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여름, 소개팅을 했던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Y대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오래 준비하다 포기하고
적성에 맞지 않는(스스로 그렇게 말함) 빡센 조직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스스로를 '일상에 무능한 남자'라고 했다.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자기는 책 읽고 생각하고 글 쓰고 여행하는 걸 좋아하고,
일상, 그러니까 운전하고 파킹하고 이동통신 적립카드에 포인트를 적립하고,
마음에 없는 말 하고,여자를 꼬시는데 철저하게 무능하다고 했다.

그 남자는 후면 주차만 할 수 있고(전면 주차와 병렬 주차는 못한단다),
길 눈은 너무 어두워 아는 길만 겨우 운전하고,
지도에 약하기 때문에 네비게이터도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헉~하고 한숨이 나왔다.
서로 기분 좋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면 "빙고!"하고 소리 치며
"저도 그래요!" 할 텐데,
길눈이 어둡고 운전을 잘 못하고 파킹은 후면 주차만 할 수 있다니 기가 막혔다.

내 최대 컴플렉스가 바로 "운전"이다.

2003년에 차를 팔고 한 번도 운전을 하지 않았다.
얼마 전, 회사 차를 운전할 일이 있었는데 망설이다가 못하겠다고 했다.
3년 동안 한 번도 핸들을 잡지 않다가, 내 차도 아닌 회사차를 운전할 자신이 없었다.

난 대학 1학년 때 운전면허를 땄다.(시험 운은 있어서 한 번에 합격했다.)
한 동안 장롱면허로 지내다가, 대학 4학년 때 노란 차로 연수를 받았다.
그 때, 연수 선생님이 했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 어떻게 아줌마들 보다 더 못해요? 보통 학생들은 금방 하는데..."

엄마,아빠의 반협박 및 강요로 난 운전연수를 "40시간"이나 받았다.
동네 50대 아줌마들 보다 내가 더 오래 연수를 받았다.

40시간 연수를 마치고, 혼자 긴장하며 차를 몰고 나간 첫날 접촉사고를 냈다.
4차선에서 천천히 차를 몰다 앞에 비상등을 켜고 정차한 쏘나타가 한 대 있기에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살짝 핸들을 틀었는데,
내 차 사이드 미러가 정차하고 있던 쏘나타 싸이드 미러에 부딪히면서
쏘나타 싸이드 미러가 깨져 유리가 막 날렸다.
별거 아닌 사고였는데도, 유리가 막 날리니까
난 대형사고가 났는지 알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찌나 무서웠던지....

그 후 한 동안 운전을 안 하다가
2001년, "더 이상 운전을 컴플렉스로 안고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카 레이싱'을 배웠다.
경험으로 볼 때, 노란 차 연수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고,
몸 속 깊이 입력된 두려움을 떨치려면 '카 레이싱' 정도는 해야 될 것 같았다.

비싼 수업료를 내고 레이싱을 배운 덕분에
난 두려움을 떨치고 중고차를 한 대 사서 폼 나게 잘 몰고 다녔다.

하지만...파킹은 하지 못했다.
내가 원래 '공간 지각 능력'이 빵점이다.
어렸을 때부터 IQ 검사를 하면 언어능력은 뛰어 났는데,
공간 지각 능력은 형편 없었다.
학교 다닐 때도 국어랑 영어는 항상 만점이었는데,
수학은 반타작을 겨우 했다.

아무리 파킹 연습을 해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전면주차만 겨우 할 수 있었다.
병렬주차랑 후면주차, 좁은 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세우는 주차는 포기했다.
약속이 있으면 발릿 파킹해주는 카페로 정하고,
회사나 아파트 주차장에서는 경비 아저씨의 도움을 받았다.

길눈도 믿어지지 않게 어두워서,
모르는 길을 갈 때면 택시 아저씨들한테 하도 물어 봐서
집에 오면 목이 쉬곤 했다.

중고차가 '돈 먹는 귀신'으로 전락하고 차를 판지 3년이 된 지금
필요에 의해 차를 다시 산다면 워밍업을 한 후 운전을 하겠지만,
지금은 운전을 할 필요성도, 하고 싶은 욕구도 없다.
솔직히....다시 운전하기가 무섭고 두렵다.

이런 걸 심리학 용어로 "투사"라고 하나?
난 운전 못하고 길눈 어두운 남자가 싫다.

여성잡지를 보면 "남자가 섹시하게 느껴질 때?" 이런 설문이 자주 있다.
난 내가 호감을 가진 남자가 기분 좋은 음악을 들으며 와이셔츠를 약간 걷은 채로
능숙하게 운전할 때, 섹시함을 느낀다. 또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운전하는 남자 옆에 앉아 함께 음악을 들을 때 기분이 좋다.

반면, 길눈이 어두운 남자 옆에 앉아 있을 때는 정말이지 답답하다.
나도 헛갈리는 길을 자꾸 물어 보는데, 정말 그냥 내려서 버스 타고 가고 싶다.
끊임 없이 길을 물어 보다 내가 자꾸 헛갈려 하면,
" 집에 가는 길인데 잘 몰라요? " 하면 당장 내려 버리고 싶다.

이런 얘길 친구들한테 하면,
" 뭘 그런걸 갖고 그래? 나중에 기사 두면 되쟎아. 하하" 하는데,
내게 운전은 가벼운 컴플렉스를 넘어 트라우마에 가깝다.

난 지도를 못 읽는 건 기본이고,
청첩장에 있는 약도도 제대로 못 본다.
이 말을 하면 "설마?" 하며 안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이다.

내가 이렇게 길치인 건 유전적 영향도 크다.
울 아빠는 정말 엄청난 길치다.
그래서 가족들끼리 어디를 갈 때는
옆에 앉은 엄마가 끊임 없이 길을 알려 줘야 한다.
여러 번 가본 길이라 엄마가 말을 안하고 있으면, 당장 삼천포로 빠진다.

평생 남편 옆에서 길 안내 하느라
우아하게 드라이브를 즐기기는커녕
졸려도 잘 수도 없었던 엄마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 다른 건 몰라도 길눈 어두운 남자하고는 절대 결혼하지 마라."

이러니....
남자가 길눈이 어둡고 파킹을 못한다는
남들에겐 정말이지 사소한 일이 내겐 너무도...치명적이다.

그 '일상에 무능한 남자'는 썩 괜찮은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와의 엄청난 '공통점' 때문에 다시 만나지 않았다.

회사 후배 W는 소개팅남과 "무협지"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친해져서
지금 예쁜 연애를 하고 있다.

'공통점'이란 건.... 연애를 돕기도 하고 망치기도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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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5-02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꾹. 저도 길치에요. ^^V
전 여친이 그걸 가지고 머라 할 땐 정말 화나. 짜증나. 헤어졌지만.

kleinsusun 2006-05-02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이게 정말인지는 모르겠는데......어렸을 때 부터 책 좋아하고 읽는걸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길치가 많은 것 같아요. 제 주변 사람들을 보면....ㅎㅎㅎ

비로그인 2006-05-02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잘할 수 있으련지...걱정되네요 ^-^

kleinsusun 2006-05-02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찾아서님, 좋은 아침!^^ 저 지금 신현림의 <싱글맘> 읽고 있는데, 정말 마음에 톡톡 와닿네요. 님 덕택에 좋은 책 읽고 있어요.감사합니다.

드팀전 2006-05-02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후면 주차의 왕인데.... 사사삭... 예전에 살던 원룸 지하주차장이 엄청나게 고난이도의 주차를 요했거든요.거기서 벽에 긁고 박고 뭐 이러다 보니 엄청 훈련한셈이죠....후면 주차의 왕도 다 -돈 안날리려는 -피나는 노력과 노심초사가 있었답니다.훈련만이 최강의 후면주차 왕을 만든다. 선 그어놓은 것보다 양 옆이 벽으로 막혀있는 후면주차 연습을 하면 오히려 편할거에요.물론 잘못했을 경우 꿍..이지만.

kleinsusun 2006-05-02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 해도 해도 안되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ㅠㅠ
제가 그 지하주차장에 한달간 차를 세웠다면 차가 스크래치 투성일꺼예요.줄무니 차처럼....음하하하.

마늘빵 2006-05-02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장롱면허. 이제 운전 못할거 같아요. 연수해야될텐데. 차도 엄꼬 머.

kleinsusun 2006-05-0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미녀 카렌서를 만나세용.ㅎㅎㅎ

프레이야 2006-05-02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카레이스를 배우셨다니 그래도 대단하셔요^^

kleinsusun 2006-05-02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두려움을 깨뜨리기 위한 안깐힘이었어요.ㅎㅎㅎ
3년 동안 안했더니 다시 두려움이 장막을 쳤답니다.^^

다락방 2006-05-02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면허만 따놓고 아예 운전할 생각은 하질 않는답니다. 운전할 생각만 해도 앞이 깜깜해져요. 앞으로도 하지 않을래요. 저 역시 방향치거든요. 대학4학년때는 학교 도서관에서 친구에게 전화해서 "나좀 찾아가!" 했을 정도였어요. ㅋㅋ

외로운 발바닥 2006-05-02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레이싱까지 배우시다니...길눈이 밝지 않은 남자로서 여행가면서 여친에게 지도 계속 보라고 강요한 것이 무척 찔립니다. -0-;;

2006-05-02 1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06-05-02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수선님 반가와요. (꼬옥. 껴안으며 ;;) 제가 워낙 길치에 운전을 잘 못 해서 저역시 운전에 능숙한 사람이 멋져보이더라구요. 지금 직장과 집을 오가는 정도로 운전을 하고 있긴 하지만 모르는 길 가라 하면 그냥 택시 타요. -_-; 전 남자가 아니니, 치명적인 공통점을 갖고 있어도 좋아해주실 거죠? 헤헤 ^^

kleinsusun 2006-05-02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음하하하, 님도 만만치 않으시군요. 도서관에서 길을 잃으시다니....
저도 건물 안에서 길 잃어 버린 적 있어요. 아무리 헤매도 출구를 찾을 수 없었던...ㅎㅎㅎ

외로운 발바닥님, 여친이 지도를 잘 읽으면 상관없죠.^^
전...워낙 트라우마에 가까운 컴플렉스라....ㅎㅎㅎ

kleinsusun 2006-05-02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ㅎㅎㅎ 님은 운전해 줄 든든한 옆지기가 있쟎아요. 그냥 우아한 사모님이 되세용!^^

달밤님, 아.....님도 운전을 잘하는 , 그래서 옆에 앉아 맘 편하게 얘기하고 음악 들을 수 있는 그런 남자를 좋아하시는군요.^^ 그럼요, 당근 님은 좋아하죠. 이 얘긴 단지 제가 느끼는 "남자로서의 매력"얘기랍니다.ㅎㅎㅎ

바람돌이 2006-05-03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수선님 기준으로 보면 멋진사람이네요. 저요. 운전한지 한달만에 운전의 두려움을 떨쳤고, 6개월만에 주차의 두려움도 완전히 극복! 지금은 생전 처음가보는 도시도 주소만 가르쳐주면 지도보고 대충 근처까지는 찾아가는데요. (얼마전 인천 큰댁데 주소하나만 듣고 지도보고 찾아갔음) 이거 약올리기용 댓글이예요. ^^;;
아! 도망가기전에 하나. 운전 역시 하면 무조건 늘게 돼있어요. 사람에 따라서 걸리는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안된다는 생각을 버리면 돼요. 그럼 저는 도망갑니다. 3=3=3===

kleinsusun 2006-05-03 0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이거 자랑 페이퍼예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와.....멋지다,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지도 보고 운전을 하시다니..... 지도도 자꾸 보면 읽어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