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넘는 고비에선가 나대로 짠 독서계획에서 '역사'와 '동양 고전' 쪽은 40대가 되면 읽기로 한 분야다. 너무 방대한 분야이기도 해서 시간적으로나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가 없다고 판단해서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서 어느새 40대가 되고도 두 해가 더 지났다. 사실 재작년부터 은근슬쩍 준비는 해오고 있는데, 최근에는 중국사와 일본사 책들을 조금씩 긁어모으고 있다. 어디까지나 교양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대로의 안목과 주관 같은 걸 10년쯤 후에는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부분적으론 중국과 일본의 근현대사 책을 몇 권 읽는 것이 올해의 목표이긴 하지만, 그와 병행하여 전체적인 그림도 그려보는 게 유익하면서도 필수적이다. 염두에 둔 책은 '통합적 지구사'를 표방한 신시아 브라운의 <빅히스토리>(프레시안북, 2009), 그리고 남경태의 '종횡무진 세계사' <역사>(들녘, 2008), 최근에 나온 시릴 아이돈의 <인류의 역사>(리더스북, 2010) 등이다. 모두 중학생 정도면 읽을 수 있는 책이다(중학교 때부터 세계사를 배우니까).
시릴 아이돈은 <찰스 다윈>의 전기 작가로도 유명하다는데, 뜻밖에도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 책이다. <찰스 다윈>(에코리브르, 2004). 그리고 <인류의 역사>에 이어 <인류의 약사>(2009)란 책도 최근에 펴냈다. 분량도 비슷해서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인류의 역사>(원제는 <인류 이야기>. 곰브리의 <서양미술사>의 원제가 <미술 이야기>인 것과 비슷하다)에 대해서는 아래 소개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세계경제(10. 01. 16) 끝없는 전진? 숨겨진 퇴보!… '역사 발전론'에 경종
인류는 어떻게 진화해왔고 미래는 과연 낙관적인가. 인류가 거센 변화의 물결에 휩싸이면서 과거 인류는 어떻게 걸어왔는지 관심이 더 커지고 있다. 이 책은 15만 인류역사에서 전개됐던 도전과 좌절, 공존과 충돌, 발전과 퇴보의 사건들을 짚어본다.
인류의 기원, 신석기 혁명, 종교의 탄생, 제국들의 흥망성쇠, 수레바퀴부터 인터넷까지 인간의 발명, 정치사상, 기술혁명 등 문명사의 패러다임을 바꿨던 주요 장면을 45개로 나눠 인류의 발전사를 추적했다. 전체적인 내용은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아시아 역사도 상당 부분 할애됐다. 특히 인간 생존의 물질적 토대가 된 두 가지 변화인 정주농업과 산업혁명을 깊이 다뤘다. 신석기 시대 세계 곳곳에서 등장한 정주농업은 문명의 근원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인간은 특정 지역에 정착해 촌락을 이룰 때까지 농사를 짓지 못했기 때문에 촌락은 진정한 의미에서 문명의 근원이라고 저자는 본다. 저자는 18세기를 전후해 유럽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을 신석기 혁명에 버금갈만한 획기적인 사건으로 본다.
산업혁명 자체가 순차적 과정의 결과가 아니라 행운의 변수를 가진 힘들이 뒤섞여 상호작용을 일으킨 결과였다고 파악한다. 단편적인 역사 지식을 하나의 큰 줄기로 엮어냄으로써 독자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는게 저자 시릴 아이돈의 말이다.
저자는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행복과 불행, 진보와 퇴보의 반복된 과정으로 파악하면서 중단없는 전진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고 믿는 역사 발전론에 경종을 울린다. "역사학도라면 누구나 지난 15만년간 인류가 겪은 퇴보의 횟수에 놀라고,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거대한 힘을 지닌 자연 앞에서 미래를 운운하기 앞서 머리를 낮추는 자세부터 가져야 할 것이다"
인류 역사는 수많은 성공의 역사며 무한질주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발상지인 아프리카에서 전세계로 퍼져나간 인류는 달나라에도 한 발을 내딛고, 복제 동물을 만들어내며,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바로 눈앞에서 현실로 이뤄지고 있고 그 속도는 체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지고 있다.
하지만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류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불어닥칠 가능성은 높아진다. 정치갈등, 종교갈등, 환경오염, 각종 범죄, 유행병 등 난제가 숨어있다. 저자는 다가올 미래를 낙관할 수만없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인류는 그간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적지않은 실패를 경험했고, 같은 실책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군비제한이나 지구 온난화처럼 인간의 힘으로 해결가능 한 문제들을 슬기롭게 풀어가는 것이 당면과제라고 강조한다. 화산폭발, 지진, 치명적 전염병과 같은 것들이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은 불가항력적인 요인이었다면 산업혁명에 따른 부작용,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 두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초래된 비극,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빈부격차등은 그 인위적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언자는 과거'라는 바이런의 말을 확인하는 작업이다.(정승양기자)
10. 01. 31.
P.S. 책은 참고문헌 해제도 포함하고 있어서 유용한데, 개설서로서 저자가 격찬하고 있는 책 두 권이 인상적이다. 하나는 얼마전에 번역돼 나온 <지도로 보는 타임스 세계 역사>(생각의나무, 2009). 리처드 오버리 편집인데, 2004년에 나온 6판을 평하면서 아이돈은 이렇게 적었다.
"지도와 역사 백과사전의 결합물이라 할 수 있는 탁월한 책이다. 새 책은 새 책대로 비싸기는 해도 그만한 값어치가 있고, 헌책도 값이 싸므로 횡재를 만나는 셈이다."
국역본의 경우 두 권의 한정특가가 18만원이니 '비싸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다. '잠자코 '헌책'을 만나는 '횡재'를 기다려야 할까. 보통 이런 유형의 책은 도서관에서도 자료실용이어서 대출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두번째 책은 J. M. 로버츠의 <펭귄판 신 세계사>(2004). 2004년에 4판이 나왔고, 2007년에 5판(증보판)이 나왔다. 분량은 1200쪽이 좀 넘는다. "현존하는 세계사 대요 중 가장 우수한 책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라는 게 아이돈의 평이다. <타임스 세계역사>도 나올 정도니까 이 책도 한국어판을 기대해봄직하다...
P.S.2. <찰스 다윈>의 저자이기도 하니까 시릴 아이돈이 <인류의 역사>를 쓰면서 염두에 두었을 책은 <인간의 유래>일 것이다(책에서 두 차례 언급된다). 국역본 <인간의 유래>(한길사, 2006)가 나와 있지만, 새 번역본이 나온다는 소식도 있어서 나는 구입을 미뤄놓고 있다.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바다출판사, 2009)는 제목부터 <인간의 유래>를 뒤집어놓은 것이라 나란히 읽어볼 만하다(적어도 나란히 꽂아두어야 한다). 80년대에 범양사에서 출간된 바 있는 책인데, 재미 작가 김은국 씨가 번역에 참여한 점이 이채롭다.
P.S.3. '인류의 역사'라고 약간 비틀어서 그렇지 '세계사'라고 하면 읽을 책들은 한정없이 늘어난다. <식민주의 흑서>(소나무, 2008)가 나왔을 때 관심을 갖게 된 마르크 페로의 <새로운 세계사>(범우사, 1994), 청소년들에게도 권장할 만한 사이토 다카시의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뜨인돌, 2009), 그리고 최근에 나온 캔디스 고처 등의 <세계사 특강>(삼천리, 2010) 등도 모두 리스트에 포함시킬 만하다. 일단은 갖고 있는 책들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