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쇼핑 카트를 탱크처럼 밀면서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닌다.
여자애가 카트 위에 올라탄다. 여자애는 맥주 두 병을 집어들고 마시는 시늉을 한다.
포카칩스 한 봉지, 라면 두 봉지, 오징어채 한 봉지를 카트에 밀어넣는다.

그리곤 주방기구 코너로 가서 뒤집개 하나를 뽑아든다.

"야,씨발,오밤중에 부침개 해먹을 일 있냐?"
내가 핀잔을 주자 여자애가 뒤집개로 내 머리를 때린다.
"난 이걸 꼭 사야겠어."
"왜?"
"한번도 못 사봤고 앞으로도 못 살 것 같으니깐."

- 김영하의 <비상구> 中

어제 마트에서 "뒤집개"를 사면서
문득... 김영하의 <비상구>가 생각났다.
필요도 없으면서 고집 부려 뒤집개를 사는 가출소녀가.

마트에 간 적은 많지만...
주방기구 코너에 간 건 처음이었다.

식기건조대, 칫솔걸이, 섬유린스, 발닦이, 과도....등을 사다가
뒤집개도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거의 해먹지 않겠지만
계란 후라이라도 하려면 뒤집개가 있어야 하니까!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는데
가격은 차이가 많이 나고
스테인레스도 있고 플라스틱도 있고...
뭘 사야 할지 망설이다 그냥 싼 걸로 샀다.

그 뒤집개로 오늘 닭가슴살을 구워 먹었다.
(다이어트 28일 째.
탄수화물을 제한하고 단백질 위주의 식사를 하고 있다.
4주만에 지방만 2.5kg 감량했다. 근육 손실 없이 지방만! 하하하)

독립 기념으로 선배에게 테팔 후라이팬을 선물 받았다.
새 후라이팬, 새 뒤집개, 오늘 마트에서 산
포도씨유를 몇방울 뿌려 닭가슴살을 굽는 걸로
새로운 공간에서의 "첫 식사"를 했다.

집 나온지 하루 밖에 안 됐는데...
그 동안 얼마나 "기생"을 해 왔는지...
매 순간 느낀다.

쓰레기 분리수거는 또 왜 이리 복잡한지!
뭐 하나 움직이지 않고 되는 일이 없다.

이번 독립은 내 자신을 위한 최대의 "투자"다.
망설이고 또 망설였지만...
힘든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건
내 인생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러 외롭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겠지만,
돈은 돈대로 쓰고 이게 무슨 고생이냐...후회할 때도 있겠지만,
내 자신의 결정을 지지하고 믿는다.

All by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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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7-05-27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요한 물건은 그 때 상황에 맞춰서 사세요.
이러다간 나중에 집이 작아지는 마술에 걸린답니다.흐흐

kleinsusun 2007-05-27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들뜬 마음에 마트에 가면 이것 저것 사게되요.
안 그래도 어제 자중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ㅋㅋ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2007-05-27 2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07-05-27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요일 밤은 간단한 냉장고 청소를 하고, 또 주말 동안 해먹은 거 치우고, 더불어 쓰레기 내다버리고, 옷정리하고, 다림질하고....그러다 다용도실 청소에 쓰레기통도 세제풀어서 닦고...나링 더워지니 식중독 걱정이 되잖겠어요. 오늘은 두번이나 세탁기를 돌렸네요. 헥헥...

마늘빵 2007-05-27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이어트 잘 하고 계신가봅니다. 저는 어휴. 매일매일이 결심의 반복입니다. -_-

Mephistopheles 2007-05-2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메피스토입니다.
전 님처럼 생각을 행등으로 옮기고 유지하시는 분을 경외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후광만 추가된다면...)

겨울 2007-05-28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립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지만 주변에서 망설이는 사람이 있으면 전 무조건 혼자 살아보라고 부추깁니다. 그 무한대의 자유로부터 오는 들뜸과 고요가 어느 순간부터 가족의 발소리 말소리가 그리워 잠 못 이루는 시간으로 바뀔지도 모르지만요. 독립은 심리적으로 혼자라는 걸 빼면 결혼과 동시에 집을 떠나는 과정과 아주 비슷한데, 아닌가요.^^

바람돌이 2007-05-28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수선님! 저도 수선님의 결정을 팍팍 지지해요. 귀찮은 일 투성이고 할 일 많지만 그럼으로써 얻는것도 많겠지요.
그나저나 저 김영하의 소설 중 "야,씨발,오밤중에 부침개 해먹을 일 있냐?" 는 딱 경상도식으로 바꾸면 더 맛이 날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야, 씨발, 오밤중에 찌짐 뒤빌일 있냐?" ^^

사마천 2007-05-28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사람의 무게는 빈자리에서 나타난다. 부모님의 무게가 말이죠 정말이지 엄청 크거든요. 다 때가 되면 헤어져야 할 수 밖에 없는 게 인간의 운명이라면 부모님의 무게를 느끼게 해주는 책 하나 추천 드립니다. 미키 앨봄의 <단 하루만 더>입니다. 죽기 직전에 처한 아들에게 나타난 유령 어머니이야기입니다.

조선인 2007-05-28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래도 재미나시죠? 하나 하나 by myself를 만드시는게요? 아직은 말이죠.ㅋㅋ

moonnight 2007-05-28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들어도 참 즐겁고 행복해 보입니다. 새집에서의 첫번째 식사 축하드려요. 성공적인 다이어트도 축하하구요. ^^

혜덕화 2007-05-28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서 독립하셨나봐요. 이제야 알았네요. 축하합니다. 수선님만의 삶, 즐겁게 꾸려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