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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에서 살다
조은 지음, 김홍희 사진 / 마음산책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정은숙의 <편집자 분투기>를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었다.
<편집자 분투기>를 읽고,마음산책에서 나온 두 권의 책을 샀다.
<벼랑에서 살다>와 <예술가로 산다는 것>.
<벼랑에서 살다>를 만나기 전까지,
시인 조은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이 책은 조은이 쓴 최초의 산문집이라는데,
그러니까 나는 시인 조은의 "詩"를 한 편도 마주치지 못하고
그의 산문집을 먼저 읽은거다.
<벼랑에서 살다>를 출근길에, 또 퇴근길에 읽으면서 전율했다.
너무도 솔직하고 치열한 자기고백, "~척" 없이 맨살을 드러내 보이는 그 담담함, 멋부리지 않고 절제된 문장.
이렇게 솔직하고 절제된, 감정의 과잉에 빠지지 않은 군더더기 없는 글을 정말 오랜만에 만나보았다.
난 소설가들이나 시인들이 쓴 산문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2~3년간 신문,잡지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모아서,
그것만 한 권의 책으로 내기 미안하니까
새로운 에세이를 한두개 추가하고
삽화도 좀 곁들이고
근사한 표지로 단장을 해서 나온 산문집은
계란 하나 넣지 않고 성의 없이 끓인 라면처럼 밍밍할 때가 많다.
그런데 <벼랑에서 살다>는?
이 책을 위해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지내는 동안 한 달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글을 쓰는 동안에는 바위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물까지도 짜내는 심정이었는데,묶어 놓고 보니 바위에서 꿀을 따낸 것처럼 뭔가 큰 것을 덤으로 얻은 듯한 기분이다.이 글을 통해 나는 그동안 자신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서툴게나마 삻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 글머리 中-
글머리를 읽을 때는 산문집을 쓰면서 이 정도까지 했을까 싶었는데, 조은의 글들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그의 갑갑하기 까지한 성격은 충분히 산문집을 쓰기 위해 방이 아니라 동굴에라도 쳐박혀 있을 것 같다.
조은은 우리나라 나이로 마흔 하고도 다섯살이다.
또또라는 개 한마리를 데리고 혼자 살며, 시를 쓴다.
나는 언제나 내 뜻대로 하고 살았다.
내 뜻대로 한 일을 얼른 꼽아도 세 가지는 될 것 같다.
첫째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
둘째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
셋째 시를 쓴다는 것.
물론 내가 꼽은 것들은 너무도 당연하고 보잘것없다.
하지만 아직도 몸 어딘가에는 유림의 피가 흐르고 있을 아버지로 부터 독립한 것도, 결혼하지 않은 것도 내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아버지는 극도로 화가 나면 " 왜 절름발이한테라도 시집 가지 못하냐!"며 내게 분노를 터뜨리곤 했다.잦은 말은 아니었지만,그 말이 지닌 독성은 해독이 불가능할 만큼 강했다.(p 100~101)
조은은 당연하고 보잘것없다고 말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부모님의 애원을 넘어서는 비난 앞에서
혼자 살며, 그것도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만으로 시인 조은이 얼마나 꿋꿋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억대 연봉의 여자 임원들이나 외국계 회사 파트너들도 결혼 스트레스를 받는다.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멀쩡한데 혼자 살고 있으면 난리가 난다. 늙으면 어쩔꺼냐, 평생 그렇게 혼자 살꺼냐, 애도 하나 안 낳고 죽을꺼냐 등등 주위의 걱정 내지 비난은 계속된다.
하물며 가난한 시인으로 혼자살기는?
내가 시를 쓰지 않았다면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지금보다 풍족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내가 번 돈은 대부분 여행을 하는 데 쓰였고,그 여행에서의 경험은 내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하지만 내가 시를 쓰지 않고,친구들과 고통을 나누며 술을 마시지 않고,혼자 사는 삶에 대한 대비책으로 저축만 늘렸다면......어쩌면 지금쯤 더 초조하고 불안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p101)
뚜렷한 가치관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감 없이는
조은처럼 조용하게, 하지만 열정적으로 살 수 없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시인 조은에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약지 못한 여자 조은에게,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에 "~척" 없이 자신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 줄 수 있는 용기있는 여자 조은에게,
멋부리지 않은 절제된 문장이 얼마나 힘이 센지 보여주는 문장가 조은에게 존경을 보낸다.
이 책을 읽고 조은의 두번째 산문집 <조용한 열정>을 주문했다.
<벼랑에서 살다>를 읽고 더 이상의 산문이 나올 수 있을까 의혹이 일기도 했지만,
우직한 시인 조은이 보여줄 "솔직한 글쓰기의 힘"을 나는 믿는다.
시인 조은을 향한 바람 한 가지.
새로운 산문집으로 인세를 많이 받아서 여행을 떠났으면 좋겠다.
여태까지 여행에서의 경험이 그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듯이,
새로운 여행을 통해 얻은 에너지와 영감으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