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진화 - 그들은 어떻게 시대를 앞서갔는가
미하엘 슈미트잘로몬 지음, 이덕임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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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진화 #니하엘슈미트잘로몬 #추수밭 #과학 #철학 #사상 @chungrim.official

 

#청림출판사 로부터 #도서협찬 을 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에 소개글을 읽고 관심이 인 이유는, 기존의 통념을 깬 통찰과 사유가 무엇이었는지 또 그들의 사유와 관점이 이 시대를 가져오고 이 시대를 유지하게 한 면은 있는지 그래서 그들과 같은 남다른 통찰과 사유를 가지려면 그들의 어떤 면을 배워야만 할 것인지 깨우칠 기회가 되리라 믿어서이다.

 

바로 본서의 특징을 짚어보자.

 

첫째, 전기문 형식 구성

이 책에 오른 과학자, 철학자, 사상가들에 관한 서술은 비단 그들의 사상이나 과학 이론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학적 발견의 시점이 중심이 되긴 하지만 그들 생의 단면이 담겨있다.

 

둘째, 사상과 이론만이 아닌 그들의 생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전기문 형식이라고 정의한 이유가 바로 이점 때문이다. 다윈이 진화론에 대한 책인 [종의 기원]을 집필하고도 오랜 세월 출간을 미룬 그의 종교성과 사상가로서의 지성 사이의 갈등 그리고 진화론 외에도 지렁이의 생태가 농업에 혁신을 줄 수 있다는 등의 실용성을 고려한 학문적 연구 등이 담겨있기도 했다. 마리 퀴리가 연구에서 자신을 혹사하다가 유산을 하였다거나 남편 피에르가 40대에 그녀와 잠시의 다툼 후 돌연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자 30대에 미망인이 된 마리 퀴리가 평생 웃음을 잃은 이야기도 그녀의 성취만이 아닌 인간 마리를 이해하게 한다. 또 현대의 쾌락과는 결이 다르나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가 신장결석으로 소변을 볼 때마다 극도의 고통을 느낀다며 친구에게 하소연하는 장면은 철학자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으로서 겪는 생의 어려움이 그 자신의 사유나 신념에 대한 시험일 수 있음을 느끼게 한다.

 

셋째, 영향력

각 과학자와 철학자, 사상가의 생각들이 기존의 통념을 깨기만 한 게 아니라 이전부터 전승되던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계승했는지 또 동시대의 사상가나 예술가와 어떠한 영향을 주거나 받았는지를 알 기회가 되며 다음 세대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헤아리게 한다.

 

이를테면 칼 세이건의 장에서는 데모크리토스의 영향을 논하기도 하고, 아인슈타인의 장에서는 그의 발견이 양자역학을 발견한 과학자들과의 갈등을 빚은 이야기가 잠시 언급되기도 한다. 마리 퀴리의 장에서는 그녀의 사후 11년 후 핵무기가 실제 투하된 사실을 언급하기도 한다. 니체의 장에서는 니체가 에피쿠로스를 언급하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리기도 하며 알베르 카뮈가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과 허무에 대한 관점에서 더 나아가 부조리의 철학을 완성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칼 마르크스의 사상 역시 에피쿠로스와 니체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는 동시대의 하이네 같은 예술가들과 영향을 주고받았다. 니체가 그 이후 철학과 사상 그리고 예술에 미친 영향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를 설파하면서도 사회계약개념의 토대를 완성하였고 신에 의지하는 인간의 성향을 비판하며 인본주의로 나아갈 토대를 마련했다. 줄리언 헉슬리는 우생학트랜스 휴머니즘의 주창자였는데 그의 견해가 현재의 트랜스 휴먼과 유전공학으로 맞춤 아기를 생산하자는 등의 주의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베게너의 판 구조설은 지각변동에 대해 논하며 기존의 일관되고 고정된 것이 세계라는 상식을 깨어 대중이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에 영향을 미쳤다.

 

넷째, 이와 같은 감상에 이르게 한다.

본서는 대체로 기존의 통념을 깨는 과학적 발견과 사상적 개가가 어찌 일어났는지를 다룬 책으로 소개하고 있던데 그보다는 현재의 세계를 만든 사람들의 생각은 어떻게 진화해 온 것인지알아가자는 게 이 책에 다가서는 더 나은 태도가 아닌가 싶다. 과학도 사상도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 이전의 철학이 계승되거나 그 철학에 반박하며 발전하였고 동시대의 학문들이 서로를 통해 성찰하며 이루어낸 것이 통섭되어 현재의 세계관과 세계 자체를 만들게 된것이다.

 

본서는 이 시대를 돌아보기에 꼭 필요한 사상을 전한 학자들을 꼽아 논하고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언급했듯 정보의 선택이 그 구성만큼이나 중요하니 말이다. “그들의 사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본주의라는 인간 중심사고를 불러왔고 현대 사회의 정치구조나 국민적 상식을 구성하게 했다. 또 가이아 이론과 트랜스 휴먼, BCI 기술 등 새로운 이론과 사상과 관점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태도, 인간의 자기 개선이나 영향력 확장 등에 대한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 시절의 상식은 그 시대가 오기까지 인간들의 사유가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것이란 걸 이해하게 해주는 책이다.

 

다만 이 시절은 인간이 기반해온 인본주의와 인간 중심사고를 너머 인간이 식물 중심사고 등 타자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전환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재는 인간이 이룩해온 기술과 제도가 되려 인간을 옭아매는 현재와 미래를 맞이하기도 했고 맞이할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이 이룩해온 것들은 논리와 이성에 의해서이기도 했지만, ‘감성에 입각한 짐작, “상상이 역할을 한 부분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세계의 체제들은 대부분 미래 예측기구를 두고 있고 이들은 데이터와 추론과 짐작을 가지고 미래 예측을 한다. 대부분 이들의 예측은 정확했다. “정보와 논리와 상상은 이렇게 인류를 지탱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모두가 인류에게 고정된 건 없다. 인류가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있다. “과거가 인간 중심사고인 인본주의로 인간을 부흥시킨 시절이었다면, “인간이 이룩해온 제도와 기술과 가치관(개인주의, 자본주의, 능력주의, 승자독식, 적자생존, 약육강식 등)이 다수의 인간에게 파멸을 불러오게 될 이 시절에는 인본주의 이상의 관점을 찾아 나아갈 필요가 절실하다. “‘인간은 그저 자연의 일부라는 것 우주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이라는 걸 인간도 이제는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그런 시각의 [생각의 진화 2]이 등장해 주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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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을 파는 의사들 - 의료시스템은 어떻게 우리를 약물 의존으로 내모는가
애나 렘키 지음, 중독성 처방약물에 신중을 촉구하는 의사들 옮김 / 오월의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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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을파는의사들 #애나렘키 #오월의봄 @maybooks_05

 

출판사로부터 #도서협찬 을 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본서의 원문 제목은 [Drug Dealer, MD]라고 한다. 직역하면 마약상 의사라는 뜻이다. ‘추천의 글에서 미국의 중독 정신과 전문의이자 예일대학교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나종호 교수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부패한 시스템 속에서, 환자의 통증을 덜어주려는 의사들의 마음과 중독에 대한 무지가 결합할 때,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의사들은 이 책을 통해 뼈저리게 배웠다.”

 

이 책은 영어와 한글 제목 모두에서 의사가 중독을 판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건 모든 중독의 원인이 의사의 잘못된 처방이라는 말일까? 그렇다기보다는 나종호 교수의 [추천의 글]에서 보이듯 현재 대부분의 중독 사례는 시스템적인 문제로 야기된다는 것이 본서 저자의 설명이다.

 

본서를 읽으며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이건 중독된 환자가 이 책에서는 물질사용장애라고 번역된 마약성 약물에 중독되기를 추구했기 때문만도 아니고, 의사의 부주의한 처방 때문만도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정책적인 문제가 더 깊어 보였다.

 

의사의 처방이 부주의한 이유나 환자가 쉽게 중독에 빠지는 이유를 저자는 이 시대의 통증에 대한 정의와 관련지었다. 과거에는 통증이 말해주는 질병에 대한 경고를 중시하거나 통증으로 정신적 성장을 한다는 서사를 중시한다거나 하며 통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통증이 영구적인 손상을 일으키고 이후 또 다른 통증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고 믿는다고 한다. 이러한 통증에 대한 믿음이 중독성 처방약물의 대유행을 초래한 한 가지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심리적 트라우마도 정신적 상처를 남기고 결국 미래의 고통을 초래한다는 정의 역시 정신과 약물의 중독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

 

의사도 이렇게 배우고 환자에게 역시 이러한 관점은 상식이 되었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중독성 약물을 처방하고 처방받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 관계에서 의사의 좋은 의사이고자 하는 마음이 중독성 약물 처방을 남용하는 원인이 되고 이렇게 처방받은 약물에 중독된 환자의 약물의존성이 약물 처방을 유도하는 계기가 되어 악순환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본서에서는 현재 중독이 대부분에 경우 의사의 처방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의사가 좋은 의사이고자 하는 경우 외에, 환자가 중독성 약물을 처방받으려 다채로운 수단을 이용하는 경우를 13가지 유형으로 유형화해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책의 후반부 즈음에서는 저자가 처방을 단호히 거절하자 병원과 의사 평점에 별점 테러를 가한 환자 사례를 서술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백미는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의 처방문제만이 아니라 정부의 정책의료 산업의 부조리시스템에 관한 문제 제기이다. 정부의 정책으로는 군대에서 병사들의 성취도를 높이기 위해 중독성 약물을 사용하거나 참전용사들을 위한 치료에 너무도 쉽게 약물을 처방하도록 한 문제를 들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나라 표현으로는 의료수급자나 미국에서도 장애급여를 받는 환자들에게는 중독성 약물이 더 쉽게 처방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본서를 한국어로 번역한 분들도 [중독성 처방약물에 신중을 촉구하는 의사들]이니 비단 이런 정책적인 처방 남용이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본서는 정책과 의료 산업의 문제점이 중독을 양산하고 있다는 걸 지적하여 대중이 이 사안에 대한 경각심과 관심을 가지고 더 나은 대안을 찾아가길기대하고 집필한 저작이 아닌가 싶다.

 

과거 세계대전 시기부터 국가와 기관이 병사와 민간에게 중독성 약물을 처방하고 상용하게 하던 악습이 아직까지 이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이제는 인식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자아 초월심리학과 같은 학문 분야에서 아직도 비일상적 경험을 위해 향정신성 약물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어느 경우나 문제는 검토와 제재보다는 정부의 허용과 권유가 앞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확실한 검토와 검증이 뒷받침된 적절한 제재와 처방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이런 문제는 앞으로도 양산될 것이다.

 

국가가 안정된 상황에서는 정부를 움직이는 것은 국민의 의식이다. 우리가 의식을 제대로 가지려면 사회적 사안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작은 관심이 보다 깊이 주목하게 하고 그런 관심과 주목이 행동으로 이어지면 사회는 결국 바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저자가 펜을 든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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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그니티 플랜 - 우리는 어떻게 나쁜 세상과 싸우는가
양정훈 지음 / 수오서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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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그니티플랜 #양정훈 #수오서재 #인권교육서 #인권기본서 #요조앤서평단

 

요조앤 @yozo_anne 이 모집한 서평단에 선정되어

수오서재 @suobooks 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본서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은 내일 자신의 새끼손가락이 잘리게 돼 있다면 오늘 잠을 못 자겠지만 지진으로 어느 대륙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에는 동요 없이 곤히 잘 수 있다

 

글쎄,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아무리 빅뱅 이론과 양자역학을 적용해 한순간 같이 생성된 두 광자 사이에 양자얽힘이 작용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둘은 동시에 똑같이 반응한다는 양자얽힘(양자중첩) 현상을 빅뱅 시 우주 만물은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동시에 생성된 물질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양자얽힘 현상과 같이 우주의 모두가 얽혀서 동시에 함께 울고 웃는다고 말한들, 우리는 이러한 진제의 세계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이고 각자 살아가는 거라는 속제를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인간의 본능은 생존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고 자신의 생존에 그리고 자신의 영속성에 무엇보다 가장 절실하게 반응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시대의 우리는 시대가 주는 공허함으로 인해 무언가 정의와 진리가 드러날 순간은 없을까?” 기대하게 되고, 그런 까닭에 사회정의에 눈뜨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차별철폐 주의소수자 우대’, ‘다양성 존중과 같은 ‘Woke’정치적 올바름이 대세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반대쪽에서는 Woke나 정치적 올바름으로 무장한 이들이 상대방은 무조건 절대악으로 치부하거나 이해력이 딸리는 지적으로 열등한 자로 몰아가는데 반발해 갈등과 충돌이 빚어지고 있기도 하다. 누군가가 지키고 싶어 하는 규범과 전통을 존중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사회적 울음을 감각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시작이 있지 않겠는가하는 물음에는 응당한 답이 분명히 있지 않나 싶다. 이 말은 귀족 노조를 포장하거나, 먹고 살자는 사람들의 출근길을 방해하는 장애인들의 강경 시위를 비호하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너와 나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의 구성원인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길을 찾자는 말이며, 이미 쓰러진 채 시작하며 일어서서 나아가려는 데에도 일어서기도 쉽지 않은 세상을 바꿔보자는 바람일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일어서고 나아가려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들에 대한 대중의 반응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러한 노력과 반응이 어떠하며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인권을 그저 천부적인 것이니 지키면 되는 거라는 식의 말은 하지 않는다. 사실 존중하지 않는 사회, 존중의 필요성을 모르는 사회, 존중하는 법을 모르는 사회에서는 존엄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살인과 강간, 폭력 등 범죄가 난무하고 약자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약자가 찾을 수 있는 존엄이란 없다. 짓밟힌 채 썩은 표정으로 일어서서 나는 존엄하다고 외친들 거기서 지켜진 존엄과 지킬 존엄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것이 개인의 무력함만을 탓하며 네가 돈도 권력도 빽도 없이 태어나 그런 걸 갖추지도 못한 생을 살았으니 네 탓이다라고 하고 말 문제도 아닐 것이다. 당연히 존엄을 지키는 일에는 공권력이 개입해야 하고 사회적 정의가 역할을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저자는 국가의 책무성부터 언급하고 있다. 국가란 원래 국민을 수호하고 서로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 시선을 두어야 하는 곳은 어디부터일까? 우리는 아마도 약자소수자에 대한 정의부터 알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회적 약자사회적으로 불리한 상황과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고 저자는 정의해준다. ‘소수자사회구조가 갖는 모순과 불평등 때문에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거나 제한적으로 누리는 집단 속 구성원을 일컫는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불리한 상황과 위치에 있으며 모순과 불평등 때문에 불이익과 피해를 입는 집단이나 그 구성원이 약자이며 소수자라는 것이다.

 

비장애인이거나 살만한 사람들은 누구나 이것은 우리와는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시절에 누구나 인식하지는 못한다 해도 다들 불리하고 모순되고 불평등한 상황에 놓여있다. 자본주의와 함께 전파된 능력주의, 승자독식,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라는 관념들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능력있는 놈, 이긴 놈이 다 갖는 게 타당하고, 강한 놈만 살아남는 세상에서 약자는 밥이 되고 강자가 잡아먹는 건 순리라 생각하며 살고 있다. 간혹 기업과 부자가 돈을 벌면 낙수 효과로 하위계층에게도 유익하다며 자위한다. 그런 자위는 마스터베이션보다도 못한데도 말이다. 세상의 이치와 돈의 흐름을 알고 보면 돈은 아래로 흐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돈은 위로 흐른다. 그리고 가진 자가 더욱 갖게 되는 구조로 이루어진 게 세상이다.” 능력주의 세상이라면서 능력대로만 운영되지 않는 세상이고, 가진 자들은 사회적 기준과 규정 곧, 법을 만드는 이들에게 후원하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회 기준과 원칙을 창조할 수 있는 이들이다.

 

토마 피케티를 위시한 많은 경제학자와 사회학자, 사상가들이 다양한 저작에서 이에 대해 고발하고 있다. 사회는 이미 모순되어 있으며, 구조 자체가 다수에게 불리하고, 이 모든 건 불평등속에서 이루어져 더한 불평등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대중이 이미 사회적 약자인 것이다. 이런 속에서도 우리는 다른 약자들을 외면하고 냉대할 수 있겠는가? 근본적으로 같은 처지에서 우리보다 더 약자이니 너희는 외면당해도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저자가 한 많은 이야기 가운데 비가시성에 대한 대목이 와닿았다. 우리는 약자와 소수자들은 보지 못하거나 못 본 척한다. 그들은 우리 눈에 좀처럼 띄지 않는다. 그건 우리가 보지 못해서이기도,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 스스로 숨어있기만 한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저자가 말하는 해법은, 여러 이야기가 향하는 바는, 사회적 논의와 공공의 관심이 되기도 하겠으나, 달리 집단의 힘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집단적 정체성을 단단히 하며 커뮤니티 등의 집단을 강화하는 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자기 범주화를 통해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여 사회적 배대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이다. 이 말은 자기를 끼리 모여 자기 집단에서 결속하고 연결감을 느끼며 자기 집단 내에서 역할을 다하라는 말만이 아닐 것이다. 세상과 하나가 되라는 말이다. 세상이라는 집단 속에서 우리 모두가 구성원이라는 의식을 가지며 자신을 서로를 대하라는 말이다. 서로 너는 나와 다르다낙인을 찍고 배제하지 말고 어우러져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시대가 나아져 인권을 소리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서양 문명이 득세하며 인권과 복지는 하향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대의 기록을 보면 관노비에 대한 출산휴가가 이 시대와 비교할 때 놀라운 수준이었다. 산모에게는 130일의 휴가를 주었고 그녀의 배우자에게는 그 산모를 보살피라고 30일의 휴가를 주었다. 그것도 유급 휴가로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의창이 있어 흉년이나 재난 시기에 빈민들에게 곡식을 빌려주었고,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혜민국(혜민서)에서는 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며 의약품과 의복을 제공했다. 제생원(활인서)에서는 전염병 환자와 빈민 환자를 치료하고 구호했다. 소외계층에 대한 복지로는 환과고독 구휼이라 해서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 등 의지할 바 없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구했고, 장애인 복지로는 패질자 구휼이라고 해서 장애인을 먼저 구휼하고 이들이 죄를 지어도 관대하게 처벌했다. 그리고 시각 장애인들의 취업을 위한 명통사 등의 기관과 단체를 마련해 이들의 자립을 도왔다고 한다.

 

이 시절의 우리는 개인주의능력주의를 위시한 승자독식, 적자생존, 약육강식논리에 빠져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생각이 당연하다 여기며 살고 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 반투어에서 유래한 우분투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결국 우리가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분별을 망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분별 망상으로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없다면 나도 없다는 게 사실이란 걸 뼈저리게 느끼는 것도 사람의 삶이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이 세상이라면 우리는 함께라는 의미를 되새기며 함께 서로를 지키며 살아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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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으로 살지 말라
로드 드레허 지음, 최봉기 옮김 / 드러커마인드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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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으로살지말라 #로드드레허 #드러커마인드 #인문 #전체주의 #연성전체주의

#단단한맘_하하맘_서평단 @gbb_mom @wlsdud2976 @happypress_publishing

 

<단단한 맘님과 하하맘 서평단 모집>을 통해 #도서협찬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단단한 맘님의 서평모집을 통해 본서가 전체주의에 대해 알 기회가 되는 책이라 생각해 저자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상태인데도 우선 관심부터 갔다.

 

저자는 [더 아메리카 컨서버티브]의 선임 편집자이며 유명 언론들의 기고가이자 편집자라고 한다. 한마디로 언론인이자 작가다. 그의 유명 저작으로 [베네틱트 옵션]이 있다는데 무거운 주제의 책은 많이 못 읽어봐서 리뷰어 본인에게는 생소하다.

 

본서를 읽으며 애초에 전체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했기에 전체주의가 경성과 연성으로 이 시대에는 구별되고 있다는 것부터 주목되었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과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등이 전체주의의 국가들이었다는데 그 당시의 전체주의는 모든 것은 국가 안에 있으며, 국가 외에, 국가에 대항하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는 주의였다고 한다. 1부의 전반부에서 전체주의는 사람의 행동뿐만이 아니라 사상과 감정까지도 통제하고자 한다는 문장도 있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20세기 초, 지식인들의 삶 속에 비어있는 공허감을 채우게 되었다는 문장도 있지만, 다른 어떤 설명보다 모든 것은 국가 안에 있으며, 국가 외에, 국가에 대항하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는 이 문장 하나가 가장 전체주의를 잘 설명하는 것 같았다. 저자는 전체주의란 사회 지배 이데올로기와 상충하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국가를 의미한다고 간단명료하게 정의해주고 있다. 이 과거의 원형적인 전체주의를 이 시절에는 경성 전체주의라고 한다.

 

그렇다면 연성 전체주의란 무엇일까? 저서의 내용 전체를 흐르며 설명되었지만 역자인 최봉기 교수님의 설명이 간결하면서도 강렬하게 와닿는다. 역자분은 ‘SNS, 스마트 기기, 결제 시스템, 감시 시스템, 알고리즘, AI의 기능과 그로 인한 통제들이 어우러지며’ “인간의 삶을 잠식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배해 가고 있는 현실이 전체주의 통제의 예비 단계라고 말씀하고 있다. “PC/Political Correctness, Wokeness, 동성애, 성전환, 퀴어 등 젠더 이슈, 문화 삭제, 역사 지우기, DIE 즉 다양성/diversity, 포용성/inclusiveness, 평등성/equality, 사회정의 운동 등을 통하여 심화되면서 전체주의 예비 단계를 형성한다.”고 부연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이념과 사고들이 연성 전체주의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한마디로 사회정의라며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시작해, 자신들의 주장을 절대적인 정의라 각인시키면서 대중의 다양한 사고와 반응을 억압하며 사회 통제를 강화해 나아가는 것이다.

 

미국의 PC주의나 Woke 그리고 다양성, 차별철폐주의 등을 떠나 한 집단에서 자신만이 정의이고 선이라는 신념과 주장이 폐단인 것을 나로서는 미국의 진보주의 사상가들이 내놓은 다양한 저작들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었다. 다니엘 지블렛의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레오르 즈미그로드의 [이데올로기 브레인], 미치코 가쿠타니의 [거대한 물결], 앨리 러셀 혹실드의 [도둑맞은 자부심] 등에서는 진보주의 지지자인 저자들이 진보인 자신들만이 정의이고 바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듯 서술하고 있으며, 보수를 지지하고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들은 뇌과학적으로 내재적인 문제로 인한 오류가 있거나 패배주의자로서의 상실감 때문에 보수와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는 듯 서술하고 있었다.

 

이들이 지지하고 있는 차별철폐주의나 다양성, PC주의와 Woke로 인해, 미국의 스포츠계와 학교와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때문에 미국에서는 오히려 여성이 성취할 길이 무너지고 있으며, 교육 현장의 아이에 대한 지지라는 명분의 강제로 부모의 반대에도 성전환을 무턱대고 받은 아이들이 쏟아내고 있는 후회의 토로들을 그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다양성 정책과 성소수자 우대 정책으로 캘리포니아 주의원이 된 성소수자들이 아동 성범죄에 대한 법안에 관해 성소수자들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들이 아동 성폭력범이라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인) 일종의 고해와도 같은 이유로 법안을 반대해 아동 성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캘리포니아 주법의 개정이 저지된 것 역시 이들의 주의와 사상이 얼마나 문제적인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인식한 사람들이 미국 민주당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보수지지자들이 늘어나고 트럼프 대통령 지지층이 증가한 효과를 가져온 것인데도 그들은 보수와 트럼프 대통령 지지는 뇌의 오류이거나 패배의식 때문이라며 자기 최면과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자기들이 만든 문제로 진보의 지지층이 무너지고 있다는 자체를 그들은 부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누가 뇌에 오류가 있으며 사회를 망치고 있는 패배자인지 그들은 자각 조차 못하고 있다.

 

한국만 해도 귀족 노조도 있는 지경에 노동자는 모두 희생자라는 프레임이 아직도 대중적으로 주장되고 있다. 진보가 주장하는 게 정의라는 관점으로 중국인들의 여론 개입과 (한국인에게는 거래가 제한되는 와중에도) 중국인 부동산 매매와 중국인에 대한 교육 특혜, 입학 특혜, 취업 특혜, 의료보험 특혜 등은 이어지고 있다. 일당이 국회를 장악하여 정권과 함께 국가와 국민을 수호해야 할 군을 무력화하여, 나라 곳곳에서 북한제 군사 무기 등이 발견되기 시작했고, 강원도에서는 땅굴을 파는 소음을 듣고 살펴보다 땅굴에서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오는 걸 목격한 주민들이 신고를 하고도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방송을 하는 유투브 방송까지 있는 지경이다. 전국 곳곳에서 상반신이 없는 시신이 발견되고 있으며, 납치당할 뻔했다는 피해를 호소하는 개인 방송들도 여럿이다. 사법부 역시 무력화되었고, 치안 역시 중국 틱톡 등에 개인 방송을 통해 중국인들이 한국에서 경찰복을 입고 한국 경찰들과 함께 한국 도심에서 경찰 활동한 걸 중국 SNS와 개인 방송에서 인증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당이 북한 외 다른 나라에 의한 스파이 행위 또한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는 걸 저지한 때가 있었는데, 현재는 그 제한된 국가보안법마저 폐지될 상황에 놓여있다. 나라 곳곳에서 시체가 드러나고, 언제 납치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나라가 언제 타국에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현실 속으로 들어서 있는 것이다.

 

한국은 연성 전체주의를 거쳐 경성 전체주의로 신속하게 전환되어 가는 중이다.

 

저자는 정의를 내세우며 대중의 공허감을 틈타 공감 속에서 통제사회로 나아가는 현실을 우려하고 있다.

 

이에 대한 원인과 근거로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담고 있기도 한데 사회적 원자화라는 그녀의 개념을 들어 설명한다. 대중 개개인이 개별적인 존재로 파편화되는 상황을 아렌트는 사회적 원자화라고 정의했다. 이로 인해 대중은 공허와 소속감에 대한 바람을 갖게 되고 여기에 누군가가 무언가를 정의라고 선언하는 순간 대중은 그 정의라 선언된 것에 공감할만하다 여기면 열혈지지자가 되어 파벌을 이루면서 상대를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갈등하고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안으로 저자는 바츨라프 하벨이 한 비유를 들어 거짓 동조를 하지 말라고 지적하고 있기도 하고,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목소리를 빌려 거짓에 동참하지 말라고 역설하고 있다. 가정이 중심이 되어 역사와 정통과 신앙을 지키고 전승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 생각으로는 가정에 한정되어 자신들만이라도 바르리라는 입장으로는 사회 전체가 전체주의화 되고 나면 자신마저 지킬 가능성은 사라진다고 생각된다. 집단을 이루어 집단의 힘을 결집해 국가가 전체주의화 되는 것을 초기에 막지 못한다면 이후에는 지키려 해도 지킬 것을 찾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지 않을까 깊히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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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문장의 기억 (양장) - 살아 있음의 슬픔, 고독을 건너는 문장들 Memory of Sentences Series 4
다자이 오사무 원작, 박예진 편역 / 리텍콘텐츠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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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오사무문장의기억 #다자이오사무 #박예진 #리텍콘텐츠 @riteccontents

 

출판사로부터 #도서협찬 을 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세계를 누군가는 우울과 절망 그리고 그 속에서도 어린 깜빡이는 빛을 그린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본서에 대한 보도자료에서는 다자이 오사무가 인간의 나약함과 위선을 통렬하게 들여다보았다고 말하기도 그의 문학은 파멸과 허무만이 아니라 죽음을 향하면서도 살고 싶어 한 이야기라고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 이 보도자료에서 다자이 오사무를 서술한 그 외의 단어들을 키워드만 남긴다면 상처, 이중성, 도망, 회복, 절망, 연민, 고독, 비극등이 있겠다.

 

이 문장집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가운데 [사양, 인간실격, 어쩔 수 없구나, 앵두, 어머니, 셋째 형 이야기, 여학생, 직소, 달려라 메로스, 사랑과 미에 대하여, 비용의 아내, 늙은 하이델베르크] 이렇게 12개의 소설에 대한 소개와 그 문장이 일본어와 한국어로 수록되어 있다. 여기 엮인 소설들 중 나로서는 사양, 인간실격, 여학생, 비용의 아내정도만 읽어봤다.

 

내가 느낀 다자이 오사무를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흔들리며 아파하는 마음 그리고 아파서 흔들리는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지키고자 하고 지키고 싶어하는 마음까지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살아있어서 슬픈심정을 담은 문장들을 그려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지만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꼬집을 수 없을 만큼 세상과 잘못은 일체이다”. 이 세계에서 쓰러지는 것은, “아파하고 절망하고 그러다 슬퍼하며 나를 위한 행복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여정은, “절망도 부정도 이 세상에서는 의미도 가치도 결론도 될 수 없다는 걸 깨우치는 하나의 과정일 거다.

 

다자이의 문장 속에서도 불안이라는 어휘는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불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안은 흔들리며 아파하고 아파서 흔들리는 심정과는 다른 것이다. 너무 슬플 때는 누구도 불안하지 않다. 되려 내 안에서 깜빡이는 별빛을 보기 시작한다. 아련하고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빛을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그 빛을 그려내려 집필을 해온 것일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다섯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생을 마감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보다 적거나 많거나를 떠나 자살을 결행해 봤을 것이다. 그건 멸망을 바래서도 패배했기 때문이지도 않다. 그 누구보다 살고 싶어서다.

 

직소라는 그의 소설에서 다자이는 유다의 목소리로 예수를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읊조린다. 많은 이들이 이걸 죄의식과 믿음과 배신 그리고 자기변명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다들 다자이가 유다의 심정으로 자기 죄에 대해 변명을 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지 않았지만, 이 문장집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유다가 아닌 예수의 입장에서 유다의 마음을 이해하려 유다의 심정을 헤아리려 까닭을 짚어본 것이다. [달콤한 인생]이란 영화에서 이병헌이 연기한 선우라는 인물이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보스를 찾아가 그에게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런 거예요?”라고 묻던 그 심정으로, 다자이는 예수의 입장에서 유다가 왜 그런 것인지를 알고 싶어 유다가 되어본 것이다. 내가 하나님이 내게 도대체 왜 이런 것인지 알고 싶어 하는 것처럼, 선우도 예수도 보스가 유다가 왜 그런 것인지 헤아려보고 싶었던 것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오해로 빚어진 곳이다. 이곳에서는 이해에 가닿을 수 없다. 서로가 자신의 세상 속에서 타인의 세상을 자기 세상의 빛깔로 물들여 바라보는데 다른 이의 세상 빛깔을 이해할 수 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인간실격의 요조처럼 웃고 웃기면 사람들은 그의 눈물을 볼 수 없다. 사람들이 따라 웃을 때 요조는 울었을 것이지만, 그의 눈물은 자신 밖에는 볼 수 있는 눈이 없다.

 

본서에서도 그가 여성 화자가 되어 그려낸 소설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많은 여성들도 그를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추켜세우고 있다. 하지만 어느 시절 본 기사로는 그의 소설 [여학생]은 소설가를 꿈꾸던 어느 소녀가 다자이 오사무라는 저명한 작가의 평가를 부탁하며 보내온 그녀의 자전적 소설을 다자이 오사무가 그대로 표절한 것이라고 한다. 여성의 성취와 미래, 가능성을 빼앗는 페미니스트는 없을 것이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듭 호명되던 한국의 중견 문인은 여성을 만져서 그의 모든 영예가 거둬졌다. 교과서에서도 그의 작품이 사라지게 되었고 말이다. 하지만 여성을 만지는 성추행보다 더 극렬할 정도로 나쁜 건 여성의 성취와 미래를 빼앗는 것일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그러니 페미니스트 작가일 수 없다. 아마도 그의 이런 일면 역시 흔들리며 아파하고 아파서 흔들리는 그의 생의 한 단면이지 않나 싶다.

 

어떤 이들은 다자이의 죽음을 그가 자신의 가문에 수치라고 생각하던 데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행한 저항이라고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저항하지 않는 것은 죄인가?’라고 물었다. 그 물음은 저항하고자 해서였는지, 자살을 저항이 아닌 수용이라고 받아들여서인지 나로서는 모르겠다. ‘인간실격에서 요조는 죽지 않았다. 다자이도 죽지 않아야 했다. 작품을 통해 살아났어야 했다.

 

눈물이 날 만큼 모두를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던 사람이 결국 자신을 죽인 것이다. 모두를 사랑할 수는 없어서 하던 생각인 것인가? 하지만 그는 아름답게 살고 싶다고도 말했다. 그는 살아야 했다. 그가 살아있는 어느 우주의 지구가 있다면 그를 그리는 사람들이 그 별 밖에도 있다고 그 지구에 사는 다자이에게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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