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없는 연말을 보내고
1월 첫주부터 핀란드로 출장을 갔다 왔다.

갔다 오니...서울이 스칸디나비아의 끝 핀란드보다 더 춥다.
얼얼한 추위 속에 다시 정신 없는 날들의 시작.

나의 모리 김영하 상무님께서는
며칠 전 보낸 메일에 이렇게 쓰셨다.

"수선씨는 바쁜 거 좋아하잖아요."

그럴까?
하긴... 안 바쁘면...엉뚱한 일들을 잔뜩 벌려 놓고
헉헉거리는 게 나란 인간의 속성이다.

1월 8일 월요일부터 11일 목요일까지 나흘 동안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김윤식 선생님 특강
<한국근대문학사의 두 공간에 대하여>를 들었다.

출장 보고에, 밀린 일들에,
올해는 뭔가 보여주자!는 연초의 전투적인 분위기 속에
일찍 퇴근을 한다는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나흘간 일찍 퇴근을 하고 바람을 날리며 용산으로 달려갔다.

김윤식 선생님의 특강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대학 때 김윤식 선생님 같은 스승을 만났다면
계속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촉망 받는 훌륭한 인문학자까지는 못되더라도,
시간 강사로 고단한 생활을 하더라도,
그래도 어딘가에서 계속 문학을 공부하고 있지 않을까?

가지 못한 길은 언제나....애틋하다.

김윤식 선생님의 특강을 한 단어로 압축한다면
그건...."열정'이었다.

10년간 회사생활을 하며 늘 어떤 허기와 결핍 속에
수많은 강의를 들어왔지만,
이런 열강은 정말....처음이었다.

강의 시작 시간은 저녁 7시. 끝나는 시간은?

첫날 월요일 9시 30분.
화요일 10시 30분,
수요일 10시,
마지막 날인 목요일.....11시 30분!

화요일에는 신들린 듯 강의를 하시다
문득 시계를 보시더니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할망구 영감 와 안오나 기다리겠다."

강의는 크게 세가지 주제로 진행됐다.
- 일제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
- 해방공간 한국 작가의 민족문학 글쓰기론
- 일제말기 한국인 학병 세대의 체험적 글쓰기론

강의를 들으며...한 없이 부끄러웠다.

난 어떻게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한번도 한국의 "근대"에 대하여, 그 정체성에 대하여
고민을 하지 않고 살았을까?

소설적 인물이 "문제적 개인",
끊임 없이 고민하고 번뇌하며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적 개인"이라면,
난 바로..."문제적 개인"의 반대말이라 할 수 있는
"유지적 개인", 그러니까 하루하루 밥 잘 먹고
소소한 개인적 고민에 갇혀 사는
시스템의 유지에 기여하는 개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허구한 날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엄살?)

선생님은 나흘간 강의 내내
Georg Lukacs의 [Die Theorie des Romans] 얘기를 많이 하셨다.

69년에 동경대에 가셨다가 동경대 정문 앞 서점에서
루카치 선집을 산 선생님은 너무도 흥분해서 밤새 읽고 번역을 하셨다고 한다.

강의를 들으며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독일어로 읽고 싶다는
열망에 빠진 나는 오늘 아침 amazon.de에서 책을 검색했다.

그런데....오호통재라!
너무 옛날 책이라 개인들이 팔고 있는 헌책 4권 밖에 없는데,
해외 배송이 안된다고 한다.
Hamburg에 있는 친구한테 부탁해서 책을 보내달라고 해야 겠다.
(그런데....읽을 수 있으려나?)

평생 하나의 일에 열정을 바쳐 온 사람은 아름답다.
김윤식 선생님에게서 문학과 삶이 하나 된
역사철학적인 "완결성"이 느껴졌다.
아.....그 근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란!

마지막 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작은 선물을 했다.
자주 가는 베이커리에 특별히 부탁해서
자그마한 상자에 담겨 있는 만쥬를
빨간 포장지와 금색 리본으로 포장해서 드렸다.

만쥬를 선택한 건 정말....탁월한 선택이었다.
왜냐면...잔뜩 긴장해서 선생님께 선물을 내밀었을 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먹는거요? 내 먹는 거 아니면 필요 없소."

마지막으로....선생님은 외모도 정말 멋지다!
까만 와이셔츠에 회색 넥타이,
넥타이 보다 더 진한 회색 슈트를 입으셨는데
정말...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떻게...36년생 할아버지가 그렇게 멋있을 수 있을까?
외람된 말이지만....광화문을 걸으며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하.

강의를 마치며 선생님께서는 두가지 당부를 하셨다.

하나, 언젠가 길에서 마주치면 인사는 안하더라도
나라는 사람을 기억해 달라.
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라!
세상에 머리를 숙일 데는 하늘과 부모 밖에 없다.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갈팡질팡하는 내 삶도 하나의 길로 좁혀져 가며
언제가 그런 완결성을 만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지(?) 또는 욕심이 들었다.

선생님의 열강에 감사하며,
선생님의 건강을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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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1-13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서너 학기 동안 강의를 들었었지요.^^

사마천 2007-01-13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교수님 강의는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사람을 다르게 느끼게 해주더군요.

hnine 2007-01-13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신년 정초에 그토록 좋은 기회를 가지셨다니!
두번째 말씀은 저도 동감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라!
자기가 진정 좋아하는 일일때 열정도 생기는 것 같아요.

라로 2007-01-13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분야이긴 하지만 님과 비슷한 느낌을 경험했어요.
여든이 넘으신 선생님께서 노쇠하시어
비록 흔들리는 손이지만
바이올린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하더군요.
처음 인사드려요.
좋은글 자주 접하겠습니다.

kleinsusun 2007-01-13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와....넘 부러워요.^^

사마천님, 맞아요.세시간 넘는 강의시간에 아무도 졸지 않는 강의는 정말...처음이었어요!^^
hnine님, 새해 목표는 잘 지키고(?) 계시죠?^^
무엇보다...즐겁게!

nabi님, 반가워요.^^
nabi님의 스승님 얘기를 들으니 저도 가슴이 뭉클해요. 앞으로 자주 만나요.^^

다락방 2007-01-13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그동안 아주 멋지게 살고 계셨군요. 수선님, 화이팅!!

이리스 2007-01-13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흠, 그런 강의가 있으면 같이 가자고 했어야쥐~~ ㅋㅋ

kleinsusun 2007-01-13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멋지게...는 아니고 정신 없게! ㅋㅋ 다락방님도 홧팅!^^

구두야, 담엔 꼭 같이 가자!^^

비연 2007-01-13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도 그런 강의는 한번 꼭 가고 싶군요...

kleinsusun 2007-01-13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비연님, 담에 이런 기회가 있으면 꼬~옥 들으세욤!^^

글샘 2007-01-13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수님 결혼 이야기는 사뭇 감동적인 데가 있지요.
저 교수님 강의 청강하러 갔다가 하도 욕을 하시는 바람에 못 듣고 말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시절엔 맨날 데모한다고 공부 안했다고 엄청 욕 듣고 그랬지요. ㅋㅋㅋ

kleinsusun 2007-01-13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수님 결혼 얘기 해주세요!!!!!
아......넘 궁금해요! 들려 주세요, 글샘 DJ님!^^

2007-01-14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14 0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1-14 0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퍼갑니다. 김윤식 선생님 결혼 이야기 낭만적이에요. ㅎㅎ; 그런데 사실 공개적으로 쓰기가 쫌...

kleinsusun 2007-01-14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결혼 얘기는 잘 모르지만 선생님 정말 낭만적이신 것 같아요. 그림 보러 Dresden 간 얘기... 무척 감동적이었어요.^^

2007-01-14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