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 - 지도를 펼치면 성공의 길이 열린다
댄 스미스 지음, 김이재 옮김 / 청아출판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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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가 말하는 지도력(地圖力)이 왜 필요한가를 충분히 실감하게 되는 저작이다. 여러 주제와 사안들을 중점으로 지도와 도표를 제시하고 있는 본서를 통해 많은 사고를 해보게 하는 필요와 유용함이 남다른 저작이라는 감상이 든다. 

 

[우리는 누구인가] 장에서 현재의 기대수명을 지도로 보며 다시 도시화에 대한 지도와 연계해 보자니 팬데믹으로 사회적 불안정성이 높아진 이때, 다시 말해 감염과 부작용, 사망률이 상승하는 이때 인구가 도시로만 밀집해 있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지 않은가 하는 우려가 되었다. 실제 인구밀도만큼이나 감염재생산지수도 수도권 지역과 거대 도시들에서 밀도 높게 나타나고 있으며 확진자 숫자 만큼이나 사망자 숫자도 그렇게 높다고 알고 있다.

 

도시화라는 것이 편리에 의해 여러 목적에 의해 추구되어 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팬데믹 이후 많은 이들이 재택근무 비중이 높아지며 딱히 감염 위험도 높은 도시 거주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각성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완전 재택근무 비중이 높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지만 미국 등 서구 국가들에서는 탈도시화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재택근무로 출퇴근의 편리를 위해 굳이 도시에 거주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 이유인데 사실 도시 거주는 감염 가능성도 높여줄 뿐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기대 수명이 높아진데 대한 지도는 이 저작의 대다수 자료가 2017년까지나 2019년까지의 정보로 한정되어 있어 그렇다고 생각한다. 팬데믹이 종식된 이후 2022년 현재 내지는 이 팬데믹이 끝난 이후의 자료로 다음 개정판이 출간된다면 세계 각국의 기대 수명은 아마도 한층 감소했을 것이다. 빌 게이츠가 계획한대로 다음 팬데믹이 등장하는 이후에는 더더욱 가열차게 기대수명은 감소할 것이다.

 

본서의 도표로는 '2020년 전 세계 도시 인구는 43억 7,900만 명'이다. 지금까지의 추세로는 도시화는 편리와 목적이라는 필요에 의해 거듭거듭 갱신되어 왔다. '1950년의 전 세계 도시 인구는 7억 5,100만 명'이었다고 하는데 인구 증가률을 감안하더라도 2020년까지 상당한 규모로 확대된 것이다. 하지만 재택근무나 재택근무를 하면서도 이직의 자유가 보장되는 프리랜서 업무가 일반화되면 더이상 취업자들에게 감염 가능성이 더 높은 도시생활이 불필요해질 것이다. 그런 위험을 굳이 떠안을 필요도 없고 말이다. 향후에는 탈도시화가 상당한 규모로 일반화될 것이 아닌가 싶다. 탈도시화가 이뤄진다면 대도시들의 부동산가는 당연 하향할 것이다.

 

[부와 빈곤]의 장에서는 부의 분배를 묻는 각국의 Gini계수나 각국의 인간개발지수(HDI)를 각국 국민총소득(GNI) 수준과 비교해 볼 기회도 나쁘지 않았다. 초국적 기업들(월마트 수익:5천억 달러, 보잉의 수잉:930억 달러, 메타의 수익:410억 달러, 맥도날드의 수익:230억 달러)의 수익과 각국의 GNI를 비교해 주는 지도나 JP모건 체이스의 연간 수익(1,314억 달러)과 비교한 지도 역시 마찬가지다. 각국 부패지수 이후 지하경제규모와 파나마 및 파라다이스 페이퍼스의 조세 회피 데이터가 유출된 경로를 밝히고 그 데이터에 근거한 각국의 조세회피 실체와 그로 인한 각국의 대응들을 지도로 보는 것도 상당히 유익한 정보였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정보는 급증하는 계층 격차를 도표와 그래프 그것도 국가간 양상만을 비교한 정보로 "아! 이렇구나."에서 그치게 만드는 효과가 더 크지 않나 싶다. 물론 [소수의 부유층] 장에서 '2,153명의 억만장자의 총자산이 8조 7천억 달러'라고 밝히고는 있지만 이것도 2019년의 자료일 뿐이다. 조바이든 대통령의 의회 연설을 인용한 2021년 4월 [포브스]지의 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코로나19로 미국인 2000만명이 직업을 잃었을 때 개인자산 10억달러가 넘는 미국 억만장자 고작 650명의 전체 자산은 1조 달러 늘어났다고 한다. 그들의 총자산은 4조 달러가 넘는다고 의회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연설 중에 발언했다. 실제 데이터로도 이들 650명의 자산은 2020년 1월1일 주식시장 개장 당시 가치는 3조4000억 달러였는데 2021년 4월 28일 주식 시장이 마감할 때는 전체 자산 가치가 4조 6000억 달러였다고 한다.] 2022년 현재 미국의 650명의 총자산 규모가 얼마일지는 감도 오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팬데믹에 배팅해 백신개발에 투자했으며 그로 인한 수익은 쉽게 헤아릴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와 각국 수반, 그리고 각국 정재계인사들이 팬데믹이 오기 불과 2달 전에 팬데믹 상황을 시뮬레이션했다는 것과 빌&멀린다 재단이 중국의 우한 바이러스 연구소에도 후원하고 있었음은 이미 [플랜데믹]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와 그 저작에서도 밝히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이 음모론이었다면 반론이 나왔을 것이고 사실이 아니라며 반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슈가 되는 영화이자 저작임에도 누구 하나 오류를 밝히지 못했다. 

 

세계의 부패와 부의 축적은 어떤 식으로든 격차를 확장하고 일부에서는 죽음을 불러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정보에 민감하고 민활하게 대응해야 한다. 본서에서는 [권리와 존중]의 장에서 범죄자, 아동, 여성, 성소수자, 소수자의 인권 등을 다루고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각국의 정보를 거시적으로 돌아보는 정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좀더 상세한 정보는 각자가 더 확장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정보들이 보다 나아지는 세계로 가기위해 변화되어야 할 부분들을 알려준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살아남아야 세상도 바뀐다는 생각도 들었다. 몇 십억 명의 대대적인 인구 감소가 이뤄진 직후라면 그때 부패니 빈곤과 부니 차별이니 하는 문제들이 더이상 무슨 논란꺼리가 되겠나 싶기도 했다. 어느 정도의 변동사항이 있다하더라도 지속되는 바가 있어야 변화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종교들이 종말이라거나 개벽이라거나 하면서 이 학살의 시기를 자기들의 종교교리에 따른 해석으로 호도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 종교의 창시자들도 바라지 않는 바일 것이다. 특정 세력이 의도를 가지고 인구감소를 추진하는 것을 그저 시대의 흐름으로 종교적인 특정시기가 다가온 것만으로 치부하게 대중을 선동한다는 건 대응의 방법을 차단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말이다.

 

[전쟁과 평화] 장은 21세기의 전쟁을 지도로 보여주며 시작한다. 2018년까지의 기록이지만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 등에서의 전쟁들이 다시 급증하는 추세임은 명백하다.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인 위상으로 볼 때 이 지역의 문제가 세계적인 영향력을 주는 사안으로 확대되는 상황은 언제와도 놀랍지 않은 상황이다. 본서에서 도표와 사진으로 보여주는 각국의 군비증강 사례나 전쟁 사망자 수, 난민 수 등도 주목하게 되는 바다. 게다가 현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핵을 사용할 시기가 언제일까도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원유, 원자재 등으로 각국의 공급망 문제를 불러일으켜 생산과 무역에 차질을 불러와 경제에 총체적인 문제를 일으키는데다 두 곡창지대의 전쟁으로 식량문제 마저 불러와 달리 말할 것도 없는 대재난의 시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세계화가 30년을 이어온 지금, 전쟁이 결코 전쟁지역만의 참상에서 끝나는 사태가 아니게 된 것이다. 왜 하필 대중들이 대감염병과 그에 대한 백신으로 야기되는 문제들에 주목할 때 즈음 전쟁이 터졌을까? 그리고 왜 서구 사회는 이 전쟁을 지속하려 열의를 보일까? 아마도 이 이후 기다리는 것은 그레이트 리셋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응안은 무엇일까? 인류가 보다 아프지 않고 지속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계와 변화에 대한 정보들을 흘려듣지 못하겠는데 그런 때 출간된 이 책도 나름의 역할을 해 주는 책이라 생각된다. 지금을 바로 아는 기회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외의 내용이라면 [인류의 건강] 장에 있는 팬데믹, 영양실조, 비만, 흡연, 암, 후천성면역결핍증, 정신건강, 물과 위생, 병에 걸린 사람들의 내용들이 있는데 그 중 영양실조와 비만에 대한 데이터가 인상적이었다. 영양실조와 비만은 영양이라는 문제에 앞서 분명한 분배의 문제가 선행한다고 생각한다. 장 지글러의 저작들을 보면 고기를 위해 사육되는 소와 돼지들에게 초대량의 곡물이 투입되고 있고 버려지는 음식쓰레기의 양이 측량키도 버거울 지경이지만 지구의 한 켠에서는 굶주리고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넘쳐난다. 본서에서는 지구의 인구가 날로 증가 추세인데도 불구하고 2005년 15% 였던 영양부족 상태인 사람들의 비율이 2015년부터 11%로 소폭 하락해서 2018년까지 줄곧 11%인 상황이다. 이것은 엄연한 분배의 문제이다. 부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치중하여 축적되는 상황하에 부가 편중되지 않는 지역에서는 날로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게 되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그 나라 그 민족 그 사람들이 국가 운영을 제대로 못하고 경제 운영을 못해 그 나라 사람들이 그런 것에 무슨 공감과 연민이 필요할 것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가 치중되는 나라에서 태어난 이들과 굶주리는 그 나라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차이라면 어느 지역에서 태어나 어떠한 환경에서 자라나게 되었느냐는 차이가 유일한 것이 아닐까? 단지 이러한 운명적인 하나만으로 누군가는 영양과다가 되고 누군가는 영양결핍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부조리는 타파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싶다. 국가와 세계의 운영기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부라는 것이 선순환되는 기조로 말이다. 고작 몇 퍼센트의 사람들에게 거의 대부분의 부가 치중되는 구조라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마지막 장인 [지구의 건강] 장이 있는데 생물의 다양성이 감소하고 있는 것을 돌아보고 인류의 수자원 문제를 짚어본데는 의의가 있었다. 하지만 에너지 기후변화, 녹색지구 만들기에 대한 논조에 다소의 이견이 있다. 지금의 환경문제, 기후변화문제는 노선이 정해져버렸으며 그것이 과학계에서도 주류가 되어버렸지만 한 편으로는 기후변화는 지구적 차원의 주기를 두고 일어나는 변화이지 인간의 탄소배출로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는 과학계의 연구 결과들도 있다. 처음에는 이 둘이 첨예한 대립을 했었지만 전 지구적인 대응책 마련이 세계를 블럭화하고 층차를 두고 각국의 개발을 제재하기 쉬운 현재의 체제로 확립되고 말았다. 물론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에게 달려있고 스스로 하기 나름이라는 현대 과학과 철학의 주류적 관점에 익숙해 있어 기후변화도 인간이 바꿀 수 있다는 전제가 더 받아들이기 쉽고 마음도 편할 것이다. 하지만 지구의 역사와 변화를 거시적으로 연구하는 과학분야들에서는 지구의 기후는 다른 주기로 접어들어서이지 인간이 영향을 주어서도 아니고 인간이 영향을 줄 수 있지도 않다고 말하고 있다. 본서의 내용처럼 1950년대 부터 인간의 탄소배출이 거세지고 지구의 변화를 인간이 몸소 체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분명한 건 그러한 주기는 지구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반복되어오는 여러 주기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한 주기설을 무시하고 기후문제를 가장 뜨거운 이슈로 자리매김한 것은 탄소배출권이라는 주제로 개발항로인 국가들을 제한하기 위해서라는 견해가 무엇보다 타당하지 않나 싶다. 이에 대해 이견이 있는 학자들이라면 각자의 연구를 공정하게 발표하고 경쟁하면 될텐데 다수의 경제계는 탄소배출이 기후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연구에 압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기업의 생산과 연구개발에 악영향을 주는 이론인데도 말이다. 이는 거대한 계획의 일부로 기후변화 문제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없다면 시도되지 않을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들의 항로는 그레이트 리셋을 향하고 있다. 기존의 체제와 체계들을 모조리 무無로 되돌려버리고서야 맞이할 수 있는 시대를 향한 걸음걸음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사람들은 냄비 안의 가재가 산채로 조용히 익어가듯 별다른 문제제기도 없이 그렇게 그레이트 리셋 이후, 뇌 임플란트를 이식해서 뇌를 기계와 연동하는 인터페이스를 통해 중앙컴퓨터(AI가 탑재된 양자컴퓨터)에 제어 당하며 살아가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제기들은 마치 음모론의 우스운 털 하나처럼 우스며 지나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아귀 하나하나가 이러한 결론을 가르키고 있다. 인간이 가축이 되는 시대를 말이다. 

 

[지금 세계]라는 본서는 결코 음모론과는 1도 관계가 없는 저작이다. 그럼에도 어느 관점으로도 정보는 해석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주기에 좋을 만한 이런 리뷰를 써보았다. 이 리뷰에서 언급한 정보들은 본서가 보여주는 숱한 정보들에 일부의 일부도 안되는 것들이다. 이 시대를 말하는 정보들을 둘러보고 다시 그 정보 위에 새로이 접수되는 정보들을 쌓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가짜뉴스라는 프레임으로 진실이 덮히고 있는 가당치도 않는 일들이 많았다. 미국 정부에서는 조지오웰의 [1984]에서와 같은 '진실부'라는 부서까지 등장할 정도이다. 시대를 만만히 보다가는 시대에 당하고 말 것이다. 시대를 바로 보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지금 세계]를 바로 본다해서 반드시 미래를 예비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을 알아야, 지금 이 순간을 바로 딛고 서야, 이 순간에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시대를 논하는 저작들에는 관심이 절실히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지금 이 시대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라면 몇 번이고 거듭 읽어봐도 좋을 책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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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의식 - 환각과 우연을 넘어서 초월의식 1
스타니슬라프 그로프 지음, 유기천 옮김 / 정신세계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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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심령적 위기라고 언급한 내용은 누구나 인생을 살며 맞이하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삶에 대한 총체적인 회의... 주로 예전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인생무상을 이야기 하는 대사가 등장하던 그런 상황을 이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누구나의 삶에서 반드시라고 할만큼 겪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배우자의 배반, 자식의 실망스런 일탈, 시종일관하던 일의 전도(사업의 실패 등), 믿어마지 않던 동료나 친구 후배 형제의 배신 또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사고나 사건 등으로 인한 트라우마 상태 등 우리 누구나가 한번쯤 삶의 여정에서 겪을 법한 과정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누구나 그 삶의 과정 속에서 방황하고 선택하며 후회하거나 뿌듯해할 감정적 기복과 교훈을 얻을 것이다.

 

이러한 여정을 저자는 우리가 진화 내지는 각성할 기회라 말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며 전체의 내용이 저자 자신과 저자의 전 부인의 체험이 주를 이루며 다분히 개인적인 체험의 기록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었다. 책을 읽는 중도에 지루해 읽기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완독을 마친 지금 인생 전체가 거대한 교육의 장이라는 인생의 모든 체험과 행위가 가르침의 도상 위에 있는 과정이라는 저자의 관점이 새로이 다가오는 것 같다. 우리가 심령적 위기의 상태에 놓이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생의 의미를 일러주는 우연의 연속이 거듭된다고 한다. 우리가 모태에 잉태되어 있던 순간과 출생 과정 그리고 출생 이후의 의식차원에서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모든 여정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에서 지닌 자각 못할 만큼 뿌리 깊은 정서적 관계적 문제들이 치유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전생을 기억하거나 우리로서는 정신질환으로 밖에 인식되지 않는 상황까지도 우리 자신을 치유하고 각성시키는 여정이 된다고 한다.

 

사실 전생 퇴행이 우리의 내외적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치유할 수 있는 경험이 될 수 있음은 이미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가 문제라 인식하던 부분들이 우리가 그러한 문제들 속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사회에 대한 생에 대한 통찰과 지혜를 얻을 기회라는 것 역시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관점이다.

 

하지만 그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이 책이 인생의 어느 순간 이를테면 이 책의 저자가 말한 심령적 위기 상태에 놓인 누군가에게 주어진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여래장의 의미나 불성론의 의의나 또 이태영님의 <요가>에 수록된 쉬바상히타 3장 74절의 카야비우하(kayavy uha)에 대한 주석(전생에 지은 업으로 인해 내생에 숙명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육체를 만들어 미리 업의 결과를 모두 경험하게 하여 다시 태어날 필요가 없게 한다)에 대한 진정한 심의가 다시 와닿는 계기로 작용할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그 순간이 생의 고난들로 부터 새로이 눈뜨며 피어날 계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스티븐 휠러씨의 <이것이 영지주의다>를 보자면 영지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는 것 같았다. 하나는 불교나 요가의 깨달음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측면, 또 하나는 백마법의 멜카바 명상처럼 단계적으로 우리의 의식을 상승시켜 나가는 가르침을 담은 환영의 측면...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적극적 심상화'등의 의미나 꿈과 환상 등을 분석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라 여겨진다.

 

마치 영화처럼 -[머쉬니스트]나 [매치스틱맨]과 같은 영화들처럼- 우리 내면에 있는 것이([슈퍼내추럴]이라는 저작에 근거하자면 더욱 와닿겠지만)... 그것이 아무리 심대한 혼란과 아픔을 통해야 하는 것일지라도 끝내 우리를 치유와 성장으로 이끄는 것인가 보다.

 

그래도 많이 아프고 싶지만은 않은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곧 인류 전체가 심령적 위기 상황에 놓이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리라 짐작된다. 아마도...

 

 

[환각과 우연을 넘어서]가 제목을 달리해 개정판이 나왔길래 기존의 리뷰를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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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의식 2 - 코스믹 게임 초월의식 2
스타니슬라프 그로프 지음, 김우종 옮김 / 정신세계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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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믹 게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을 [초월의식2]라는 새제목을 달아 개정판을 출간하였기에 다시 읽어보고 리뷰를 남긴다. [초월의식] 1권과 본서는 1권이 [환각과 우연을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었던 책이고 각기 개별적인 책을 정신세계사측이 1권과 2권으로 연계지어 다시 재출간했다. [초월의식2]는 1권을 읽지 않더라도 충분히 독자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1권에 질려버린 분들이라도 그 정도로 지루하고 개인사적인 이야기만이 아니니 본서를 꼭 읽어보셨으면 싶다.

 

[초월의식] 1권은 굉장히 개인사적으로 전개되고 초개아적인 내용이 '내포'되어있는 자전적인 이야기라 흥미를 갖던 분들도 굉장히 지루해서 독서를 중도에 포기할 수도 있는 책이다. 하지만 예전 출간 제목이 [코스믹 게임]이었던 본서는 1권과 연관짓지 않더라도 초개아 심리학이랄까 초월 심리학이랄까를 직설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 책에 애정을 갖고 읽었던 사람으로 굳이 왜 독자적인 두 책을 하나의 시리즈로 만들었는지 조금 애석하기도 하다. 1권을 읽고 질려버린 분들이 이 책도 마찬가지이리라 생각하고 관심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본서는 기존의 영성서들과 맥락을 같이 하는 가르침들이 담겨있다. 현대의 초개아심리학은 심리학의 한 지류이기도 하겠지만 그 연구의 시작점이 개인심리가 아닌 개인을 초월한 아마도 집단무의식이랄까 영성이랄까가 연구의 대상이기에 본서가 다루는 내용 역시 과학과 심리학적인 내용이기도 하면서 영성이 분석의 대상이다. 물론 무신론자나 유물론적인 견해를 갖는 분들에게는 비판도 아닌 비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내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카발라라던가 현존하는 영성서들에 관심이 깊던 분들에게는 깊은 호감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저작이다. 

 

개아는 전체와 같고 전체가 부분을 포함하듯 부분 역시 전체를 담고 있다는 내용이나 전체가 자신을 한정 지으며 개체아로서의 삶이 생겨난다는 내용들은 마치 홀로그램 우주론이나 카발라의 짐줌을 이야기하는 것도 같다. 악은 전체를 완성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며 악과 고통은 전체를 경험하기 위해 선과 전체성과 함께 양극적으로 이어져 있는 하나이다라는 가르침은 동양의 불교철학, 역철학, 카발라 등과 함께 모든 영성서들의 근본 주제이기도 하다. 악은 이야기를 풍부하게 하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라는 이야기에도 적극 공감이 갈수밖에 없다. 주산기(출산*탄생 전후) 경험이나 윤회마저도 본서의 담론의 대상이다. 절대와 무한, 완전 등으로 수식되는 절대자가 자신 안에서 한계를 지으며 세계를 창조한데는 의도와 바람이 있을 것이며 그렇기에 근원적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이 한정된 세계에서의 경험도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도록 하는 전개도 나쁘지 않다. 무한, 절대의 본래 자신과 합일하는 것은 생명체의 근본 목적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조와 귀환의 도상에서는 경험하고나서 돌아가는 것이 바른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본서는 영성에 1도 관심이 없는 유물론적 관점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기대는 하기 힘든 책이다. 다만 명상과 영성에 대한 관심이 깊은 분들 중 심리학자의 영성 이야기는 어떻게 다를까 궁금하다는 분들이라면 관심을 가질만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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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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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좋아하던 시절이 오래오래전엔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문학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생활을 해왔다. 순수문학을 읽던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고 읽는다해도 장르문학에 한정되어있었다. 그러다 최근 들어 순수문학을 그것도 고전들을 다시 읽어보고 있는데 그 감상이 여운이 깊다. 다시금 문학 소년이 아니 문학 중년이 되는 느낌이다.

 

새움의 움라우트 세계문학 시리즈는 [이방인], [노인과 바다] 이후로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다. 앞서 두 권은 서평단 모집 때 눈여겨 보았다가 구매해서 읽고 리뷰를 남겼고 [위대한 개츠비]는 그 두 권으로 익게 된 이정서 번역가님에 대한 신뢰가 커져서 서평단 응모로 리뷰를 남길 기회를 얻게 되었다.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 읽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번역가님의 문단 하단의 짧은 기록들을 보며 이 소설을 다른 번역본으로 보았더라면 도대체 내게 남은 개츠비에 대한 인상은 얼마나 오해의 층층이었을지 생각하니 다행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윌슨을 향한 언급들을 개츠비로 판단한다거나 하는 그 단순한 것만으로도 인상의 빛깔이 전혀 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안타깝지만 한심한 졸부로만 개츠비에 대한 인상이 남게 되었다면 이 소설을 읽은 의의는 무엇이 되었을까? 

 

닉의 시선으로 전해지는 개츠비이기에 오역되지 않은 원작대로의 개츠비에 대한 인상은 닉의 감상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개츠비에 대해 닉의 시선은 그의 자산을 보며 느끼는 선망과 그의 출신과 자신의 출신을 비교하며 드러나는 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모든 것을 자수성가한 개츠비에 대한 나름의 인정하는 심리와 당시에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는 밀주 커넥션에 연루되어 개츠비가 부를 축적한 것을 알고서 느끼는 다소의 경멸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있는 것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닉은 개츠비에게 깊은 호감을 느끼고 있기도 하다. 그런 그의 시선이 있기에 독자 역시 그의 시선으로 인해 개츠비라는 한 사람에 대한 인상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닉의 정서가 반영되지 않았다면 다를까 싶지만 이 작품에서의 개츠비는 참으로 양가적인 사람이 아닌가 싶다. 소설을 퍼즐처럼 조각을 이어보자면 그의 아버지가 보여준 그의 옛 애장소설의 기록으로 보아 개츠비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며 미래를 꿈꾸던 소년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참상으로 뛰어든 그 시대의 무거운 한 장면을 감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전쟁 속에서도 사랑에 빠져버리고 오랜 세월을 한 여인에게 연연하는 순순한 열정을 품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반면에 그는 전쟁 후의 특혜로 가게 된 옥스퍼드 대학 생활 몇 개월을 나름 자신을 부각시키는데 활용해 일자리를 찾아낼 줄도 알고 평판을 일구어 보려고도 하는 기회주의자이기도 하다. (역자 이정서님은 개츠비가 옥스포드 맨이라고 그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지만 울프심에게 그가 옥스포드 출신임을 말할 사람은 그다지 따로 찾을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기회가 왔을 때 자신의 이력을 이용하지 못하는 자라 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옳고 그름이라는 관점에서 터부시하며 뿌리치지 않는 어떤 면에서는 진취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잠자던 사람을 깨워 데이지와의 자리에서 분위기를 자아내려 연주케하는 면모로 보아 자신의 의도가 우선이며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잊고마는 독선도 있는 인물이다.

 

그는 기회주의자이며 성취자이기도 하고 미래를 꿈꾸던 소년이었고 한 사람만을 향하는 불타는 사랑을 안은 열정가이기도 하다. 돈을 추구하는 인물로만 보이기도하지만 그를 떠난 데이지와의 신분차이가 그에게 금전적 성취를 우선하게 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닉을 태운 차 안에서의 그의 부산함은 그가 부를 축적한 졸부나 부호로만 보이지 않게 하는 유치한 이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또 그토록 잊지 못하던 데이지와의 재회를 닉의 집에서 갖게 되었을 때 그의 모습은 한 소녀에게 빠져버린 소년의 심정과도 비슷해 보였다. 재회한 그녀에게 아직 자신이 부족해 보이지는 않을까 주저하는 그는 벽에 걸린 시계에 머리를 기대다가 허둥거린다. 그 시계가 마치 깨어진 것만 같이 여기는 것 같다는 닉의 표현은 개츠비가 데이지를 대하는 그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고 있음을 얘기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의 양가적인 면들과 그 속에서 두드러지는 그 순수함이 미국인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위대한 개츠비]를 사랑하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런 면들이 현시대의 유일한 대제국 미국의 모습과 미국인들을 대변해 준다고 미국인 자신들이 여길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세계 경찰을 자처하던 미국, 호기롭게 달러패권으로 독주하는 미국, 그러면서도 인종갈등과 총기사고, 마약으로 점철되고 있는 미국, 또 세계경찰이라면서도 일루미나티 주축들의 근거지라는 의혹을 사고 있는 미국, 그러면서도 한없이 자유를 사랑하고 성장하려 하고 아직까지도 아메리칸 드림은 있다고 믿어마지 않는 미국인들의 모습이 개츠비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보였다. 

 

데이지는 어떤가? 피로연 당일 신부가 (아마도 개츠비가 보낸) 편지를 움켜쥐고 만취한 채 자신을 욕조에 담궈달라고 말하며 눈물 흘리던 그녀, 재회한 개츠비를 연이어 찾아가던 그녀, 자신의 아이를 안고 개츠비를 보여주던 그녀... 그런 그녀가 개츠비에게 진심이 아니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끝내 우연이었는지 자신의 남편과 바람이 난 여성을 개츠비와 동승한 차로 치어 죽인 그녀에게 개츠비는 어느새 연인에서 자신의 죄를 목격한 목격자로 자리바꿈 해 버렸을 것이다. 개츠비를 보는 순간마다 그녀는 자신의 죄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녀의 머리에 카인처럼 하나님의 인이 더해지지 않고서는 그녀는 결코 개츠비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개츠비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개츠비는 그녀에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개츠비가 매일을 화려한 파티를 열어 대중들을 불러모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는 안스러울 정도이다. 개츠비의 삶은 작가가 닉의 시선으로 보여준 외연만큼이나 그 심연 또한 양극적인 면을 띠고 있다. 이 소설의 독자들에게 개츠비는 어떤 감상을 안겨주는 인물이기를 피츠제럴드는 바란 것일까?

 

피츠제럴드는 퍼즐 조각 하나하나를 나열하는 듯하다가 어느새 퍼즐을 맞춰놓는 뛰어난 문장력을 보여준다. 자못 일상적인 이야기만 서술하는가 싶다가 소설의 끝에 이르르면 이 얼마나 뛰어난 구성의 소설인가에 감탄하고 말게 하는 것이다. 인물 한 명 한 명도 허투로 등장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탐 뷰캐넌이 [오셀로]의 이아고 같은 역할을 하게 될 줄도 짐작할 수 없었고 그저 주변 이야기일뿐인줄 알았던 탐의 불륜 이야기가 이렇게 대미에 영향을 줄지도 몰랐다. 더구나 윌슨이 결말을 가져올지는 예상조차 못했다. 그의 이름이나마 기억하게 될 존재일지 짐작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개츠비의 매력 만큼이나 소설의 얽개의 치밀함도 이 소설을 잊지 못하게 할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츠비를 오해 하지 않음으로서 소설에 대한 감상이 온전했다고 생각된다. [위대한 개츠비]는 반드시 새움의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으로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이정서 번역가님의 번역서 중에서도 [위대한 개츠비]는 반드시 이 책이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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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2-04-25 08: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츠비는 여러 판본을 구해서 읽었는데 하나 더 늘어날 예정이 되어버렸네요 ㅎ 언제나 조금씩 다르면서도 비슷한 쓸쓸함을 느끼면서 때때로 다시 읽습니다

이하라 2022-04-25 08:29   좋아요 2 | URL
개츠비에 대한 인상이 깊으셨군요. 저는 이 책으로 개츠비를 처음 만났는데 첫인상이 강렬한 소설이었습니다. 저도 때때로 읽게 될 것 같습니다.

새파랑 2022-04-25 1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콧피츠제럴드는 개츠비도 좋은데 단편도 좋더라구요 ^^ 다시 문학소년이 되신걸 축하드립니다~!!

이하라 2022-04-25 12:58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피츠제럴드의 단편이라면 기대되네요. 구성력이 남다른 작가 같아서 다른 소설들도 완전 기대됩니다.^^

페크pek0501 2022-04-28 17: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영화로도 보고 소설로도 읽었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은 사랑이란 대체 무엇일까 하는 거예요.
사랑 받을 만한 자격도 없어 보이는 이기적이고 가벼운 생각으로 사는 듯한 여성의 무엇을 개츠비는 사랑했을까요.
그 자체 모든 걸 사랑했을까요.
사랑은 그저 환상의 산물이었는지 몰라요. 잘 모르겠어요. 책을 두 번이나 읽었는데 말이죠.

이하라 2022-04-28 18:29   좋아요 2 | URL
저는 사랑이야기로서 보다는 쓸쓸한 한 남자의
생의 한 대목과 죽음에 더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데이지의 매정함 때문에도 그렇겠지만 개츠비의 연연함도
그의 마지막도 너무나 고독하게만 느껴지더군요.
그의 외로운 생과 죽음이 사랑이야기를 압도해 버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숫자에 속지 않고 숫자 읽는 법 - 뉴스의 오류를 간파하고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가이드
톰 치버스.데이비드 치버스 지음, 김성훈 옮김 / 김영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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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통계를 통한 거짓말이라거나 거짓 통계를 통한 대중의 판단 착오를 불러오려 시도하는 경우는 아직까지는 현 정권인 문재인 정권 내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초중반의 통계 기준을 호도해서 취업 증가률을 조작한 사례와 얼마전 무역 수지 적자인 상태를 통계 기준을 조작해 무역흑자로 호도한 사례 그리고 부동산가 상승률 통계를 조작한 사례가 대표적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통계 조작의 사례는 문재인 정권에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박근혜 정부 시절 메르스 대응에서도 이러한 통계 조작으로 우리나라의 메르스 대응이 최적절한 것으로 호도하는 기사가 있었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 시절의 통계만을 보면 대한민국 창건이래 가장 살기 좋고 국민들이 만족하며 살던 시절이 전두환 정권 시절이라는 통계도 존재 한다. 해당 기사는 SNS 등에서 아직까지 유포되며 독재에 가까운 시절이 호도되고 있기도 하다. 

 

문재인 정권은 가짜뉴스라는 프레임을 제시해 대중이 의심해 볼만한 사안에 대해서도 가짜뉴스라는 관점을 견지하며 정권의 주장 외에는 귀를 닫게 대중심리를 통제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위의 사례와 백신 관련 가짜 뉴스 프레임은 시간이 지나고 보니 오히려 정권의 주장과 제시가 오히려 가짜였음을 증거하게 되었다. 

 

이 시대는 정권과 대통령의 말도 검증이 필요한 시대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의 정권들 중 검증이 필요없을 정도로 명백한 근거에 입각해 사실만을 전달하고 주장했던 정권이 몇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글로벌 뉴스 등을 보면 이건 비단 한국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기도 하다. 각국 대부분의 정권들이 자기 편향의 주장과 통계조작을 통해 대중심리 통제를 시도하고 그게 또 성공하는 경우도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이 시대는 자국의 정부이던 국제기구의 공표이던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통계와 숫자에 대한 세심한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본서와 같은 통계와 숫자에 대한 저작들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본서 [숫자에 속지 않고 숫자 읽는 법] 외에도 [위험한 숫자들], [숫자는 거짓말을 한다], [다크 데이터] 등이 통계의 오류와 호도, 거짓에 대한 눈을 밝혀주는 책일 것이다.  본서 보다 [다크 데이터] 라는 책을 앞서 읽었는데, 두 권 다 통계나 수학과는 거리가 먼 나 같은 사람에게는 주제에 대한 관심을 독해력이 따라가 주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본서는 전문적인 정보는 박스에 담아 매 장 마다 분리해 다루며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기도 한데, 굳이 안읽을 정도로 어렵게 서술하고 있지는 않다. 

 

필자의 재치와 어려운 개념을 쉽게 전하는 문장력이 책 전체를 평이하고 읽기 쉽도록 서술하고 있다. 다만 서술이 너무도 평이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저자 나름대로는 일상에서나 대중적인 이슈에서 사례를 찾기도 하고 전문적이지만 관심이 갈수 있는 의학 사례를 들기도 한다. 하지만 책에 대한 관심이 전문적인 이야기를 쉽게 전달해 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각 주제로 지속되지 않는 느낌이다. 정치, 범죄, 의료, 사망, 경제지수, 파산과 회생, 올림픽이나 월드컵의 사례 등이 좀더 강렬하고 자극적으로 주어졌다면 인상 깊은 통계 오류 저작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과학분야에서 우연히 일어날 확률인 P값을 0.05 이하로 제어하려는 p해킹을 해서 논문 등의 신뢰성을 조작해 내는 사례나 생존자 편향의 예로 든 세계대전 시기의 전투기에 갑피를 덧댄 사례는 인상 깊을만 했는데, 이미 [다크 데이터]라는 저작을 통해 접했었기에 본서만의 특징으로 기억에 남는 문장이 적은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저자는 p값과 충돌편향(이상한 결과를 던져 넣어 상관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거나 가상의 상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기자들이 일반적으로 저지르는 통계실수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말하고 있다. 나로서는 통계와 숫자에 대해 관심을 가장 많이 갖는 사람들은 학술서나 전문 연구 결과에서의 오류를 알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정부 발표와 경제지수, 기업공개 등에서의 호도들이 있는가가 더 관심이 있어서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사례들만 골라서 피해가며 서술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는 정부나 사회에 굉장히 애착이 깊던가 저자가 사는 국가에서는 그런 분야에서 오히려 가짜뉴스가 적기 때문에 그런 분야에 대한 문제의식이 본서에서 크게 담겨 있지 않은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본서의 내용만으로는 저자가 극보수이고 현재 영국의 보리스 총리가 보수당 출신인데다 12년이 되도록 보수당에서 총리들이 연이어 정권을 잡다보니 정당의 정책이나 발표에 만족해서 딱히 정부 발표에 통계조작 등에 대한 사례는 등장하지 않고 있는가 싶기도 했다. 물론 영국이 의외로 정치적인 발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라여서 마음껏 정부 사례를 들 수 없어서일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저자가 극보수일 거라는 의혹이 든 이유는 저자가 예를 든 자폐스펙트럼을 겪는 아이들의 뇌에서 고농도의 알루미늄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언급하며 대뜸 그런 뉴스는 백신에 대한 반발만을 불러올뿐이라며 분노하는 대목에서 였다. 백신에 알루미늄 성분이 있다는 이유로 자녀의 백신 접종을 꺼리는 사례가 늘어난데 대해 저자는 자폐 상태의 뇌에서 고농도의 알루미늄이 발견되었다는 연구에 대해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연구가 백신 접종률을 낮추고자 기획된 연구라는 근거도 없고 연구 내용만 보면 충분히 유의미한 연구이고 연구 결과가 그렇다면 백신에서 알루미늄 첨가제를 제거하는 방법을 찾으려 하는 게 맞을 텐데도 말이다. 학자들의 아집이 더 가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서의 주제와 관점은 충분히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제 또 누구나 관심을 가져본 주제이기도 할 것이다. 통계의 조작 방식과 통계의 집요한 오류를 읽어내는 눈은 이 시대에 반드시 필요할 것이기에 통계 관련 저작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나에게 절대적인 필독서와도 같을 수 있다. 같은 주제의 책들이 다양히 출간되어있으니 비교해가며 두루 읽어보는 재미도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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