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로 이사오기 전에,
우리 회사가 있던 빌딩에는 19층에 여자화장실이 없었다.
그래서 19층에 있던 여자들은 20층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한 층인데 엘레베이터를 기다리기도 뭐하고 해서,
비상구로 걸어서 올라갔다.
그 빌딩은 "금연빌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고딩들 처럼 삼삼오오 비상구에 모여서 담배를 피웠다.

화장실에 갈 때면,
비상구에 모여서 담배를 피고 있는 남자들과 마주쳐야 했다.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고 있던 남자들은
내가 지나가면 비켜 주면서 농담을 걸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김대리 : 성대리님은 담배 한번도 안 피워 봤어요? 요즘 여자들 많이 피쟎아요.
성대리 : (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강차장 : 야, 물론 피워 봤겠지.
우리 아늘놈이 말이야 (참고 : 6살이다),
내가 일요일에 TV를 보고 있는데 고무줄을 들고 오더니 내 머리를 쪼매는 거야.
유치원에서 여자애들이 머리 묶고 머리에 핀 꽂고 다니는걸 보니까 신기했던 거야.
다 신기하면 한번 씩 해보고 싶쟎아.
그러니까 성대리도 한번 피워 봤겠지. 얼마나 궁금하겠어. 남자들이 담배 피는걸 보면....


난 이 황당한 비교에 어이가 없어서 그냥 헤~ 웃으면서 20층으로 올라갔다.
강차장님은 확실한 이분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를 묶고 핀을 꽂는 것 : 여자
담배를 피우는 것 : 남자

이렇게 확실하게
남자와 여자가 고유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이 강차장님에게는 정해져 있다.
담배를 피우는 여자들을 험하게 욕하는 것 만큼,
귀걸이하고 머리 묶고 다니는 남자들을 욕한다.

이런 사고방식을 강차장님만이 가지고 있을까?
강차장님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 방식을 가진 아주아주 보수적인 존재일까?

아니다.
강차장님은 보수적 성향의 남자이기는 하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 꽉 막혀 있는 사람도 아니다.
강차장님의 생각은 우리 사회를 살고 있는 40대 남자들의 평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하는데 있어서 강차장님은 전혀 여자와 남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똑 같이 출장 보내고, 똑 같이 밀어 준다.
보통 관리자들은 후배들이 가야 할 출장도 자기가 가는 경우가 많은데,
강차장님은 자기가 가야할 출장도 웬만하면 후배들을 보내려고 한다.
후배들에게 조금의 기회라도 더 주려고 노력한다.
후배들이 상무님에게 깨지고 있으면
" 그건 말입니다...." 하고 보호해 주는 그런 의리파 남자다.

의리파 남자.
그러니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의 미덕으로 꼽히는 모든 것들을 지니고 있는 멋진 남자.
하지만 아주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여자가 담배를 피면(그것도 사람들 앞에서)
지구가 네모가 되는지 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작년 9월인가?
강차장님과 일본 출장을 같이 갔다.
업체에 미팅을 하러 갔는데
그 건물 앞에서 한 여자애가 담배를 피고 있었다.
20살 갓 넘은 것 같은 어린 여자애였다.

강차장님은 그 여자애를 보고 확 드러나게 인상을 썼다.
많이 불쾌했나 보다.
회의실로 안내되어서 미팅시간을 기다리다가 차장님한테 궁금해서 물어봤다.

성대리 : 차장님, 만약에 우리팀 여직원들이 회식할 때 담배 피면 어쩌실꺼예요?
강차장 :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흥분한 목소리로)
그걸 말이라고 해? 어디서 감히.... 변소도 아니고 어디 어른들 앞에서...
술집 애들이 피는 것도 보기 싫은데 말이야...
성대리 : (씩 웃으며) 뭘 그렇게 흥분하세요? 쫌 있다 미팅인데....
(말을 돌리며) 미팅 자료 한번 더 보실래요?


그렇다.
강차장님에게,
우리 사회를 살고 있는 많은 40대 남자들에게(30대도 이런 남자들 물론 있겠지만)
여자가 남자 앞에서 담배를 핀다는 것은,
용납이 안 되는 대단히 도전적인 행위인 것이다.
넘어서는 안될 영역을 침범하는 일인 것이다.

왜 이 이야기를 하냐구?
어제 지난 3주간 피를 말렸던,
지난 3주간 주말마다 사무실에 나와서 머리를 쥐어 뜯게했던
프로젝트가 끝났다.

긴장이 풀린 난
어제 좀 널널한 하루를 보내면서
알라딘 서재의 글들을 읽었다.

우연히 들린 "꼬꼬댁의 책꽂이"란 서재.
페미니즘 관련 책들이 많아서 당연히 여자의 서재인지 알았는데,
서명숙의 <흡연 여성 잔혹사> 리뷰를 읽다가 꼬꼬댁님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꼬꼬댁님의 리뷰 中 일부를 살짝꿍 퍼왔다.

남자의 흡연은 금연열풍에 맞닥뜨려도 문제시되지는 않지만, 여자의 흡연은 어째서 여전히 관대해지지 않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 저자는 남성의 영역을 '감히' 넘보려는 여성들에 대한 괘씸죄라고 진단하며 나 역시 동감한다. 사실 이거 아니면 달리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게다가 "요새 담배피는 여자는 부지기수잖아?"라며 옛날 얘기라고 치부할 수만도 없다. 길에서 담배피는 여자들에 대한 심술궂은 시선은 여전하니까. 이건 좀 된 이야기다. 2000년 여름에 전라도 지방으로 친구들과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광주의 기차역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무료하게 뭔가를 기다렸었는데, 그 시간에 나(男)와 친구 둘(女)은 담배를 물었다. 심심하게 절반쯤 태웠을까, 어디선가 고함소리가 들린다. 놀랍게도 적당히 나이먹은 한 아저씨가 우리를 보며 한껏 자가격앙되어 내는 소리였다. 역겨울 정도로 험한 말들을 뱉었지만 그 말을 옮길 필요는 없겠고, 결국 요지는 "감히 여자가 밖에서 담배를 펴?!"였다.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과, 할 수 없는데 안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 차이를 바로 차별이라고 하는 거다. '할 수 없는 것'들이 불합리한 것이 아닌 이상에야, 그걸 없애는 게 바람직함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모성을 이유로, 정서라는 걸 근거로 여성의 흡연을 불온한 것으로 여기는 건 사실 궤변이다. 다 까놓고 보면 결국 남성우월의식만 남는다. 그래서 "흡연은 몸에 좋지 않은 거니깐, 여자들이 담배 피지 못하는 건 나쁠 거 없잖아?"하는 식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넌센스인 셈이다.


그렇다.
여자의 흡연에 남자들이 눈을 부라리는 것은,
남자의 영역을 "감히" 넘보려는 여자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많은 남자들에게 있어서 흡연은
서서 오줌을 누는 것처럼 남자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신성불가침한 영역인 것이다.

꼬꼬댁님 처럼 이렇게 열려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는 남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 몸에 나쁜 담배를 안 피면 좋은 거지. 더구나 여자는 애도 낳아야 하쟎아.
여자가 담배 피워서 좋을게 뭐가 있다고 남자들도 다 끊는 판에 말이 많은 거야?"
가 아니라,

" 왜 우리 사회에서는 이토록 여자들의 흡연에 반감을 가지는가?
왜 중학생 남자애들이 하교 길에 담배 피는 것 보다,
20대 여자가 길을 걸으며 담배 피는 것에 눈을 부라리는가? " 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어서(사회적으로 금기시 되어 있어서) 안 하는 것과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

꼬꼬댁님 처럼
유연한 사고 방식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서명숙의 <흡연 여성 잔혹사>,
이숙경의 <담배 피우는 아줌마>,
이유명호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자궁>,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
모두 남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제목만 보고 거부감을 가지지 말고,
한번 쯤 여유를 가지고 읽어 보기를....

영화 <스위치> 처럼 갑자기 여자로 변해볼 수는 없겠지만,
한번쯤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여자의 입장에서 일상적인 일들을 생각해 보기를....

연말선물로 강차장님한테 <흡연 여성 잔혹사>를 선물해 볼까?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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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4-12-17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너의 인생을 바꾼, 이 책도 끼워주세요. ^_^o-

marine 2004-12-17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신입생 때 같이 입학한 나이많은 언니가 선배들 앞에서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 뒤 언니는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에게 끌려가 단단히 주의를 받았습니다 그 특이한 태도 때문에 결국 대학 시절 내내 왕따로 지냈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죠

kleinsusun 2004-12-17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다닐 때,어떤 여자애가 경영관 정문 앞에서 담배를 피다가 지나가는 모르는 남자애한테 따귀를 맞은 적이 있어요. 이런 일이 우리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왠만한 학교에서 다 한번씩 발생했더군요. 거 참..... 이거 외국신문에 내면 해외토픽인데...ㅋㅋ

kleinsusun 2004-12-17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매너처럼 유연한 사고 방식을 가진 남자들이 많아야 할텐데...

오키, <아주 작은 차이> 추가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