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믹 쿼리 - 우주와 인간 그리고 모든 탄생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유쾌한 문답
닐 디그래스 타이슨.제임스 트레필 지음, 박병철 옮김 / 알레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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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믹쿼리 #닐디그래스타이슨 #제임스트레필 #궤도추천 #우주먼지추천 #우주스타그램 #알레 #베스트셀러 #북스타그램 @allez_pub

 

출판사로부터 #도서제공 을 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도의 탄트라 경전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에서는 시바신의 배우자 데비 여신이 시바신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오 시바여,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이토록 경이로 가득 찬 우주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원소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우주의 중심에 앉은 자는 누구입니까? 형상들로 충만하며 동시에 모든 형상을 초월한 이 생명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시간과 공간, 이름과 모양마저도 뛰어넘어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시바신은 데비 여신에게 112개의 탄트라 수행 방편을 강설한다. 우주와 존재의 신비에 대해 현학적이고 이성적인 대답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 그 자체가 되어 체험하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우주와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고 그것을 종교나 철학에게 또 과학에게 답변을 듣고자 하기도 한다. 종교는 그래서 에 대한 답변을 시도했고 과학은 어떻게에 대해 답변을 시도하고자 하고 있다.

 

본서는 [코스모스]라는 다큐멘터리와 저작으로 유명한 칼 세이건의 제자이자 동명의 다큐멘터리 후속 시리즈를 진행하기도 한 미국의 유명 천체 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과 물리학과 교수인 제임스 트레필이 공저한 천체 물리학에 대한 책이다.

 

제목에 쿼리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말은 컴퓨터 용어로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요청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최적의 질문을 가리키는 것이 쿼리라는 말이니 [코스믹 쿼리]는 우주에 대한 최적의 질문이라는 뜻일 것이다.

 

목차만 보아도 알겠지만 이 책에는 단순한 질문부터 심층적인 질문까지 10가지 질문으로 우주와 우리의 기원과 존재 방식까지를 어떻게라는 차원에서 논하고 있다. 이 궁극적인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천체 물리학, 이론물리학, 양자역학, 진화생물학 등등 학문의 여러 분야가 동원되며 통섭적 차원에서 우주의 기원과 존재의 구조 그리고 외계와 다중 우주를 거쳐 우주의 종말까지를 논하고 있다. [빅 히스토리]적인 저작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라도 끌릴 만한 책이다.

 

이 시절이 실용성에 큰 의미를 두는 시절이라지만 이때 역시 그럼에도 모든 이들이 자신과 우주에 대해 어떻게라는 차원에서 궁극적이랄까 실제적인 의문을 늘 품고 살아가게 되지 않나 싶다. 그래서 수행을 찾는 분들과 종교를 찾는 분들 그리고 철학에 천착하는 분들도 끊이지 않는 것일 테고 말이다. 하지만 과학 역시 하나의 철학이라고 생각된다. 다수가 과학은 검증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과학에서 밝혀진 대목은 그렇다 해도 우주와 존재 차원에 관한 영역은 검증도 답변도 되지 않은 영역이 더 크다. 검증이 되기 전까지는 모두 가능성의 영역일 뿐이다.

 

닐 디그래스 타이슨도 말하고 있지만 우주의 비밀에서 인간이 접근한 부분은 5%이다. 95%는 아직 가설일 뿐이고 이건 인간의 지성이 잘못 접근했다고 한다면 기존의 5%에 대한 정의들마저 대부분 전면 수정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과학이 객관적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공간과 시간상에서 극도로 한정된 위치에서라는 게 당연한 정의일 텐데 대다수 과학자도 일반인도 과학은 절대적 진리라고 여긴다 해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과학이 많은 의문들에 궁극의 답을 해주는 듯하지만 과학 책들을 읽을 때마다 다양한 가설들이 각 다중우주마다의 정답인 세계가 있다 해도 그건 다른 우주에선 답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런 가설들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어떻게에 답변하며 어떻게살아가야 할지 답변해 주어서가 아닌가 싶다. 빅뱅 이론은 만물의 존재가 하나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해주고 양자얽힘은 우리가 서로에게 타자이지만 둘이기만 하지는 않다고 말해준다. 이런 과학 원리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우주와 존재에 대한 본서의 질문들을 통한 여정이 어떻게에 답변하며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자연히 어떻게살아가는 것이 나은가? 라는 또 다른 질문을 낳게 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찾아가게 하는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된다. 누구나 품는 이런 의문들은 결국 그런 결론으로 가닿게 하니 말이다.

 

모든 학문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영혼으로 가닿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기대가 있기에 학문을 닦기도 책을 읽기도 하는 걸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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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멸종, 생각보다 괜찮은 아이디어 -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철학적 사고 실험
토드 메이 지음, 노시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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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멸종생각보다괜찮은아이디어 #토드메이 #철학 #인류멸종 #인류존속

#위즈덤하우스 정기서평단 #위뷰 1기로서 #도서제공 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본서의 원제는 [Should We Go Extinct?: A Philosophical Dilemma for Our Unbearable Times]이다. 나로서는 답이 나왔다고 생각하고 그다지 딜레마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한국어 부제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철학적 사고 실험]인데 부제에서 이미 저자 토드 메이 씨의 입장이 표명되어 있다.

이 책은 인류 멸종을 논하는 무거운 주제의 책이지만 서술은 너무도 대중 친화적이다. 저자가 [굿 플레이스]라는 시트콤의 철학 자문을 맡았었다고 하는데 그 시트콤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너무도 쉽게 딜레마를 불러오면서도 대중적이다. 그 시트콤과 같은 분위기의 책이라고 보면 된다.

저자는 본서에서 인류가 멸종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고 바로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존속해도 될 이유를 제시한다. 다시 그럼에도 부정적인 견해의 근거를 제시하고 다시 또 그를 부정하며 이런 순환이 이어진다. 이 리뷰에서는 저자의 입장 전환을 따르기보다 상반되는 입장을 각각 나열해야 할 것 같다. 나에게는 저자와 같은 필력과 위트를 따를 재능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류 멸종을 지지하는 입장에 대해 저자는 공리적 입장에서 논지를 펼친다. 인류 본인이 이미 행복하지 않으며 인류는 공장형 축산과 산림 파괴를 비롯한 환경 파괴로 인류 자신뿐만이 아니라 타 생명체들인 동물들에게 마저 불행과 고통을 전파하고 있다는 이유다.

인류 존속을 주장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인류는 이성을 가진 존재이니 무엇보다 존재 가치가 있고 이를 종차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고 해도 타 동물군과 자연에 대해서는 적절한 대응으로 이들에게 미치는 해악을 줄이면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단순한 이야기를 철학적 논변으로 거듭 전제를 반박하고 그 반박을 반박하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나는 이 책은 하나의 주제를 유의미하게 던지는 자체로서의 의미가 더 큰 저작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너무도 심오한 주제인데 분량이 너무 짧은 것만이 아니라 서술의 관점 또한 동시대에만 한정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보다는 더 깊은 서술이 가능한 주제의 책이 아닌가 싶었다.

인류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만으로도 이 시대의, 서로를 엿보며 열등감에 쩔어가다가 살인도 서슴치 않는 사람들, 타인의 반응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자기 입장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극대화된 사람들, 서로 분열하기가 극한이라 남녀까지도 대립하는 시대상, 황금만능주의와 승자독식에 찌들어 타인을 인신매매하고 죽여 장기 적출도 거대 사업이 되는 이 시대상은 인류가 멸종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인류의 역사를 보아도 중국 진나라 장수 백기는 포로 40만 명인가를 묻어 죽인 것으로 알고 있으며 중국사에서 이런 규모의 인명 살상은 적지 않게 반복되었다. 예수가 사랑을 전파하고 간 서양에서는 그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마녀사냥으로 죽였다. 그리고 대항해시대의 신대륙 원거주민들에 대한 살상과 폭력과 잔혹 행위도 인간의 실상을 말해준다. 세계대전 시기 일본군의 731부대 실험이나 위안부라는 이름의 성노예 행위 그리고 중국에서 그들이 행한 난징 대학살, 일본에서의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 그리고 나치가 행한 홀로코스트 등은 인류가 과연 존속되어야 할 정도로 선한 존재인가 의문이 인다.

현대에도 장기 적출을 위한 납치로 경악스럽지만 20세기에 미국 정부가 군인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살인병기로 사용하려 최면과 마약을 이용해 세뇌했다는 [MK 울트라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가 음모론으로 알려졌으나 21세기 되어 사실로 밝혀졌다. 20세기에도 후반에 미국 흑인들을 대상으로 매독을 전파해서 이 극도의 전염병이 전파되는 과정을 추적했다는 것이 음모론으로 돌았으나 이 또한 21세기가 되어 미국 정부 산하 미질병청에서 승인을 받고 행한 실험인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개인주의적 관점으로 사건을 보는 미국인들은 이것이 한 질병청 관리이자 의료인의 개인적인 도덕성 문제이자 매드사이언티스트의 그릇된 판단에 기인한 범죄로 보며 대중적 담론에서 묻히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인종의 여성이 흑인 남성에게 성적으로 호의적인 시대 상황에 이 실험이 흑인 사회만을 향한 실험이었다고 생각하고 미국 시민들이 문제의식 없이 넘어가는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국 시민 전체에 대한 미국 정부 차원의 질병 전파 과정을 모니터링 하는 실험이었다는 것이 사실일 텐데도 말이다.

한국도 선감학원(서울 경기 지역)과 형제복지원(부산 경상도 지역)이라는 어린이를 아무나 잡아다가 성적으로 유린하고 폭력으로 노동력을 착취한 역사가 있다. 21세기의 한국 전라도 신안이라는 곳에서는 염전 노예라고 다른 지역 사람들을 잡아다 노예로 만들어 십수 년을 무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기도 했다. 그걸 전라도의 법원에서 관행이라며 집행유예를 판결한 판례도 있다. 전라도에서는 전국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는 숫자보다 더 많은 숫자의 시신이 매해 발견되고 있고 한국의 전국 곳곳에서 머리 없는 시신과 상반신 없는 시신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대한민국 현실이다.

한국 한해 실종자 수는 7만 명 이상이고 중국은 한해 100만 명이 실종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밀입국자들 자녀 수만 명이 실종되었다. 한국에서 길거리를 가는 여고생을 마구 폭행해 차에 태우는 남자들의 모습이 감시카메라에 찍히기도 하고 중국에서는 아이를 안고 가는 엄마에게서 순식간에 아이를 빼앗아 차에 싣고 사라지는 남자들의 모습이 감시카메라에 찍히기도 하는 세상이다.

21세기 초에는 한 중학생이 게임을 하다가 사람을 죽여보고 싶다며 자기 초등학생 동생을 난자해서 죽인 사건이 있었고 자기 아이를 고층 아파트에서 창밖으로 던진 엄마도 있었다. 사회생활이 여의치 않던 20대가 사회와 타인에게 적의를 품고 서울 번화가 한복판에서 스포츠 경기를 즐기듯 마라톤을 하며 아주 먼 거리 동안에 지나가는 자기 또래의 남자들을 마구 찔러 죽인 사건이 있었던 건 지금으로부터 몇 해 되지도 않았다. 돈이 이유인 사건들은 모두 배제하고 언뜻 기억나는 충격적인 사건들만도 이렇다.

정치가의 범죄나 특정 정치인이 타국 조직범죄자들과 연루되었을 수도 있을 사건들은 현재 법들이 말할 수 없는 시대를 만들어 말하지 않는다. 직위나 계층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가 문제이다.

인류 문명은 실패한 문명이다. 개선의 가능성도 없다. 인류는 멸종하는 것이 낫고 이것만이 지구가 개선되는 길이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네가 뭔데 그런 판단을 하느냐’고 하지만 그건 누구나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과거에 한국에서는 친아버지와 계모에게 맞아 늑골이 부러지고 온몸이 멍투성이로 죽은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아직 미취학 아동이었고 온몸에는 다리미로 지진 자국과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있었다. 동급생들에게 폭행당하고 강간당한 채 음부가 지져진 채 죽은 여학생도 있었다. 그 여학생이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한 해 중국에서는 27만 명에서 34만 명 정도의 어린이가 실종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세계기구 산하 기관의 중국 장기매매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전 세계 어린이 간의 이식 사례는 모두 합해야 한해 1000명인데 중국은 한해 3000명이다. 중국의 장기 적출 사례를 조사한 기록을 보면 중국에서 망명해온 군인과 의료인들이 보고하기를 태어난 그날 아기 부모에게 사망했다고 거짓으로 통보하고 바로 아기를 죽여서 장기를 적출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아기던 어린이던 장기를 적출해 성인에게 이식하면 두세 달 사이에 성인의 장기 크기가 된다는 것이 의료진들 증언이다. 이런 실정이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중국에 방문해 시진핑 중국 주석을 만나 장기만 새걸로 바꾸면 영생할 수 있다고 말해 세계적 논란이 되고 러시아 대통령실 대변인이 이에 대해 해명까지 했던 것이다.

상상해 보라. 부모에게 학대당하던 아이가 집을 나서서 힘없이 걷고 있을 때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손을 잡아주는 모습을. 그 아이는 따듯한 손길에 이끌려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며 따라나설 수 있다. 그 아이는 아줌마가 건네는 따듯한 음료수를 마시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면 차가운 철제 침대에 묶여있는 현실에 처할 것이다. 아이를 보호해주어야 할 어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그 아이의 눈과 장기를 적출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그 아이가 “이 세상은 지옥이구나! 사람이 악마구나! 이딴 세상 멸망해 버려라!”라고 소리없이 절규하며 죽어간다고 그 아이에게 누가 “네가 뭔데 그런 판단을 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아이가 있는 세상을 멸망하는 게 낫다고 생각도 못 해야 한다는 것인가! 이 세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멸망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나은 세상이다.

본서는 앞서 말했지만 저자의 긍정적인 답이 와닿기보다는 생각해 볼 주제를 주었다는 자체로서 의의가 있는 책이다. 시대를 보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존속할 가치가 있다’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건 생각할 기회를 주는 자체로 의미가 큰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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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1-01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리뷰글을 읽어보니 과연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는것이 좋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드네요 ㅜ.ㅜ

이하라 2025-10-31 11:42   좋아요 0 | URL
저는 개선된다면 모를까 인류가 지금 이대로 존속되어선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절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죽음을 모른다고 걱정하지 마라 - 영혼의 철학자 몽테뉴 인생 수업
미셸 에켐 드 몽테뉴 지음, 고봉만 옮김 / 아를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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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모른다고걱정하지마라 #가려뽑아새로번역한수상록 #미셸에켐드몽테뉴 #고봉만 #도서출판아를 #수상록 #에세이

 

몽테뉴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으나 그의 수필을 접한 건 처음이다. 엮고 옮긴이인 고봉만 님은 몽테뉴의 [수상록]을 인생의 주기마다 거듭 읽고 또 읽어왔다고 한다. [수상록]은 이 장르를 열었다고 인정받는 최초의 저작이라고 고봉만 님은 언급하고 있다. 물론 나로서는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떠오르기는 했지만 아마도 이 둘의 서술과 주제를 펼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어서 그리 말씀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본서는 [수상록]에서 죽음에 대한 주제를 가려 뽑아 엮은 책이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죽음이 만연한 이 시절에 죽음을 돌아보는 본서가 출간되어 조금은 다른 의미로 다가오지도 않을까 싶기도 했다. 사람에게 죽음이란 두려움일 수도, 따스하게 또 다른 삶으로 이양하는 교차로이기도, 버거운 삶을 끝내며 다른 삶을 꿈꾸는 어두운 희망이기도, 또는 실패에 대한 수긍이기도 하다. 아마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수 만큼에 죽음의 의미가 있을 것도 같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명확한 건 이건 상당히 선명하고 강렬한 경험이고 딱 그런 크기의 경험할 순간에 대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두렵던 후련하던 그저 암울하던 각자마다의 감정을 갖게 되는 가장 뚜렷한 정서적이기도 실제적이기도 한 경험일 것은 명백하다. 그래서인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도 이것이 걱정이라는 말에 수긍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죽음을 모른다고 걱정하지 마라] 저자는 수상록에서 죽음을 화두로 가려 뽑아 옮긴 이 책의 제목을 이리 지었다. 본서에서 몽테뉴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려 애쓰기보다는 죽음에 단단해지라고 조금씩 죽음에 적응하라는 듯 말하고 있다. 서양 철학에서는 흔히 메멘토 모리를 말하는데 죽음을 기억하라는 이 말의 깊이를 서양인들 그것도 과거의 서양인들은 명확히 느끼며 살았을 테니 말이다. 몽테뉴는 1533년 태어나 1592년 사망했는데 그가 살던 시대는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절이다. 몽테뉴의 청년 중년 시절은 종교 전쟁이 지속되었다. 내전으로 사회에는 질서가 무너졌고 사람들 간의 신뢰에도 금이 갔으며 누가 친구인지 누가 적인지도 알 수 없는 시절이었다고 한다. 오늘 밤 누가 나를 배신해 죽일지 모르고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자유의 몸일지 확신할 수 없는 시대였다고 말이다.

 

이런 시대 상황과 의료가 발전하지 않아 유아들이 거듭 죽어가던 상황에서 몽테뉴의 자녀들도 거듭 죽어갔다. 몽테뉴의 첫딸은 태어난지 두 달 만에 죽었고, 둘째는 7주 만에 죽었다고 하며, 셋째는 석 달 만에, 넷째는 며칠도 못 살고 죽었다고 한다. 다섯째만이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몽테뉴는 내 아이들은 모두 젖먹이 때 죽었다.”라고 자신의 글 행간에 적었다고 한다. 그는 둘째와 셋째 같은 경우에는 이름도 짓지 않았다. 아마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며칠도 못 살고 죽은 넷째도 이름이 있는데 그 역시 두려워서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절친 라보에시는 몽테뉴가 20대이던 시절에 결핵으로 죽었는데 몽테뉴는 나 자신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고 적었다. 그의 동생 역시 사망했다. 그 시절에는 죽음이 일상적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죽음을 꺼려하거나 부정하려 하기보다는 수긍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영원불변함 자체도 사실은 시들어 힘이 없는 움직임에 불과하다.” 그에게 죽음에 대한 인상이 어떠했는지가 다가오는 문장이다. 그는 영원한 것을 믿지도 기대하지도 못했다.

 

나는 존재를 그리지 않는다. 내가 그리는 것은 과정이다.” 그는 순간순간의 연속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안도했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는 죽음에 지는 걸 그저 받아들이기보다는 살아있는 지금에서 느끼는 희열에 집중하는 길을 선택했다. “인간의 지극한 복은 행복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인상이 그에게 더욱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했음을 느낄 수 있는 문장이다.

 

신은 조금씩 빼앗아감으로써 인간에게 은총을 베푼다. 이것이 노화의 유일한 미덕이다. 노화를 겪으며 조금씩 죽어온 덕분에 마지막 순간에 죽음이 완전하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것이다.”

 

죽음이 어디서 우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으니 어디서든 죽음을 기다리자.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그토록 짧은 시간 동안의 일을 그토록 오랫동안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까? 오래 사나 일찍 죽으나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마찬가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히파니스강에는 단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작은 동물들이 있다고 한다. 그 동물들 중 아침 여덟 시에 죽는 동물은 청춘에 죽는 것이고, 오후 다섯 시에 죽는 동물은 노후에 죽는 것이다. 이토록 짧은 동안의 일로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것을 보고 웃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죽음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그의 의식 속에서 점차 승화되어 가며 위트와 함께 다른 감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본서에서는 죽음만이 아닌 그의 의식들도 돌아보게 된다. 그는 늙어가며 자신에게 자제력이 생겼다고 말하고 성숙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무겁게 여기지 않았다. 늙고 병들어서 활력이 사라져 가면서야 멈추게 되는 것을 절제한다거나 자제력이 생겼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영혼과 육체는 부부처럼 서로 의지하며 절제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쾌락을 적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경험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적 사유와 교육을 기꺼이 신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이다. 이는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숙련되고 성장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의 말들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일 때와 직관적일 때가 교차하며 영혼에 이끌림과 울림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시대에 주던 울림이 이 시대에도 동요하게 하는 것은 인간에게 시간을 관통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시대의 영혼에게도 필요한 질문과 조언에 대한 궁금함이 인다면 들어봐도 좋을 말들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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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는 뇌 -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단 하나, 상상에 관한 안내서
애덤 지먼 지음, 이은경 옮김 / 흐름출판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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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는뇌 #애덤지먼 #The_Shape_of_Things_Unseen #A_New_Science_of_Imagination

 

#흐름출판 @nextwave_pub 으로부터 #도서제공 을 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자는 액서터 대학 의대 교수이자 신경과학자로 의식, 기억, 심상의 신경 기제를 30여 년 동안 연구해 왔다고 한다. 2003년 수술 후 이미지를 상상하는 능력을 상실한 환자를 치료하면서 이 책에서도 언급된 아판타시아인(상상하는 힘을 잃었거나 애초에 없는 사람)과 하이퍼판타시아인(상상하는 힘이 극도로 강한 사람)에 대한 연구에 매진했다고 한다.

 

나의 경험을 이야기해보자면 나는 유년 시절부터 눈앞에 없는 대상을 실제 그대로 그려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반응을 보며 타인들은 내가 눈앞에 그린 영상을 보지 못하고 그걸 표현하면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걸 눈치채고는 다시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허공에 그려낸 영상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현실이란 것은 공유됨으로써 실재성을 인정받는 것이고 사람들이 감각할 수 없고 실재한다고 다수가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다수의 왕따가 시작될 수 있다. 어린 시절 이미 이걸 눈치채고 나로서는 내가 이미지화해내는 대상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때 나는 모든 현실이 서로 다 공유하는 것은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또한 때로는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경로로 현실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자신의 의지로 창조하는 현실은 실제에 영향을 미치는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만들어진 현실이 되기도 하고 시, 소설, 극 등의 문학이나 극문학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창조되는 현실은 가볍게는 몽상이나 백일몽이겠으나 심각하면 환각, 망상, 편집증, 히스테리 등 이상 심리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은 이렇게 다른 현실을 자의에 의해서든 자의와는 다른 과정을 통해서는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여기까지 서술한 현실이란 말을 정의하자면 실제라는 것이 공유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현실은 공유될 수도 있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공유되지 않는 감각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공유되지 않지만 감각되는 대상 즉 현실은 어떻게 창조되거나 현현되는 것일까? 우리는 그러한 현실 창조를 가져오는 힘을 상상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력은 앞서 말했듯 자의적(자신의 의지로)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양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은 대부분 상상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미지든 감각이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든 연상 자체가 불가능한 아타락시아인이라는 부류가 있고 모든 걸 실제에 가깝거나 원활하게 떠올리는 하이퍼판타시아인이 있다. 그리고 그사이에 대부분에 사람들은 적절한 수위의 상상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류 대부분에게 상상력은 자신의 속성인 것이다. [사피엔스]에서의 유발 하라리의 말을 빌리자면 상상하는 힘이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다. 그리고 본서의 저자도 이 시대 뇌과학자들과 신경의학자들도 인간이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재(현실)을 인지하는 것 자체도 하나의 예측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가능성 중 더욱 현실성 있는 가능성을 예측하고 판단해내는 과정이 현재(현실) 인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재 예측은 결국 인간은 상상하는 힘으로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도 인식한다는 말인 것이다. 상상한다는 것은 문명과 문화 같은 거대 규모와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사소한 규모를 막론하고 인간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어쩌면 모든 사안을 고려할 때 세상이란 건 상상이 전부인 것인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양자역학과 우주과학은 우주가 하나의 시뮬레이션이라는 가정을 학문적으로 구축하고 있고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로 전파되기 직전인 상황이다.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우주도 세상도 하나의 상상 속 세계라고 주장한다니 일부 과학자들의 정신에 대해 정신과적으로 참 진단하기 쉬운 결론에 이르고 있지 않나?

 

본서는 신경과학에 입각해 서술하는 바의 근거를 제시하며 일상부터 스포츠맨과 예술가의 상상 훈련, 음악과 미술과 문학 예술가들의 창의성 그리고 히스테리 등 의학적인 대목 더 나아가 인류사적인 발전에서까지 상상한다는 것의 여정과 그 힘을 형상화하고 있다.

 

상상하는 존재로서의 인류 그리고 그 인류의 정신과 뇌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궁금해할 만한 책이고 그 궁금함을 지적 재미로 채워줄 수 있을 책이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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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제국 쇠망사 - 우리는 왜 멸종할 수밖에 없는가
헨리 지 지음, 조은영 옮김 / 까치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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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제국쇠망사 #헨리지 #과학 #인류사 #호모사피엔스 #생물학 #인류멸종 #대안

 

#까치글방 으로부터 #도서제공 을 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재는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초월하는 데 대한 대중의 우려, 국지전 양상이지만 알고 보면 세계전인 전쟁이 확전 양상이 되어가는 데 대한 불안, 기후위기설과 자연재해들이 연이어지는 데서 오는 위기감이 점차 대중을 불안에서 두려움으로 위기감에서 공포로 몰아넣다가 이젠 해탈의 경지인지 안일해지게 만들어 가고 있는 시절이다. 종말론이 대두되고 인류세의 끝이 재조명되는 시기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러한 시기에 헨리 지는 인류세의 끄트머리일지도 모르는 이 시절을 과거부터 복기해 보며 조망하고 있다. 과학 문외한도 누구나가 아는 과학 학술지 [네이처]지의 시니어 에디터인 저자는 [지구 생명의 (아주) 짧은 역사]라는 책을 저술해 2022년 영국 왕립학회 과학도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본서는 전작의 시선을 인류에게로 돌아보되 인류가 어떻게 중흥했는지가 아니라 현재 쇠락해가고 있으며 어쩌면 절멸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책이다.

 

제목에 흥망이 아닌 쇠망을 표기했듯이 이 책의 주제의식은 어떻게 발전해왔는가가 아니다. 인간의 발전 속에 어떻게 쇠락과 위기가 내포되어있었던지를 주목하며 차분히 논하고 있는 저작이다. 인류세가 시작되기 전 호모속은 다양한 종이 공존하고 있었다. 서로 유전자가 교류하고 생존을 위해 경쟁하며 생물학적으로도 생존을 위해서도 상생할 수 있는 체제였다. 그러다 호모 사피엔스만이 승자라며 남았지만 그건 다른 종으로부터 생존에 유리한 이점을 넘겨받을 가능성이 차단당하고 다양성이 소멸해 질병에 대한 저항력 약화 등 문명의 쇠락를 불러오는 문제를 내포하게 했다.

 

농업혁명은 잉여생산물을 축적하여 인류가 계층이라는 것을 창조해내 계층 간의 갈등 요소를 내포하게 했고, 농산물에 한정된 식량을 소화하는 문제로 인해 질병 문제를 낳아 그런 까닭에 인간을 더욱 쇠약하게 만들었다. 야생동물의 가축화는 수인성 감염병 등의 인간에 대한 전파로 이어져 현대 감염병들의 효시가 되었다. 대대적으로 전파된 감염병들부터 상시 앓고 있는 독감까지 가축화가 진행되며 인류가 안게 된 것들이다. 이는 팬데믹의 가능성을 이때부터 안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농업혁명과 가축화 등으로 인구증가가 가능하게 되고 거대 인구를 보유하게 되며 형성한 문명들은 서로 갈등의 여지를 안게 되었고, 거대 인구는 산업화와 기술개발 등의 요인이 되어 현재의 정치 사회적 갈등과 기술개발로 인한 우려의 원인이 되었다.

 

사안들이 모두 어우러져 다시 생태계 파괴와 환경 파괴의 과정을 거치게 했으며 내포되었던 전쟁 발발의 우려나 기술개발로 인한 AI 등장으로 인류세의 위기의식을 낳았다. 정치 사회적 갈등 양상 등이 더해지며 이러한 여러 요인들은 인구 감소의 원인이 되었다. 불임과 난임과 피임 등 지속적인 인구 감소의 원인은 이러한 추세의 지속만으로도 1만 년 내의 인류 절멸을 예견하게 한다.

 

이러한 우려들에 대한 대안을 저자는 차근차근 제시하기도 하는데 녹색 혁명과 환경 개선 등과 사회적 인식의 개선 같은 원론적인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주개발 등으로 우주로 진출하는 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물론 과거부터 많은 학자와 문인, 식자들이 누구나 이야기하던 바이기는 하지만 인류의 역사와 절멸 위기를 구체화해 서술하여 언급한 저작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것을 대안으로 보자고 해도 인류 역사에서 인류가 동족마저 타 인종이나 타 문명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종시키며 대항해시대를 열어온 것을 고려한다면 인류의 우주로의 확장은 우주적 차원의 재앙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인류의 의식 혁명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인류가 우주로 확장한다는 것은 우주에 암이나 바이러스가 확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어쨌든 인류의 절멸을 우려하여 남긴 저작으로는 상당히 몰입감 있는 저작이 아닌가 싶다.

 

미국과 유럽을 위시한 각국의 우주개발 계획을 시행하고 있는 기업들과 정부 산하 조직들을 볼 때 지금 본서와 같은 이러한 저작은 이미 작성된 청사진을 재조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저작들을 디딤돌 삼아 우주로 나아가기까지 인류의 의식이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지를 논하는 학자들도 앞으로 속속 등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자면 본서에서의 관점과 제안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며 대중적 상식이 되어야 하는 게 선행되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그러한 까닭에 본서에 대한 관심이 이어져야 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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