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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수이 할머니는 수이 걱정을 하며 뜬 눈으로 뒤척이다 선잠이 드셨다. 그때 꿈속에서 유로가 나타났다.


-할머니. 할머니. 큰일이에요. 수이가 다쳤어요. 빨리 수이 방에 가보세요. 어서요.


-뭐라구. 우리 수이가?


수이 할머니는 유로의 말에 놀라 잠에서 깨었다. 불길한 꿈이다 싶으셔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되겠다 생각했다. 수이 방으로 가 방문을 열자 방바닥에 흥건하게 피가 흘러 있었고 수이가 팔에 상처를 낸 채 쓰러져 있었다.


-아이고. 수이야. 수이야. 



18


수이는 병원 침대에 뉘여 응급실로 실려갈 때쯤 깨었다. 몽롱한 의식으로 힘없이 가늘게 눈을 뜨자 하얀 천정이 보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유로가 자신이 누운 침대가 가는 방향을 따라 침대 옆에서 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유로 오빠?


-수이야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내가 널 지켜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반드시 널 지켜낼 거야.


수이는 유로의 말에 안심이 돼 다시 스르륵 눈이 감겼다. 



19


수이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멤버들과 고정도 대표가 문병을 왔다가 고 대표가 수이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떠났다.


-언니 기운 내. 


이연이가 병상에 누워 천정만 바라보고 있는 수이를 보고 무슨 말이든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태어나 처음 겪는 일들에 이연이 역시 당황스러웠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기운 내라는 한마디를 하고는 수이를 바라봤다. 


효윤이가 무표정하게 천정만 바라보는 수이를 보다가 다급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


-수이 언니, 언니가 리더고 메인보컬인데 이러면 우린 어떡해. 언니가 기운 내고 앞날을 생각해야지.


-지금은 그런 말할 때가 아니야. 효윤아 언니 곧 기운 차리면 다 제자리를 찾을 거야.


-맞아 효윤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우리 아빠도 그랬어.


소미가 효윤을 나무라고 다독이자 선희도 거들었다. 하지만 선희의 마지막 말에 수이는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수 있을까? 유로 오빠가 시간이 지난다고 살아 돌아올 수 있다고?


도무지 어떻게 시간이 지난다고 괜찮아질 수 있다는 건지 수이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얘들아 미안한데 나 눈 좀 붙일게. 너네들도 이제 그만 돌아가야지.


-어. 그래. 언니 좀 쉬어야지. 


-언니 그럼 나중에 또 올게.


-언니, 우린 언니 믿어. 힘내.


이연이와 소미, 효윤이와 선희는 불안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돌아섰다.


M.G.I 데뷔를 기껏 6~7개월 앞둔 시점이라 아이들 모두가 이번 일로 불안해했다. 그래도 평소 수이의 태도가 데뷔에도 가수로서의 삶을 맞이하기 위함에도 얼마나 진지한지를 아는 아이들이었기에 수이에 대한 믿음으로 그 불안을 떨치려 했다. 앨범 재킷 사진까지 찍어두었는데 수이가 자살기도를 하다니 아이들로서는 믿기도 힘들고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 고정도 대표도 아이들 모두의 부모님도... 어른들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 괜찮다고 하니까 소녀들은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멤버들이 돌아가자 수이는 눈을 떴다. 밤을 지새운 수이 할머니가 침대 발치에서 의자에 앉아 졸고 계셨다. 


=오빠 내 곁에 있어? 있으면 대답 좀 해 봐. 오빠가 날 구한 거야... 왜 그랬어? 그냥 오빠 곁으로 가고 싶은데. 이젠 모든 게 의미가 없어졌어. 오빠와 함께 일 때는 모든 게 다 살아있는 것만 같았는데 오빠가 떠나면서 모두 죽어버린 것만 같아. 죽음 속에서 나만 살아있는 게 너무 벅차.


수이가 누운 침대 머리맡에 서서 수이의 생각을 듣고 있던 유로는 심장이 깨어지는 것만 같았다. 


-수이야. 난 니 곁에 있어. 그러니까 넌 니 삶을 니 목표를 버릴 필요 없어. 내가 언제까지나 널 지켜 줄 거야. 그리고 넌 너의 삶을 살아야 해. 만질 수는 없어도 나 항상 널 바라보고 있어. 이것만으로도 난 행복해, 힘이나. 그러니까 너도 힘을 내. 죽었어도 난 살아있으니까. 어쩌면 죽음이란 건 마음속에만 있는 건지도 몰라. 모두 죽어버린 것 같다는 그 심정을 이겨내야 해. 내가 널 꼭 다시 살아있는 게 행복하다는 심정으로 만들어 줄게.



20 


금발의 수호천사를 유로가 다시 나타나 달라고 불렀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유로는 한편으론 두렵고 한편으론 분노했고 한편으론 서글펐다.


-그 마법써클이 자연적으로 생기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의례마법으로 만들어지는 거라셨는데. 그렇다면 누군가가 수이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렇다기엔 계속 생겼다 없어지고 생겼다 없어지는 게 좀 의아하긴 해. 단정적으로 말해야 한다면 누군가 악의를 품고 행하는 흑마술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만 말이야.


-흑마술을 걸고 있는 게 누군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우리 권한으로는 없다고 봐야지. 너나 나나 수호해야 하는 대상의 어느 반경 이상은 벗어나지 못하는 게 원칙이니까.


-원칙을 깬다면요?


금발의 수호천사는 부정적인 답변을 했지만 그 대답에서 유로는 오히려 일말의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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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밤늦게 죄송해요. 이제 그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고마워, 학생. 조심해서 가. 


유향은 수이를 숙소가 아닌 수이네 집에 바래다주고 수이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중이다. 수이 할머니는 늦은 시간이라 여자만 있는 집에서 간다는 걸 만류할 수도 없고 해서 문 밖까지만 마중을 했다.


수이는 유향이 앉힌 소파에서 옆으로 쓰러져 있다가 나가는 유향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유향은 수이가 걱정됐지만 수이 본인 집에서 수이가 안정을 찾으리라 생각했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돼.


수이 할머니가 수이를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해 하다가 꺼낸 말씀이다.


수이는 대답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수이가 방문을 닫자 한참을 '쟤는 이제 어쩌나'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어떤 말로도 위로할 길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푹 자고 나면 조금은 낫겠지. 


할머니는 혼잣말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렇게 빈 공간에 멍한 수이의 심정을 바라보는 듯 유로가 서있었다.



16 


수이는 방의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작은 무드 등 조명 옆에서 멍하니 화장대의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말없이 주르륵 눈물을 흐렸다. 그러다 소리내 웃었다.


=왜 난 오빠와 헤어지려고 했을까? 내가 그날 헤어지려고 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날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유로 오빠도 죽지 않았을 거야. 이령이 말이 맞아. 내가 오빨 죽인 거야. 내가 그런 거야. 


수이의 뒤에서 거울에 비친 수이의 얼굴을 보고 있던 유로는 수이가 그렇게 생각하자 소리쳤다.


-아니야. 수이야. 니 탓이 아니야. 언제나처럼 널 만나러 가는 동안 난 행복했어. 니가 헤어지려 말하려 했다지만 그렇게 됐다 해도 우린 언제나처럼 금방 다시 만났을 거야. 니 탓이 아니야. 니 탓이 아니라고. 


-시끄러우니까 소리 좀 낮춰!


유로 옆에 하얀 슈트 차림의 금발 외국인이 나타났다.


-누구야! 


놀란 유로가 다시 소리쳤다. 


-시끄럽다니까. 누구 귀먹은 줄 알아. 소리 좀 낮추라고. 온 차원이 다 니 외침뿐인 것 같잖아! 도대체 어떻게 한 영혼의 목소리가 이렇게 큰 거야.


파란 눈동자의 금발 외국인이 그렇게 말하자 유로는 진정하고 다시 조용히 물었다.


-도대체 누구세요.


-나도 너처럼 수이를 수호하는 수호천사야!


-네? 그럼 여태까지 어디 계신 건데요.


-너처럼 수이 곁에 있지만 너와 나는 서로 조금 다른 차원의 공간에 있어. 천국과 너희 천당측의 규약으로 너랑 나는 자주 접촉할 수 없어. 하지만 니가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늘 나 역시 수이 곁에 있어.


-이제까지 계속 수호령이셨나요?


-난 수 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을 수호해 왔지. 하지만 수호령이 아니라 수호천사야. 너희와는 급이 다르지.


금발의 수호천사가 턱을 약간 치켜들며 다소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유로는 그의 거만함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심정을 가져다주는 듯했다. 믿을만한 수호천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그럼 말씀해 보세요. 수이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이는 지금 평소와 달라. 어떻게의 문제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뤄져야 해. 그렇지 않으면 수이가 아주 위험할 거야.


-지금 평소 심정이랑 다른 건 저도 알지만 이주 위험하다는 말씀은.. 도대체 뭐죠? 미래를 보시나요.


-미래의 여러 경로들을 보지만 그것도 모든 미래는 아니야. 하지만 내가 본 미래를 가져오는 건 비단 수이의 현재 심리만이 아니야.


그때 침대에서 일어난 수이가 조금 어두운 무드 등 불빛에 의지해 거울을 바라보며 조금씩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수이의 머리 위에서 원 안에 역삼각형 위 두각을 자르는 듯한 X표가 그려진 마법써클이 생겨났다. 


-저거. 저게 문제야.


유로가 그의 말에 다시 수이를 돌아봤다. 수이 머리 위의 마법써클을 발견한 유로는 다급해졌다. 


-저게 도대체 뭐죠? 저게 수이를 위험에 빠뜨리는 건가요?


-오랜 내 경험으로 봐서 저건 유사 이래 존재해온 마법하고는 조금 다른 방식의 마법써클 같아. 이제까지 매번 저거보다는 덜 위험해 보이는 그저 내적 혼란이나 이별을 불러오는 힘이 느껴지는 마법써클만이 수이 머리 위로 떠오르다가 사라지고 떠오르다가 사라졌었어. 그러다 며칠 전 죽음을 부르는 파멸적인 힘이 보이는 마법써클이 나타나더니 이상하게 그것도 금세 사라지더라구. 근데 오늘만 해도 벌써 저 문양의 마법써클이 두 번째 나타나는 거야.


-나타났다 사라지면 문제가 없는 건가요? 


-그렇지도 않아. 금세 그 힘이 사라지지는 않거든. 마법써클만 사라지면 그 이후 안정 시키는 건 수호천사의 몫이니까. 그리고 니 몫의 일이기도 하구.


수호천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수이는 화장대 앞에 무릎을 꿇고서 엉성하게 주먹을 쥐고는 손날 부분으로 거울을 쳤다. 거울이 조금 깨지기는 했지만 거울에서 떨어져 나오지는 않자 옆의 화장품을 들고 거울을 쳤다. 


-안돼. 수이야. 뭐 하는 짓이야. 그만둬. 제발 그만 좀 해.


유로가 다급히 소리치고 있을 때 금발의 수호천사가 마법써클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손가락으로부터 마법써클에 빛덩어리가 던져지더니 붉게 타오르던 마법써클이 한 바퀴 회전하며 파란색으로 바꼈다. 하지만 수이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조각난 거울 조각 하나를 움켜쥐더니 자신의 손목으로 가져갔다. 


유로가 '이제서야 떠오르다니' 하면서 둔한 자신을 탓하며 마법써클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자 유로의 손바닥으로부터 푸른빛이 외곽을 감돌고 있는 새하얀 빛의 줄기가 터져 나오며 마법써클을 깼다. 그런데도 수이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하얀 팔목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오빠, 나도 오빠 곁으로 갈래. 내가 미안하다고..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고 오빠한테 꼭 말하고 싶어... 사랑해 유로 오빠.


피가 뿜어져 나오는 팔목을 멍한 채 바라보던 수이는 가만히 그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유로와 만날 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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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유로는 한쪽 무릎을 꿇고 붉은 도복의 노인이 주는 봉신 명부를 받았다. 명부를 받자 명부가 빛무리로 변하며 유로를 에워싸더니 유로의 몸으로 스며들듯이 감싸고는 가야 시대 철갑옷의 형태를 띠다가 검은색 수트로 변했다.


-너는 이제 명실상부한 신계의 봉신을 받은 수호령이니라. 언젠가 수호신이 될 수도 있을 게다.


-수호신이요? 그건 수호령이랑 다른가요? 


-능력치와 권한이 다르다. 먼 이야기이니 지금은 그 정도만 알고 있거라.


유로는 수호령이든 수호신이든 그런 건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이젠 수이를 지켜줄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면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때 하얀 수트의 중년 천사는 한창 짜증이나 있었다. 


-이건 상도덕에 어긋나죠. 무슨 원칙도 없이 영혼이 살아있을 때 가장 아끼던 사람을 지켜주게 하겠다면서 수호천사 아니 수호령 지위까지 급임명해 버리고.. 이게 도의에 맞는 일입니까?


-규약에 어긋난 것이 있는가? 우리가 이 아이를 강제로 납치라도 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영혼을 홀려 강제 귀의라도 시켰다는 말인가? 


-그런 건 아니지만 원칙이 없잖아요 원칙이. 우리 천국측과 그쪽 천당측이 맺은 규약으로도 인간들 시간으로 49일 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영혼이 자신이 갈 길을 선택할 시간을 주기로 해놓고 지금 이게 뭡니까? 저더러 호객행위를 한다더니 그쪽 분들 처사는 말도 안되는 거 아닙니까? 죽자 마자 수호천사 아니 수호령 지위를 물건 강매하듯이 넘겨 버리고 말이에요.


천사의 말에 붉은 도복의 노인이 경우를 벗어난 것이 없음을 짚었지만 천사는 더 볼멘소리로 원칙을 따지려 했다.


-규약에는 영혼 자신의 선택에 따른다고 하지 않나? 이젠 자네 참견은 끝났네. 얘는 이제 우리 관할의 수호령이니 자네는 이만 돌아가시게.


-네. 일단은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그 멈춰진 공간에서 사라졌다. 



14


내리는 비도 멈춰져있고 달리는 트럭도 멈춰있으며 도로를 향해가고 있는 수이도 걷던 모습 그대로 멈춰져 있었다. 그 멈춰진 공간에 다시 선 젊은 여성 차사가 유로를 향해 지적했다.


-수호령이라고 자신이 맡은 사람의 행동에 다 참견할 수는 없는 거야. 지켜보다가 그 사람이 위험해지는 순간에 한 해서 도와야 해.


-그 말을 몇 번째 하세요. 오른쪽 귀랑 왼쪽 귀랑 개통될 지경이에요. 주의 사항과 임무는 이미 다 전달하셨잖아요. 이제 저 혼자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 그렇구나. 너도 이제 엄연한 수호령이니 알아서 해야지.


-근데 계속 이 옷만 입고 있어야 하나요? 


-옷은 네가 원하는 어떤 옷으로도 변하는 거야. 그냥 생각만 하면 돼. 


유로는 그 말을 듣고 동방신기의 유노윤호가 입었던 무대의상을 떠올려 보았다.


-와. 이게 진짜 되네.


-니가 가수냐? 공연이나 패션쇼할 일 없으니까. 맡은 직무나 잘 챙겨.


의상이 뜻대로 바뀌는 것에 유로가 신기해하자. 차사 누나는 직위를 처음 받는 영혼들마다 왜 다 이렇게 한심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 가면 넌 바로 이 세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멍 때리다 소중한 사람 다치게 하지 마라, 알겠니. 


-예. 


그리고 젊은 차사 누나가 사라지자 공간 속에 멈춰있던 비가 다시 내렸다. 멈춰있던 수이도 트럭이 달려오는 도로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다시 제자리를 찾자 수이 머리 위에 보이던 그 마법써클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유로는 잽싸게 수이의 뒤에서 수이를 안고 도로에서 물러났다. 수이는 몸이 저절로 뒤로 떠오르자 놀라 주저앉으며 쓰러졌다. 그때 아슬아슬하게 트럭이 지나갔다. 


유로는 수이의 뒤에서 '아! 다행이다.' 생각하며 수이의 얼굴을 보러 수이 앞으로 가려 했지만 무슨 보이지 않는 막이 있는지 수이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수이가 지친 모습으로 빗속에서 쓰러진 채 땅을 짚고 울고 있다가 다시 도로를 바라봤다. 


수이 머리 위의 마법써클이 오렌지빛에서 강렬한 붉은빛을 띠며 빠르게 회전하다가 멈춰 섰다. 


유로는 수이가 자꾸 평소 같지 않게 구는 것이 저 마법써클 때문이라 생각하고 마법써클을 없애려 손을 댔다. 무언가 저릿하고 뜨거운 느낌이 나며 손이 마법써클을 지나쳐 갔다.


수이가 일어나 다시 도로로 향하려 했다. 유로는 조급해졌다. 


-지도령님 도와주세요.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전 오늘이 처음이잖아요.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붉은 도복의 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는 유로의 가슴 뒤 등뼈 쪽에 손을 대고는 말했다.


-이제 저 마법진을 향해 손을 뻗거라. 만지지는 말구.


유로가 손을 뻗자 손바닥에서 무언가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유로의 손에서 하얗고 파란빛이 터져 나와 수이 머리 위의 마법써클을 부숴버렸다. 마법써클은 부서지며 어두운 기운을 흩뿌리다 사라졌다. 


-괜찮아. 수이야!


다시 한번 수이의 앞으로 가려던 유로는 무언가가 가로막는 듯해 벽을 치듯 공간을 쳤다.


-너는 그 아이 앞으로 가지 못한다.


-네. 수호령에게 그런 제한도 있나요?


-아니다. 니 소원을 다시 되짚어 보거라. 너는 저 소녀의 뒤에서 보호해 줄 수 있기를 바라지 않았느냐?

 

-아니, 그 말이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러게 소원은 신중히 기원해야 하는 것이다. 영혼의 차원에서는 직설적으로 이뤄지니까 말이다.


-그럼 저는 계속 수이의 뒷모습만 볼 수 있는 건가요?


-그게 어디란 말이냐? 다시는 볼 수 없었을 수도 있는데.


유로는 이 꽉 막힌 저승 사람들 아니 저승 영혼들이 한참이나 답답하게 여겨졌지만 그의 말마따나 뒤에서라도 지켜줄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럽다고도 생각했다. 


마침 장례식장에서 유향이가 우산을 들고 나오다 도로 앞에 서있는 수이를 보고는 달려왔다.


-너 여기서 뭐 해! 형 따라 죽으려구.


-난.. 난..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야. 다 돌려놓고 싶어, 다.


-그래서 너 죽으면 형이 잘 왔다. 고맙다. 그럴 것 같아. 


-나 유로 오빠한테 너무 미안하단 말이야. 어떻게 해야 모든 게 다 원래대로 될 수 있을지.. 난 모르겠어. 모르겠다구.


형을 따라 죽으려는 듯한 수이를 보고 유향이 진지한 어조로 나무라자 수이는 울면서 절규했다. 수이는 자신이 이별을 말하려는 날 유로가 죽자 마치 자신이 유로를 죽인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모든 걸 원상태로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괴로움만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건 없이 말이다.


-일단 너네 집으로 가자. 너 좀 쉬고 정신 차려야 할 것 같아.


-아니야. 나 유로 오빠 곁에 있을래.


-형은 죽었어. 어떻게 곁에 있겠어... 집에 가자. 바래다줄게.


유향은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한 손으로는 수이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택시를 잡으려 했다. 유로는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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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수이는 유로의 영정 사진 아래서 하염없이 울다 지쳐 영정사진 옆의 벽에 기대 넋을 놓고 있었다. 


유로 엄마와 유향 역시 갑작스런 유로의 죽음 앞에 반쯤 넋 나간 사람들처럼 서있었다. 


조문 오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는 것도 처음엔 넋이 나가 멍한 채 서있기만 했다.


유로의 담임 선생님과 선생님들 몇 분이 오시고 학교 아이들 중 연락을 먼저 받은 아이들이 왔다 갔다.


시간은 점점 늦어져 밤 12시가 몇 분 남지 않은 시각이 되었다. 그때쯤 복도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두운 갈색 옷을 입은 소녀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그러다 유로의 영정사진을 보고는 한참을 멈춰 서있더니 두 눈에 눈물이 그렁 하는가 싶다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소녀는 유로의 영정 앞으로 다가와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옆에 서있던 유로 엄마를 향해 자기도 모르게 절규하듯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유로 오빠가 죽어요. 아줌마 말씀 좀 해주세요. 도대체 유로 오빠가 왜요. 


유로 엄마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아니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도대체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유로 엄마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소녀는 영정사진을 다시 돌아보려다가 한쪽 구석에서 넋 나간 채 유로 사진만 바라보고 있는 수이를 발견했다. 소녀는 수이에게 달려들었다. 


-너 때문이야! 신수이! 너 때문이라고. 니가 유로 오빨 죽인 거야. 니가 죽어! 니가 죽으라고. 유로 오빠 살려내고 니가 죽어버려!


소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분노에 차 수이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이령아! 왜 그러니. 유로가 마지막.. 마지막 가는 길에 이게 무슨 소란이야.


유로 엄마가 이령이라는 그 소녀를 말리려 했지만 이령인 거세게 수이의 어깨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침 이령의 어머니와 그녀의 기사 겸 보디가드가 M.G.I 멤버 중 소미, 이연과 함께 들어서다 이 광경을 보았다.


-언니 도대체 왜 그래요. 지금 언니보다 더 가슴 아픈 건 수이 언닐 텐데.


이연이 나서며 이령을 말렸지만 사실 수이 못지않게 이령이의 심정도 말이 아니었다. 지금 이령이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가 않았다.


-이제 그만해. 제발.


-놔! 노라구. 이거 못 놔! 


유향이가 나서서 이령이의 뒤에서 이령이의 어깨를 잡고 수이에게서 떼어냈다. 


정신이 나간 듯 조문 자리를 난장판으로 만들던 이령은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은 유향을 어깨너머로 돌아봤다.


-유로 오빠?


유향을 본 이령이 표정이 문득 밝아졌다. 하지만 곧 유향이가 유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다시 슬픈 눈빛으로 눈물을 흘렸다.



소미와 이연이가 수이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듯이 부축했다. 수이는 말없이 정신줄을 놓은 사람 마냥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언니 기운 내. 


-유로 오빠 같은 사람은 천국 갈 거야. 언니가 이렇게 힘겨워 하는 건 오빠도 원하지 않을 거야.


소미는 힘내라는 말밖에 뭐라고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연이도 수이를 북돋아 주고 싶었지만 이런 뻔한 말밖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놔! 노라고. 나 유로 오빠 곁에 있을 거란 말이야... 제발 날 좀 놔 줘. 


이령이가 이령이 엄마의 보디가드에게 끌려나가며 소리쳤다. 


유로 엄마는 이 상황에 너무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은 아무 감정을 못 느끼는 사람처럼 표정이 없었다. 유향인 형을 잃은 마음도 말이 아니었는데 그런 엄마를 보고 더 가슴이 아팠다.


이령이의 엄마가 유로 엄마에게 다가왔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갑작스런 비보에 유로 군 어머님께서도 경황이 없으실 텐데 저희 딸이 이런 소란까지 피워 죄송합니다. 어떻게 사죄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이령이도 소란을 피우겠다고 이런 건 아닐 거예요.


-아드님을 너무 아끼는 마음에 이령이가 제정신이 아니었나 봅니다.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드립니다.


이령이 엄마는 그리 말하고 돌아서려다 유향이를 유심히 봤다. '형제라 그런지 많이 닮았어' 이령이 엄마는 이령이를 안정시키려면 어찌해야 할지 깊은 고민을 했다.



11


조문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비우고 유로의 엄마가 실신하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유향이는 놀라 한쪽 무릎을 굽혀 앉으며 엄마를 감싸 안았다.


-엄마. 엄마. 정신 차려야 돼. 엄마 이러면 형이 슬퍼할 거야!


그리 말하고 유향은 울기 시작했고 유로의 엄마도 마냥 눈물을 흘렸다. 


이 모든 상황을 유로는 목도하고 있었다. 유로 곁에 서있던 흑백의 차사와 천사 남녀는 늘 보는 광경이었지만 사람에게 이 순간이 얼마나 애통한 순간인지를 알고 있기에 유로를 애처롭게 지켜봤다.


-엄마 저 괜찮아요. 다친데도 없고 배도 안고파요. 엄마... 엄마.. 죄송해요.


유로는 모두에게 이 깊은 슬픔을 자신이 안겨준 것 같아 너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다시 가족 곁으로 수이 곁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럴 길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슬픔 보다 더한 아픔이 밀려왔다. 


-가족과 너의 수이 곁으로 다시 갈 수 있는 방법이 꼭 없는 건 아니야.


하얀 수트의 중년의 남자 천사가 말했다. 


-제가 다시 살아날 수도 있는 건가요?


-다시 죽기 전의 너로 되살아날 방법은 이제 없는 거야. 그런 망념은 접어둬.


검은 수트의 저승차사 누나가 유로의 들뜬 기대를 조각조각 내듯 차갑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수호천사가 되면 그래서 너의 가족과 수이라는 소녀 중 누군가를 수호하도록 지시가 내려오면 그들 곁에 있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야.


-괜히 애 바람 넣지 말아. 얘 판결부터 지시가 떨어지기까지 너네 천국 절차로는 한 세월이 다 걸릴 텐데. 괜히 애 바람만 넣지 말아. 


유로는 중년 천사의 말에 한껏 기대하다가 차사 누나의 말에 바람이 빠지는 듯했다.


그때 원 없이 울은 건지 무표정해진 표정의 수이가 일어나 유로 엄마와 유향 곁을 지나 장례식장 복도를 따라 걸어 나갔다. 수이의 머리 위로 유로가 죽기 전에 생겼던 바로 그 마법써클이 떠올라 있었다,


유로가 수이의 표정에서 뭔가 불길함을 느끼고 따라나섰다. 수이 머리 위의 이상한 문양도 신경이 쓰였다.


-절차를 단축시키는 방법은 없나요. 


-그런 방법은 없지만 우리 천국으로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뭔가 대안을 주실지도 몰라.


-속지 마라. 그 하나님이란 존재에게 기도하고 응답받았다는 것들은 줴다 사기꾼들뿐이란다.


천사의 말에 뭔가 희망을 품으려 하면 차사 누나가 늘 찬물을 끼얹었다.



12


밖에는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폭우였다. 그 폭우 속을 가르며 수이는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수이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그 마법써클이 있다.


-수이야. 너 왜 그래. 비가 오잖아. 그것도 이렇게 많이. 


유로는 수이에겐 들리지도 않을 말을 속삭이며 가슴이 저미는 것만 같았다. 


수이는 흐릿한 눈동자로 비에 푹 젖은 채 도로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지금 수이의 수호천사와 수호령이 수이에게 계속 정신 차리라고 주의를 주고 있는 중이야.


-무슨 수호천사가 말밖에 못한데요. 어떻게든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등급이 낮은 수호령이라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어. 저 아이의 수호령과 수호천사도 할 만큼 하고 있는 거야. 


다급한 유로의 말에 하얀 천사와 검은 차사가 답변은 해줬지만 시답지도 않은 말들만 같았다. 유로는 더 조급해져가며 말했다.


-어떻게든 해 주세요. 아니면 제가 수이 뒤에서 수이를 지켜주게 해주시던가요. 그럼 뭐든 다 할게요.


수이는 저 멀리에서 트럭 한 대가 빗길을 해치면 달려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작정 도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시간이 정지된 듯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그리고 붉은 도복의 그 어르신이 나타났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너만 결심한다면 절차를 생략하고 한동안 저 아이를 뒤에서 지켜줄 수 있는 수호령 지위로 봉해도 된다는 전갈이 왔으니 말이다.


유로는 멈춰진 공간 속에 온통 비에 젖은 수이를 보고는 결심했다. 


-결심했습니다. 수이의 수호령이 되게 해주세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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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는 온통 새하얀 공간에서 자신을 감싸는 파동 같은 또는 빛의 일렁임 같은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정좌를 하거라!


-네?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라고!


어디선가 동굴 소리 같은 노년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로는 그 말을 따라 정좌를 하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아! 


-아무 생각도 하지 말거라. 내면의 요동에 반응하지 말고 그냥 느낌만 따라가면 된다.


아랫배부터 뜨겁고 찌릿한 기운이 일어나자 유로는 놀라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노인이 무언가 미더운 목소리로 주의를 주자 그의 말대로 의식이 따라가고 있었다. 불 같고 전기 같은 그 기운이 아래를 거쳐 꼬리뼈로 가더니 용암 줄기라고 할까 아래에서 위로 치는 번개 같다고 할까 뭐라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느낌이 머리까지 곧장 올라갔다. 유로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마치 자신의 정수리에서 빛의 불꽃이 터져 오르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9


유로는 한참만에 의식을 차리고는 오히려 더 깊은 잠에 빠져 꿈속에서 헤매는 듯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자신을 사이에 두고 낯모르는 두 남녀가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아이를 왜 천당에서 관리하려고 드느냐구요? 이 아이는 기독교도예요. 어디까지나 저희 천국 소관입니다.


-천국에 영혼이 없어? 무슨 호객행위 하듯이 영혼을 홀려가려고만 해. 이 아이는 생전에 손씨 형의권을 사사 받은 아이야. 어느 모로 봐도 우리 천당하고 더 인연이 깊다구.


하얀 수트 차림의 중년 남자가 검은 수트를 입은 젊은 여성에게 따지고 들자 젊은 여성도 근거를 대며 반박했다. 


-그깟 무술 나부랭이가 뭐가 중요해요. 크리스천을 천국에서 관리하겠다는데 운동을 이걸 했으니 얘는 우리 애다 이런 논리가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세요?


-공부(功夫)를 배우는 아이의 정신 속에는 동양의 정신이 자리 잡아. 허울뿐인 종교 나부랭이가 뭐가 중요해. 그 영혼에 어떠한 정신을 갖추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아니 그래서 상도덕도 없이 이러자는 겁니까?


-너네는 영혼을 장삿속으로 관리하니? 정신을 이야기하는데 상도덕이 웬 말이야?


하얀 수트의 중년 남자는 갓 입문한 초보 천사였고 검은 수트의 젊은 여성은 경력이 있는 저승차사였다. 그런데도 남자가 흥분하며 논리 없이 따지고 들자 여성까지 성이 차오르고 있었다. 마침 그때 새하얀 그 공간에 그보다 더 새하얀 빛이 어리더니 붉은 도복의 노인이 나타났다. 


-규약대로 하게 규약대로. 이 아이 자신의 결정이 중요한 거야. 


-네. 어르신. 규약대로 해야죠. 안 그래도 물어보려던 찰나였습니다.


-맞습니다. 영감님. 아이 의사가 가장 우선이죠. 


노인의 말에 젊은 여성이 되려 난처한 빛을 띠었고 중년의 남자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유로는 이 상황이 오기 전에 들리던 동굴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나자 왠지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할아버지 아까 제게 뭘 어떻게 하신 거예요.


-내가 니 할애비는 아니다. 


-아! 그럼 뭐라고 불러드려야 하나요?


-어르신 정도가 좋겠구나.


-예. 어르신. 그런데 아까 제게 뭘 하신 건가요?


-중유에 이르기 직전에 너의 임독맥을 타통한 것이다. 


-저는 아직 내공 수련은 해 본 적이 없는데 그게 가능한가요?


-네가 몇 해나 꾸준히 공부(功夫)를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게지. 


유로는 노인의 말에 의문이 풀리나 싶었지만 그의 말속에 뭔가 꼭 묻지 않고는 안될 의문을 하나 품게 되었다.


-그런데 말씀하신 중유라는 게 뭔가요?


-그건 바로 우리가 있는 이 공간과 이 세계의 일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네가 인간계의 시간으로 49일 동안 머물러야 하는 곳이지.


그 말을 듣고 유로는 '그렇구나. 나는 역시 죽었구나!' 하는 수긍과 함께 "내가 도대체 왜 벌써 죽어야 하나' 하는 억울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 것이란다. 억울함이나 난감함이나 당혹스러움 같은 것들은 망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인간계의 생에 미련만 가지며 영계에서 새로운 생을 부정하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다. 너는 어리석은 아이가 아니니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제게는 책임져야 할 가족들이 있어요. 책임지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구요.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를 책임지며 살아가는 거란다. 네게 어찌 그 모두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말이냐? 그런 생각은 자만이고 오만이다. 너도 너 스스로를 책임지는데 전념하는 것이 좋다. 현재의 너 자신 말이다.


유로가 너무 답답한 이 심정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하얀 수트의 남자가 유로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이봐. 고유로 너는 크리스천이니까 천국 가야잖아. 그치.


유로는 확 한대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작자는 정말 천사가 맞는 걸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아니야. 너의 내면 깊숙이에서 올곧게 동양의 전통을 애호하는 그 정신의 흐름을 믿고 따라야 해. 우리 천당으로 오면 네가 배우고 싶어 하는 십대 문파의 절기를 가진 고수들이 숱하게 있단다.


유로는 외모와 다르게 노숙한 어투의 이 누나 역시 짜증이 났다. 이 둘은 방금 죽은 사람의 심정이 어떨지 전혀 감이 오지도 않고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 아니 영혼들인 것만 같았다. 


-천국이고 천당이고 그런 거 관심 없습니다. 저는 약속이 있다고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유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수이가 걱정됐다. 이 두 사람 아니 두 영혼의 말보다 오늘 날씨가 일기예보하고 다르면 곧 비가 올지도 모르는데 수이가 우산은 갖고 나왔을지 하는 걱정부터 먼저 들었다.


-그 아이가 오래 기다릴까 봐 걱정이냐? 비에 젖을까 봐 걱정이냐? 더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단다. 그건 살아있는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하게 될 걱정들이니까 말이다. 


-저는 이제 어째야 하는 거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노인의 말을 듣고 유로가 참담한 심정으로 울부짖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노인은 조용히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을 올려 작은 원을 그렸다. 딱 그만한 크기의 빛의 구슬이 생기자 노인은 그걸 유로의 가슴께로 밀어 보냈다. 유로가 가만히 바라보자 그 빛의 구슬이 자신의 가슴께서 스며드는 것 마냥 사라졌다. 그러자 한결 마음이 가뿐해지는 것 같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너에게는 아직 7재 동안(49일)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 사이에 결정하려무나.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사이 무얼 할 수 있나요?


-우선 네가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을 보아라. 잠시 가슴 아픈 이들의 마음에 안식을 주기 위해서라도 네가 빨리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며 노인이 허공에 손바닥을 펴고 내밀자 허공에서 상복을 입은 어머니와 유향이의 모습이 비쳤다. 아니 유로는 그리 생각했지만 그것은 차원의 문 같은 것이다. 유로와 흑백 두 수트의 남녀가 함께 차원의 문을 넘어가자 오열하고 있는 어머니의 곁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오빠. 오빠. 유로 오빠. 


눈물을 흩날리며 달려오는 수이를 보고 유로는 두 팔을 벌렸다. 수이는 유로를 관통하고 지나쳐 영정 사진 앞에 가 쓰러져 울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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