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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 바이킹의 신들 현대지성 클래식 5
케빈 크로슬리-홀런드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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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반부까지의 내용과 일관성 있게 단지 싫어서 기분 나빠서 서로서로 죽이는 내용들이 이어진다. 노래나 비가 등의 제목이 이어지는 내용은 상식과 훈계이지만 그걸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이 살인과 파괴, 사기, 저주인 내용들이 중후반부의 내용이다.


기대했던 라그나로크는 모든 신들과 인간들과 죽은 자들 마저 일어나 싸우는 개념잡기 힘든 전쟁이다. 얘네는 전쟁의 이유도 없다. (신들과 거인들 중에는 예언능력이 있는 이들이 있어 최후의 전쟁이 라그나로크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고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죽는지 까지도 알고 있다. 피치 못해 일어나는 전쟁이 아니라 예언을 완수하는 전쟁이 라그나로크인 것이다.) 라그나로크니까 그냥 전쟁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 참여했던 대부분이 죽고 오딘 토르 로키할 것 없이 다 죽는다. 이후 살아남은 극소수의 존재들과 다시 살아나는 자 몇몇이 남고 세계는 바다에서 땅이 일어나며 한번도 개간된 적 없는 땅에 농작물과 자연이 살아난다는 내용이다.


세계는 다시 궁전들이 솟아나고 저택들이 솟아나 새로운 시작이 일어난다지만... 32장 라그나로크를 읽은 감상은 이 정도의 살육과 파괴라면 핵전쟁 규모의 종말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었다. 신들의 세계와 인간세계, 거인들의 세계와 난쟁이의 세계와 꼬마요정들의 세계, 죽음의 세계들도 모두 붕괴되었다가 다시 솟아난다는 것이 핵전쟁 이후에 다시 재건하게 되는 세계상을 그려주는 것만 같았다.


인도 신화에서는 우주적 차원의 겨울에 비슈누신의 10번째 아바타 칼키가 현현하여 인류를 지켜준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주목하게 되는 건 칼키라는 이 10번째 화신은 이제까지의 비슈누신의 아바타들과는 다르게 한명이 아니라 다수로 현현한다는 것이다. 결국 종말론적인 세상이라하더라도 다수가 이해와 의지를 함께 하고 행동한다면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은유 같았다. 이런 긍정적인 감상을 갖게할 해석을 갖고 싶어서 종말을 그린다는 라그나로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북유럽 신화 속 라그나로크는 너무도 단순하게 모든 것이 종말을 맞이하여도 운좋게 살아남은 이들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겠지 하며 약올리는 투라 이 신화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종말이라도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기 위한 하나의 흐름이고 살아남은 존재들은 다시금 봄을 맞이하리라는 신화였다고 받아들여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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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유럽 신화 - 바이킹의 신들 현대지성 클래식 5
케빈 크로슬리-홀런드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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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시와 더불어 좋아라 하는 장르다 보니 관심어린 저작이었습니다.

신화 속 세계와 인물과 성스러운 무기 및 도구와 사건들... 각 상징체계가 그리려하는 것들에 흥미를 느끼다 보니 한차례의 서평으로 끝내지 못할듯 합니다. 연재서평이 될 것 같군요. 앞으로 적어도 한번은 더 리뷰를 남길듯 합니다.


본서의 저자는 이 저작을 완성하려 여러 전승의 신화집을 참고하며 각 에피소드들의 지명과 인물 묘사와 각 인물들의 대사에 완성도를 높였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화의 이야기 자체가 아마도 전승되어오던 옛신화집들 보다 구성에서 나름 치밀하게 전개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기존 전승되어온 신화집 원전을 읽어보진 못한터라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요. 그래도 저자가 나름 이야기꾼인듯 합니다. 제법 술술 읽히는데다가 신화가 원래 재밌다는걸 고려한다해도 몰입도가 나름 상당한 저작물입니다.


신화는 전체 32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엔 용어집이 있어서 신화를 읽다가 신명, 인명, 무기와 도구, 지명까지 참고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북유럽 신화의 32 에피소드를 시작하기 전 '서론'이라며 '북유럽의 세계, 우주론, 신들, 출전, 신화의 문학적 구조, 신화에 대한 접근' 까지 6분류로 북유럽 신화에 다가서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북유럽 신화의 세계관, 신화 속 신들의 속성, 그러한 신화를 구조화한 유럽인들의 인간관, 세계관, 우주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북유럽 신화를 읽으며 가장 주목되던 것은 유럽인들의 기질적 잔인성이었습니다. 1~10장까지의 단지 10개의 에피소드만을 읽고나서 느낀 것도 내면 깊숙히 이런 속성을 드러내는 인간들이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대를 맞이해야 했기에 인류가 그토록 암흑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두차례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가 예견된 것이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저자도 서론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북유럽 신화에서 이야기 전개의 동인은 증오입니다. 무슨 분노바이러스라도 감염된 신들인건지 오딘 삼형제 신들이 세계를 창조하게 된 동인 또한 증오입니다. 단지 최초의 존재인 거인 이미르와 그의 후손들인 서리 거인들 인구가 많아지는 것을 싫어하던 마음이 증오로 확장되어 오딘 삼형제 신들이 최초 거인 이미르를 죽이고 해체하여 세계를 완성합니다.


더구나 에시르 신들의 거주처 아스가르드에 마녀 굴베이그가 찾아왔을 때 오딘을 비롯한 에시르 신들이 그녀를 난자하고 불 속에 던져넣은 이유는 기가 막힙니다. 그저 그녀가 황금을 좋아하며 탐욕스러운게 혐오스러웠다는 이유 하나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편협하고 잔혹한 면이 있었기에 굴베이그가 재생이랄까 회복이랄까의 이적을 보일 기회를 얻는 것이고 에시르 신들과 바니르 신들 간의 최초의 전쟁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전개되기에는 필수적인 요소였던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깊은 증오를 보여주는 인물들, 분노를 통제 못하는 것이 신화로 까지 전승되리만치 내적 동인으로 인식되는 내면을 가진 인간들이 백인들입니다. 백인문화가 역사적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상황은 오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가 거듭될 것만 같으니까요.


서론에서 저자가 밝혔듯 북유럽인들의 원류인 바이킹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에서만 정착했던 것이 아닙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가득 채우자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발트해 연안, 키예프, 흑해, 카스피해 까지 급격히 확장했으며 유적 발굴로는 서기 1000 년 즈음에는 현재의 뉴펀들랜드 지역 까지 확장했다고 합니다. 현지에서 그들의 흔적이 발굴되었다고 하는군요. 저자의 말로는 이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기 500년 전이라고 하네요. 그럼, 명나라 정화 원정대가 미대륙을 발견하기 보다도 한 420 여 년 정도 앞선 모양입니다. 


이렇게 유럽 전체를 넘어선 확장세를 보이던 바이킹들의 속성을 유럽인들이 보이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들에게 바이킹의 유전자가 두루 남아있을테니 말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신들의 세계 창조도 신들의 최초 전쟁도 증오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게다가 최초 전쟁 후 평화협정 처럼 에시르 신족과 바니르 신족은 서로 지도자를 교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니르 신족은 자신들은 탁월한 지도자를 보냈음에도 에시르 신들 측이 보낸 지도자 중 허우대 멀쩡한 신 호니르가 함께 온 현자 신 미미르가 없을 때는 발언을 얼버무리기만 한다고 자신들이 손해본 것 같다며 분노에 차서 그 허우대 멀쩡한 신 호니르도 아니라 현자 신 미미르를 죽입니다. 그리고는 머리를 잘라서 에시르 신들의 지도자 오딘에게 보내지요. 분노조절장애에 극단적 폭력주의의 기원이 북유럽 신들이었습니다. 분노조절장애, 극단적 폭력주의를 신들 마저 속성 마냥 지니고 있다는 문화입니다.


또 그리스 신화의 넥타 처럼 신주神酒라는 신들의 음료가 만들어진 경로는 섬찟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지적인 인간 '크바시르'(신인지 인간인지 모르겠더군요. ep.2 신들간의 전쟁 이야기에서는 바니르 신족이 에시르 신족에게로 보낸 지도자 신들 중 현자로 등장하는 이름입니다)가 지혜롭다는 평판에 시기심을 느낀 난쟁이들이 그를 속여서 초대하고는 죽여서 그의 피로 술을 담근 것이 한번만 마셔도 시인이자 현인이 된다는 신주라는 음료입니다. 게다가 이 신주를 오딘이 마시게 되기까지의 과도기상에서 주퉁이라는 거인을 거치게 되는데 주퉁에게 오게 된 과정도 잔인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현자 '크바시르'로 술을 담갔다는 그 난쟁이들이 거인 길링 부부를 초대해 대접하다가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근데 앙심을 품고 증오가 가득차자 길링에게 바다로 가서 바람이나 쐬자면서 배로 유인하여 바다에 빠트려 죽입니다. 그리고는 부인에게는 남편이 사고로 바다에 빠져 죽었다며 거짓말을 하고는 보복방지 차원에서 맷돌을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뜨려 죽입니다. 이 길링 부부가 주퉁의 부모인데 복수하러 온 주퉁에게 신주를 건네주는 것으로 복수를 퉁친 것입니다. 


그리고 ep.3 아스가르드 성벽 재건에 대해 전개되며 이들의 증오와 잔혹함이 또한번 빛을 발합니다. ep.2의 신족 간 최초전쟁으로 붕괴된 성벽을, 재건해 주겠다며 찾아온 한 이방인이 있었습니다. 단기간 내에 성벽 재건을 해 주겠다고 장담하자 에시르 신들의 지도자 오딘은 그가 목적하는 바가 무언지 묻습니다. 그 이방인은 물적 인적 지원 하나 없이 성벽을 재건하는 조건으로 아름다운 여신 프레이야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신들은 그의 요구를 과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거절하려 하는데 얍쌉한 신 로키가 묘안을 내놓습니다. 그가 제시한 기간 보다도 훨씬 더 짧은 기간 내에 성벽을 모두 재건하면 프레이야를 주겠다고 하라는 거였습니다. 도저히 누구도 가능하지 않은 기간을 제안하는데도 그가 받아들이면 그는 결국 프레이야를 향한 욕심으로 힘들게 성벽을 재건하려 노동만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벽을 완전히 재건 하지 못하고 시일은 지날 것이고 그래서 그에게 프레이야를 주지 않으면서 성벽은 절반이라도 재건하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그 이방인은 신들이 제시하는 단기간을 받아들였습니다. 단지 자신의 말 '스바딜파리'만 이용하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여기서 이 힘 좋은 명마가 암석을 옮겨주어 성벽이 약속기한에 맞춰 다 재건되어 갈 듯하자 신들은 그 이방인의 명마 스바딜파리를 꾀어 내려 묘안을 씁니다만 이건 본서에서 확인하세요^^*


이 에시르 신들의 농간으로 자신의 말이 암석을 나르지 못해서 기한 내에 성벽 재건을 완료하지 못할 것을 알게 된 그 이방인이 격분하여 본래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를 주목하라 하고 싶었습니다. 그 이방인은 격분하여 변신이 풀렸는데 알고 보니 바위거인이었습니다. 그가 본모습을 드러내자 그저 사랑에 빠져 어떻게든 사랑하는 여신과 함께이고 싶었을뿐인 이 가련한 거인은 토르의 망치 묠니르에 무참히 짖이겨져서 살해 당하고 맙니다. 단지 거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애초에도 세계를 창조한 것이 "난 거인들이 싫어!" 이러다가 증오로 변해 죽이고 난도질하고 토막을 쳐서 세계를 창조했다지 않았습니까? 얘네들 전부 인종차별주의자들인 겁니다. 이런 문화니까 우생학이니 하면서 홀로코스트가 등장하고 고작 십여년 전까지도 인종청소니 하는 말이 기사화 되었던 거 아닙니까?


신화가 기승전증오 기승전잔인 입니다. 분노조절장애 , 극단적 폭력주의, 인종차별, 계층화해서 차별하기, 집단 이기주의, 사기, 기만 등이 이들 문화의 근간입니다.


그러게 대외적으로 신사로 알려진 영국인들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이 축구 때문에 폭력집단으로 변모해 버리는 훌리건 사태 아닌가요? 페르조나는 젠틀맨인데 실상은 훌리건인 것이 영국 남자니까요.


그리고 간략히 제게 인상 깊었던 상징들을 몇가지 전하자면...


ep.4 오딘이 지혜를 (여기서는 마법이라고 하지만) 얻으려 자신의 한쪽 눈을 희생하고 거꾸로 매달려 아흐레를 보내야 했다는 것은 지적인 성취던 무엇이던 어떠한 의미있는 성취에는 반드시 댓가가 따른다는 걸 상징하려 한듯합니다. 물론 다른이의 탁월한 재능을 인정해 주는 내적 자원으로는 나쁠 것 없겠지만 이 이야기는 세상은 다 타고나는대로 사는 거란 걸 간과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북유럽 신화 속 그들은 날 때 부터 신이라는 자체를 간과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ep.4에서 오딘이 노래하는 첫번째 마법이 "도움으로 슬픔에 위안을 주고 고통을 덜어 주고 아픈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이다"라는 주문은 깊은 의미가 있는 듯 합니다. 유럽인도 인류 누구도 공감 받고 싶다는 바램과 공감해 주는 것이 누군가를 도우려면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는 깊은 이해가 있었던 것이니까요. 열여덟번째, "너 자신과 너만이 알고 있는 진실이 항상 제일 강한 것이지"라는 마지막 주문은 신화에 깊이를 더해 주는 듯 했습니다. 자신을 깨닫고 회복하고 완성하고 그러한 삶 속에서 자신이 찾는 의미가 바로 오딘이 노래한 '너만이 알고 있는 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열여섯번째와 열일곱번째 마법이 '내가 원하는 어떤 여성이던 나에게 매료되게 할 수 있다'는 것과 '나를 좋아하던 여성이 언제든 내가 원할 때 나에게서 떠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나름 위트가 느껴졌습니다. 부모님 여행가셨다며 여친이 자취방에 찾아와 돌아가지 않는 감사한 날들에도 " 제발 공성전 할 때 만큼은 돌아가 주면 안되겠니?" 하는 심정을 겪어본 적 있는 남자들이라면 다들 공감할 마법일테지요. -참고로 저는 그런 날들에도 게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만, 게임이 초능력자 게임으로 변할 뿐이었죠. "지진을 부르는 자!" "홍수를 부르는 자!" "블랙아웃을 부르는 자!" 걍 웃자고 한 이야기니 진지흡입하지 마세요-


그외에는 ep.1에서 태초에 남쪽 무스펠은 불꽃의 세계이며 그곳은 '주르트'(Surt, Black)만이 견딜 수 있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북쪽 니플하임은 얼음으로 가득찬 광활한 눈더미로 덮힌 지역이고요. 여기서 우선 주목 되던 것은  방위의 상징이 나름 동양의 방위와 오행의 상징과 유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양 방위와 오행으로 南火 北水 (그외 東木 西金 中土) 로 남쪽인 무스펠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곳인 것이나 북쪽인 니플하임은 얼음과 눈으로 가득하고 흐베르젤미르 라는 샘이 열한개의 지류로 흘러갑니다. 동양의 방위 상징과 일맥상통하지 않나요? 

게다가 성경과도 통합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북유럽 신화에서 물론 남쪽은 불꽃의 세계지만 그곳에 거주자는 '주르트'란 이름으로 검정(Black)을 상징한다는군요. 흑암 즉, 어두움을 상징하는 색이 검정색이죠. 이렇듯 창세기의 상징 흑암과 물이 북유럽 신화에서 등장하지 않는게 아닙니다. 이미 북유럽의 신들이 세계를 창조한 이야기는 언급했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을 창조한 상징을 보자면 북유럽 신화에서는 인간이 죽은 나무에서 시작되었다는군요. 오딘 삼형제가 죽은 나무를 보고 들어올려 물푸레나무로는 남자인 아스크(Ask)를, 느릅나무로는 여자인 엠블라(Embla)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보자면 물푸레나무가 북유럽 신화에서 상징하는 것을 보면 세계 여러신화에서 상징하는 세계의 축인 세계수世界樹 ... 영원을 상징한다는 나무인 이그드라실이 물푸레 나무라는 것입니다. 북유럽 신화의 모든 세계를 지탱하는 나무이며 최후의 전쟁 라그나로크에서도 살아남을 나무라고 하는 그 나무가 물푸레 나무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그 자신이며 동시에 세계를 즉, 존재적 차원 전체를 지탱하면서, 찰나를 살다가지만 영원 속에 남을 존재임을 상징하려 사람이 물푸레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물푸레 나무가 애초에 죽은 나무였다는 것은 또한번의 상징적 비아냥인 것이겠지요. 느릅 나무의 상징은 나 몰라라하며 스킵~


ep.6에서 등장하는 크바시르는 아홉세계의 모든 일과 불가사의를 꿰뚫는 통찰력을 지녔다고 하는 현자입니다. 헌데 그의 근원을 보면 최초의 신들의 전쟁 후 에시르 신들과 바니르 신들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며 단지에 침을 뱉어 우호관계의 증거를 삼았다고 하는데 그 단지의 침으로 에시르 신들이 만든 사람이 바로 '크바시르'라는군요. 이건 북유럽 신화 속 위트 같습니다. 인간의 지성이라는 것, 지혜라는 것은 그리고 지성인이라는 것은 그저 뱉어논 침과 다를 바 없다는 풍자가 아닌가 합니다. 그럼에도 그 침으로 만든 현자 크바시르를 모두들 부러워하고 난쟁이들은 시기하여 그를 죽여서 그의 피로 신주神酒를 만들죠. 그 음료는 누구든 한모금만 마셔도 시인이 되고 현자가 된다고 합니다. 

-시인은 주퉁의 형제이면서 신주를 지키던 바우기의 입을 빌려 언급되었듯 북유럽인들이 제일 고상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던 직종입니다-

신주의 효험을 알게된 이들은 다 탐을 냈습니다. 게다가 오딘은 미남계를 이용해 주퉁의 딸 군로드와 다정히 보낸 후 그녀를 기만해 신주를 마실 기회를 얻자 단한모금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을 만큼 신주는 욕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딘이 한모금도 안남긴 이유는 다른 이도 그것을 마시고 먼저 마신 자신만큼 총명해질 것이 두려워서였을 것입니다. 하긴 뭐, 그것도 나름 술이니까 처음 술을 마시던 것은 오딘이었다해도 마시다 보니 술이 오딘을 마신건지도 모르겠군요.


ep.8에서 여신 이둔이 그녀의 황금사과... 신들의 청춘을 지탱하는 황금사과와 함께 납치되자 아스가르드의 모든 신들이 늙어 갔습니다. 그때 아스가르드에 있는 여신이기는 하지만 신들의 최초 전쟁 후 평화를 협정하며 공존의 증거로 지도자를 교환할 때 아스가르드로 온 바니르 신족인 프레이야도 늙어갔습니다. 아스가르드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프레이야 니까 에시르 신족에서도 그녀만한 미모가 없다는 거 아닙니까? 에시르 신족과 바니르 신족 통합 최고 미녀 여신인 그녀도 늙어가자 로키가 그녀를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아마도 신화집 원전에서도 늙어가는 신들을 무력하고 허탈하게 묘사한 모양입니다. 그것이 북유럽 신화가 하나하나 만들어져 가던 시기, 북유럽인들이 가진 늙는다는 것에 대한 선입견이었던 모양입니다.


ep.9에서 풍요의 바다 신 뇨르드와 스키의 여신 스카디의 결혼 생활은 남녀란 너무 다를 수 있다고 말해 주는듯 했습니다. 이 다름을 받아들이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여유가, 다르다는건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면서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바둥거리는 것 보다는 나은 혜안이라는 북유럽식 부부 상담 닮은 에피소드였습니다.


그리스 신화도 그렇고 북유럽 신화도 그렇고 유럽신들은 대체로 다혈질에 감정몰입이 뛰어난 배우들 같은 느낌입니다. 무엇보다 수퍼히어로 영화 「토르」에서의 안소니 홉킨스 님이 연기한 오딘과 북유럽 신화 속 오딘은 너무도 다른 이미지 입니다. 연륜과 덕망을 갖춘 지혜로운 전사이자 왕의 이미지가 안소니 홉킨스님이 연기한 오딘이었다면, 북유럽 신화 속 오딘은 한국영화 속 조폭의 보스만도 못한 이미지입니다. 그냥 넘버3 정도 지위의 행동대장 느낌이나 드는데 북유럽에서는 신들의 지도자더군요. '액션러닝'이란 게 있던데 그것도 그렇고 유럽식은 우선 행동하면서 생각하며 답을 찾는 지도자상이 이상적이라 여기는 듯 합니다. 도덕적으로나 실리 차원으로나 빈틈없는 완벽주의자인 이상 속에서나 가능한 지도자만을 꿈꾸는 한국인들이 바램하는 지도자상 보다 훨씬 더 현실성 있는듯 합니다. 하긴 구약성경에서의 하나님상도 질투하고 분노하고 처벌하고 시험하고 환난과 재앙을 주시는 존재가 아닙니까? 물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에게는 관대하시며 죄를 면하게 해주시기도 하고 축복하시고 자신이 선택한 이는 아무리 못났어도 함께하는 분이시기는 합니다. 다만 앞서 이야기했듯 시험과 환난과 재앙이 도를 지나치게 넘어설 때가 있는 분이라는게 함정입니다. 무자비하고 잔인하기 이를데 없을 때가 있는 분이니까 말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요한일서 말씀 만큼이나 하나님께서 보이신 역사에서도 양가적인 면을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을 고려한다면 '사람에게서 양가적인 모습이 보인다고 그를 쉽게 부정적으로만 단정지어서는 안될 일이구나' 정도의 삶과 사람에 대한 해석의 폭은 지니고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북유럽 신화 속 신들을 보며 이 시대를 대응하는 방식을 알게 해 줄 해석의 깊이를 가져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처세와 이해의 폭 정도 넓힐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냥 이 순간에 잘 대처하면 된다' 정도로는 시대에 대한 대응으로 부족할듯 싶으니까 더더욱 라그나로크에서의 신들의 대응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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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23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 판타지에 흥미를 느끼고 싶으면 북유럽 신화를 먼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이하라 2017-10-23 19:44   좋아요 0 | URL
네, 그리스로마신화랑은 다른 단순미가 있더군요^^
 
융의 분석심리학과 신화
Steven F. Walker 지음, 장미경 외 옮김 / 시그마프레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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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공산주의에 대해 전혀 두렵지 않다. 나는 무의식과 현대과학이 두렵다" - 칼 융


조목조목 신화를 대조하며 분석심리학적 툴로 해석하는 방식을 가르침하는 자상한 책을 기대했다. 신화의 구조와 유형에 대한 관심으로 분석심리학과 융 그리고 신화가 동시에 언급된 도서들에 목말라했었는데 코냑을 기대하다가 맥주 한 캔에 퉁친 샘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악평을 유발하는 정도의 저작물은 아니다. 분석심리학의 기본툴들을 아우르고는 있다. 다만 상세한 신화와 그 원형상들과의 관계와 해석이 간소하다는 것뿐이다.


이 책에 실망했다기엔 오히려 융 학파의 신화 해석에서의 갈등 내지는 충돌 사이에서 어떻게 분석심리학이 발전해 왔는지를 짚어주기도 하며 칼 융 박사가 남성으로서 한계를 느꼈을 여성이 보는 아니무스에 대해 융 학파의 여성학자들이 선전한 내용들이나. 학계의 다양한 업적이 발전해온 과정들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나의 독서 목적이 분석심리학적 툴로 신화를 해석하는 방식을 좀 더 깊이 있고 폭넓게 아우르는 가르침을 얻고 싶어서였다는 게 함정이었던 것 같다. 어쨌건 신화 관련 다음 도서는 이창재님의 『신화와 정신분석』을 읽으려 하는데 이건 목차를 보니 기대를 배반하지 않을 저작이라는 확신이 드는 키워드들이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며 든 짧은 생각 하나는 세상이 위기와 불안으로 가득 찰 때 그에 대한 보상의 차원에서 신화적 원형상들이 드러난다고 본서에서는 이야기하는데 현재의 세계가 점점 위기와 불안이 팽배해지고 있는 국면이다 보니 《진격의 거인》 《2012》 《월드 워 Z》 《나는 전설이다》 《부산행》 《판도라》 같은 유형의 영화들과 수퍼히어로물 영화들이 이 시대의 위기와 불안에 공명하는 집단무의식이 드러낸 신화적 원형상들을 닮아 있는 것만 같고... 사람들의 위기감과 불안심리를 통해 분석심리학을 역이용하고 있는 통합적 세력이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지경이다. 사실 의구심이 아니라 확신에 차있긴하지만...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체제가 두려움의 근원일 수 없고 이런 체제들을 강력하게 이용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체제의 첨단 위에서 세상을 조망하고 운영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무의식이 두렵고 현대과학이 그 두려움을 공포로 가져다줄 수도 있는 시대다. 그렇다 보니 무력감을 못이길 때가 더러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그건 풀어나가라고 있는 문제들일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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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가면 1 : 원시 신화 까치글방 160
조셉 캠벨 지음, 이진구 옮김 / 까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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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예수님의 사역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조지프 캠벨님의 저작 《신의 가면 1 원시신화》로 돌아 보았다. 

그의 주장으로는 샤먼은 온화한 마음이 속성이라지만 세계와 우주의 변화를 가져오는 자이며 진정한 자신을 깨닫기 위해 자아가 발가벗겨지는 상황에 긴 시간 놓인다고 한다. 길고 긴 시련의 길을 걸어야 하며 그 속에서 자발적이면서도 강제적으로 엄청난 고독을 감당해내야 하는 존재다. 비극이 고통에서 환희로 바뀌는데는 마음의 초점을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게다가 기괴한 사고라는 갑작스럽고 기묘한 죽음이 죄와 벌을 스스로 불러오게 한단다. 이것이 일상성의 기괴함, 신적인 기괴함을 돌아보게 하는 매개적 역할을 한다고 한다.


샤먼에게 나타나는 위기는 적절하게 육성하면 탁월한 지성, 세련된 태도, 훨씬 강한 육체적 에너지와 정신적 활력을 가져온단다. 이제껏 테러리스트 성자에서 말했듯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유대사회의 대부분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저항하셨다. 심지어는 그 과정에서 물리적 테러도 서슴지 않으셨다. 온화한 샤먼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사냥꾼 같은 자기과시적 폭력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신화적 놀이를 위한 미성숙함이라는 전제이기에 미성숙함 자체가 축복이라고 조지프 캠벨님은 주장했다. 


그러나 미성숙함과 성숙함이 어우러진 삶이었다고 여겨진다. 스스로 정치범으로 죽임을 당하기에 합당한 상황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자발적으로 몰고 가지 않았던가? 그의 모든 사역과 기록된 만큼의 발자취만 보더라도 그는 미성숙한가 싶으면 하나의 연출을 완벽히 이뤄낸 성숙한 영혼이셨다.


유대사회 속에서 유대문화의 한부분인 경제인들에게 낙타와 바늘구멍의 예를 들어 비난하셨고 유대교인들을 신랄히 비판하셨다. 그러는 과정에 성전 앞 환전상들과 비둘기 판매상을 테러하셨고 말이다. 아비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맞나?) 서로 대립하라는 말씀도 하셨고 예수님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가 찾아왔을 때 마저 신도들 앞에서 실제 외면해 버리셨다. (요리하다 지친 언니가 자기 여동생도 주방으로 보내 달라는 부탁에도 다 자신의 역할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여동생이 미녀라는데 큐티 라이프 성경 책 한권을 건다.)


유대사회 지도층들이 예수님의 교세가 확장되는 만큼 예수님을 위험한 인물로 생각하도록 딱 그렇게 행동하셨다. 왜 그러셨을까는 누구라도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공동연출로 완성된 수난과 십자가형과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의 그런 미성숙해 보이는 행동들이 성숙하게 안배되어 일어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상황이 다 지나고서야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며 "다 갚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며칠전까지 있던 정신과의 약품 때문에 안그래도 무안한 대뇌가 더 잘 돌아가지 않고 있지만 어쨋듯 마치려던 글을 끝맺으려 한다) 정신과에서 기독교 방송만 듣고 있던 707호 동기 어르신 때문에 (그 어르신이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 같은 707호 동기인 어르신 때문에 "다 갚았다"란 표현을 사용하는 목사님 설교 기독교 방송을 보았고 방 호실 마다 찾아다니며 히브리어와 헬라어도 아시는 분을 찾아서 물어본 것이다) "다 이루었다"란 말씀에 "다 갚았다"는 뜻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앞서 누차 말해왔듯 그의 탄생은 이스라엘의 한도시인지 그 근방 전체까지인지의 신생아들이 모두 죽는 저주 같은 현실을 가져왔다. 또 유년시절의 예수님의 살인과 저주에 대해 외경의 내용을 언급했듯 자라는 과정에서도 그는 섬찟할 정도로 순수한 의식을 지니고 계셨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살해도 저주도 꺼리낌이 없으셨던 분이시다.


그러고 자라는 과정 중에 어떤 계기일지 몰라도 광야에서의 단식과 유혹 보다 더 먼저인 어떠한 계기가 분명히 선행했을 것이다. 어떤 계기가 선행했을지는 모르지만 사랑의 전도사이시던 예수님에게 이미 자신이 행한 타인들에 대한 살해와 저주가 이후 "다 갚았다"는 말씀을 하시도록 만들 정도 였다면 분명 목숨만큼 소중한 누군가를 잃으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상황이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말했던 "태어날 때 흐트러진 머리 속의 회전"을 바로 잡은 것이리라. 하지만 이것은 억측에 가까우니 살펴서 생각하시길 바란다.


조지프 캠벨님이 이야기하던 '기괴한 사고(사건)'이 성장해 가는 샤먼에게서 자주 살해의 형태로 일어난다던데 이 살해가 죄와 처벌의 형식을 띠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죄의식과 함께 전국면의 국면 전환의 성격을 가지려면 샤먼 스스로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찌된 것인지는 나도 모르지만 어떤 계기가 있은 이후 광야에서의 단식과 시험이 있었고 그의 공생활이 시작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원시신화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길고 긴 시련과 고난 또한 엄청난 고통 위대한 고통에 해당하는 놀이가 완성되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놀이 일수 있는 건 서양영화에 등장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행해지는 마굿간에서 태어나는 예수님과 동방박사의 조우를 유치부 아동 연극으로 펼치는데서나 또 성찬식에서나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전생애를 놀이라고 보아야 할 텐데 그토록 슬픈 연극을 누구에게 강요한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미워지는 전제가 아닌가 말이다. 그 슬픈 연극 속에서 그분은 용서와 사랑의 화신으로 거듭 누구라도 마지막 한사람까지 용서하셨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까지 용서하고 가셨다는 말이다.


그의 생은 용서와 사랑의 구현으로 많은 이들을 사랑으로 가득찬 이들로 변모 시키려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우리가 사랑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회복하면 죽음 마저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란 걸 증명하시기 위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속에서도 준비 안된 이들과 흥을 깨는 이들에게는 깊은 의미를 숨겨주는 우화(우언)가 되었어야 할 아포크리파들이 기독교 내의 통합을 위해 졸지에 외경(아포크리파)이란 이름으로 대중의 눈 밖에 난 것은 과연 다행인 것인지 애석해 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예수님의 함자에 히브리어 발음은 "예수아"라고 한다. 이것은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축약형 발음이라고 하던데 '여호'라는 하나님 함자를 표기할 때 사용되는 접두사와 '수아'라는 "구원하다" "인도해내다"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에 야샤가 결합된 어휘라고 한다. '야샤'에 대해 '히브리어 종합사전'은 '존재의 기원을 밝히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들었다. 


"예수아"라는 이름은 결국 "인류를 구원하고 존재의 기원을 밝히실 분"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말이다.


사랑의 전도사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한 종류일지 감히 마음대로 단정짓기 어려운 어떠한 계기로 인해 인류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죄인들의 죄를 사하여 주면서도 자신은 '기괴한 사고'에 대한 죄의식을 수난과 십자가형에 처해서야 용서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를 외치던 분이시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용서하는데는 그토록이나 버거워 하신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보면 레니게이드가 떠오른다. 이 시대에 그분께서 다시 오신다면 엘리트가 아니라 날건달로 오실 것 같다. 아니다. 오히려 선입견을 깨고 엘리트로 오실지도 모르지만 날건달 성향을 버리긴 어려울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그분의 친구들인 크리스찬들이 쉽게 알아보긴 할지 모르겠다. 


끝맺음이 불완전해 보이긴 하는데 여기서 마치려 한다. "어쩌다 어른"이란 방송을 보니 사람에겐 패턴완성을 하는 특성있다니까 미흡한 부분은 자신들의 지식으로 메우리라 생각하며 이만 접겠다.


-음! 잊고 나도 모르게 넘어간 주제가 있었다. 그건 조지프켐벨님이 생득적방출기제(모르시면 검색바람^^*)를 통해서라도 새시대의 새로운 통합신화가 완성 되기를 못내 기다렸음이 책 속에 은근슬쩍 비춰지더라는 것이다. 사람이 원인과 조건만 갖춰지면 누구라도 신화의 한부분을 시작할 수 있다고 저자는 꿈꿨던 것 같다. 그래도 호돈 단편 중 '큰바위 얼굴' 같은 긍정적 변화만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신지학회의 블라바츠키 여사 등이 크리슈나 무르티의 남다름을 알아보고 예수님과 같은 인물로 키워내려 하였으나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유로운 연설가가 되고 싶어했을 뿐이지 않나? (뭐!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오쇼라즈니쉬의 책들 중에 하나에서 읽었던 이야기다) 


작위적으로 모조나비를 더 그럴듯 포장해 암나비들이 다 모여들게 만든다해도 그런 상황에서는 다음세대가 태어날 수 없다. 난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그래도 진짜 예수님의 재림을 바란다. 이 시대의 문제들에서 해답같은 사람을 기대할 대중들을 농락하는 그런 가짜 보다 가짜 빛에 더 반짝이는 사람보다는 기다리던 진짜가 진실로 오시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과거의 예언을 이 시대에 현실화 시키며 해결안 같은 가짜들을 제시하려고도 한다. 물론 조지프켐벨님이 바란 것은 조건을 갖추어 실제 메시아가 등장하는 현실이 보고 싶었던가 본데... 불완전한 인간의 의도와 노력으로 진실한 기적을 불러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 시대를 예언대로 조작한다고 해도 가짜메시아 마저 조작하려는 노력은 그쳤으면 좋겠다. 어딘가에서 시대의 해결안을 하나하나 준비하며 자신의 현신을 대기하고 있을 진짜 메시아가 있을 것이라 믿어보자.-

미흡한 글 사람들의 패턴 완성 특성을 기대하며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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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가면 1 : 원시 신화 까치글방 160
조셉 캠벨 지음, 이진구 옮김 / 까치 / 200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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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충만성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신화의 깊이와 폭에 직접 비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문화의 신화들은 ...중략... 삶의 동기와 방향을 제공하는 강력한 동인으로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신화 속 상징들은 가장 깊은 동기 부여를 가져온다"

"신화가 자신의 특질을 무의식으로 부터 꺼낼 때 삶은 그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신화는 -따라서 문명은- 시적 초일상적 이미지이다. 모든 시가 그러한 것처럼, 신화는 깊은 차원에서 상상된 것이지만 다양한 수준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아주 피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는 신화에서 국지적인 배경을 보지만, 가장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는 거기서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 

"신화는 삶의 의미를 연출하는 이미지 체계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두가지 방식으로 파악할 수 있다. 첫째는 사유의 방식이고 둘째는 경험의 방식이다. 사유로서의 신화는 과학에 접근하거나 과학으로 향하는 원시적인 서곡이다. 경험으로서의 신화는 예술 자체이다. 더구나 신화적 이미지와 신화적 공식은 의례 속에서 현재화 된다."




이 리뷰의 마지막장을 너무 오래 미뤄뒀는데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가능하면 짧게 끝내려 한다. 


애초에 『신의 가면』은 제목 마따나 신화에 대한 저작이다. 그러니 이 저작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며 예수님의 생과 가르침으로 접근한 것은 가장 적절한 양식이 아니었나 싶다.


'삶을 충만하게' 만들고 '삶의 동기와 방향을 제공'하며 '삶이 흘러들어 간다'는 신화... '무(無)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보게 한다'는 신화는, '삶의 의미를 연출하는 이미지 체계'라고 조지프 캠벨은 말하고 있다.


이는 비단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자신의 종교를 통해 삶이 의미를 찾은듯하고 충만한 사랑과 은혜를 경험해 보았다는 이들이라면 공감할 정의가 아닌가 싶다. 물론 이것은 종교의 긍정적 영향만을 두고 이르는 것이지만 말이다. 


조지프 캠벨은 『신의 가면』의 첫번째 권인 《원시신화》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가장 주목하게 되었던 것은 마르가와 가면의식, 기괴한 사고(accident), 은폐하는 우화(Screening Allegory) 그리고 이 모두를 인간의 의지로 구현하여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통합적 새신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가져올 수도 있을 생득적 방출기제(Innate Release Mechanism)에 대한 서술이다.


조지프 캠벨은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 가운데 최고의 선물은 미성숙함 자체'라며 '인간은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놀이 능력을 지니고 있다' 고 말한다. '정신의 고귀함은 천상에서든 지상에서든 놀이를 할 수 있는 능력' 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예를 든 것이 중세 유럽의 기사도 양식과 비슷한 일본어 화법인 '아소바세-코도바' (놀이 언어)이다. "자네 아버지께서는 언제 죽음을 연기하셨는가?" "제 아버지께서는 삼일 전 죽음을 연기하셨습니다" 부친이 언제 돌아가셨는지에 대한 대화이지만 이 일본어 화법 속에서 부친은 하나의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어에서는 돌아가셨다라는 죽음에 대한 표현양식과 다른듯 하면서도 유사하다. 한반도에서의 선조들은 죽음이라는 과정으로 오셨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계신 것이고 일본에서 일본인들의 선조들은 한편의 연극으로서 죽음을 연기하고 연출하는 것이다. '일본인의 삶의 이상에서 나타나는 비상할 정도의 열정과 엄숙함은 하나의 허구에 의해 가려져 있다. 그것은 인생만사가 놀이일뿐이라는 멋진 허구이다.' 


조지프 캠벨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 속에서는 삶도 죽음도 한편의 놀이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그가 말하는 놀이가 너무도 처연하게만 다가온다.


원시적 의식 속에서 샤먼은 '신의 가면을 쓰고 의례를 행한다. 의례 속에서 그는 신과 동일시된다. 그는 단지 신을 표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 자체이다.' 이 의례 속에서는 (as if~), (make~believe) "마치 ~인체 하는" 즉 "마치 ~인 것 처럼" 이라는 논리가 지배한다고 한다. 이것은 자신이 신이 되었다는 믿음이 바탕하며 진행되는 하나의 게임이며 이 "'믿음의 게임'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축제의 놀이'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조지프 캠벨은 이야기 한다. 믿음을 통해 '일상적 세속적 논리가 연극과 놀이의 논리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 이 믿음은 그저 하나의 가정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단지 "무엇인 척" 하는 것으로 또는 "동일시"하는 것으로 저자나 서양학자들이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르게 진리의 인식인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진리의 인식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단하나인 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인도의 수행철학체계의 근간이 담긴 '소흠' 또는 '소함'으로 음역되는 만트라는 그 반대의 '함사' 만트라와 함께 수행하도록 하는 체계이다. '소'를 '그것(It)'으로 번역하던데 이는 영어권 수행자의 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어권에서는 '그것' 보다는 '그' 또는 '그녀' 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그로 해석하던 그녀로 해석하던 서양인들 처럼 그것이라 하던 모두 유일한 한분의 절대자를 말하는 것이다. '흠'은 '나'를 뜻한다. 들숨에서 '소' 또는 '사' 음이 날숨에서 '흠' 또는 '함'음이 동반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나면 이 만트라는 "그는 나이다" "나는 그이다"가 거듭 반복되는 것이 우리의 호흡이며 살아 숨쉬는 동안 한결같이 지속되는 존재의 가르침임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는 둘이 아니다. 그와 나를 둘로 보게 하는 존재의 차원 전체가 하나의 꿈이며 기만일 뿐이라는 것이 인도 베단타 요가철학 체계 가르침의 핵심이며 축이다. -


- 축제의 놀이영역에 대한 조지프 캠벨의 말을 좀더 인용하자면, "그 놀이 영역에서는 재미와 기쁨 그리고 황홀감이 단계적으로 힘을 발휘한다. 거기에서는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삶의 법칙들, 즉 경제학과 정치학 그리고 도덕법칙이 사라진다. 그 다음에는 타락 이전(선과 악, 옳고 그름, 참과 거짓, 믿음과 불신에 대한 지식이 생겨나기 이전)의 낙원으로 귀환하여 새롭게 거듭나게 되고, 그 결과 놀이의 인간(호모루덴스)의 정신과 관점을 삶 속에서 다시 회복하게 된다. 아이들의 놀이에서 처럼, 그러한 상황에서는 진부한 삶이 현실에 기가 꺾이지 않은 채, 순수한 놀이의 기쁨을 위하여 다른 어떤 것과 스스로를 동일시 하는 자발적인 정신의 충동이 이 세상을 성스럽게 변화시킨다." -


조지프 캠벨은 '놀이의 경우 처음 순간 강조되는 것은 "사로잡힘(seizure)"의 황홀이 아니라 놀이의 즐거움(fun)' 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믿음(belief) 혹은 믿음의 놀이는 "사로잡힘"의 상태로 나아가는 첫걸음' 이라고 한다. 그러니 결국 사로잡힘의 상태로 나아간다는 말인 것이고  '...그들이 "사로잡힘"의 경험을 하기전에 겪은 "기나긴 시련"' 에 대해 논하기에 이른다.


원시전통 속의 샤먼은 기나긴 시련, 가혹한 시련으로 일컬어지는 고통의 시간들을 견뎌내야 한다. '고통을 통해서만이 지혜에 이를 수 있다' 면서 말이다.


- 이것은 기독교 성자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위의 문장에서 마지막 따옴표 안의 '그들이' 로 시작하는 문장을 인용하며 임의로 '성자전에는' 이라는 주어를 생략했다. 결국 샤먼에 대한 내용이면서 동시에 카톨릭 사제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


기나긴 시련, 가혹한 시련이라는 고통의 길 '마르가' 는 인도철학의 용어 '우파디(upadhi)' 로 설명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용어는 '깨달음의 특성' 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존재의 기만적 속성' 들을 이르기도 하는 말이다. '고통' 은 실체가 아닌 속임수이며 그 고통 안에 존재하는 '환희' 라는 깨달음의 특성만이 실재할 뿐이다. 이것이 우주적 진실이기에 '깨달음의 특성'인 것이며 '존재의 기만적 속성'이라는 것이다. 조지프 캠벨은 '비극적 고통이라는 것은 존재의 기만적 속성이며 이것을 통해 근원적 비밀'에 이른다는 것이 원시신화와 인도철학 용어가 합일점을 찾은 관점이라는 듯 주장을 한다. 그렇기에 '죽음은 기만인 것이고 부활이라는 진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환희' 라고만 하기엔 샤먼은 '기나긴' 그러면서도 '가혹한' '시련' 속에서 '위대한' 이라던가 '엄청난' 이라는 미사어구가 더해진 '고독'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가 겪어야 하는 시련과 고독은 길고 긴 시간 가혹하고 엄청난 규모로 덮쳐오고 지속되는 것이다. '엄청난 고독'이라는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숨겨져 있던 모든 것이 한사람의 정신세계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고는 하지만 이 과정은 '영적 정화'니 '자아 비우기'니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 보았자 "궁핍(privation)과 자아가 발가벗겨지는(stripping of the self)" 과정이 동반된 고통만이 주도적인 길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편 51: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시편 109:22]' 에 해당하는 상태로 내몰리기 위한 바로 그 길이라는 말이다. 이 고통이 환희로 바뀌어야 할 '비극'은 '마음의 초점을 바꿈' 으로써 비극이 끝나고 희극이 시작된다고 한다. 즉, '비극의 양식이 끝나고 신화가 시작된다' 는 것이다. 샤먼은 '신화의 시적 변형' 인 이 '비극' 이라는 '심리적 위기'를 통해서야 '자기만의 고유한 힘'을 획득하는 것이라 한다. (레법이냐ㅡㅡ^ 2C)  


- 이 길에서 그는 사랑 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 메마르고 불사르는 지옥 불구덩이만도 못할 지구에서, 목타오르는 갈망 속에서도 단하나의 사랑 조차 허락되지 않은 삶이라는 말이다. 조지프 캠벨은 말한다. "낮은 차원의 대상에 대하여 느끼는 사랑과 애착은 실은 높은 차원의 대상 안에 자신을 잠재적으로 확립하는 작용이다. 그러나 만약 정신이 본연의 목적에 도달하려면 낮은 차원의 대상에 대한 사랑을 희생해야만 한다."


결국 한사람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통해 하나님께로 향하여야 하고 한사람을 통해 간절한 사랑을 깨닫고 나면 그 단 한사람을 향한 사랑은 좌절 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으로써 하나님 밖에는 못보는 외곽으로의 시야는 가려진 채 달리는 경주마 같은 신세가 되어 오아시스의 한모금도 그저 한줌의 물도 허락 되지 않은 삶이나 살아야 하는 것이 샤먼과 사제의 삶이라는 말인 거다. (엿 같다! 절대 '요깟다'가 아니라!) -


이 과정에서 동반되는 것이 있다. 그건 '원시의례에서는 "사고(accident)"로 간주되는 것이 우주체계의 중심에 놓여있다'고 저자가 말한 바로 그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동반되는 것이라기 보다 '우주 체계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으로 저자가 언급했듯 이 의례의 축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그 축이라는 것은 바로 "갑작스럽고 기괴한 죽음" 을 이른다. '이러한 "사고"는 우주의 질서가 지닌 잔인성의 계시로 간주된다' 는 것이 저자의 관점이다. '이렇게 계시된 것은 단지 이 세상이 지닌 일상성의 기괴함이 아니라 우리의 둔감한 능력으로 느끼는 것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실재성을 지닌 일상성'이라 한다. 이런 '신적 의지를 지닌 기괴함'을 내용으로 하는 계시가 '그러한 기괴함의 형태를 지니는 것은 신이 모든 활동에서 그 자신을 현실화하기 때문'이라 것이 저자의 성찰이다. 그래서 저자는 '신화는 이 세상의 기괴성과 경이감의 표출' 이라 정의하고 있다. 앞서 "갑작스럽고 기괴한 죽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나 "일상성"이라는 어휘의 사용이 반복되었듯 갑작스럽다 하여도 경이라 하여도 기괴하다 하여도 그것은 '갑작스러우면서도 경이롭고 기괴한 "일상"의 문제인 것이다' 세계와 우리 자신의 날들에서 일어나는 현실 말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신화를 통하여 우리는 세계와 우리 자신을 깊은 차원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기괴한 사고'에 대해 결론 짓고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조지프 캠벨의 주장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응 해보자. 신의 가면을 쓰고 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원시의례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던 예수님의 말씀에 수긍하던 기독교인들을 통해 더욱 온전히 완벽한 연극으로 완성되었다. 예수님 사후 요한복음서를 통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며 예수님을 하나님과 완벽한 일체를 이루는 존재로까지 온전히 빈틈없는 하나의 극으로 완성되지 않았나? 게다가 '만물이 그로 하여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느니라' 라는 구절로 인하여 바늘구멍 하나만한 빈틈도 없을 완벽함을 갖추게 된 것이다.


사실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 하여 어찌 하나님이겠나? 비유하자면 자신의 아버지 곁에 있는 이가 모두 아버지라는 논리는 성립될 수없는 논리일뿐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 내지는 부분적 분할(할애)을 통해 존재케 되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사용하셔서 말씀을 근간으로 존재의 차원을 창조하신 것이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말씀일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 하나님이시다는 논리를 담은 구절은 예수님 생존시 허락을 구하고나서 요한복음서가 쓰여졌다면 예수님께서 허락하셨을리 없을 논리적 오류 자체인 구절이다. 그리고 말씀을 현대 과학으로 보자면 말씀이라 할 때는 정보를 담은 소리를 말하는 것일테고 이는 현대물리학에서 아마도 파동이라 이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파동은 시각영역을 자극하는 대상이 될 때는 빛, 색깔, 형상을 띠게 되며 청각영역을 자극하는 대상으로는 소리가 될 것이며, 촉감으로는 냉감 열감 등등의 느낌으로 접수 될 것이다. 이 파동의 주파수 대역으로 아마도 초끈이론에서 끈의 파장이 달라지며 물질의 최소구성인자의 종류가 결정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씀이란 애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차원들 중 우리가 거주하는 물질 우주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원리 자체를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이지 인격체를 상징하는 것일 수 없다. 그럼에도 요한복음은 창조자와 구성원리를 인격체와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창조자와 창조자가 창조한 구성원리 그리고 한명의 인격체를 동일시함으로써 원시부족의 가면의례와도 같이 하나의 신화가 온전함을 갖추게 된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이 아들이라 하고 그를 신앙하는 이들은 그를 하나님과 동일시함으로써 as if~, make beleive~ 라는 의례이면서 동시에 놀이인 논리가 완성된 것이다. 이렇게 신인 체하고 신이 되었다고 믿는(가정하는) 의례의 필요성과 그 기능에 대해 조지프 캠벨은 인도의 간다르바 탄트라를 들어 설명한다. 


"스스로 신이 되지 못한 사람은 제대로 예배할 수 없다. 신이 된 사람만이 신에게 자신을 제물로 바칠 수 있다." -  간다르바 탄트라(Gandharva Tantra)


신에게 제대로 예배한다는 것, 신에게 자신을 제물로 받칠 수 있다는 것은 모두 스스로가 신이 되는 것이 전제가 된 이후의 결과이다. 즉, 신이 되는 것은 의례를 완성하는 전제 조건이며 이러한 전제는 바로 신의 제물이 되고 신에게 예배하는 다시 말해 신에게 귀속되고 환원되는 과정 그 자체를 이르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은 신이 되어야 신의 것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란 논리적 귀결에 이르도록 한다.


따지고 보면 기독교적으로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본따 즉 하나님의 구조대로 만들어져, 하나님의 부분을 담으면서야 창조가 완성된 존재이기에 처음 부터 하나님과 그 피조물인 우주와 인간 이 셋이 모두 완전히 독립되기만하고 단절되어 있는 존재라고만 우기는 것은 애초에 막무가내식 억지일뿐이었다. 그렇다고 독립적인 존재가 결코 아니기만 하다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이기만 하거나 단절되어 있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다시한번 언급하겠지만 조지프 캠벨이 말하는 '자아의 상실과 자아의 고양이 동일하게 느껴지는 순수한 황홀의 경험'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자아의 상실'과 자아의 고양'이 어떻게 같으냐? 무슨 말 장난인 것이냐? 고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여기까지 이르는 포스팅들을 건성으로 스킵해가며 하얀 행간만 읽은 것일 거다. 자아의 상실은 자신의 자아 곧 내가 사라지며 자신이 사랑(신앙)하는 대상만이 자신을 충만히 채우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아의 상실과 동일하게 느껴지는 자아의 고양이라 한다면 결국 자신의 근원이자 자아 상실 상태의 자기를 압도하며 충만히 채운 대상(근원적 일자)만이 온전히 자신과 모든 차원의 우주에 가득해진 상태를 이를 것이다.  


그래서 조지프 캠벨은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이의 미분화 경험이 성인의 개별화 경험 보다 더 깊은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개개의 유기체는 결코 자연에서 독립해 있지 않다." "모든 신비주의가 추구하는 가장 큰 목표는 자아라는 이슬방울을 전체라는 대양 속에 소멸시키는 것, 즉 자아를 비우고 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이미 예로 들었던 '소함'과 '함사'의 의미인 "나는 그이다." "그는 나이다."가 영혼 깊숙히에서 의미 그 자체로서 아니 존재적 차원 그 자체로서 충만히 온전히 진실임을 깨닫게 하고자. 스스로가 또는 우리의 대표라 할 상징적 존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상징적 존재의 대표적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이어서 계속됩니다

삶의 충만성은 회복과 귀환의 길을 깨닫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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