이 ‘시민의 자기 통치술’이다.

대안까지 따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진단은 한국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부패와 무기력에 있어서는 우리도 미국 못지 않으니까. 저자의 대안은 "시민의 덕성, 공동의 심의, 공공선을 중시하는 ‘공화주의’의 회복"이다. 리뷰를 쓴 이유진 기자는 그런 회복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매슈 크렌슨과 베전민 긴즈버그의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후마니타스, 2013)보다 희망적이라고 지적한다.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의 저자들은 이미 "시민의 시대가 끝났고, 정부가 더는 시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공화주의의 회복이란 대안은 마이클 샌델의 <민주주의의 불만>(동녘, 2012)과도 상통한다. 샌델은 자유주의의 득세와 공화주의의 쇠퇴라는 정치철학적 용어로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적시하고 역시나 공공선에 대한 관심의 회복으로서 공화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했었다. '다운사이징'된 한국 민주주의, 그에 대한 불만도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는 이즈음에 '민주주의 구하기'는 어떻게 가능할까(실상 복지국가나 자유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보루다. 그 너머에 있는 건, 마르크스의 말대로 계급투쟁이고 자본주의 이후다. 한국형 '앙시앵 레짐'은 복지국가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악화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또한 무너뜨리게 되지 않을까). 오늘밤 슈퍼문이 뜨면 달님에게 한번 물어봐야겠다...

 

14.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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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28사단에서 발생한 윤모 일병 구타 사망사건의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어제는 대통령의 질책에 이어 육참총장이 사퇴했지만 병영문화가 근본적으로 쇄신되지 않는 한(군대 인권에 대한 인식이 획기적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모두가 예상하는 바대로 이와 유사한 사건은 언제라도 재발할 수 있다. 그게 한국 군대의 현주소다.

 

 

사건의 잔혹함 때문에 안나 폴릿콥스카야의 <러시안 다이어리>(이후, 2014)에 나오는 일화가 떠올랐다. 전 세계적으로 러시아의 병영문화가, 특히 신병에게는 최악으로 악명이 높기 때문이다(하지만 윤일병 사건은 한국 군대가 러시아 군대 못지 않다는 걸 단번에 입증했다). 2004년 7월 9일 일기에서 폴릿콥스카야는 한 러시아 사병의 끔찍한 죽음을 소개한다. 예브게니 포몹스키가 그 사병의 이름이다. 애칭은 제냐(예브게니의 애칭이다).

 

 

군 복무에 열의를 갖고 징집 날짜보다도 일찍 자원입대를 했지만, 예브게니의 군복무 기간은 한달 반이 채 되지 않았다. 5월 31일에 입대하여 국경수비대에 배치된 그는 7월 6일에 하계 훈련장에 배속됐고, 7월 9일 두 개의 허리띠로 목이 졸려 숨진 시신으로 발견됐다. 집에는 예브게니가 자살했다는 부대장의 통지서가 전달됐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예브게니는 키가 196센티미터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문제는 발도 컸다는 것. 그에겐 47호의 군화가 맞았지만 그가 지급받은 건 44호짜리였고, 그렇게 발에 맞지 않는 군화를 신고서 40도의 열기 속에서 5킬로미터의 행군을 소화해야 했다. 예브게니는 발에 맞는 더 큰 군화를 요구했지만 그의 고참들은 신병의 그런 요구를 '군기'가 빠진 걸로 보고 본때를 보여주기로 한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에브게니를 구타했고 결국 예브게니는 고문을 당하다가 숨졌다. 살인자들은 그가 자살한 것처럼 위장했고, 사건은 그렇게 종결됐다. 예브게니의 이모 예카테리나 미하일로브나는 영안실에서 본 제냐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이의 몸 전체는 두들겨 맞은 자국이 역력했고, 머리는 멍 자국이 수두룩했지요. 마치 뼈가 없는 것처럼 몸 전체가 물렁물렁했어요.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은 데가 없었죠. 뒤통수에는 묵직한 물체에 맞은 것처럼 움푹 팬 자국이 선명했고, 생식기는 짓뭉개진 채 부어올라 있었어요. 두 다리 역시 부어올라 있고 상처투성이인 데다가 마구 끌려다녔던 것마냥 흐늘거렸죠. 뒷머리는 피부가 완전히 벗겨져 있었는데, 그것 역시 아이가 끌려다니면서 생긴 것 같았어요. 발 위에는 화상 자국이 보였고, 어깨에는 누군가 위에서 세게 누른 듯한 멍 자국이 있었죠. 나는 아이가 고문을 당했고, 그 다음 살인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 아이를 매달았다고 생각해요.(207쪽)

폴릿콥스카야는 사건의 귀결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그나마 한국의 상황이 러시아보다 아주 조금 낫다고 할까. 

발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열여덟 살의 청년 포몹스키 이등병의 비극은, 그럼에도 군대 내의 그런 흉포한 야만성에 대한 사회의 공분을 크게 일으키지 못했다. 그 누구도 국방부 장관 세르게이 이바노프와 FSB 국장 니콜라이 파트루셰프가 러시아 군인들에게 향후 질서 있는 환경과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음식, 옷, 신발을 공급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또 그들이 나라의 부름을 받은 청년들의 목숨에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든 것이 전과 다름없이 흘러갔다. 다음 순번의 군인이 또 다시 무참히 살해되기 전까지.(207-8쪽)

러시아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자면, 다음 순번의 구타 희생자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국민으로서 우리는 윤일병 사건의 가해자와 책임자의 처벌과 함께 군문화의 획기적인 혁신을 촉구할 권리가 있다(군 수권자와 수뇌부에게 그럴 의지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군대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국민을 죽이는 군대는, 죽도록 방치하는 군대는 더이상 국민의 군대가 아니니까...

 

14. 08.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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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프랜시스 우드의 <실크로드>(연암서가, 2013)를 '이주의 발견' 가운데 하나로 소개하면서 저자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었다.

 

 

영국 국립도서관의 중국문헌 담당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저자는 국제 돈황 프로젝트의 운영위원이기도 한데, 명성을 얻은 것은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 갔는가?>(1995)를 출간하면서다. 저자의 주장은 마르코 폴로가 실제로 중국에 간 적이 없으며 <동방견문록>은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 여러 여행기를 모아놓은 책이라는 것. 학계에서 이 문제가 어떻게 정리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흥미를 끄는 주장인 것만은 분명하다. 저자 소개에 이 책으로 "우리에게 이름을 알렸다"고 돼 있어서 혹시나 싶어 찾아봤지만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내친 김에 소개되면 좋을 듯싶다.

학계에서의 결론이 궁금하다고 적었는데, 마침 끄덕끄덕님이 메일로 현재 몽골사 연구자들은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는 견해라고 알려주셨다. 작년말에 나온 <몽골족의 역사>(모노그래프, 2012)의 저자 데이비드 모건은 우드의 주장에 이렇게 논평하고 있다.

프랜시스 우드의 책(마르코 폴로는 중국을 갔을까?)은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그 책에서 마르코 폴로가 흑해보다 더 동쪽으로 진출하지 않았다고 매력적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동조한 학자는 거의 없었고, 라케빌츠는 프랜시스 우드의 책에 권위 있는 반론을 제기했다. 우드의 주장은 마르코 폴로가 언급하지 않고 누락한 내용을 의심하는 것에 근거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만리장성을 언급하지 않은 점을 주장의 근거로 삼는 식이다. 하지만, 마르코 폴로의 기록이 출간되었을 시기에 그가 만리장성을 거의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은 이미 명백했다. 그 당시에는 만리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왈드론의 논문에 의거하여 이러한 결론을 제시했다. 훗날 출간된 왈드론의 광범한 저서는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에 관해 쓰 존 라너의 훌륭한 최신작은 그 신빙성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요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의심을 사기도 했지만 마르코 폴로가 중국(원나라)에 실제로 갔고, <동방견문록>의 저자라는 것. 그게 학계의 정설이며 프랜시스 우드의 주장은 소수 의견이라고 알아두시면 되겠다. 끄덕끄덕님의 귀뀜에 감사드린다...

 

13.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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