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은 울 아빠 생신이었다.

생신인데....번듯한 저녁도 먹지 못했다.
왜냐면....아빠가 얼마 전 임플란트를 하셨기 때문이다.
죽 밖에는 아무 것도 못 드신다.
식구들이 다함께 죽집에 가서 전복죽,해물죽을 먹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럴듯한 죽집도 없고 해서 저녁을 생략했다.

작년은 아빠 환갑이었는데도, 제대로 못챙겨 드렸다.

어렸을 때,
아니 몇년 전만 해도,
아빠 환갑 즈음엔 나도 독립된 가정을 갖고 있겠지... 생각했다.

나름 첫째로서 "책임감"이라고나 할까...
요즘 세상에 환갑 잔치하는 집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환갑까지는 독립을 해야 겠다,
다함께 가족사진도 찍고 해야 겠다...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1년 전 아빠 환갑은...그냥 조용히 지나갔다.
올해도 조용히....지나갔다.

그래서 올해는 나름 고민해서 아빠 선물을 준비했다.
노트북.

인터넷 쇼핑에서 노트북을 주문하고 회사로 배송시켰다.
MS word 등 기본 프로그램을 깔려고 박스를 뜯고 있는데,
팀 사람들이 물어봤다.

" 성과장, 작년에 노트북 사지 않았어? 왜 또 샀어? "
" 아....작년에 산건 제꺼구요, 이건 울 아빠꺼예요."

" 어? 아빠꺼? 왜 아빠 노트북을 성과장이 사?"
난 머쓱해 하며 대답했다.
" 네....아빠 생신이라서요."

그 말에 사람들은 뒤집어 지며 말했다.
" 뭐??? 아빠 생신에 이 비싼 노트북을?
와...성과장 통크네, 통커. 역시 효녀야!!!"

난 참 "효녀"란 말에 머쓱, 뻘쭘했다.
노트북 하나 선물한 걸로 효녀가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빠는 최근에 인터넷을 배우셨다.
요즘엔 서툰 독수리 타법으로 워드도 몇장이나 치시고,
친구들하고 메일도 나누신다.
가끔은 내게도 이메일을 보내신다. 그것도 20줄 넘는 장문의 이메일을.
독서광인 아빠는 좋은 글이 있으면,
힘들게 워드를 쳐서 친구들에게 보내기도 하신다.

집에서 막내동생 노트북을 함께 쓰다 보니,
(내껀 작아서 불편하시단다.아...울 아빠도 늙으셨다.)
가끔 실수로 동생 파일을 지우기도 하셨고,
아빠가 2시간 넘게 워드를 치고 계시면
자기도 써야 한다는 동생의 성화에 마음만 급하게 워드를 치시곤 하셨다.

아빠께 컴퓨터를 가르쳐드리다 보면
솔직히 짜증이 날 때가 있다.
그러니까....초보운전 운전 가르킬 때 답답한거처럼...

그래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곤 한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엄마, 아빠는 나한테 신발 짝짝이 구별하는 것까지 다 가르키셨는데...

사실 난 신발 짝짝이 구별하는데 정말 오래 걸렸다.
더디고 느리게 배우는 애였다.
신발 짝짝이를 구별하지 못하다 보니,
짝짝이로 신고 가다 넘어지기도 잘했다.
그래서...어렸을 때 별명이 배삼룡이었다.
배삼룡이 뜻밖에 공부는 잘해서 친척들이 놀랐다나...하는 말도 있다.

어른들이 말하는 보기만 해도 든든한 사위는 데려오지 못했지만,
올해는 노트북으로 좋은 글도 많이 쓰시고, 또 인터넷의 재미에 푹 빠지셨으면 좋겠다.

항상 건강하시고, 또 하루하루 행복하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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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4-02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님 생신 축하드려요.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kleinsusun 2006-04-02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리스 2006-04-02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 생신 축하드립니다. ^^;

끼사스 2006-04-02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씨 같은 딸이 있는, 환갑 즈음에 인터넷을 배우는, 좋은 글 읽는 기쁨을 지인들과 함께 나누는, 올해 예순둘 된 남자의 인생이라… 멋지군요. ^^ 생신 축하드립니다.

kleinsusun 2006-04-02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은구두님, 감사합니다.^^

훈성님, 감사합니다.^^ 근데...울 아빠 디따 젊어 보인답니다.ㅎㅎ 임플란트 땜에 못드시는게 맘 아프네요.

마늘빵 2006-04-02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년에는 근사한 사위를... ^^

신지 2006-04-0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곤 한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엄마, 아빠는 나한테 신발 짝짝이 구별하는 것까지 다 가르키셨는데...

-----> 저는 386인데도... 컴을 배우는데, 정말 너무 오래 걸렸어요.-_-
이 말이 많이 와 닿아요.(그래서 제 동생이 부모님에게 컴 가르쳐 드리며 짜증 낼 때, 참 밉더라구요.)

순간, 간혹, 짜증이 나기도 하겠지만...
무슨 일이든,
님처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거나,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금방 답이 나오죠.
아버님 건강하세요, 라고 가만히 말해 봅니다.

kleinsusun 2006-04-02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하하하, 아프락사스님, 감사합니다.^^

kleinsusun 2006-04-03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엠님, 아....진심 어린 댓글 남겨주셔서, 건강하시라고 가만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아빠 컴 가르쳐 드리다 보면,
아빠의 몇번째 계속되는 똑 같은 질문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질 때가 있어요.
한번은 그래서 아빠가 맘상하신 적도 있답니다.ㅠㅠ
근데...그럴 때 생각해요. 아....제가 신발 짝짝이 못구별하는 거 묵묵히 기다려주시고, 한글도 가르켜 주시고, 구구단도 가르켜 주셨는데...항상 묵묵히 기다려 주셨는데....난 지금 뭘하고 있는건가....

이엠님 부모님도 건강하시고, 또 인터넷 즐기시길 바랄께요.^^

마태우스 2006-04-03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같은 딸만 낳을 수 있다면 무자식상팔자주의를 기꺼이 버릴 겁니다...

조선인 2006-04-03 0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은 정말 효녀 맞아요. 전 아이 낳아 키우며 뒤늦게 부모님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거든요.

로드무비 2006-04-03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 뭉클해요.
수선님 아빠가 건강하시길 빌어드릴게요.
노트북 컴 선물이라니 멋집니다.^^

kleinsusun 2006-04-03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집에서 제 평소생활을 보신다면....ㅎㅎㅎ

조선인님, 효녀는 조선인님이 효녀죠.^^ 부모님은 이제 조선인님 걱정 안하시쟎아요. 친구들도 그러더군요. 아이를 낳아보면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알게된다고...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로드무비님, 와....감사합니다. 로드무비님의 기도빨에 맘이 다 든든해져요.^^

승주나무 2006-04-03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 과장님, 정말 감동적인 글이어서 저보다 마우스가 먼저 달려가서 꾹 눌러줬어요.
제 앞날을 이야기해주시는 것 같네요. 저도 역시 어머니가 환갑에다가 지금은 바다 건너 있어서 컴터를 보내야지 생각하면서도 아직은 여의치 않은 몸입니다만, 님의 글을 읽고 몹시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갑자기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눈물이 다 나네요(진짜)ㅠㅠ

kleinsusun 2006-04-03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님, 아....부모님이 멀리 계시군요. 무척 보고 싶으시겠어요.
승주나무님이 멀리 계신 부모님께 사진도 많이 보내드리고, 화상 채팅도 하고, 미니홈피에 글도 남기고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요. 꼬~옥 그렇게 되길 바랄께요. 승주님, 힘 내세요!^^

다락방 2006-04-03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선물이에요, 수선님!

kleinsusun 2006-04-04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감사합니다. 이거....실컷 말썽 피우고 노트북 하나로 칭찬 받는거 같아 부끄부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