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로 이사오기 전에,
우리 회사가 있던 빌딩에는 19층에 여자화장실이 없었다.
그래서 19층에 있던 여자들은 20층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한 층인데 엘레베이터를 기다리기도 뭐하고 해서,
비상구로 걸어서 올라갔다.
그 빌딩은 "금연빌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고딩들 처럼 삼삼오오 비상구에 모여서 담배를 피웠다.

화장실에 갈 때면,
비상구에 모여서 담배를 피고 있는 남자들과 마주쳐야 했다.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고 있던 남자들은
내가 지나가면 비켜 주면서 농담을 걸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김대리 : 성대리님은 담배 한번도 안 피워 봤어요? 요즘 여자들 많이 피쟎아요.
성대리 : (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강차장 : 야, 물론 피워 봤겠지.
우리 아늘놈이 말이야 (참고 : 6살이다),
내가 일요일에 TV를 보고 있는데 고무줄을 들고 오더니 내 머리를 쪼매는 거야.
유치원에서 여자애들이 머리 묶고 머리에 핀 꽂고 다니는걸 보니까 신기했던 거야.
다 신기하면 한번 씩 해보고 싶쟎아.
그러니까 성대리도 한번 피워 봤겠지. 얼마나 궁금하겠어. 남자들이 담배 피는걸 보면....


난 이 황당한 비교에 어이가 없어서 그냥 헤~ 웃으면서 20층으로 올라갔다.
강차장님은 확실한 이분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를 묶고 핀을 꽂는 것 : 여자
담배를 피우는 것 : 남자

이렇게 확실하게
남자와 여자가 고유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이 강차장님에게는 정해져 있다.
담배를 피우는 여자들을 험하게 욕하는 것 만큼,
귀걸이하고 머리 묶고 다니는 남자들을 욕한다.

이런 사고방식을 강차장님만이 가지고 있을까?
강차장님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 방식을 가진 아주아주 보수적인 존재일까?

아니다.
강차장님은 보수적 성향의 남자이기는 하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 꽉 막혀 있는 사람도 아니다.
강차장님의 생각은 우리 사회를 살고 있는 40대 남자들의 평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하는데 있어서 강차장님은 전혀 여자와 남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똑 같이 출장 보내고, 똑 같이 밀어 준다.
보통 관리자들은 후배들이 가야 할 출장도 자기가 가는 경우가 많은데,
강차장님은 자기가 가야할 출장도 웬만하면 후배들을 보내려고 한다.
후배들에게 조금의 기회라도 더 주려고 노력한다.
후배들이 상무님에게 깨지고 있으면
" 그건 말입니다...." 하고 보호해 주는 그런 의리파 남자다.

의리파 남자.
그러니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의 미덕으로 꼽히는 모든 것들을 지니고 있는 멋진 남자.
하지만 아주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여자가 담배를 피면(그것도 사람들 앞에서)
지구가 네모가 되는지 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작년 9월인가?
강차장님과 일본 출장을 같이 갔다.
업체에 미팅을 하러 갔는데
그 건물 앞에서 한 여자애가 담배를 피고 있었다.
20살 갓 넘은 것 같은 어린 여자애였다.

강차장님은 그 여자애를 보고 확 드러나게 인상을 썼다.
많이 불쾌했나 보다.
회의실로 안내되어서 미팅시간을 기다리다가 차장님한테 궁금해서 물어봤다.

성대리 : 차장님, 만약에 우리팀 여직원들이 회식할 때 담배 피면 어쩌실꺼예요?
강차장 :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흥분한 목소리로)
그걸 말이라고 해? 어디서 감히.... 변소도 아니고 어디 어른들 앞에서...
술집 애들이 피는 것도 보기 싫은데 말이야...
성대리 : (씩 웃으며) 뭘 그렇게 흥분하세요? 쫌 있다 미팅인데....
(말을 돌리며) 미팅 자료 한번 더 보실래요?


그렇다.
강차장님에게,
우리 사회를 살고 있는 많은 40대 남자들에게(30대도 이런 남자들 물론 있겠지만)
여자가 남자 앞에서 담배를 핀다는 것은,
용납이 안 되는 대단히 도전적인 행위인 것이다.
넘어서는 안될 영역을 침범하는 일인 것이다.

왜 이 이야기를 하냐구?
어제 지난 3주간 피를 말렸던,
지난 3주간 주말마다 사무실에 나와서 머리를 쥐어 뜯게했던
프로젝트가 끝났다.

긴장이 풀린 난
어제 좀 널널한 하루를 보내면서
알라딘 서재의 글들을 읽었다.

우연히 들린 "꼬꼬댁의 책꽂이"란 서재.
페미니즘 관련 책들이 많아서 당연히 여자의 서재인지 알았는데,
서명숙의 <흡연 여성 잔혹사> 리뷰를 읽다가 꼬꼬댁님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꼬꼬댁님의 리뷰 中 일부를 살짝꿍 퍼왔다.

남자의 흡연은 금연열풍에 맞닥뜨려도 문제시되지는 않지만, 여자의 흡연은 어째서 여전히 관대해지지 않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 저자는 남성의 영역을 '감히' 넘보려는 여성들에 대한 괘씸죄라고 진단하며 나 역시 동감한다. 사실 이거 아니면 달리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게다가 "요새 담배피는 여자는 부지기수잖아?"라며 옛날 얘기라고 치부할 수만도 없다. 길에서 담배피는 여자들에 대한 심술궂은 시선은 여전하니까. 이건 좀 된 이야기다. 2000년 여름에 전라도 지방으로 친구들과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광주의 기차역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무료하게 뭔가를 기다렸었는데, 그 시간에 나(男)와 친구 둘(女)은 담배를 물었다. 심심하게 절반쯤 태웠을까, 어디선가 고함소리가 들린다. 놀랍게도 적당히 나이먹은 한 아저씨가 우리를 보며 한껏 자가격앙되어 내는 소리였다. 역겨울 정도로 험한 말들을 뱉었지만 그 말을 옮길 필요는 없겠고, 결국 요지는 "감히 여자가 밖에서 담배를 펴?!"였다.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과, 할 수 없는데 안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 차이를 바로 차별이라고 하는 거다. '할 수 없는 것'들이 불합리한 것이 아닌 이상에야, 그걸 없애는 게 바람직함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모성을 이유로, 정서라는 걸 근거로 여성의 흡연을 불온한 것으로 여기는 건 사실 궤변이다. 다 까놓고 보면 결국 남성우월의식만 남는다. 그래서 "흡연은 몸에 좋지 않은 거니깐, 여자들이 담배 피지 못하는 건 나쁠 거 없잖아?"하는 식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넌센스인 셈이다.


그렇다.
여자의 흡연에 남자들이 눈을 부라리는 것은,
남자의 영역을 "감히" 넘보려는 여자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많은 남자들에게 있어서 흡연은
서서 오줌을 누는 것처럼 남자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신성불가침한 영역인 것이다.

꼬꼬댁님 처럼 이렇게 열려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는 남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 몸에 나쁜 담배를 안 피면 좋은 거지. 더구나 여자는 애도 낳아야 하쟎아.
여자가 담배 피워서 좋을게 뭐가 있다고 남자들도 다 끊는 판에 말이 많은 거야?"
가 아니라,

" 왜 우리 사회에서는 이토록 여자들의 흡연에 반감을 가지는가?
왜 중학생 남자애들이 하교 길에 담배 피는 것 보다,
20대 여자가 길을 걸으며 담배 피는 것에 눈을 부라리는가? " 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어서(사회적으로 금기시 되어 있어서) 안 하는 것과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

꼬꼬댁님 처럼
유연한 사고 방식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서명숙의 <흡연 여성 잔혹사>,
이숙경의 <담배 피우는 아줌마>,
이유명호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자궁>,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
모두 남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제목만 보고 거부감을 가지지 말고,
한번 쯤 여유를 가지고 읽어 보기를....

영화 <스위치> 처럼 갑자기 여자로 변해볼 수는 없겠지만,
한번쯤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여자의 입장에서 일상적인 일들을 생각해 보기를....

연말선물로 강차장님한테 <흡연 여성 잔혹사>를 선물해 볼까?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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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4-12-17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너의 인생을 바꾼, 이 책도 끼워주세요. ^_^o-

marine 2004-12-17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신입생 때 같이 입학한 나이많은 언니가 선배들 앞에서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 뒤 언니는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에게 끌려가 단단히 주의를 받았습니다 그 특이한 태도 때문에 결국 대학 시절 내내 왕따로 지냈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죠

kleinsusun 2004-12-17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다닐 때,어떤 여자애가 경영관 정문 앞에서 담배를 피다가 지나가는 모르는 남자애한테 따귀를 맞은 적이 있어요. 이런 일이 우리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왠만한 학교에서 다 한번씩 발생했더군요. 거 참..... 이거 외국신문에 내면 해외토픽인데...ㅋㅋ

kleinsusun 2004-12-17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매너처럼 유연한 사고 방식을 가진 남자들이 많아야 할텐데...

오키, <아주 작은 차이> 추가합니당!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들을 보면,
주인공들은 "~ 짱"이라고 불린다.
물론 주인공들도 자기 친구들을 "~짱"이라고 부르고....

친한 친구들끼리는 "~상" 대신에 "~짱" 이라고 부른다.
그것도 이름 전체를 다 부르는 게 아니라 이름의 일부만 떼어서....
예를 들어 나를 부른다면, "수짱!" 이렇게.

일본 거래선 중 Kennichi Nakaura가 있다.
사람들이 "나까무라" 라고 자꾸 헛갈려 하는데,
흔하지 않은 성이다. "나까우라".
우리 팀 사람들은 "Mr.Nakaura" 또는 "나까우라 상"이라고 그를 부른다.

나는 그를 "켄짱"이라고 부른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이 그렇게 불렀단다.
나 보고도 그렇게 부르란다.

켄짱은 나를 Susan이라고 부른다.
Susan은 내 nick name이다.
해외 거래선들은 모두 나를 Miss Sung 대신에 Susan이라고 부른다.
울 상무님도 나를 "성대리" 대신에 Susan이라 부르신다.

켄짱은 나 보다 세살 많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노총각, 노처녀다.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다. 왜냐?
내가 Tokyo에 갔을 때,
켄짱이 서울에 왔을 때,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 주기 때문이다.

무슨 구원?

출장을 가거나 또 오면,
보통 거래선과 저녁 식사를 한다.
해외영업팀에서 거래선과의 저녁식사는 업무의 연장이다.
보통 밥 먹으면서도 일 얘기를 많이 한다.
인도,파키스탄 같은 데서 채식주의자들이 오거나
발음을 아주 알아듣기 힘든 프랑스나 인도 거래선이 오거나 하면
사실 좀....피곤하다.

켄짱과 나는 밥 먹으면서 절대 일 얘기를 하지 않는다.
서로의 취향을 잘 알기 때문에
나도 켄짱이 오면 외국 사람 왔다고
갈비집이나 한정식집에 데려가서 배 터지게 먹이는 우를 범하지 않고,
켄짱도 내가 Tokyo에 가면
일본 전통 스시집에 가서 배 터지게 먹이고
예의상 엄지 손가락을 올리며 "오이시!"하는 접대성 멘트를 듣고 좋아하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켄짱이 담당자가 아니라면 나는 지루한 일본 아저씨와 한국 경제 전망이나 축구 얘기를 해야 하고,
내가 담당자가 아니라면 켄짱은 우리팀 사람 중 한 명이랑 참이슬을 완샷하며 "맛있어요!" 해야 한다.

다행히도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하며,
즐겁게 저녁을 먹는다.
서로 가고 싶은 장소를 물어 보고
요즘 뜨는 곳에 가보기도 하고,
"물 좋은 곳" 에 구경을 가기도 한다.
Tokyo 가서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와인을 마시기도 하고,
서울에서 일본사람이 주인인 이자까야에 가서 사께를 마시기도 한다.

켄짱 덕분에, 또 켄짱은 내 덕분에
여행책자에 나오지 않은 많은 곳들에 가 볼 수 있다.

이틀 전에 켄짱이 왔었다.
대만에 들렸다 오는 길이라 중국음식을 배 터지게 먹고 온 것 같기에,
사람 좋은 일본 아저씨가 주인인(물론 주방장도 일본 사람이다) 이자까야에 데려갔다.
켄짱이 좋아했다.
또 서울에 주인도 일본 사람이고, 손님도 대부분 일본 사람인 이자까야가 있다는 걸 신기해했다.

우리는 커다란 사께 한 병을 시켜 놓고 많은 얘기들을 했다.
물론 일 얘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켄짱이 뭔가를 한참 망설이다가 말했다.
봄에 싱가폴로 발령날 것 같다고...
켄짱이 50%의 가능성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갈게 확실하다.
( 켄짱의 숫자는 아주 보수적이다. )

난 잔을 부딪히며 축하해 주었다.
우와.....부럽다.부럽다.정말 부럽다.....
나도 태국이나 홍콩, 말레이지아, 싱가폴 이런 곳으로 보내 줬으면 좋겠다.
태국 가서 바나나만 먹고 1년 살라 그래도 행복할 것 같다.

켄짱은 머쓱해 하며 말했다.
이 사실은 엄마랑 Susan한테만 말했다고...
귀여운 넘.
만나는 여자들 모두에게 그렇게 말하겠지. 우하하.

이제 Tokyo에 가면 켄짱을 볼 수 없는 게 아쉽지만,
참 잘된 일이다. 대리만족을 느낀다고나 할까....
켄짱이 동남아에서 "happy"한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동남아.
나도 언젠가는 꼭 방콕에 가서 살아야지.

신입사원 때부터 계속 해외영업을 하면서
켄짱처럼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싱가폴의 Reece, Mailing,
뉴질랜드의 Rob,
태국의 Suda, Joy, Suthee,
말레이지아의 SaiTong, Roven,
영국의 Rodney 아저씨, Ian,
독일의 Niels, Swen,
이태리의 Paola, Maureen.....
중국의 Shen Li, Wang Ren Ji,
홍콩의 Walter......
우와..... 정말 많다.

물론 스트레스로 터져 나갈 것 같은 날들도 많지만,
켄짱 같은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내 일의 큰 매력이다.

켄짱의 행복한 미래를 축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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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4-12-16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san님 참 멋지게 사십니다. 부럽습니다. 진짜루~~~

글샘 2004-12-16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S.S.님. 이니셜이 참 독특하군요. ㅎㅎㅎ 처음 뵙습니다.

글이 신선한데요. 잘 사시는 것 같고... 인생이 아름답군요.

아름다운 인생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음, '나'라는 주어를 안 쓰고 적다보니, 말이 역시... 안 되는군요. ^^

kleinsusun 2004-12-17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처음 인사드리네요.

글샘님 서재에 지금 막 들어가 봤는데....

우와....감탄이 절로.....국어 교사이신가요?

근무시간이라 오래 머물 수 없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리뷰만 보고 나왔어요. '본질을 놓쳐버린 치히로는 목욕탕 때밀이일 뿐이다' 이 부분 정말 이 아침을 강타하며, 마음을 정면으로 받아 버리네요. 정말 글을 잘 쓰시는군요. 앞으로 자주 들릴께요.
 
내 생애 단 한번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알라딘 야클님의 "책 없는 서재"에서
"가슴 뭉클한 책"이란 제목의 리뷰를 읽었다.
장영희의 <내 생애 단 한번>을 읽고 쓴 리뷰였다.

난 야클님의 서재를 좋아한다.

야클님은 알라딘의 인기 서재 주인장들처럼 글을 유려하게 잘 쓰지는 못한다.
책을 많이 읽지도 못한다.
하지만 야클님의 글은 참 솔직담백하고 공감이 느껴진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회사원의 그 꽉 짜인 바쁜 일상 속에서
책을 읽고 글을 끄적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건조해지지 않으려고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하는
자신의 일상에 대해 투덜투덜 말하지만 그 속에서 기쁨이 느껴지는 그런 글들을 쓰는,
야클님이란 사람은 자신의 일상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다.

야클님의 리뷰를 읽고 <내 생애 단 한번>을 주문했다.
학교 다닐 때, 장영희 선생님을 자주 봤다.
장영희 선생님은 주로 영문과 전공과목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수업을 들어 본 적은 없지만,
선생님이 계단 많은 건물을 목발을 짚고 올라 가시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표정은 항상 밝았던 것 같다.

야클님의 리뷰를 읽고 책을 주문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장영희 선생님의 '문학의 숲' 칼럼을 자주 읽었었다.
잔잔한 일상에서 잡아낸 생각거리에 문학 작품들을 하나씩 불러와
조용히 얘기를 하듯이 쓴 그런 아기자기한 칼럼들이었다.
<내 생에 단 한번>도 이런 칼럼들을 묶은 수준의 책이 아닐까?
그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내 생에 단 한번>을 읽으면서,
끊임 없이 '부끄러움'을 느꼈고
삶을 향한 지치지 않는 '열정'을 느꼈고,
책장을 넘기면서 쏟아지는 '사랑'을 느꼈고,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일상의 수 많은 소소한 사건들을
애정을 담아서 풀어내는 그 '따뜻한 시선'에 깊은 감사를 느꼈다.

무엇보다도 '솔직한 글은 힘이 세다'는걸 느꼈다.
감동을 주는 글들은 솔직하다.

"나 잘났어!" 떠드는 "성공시대"류의 책들은
반짝 읽는 이들에게 긴장을 주긴 하지만 곧 잊혀진다.
장영희 선생님의 글들은 정말로 솔.직.하.다.
에세이 한편 한편이 따끈따끈한 일상과 지나친 기억에서 잡아낸
솔직한 자기고백들로 가득하다.

난 장영희 선생님이 목발을 짚고 계단을 올라가시는걸 많이 봤지만
장애가 그토록 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꿈에서도 목발을 짚고 걷는,
수많은 장애와 벽들에 끊임 없이 부딪히게 하는,
그런 "거대함" 이라는 걸 느끼지 못했다.

장영희 선생님은 항상 웃는 얼굴이었고,
장애를 훌쩍 넘어선 '잘난 여자'로만 보였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
화장실에 데려다 주려고 엄마가 쉬는 시간 마다 오셨다는,
초조함 때문인지 엄마가 집에 가고 나면 가기 싫었던 화장실이 그렇게 가고 싶었다는 고백.

동생이 명동에 옷 구경을 가자고 해서 같이 갔다가
옷가게의 턱이 높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주인이
"나중에 와요! 지금 손님 있는 거 안보여요?"
"나중에 오라니까요. 지금 잔돈 없다니까...."
했다는, 그러니까 거지 취급을 받았다는 고백.
그래서 자신에게 배우는 학생들의 자존심을 위해서 화장을 하고 정장을 입는다는 고백.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이 번번히 거절되었다는,
Y대 영문과 박사과정 면접을 보러 갔는데
(이 떄 서강대에는 박사과정이 없었단다)
면접관들이 목발을 흩어 보면서
"저희는 학부에도 장애인 입학은 허용되지 않습니다.하물며 박사과정에서야..."
라는 "명백한 거절"의 말을 듣고,
집에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고자 영화 "킹콩"을 보러 갔는데
사회에서 필요로 하지 않는 "킹콩"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느꼈다는 고백.
(이 부분에서 나는 막 화가 났다. 이 때는 70년대니까 지금은 달라졌겠지만,
신학과와 사회사업학과가 있는 대학에서 장애인 입학을 거부했다는 웃기는 짬뽕 같은 얘기.
사회사업학과는 사지 멀쩡한 애들의 "사회복지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서 필요한 과인가? )

장영희 선생님의 너무도 솔직한 자기 고백은 책에 가득 넘쳐 난다.
장영희 선생님은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그 때 마다 일어서고 또 일어서서,
세상에 "따뜻함"을 전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을 쓰신다.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런데....
장영희 선생님이 얼마 전 또 다른 고난을 만나셨다.
암에 걸리셨다. 척추암.

9월 24일 '문학의 숲' 마지막 칼럼에서 장영희 선생님은 이렇게 쓰셨다.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 그렇다. 문학은 삶의 용기를, 사랑을, 인간다운 삶을 가르친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치열한 삶을, 그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나는 배우고 가르쳤다. 문학의 힘이 단지 허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도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선생님!
꼭 다시 일어나셔야 해요.

<내 생애 단 한번>에서 선생님이 <노인과 바다>의 노인의 말을 인용하셨었죠?

" It is silly not to hope. It is a sin!"

이 문장을 만나고 정말 부끄러웠고, 또 용기를 얻었어요.
선생님도 이 말, 항상 가슴 속에 넣어 두고 계시죠?

다시 씩씩하게 일어 나셔서,
행복한 글들을 쓰시길,
또 그토록 원하셨던 여행을 훌쩍 떠나시길 기도할께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야클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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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4-12-16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부끄부끄 민망민망 *^^*

요즘도 장영희 선생님 영시산책이 신문에 매일 연재되고 있는걸 보면 거뜬히 병마를 물리치고 계신가 봅니다. 새해엔 꼭 완쾌되시길 다 같이 응원보내드리죠.

로드무비 2004-12-16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는 장영희 교수님이 1년 동안 애써 쓴 논문을 날려먹고 쓰신 글을

어느 산문집에서 읽고 감동했는데 이 책을 꼭 사봐야겠군요.

빨리 완쾌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땡스투 누릅니다.

그리고 야클님 서재에 가봐야겠어요.^^

kleinsusun 2004-12-16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장영희 선생님이 이번에도 꼭 이겨내시길 다 함께 기도해요!

플레져 2004-12-16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영희 선생님의 글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참 좋아했어요.

요즘도 그분의 영미시 산책이 연재되고 있지만, 시를 볼 때 마다 마음이 아파요.

꼭 완쾌 되시기를...바랍니다!!!

수선님의 글도 참 좋은걸요...^^ 저두 땡스투 눌러요!

kleinsusun 2004-12-16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당.

흘려 버리는, 지나쳐 버리는 일상의 이미지들을 "따뜻함"으로 불러내어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나누어 주셨던 장영희 선생님. 우리들의 응원이 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2004-12-16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랑녀 2005-01-20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학기부터는 다시 강단에 서신다고 하시더군요. 병이 나으신 건 아닌데, 젊은 학생들을 보면 힘이 난다구요.
제가 그 분을 직접 뵌 일은 없지만, 참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구요.
 
벼랑에서 살다
조은 지음, 김홍희 사진 / 마음산책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정은숙의 <편집자 분투기>를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었다.
<편집자 분투기>를 읽고,마음산책에서 나온 두 권의 책을 샀다.

<벼랑에서 살다>와 <예술가로 산다는 것>.

<벼랑에서 살다>를 만나기 전까지,
시인 조은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이 책은 조은이 쓴 최초의 산문집이라는데,
그러니까 나는 시인 조은의 "詩"를 한 편도 마주치지 못하고
그의 산문집을 먼저 읽은거다.

<벼랑에서 살다>를 출근길에, 또 퇴근길에 읽으면서 전율했다.
너무도 솔직하고 치열한 자기고백, "~척" 없이 맨살을 드러내 보이는 그 담담함, 멋부리지 않고 절제된 문장.
이렇게 솔직하고 절제된, 감정의 과잉에 빠지지 않은 군더더기 없는 글을 정말 오랜만에 만나보았다.

난 소설가들이나 시인들이 쓴 산문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2~3년간 신문,잡지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모아서,
그것만 한 권의 책으로 내기 미안하니까
새로운 에세이를 한두개 추가하고
삽화도 좀 곁들이고
근사한 표지로 단장을 해서 나온 산문집은
계란 하나 넣지 않고 성의 없이 끓인 라면처럼 밍밍할 때가 많다.

그런데 <벼랑에서 살다>는?

이 책을 위해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지내는 동안 한 달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글을 쓰는 동안에는 바위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물까지도 짜내는 심정이었는데,묶어 놓고 보니 바위에서 꿀을 따낸 것처럼 뭔가 큰 것을 덤으로 얻은 듯한 기분이다.이 글을 통해 나는 그동안 자신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서툴게나마 삻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 글머리 中-

글머리를 읽을 때는 산문집을 쓰면서 이 정도까지 했을까 싶었는데, 조은의 글들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그의 갑갑하기 까지한 성격은 충분히 산문집을 쓰기 위해 방이 아니라 동굴에라도 쳐박혀 있을 것 같다.

조은은 우리나라 나이로 마흔 하고도 다섯살이다.
또또라는 개 한마리를 데리고 혼자 살며, 시를 쓴다.

나는 언제나 내 뜻대로 하고 살았다.
내 뜻대로 한 일을 얼른 꼽아도 세 가지는 될 것 같다.
첫째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
둘째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
셋째 시를 쓴다는 것.
물론 내가 꼽은 것들은 너무도 당연하고 보잘것없다.
하지만 아직도 몸 어딘가에는 유림의 피가 흐르고 있을 아버지로 부터 독립한 것도, 결혼하지 않은 것도 내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아버지는 극도로 화가 나면 " 왜 절름발이한테라도 시집 가지 못하냐!"며 내게 분노를 터뜨리곤 했다.잦은 말은 아니었지만,그 말이 지닌 독성은 해독이 불가능할 만큼 강했다.
(p 100~101)

조은은 당연하고 보잘것없다고 말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부모님의 애원을 넘어서는 비난 앞에서
혼자 살며, 그것도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만으로 시인 조은이 얼마나 꿋꿋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억대 연봉의 여자 임원들이나 외국계 회사 파트너들도 결혼 스트레스를 받는다.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멀쩡한데 혼자 살고 있으면 난리가 난다. 늙으면 어쩔꺼냐, 평생 그렇게 혼자 살꺼냐, 애도 하나 안 낳고 죽을꺼냐 등등 주위의 걱정 내지 비난은 계속된다.

하물며 가난한 시인으로 혼자살기는?

내가 시를 쓰지 않았다면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지금보다 풍족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내가 번 돈은 대부분 여행을 하는 데 쓰였고,그 여행에서의 경험은 내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하지만 내가 시를 쓰지 않고,친구들과 고통을 나누며 술을 마시지 않고,혼자 사는 삶에 대한 대비책으로 저축만 늘렸다면......어쩌면 지금쯤 더 초조하고 불안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p101)

뚜렷한 가치관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감 없이는
조은처럼 조용하게, 하지만 열정적으로 살 수 없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시인 조은에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약지 못한 여자 조은에게,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에 "~척" 없이 자신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 줄 수 있는 용기있는 여자 조은에게,
멋부리지 않은 절제된 문장이 얼마나 힘이 센지 보여주는 문장가 조은에게 존경을 보낸다.

이 책을 읽고 조은의 두번째 산문집 <조용한 열정>을 주문했다.
<벼랑에서 살다>를 읽고 더 이상의 산문이 나올 수 있을까 의혹이 일기도 했지만,
우직한 시인 조은이 보여줄 "솔직한 글쓰기의 힘"을 나는 믿는다.

시인 조은을 향한 바람 한 가지.

새로운 산문집으로 인세를 많이 받아서 여행을 떠났으면 좋겠다.
여태까지 여행에서의 경험이 그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듯이,
새로운 여행을 통해 얻은 에너지와 영감으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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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2-12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안할 수 없죠.
조용한 열정 빨리 읽고 리뷰 올려주세요.
사볼지 말지 결정하게요.^^

kleinsusun 2004-12-12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당. 어제 주문해서 아직 도착안했어요. 조은의 또다른 산문집.기대됩니당.

솔직한 글쓰기의 위력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시인 조은.

야클 2004-12-12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전 처음 접하는 이름이네요. 좋은 책 소개받고 갑니다.

마냐 2004-12-12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랏....최민식 사진집에 불필요한 글을 갖다얹었다는 이유만으로 쓸데없는 편견을 조은시인에게 갖고 있었던 모양임다. 반성..

kleinsusun 2004-12-13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민식 사진집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있는데,

그 글들을 조은이 썼는지 몰랐거든요. (사실...사진만 봤어요.ㅋㅋ)

조은의 산문은 "절제"란 미덕을 볼 수 있는 흔하지 않은 글인 것 같아요.

한번 읽어 보셔도 좋을것 같네요. 날이 추워요. 감기 조심하세요!

달팽이 2004-12-15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이 난 오솔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군요...

음 알라딘에 또 한명의 매니아가 생긴 듯한 느낌이군요...

앞으로 좋은 만남 기대합니다.

알라딘의 인드라망은 늘 이렇게 새로운 만남들을 만들어가게 합니다.

파란여우 2004-12-19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옷자락을 붙잡고 따라 왔어요. 아름다운 글이 많은 서재입니다. 조은시인을 평가절하했던 일을 다시한번 재고해야 겠군요...

kleinsusun 2004-12-20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안녕하세요!

독서에 관한 18문답 잘 읽었어요.

<헌법의 풍경> 보관함에 쏘~옥.

담 주문할 때 같이 할려구요.

크리스마스 트리가 이쁘네요. 앞으로 자주 만나요!
 

지난 여름, 3박 4일간 황룡사에서 명상 수련을 했다.
원래 7박 8일의 일정이었는데,
명상 초행자인 나는 더운 날씨와 하루 종일 계속되는 좌선과 경행,불편한 잠자리와 샤워시설을 견뎌내지 못하고 중간에 나왔다.

3박 4일간 수련을 하면서
내게 언니처럼 다정하게 대해주고,
내가 지치고 힘들어할 때 도와주고,
자신의 명상 초행때의 경험을 얘기해주고,
나에게 끊임 없이 에너지를 불어 넣어 주었던 고마운 사람,
계향 언니를 어제 만났다.
황룡사에서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동안 너무 정신없이 살았다.
내가 여름 휴가 때, 명상수련을 했었다는 것도 잊을 만큼.

어제 계향 언니는 내가 황룡사에 두고 왔던
책과 노트, 볼펜을 갖다 주었다.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스님의 <가장 손쉬운 깨달음의 길:위빠사나명상>, 내가 구나라타나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필기했던 노트, 그리고 내 이름이 각인된 파카 볼펜.
그 더웠던 여름에 주인을 잃고 겨울까지 기다려온 물건들이 내게 돌아왔다.

노트에는 참 많은 글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했던 필기,
휴식 시간에 틈틈히 적었던 어설픈 감상과 감정의 찌꺼기들...
부끄러웠다.

그 때 적었던 글들을 보면서
지난 여름 황룡사의 기억과 재회했다.
읽으면서 어찌나 웃기던지....

그 중의 하나.

2004.8.3.09:45

정말 시간이 너무 안간다.
하루가 이렇게 긴지 처음 알았다.
달랑 법당 하나인 이 작은 절에 갇혀 있는 것 같다.
.... (중략)
이 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원하면 나갈 수도 있다.
모범 택시를 불러도 될테고,
고삼 렌트카를 불러도 된다.
일요일 새벽 혼자 떠난 룸메이트처럼 한 30분 걸어서 가도 된다.
하지만, 모두 다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탈출한다 해도
집에 가서 늘어지게 자는 것 밖에 대안이 없다.
그러면 내 성격에 두고두고 후회할꺼다.

여기엔 없는게 너무 많다.
그 흔한 커피 자판기도 없다.
우리 주변엔 너무도 먹을게 널려 있었던 것 같다.
영화를 볼 때 배도 안 고픈데 팝콘을 먹는 것 처럼...

여기를 탈출해서
시원한 호텔방에서 한 숨 자고,
맥주 마시고, 사우나 하고, 영화 보고,
늦게까지 놀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항상 할 수 있는 일들이니까 일단 보류하기로 한다.

난 도대체 전생에 뭐였을까?
스님이 주어에 '나'를 쓰지 말라고 하셨는데...
여기 있으면 웃을 일도 없고,화낼 일도 없다.
말을 안하니 오해 살 일도 없다.

이렇게 하루에 몇시간씩 벽을 보고 앉아 있으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걸까?
경행을 하는 사람들의 신중한 표정을 보면
가끔씩 웃음이 나온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일까?
왜 에어컨과 냉장고와 커피를 다 버리고 이 곳에 왔을까?


어제 이 글을 읽으면서 어찌나 웃었던지....
누가 가라고 등을 떠민것도 아니고,
스스로 명상을 한다며 여름휴가에 연차까지 하루 더 내고
감정의 찌꺼기들과 집착을 다 버리고 오겠다며 떠난 곳이었는데...

어제 오랜만에 계향 언니를 만나고,
황룡사에서 함께 수련을 했던 사람들을 몇명 더 만났다.

그 때, 사람들이 그렇게 말렸는데
처음에는 원래 다 힘들다고 하루만 더 있어보라고 다독거렸는데,
휴가가 끝나서 먼저 떠나는 분이 있어 그 차를 낼름 타고 나와 버렸다. 그 차가 출발하기 전에 따라가려고 서두르는 바람에 책이랑 노트까지 흘려 놓고...

그 분은 연차를 다 붙여서 17일 동안 수련을 했다고 했다.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면서,
지금이라도 다시 데려다 줄까 물어 보셨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압구정까지 같이 차를 타고 오면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주 침착하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품격과 절제가 느껴지는 분이었다. 서초법원의 판사였다.
그 분을 보면서 다른 판검사들도 저렇게 스스로를 단련시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황룡사에서의 3박 4일은 지나갔고,
그 후 바쁜 일상 속에 허걱거리면서 잊고 있었다.
제대로 명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어제 계향 언니의 평화롭고 밝은 표정을 보면서,
함께 수련을 했던 분들의 따뜻한 말투와 온화함을 느끼면서
많이 부끄러웠다.

정신 없이 지내온 날들....
사소한 일에 화내고 짜증내었던 많은 시간들....

지난 여름, 구나라타나 스님이 법문 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평생 세 마디로 된 노래를 부른다.
I.I.I.I.I.I.I.I.I.I.I.I,I.I.I.I.I.I.I.I.I.I.I.I.....
me.me.me,me.me.me.me.me.....
mine,mine,mine,mine,mine,mine....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조금만 나를 버리면
화를 낼 일도,
짜증을 낼 일도,
분노할 일도,
누군가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낄 일도 별로 없을텐데...

어제 계향 언니를 만나 에너지를 듬뿍 충전했다.

황룡사에서의 기억과,
구나라나타 스님의 소중한 법문과,
삶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찬 계향 언니와,
수련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키는 수행자들께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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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12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2-12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어컨과 냉장고와 커피를 다 버리고... 도대체 무엇하는 사람들일까?

저도 그 대목에서 빙긋 웃습니다.

사람들이 평생 부른다는 세 마디 노래, 가슴에 와닿네요.

잘 읽고 가요.^^

kleinsusun 2004-12-12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때 아침은 6시, 점심은 11시에 먹고 정오 이후로는 아무 것도 안 먹었거든요.

배는 하나도 안 고픈데, 커피가 그렇게 마시고 싶더라구요. 커피만 아니었어도...ㅋㅋ

야클 2004-12-12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한시간 정도라도 차분히 명상해본 기억이 없네요. 항상 뭘하거나 보거나 듣거나했지. 좋은 경험하셨네요.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