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풀니스 -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
한스 로슬링.올라 로슬링.안나 로슬링 뢴룬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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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와 인간 본성이 왜곡하는 세계관을 데이터(팩트)를 통해 수정해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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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사란 무엇인가? - 역사가가 텍스트를 읽는 방법
리처드 왓모어 지음, 이우창 옮김 / 오월의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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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리처드 왓모어, "지성사란 무엇인가? -역사가가 텍스트를 읽는 방법", 이우창 옮김, 오월의봄, 2020.

'지성사'에 관심을 두고, 스키너의 책도 논문에 인용하여 박사 논문을 써서 더욱 관심을 두었던 책. 충실한 역주와 매우 잘 설명하고 있는 역자 후기가 반갑다. 이 책을 읽으면, 결국에는 포칵이나 스키너 등의 주저작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지성사에 대한 유혹서로의 역할은 충분히 하고 있다. 다만,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 책만 읽고 바로 '지성사' 연구 방법론을 배워서 이를 자신의 연구에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방법론적 설명은, 한국어로 번역된 스키너의 "역사를 읽는 방법 -텍스트를 어떻게 읽고 해석할 것인가"이 더 자세하다.(두 책의 한국어 제목과 부제를 보면 그 유사성이 흥미롭다) 그러나 지성사 자체가 어떠한 '맥락' 속에서 발화했고 변화해왔는지를 지성사적 접근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이 또한 하나의 지성사 연구의 사례(지성사에 대한 지성사?)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는 지성사 개설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지성사의 구체적 성과들의 혁명성이나 방법론적 특성이 구체적으로는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표현하기 위해 채택하고 활용하는 일련의 전제를 언어 혹은 담론이라고 할 때, 저자가 활용하는 언어 혹은 담론이 저자의 주장 자체에 제한을 가한다는 것이다. 언어 또는 담론은 문법과 수사, 그리고 관념의 용법과 함의에 관한 일련의 전제로 구성되어 마치 복잡한 구조물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언어 사용자들이 공동체를 구성한다고 할 때, 그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저자들은 기존에 존재하는 언어들을 혁신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언어라는 복잡한 구조물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인 현재 및 물질적 현재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명료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미 존재하는 언어를 활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101)

여기서 "저자가 활용하는 언어 혹은 담론이 저자의 주장 자체에 제한을 가한다는 것", "문법과 수사, 그리고 관념의 용법과 함의"가 어떤 식으로 제한을 가하고 이를 텍스트들에서 어떻게 추출해서 논의하는지는 문학 연구자로서 매우 관심 있는 주제이다. 특히 서구의 긴 수사학적 전통을 떠올린다면, 어떠한 '수사'가 담론에 제한을 가한다는 식의 설명은 문학 연구자라면 눈이 번쩍 떠질 만큼 매력적인 연구이다. 그런데 이를 알기 위해서는 포칵이나 스키너 등의 연구를 살펴야 한다. 제한된 분량상 이를 담지 못했다고 해도, 이에 대한 구체적 예시나 설명이 거의 없는 것이 아쉽다.


여기서 말하는 '지성사'는 당대에 중요한 '주장'을 했던 텍스트/사상가에 대한 연구에 해당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텍스트는 일종의 주장으로 읽을 수 있는데, 이를 '시'라는 담론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론적 변용이 필요할까. 저자의 발화수반적의도 자체를, 저자가 모를 때. 또는 그 발화수반적의도가 '시' '미적인 것' 자체일 때, 그 '시'나 '미적인 것'을 당대 또는 해당 저자를 둘러싼 맥락을 파악하는 것을 통해서 추적하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 문학사/문학연구란 무엇을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윗모어는 “가장 뛰어난 지성사 연구자들 다수는 학문적 연구와 가치평가 작업이 병행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혹시 지성사가 스스로 과거의 저자에게서 혐오스러운 주장 혹은 관념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것들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요점은 왜 저자가 그런 관념을 세계에 내놓았는지, 그리고 당시의 맥락에 입각할 때 어떻게 그런 논변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데 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상황을 좀 더 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며, 더불어 당시에 해당 논변이(설령 지금 우리에게 매우 끔찍하다 할지라도) 어떤 이유에서 유효했는지 통찰할 수 있게 된다.” (214)

라고 주장한다. 저자를, 텍스트를, 논변에 대한 '판정'하는 것보다는 '이해'하는 것이 우선된다. 이는 어느 정도 당대에 영향력이 있고 '성공'한 텍스트를 해명하는 데 더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당대에 '실패'했지만, 후대에 '성공'한 텍스트들이 실패했던 맥락 등도 고찰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문학사/문학연구도 이 '이해'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 이것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런데 이 지성사적 접근만으로 문학은 해명될 것인가? 물론 이 책의 저자도 이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 연구자로서 지성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무엇을 '더' 또는 '다르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로는 어떤 문학 텍스트 어떤 작가를 연구해야 하느냐는 기준이 문제가 된다. 정통적인 '순문학' 연구자들은, '문학적 가치'라는 기준에 따라서 높은 '문학성'이 있는 작품들을 연구했다. 물론 이 '문학성'이라는 것은 당대 기준으로 평가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작업은 일종의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좋은 예로,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기존 남성중심주의적 '정전'을 비판하고, 새로운 '정전'을 발굴하려는 시도가 있다. 이에 대해서 앞선 지성사 연구의 입장이라면 이러한 시도는 오늘날의 가치를 바탕으로 과거의 텍스트를 재단하는 일이 될 것이다.

어떠한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 당대의 맥락들을 섬세하게 복원한다는 것. 우리가 시를 연구한다고 했을 때, 이것으로 충분할 것인가? 그 시의 '아름다움', '문학적 가치', '정치적 가치'가 시대에 한계에 제한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끊임없이 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또 문제적인 지점은 과거와 오늘날 사이의 섣부른 연결을 경계한다는 것이, 아예 연결을 사유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기원'이 아니라 '원천'으로서의 문학 텍스트. 100년 전 시를 읽고 이를 연구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ps. History of idea가 '지성사'로 옮겨지게 된 맥락은 무엇일까. 관념사, 사상사, 지성사 등에서 '지성'이라는 번역어의 맥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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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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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김영하, "여행의 이유", 문학동네, 2019.
언제부터인가 남성의 문학적 글을 읽기 싫어졌다. 남성의 감정과 삶에 대해서 별로 알고 싶지 않다. 이는 자기혐오를 포함하는 감정일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남성 피아니스트의 연주도, 남성 가수의 노래도 잘 듣지 않는다. 윤아가 태어나고 커가면서 더 그렇게 된다. 미래는 여성의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이 여성이 자라는 사회에서 여성 혐오가 사라지고 성 평등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개인적이기도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데도, 코로나 사태 중에 정말 매력적인, 여행 '뽐프'를 제대로 주는 산문집을 만났다. 여행을 가는 이유는 소설을 읽는 이유와 같다. 일상에서 벗어나 타인의 삶을 경험하게 하고, 일상의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 여행에 집중하게 한다. 소설은 거짓이라 읽지 않고 논픽션만을 읽는다는 사람은, 여행은 낭비니까 출퇴근만 한다는 사람과 같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다른 나라에 사는 것은 좋아한다. 내가 원하는 여행의 속도는 아마 이렇게 1달 이상 낯선 도시에 체류하며 조금씩 내 반경을 넓혀서 마트에 가보고, 일상적으로 교류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그 정도 속도인 것 같다. 얼른 코로나가 끝나면, 먼 도시로 떠나고 싶다. 이번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대륙 아프리카에서 2달 정도 체류하다 올 것이다. 그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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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여성들 -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젠더, 노동, 섹슈얼리티 연세근대한국학총서 109
배상미 지음 / 소명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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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읽었다. 매우 잘 읽힌다. 박사 논문은 안 읽고, 책으로 펴낸 것만 읽어서, 박사 논문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하다.

일단 저자에게 묻고 싶은 것


1. 방법론적 고민.
소설 연구자가 아니라, 소설 연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문학 연구자로서, 이 연구의 방법론적 고민이 궁금했다. 이 연구의 궁극적 목적은 "근대 초기, 특히 식민지시기에 여성들의 노동과 여성 노동자라는 존재가 당대 사회에서 인식되었던 방식을 포괄적으로 살피"(217)는 것이다. 그랬을 때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다양한 영역에서 노동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에"(217) 선택된 매체이다.


여기서 소설은 담론의 한 종류로 취급된다. 소설이라는 미디어 자체의 특수성은 별로 조명되지 않는다. 소설을 담론의 한 종류로 취급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 담론의 한 종류라고 해도, 소설이라는 매체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 '여성들의 노동과 여성 노동자라는 존재가 당대 사회에서 인식되었던 방식'을 살핀다는 것이 주목적이라면, 그 중 '프롤레타리아 소설'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적 논의가 필요하다. 기타 매체의 담론들 (가까이는 시, 희곡과 같은 문학 장르들, 영화, 신문 기사, 재판기록물, 회고록 등등)이 아니라 '소설'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를 논의할 때, 소설을 분석하는 방법론도 섬세해질 수 있다.


또는 소설을 매개로 당대 '현실'의 재현을 살피는 것인가, 아니면 소설이라는 담론의 한 형태를 통해 당대 사회 여성들의 노동과 여성 노동자가 어떻게 담론화되었는지를 논의하는 것인가. (담론/현실이라는 이분법을 다시 사유하자는 것이 아니라, '담론화'라는 기제, 매체의 특수성을 사유해야 한다는 것)



2. 구체적 분석 방법론

두 번째도 방법론의 문제인데, 앞의 방법론이 연구 목적과 매체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는 방법론이라면, 두 번째로는 소설 텍스트, 또는 소설이라는 담론을 어떻게 분석하겠다는 방법론에 대해서 궁금하다. 매번 분석이 스토리 속 여성 인물들에 집중하면서 이들을 분류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는 느낌이다. 이러한 분류 자체가 방법론일 수 있다. 그러나 읽어나가다 보면, 저자는 무언가를 더 분석하고 논의하고 의미화하고자 하는 지점들이 보이는데, 이 부분에 대한 방법론적 고민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마지막에 김남천의 "맥"에서 무경을 분석하면서, "무경의 생활은 어느새 동양론 이후에 올 새로운 사상을 추동하는 힘을 내포한 것이 된다. 지금까지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고 대상화되고 주변화되었던 여성 서비스직 노동자의 생활이 근대의 끝에서 근대도 반근대도 아닌 새로운 사상을 낳을 가능성으로서 태동하고 있는 것이다."(212)라는 주장이 나온다.


여기서 "무경의 사상은 지금까지 존재하던 사상들과는 완전히 다른 출발점을 가정한다"(212)라고 했는데, 그 출발점은, "여성 서비스업 노동자의 생활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다"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존재하던 사상들과는 완전히 다른 출발점을 가정한다고 하는 것 같은데, 이것이 '완전히 다른 출발점'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노동자의 생활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은 사상이 없다는 말은 아니겠고, "여성 서비스업 노동자의 생활"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 새롭다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필요할 것 같은데, 전혀 논의가 생략되어 있어서 아쉬웠다. 이 부분에서 방법론적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소설이라는 담론을 여성 노동의 영역(공장, 사적영역, 서비스업)에 따라 분류하는 것을 넘어서, 이의 사상적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대결하고, 마르크스 페미니즘을 경유하는 일이 필요하다. 서론에서 이것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있었는데, 이게 본론 중에 구체적 분석 중 일부분에서는 소략해진다. 대표적으로 앞서 말한 무경의 사상을 분석할 때, 이를 더 밀고 나갔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면 공장, 사적 영역, 서비스업이라는 분류 속 나타난 여성 노동의 의미에 대해서 더 의미부여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대공장 (남성 노동자) 중심주의를 타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해도, 현재 공장, 사적 영역, 서비스업이라는 분류를 한 이상, 그것이 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선명하게 의미화하는 작업이 필요했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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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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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명의, 삼국지에서 관운장을 수술한 화타에게는 두 명의 형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환자가 아프기도 전에, 병을 예감하고 치료하고, 둘째는 아주 미미하게 아플 때 병을 치료한다. 김승섭 선생님의 이 책을 읽으며, 화타의 첫째 형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기존의 우리가 '명의'라고 알려진 사람들은 화타와 같은 의사이다. 큰 병이 났을 때 그 병을 최신 기술로 치료하는 의사. 물론 이 또한 정말 감사한 분들이다. 그런데 김승섭 선생님은 화타의 첫째 형과 같은 의사이다. 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아서, 이에 대해서 고민하는 '역학'을 전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낮은 곳의 약한 자들의 '아픔'의 사회적 원인을 고찰한다. 이로 인해, 세월호 유가족, 트렌스젠더, 범죄자 등의 '아픔'이 조명되고, 이 아픔의 사회적 원인을 고발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이를 통해, 사람들이 아프기 전에 그 병을 고치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김승섭 선생님은 화타의 첫째 형과 같은 의사가 되고자 한다.




우리는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사가 늘, '술담배 줄이고 스트레스받지 마시고 푹 쉬라'고 말하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구든 그러고 싶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기에 견디고 견디다가 탈이 나서 의사를 찾게 된다. 김승섭 선생님의 책은 이 부분에서 시작한다. 왜 우리는 술담배를 하게 되고,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고, 쉴 수 없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무엇이 문제일까? 실제로 사회적 관계도가 높을수록 면역력이 높다는 연구도 있고, 공동체가 굳건할수록 심장병도 덜 걸린다는 연구도 소개한다.




우리 사회에는 이국종 같은 의사도 필요하다. 그러나 김승섭 같은 의사도 정말로 필요하다. 아니, 이국종 센터장도 결국에는 사회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추울 때 추운 곳에서,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위험한 환경에 일하는 사람들이 외상센터의 주환자이고, 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사회의 품격을 결정한다고. 한국이 선진국인가 아닌가는 단지 GNP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우리는 '공동체'를 만들었는가, 얼마나 행복하게 자기의 꿈을 각자가 실현하고 있는가, 우리는 서로에게 어떠한 뒷받침을 하고 있는가. 이 책은 그러한 '공동체'에 관해서 묻고, 공동체가 겪은 '아픔'이 하나의 길이 되기 위해서는 이 아픔을 사회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게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모든 지인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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