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3박 4일간 황룡사에서 명상 수련을 했다.
원래 7박 8일의 일정이었는데,
명상 초행자인 나는 더운 날씨와 하루 종일 계속되는 좌선과 경행,불편한 잠자리와 샤워시설을 견뎌내지 못하고 중간에 나왔다.
3박 4일간 수련을 하면서
내게 언니처럼 다정하게 대해주고,
내가 지치고 힘들어할 때 도와주고,
자신의 명상 초행때의 경험을 얘기해주고,
나에게 끊임 없이 에너지를 불어 넣어 주었던 고마운 사람,
계향 언니를 어제 만났다.
황룡사에서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동안 너무 정신없이 살았다.
내가 여름 휴가 때, 명상수련을 했었다는 것도 잊을 만큼.
어제 계향 언니는 내가 황룡사에 두고 왔던
책과 노트, 볼펜을 갖다 주었다.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스님의 <가장 손쉬운 깨달음의 길:위빠사나명상>, 내가 구나라타나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필기했던 노트, 그리고 내 이름이 각인된 파카 볼펜.
그 더웠던 여름에 주인을 잃고 겨울까지 기다려온 물건들이 내게 돌아왔다.
노트에는 참 많은 글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했던 필기,
휴식 시간에 틈틈히 적었던 어설픈 감상과 감정의 찌꺼기들...
부끄러웠다.
그 때 적었던 글들을 보면서
지난 여름 황룡사의 기억과 재회했다.
읽으면서 어찌나 웃기던지....
그 중의 하나.
2004.8.3.09:45
정말 시간이 너무 안간다.
하루가 이렇게 긴지 처음 알았다.
달랑 법당 하나인 이 작은 절에 갇혀 있는 것 같다.
.... (중략)
이 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원하면 나갈 수도 있다.
모범 택시를 불러도 될테고,
고삼 렌트카를 불러도 된다.
일요일 새벽 혼자 떠난 룸메이트처럼 한 30분 걸어서 가도 된다.
하지만, 모두 다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탈출한다 해도
집에 가서 늘어지게 자는 것 밖에 대안이 없다.
그러면 내 성격에 두고두고 후회할꺼다.
여기엔 없는게 너무 많다.
그 흔한 커피 자판기도 없다.
우리 주변엔 너무도 먹을게 널려 있었던 것 같다.
영화를 볼 때 배도 안 고픈데 팝콘을 먹는 것 처럼...
여기를 탈출해서
시원한 호텔방에서 한 숨 자고,
맥주 마시고, 사우나 하고, 영화 보고,
늦게까지 놀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항상 할 수 있는 일들이니까 일단 보류하기로 한다.
난 도대체 전생에 뭐였을까?
스님이 주어에 '나'를 쓰지 말라고 하셨는데...
여기 있으면 웃을 일도 없고,화낼 일도 없다.
말을 안하니 오해 살 일도 없다.
이렇게 하루에 몇시간씩 벽을 보고 앉아 있으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걸까?
경행을 하는 사람들의 신중한 표정을 보면
가끔씩 웃음이 나온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일까?
왜 에어컨과 냉장고와 커피를 다 버리고 이 곳에 왔을까?
어제 이 글을 읽으면서 어찌나 웃었던지....
누가 가라고 등을 떠민것도 아니고,
스스로 명상을 한다며 여름휴가에 연차까지 하루 더 내고
감정의 찌꺼기들과 집착을 다 버리고 오겠다며 떠난 곳이었는데...
어제 오랜만에 계향 언니를 만나고,
황룡사에서 함께 수련을 했던 사람들을 몇명 더 만났다.
그 때, 사람들이 그렇게 말렸는데
처음에는 원래 다 힘들다고 하루만 더 있어보라고 다독거렸는데,
휴가가 끝나서 먼저 떠나는 분이 있어 그 차를 낼름 타고 나와 버렸다. 그 차가 출발하기 전에 따라가려고 서두르는 바람에 책이랑 노트까지 흘려 놓고...
그 분은 연차를 다 붙여서 17일 동안 수련을 했다고 했다.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면서,
지금이라도 다시 데려다 줄까 물어 보셨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압구정까지 같이 차를 타고 오면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주 침착하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품격과 절제가 느껴지는 분이었다. 서초법원의 판사였다.
그 분을 보면서 다른 판검사들도 저렇게 스스로를 단련시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황룡사에서의 3박 4일은 지나갔고,
그 후 바쁜 일상 속에 허걱거리면서 잊고 있었다.
제대로 명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어제 계향 언니의 평화롭고 밝은 표정을 보면서,
함께 수련을 했던 분들의 따뜻한 말투와 온화함을 느끼면서
많이 부끄러웠다.
정신 없이 지내온 날들....
사소한 일에 화내고 짜증내었던 많은 시간들....
지난 여름, 구나라타나 스님이 법문 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평생 세 마디로 된 노래를 부른다.
I.I.I.I.I.I.I.I.I.I.I.I,I.I.I.I.I.I.I.I.I.I.I.I.....
me.me.me,me.me.me.me.me.....
mine,mine,mine,mine,mine,mine....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조금만 나를 버리면
화를 낼 일도,
짜증을 낼 일도,
분노할 일도,
누군가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낄 일도 별로 없을텐데...
어제 계향 언니를 만나 에너지를 듬뿍 충전했다.
황룡사에서의 기억과,
구나라나타 스님의 소중한 법문과,
삶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찬 계향 언니와,
수련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키는 수행자들께 감사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