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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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정확히는 한 여자, 더 정확히는 한 여자의 유년기부터 소녀시절을 온통 지배한 훈육과 독재에 대한 이야기다. 다만 그녀의 감상에도 공감은 하지만 출판사나 여러 독자들이 이야기하듯 완전한 폭력과 강탈로는 보이지 않았다. 누구나 타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의 생과 비교하거나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사유의 틀로 감상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까닭에 내가 본 그녀의 삶은 주어질 것은 다 주어졌으나 그녀가 받아들이기에는 과도하거나 지나치거나 압제적인 운명이 주어졌다고 느꼈기에 이런 자전적 이야기가 쓰여졌던 거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분명 그녀에겐 안전이 주어졌고 식량이 주어졌고 교육이 주어졌다. 생존을 위해 어린시절 누려야 할 것들이 모두 주어졌다. 다만 그녀나 대중이 느끼기에 무언가 그릇되고 강압적이고 삐뚤어져 전해졌다고 느끼기에 이 책에 대한 감상들이 대체로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사실 그녀의 이야기 속에 레몽이라는 빌런의 행동 외에는 과거에는 대부분이 이런 정도의 환경과 유사했거나 이보다 지나쳤다. 내게는 그랬는데 나 이전 세대 분들에게는 더했을 것이다. 저자는 나보다 훨씬 이전 세대이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그녀는 자신이 기대한 것과 다른 환경이 주어져서 괴로웠던 것이지 대부분에게 주어지는 환경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삶이었다고 느껴졌다. 성장기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괴로움을 매운맛의 9단계로 분류한다면 그녀의 삶은 9단계 어디에도 들어서지 않는 그저 순한 맛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에게는 아버지의 강압이 폭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그녀가 홈스쿨링만 했지 학교생활이 결여된 환경을 겪어서 모르나 본데 학교는 그보다 더 폭력적인 곳이다. 그녀에게는 단체 생활의 결여가 큰 상실감을 자아낸 모양인데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도 많은 이들이 홈스쿨링을 선택하고 고독한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 다만 그녀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면이 다소 안타깝기도 하지만 대부분 특히나 한국 같은 경우에는 성인이 되기 이전에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권이 완벽하게 주어지는 경우가 없다. 태어나서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거치기까지 자신이 놓이는 환경이라는 것은 부모의 재정 상태, 주거지역, 인간관계 등등에 의해 제한되는 경우가 거의 다이고 어느 누구도 자기만의 선택으로 환경이 좌우되지 않는다.

 

그리고 학교 교육과 사회화라는 것도 대중이 가르치는 것이라고 해서 정의이거나 바른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 문제다. 대부분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식적인 프레임인 개인주의, 이기주의, 약육강식, 승자독식, 다수결 원칙 등등도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고 판단해서 사회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알고 보면 저자의 아버지처럼 하나의 세뇌를 거치는 방식이 거대 집단인 사회 체계 속에서도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기본 상식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정이 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사회에서 일탈하는 삶을 살기도 한다. (이 책의 소재와는 다르지만) 우리는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 같은 소수단체들을 보면 그들에게서 다르다는 인식 외에 알게 모르게 이질감의 부정적 경로인 배척이라는 방식을 선택하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다른 것이다. 틀린 것이 아니라. 저자가 느낀 감상들을 그녀와 같이 느끼게 된다면 자신이 속한 집단(가정이든 나라든)을 떠날 권리가 주어지는 게 맞을 수도 있다. 지금의 한국이 싫으면 한국을 떠날 자유도 분명히 주어져야 하듯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구성요소인 가정도 싫다면 떠날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절대악이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다수의 방식이 아닌 방식은 절대악이고 다수가 선택하면 선이라는 논리는 아니라고 본다. 스카이 캐슬 같은 부모들의 강요도 옳지 않다. 하지만 그들을 절대악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 우리가 알기에는 그런 가정도 다수이고 흔하기 때문이다. 스카이 보내려고 공부 닦달하는 부모 때문에 자식이 자살을 했다면 적당히 하지에서 그쳤을 감상이 자신이 옳다는 걸 자신의 아이에게 적용했다고 절대악이라니 이상한 논리다. 대부분에 부모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걸 자식에게 누리게 하고 대부분에 가정에서 다 부모의 상식대로 자녀를 양육한다. 내가 보기에는 스카이 닦달하는 부모와 저자의 부모가 결이 다르지 않았다. 둘 다 상식적으로 상식 밖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저자 부모들의 상식 밖 대응과 결이 같은 대응들을 일상에서 자기 부모들에게 겪는 경우는 흔하고 이보다 더 심한 부모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저자의 감상에 딴지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딴지라기보다는 그녀가 감성이 풍부한 20세기 소녀였기에 더 크게 문제라고 느꼈던 거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이 정도만 주어졌어도 만족하겠다는 사람들도 세상에 적지 않을 것이기에 말이다. [배움의 발견]을 쓴 타라 웨스트오버는 실존적 위기였다면 모드 쥘리앵은 보다 더 자유로운 삶에 대한 희구였다고 보인다. 나로서는 타라에게는 공감과 안타까움과 함께 대견함이 느껴졌지만 모드 쥘리앵에게는 그녀의 생애 전반기 전체에서 부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아이 #모드쥘리앵 #복복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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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비트겐슈타인 - 20세기 천재 철학자의 인생 수업 마흔에 읽는 서양 고전
임재성 지음 / 유노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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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노북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협찬을 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의 인생 수업을 들으려는 분들이라면 분명 그에 대한 약력까지는 이미 아실 것이다. 나로서도 이 책에서 간략히 언급된 것과 검색을 통한 내용 외에는 아는 게 없는 관계로 리뷰 사전에 알려드릴 그의 약력은 버트런드 러셀의 제자였다는 것과, 언어를 주제로 철학을 천착했다는 것 말고는 없다.

 

그는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주장한 이이다. 아마 그의 시대에는 그의 이런 식견이 남다르게 다가올 수 있었던 시절이었구나 싶기도 하지만 일견 시절의 한계였구나 싶기도 하다. 불가에서는 언어도단과 불립문자라는 말이 있다. 언어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를 말하고 문자만으로는 성립될 수도 파악할 수도 없는 경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이미 언급했지만 분명 언어로는 전달될 수 없는 경계들이 있고 현대의 뇌과학은 서술 기억보다 비서술 기억이라는 표현될 수 없는 기억들이 인간의 전체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인풋된 대부분의 데이터는 비언어이며 이것이 인간의 정서를 이루고 이 정서를 바탕으로 그것도 한계 속에서 일부 언어나 행동으로 아웃풋 되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대부분의 동인은 논리가 아닌 정서와 감정에 달려 있다. 정신분석학이나 분석심리학이 아무리 그를 심리학적으로 또 철학적이고 신화학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에서까지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지만, 성경에서마저 창조주가 세계를 창조하고서 언급된 것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정서적인 차원의 말씀이다. 창조의 이유를 인간이 알 수 없겠지만 그를 유추한다 해도 결국에는 정서적인 차원의 답변 밖에는 나올 것이 없다. 논리로 따지고 들어도 원대한 계획이니 완수할 의지니보다는 좋으려고 만들었다는 해석이 가해지는 것이 앞뒤 문장의 정황상 말이 되지 않는가 말이다. 그리고 인간의 대부분에 기도도 감정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기도에서의 간절함은 기도를 완성시키는 정점이 아닐 수 없다. 간절함이 없는 기도나 신실함이 없는 기도는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도 대부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비트겐슈타인도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 역시도 논리에만 집중해 감정과 삶의 복잡성을 배제하는 태도가 오히려 사고를 제한할 수 있다감정을 억압하면 오히려 내면에서 왜곡된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작용이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방어기제들의 작용일 것이다. 무협지를 통해 옛 중국의 내공 심법들을 보면 오욕칠정을 끊으라는 말이 나오며, 한국의 선도에서도 조식, 지감, 금촉 세 가지 한국 전통 선도의 요소에서 지감과 금촉은 감정과 감각을 중단하고 차단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신화부터 신라시대 역사까지가 기록된 신화서 부도지를 보더라도 포도 열매를 통해 오미(다섯가지 맛)을 알게 된 인간으로 인해 타락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인간은 근본을 잃었다고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復本)는 내용이 초반의 주요 정점이다. 당연히 오미는 오감 즉 감각과 감정의 은유이다. 오감과 감정의 단절을 중국 선도도 한국 전통의 선도와 신화도 중시하고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나 염정즉정토(染淨卽淨土)를 이야기한다. 억압하는 것만이 수가 아니라 창조주가 세계를 창조하고서 한 말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이 첫 번째였다. 자신이 보시기 좋은 세상에 가득해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감각하고 만끽하는 가운데에서 진행될 사안들이다. 세계와 자신의 존재 이유는 억압하고 사유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풍요롭게 때로는 처절하게, 느끼는 과정을 거치라는 것일 것이다. 느끼는 것이 사유의 이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건 인간의 발달 단계와 과정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사유를 중시하는 철학자였지만 그 여정은 행동하기 위한 것이란 것을 주지시키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절망하지 말고 일어서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똥 밭에 빠져도 주저앉아 흐느끼며 죽는 것보다는 끝까지 버티며 전진하는 것이 낫다고 말이다. 저자는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영원할 것 같던 절망의 끝에 도달할 수 있다그 자리에는 더 깊어진 사유, 더 단단해진 내면, 그리고 다시 나아갈 힘을 갖춘 자신이 서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 말이 망막해 보이겠지만 나아가는 것은 자신의 일상에 충실하라는 말일 것이다. 나의 절망 속에서 나는 나아갈 길을 보지 못했다. 그저 내 앞에 주어진 현실 속에서 묵묵히 내가 할 수 있는 하나하나를 행하며 지내는 것뿐, 다른 벗어날 길을 난 찾지 못했다. 나아갈 길을 아는 사람은 따로 있는 걸까? 나아갈 길을 찾는 사람은 따로 있는 걸까? 아마 잘난 사람들도 극단적인 절망의 순간에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어여쁜 이들도 허다하게 자살하는 그런 나라일 것이고. 그냥 내 앞의 하나하나를 이어나가는 것 그 이상의 나아갈 길을 따로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때로는 노래하던 무대에서 뛰쳐나가 스님이 되는 여가수도 있고, 잘 다니던 회사를 박차고 나가 배우가 되는 남자도 있는 세상이지만, 대부분에 사람들은 절망의 순간 다른 길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충실한 것이란, 어떤 뛰어난 지혜로운 사람도 자신에게 놓인 길에서 묵묵한 것이라며 그를 실천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나는 책을 통해 뛰어난 지혜로운 사람들의 일상을 엿보려 노력하고 그들의 일상에서의 노력을 닮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만불상의 부처가 제각각의 개성을 나타내듯, 중국 태극권이나 다른 유파의 무술이 각 지역이나 전승자마다 다른 개성의 투로와 기법으로 재탄생했듯 자신다운 자신이 되어 갈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가르침도 결국에는 나다운 내가 되라는 것일 것이다. 언어의 철학을 말하는 그도 대중에게 자신의 어휘와 표현을 찾으라고 조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무게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렇기에 자신에게는 무겁다는 남의 무게보다 자기 자신이 진 무게가 압도할 수밖에 없다. 왜 나는 남보다 무거운 짐을 지었느냐고 한탄해 보았자 내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 자신이 진 무게를 가볍게 해주지 않는다고 더 버틸 수 있게 해 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재석은 힘들어하는 후배에게 오래 버티는 사람이 결국 살아남는다고 연예계 생활에 대한 소신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생존이 화두라고 해도 이와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똥 밭을 헤쳐나가는 법을 이야기한 비트겐슈타인의 말도 이와 다르지 않지 않나? 자신이 진 짐을 버티며 묵묵히 나아가는 것 말고는 알고 보면 인생이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 길의 끝에 더 깊어진 사유, 더 단단해진 내면, 그리고 다시 나아갈 힘을 갖춘 자신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다운 자신으로 말이다. 타인이 지옥인 것도 사실이고 그런 타인들과 천국을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천국을 꿈꾸지 말고 자신다운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게 최선은 아닐까 생각한다. ‘지옥이 아닌 타인이 있는 천국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라면 다른 감상이겠으나 대부분에 인간은 지옥 속에 있는 것이 이 세상 실상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자신다운 사유를 하고 자신다운 말을 하고 자신다운 행동을 해라. 그러면 결국 자신다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삶의 고난들이 끊이지 않고 타인이란 지옥 속에 놓인 것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나다워지기 위한 길에 잠시 독도법을 알려주는 이 책이 있다. 읽고 나면 다른 지도들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흔에읽는비트겐슈타인 #임재성 #유노북스 #비트겐슈타인 #철학 #인생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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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5-18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익한 리뷰 잘 읽고 갑니다~~감사합니다!

이하라 2025-05-18 13:00   좋아요 0 | URL
리뷰 읽어주시고 좋은 말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2 : 해학 - 본성에서 우러나는 유쾌한 웃음 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2
최광진 지음 / 미술문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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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한국의 미학에서 언급한 한국 문화의 특징을 저자는 접화 接和라고 하였다. 그리고서 한국 미의식을 신명, 해학, 소박, 평온으로 분류하여 1권에서는 신명을 다루었다. 2권인 본서에서는 두 번째인 해학을 다루는 데 보통 풍자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해학의 정의를 저자는 징벌과 포용을 함께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문화 접화를 강압적 행위인 굴복시키는 행위와 다르게 서로 어우러지며 하나되는 것으로 설명하며 이는 전쟁이나 싸움이 아닌 놀이로써 주지시키고 있다.

 

서로 즐기며 함께하는 것이 놀이이니 서로를 죽이려 하고 파괴하고 쓰러뜨린다면 이는 이미 놀이의 상태를 벗어난 것이다. 접화는 어디까지나 놀이의 경지인 것이다. 이를 고구려 귀면 문양과 백제의 귀문전, 통일 신라의 귀면와를 중국의 짐승문과 도철문, 일본의 귀면와, 인도의 키르티무카 문양과 비교하며 중국의 문양이 무서움을 근간으로 하고 일본 문양이 신경질적이며 날카로움을 특색으로 할 때 한국의 문양은 무서움과 친근함을 동시에 주는 것으로 해학의 요소를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국의 장승도 이러한 해학을 담고 있고 그리스 조각상의 아르카익 미소를 비교하기도 하는데 그리스의 미술에서는 이것이 정형화되어 창에 찔리는 그림에서도 아르카익 미소가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며 정형화된 도식인 서양의 그것과 한국 미술에서 그려진 미소는 달라 한국 장승들은 웃고 있더라도 다 지역적으로 다른 양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불교 미술에서도 차이가 드러나는 데 한국에서 사천왕들은 무서움과 친근함이 동시에 표현된 반면 중국의 사천왕은 근엄, 위엄, 매서움으로 표현되고 일본의 사천왕들은 매섭고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한다.

 

서양 로코코 미술에서는 유럽 귀족들의 환락과 그에 뒤따르는 공허가 표현되었는 데 비해 한국의 민화에서는 민중들의 일상에서의 해학이 담겨있고 그 가운데서도 신윤복의 그림에는 사회적 금기와 긴장을 다루어 같은 에로티시즘이라도 한국의 그것은 다르다고 한다. 귀족의 일상을 다룬 것과 민중이 귀족의 금기를 웃어넘기는 것을 다룬 바는 분명 다른 빛깔로 비추어진다.

 

민중의 두려움을 막아주는 부적과 같은 전래인 한국의 처용과 중국의 종규도 색깔이 엄연히 다른데 처용은 징벌보다는 포용으로서 귀신 두려움을 샀고 종규는 임금의 배려에 대해 갚음으로서 공포로 작용해 귀신을 살벌하게 물리치는 전승이 있다. 중국에도 은혜 갚음이라는 은유가 담겨있지만 그 갚음의 양식이 다른 대상에 대한 처참한 살해로 이어지는 것과 한국의 처용처럼 죄지은 대상을 포용함으로써 귀신도 감복하게 하는 바는 엄연히 다른 게 아닌가 싶다.

 

호랑이 그림도 중국의 그것과는 다르게 익살맞은 모습인 한국화는 무섭다는 개념을 모르는 민족인 건가 하는 생각도 들게 했다. 까치와 호랑이가 함께 그려진 그림에서 호랑이의 수염을 물어당기는 까치를 그리고 있는 것을, 까치로 상징된 민중이 호랑이로 상징된 폭정을 일삼는 탐관오리를 징벌하는 은유가 담겨있다며 해학의 하나로 해석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의 요구로 한국에 관왕묘가 설치되고 관우의 그림 등 삼국지의 일화들을 담은 그림들이 전시되는 데 이에 모두 익살맞고 캐리커처와도 같은 그림들이 동원되어 한국의 해학이 담기기도 했다. 한국화에서 자연도 이러한 유희적 모습으로 탈바꿈되기도 했고 이러한 해학은 근현대 미술로 이어졌다고 한다.

 

사실 놀이 형식이 경쟁에서도 느껴지는 게 한국의 그 숱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경쟁과 놀이를 일체화시키거나 경쟁에 놀이의 요소를 담으려는 노력이었다고 보이기도 한다. 경쟁 당사자인 본인들은 긴장감이 더 컸을지도 모르지만 관객(시청자)들은 그 경쟁의 양식에서 출연자들이 즐기기를 바랬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의 많은 요소들을 전쟁이 아니라 놀이로만 보기에는 파괴되고 되돌릴 수 없이 되는 경우들도 없지 않다. 자주 언급한 카라 멤버 충원을 위한 방송이었던 베이비카라의 소진 양의 경우도 그렇고 말이다. 또 다른 사례는 스포츠계의 성폭력 이야기들과 같은 경우나 선수 선발 비리 같은 경우들처럼 사회에서는 접화의 양식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경우들도 많아 이런 일들에 대한 풍자는 해학으로 보기 어려울 것 같지 않나 싶다. 해학은 기본적으로 악의가 느껴지지 않거나 완화될 여지가 있는 은유나 풍자의 대상에 한정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미술로보는한국의미의식 #해학 #최광진 #미술문화 #풍자 #은유 #익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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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1 : 신명 - 역경을 이겨내는 흥겨운 정서 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1
최광진 지음 / 미술문화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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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의식을 말하는 관계로 한국인의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계기로 삼고 싶어 독서하고자 했다. 저자의 전작 [한국의 미학]에서 저자는 민족마다 문화가 다른 것은 환경에 따른 문화의지가 다르기 때문이고 서양은 분화’, 중국은 동화’, 일본은 응축’, 한국은 접화의 의지가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저자가 한국의 문화의지라고 추출한 접화 接和태극처럼 상극의 이질성이 하나로 어우러진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저자는 이 개념을 한국문화의 기반을 이루는 천지인 사상에서 착안했다는데 천지인사상에서 인간은 하늘의 창조적인 신성(영혼)과 땅의 굳어진 물질성(육체)이 접화된 존재라고. 그렇기에 한국인은 천인묘합의 상태에서 미적 쾌감을 느끼고 그 상태를 이라고 불러왔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한국인의 미의식은 멋을 느끼고 창출할 수 있는 의식이고 이것이 신명, 해학, 소박, 평온의 미의식으로 발현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기도 하다.

 

고구려 벽화에서부터 신들에게서 미적 쾌감을 느끼며 부여한 선조들의 미의식을 엿보고 그것이 고정적이며 기학적인 서양의 미의식과는 달다며 역동적인 한국의 미의식을 설명한다. 서양의 팔메트 문양과 고구려 고분 벽화와 금동관 장식 등에서 보이는 문양을 설명하기도 하고 금동관과 한국 특유의 범종의 용뉴(종의 꼭지 같은 이을 수 있는 고리)에서 보이는 비대칭을 설명하기 위해 대칭을 이루는 중국 용뉴와 비교하기도 한다. 비대칭에서 보이는 역동성은 한국 특유의 빛깔이기도 했다.

 

여기서 이해가 갈 수밖에 없는 게 서양인들은 자연이 대칭을 이룬다며 수학과 과학을 들어 이야기하는 데 그들이 대칭을 이룬다는 자연물들도 자세히 보면 나노미터 차원이 아니라 센티미터나 미리미터 차원에서도 이미 대칭이 깨지고 있고 자연계에서 기계로 찍은 듯한 대칭은 없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장부가 좌우 한쌍씩 다 대칭을 이루며 존재하지도 않기에 여자의 가슴과 남자의 고환도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 거의 다 짝 가슴에 짝 고환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얼굴도 이미 저작(씹는)활동을 좌우로 균등히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굴의 좌우 완벽한 대칭은 없고 손과 다리의 사용에서도 그러하기에 팔의 길이나 다리의 길이 역시 좌우 완벽한 대칭은 없다. 중국의 태극권을 보더라도 대부분의 태극권 기세가 대칭을 이루며 손을 내리고 있지만 진씨 태극권 중 진정뢰 노사의 가르침을 보면 기를 느끼며 비대칭으로 자연스레 기세를 취한다. 자연계에서 대칭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은 대강 보기에 그런 것이지 실제 정밀하게 검증하자면 완벽한 대칭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한국의 미의식이 갖는 비대칭성은 자연스러움을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몬드리안의 나무 연작과 겸재 정선의 그림들을 비교하며 서양은 기하학에 기반하고 있지만 동양은 주역에 기반하고 있다고 서양은 고정된 것으로 진리를 이해하고 동양은 변화를 기반으로 세계와 진리를 이해한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말로 이해를 더하는 데 변화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라는 말이다. 한국의 그림과 관 장식과 향로와 범종들에서 보이는 비대칭성과 역동성은 살아있는 힘을 구현하려는 것이었고 이것은 과 함께 한국인의 정서를 지배하는 신명난다는 그 살아 맥동하는 미적 쾌감이 구현된 것이라고 이해되었다.

 

본서는 한국의 미의식을 논하는 데서 엿보이듯 한국 역사와 한국 미술 전반을 다루며 근현대까지의 미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통해 신명이라는 미의식이 어떻게 구현되어왔는지 설명하고 있다. 숙독하기보다는 속독하며 읽어서 깊은 이해보다는 대강만 이해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가치있는 독서였다는 감상이 드는 책이다. 서양 미술책은 많지만 동양미술, 더욱이 한국의 미술과 한민족의 미의식을 논하는 책은 드물지 않나 싶다. 그렇기에 더욱 빛나는 책이지 않은가 싶다.

 

#미술로보는한국의미의식 #신명 #최광진 #미술문화 #한민족정서 #한국인미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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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지역을 읽으면 세계가 보인다 - 국제정치 전문가 김준형의 세계 10대 분쟁 이야기
김준형 지음 / 날(도서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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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매체에서 이미 널리 다룬 분쟁 지역들이지만 본서가 차별화되는 것은 역사학자의 눈이 아니라 국제 정치 전문가의 시선으로 보고 비평한 빛깔이 다르지 않을까 싶다. 간략하지만 세세한 대목에서 정치적 시선을 담고 있기에 이미 아는 분쟁들도 찬찬히 읽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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