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 지역을 읽으면 세계가 보인다 - 국제정치 전문가 김준형의 세계 10대 분쟁 이야기
김준형 지음 / 날(도서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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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매체에서 이미 널리 다룬 분쟁 지역들이지만 본서가 차별화되는 것은 역사학자의 눈이 아니라 국제 정치 전문가의 시선으로 보고 비평한 빛깔이 다르지 않을까 싶다. 간략하지만 세세한 대목에서 정치적 시선을 담고 있기에 이미 아는 분쟁들도 찬찬히 읽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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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빌 요한계시록 주석
그레고리 K. 빌.데이비드 캠벨 지음, 김귀탁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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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기독교인이었던 사람으로 요한계시록에 매혹적인 면을 느낄 수밖에 없어 이 책과 함께 하게 되었다. 다만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게 된 이유를 조금 밝혀야 할 것 같다. 내가 기독교인이었던 순간은 성경을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언급하는 대목만 읽던 때이다. 나 스스로 성경을 읽고부터는 더 이상 기독교인일 수 없었다. 성경 자체에 모순이 깊고 이걸 그대로 믿는다면 더 이상 기독교인일 수 없는 게 성경이라 생각된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하나님의 정의와 피조물의 정의가 우선 모순되며 자신이 창조한 한 인간 족속에게 다른 족속의 인간은 성노예로 삼을 어린 여자 몇만 남기고 남녀노소 모조리 죽이라는 거룩한 진멸이라는 것도 만물의 창조자인 하나님의 태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말은 진작부터 모순이라고 느꼈다. 자신이 유일신인데 유일한 존재가 도대체 누구를 질투한다는 말인가? 인간이 몽상하는 가상의 다른 신들은 창조자의 입장에서 그저 인간의 상상의 산물일 뿐이지 않은가? 그런데 인간의 상상을 질투한다니 정신과 상담이 필요한 존재가 하나님이란 말인가? 창세기 초반의 인간과 피조물 그리고 실낙에 관한 소소한 부조리를 떠나 다른 대목들을 보아도 유대인들의 경전에 나타난 하나님은 부조리하고 어불성설의 존재일 뿐이다. 신약에 이르러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나님을 개종시키다시피 그 상을 변모시키는데 이 역시 이전의 하나님과 신약 이후의 하나님 사이에 괴리만 더 크게 느껴진다.

 

예수님의 상도 그렇다. 예수님은 분명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 ‘빛의 자녀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상을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거나 그만이 유일한 존재인 독생자라고 수평관계에서 상하 관계로 만들었다. 예수님은 오히려 친구를 자처했는데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서도 그의 제자들은 조금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는데 예수님께서 너희는 내가 누군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대목도 그가 독생자인 것을 다른 이들은 모르고 그 자신만 알고 있었다는 말도 안되는 해석을 하고 있다. 오히려 너희는 자기 자신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와 본성을 모르지만 나는 나 자신의 가치와 의미와 본성을 안다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게 너 순조로이 해석된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너희 자신의 가치와 의미와 본성을 알게 해 주겠다는 웅장한 말씀이었다고 보이니까 말이다. 이 모두 예수님을 신격화하기 위한 초기 기독교도 중 삼위일체, 예수님을 신으로 보는 관점을 가진 종파의 해석이 로마의 정치에 편승해 대세가 되며 이루어진 상황이다. 초기 기독교 중에서도 그노시스라던가 그와 비슷한 해석을 하는 종파들은 당시 거의 대부분 숙청되어 사라졌다. 복음서들을 보아도 예수님의 출생지역과 기록들이 상이하다. 그렇다면 당시 요한복음을 기록한 예수님의 이종사촌의 기록이 정확할 것인데도 그의 기록과는 다른 기록들이 존재하는 까닭은 구약에서 기록된 메시아의 출생지역과 일치시키기 위해서이다. 구약에서는 메시아가 죄인들 사이에 머문다는 기록도 존재하는데, 그래서 초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행한 것이 대중을 죄인으로 정의하는 도그마를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구약에서는 사람들은 모두 매순간마다 죄를 짓고 살며 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예수님 믿어서 사라지는 원죄만이 죄가 아니라 매순간 매초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이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짓는 죄도 죄라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도 거듭 매순간 마음으로 죄를 짓게 될 것이 인간이다. 신앙만으로 어떻게 죄에서 벗어난다는 이야기인가? 예수 믿으면 천국 가고 불신앙은 지옥행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매순간 죄를 짓도록 제작한 인간은 한순간의 신앙만으로 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너희 안(사이)에 천국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도 초기 기독교인들은 너희 재산을 땅에 쌓지 말고 천국에 쌓으라는 예수님의 다른 말씀에 미쳐서 순교될 상황을 미친 듯이 추구했다. 애초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인간들의 욕심과 욕망이 심각히 이기주의를 추구하니 서로 사랑하며 배려하고 함께 거룩하게 살아가라는 취지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욕망과 욕심어린 눈과 마음으로 이 말씀에 대해 오히려 각지의 지배자들이 초기 기독교인들을 죽이지 않으려 거듭 살려 보내며 제발 이렇게 사형당할 짓들을 하지 말라고 말리는 와중에도 초기 기독교인들이 자처해 끝내 사형당해 죽을 상황을 만들었다. 이런 천국이라는 보상에 탐욕스런 자들의 욕심과 욕망으로 갈 곳이 정말 천국일까 싶기만 하다. 기독교인이라는 탐욕스러운 자들이 추구하는 것이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 아니라는 건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1차와 2차 세계대전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모든 게 유대인들이 인간과 신의 사이에 벽을 쌓고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신격화하며 인간과 신과 예수님의 상 사이에 괴리를 거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의 이기주의와 욕심이 더 크게 그 괴리를 키웠고 말이다.

 

이 시대에 예수님의 상은 재조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분명히 창세기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인간을 만들자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구조를 본따 창조되었다는 말이 되며 하나님의 구조대로 창조되었다면 하나님이 보이신 능력의 일부를 구현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카발라 철학에서는 태초의 피조물인 실낙하기 이전의 아담을 아담카드몬이라 부르며 그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현해내었다고 보고 있다. 이 카발라 철학을 예수님께 대입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근원적으로 제작하신 진정한 인간(眞人)으로 회복(복본 復本)된 사람(아담카드몬)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현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예수님을 신격화하지 않더라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지고의 존재로서의 정의가 가능하지 않나? 예수님께서도 이미 미래에 종말의 날에 진짜 메시아가 도래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를 질투하였기에 자신이 돌아오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고 보인다. 그래서 그 존재를 한자나 한국어로 번역하면 보혜사를 자신이 보낼 것이라 말씀하셨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과 같이 실낙하기 전의 진정한 인간으로 회복되면 능력이 발현될 것을 알았기에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저 산을 바다에 던질 수도 있을 거라말씀하신 게 아닌가 싶다.

 

어쨌건 그분도 미래의 대재앙을 미리 보셨고 예언하셨으며 그의 이전 선지자들과 이후 선지자들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날을 보고 예언했다. 그레고리 빌의 요한계시록은 구약과의 영속성을 주목하지만, 다른 주석가들은 계시록에서의 구약 인용이 실제 구약과의 상이한 점을 주목하기도 했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신격화하기 위해 구약을 날조 또는 왜곡해서 인용한 경우들이 있는데 이런 습성을 계시록을 쓰면서도 보인 것 같다. 그럼에도 계시록이 중요한 이유는, 세계적으로 기독교가 전파된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세력이 있다면, 계시록 예언들을 완수하면서 대중이 예언이 이뤄지고 있다고 믿으며 안일하게 대비할 마음을 잃게 할 의도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까닭에 세계적 규모의 종교들의 예언은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면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싶다.

 

본서를 소장한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야 읽고 있다. 그레고리 빌은 계시록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요한의 말을 믿으며 계시록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태도와 살아가는 자세는 무언지를 논한다고 한다.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태도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듯하고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분명 이 시대 상황에서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 서가 아닌가 싶다. 나로서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자 바르게 살아온 선한 사람도 죽는 경우가 있고 타락한 이들 가운데에서도 살아남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죽고 사는 문제는 자신이 신앙하느냐 마느냐 하는 자신의 태도나 노력에 달린 일이 아니고, 불신앙자에게는 운명,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달린 일이니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읽으며 고려해야 할 건 7년 환난이 결코 7년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희 세대가 다 가기 전에 돌아오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2000년이 지났다. 한 세대가 30년인 것을 고려하고 7년이 30년의 4분의 1이나 5분의 1인 걸 고려하면 2000년의 4분의 1이나 5분의 1400년에서 500년은 7년 환난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적그리스도나 사탄의 하수인으로 가정되는 카발 또는 NWO 또는 일루미나티가 미국의 정재계와 국가 기관들과 미디어를 모두 장악하고 있다는 걸 믿는다면, 미국 국방성 소속 과학개발처인 다르파 DARPA에서 인간의 종교성,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유전자를 소멸시키거나 기능을 제거하는 화합물을 만든 걸 고려할 때, 과거 선지자들이 적그리스도가 단두대로 신앙인들을 죽인다고 한 예언보다 더한 시절이 올 수 있다는 결론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BCI기술을 역으로 이용해 AI로 인간의 본능과 욕망과 행동을 제어할 수 있을 텐데 거기다 신앙심과 종교성을 제거할 수 있다는 건 더 이상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가 7년 안에 끝나리라고 기대하고 싶겠지만 이제 시작되어 400~500년은 갈 거라고 보는 게 이성적인 판단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대중이 할 수 있는 건 예측하고 대응안을 마련하려 함께 생각하는 것뿐이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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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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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어떻게 아무런 잡음 없이 권력을 이양하는 오늘날 독일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규범을 유지할 수 있을까?”

 

본서의 1장은 이런 화두를 건넨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여야를 가를 새 없이 부정선거라는 암흑을 두르고 있다. 황교안 의원이 민주당의 부정선거를 논하다가 벽에 부딪히자 국민의 힘이 행한 부정선거를 논한 것과 같이 이미 박근혜 정권 때부터 부정선거 논란은 유투브 영상으로 알려져 왔다. 어느 당 어느 인물 하나의 폐단으로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진작부터 한국 정치는 민주주의를 거스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야당이 다수당이 되며 국회를 압도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압박하고 대통령이 임명함과 동시에 탄핵이 이어져 29번에 이르는 길들이기식 제재가 줄이었다. 대통령 특활비를 비롯한 여러 부서의 특활비를 삭감해 수사, 기소, 행정 전반을 저지했고 정부 예산을 대대적으로 삭감했다. 이 모든 건 민주당에서 대선 결과를 부정하고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는데 제재를 가하기 위해서였음을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다. 물론 대통령이란 인물도 대다수 국민의 마음에 처음부터 흡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족의 범죄를 감추려 수사 개입 등 권력을 남용한 것이 명백했고 그로 인해 민주당에서 탄핵할 명분이 생기자 윤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계엄을 선포해 처음엔 국민 모두가 이에 저항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다수 국민이 윤 어게인을 외치게 된 데에는 그의 부정선거를 처단하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명분이 국민들에게 최적으로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충직한 민주주의자가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동을 일관적이고 확고하게 거부하는 데 반해,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애매모호란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움직인다. ,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폭력이나 반민주적 극단주의에 눈을 감는다. 이러한 애매모호한 태도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위험한 이유다.”

 

이 말은 계엄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문장으로 쓰일 수도 있으나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표현은 법률에 있어, 대통령의 권한으로 계엄을 선포할 수 있으며, 국회가 의결해 해제를 제안할 때 거부하면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다는 조항으로 보아, 계엄을 선포한 건 법이 규정한 대통령의 권한이며 국회의 의결을 순순히 따라 계엄을 해제한 대통령에게 권력 남용은커녕 탄핵 사유조차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애초에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계엄 사유로 공표했을 때 명분은 대통령에게 돌아갔고 그걸 국민 대다수가 수긍한 것이라는 말이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동은 계엄이 아니라 다수 정당이 되었다고 자기 집단 이익을 위해 국회에서의 처신에 제한이 없는 민주당 인사들에게서 찾아야 할 일이다. 심지어 이들은 국회의원을 욕하거나 비판하면 가중 처벌하는 법안까지 만들었다. 부정선거를 논하면 처벌하겠다며 법안도 발의했었다. 이들은 법 위에 있는 존재도 아니라 법을 창조하는 빌런들이다. 선관위에서는 총선 때 참관인 둘이 부정선거 사례를 보고하자 무시했고 선관위에서 무시하자 이 둘의 참관인이 대중에게 부정선거 사례를 알렸다. 그로 인해 선관위가 이 둘을 고소하기까지 했다. 미친 것인가? 참관인은 선거를 감시할 목적으로 있는 것이다. 참관인이 부정선거를 보고하지 않고 알리지 않는다면 참관인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은 민주주의 사망이자 대한민국이 침몰 중인 상황이다. 세월호 참사는 이미 문재인 정부 때 조사가 끝났고 미심쩍어 할 대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진실을 요구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 때도 유족들의 목소리가 컸다. 그런데 무안 공항 참사에서는 이미 무안 공항과 둔덕 설치에 민주당이 더 깊이 관여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들까지 잠자코 있다. 사고 당시 착륙을 거듭 사고 지점으로 하라고 지시한 관제탑 문제까지 진실을 요구할 사안이 다른 참사들보다 큰 대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은 모두 입을 굳게 다물었다. 민주당이 난처해질 상황에는 국민이 피해자가 되어도 다수 국민은 조신한 규수가 된다. 하지만 조선 시대 규수도 분명 참다 참다가는 무슨 직언이든 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반민주 세력을 정당화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심지어 급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직언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고 묵묵히 감당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인물들이 다수인 시대라면 과거 세대가 목숨과 피를 바쳐 일군 민주주의를 우리는 잃고 말 것이다. 침묵은 불의를 향한 동조와 다를 바 없다. 심지어 자신이 피해자가 될 때까지 혹은 되고 나서도 가해자를 격려한다면 이는 느긋할 것도 없는 명백한 자살 시도이다. 이미 시절은 망국으로 들어섰으며 다시 일어서자면 시민혁명이나 쿠테타와 같은 부활의 길밖에는 없는 시절이다. 국가가 국민보다 중국 인민의 이익을 위하고 있는 정책들을 시행하고, 나라 곳곳에서 변사체와 마약이 즐비해지고, 나라 곳곳을 타국인들이 도촬하고 도청하는 지경에도, 특정 정당의 가두연설마저 타국인이던 인물들이 들어서서 다른 나라 말로 연설을 하고, 그 연설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말로 환호하는 상황에도 눈을 뜨지 못하는 국민만이 가득한 시대라면 한 번 망하는 길을 거치지 않고는 길이 없을 듯하다. 정치적 입장이 분명하지 않던 국민도 정치 성향이란 걸 띠기 시작한 시대다. 본서와 같은 책이 길을 제시하지는 않으나 이 책을 읽으며 어떤 길이 빛이고 어둠인지 가늠해 보려는 시도, 더 나은 길을 헤아려 보는 시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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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0 시대 - 글로벌 대격변이 시작된다
박종훈 지음 / 글로퍼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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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야 전문 기자 분의 전문적 시선과 상식이 어우러진 책이다. 대부분에 내용은 상식적이기도 하지만 그 정보들을 통해 드러내는 통찰은 들어봄직하지 않을까 싶다.

 

본서를 읽으며 전쟁과 방위비 분담 등과 국제질서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상당히 상식적으로 느껴졌으나 경제 문제에 대한 부분은 내가 취약한 부분이라 상당히 배우는 자세로 읽게 되었다.

 

현재의 트럼프 2기는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기댈 바가 없던 1기 때와는 달리 정당에서의 지지 기반이 탄탄하다는 대목에서 트럼프 2기 때야 비로소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대로 정치를 펼치겠구나 싶었다. 원래 미국에서는 재선전에는 다음 선거 때문에 언론과 대중의 눈치를 보며 조심히 정치하지만, 재선하고 나면 그때부터 자기 소신을 맘껏 펼친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도 어느 정도 자제하던 바를 이번 임기부터는 모두 거나하게 실행할 우려가 있는데 관세 문제부터 시작해 앞으로의 난국들이 걱정이긴 하다. 물론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 지나갈 문제기도 하겠지만.

 

본서는 정치, 국제, 경제, 사회의 4장으로 구성되어있지만 구분이 명확하다기 보다는 한 부분의 문제에도 여러 영향력이 어우러져 있기에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되기도 한다. 본서에서는 다루는 면면은 국제질서 재편과 경제적 악화의 심화와 내부의 분열과 각국의 혼란과 갈등이 어우러진 트럼프 2기가 되리라는 것이다. 나로서는 해리스가 되었어도 문제야 있었겠지만 대중이 트럼프 2기를 우려하고 심각히 보는 건 임기 시작부터 그가 보이는 지나치게 일관된 그리고 고집스런 태도때문이 아닌가 싶다. 자기 확신이 지나치고 숙고하지 않는 우려되는 승부사 기질은 그가 세계 경찰국가를 자처해 왔던 그리고 국제적 영향력의 중심에 있는 국가의 대통령으로서는 다소 무리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어쨌건 그의 시대는 왔고 미국의 민주당이 그를 탄핵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는 있지만 미국에서 그를 탄핵시키는 것이 한국 더민주가 한국의 박근혜, 윤석열 두 대통령을 탄핵한 경우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불러오는 영향력을 회피하려 한다 해도 그럴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의 정세가 이런 시기라 트럼프의 시대를 감당할 가능성이 있기나 하겠나 싶기만 하다. 어쨌든 세월은 흘러갈 것이고 이 시기가 어떠한 시절로 기억될지 가늠되기에 참 답답하고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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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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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가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인데 영어 제목과 부제도 [Tyranny of the Minority: Why American Democracy Reached the Breaking Point] 이다. 저자는 둘 다 하버드대 교수이자 정치학자이며 본서는 근래까지 국내 번역 소개되는 미국 저작의 저자들 대부분이 그렇듯 미국 민주당 지지자이고 책 전반에서도 지지 정당과 정치 성향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본서는 그래서 독자층이 명백하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개선이나 정의나 정치적 올바름이 어떤 노선으로 흘러왔고 미국을 어떤 방식으로 붕괴시켜왔으며 세계적 위기의 추세를 어떻게 불러왔는지 충분히 알고도 넘치기에 이들이 말하는 정의와 정당성에 회의를 느끼는 바다. (그렇다고 트럼프는 잘하고 있고 잘할 거라는 말은 아니다) 민주당 지지층인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전 대선에서 바이든에게 패배하고도 정당한 권력 이양을 하지 않았고 폭동을 선동했다며 비판하지만 그러한 사태가 미국내 부정선거 논란과 함께 불거진 사안이라는 것은 부정도 아니라 회피하며 언급 자체를 기피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이 소수에 의해서 정치가 패착을 겪고 있고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법 개정도 불사해야 함을 소리 높이고 있다.

 

과연 소수에 의해 미국은 붕괴하였나? 그랬다면 그 붕괴의 효시를 날린 것은 공화당인가 아니면 민주당인가? 미국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명분으로 도덕적이며 사회 정의 차원에서 얼마나 파괴적인 형국을 겪었는지 타국인인 나보다 미국인들이 더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미국의 윤리와 사회 규범과 사회 안전망들은 차별 철폐를 외치고 정치적 올바름을 외치는 사이 망가졌으며 미국민들이 그걸 절감했기에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책 저자들의 전작은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 때와 더불어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었고 그 제목과는 달리 미국의 사회상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는 바이든 정권을 통해 충분히 목격할 수 있었다.-민주당 지지자들의 시각에 반하는 근거는 미치코 가쿠타니의 [거대한 물결]에 대한 리뷰 ‘[거대한 물결]을 읽고에서 명확하게 밝혔으니 참고하셔도 좋다-

 

사실 대한민국의 현실은 미국보다 더한 것을 대부분의 국민들이 체감하는 시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서를 탐독하게 되었다. 한국의 현실은 가족의 범죄에 대한 수사에 개입하던 대통령이, 그 개입으로 인해 조만간 자기가 탄핵당할 위기에 놓이자 계엄을 선포하고, 부정선거와 거대 야당의 횡포로 인한 행정 마비가 원인이었던 계엄이었다고 변명하고, 그걸 변명이라고 보기에는 실제로 거대 야당이 일당 독재 전횡을 일삼은 것이 명백한 상황이기도 했다.

 

야당이 탄핵안을 낸 건 짧은 윤 정부 동안 29번이었으며 대통령 특활비를 0원으로 한 것도 모자라 대부분의 부서 특활비를 대폭 삭감해 수사, 기소, 행정에 악영향을 주었다. 거대 정당이 되어 대선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당과 대통령의 정치 행위 자체, 행정 자체를 마비시키려 작정하고 다수인 이점을 악용하기 그지 없었다. 이들은 이미 사회적 패권을 바꾸겠다는 자기들 공언대로 자신들이 적폐로 규정한 대상을 넘어서는 신적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특권계층을 양산해 내려고 공공의대를 지정하고 입학생들의 입학 선발에 시민사회단체가 개입하게 하려다 폐기하기도 하였다. 미국 민주당이 정치적 입지를 높이려 불법체류자들에게까지 투표권을 부여하던 것을 더불어 민주당은 그대로 따르며 국내 거주 외국인들에게 투표권을 확대하였고 민주당에는 중국 국적이던 이들마저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시켜 선거 연설에서 중국어로만 연설이 전개되고 중국어로 지지하고 환호하는 괴기스런 풍경까지 야기되었다. 이들은 한국인들의 부동산 거래를 제재(11주택 제한)하며 외국인들에게는 부동산 거래 제한을 두지 않아 중국인들의 대대적인 국내 유입과 부동산을 비롯한 국내 자본 잠식를 불러왔다. 그리고 중국인들의 국내 초중고와 대학과 의대 등의 입학에 특혜를 주었고 국내 거주와 취업에도 특혜를 주었다. 중국인이 한국인들의 세금으로 국내에서 받는 의료 혜택은 3년간 18682억 원에 이르고 있으며 의료보험 수급만 56개월간 25천억을 넘는 상황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의 세금으로 노년을 한국의 요양원에서 보내는 기가 찬 상황이 현실이기도 하다. 이러니 대대적인 중국인들의 한국 유입을 막을 수 없고, 어떤 지역에서는 자유로운 활동이 위험하다는 둥 어떤 지역에서는 중국인들이 흉기를 소지하고 다닌다는 둥 하는 소문이 횡행하다가 실제로 흉기를 소지하고 다니던 중국인이 검거되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 산불이 전쟁을 앞두고 중국인들이 인위적으로 내는 산불이라는 소문은 그저 헛소문일 뿐이라는 두둔이 무색하게 대대적인 산불 이전에 이미 중국인 대학생이 출국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산불을 내며 돌아다니다 검거된 사례도 있다. 더군다나 국내 군사기지까지 잠입해 도촬한 10대 중국인이 검거되기도 했는데 이 10대 중국인의 아버지는 중국 공안 출신이며 검거 당시 촬영뿐만이 아니라 음성 녹음까지 한 게 밝혀지기도 해서 도청의 우려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인을 받아들이고 그 숫자가 방대해지며 중국인에 의한 살인이 대두되기도 했는데 오원춘이라는 중국인의 과거 연쇄살인을 배제하고 보아도 인천 아라뱃길에서는 2023년까지 3년간 시신이 발견된 사례가 15건이었고 그 이후 2024년 한 해 동안은 25건의 시신 발견이 있었다. 작년 9월에는 머리 없는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이 상황에 말도 안 되는 건 경찰이 이 사람이 자살을 하려고 서성이는 게 감시카메라에 잡혔다며 머리가 없는 건 자살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것 같다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뭐 어떻게 자살을 해야 머리가 사라진다는 것인지 그 경찰에게 문의라도 넣어봐야 할 것 같다. 범죄도시 같은 영화가 사건을 과장한 허구만이 아니라는 게 현실인 세상이다. 인천의 시신 발견 사건 증가가 꼭 중국인 때문이라고 할 근거가 과연 부족할까? 중국인들의 국내 유입과 함께 증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일부에서는 진보 시위에 간첩과 중국인이 관계되었다는 말이 있기도 한데 이 말을 그대로 안 믿는다고 해도 윤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자인 여성이 경찰을 밀었다가 마스크를 쓴 경찰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하는 영상이 SNS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소속과 지위 및 이름을 묻는 국민의 합법적 요구에도 함구하고만 있던 마스크를 쓴 해당 경찰 주변의 다른 경찰이 이 사람은 강원 1기동대의 김X성이라고 대신 대답을 했고 답변을 들은 국민이 확인하려 그 자리에서 해당 경찰서에 해당 경찰이 소속되어있는지 확인하려다 해당 경찰이 그 시간 그 순간 확인하던 국민이 있는 현장에 있지 않고 아직 경찰서내에서 근무중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영상도 SNS에 돌고 있다. 애초에 이 국민이 물은 마스크를 쓴 그 경찰은 강원 1기동대의 김X성이라는 해당 경찰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분을 속일 정도로 비밀스러운 그 경찰은 누구라는 말인가? 마스크를 쓴 경찰들이 실제 경찰이 아니라고 해서 중국인으로 단정짓기는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현행법상 경찰에게 소속과 지위와 이름을 물으면 사실대로 답변하는 게 법인데도 불구하고 이 법을 지키지 않는 마스크를 쓴 경찰들이 즐비하다. 경찰이 범법하는(법을 어기는) 말 못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문재인 정부 때 과도하게 급증해 대한민국 전체를 마약 국가로 만들어 놓고 난 현 상황에서 마약의 거대한 밀반입이 검거되기도 했다. 이 나라는 불법의 온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정과 안전과 생명마저도 위태로운 나라로 변해가고 있다.

 

부정선거 의혹을 타파하겠다며 선관위에서는 최근 시연회를 열었는데 총선 당시 감시카메라가 한참 동안 중단되었던 것에 대해서 선관위 인사에게 질문하니 그건 컴퓨터가 렉이 걸려서 그런 것이라 답변했다. 투표함에 봉인은 한 번 뜯으면 표시가 된다고 공고하고서는 왜 뜯었다가 붙여도 아무런 표시가 남지 않느냐고 질의하자 그런 공고는 한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그리고는 선관위는 해당 봉인지 공고 영상을 삭제했으나 이미 대중이 다 온라인 박제를 해 놓은 상태다. 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은 총선 당시 특정 지역구의 참관인들이 그 해당 지역구에서 부정선거가 발견되었다고 보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중에게 이를 알렸고 사태가 그리 되고나니 그 선거 참관인들을 선관위에서 고소한 것이다. 부정선거를 보고하고 알린다고 참관인을 고소할 거였다면 애초에 선거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는 참관인들을 왜 둔 것인가?

 

더더욱 가관인 것은 부정선거를 언급하면 처벌하는 법안을 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하였다는 것도 있겠으나 그보다 더한 건 국회의원을 폭행하거나 그들의 잘못을 비난하는 말이나 글을 남기면 가중 처벌하도록 법을 제정했다는 것이다. 이게 뭔가? 이것도 인권 문제인가?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과 같은 맥락인가? 소시민이 잘못해서 피해를 보는 건 국가 차원인 경우나 대대적인 국민 차원인 경우가 드물 것이다. 하지만 국회의원의 잘못은 국가 차원의 피해와 전 국민 차원의 피해를 야기한다. 그런데도 국회의원에 대한 비판을 제한해야 한다는 말인가? 국회의원이 제왕이며 귀족이고 국민은 개돼지니까 던져주는 거나 받아먹으며 꼬리치다가 복날이 다가오도록 기다리라는 말인 것이냐는 말이다.

 

이 나라는 더이상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국민의 안정은커녕 안전도 보장하지 않고 있으며 생명도 위태로운 나라이다. 이 나라는 이미 망했고 더욱 파국을 향해 갈 것이다. 그럼에도 기대하는 건 그 파국의 끝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부활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이다. 지금의 상황은 대통령이 누가 되던 민주당 일당 독재의 시대가 될 것이며 그 끝에는 전쟁이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 상황이 지나간 이후 시민 혁명이 일어나건, 시국을 암담히 여긴 군에서 쿠테타를 일으키건 극단의 변화를 겪는 과정에서 나라가 부활하리라 생각된다. 그러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이미 더더더 망해가는 이 프로세스를 따라 끝내 끝날 것이다.

 

본서의 저자들은 미국 민주당을 옹호하며 책을 집필했지만 미국민들 중 일부는 미국 민주당을 비판하는 데 그들의 논리를 적용할 것이고 한국 독자들 중 일부는 본서에서 나와 같이 한국의 정국과 현실을 비판하는 관점을 가지게 될 것이다. 미국의 정치 성향 명확한 저작들을 읽으며 한국의 정치가 선명히 보이는 까닭은 그들의 관점이 너를 말하지만 나도 비판할 수 있는 까닭일 것이다. 상대 당에 매서운 그 눈으로 자신의 당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상대 당을 비방하는 그 입으로 자신의 당을 비판할 수 있기도 기대한다. 당신의 높이 드는 깃발이 자신의 당이 아닌 국민을 위한 것이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런 마음이 담길 수 있는 매체가 이 책이 되기를 바래본다.

#어떻게극단적소수가다수를지배하는가 #스티븐레비츠키 #대니얼지블랫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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