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수록 아름다운 우리 그림 - 한국 전통회화 들여다보기
이소영 지음 / 미술문화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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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문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은 우리 그림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볼 기회가 되어줄 책이라 생각해 다가서게 되었다. 사실 서양미술은 여러 저작이나 영상 매체로 흔하게 접하지만 동양화 그것도 한국화는 유독 취미인 경우가 아니라면 일상에서 흔히 접하며 살지 못하는 것 같다. 저자분 말씀처럼 대부분에 한국인들은 수묵화보다는 수채화를 먼저 배우고 미술관을 찾는다고 해도 서양화를 친숙하게 여기지 않나 싶다. 대학에서 한국화 학과도 줄어드는 추세라고 하니 저자분 언급처럼 한강을 위시한 한국의 문학 그리고 K-, K-컬처, K-아트 등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과는 상반되게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이러한 때이기에 더욱 한국의 것들이 하나하나 되짚어지는 순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 그림을 자주 접하며 살아가지 않던 리뷰어 본인도 우리 그림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19세기 작자 미상의 [화초도]라는 지직화와, 같은 시대 박병근님의 [낙화화초도]라는 인두화 같은 실험성 높은 그림도 인상적이었으나 신사임당의 [초충도] 가운데 [오이와 개구리][양귀비와 도마뱀] 같은 조선시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자연의 장면을 소소하지만 섬세히 옮긴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18세기 심사정의 [토끼를 잡는 매]처럼 냉엄한 자연의 진리를 아슬아슬한 장면으로 한 폭에 담아낸 그림도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17세기 조속의 [달밤 고목 위의 새]는 자연의 한가로움과 은은한 여유가 느껴지는 듯했다. 부채 하나에 금강산의 산맥들을 담은 정선의 [청양사]는 장엄함이 아기자기한 종이 위에도 그려질 수 있다는 걸 느끼게도 해주었다. 18세기 이인상의 [구룡연]은 단순한 선과 그 아래에 여리고 짙음 몇 개만으로 자연을 옮길 수도 있을 수도 있구나 하는 감상이 담기게 해주었고 [병국도] 역시 그저 선만으로 숙연함을 느끼게 할 수 있음이 놀라웠다. 김홍도와 동갑이라는 화원 이인문의 [끝없이 펼쳐진 강과 산]는 서양화와는 다른, 단순함 가운데 은은한 매력으로 자연의 장엄과 기묘함을 그려내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기도 했다. 14세기 고려 작자미상의 [수월관음도]는 불화가 이토록 매력적이란 것을 처음 알게 되는 그림이었다. 불화가 그려지는 과정도 일반 그림과 다르다 보니 그것이 그림이 오래 가도록 하기 위해서인지 보살과 부처님을 남다르게 표현해내기 위해서였는지 의문이 일면서도 불화에 대한 이끌림을 느끼게 되었다.

 

본서에는 김홍도나 신윤복의 민화부터 산수화, 일상의 책가도나 화성행궁도, 흔히 접하기 어려운 배다리를 주제로 한 그림, 근대 한국화가들의 초상화와 담채화 등마저도 수록한 다양한 주제로 한국화의 아름다움을 돌아보는 책이다. 지직화, 인두화, 혁필화 외에도 지두화 같은 실험적인 그림들도 수록되어 있고 무엇보다 색달랐던 것은 유명 한국화가의 그림만이 아니라 작자 미상의 그림도 26점 이상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그림이 한국의 제일이니 보아라인 것이나 한국인이면 이 정도는 알아둬라 라는 충고 따위가 아니라 한국에는 이런 아름다움과 기발한 주제인식도 있었다는 토로 같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언젠가 이 책과 같이 유명 그림이 아닌 우리 그림 가운데서도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그림들까지 대상으로 한 다큐멘터리가 등장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알고 있었나 하는 집단 자성에 이르게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박래현, 채용신, 이응노 같은 근대 화가들의 한국화도 그 각자에게 각각의 감상이 다채롭게 남기도 했지만 우리 그림의 특색을 잃지 않으면서도 실험적일 때도 나름의 색깔을 만들어가기도 하는 면이 옛 그림만이 아니라 근대와 근대 이후의 우리 그림에 대한 관심마저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본서를 통해 우리 선조들의 관심사와 그 시대의 시각과 시대적 풍속, 그리고 선조들과 현대의 우리 사이 시대를 가로지는 흥취 등 다채로운 감상을 갖게 해 주는 것이 우리 그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림의 양식 역시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실험정신을 가지고 고민하며 그림이 그려져 왔다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유명세가 없다고 작품성이 없거나 작가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작자 미상의 그림들을 보며 느꼈다. 우리 그림이 주는 의미가 이만큼이기만 해도 우리에게 가까이 해야 할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 리뷰를 보시는 분들이라면 이 기회에 꼭 이 책을 읽어보셨으면 싶다. 한번 그림을 보게 된다면 몇 번이고 다시 보게 될 거라 장담해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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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행복 -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우는 행복에 관한 철학 수업
양현길 지음 / 유노책주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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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인생수업] 이후 두 번째로 읽어보는 고대 그리스 철학책이다.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기도 한 그의 철학에서 플라톤의 가르침이 전승된 부분과 함께 그의 독자성이자 이후 유학의 가르침과 맞닿은 대목도 눈에 들어왔다.

 

행복을 그 자체로 추구할 진정한 의미라 하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자족성과 진정한 인생의 목적으로 보는 목적성을 가진다고 보며, ‘주어진 이성을 최대한 활용해 인간답게 올바르게 사는 상태미덕이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추구하는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외적인 요소도 덕을 실천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보아 현실성이 결여된 행복 추구를 강요하는 가르침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어나는 사건에 의해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해 그들이 갖는 견해에 의해 괴로워한다는 에픽테토스의 말을 들며 행복과 괴로움 사이를 가를 기준은 스스로의 선택에 달린 것으로 보게 하고 있기도 하다.

 

본능적 즐거움과 자극을 의존하는 쾌락적인 삶과 명예와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는 정치적인 삶은 이 의존성들이 지속적이고 안정된 행복을 추구하기 어렵게 만든다며 관조적인 삶을 추구할 것을 권하고 있는데 이는 진리를 탐구하고 사물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는 삶을 말한다. 인간 고유의 능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활동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며 이러한 활동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관조적인 삶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그는 관조적인 삶이 인간을 가장 고귀한 상태로 이끈다고 보았다. 몰입은 이러한 상태로 이끄는 근간으로 관조적인 삶과 몰입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외부 요인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몰입은 관조적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며 관조적인 삶은 몰입에 의해 더 깊이 실현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중용과 절제이다. 중용은 때에 맞춰 적합한 판단을 하는 것을 말하며 절제는 즐기되 적절함을 아는 데 있다. 느슨하기만 한 것이 중용이 아니고 억압하고 배척하는 것이 절제가 아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며 갖추어야 할 것으로 또 다른 것은 실천적 지혜상대방의 입장과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을 이른다. ‘숙고할 때도 상대방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결정을 내릴 때 반드시 참된 이성과 올바른 욕구가 결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를 의지적 욕구라고 했다. 이는 이성이 올바른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욕구가 행동으로 옮겨지도록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반복을 통해 습관으로 자리 잡아야 하는 것으로 실천적 지혜란 단발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반복과 성찰을 통해서 내면에 자리 잡는 것이라 한다. 실천적 지혜란 다양한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숙고하고, 판단하며, 선택하고, 결정하는 과정의 반복에서 얻어지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자기애라는 것은 지금의 나와 내가 꿈꾸는 최고의 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는 것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인생은 내가 내린 선택의 합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무리 사악한 인간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그들로 인하여 파괴되고 오명을 덮어쓰는 상황이라고 해도 자기가 이루고 싶은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 만들어가는 삶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필귀정이란 말이 사실이라면 진실이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고, 세상이 그런 게 없는 지옥이라 지옥이란 실명 값을 하는 게 지구라고 해도, 나는 나를 지키며 온전한 내가 되기 위해 살아간다면 언제 어떻게 죽더라도 한과 한탄은 남더라도 나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이 책의 일부 내용 중 내게 와닿는 대목만 남겼지만 전체적으로 두고두고 헤아려 볼 만한 내용들이 담긴 책이기도 했다. 자기성찰의 시간을 좋아하고 외향보다는 내향의 시간이 자주인 분들을 위해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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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심인 선불진수 능엄밀법
강형주 지음 / 다크아트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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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심인은 여래장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며 밀법은 비밀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라기보다 엄밀한 가르침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밀법을 이야기할 때는 비밀한 가르침일 때도 있지만 엄밀한 가르침일 때가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능엄경의 가르침을 수행으로 나타낸 것이 본수행이며 이 가르침은 불교적이면서도 도교적이기도 하다. 가르침에서 선도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선도의 원리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와 함께 수행의 기로에서 자미두수의 좌표를 적용해 수행해나가기도 한다.

 

도교에서는 전진도 용문남파 오류파의 수행과정을 적용하기도 했고 활자시나 외약, 내약, 소주천, 대주천, 대약의 과정을 적용하고 있기도 하다. 양광일현과 양광이현, 양광삼현이 무언지 몰랐는데 본서를 읽고야 명확한 수행 도상에서 이해되었다.

 

책의 분량도 많지 않고 글자 크기도 크다 보니 금세 다 읽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깊이 있고 수행의 설명이 명확하다. 다만 실수행에서 장애를 만날 때 책만으로는 대처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구나 생각되는 면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힘으로 뭐든 가능하다고 보는 씨크릿 류의 가르침에 평소 거부감을 느끼던 터였고 문제가 많은 관점이라 이전부터 포스팅들에서 숱하게 언급하고 리뷰마다 문제시하며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본서에서는 씨크릿 류의 가르침이 마 중에서도 대자재천마라고 뭐든 마음대로 된다고 믿는 심마로 명백히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심마의 경우와는 다른 귀신이나 빙의의 경우는 칼 융의 유사 정신계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도 자기의 마음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다. 나의 견해와는 다소 다르지만 어쨌건 마음이 외부 영향을 끌어오는 경우도 분명 크지 않은가 싶다.

 

또 하나 주지되던 것은 일반인들이 깊은 수행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남종 동파 선도에서는 수행의 깊은 경지라기보다 부작용으로 보는 마음장상을 여기서는 수행의 과정에서 수준을 나누는 척도로 보기도 해서 의아하면서도 수행이 꺼려지기도 했다. 나로서는 남종동파 선도에서 말하듯 불용성위축이라는 관점이 맞지 않나 싶고 완전히 성관계를 단절하는 것은 사랑을 버리는 것과 다름없지 않나 싶은 마음에 거리낌이 조금 생기기도 했다.

 

나에게는 수행에 대한 배움과 자기 확신을 주는 책이다. 다만 앞서 말했듯 분량과 활자크기에 불만이 다소 남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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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눈부신 철학 - 한류와 ‘다이내믹 코리아’의 뿌리 철수와영희 생각의 근육 5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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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살아오며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타인을 원망하는 습성은 나에게 없었다. 하지만 근간까지 겪은 일들은 사람에 대한 원망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정의가 달라질 만했다고 생각된다. 사연을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을 기회가 과연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까닭에 사람이란 무엇인지 더 나아가 한국인의 정서를 구조화한 원형은 무엇일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타인만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의문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 이유로 한국인에 대해 알고 싶다는 한국인의 정서와 의식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관한 의문에 답을 구하고 싶었다. 마침 그때 출간 소식을 알게 되고 서평단 모집이 있기에 기쁘게 다가섰다.

 

본서에 대한 첫인상은 [한국인의 눈부신 철학]이라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과는 미묘한 차이가 느껴지게도 민담으로 한국인의 정신을 분석하는 책이구나 였다. 물론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보면 철학이란 표현이 깊이 납득된다.

 

저자는 본 내용이 시작되기 전 [여는 글]에서 주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다루고 있다. 한국이 시작한 학문인 문학치료학과 우주철학을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문학치료학의 기본 명제는 인간이 곧 문학이고 문학이 곧 인간이다라고 한다. 또 우주철학에서는 인간을 우주와 분리되지 않은 존재로 인식한다고 하며 한국인의 철학을 담론하는 이 책은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문학이자 철학이자 우주로 확장하고 있다. 우주철학은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 눈으로 삶과 세상을 바라본다고 전제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인간의 사전적 정의가 한문 사전으로 가면 사람이면서 또 사람이 사는 세상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는 철학이 궁극적으로 문학의 한 갈래라고 했다고 하며 실용주의 철학자 로티는 철학이 삶을 새롭게 재서술하는 작업이라며 철학의 문학화를 주장했다고 한다.

 

까닭에 저자는 한국인의 철학을 조망하는데 문학으로 다가서고 있으며 그 가운데 민담을 주제로 삼은 것이다. 여기서 서사 중에서도 사회서사를 중심으로 한국인의 의식을 분석하고 있다. 앞서 철학은 문학이며 문학은 곧 인간이라고 소개한 것이 저자이고 인간이란 사람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사회서사를 주목한 것은 적확한 관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람이 문학이라 했기에 타인도 곧 문학이라고 저자는 정의했다. 나와 남과 사회를 두루 보는 것이 사회서사적인 관점인 것이다. 저자는 사회서사는 사람을 우주인이자 문학으로 보는 우주철학에 기반하고 있기에 삶의 모든 것을 사회적 잣대로 판단하는 사회성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개개인이 사회를 인식하는 관점과 삶의 자세를 중시한다고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이 사회서사를 설명하며 저자는 칼 융의 심리 유형 분석의 기반인 내향성과 외향성을 언급하는데 이를 다시 내향적 삶이 사회체제는 불변한다고 바라보며 이뤄지는 순종서사와 사회체제는 변화한다는 시각의 관조서사로 분류하고 외향적 삶이 사회체제가 불변한다고 인식하며 이뤄지는 적응서사와 사회체제가 변화한다고 바라보며 이뤄지는 실천서사로 분류하고 있다. 저자는 순종서사, 적응서사, 관조서사, 실천서사의 방향으로 인식과 대응의 변화를 바라본다. 한국인의 무의식은 실천서사가 지배적이며, 이것이 사회변화와 삶의 변화에 기회가 된다고 보고 있는듯했다. 저자의 논지가 이렇기에 이후 단군신화와 처용설화 해님달님 설화, 효자 호랑이, 신비한 눈썹, 아기장수, 그리고 단재 신채호의 최초 근대소설인 꿈하늘과 그의 선언서 조선혁명선언을 모두 실천서사의 관점을 설명하는 데 제시하고 있다.

 

저자의 관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 나로서는 한국 어르신들의 팔자타령이나 살다 보면 살아진다는 관점 그리고 으로 정의되는 정서의 바탕과 맥락에는 관조서사가 근간이며 그것이 더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하지 않나 싶었다. 그리고 실천서사라면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폭력도 강간도, 살인도, 집단적 충돌도 모두 실천서사이다. 이 실천의 바탕에 관조와 성찰이 없다면 앞서 말한 범죄들과 같은 결론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관조는 맑고 밝게 자신을 헤아리는 눈을 말한다고 본다. 메타인지도 관조의 하나이고 말이다. 관조가 없다면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 그리고 사회에서도 교훈과 반성, 성찰이 있을 수 없다. 순종과 적응을 실천으로 바꿔주는 것은 결국 관조라는 말이다. 그리고 세계 어느 문학에서도 실천이 없다면 스토리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애초에 실천서사만을 한국인의 특색이라고 정의하는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남은 생이라도 다른 빛깔로 이끌어가게 되는 것은 관조가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보이는 것이 바뀌고 달라지는 것만이 서사가 아니라 같은 일상이라도 색깔이 바뀌는 것이 진정 중요한 서사적 요소일 것이다.

 

[노인과 바다][오즈의 마법사]에서 주인공들은 종국에는 결국 각자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만 그들의 같은 일상이 더 이상 같은 빛깔이지 않게 해주는 건 관조와 성찰이 이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문학의 예이지만 우리의 많은 선조들이 삶을 살아냈던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겠다고 한 것도 그렇지만 곰이 여인이 된 것도 자성을 관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처용의 서사는 처용의 관조와 역신의 성찰이 주 내용이다. 신비한 눈썹도 관조와 성찰이 있기에 실천이라는 다음 스테이지가 가능했던 것이고 아기장수는 부모가 관조하지 못해 일어난 비극이다. 효자 호랑이는 수신자인 민중이 자신을 성찰하라는 메시지이기도 한 것이다.

 

저자와 견해는 다르지만 이런 관점으로 돌아본 것 자체가 이 저작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인에게 관조하고 성찰하고는 실행하라는 조언해 줄 수 있다면 이 저작의 도움이었다고 생각하며 내 삶과 다른 이와의 삶을 연결 짓는 관조와 성찰이 무얼지 다시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는 독서이기도 했다. 이 책은 한국인의 의식과 정신을 다루는 많은 책들을 읽는 효시가 될 만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를 통해 철수와영희로부터 도서제공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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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3-01 0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자리에 서느냐에 따라 눈길이 다르게 마련입니다. 살림하는 자리에 서는 사람이라면 모든 일을 살림눈으로 헤아리고, 이름팔이나 힘팔이라는 자리에 서는 사람이라면 무엇이든 이름값이나 돈값으로 매깁니다. 글이건 나라(정치·사회)이건 배움길이건, 저마다 선 자리에 따라서 다르게 바라봅니다. 누구나 다르게 볼 뿐인 줄 받아들인다면 ‘다 다르기에 어깨동무’를 합니다. 누구나 다르게 볼 뿐인데 이 얼개를 안 받아들이면 ‘다 다르기에 밉고 싫어서 싸우고 괴롭힙’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보면, 다 다른 모습을 안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훨씬 깊구나 싶습니다.

이하라 2025-03-01 07:53   좋아요 0 | URL
저자의 시선과는 다소 다르지만 저자의 시선이 마냥 아니라고 보는 건 아닙니다. 저자의 견해와 제 견해가 다른 건 살아온 삶이 다르기에 견해의 차이를 갖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삶을 통해 눈이 갖춰지는 거라 삶이 다르면 눈도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각자에겐 각자의 시선이 달라도 누군가는 맞고 누군가는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눈으로 보고 각자의 시선대로 수용하고 반응하게 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저자의 입장과 제 입장 각자가 다 일리가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좋은 말씀 반응으로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숲노래님^^

 
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윌리엄 에긴턴 지음, 김한영 옮김 / 까치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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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가 사물의 실상이나 근본적 원리 즉 진리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관념의 산물일 수 있음을 논하고 있다. 그것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칸트의 이율배반, 그리고 보르헤스의 문학을 통해 접근하고 들어서고 있다. 물론 주주제 외의 이야기도 여러 인물의 일화들과 그들의 사유를 주주제와 씨실과 날실로 엮으며 논한다. 하지만 책이 다소의 어려운 수준이라 주주제만을 소소히 이해한 데 대해서도 만족한다.

 

우리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뚜렷한 실상이라는 것을 실체 그 자체로써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첫 명제이고. 이것이 하나의 오해라는 것이 두 번째 명제 같았다. 불확정성의 원리가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각각 관찰할 수는 있지만 둘을 한 번에 총체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정의했듯이 칸트는 세계 인식에서의 이러한 모순을 이율배반이라고 정의했으며 보르헤스는 세계의 모순을 부정하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을 모두 이해했다고 믿는 오류를 마법이나 환각으로 정의했다.

 

저자는 진리 이외에도 타자인 모든 것, 세계나 대상의 원리와 도덕 같은 관념들과 함께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 역시 닿을 수 없는 영역으로 결론짓고 있다. 우리는 모든 대상을 관념으로 내재화해 인식할 수 있을 뿐이지 실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면화하며 서로를 반영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세계에 대한 그리고 모든 타자에 대한 원하는 수준의 이해를 갖기 위해서는 그 타자가 되어야 할 텐데 타자가 되어 자신이라는 개체성을 버려버리고서는 대상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타자와의 차이가 타자를 인식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진리라는 우리의 기대 높은 수준에 맞춘 이해나 정의를 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가 되면서 이해의 영역을 벗어나고, 이해하려 타자로 남으면 실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부조리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이해가 가닿는 것은 사물의 표상 즉 대상에 대해 우리가 내리는 관념적 정의 이상일 수 없다는 말이다. 한정하고 제한한 대상의 상징, 한마디로 대상을 보고 깎아 만든 인형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대상 자체를 가질 수는 없다는 말이다. 진짜 그 대상에 대한 염원이 깊어져 모두 가지려 하면 그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럼 그 대상을 가지려던 나는 사라진다. 그렇다고 그 대상을 사랑하려 하여 외부 대상으로 남는다면 대상에 대해 온전히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 아닌가 싶다.

 

소금인형으로서 바다를 느끼고 싶어하는 것과 바다로 뛰어든 소금인형의 차이인데, 우리는 바다로 뛰어들 수 없으면서 바다를 느끼고 싶어하는 소금인형이라는 말이다. 바다에서 수영을 하지도 않았고 바다를 만져본 적도 없는 소금인형이 바다를 만져본 것처럼 바다에서 수영을 한 것처럼 착각을 하며 열띤 토로를 하고 있는 것이 과학이던 다른 학문이건 모든 타대상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결론이 인다.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에서 데비여신은 자신의 사랑인 시바신에게 우주의 신비와 존재의 비밀에 대해 묻는다. 시바신은 그에 대해 설명하지만 결코 우주와 존재에 대한 정언적 학론을 펼치지 않는다. 그는 우주를 만끽하고 존재를 체험할 112가지의 명상 방편을 설명하는 것이다. 대상을 이해하라고 하지 않고 대상이 되고 대상을 체험하는 길을 알려준 것이다. 대상에 대한 이해와 대상 자체가 되는 것은 다를지 모른다. 본서의 저자 윌리엄 에긴턴이라는 철학자의 말처럼 대상 자체가 되는 것도 대상을 이해하는 길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일체화되어본 이만이 대상이 되었던 순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조셉 캠벨이 원시신화를 설명하며 신이 되지 않고는 결코 진정한 신앙을 할 수 없다고 말한 까닭일 것이다.

 

본서는 진리의 길, 진리를 추구하고 이해하는 길이 난해하고 지난한 길이기도 하면서 가닿을 수 없는 영역에 대한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책이다. 그럼에도 이 추구하는 바가 지성으로서의 이해가 아닌 체험의 길이어야 한다는 깨우침을 주기도 했다.

 

본서를 읽으며 다소 버거운 느낌이었으나 읽고 난 후의 감상은, 철학도든 과학도는 수행자든 일깨움이 있을 책이라는 감상이다. 한마디로 지적인 것을 추구하건 체험적인 것을 추구하건 누구에게나 깨우침을 줄 만한 책이라는 감상이다.

 

까치글방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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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를 위한 책속 문장

 

이 결정론은 하이젠베르크의 발견으로 무대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인과관계의 엄밀한 공식-현재를 알면 미래를 계산할 수 있다-에서 잘못된 것은 결론이 아니라 전제이다.” 후에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알려지게 된 이 원리는 현재 순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단지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필연적,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입증했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도보 경주에 관한 제논의 역설에 대해-)

보르헤스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그러한 순차적인 분해, 무한히 잘게 쪼개 들어가는 방법으로는 이 문제를 풀지 못한다. 이 문제를 상상하는 것이 문제이다.” 보르헤스는 그러한 경주를 상상해서 문제를 만들어낸 사람이 우리라는 점을 깨달았다.

 

보르헤스의 가정에 따르면, 가장 위대한 마법사는 강력한 마법을 부려 헛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믿도록 그 자신마저 속이는 마법사였다 그는 우리가 꼭 그렇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중략... “모든 관념론자가 인정하는 것을 인정해보자. 세계가 본래 환각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어떤 관념론자도 하지 못한 것을 해보자. 세계가 환각임을 확인할 수 있는 비실재성을 찾아보는 것이다. 확신하건대, 칸트의 이율배반에서 그 비실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에서 ...중략... 하지만 칸트가 깨달은 바에 따르면, 우리의 지각은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마음속에서 그 사물에 시공간적으로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구성하게 된 그 변형이다. 세계를 그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동등하다고 상상할 때-특히 공간과 시간이 근본적으로 실재한다고 가정할 때-우리의 이성은 결함을 가지게 되고, 과학은 역설적으로 응답하게 된다.

 

보르헤스의 마법사처럼, 세계를 관찰할 때 우리는 그에 대한 지도 혹은 마음의 그림을 만든다. 그리고 그 지도를 공간상 어디에나 존재하게 하고 시간상 영속적으로 존재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에 관해서 창조하는 그림에는 근본적인 결함, 즉 칸트가 이율배반이라고 부른 것이 있다. 완벽한 보석의 사소한 흠집처럼, 그것을 지우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결함은 지식 그 자체와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를 정확히 되살리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당신이 기억하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되고, 현재가 항상 그렇듯이 당신의 눈앞에서 가물거리며 사라질 것이다. 정말 완벽하게 재생한다면 그것을 재생한다는 의식 자체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기억하는 자-즉 자아-를 구성하는 순간들의 연결이 지워질 테니 말이다. 완벽한 기억은 불가능하다. 완벽한 기억이 자아 그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먼저 살다 간 칸트처럼 보르헤스 역시 시간을 늦춰 단일한 프레임을 담는다는 생각, 관찰의 순간을 곱게 갈아 순수한 현재로 되살린다는 생각이 관찰 자체를 파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가까이에서 볼수록 현재는 우리의 이해로부터 더 멀리 달아난다는 것을 말이다.

 

결과적으로 세계에 대한 지각과 생각이 언어의 두 측면을 조율하는 것에 달린 한, “실재에 관한 복잡하고 정확한 묘사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푸네스가 지각할 수 있다고 하는 방식대로 과학자가 지각할 수 없는 이유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어떤 것을 관찰하는 행위 그 자체가 관찰자가 시공간상 두 순간의 차이-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를 일반화하고 연결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미세한 겹침, 이 미묘한 거리두기가 없다면, 기준을 세우고 한동안 유지함으로써 어떤 미소한 변화를 표시하지 못한다면, 존재하게 될 것은 영원한 현재뿐이다.

 

실재의 궁극적 성질을 안다고 가정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이해 능력을 제한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불확정성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입자의 위치나 운동량을 알 수 있지만, 둘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비시간적, 비공간적 관점은 관찰이라는 개념 자체를 제거하고, 그에 따라 우리가 세계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는 어떤 지식과도 양립하지 않는다.

 

역설은 단지 실재와 우리가 마땅히 이래야 한다고 느끼는 실재의 충돌에 불과하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얻을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지식은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시공간상의 한계에 의존한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을 할 때 연구하는 것은 세계 그 자체의 본성이 아니라 그 표상들이다. 여러 해가 지난 뒤 하이젠베르크가 사용한 표현에 따르면, 물리학에서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탐구 방법에 노출된 자연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은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거나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의 기준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우리가 절대 완벽하게 알 수 없는 자기충족적인 우주를 가정하고, 우리가 절대 온전히 구현할 수 없는 완벽한 도덕법칙을 가정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의도를 판단할 때 우리는 절대로 그 사람의 생각에 접근할 수 없고, 그들의 눈으로 세계를 볼 수가 없다. 우리는 그들의 의도를 이미지로 구성하고, 그런 뒤 그 이미지는 우리가 만든 것임을 잊어버린다. 하지만 실험자가 사건을 측정할 때처럼 우리가 발견한 것은 우리에게 부속된 것, 어떤 관계의 산물, 자연의 어떤 부분이 우리에게 그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양자역학의 관계론적 해석이라고 자신이 명명한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존재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상상할 때, 우리는 우주 바깥에서 우주를 바라본다고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단지 세계를 부분적이며 서로를 반영하는 내면의 관점들뿐이다. 세계는 바로 이 관점들의 상호반영에 불과하다.”

 

어떤 것을 측정한다는 것은 내가 그것과 미세하게나마 돌이킬 수 없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며, 그래서 세계에 관해 무엇이라도 알게 될 조건 그 자체가 그것을 완벽하게 해낼 가능성을 폐기한다. 다른 한편으로, 완전한 존재, 즉 진실하고 완벽하게 그 흐름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차이를 전부 지워야 하고, 그래서 앎이 불가능해진다. 우리는 세계를 완벽하게 아는 것을 상상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알고자 하는 세계와 동일해져야 한다. 또는 세계와 동일해지는 것을 상상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세계를 아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하이젠베르크의 가장 유명한 원리가 운동량과 위치에 대해서 말해주듯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

 

어떤 결과를 볼 때 우리는 바깥에서, 즉 공간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시간상 영속적인 세계에서 원인을 구한다. 우리가 아는 한에서 세계는 그렇게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거기에는 실제로 엄정함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엄정함을 만든 체스 장인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천사들을 놓아주어야 한다. 실은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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