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은 그냥 벌어진다 - 이 세계를 움직이는 힘
브라이언 클라스 지음, 김문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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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심리학]을 인상 깊게 감상했었는데 바로 그 저자의 저작이다. 다만 본서 [어떤 일은 그냥 벌어진다]의 경우는 비단 국제정치학만의 경계를 넘어선 시야가 요구되는 저작이라 국제 정치학자가 과연 이런 저술이 가능한가 하는 우려 속에서 독서를 이어갔지만 완독을 하며 우려가 무색했다는 감상이다. 

카오스 이론을 통해 역사, 양자물리학, 진화생물학, 철학 등을 근거하며 전방위적으로 인간의 역사와 개인의 삶 속에서 수렴성(운명)과 우발성(우연) 가운데 무엇이 지배적인가 의혹을 불러일으키며 서술되는 본서는 결론적으로 필연적 우연성으로 우주의 모두는 곧 나는 세상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데 이른다. 저자는 사소한 우연성이 역사의 향방을 결정하고 생물의 진화에마저 우연이 작용했으며 양자우연성이 우주적 진실임을 주지시키기도 하며 우연이라지만 결국에는 필연이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게 만든다. 합리적 판단이나 계획에 우연이 미치는 영향은 사소한데서 그치지 않는다. 극단적이며 운명적인 귀결을 가져오는 것이다. 목적과 의도는 변수 제거라는 과정만으로 이루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연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는 여정을 통해 완성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어쩌면 이런 결론이 벅찬 마음의 격동을 불러올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개인의 의사는 무력한 것인가 하는 낙담도 일게 하는 결론이었다. 필연적 우연이라는 것이 운명론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갖는 감상은 저자의 의도와는 다른 감상일 수도 있다. 저자가 말하는 방향의 필연적 우연은 결코 운명결정론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야기 어디에도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거나 운명론으로 인간의 의도를 폄하하는 서술은 없다. 하지만 [자유 의지는 없다]에서 본서에 이르기까지 과학자와 정치학자의 저서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감상이 무력감이라니 이것도 필연적 우연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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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D] 신지학 제1원리
지나라자다사 지음 / 부크크(bookk)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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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소장만 하고 있던 책인데 신지학 주요 저작인 [씨크릿 독트린]POD 도서로 판매 중이라 구매하고서 신지학의 기본 지식을 알고자 이 책부터 읽어 봤다. [씨크릿 독트린] 첫 번째 권은 26일 즈음 도착할 예정이라 그전에 읽어 보면 좋을 만한 소장 도서가 본서와 [신지학 첫걸음]이었다. 신지학 도서들은 대부분 POD 도서라 마치 나만의 책을 읽는 듯한 기분도 든다.

 

신지학에 대해서는 세월이라고 할 만큼이나 오래전에 [물질의 궁극 원자 아누]를 읽으며 관심이 생겼다. 어쩌면 신지학이 쌓이고 쌓인 의문들에 대답을 가져다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생겼었고 말이다. 본서를 읽기 전까지는 [물질의 궁극 원자 아누]에서 신지학의 일부 향기를 느껴봤을 뿐 전반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본서를 완독하고 든 첫 번째 감상은 그걸 누가 알겠는가!’ 였다. 신지학은 우주의 발생과 구조, 물질과 생물의 발생과 진화와 구조를 참으로 구조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영혼의 여정과 단계까지 구조화할 정도이다. 이런 체계가 신지학이 태동하던 19세기 말에는 어쩌면 정답일지도 모를 학설이라고 받아들여졌구나 싶고, 이렇게 우주와 물질과 생명 그리고 영혼을 단계적으로 구조화, 체계화한 가르침이 과학의 발전도상에서 초기이겠으나 대중의 자부심과 기대치가 높던 당시에는 참 과학적인 사상이라는 감상을 주었을 것 같다. [오컬트 화학]과 그 프레임의 원류가 과학적 사변과 함께하게 되며 식자층의 믿음에도 불을 당겼으리라 생각되기도 했다.

 

신지학은 종교적 담론을 과학자의 언변을 보태 형이상학과 실증주의가 더해진 것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할 바탕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본서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대부분 신지학을 따르는 이들의 가르침에는 명상이나 마법이 동반된다. 이를 통한 신비체험에 실증이나 검증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면 분명 신앙(믿음)이 바탕일 수밖에 없는 가르침이 과학적 사변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지학의 성향이 과학에 친근한 사람들을 매료시키지 않았나 싶다.

 

신지학에 열광적인 사람들 가운데 마법 추종자나 명상가들 같은 영성주의자들 외에 과학도들이 흔한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본서의 후반부에 있는 [진화 속의 원리들]이라는 요약을 보면 과학적 사변성이 조금 드러나기도 해서 정리해 보려 한다.

 

[진화 속의 원리들]

 

1 신성한 의식은 생명(Life)과 물질(Matter)로 자신을 숨기고 있다.

2 형태는 생명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죽는다. 생명은 더 나은 유기체 형태로 돌아온다.

3 보이는 형태들, 보이지 않는 형태들 모두 속에는 기하학적 건축이 있다.

4 모든 것은 높은 곳에 있는 원형을 따라 만들어진다.

5 인간은 이기심을 통해 자신의 중심을 강화한다. 그는 자기희생을 통하여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뿜어져 나온다.

6 신성한 생명은 더도 덜도 아닌 완전한 신성으로서 만물 -광물, 식물, 동물, 인간, 천사- 속에 존재한다.

 

보다시피 이건 신앙 차원의 문제인 것들이다. 하지만 물질 차원을 기하학과 오컬트 화학으로 접근하고 우주의 구조(그 가운데 태양계의 구조가 거듭 예와 원리로 언급된다)와 영적 성장의 과정이 함께 논의되며 영혼의 성장을 단계별로 체계화해 마치 이러한 공식이 창조의 원래 구조이자 근본 목표인 양 인식되도록 안배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원류와 과정과 목표를 구체화해서 제시하면 사람이라면 이러한 원리가 진짜 내재해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미더움을 갖게 마련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매료시키는 경향이 깊은 가설이 신지학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화된 구조로 우주와 물질과 생명과 영혼의 단계를 인식하다 보면 대부분 목적의식을 갖게 되고 그러한 목표와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의식이 고양되는 영향을 받게도 된다. 신념에 찬 인간에게는 의혹과 흔들림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붓다가 언급하지 않은 과정과 단계라는 것이, 모든 영적 성취자들이 이것이 진리라고 선언하지 않은 단계라는 것이 19세기 말에 돌연 등장했다는 것이 의혹이 인다. 신지학의 원리들이 진리였다면 이제까지 그 숱한 영적 깨달음에 이른 이들은 왜 말이 없었다는 말일까? 그래서 하나의 종교단체에서 주장하는 하나의 도그마로서 다가올 뿐 진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매료되는 이들이 아직도 있을 만한 도그마! 나에게는 [신지학의 제1 원리]가 그렇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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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착각 - 뇌는 어떻게 인간의 정체성을 발명하는가
그레고리 번스 지음, 홍우진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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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무아에 대해, 나라는 존재적 정의가 실체가 없다는 데 대하여 심리학적이고 분석적으로 파고드는 책이리라 기대하고 선택한 책이다. 저자가 심리학자이면서 뇌과학자이기도 해서 더욱 이런 천착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분석적이기보다는 몇 가지 의제를 정하고 그에 파고든 저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자기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연결지으며 서사를 갖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며 자기(자아)를 서사적 연결성을 갖게 된 존재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접근을 기억에서부터 찾는데 인간의 기억은 영상 짤이나 동영상 짤처럼 파편적으로 보고 이러한 파편들을 서사를 갖도록 편집하면서 자기가 생겨난다고 보고 있다. 파편적인 기억들은 서사를 갖기 위해서 선별되는데 일관된 서사와 관련 없는 기억들은 잊혀지는 과정을 갖는다. 말 그대로 선별, 삭제, 편집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렇게 편집이라는 과정을 통해 과거가 생겨나고, 현재라는 순간에 그러한 편집을 통한 과거로 자신을 인식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것 또한 과거를 기반해서 짐작하는 것이라고 한다.

 

서사적 자아라는 표현도 등장하는데, 일관된 서사를 갖기 위해서 압축된 과거에 선별을 가하고, 빈칸에는 임의로 조작된 기억을 넣기도 하며, 현재의 자신을 그를 통해 정의하며 미래로 확장해 나가는 게 자아라는 것이다. 결국 자아는 단일한 구성이 아니라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가 각기 다르며 시기별로 거듭 분화된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책에서는 몇 편이나 샛길로 새는 듯한 서술을 하기도 하는데 모두 다음 단락에서는 주제로 귀결되기도 한다. 영화나 소설 같은 이야기에서 인간이 갖는 공감 능력을 뇌과학적으로 서술하기도 하는데, 그 단락을 읽으며 이건 웬 삼천포인가 생각했으나, 마지막 장에 가까워서 자기 서사를 재창조하는 과정을 이야기할 때, 비로소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장이 왜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자기 즉 자아는 서사를 통해 구성되는 것일 뿐이며, 이 서사의 근거는 희미한 것으로 자기 서사를 새로이 구축하며 새로운 자아를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아가 근거가 희미하다는 것은, 책 중반에서 자기와 타자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타인의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며 받아들이는 사람의 속성으로 인해, 자기 경계도 자아도 희미하다(희미하다는 표현은 나의 감상으로 남기는 것이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나라는 경계가 타자와 명확히 나뉘는 것이라 보기 어렵다고 받아들졌다. 나의 가치관과 신념이라고 믿는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타자의 것이라면 외부와 나의 관계는 완벽히 분리되어있다고 보기 힘들다고 이해되는 장이었다. 이렇게 뒤범벅인 자아를 또 애초에 명확하게 구성되고 고정되어 있다고 보기 힘든 자아를, 이야기를 공감하고 이야기를 자기로 인식하는 속성을 통해 재구축하는 것도 꺼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된다. 고통스러운 기억과 괴로운 자아상을 새로운 서사(새로운 해석으로 만들어내는 자아상)로 재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다만 본서에서 옥의 티는 음모론에 대한 대목이었는데 저자가 음모론을 언급하며 예를 든 [계획된 전염병]이라는 저작물은 [플랜데믹]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저자의 집필 시기와는 달리 [플랜데믹]이라는 책과 영상물에서 언급된 주장들이 모두 사실이었음이 밝혀진 현재를 생각할 때, 저자의 주장이 이 책에 수록됨으로 인해 본 저작의 수준을 반감시키는 옥의 티가 아니었나 싶다. 미국에서 20세기에 흑인에게 매독균을 주입해 매독에 걸리게 하고는 지속적으로 추적 관찰하며 실험해왔다는 음모론이 결국 사실로 밝혀졌으며, 20세기 중반의 MK울트라라는 대중에 대한 최면 통제가 사실로 밝혀진 마당에, 음모론이란 이름만 붙이면 거짓이라는 논리가 가당치 않다고 생각된다. 코로나19와 백신 음모론이라는 미명하에 가짜뉴스로 폄하되던 주장들이 바이든 정권하에서 현 정권의 주장과 미국 청문회와 유럽 청문회 등을 통해 명백한 사실로 드러났지 않은가 말이다. 코로나19는 자연 전파라고 주장하며 중국 우한 연구소 유출설에 대해 강경하게 가짜뉴스와 음모론으로 치부하며 여론을 억압하던 트럼프 정권이었지만, 바이든 정권 중기부터는 자연 전파가 아니라 우한 연구소 유출설이 사실이라고 명백히 밝혔다. 또 최근 청문회를 통해 중국 우한 연구소에 미국 CDC가 코로나19 바이러스 연구의 지원금을 지원해왔으며 인간에게 전염되기 쉽도록 바이러스를 변이시키는 기능획득 연구에도 지원금을 지원한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그보다 이전에는 백신 제조사로부터 후원금을 얼마를 받았느냐는 질문에 백신 보급에 앞장서 온 파우치 소장은 법적으로 액수를 밝힐 이유가 없다면서 팬데믹이 아직 끝나지 않은 당시 화상 청문회를 종결지었다. 유럽 청문회와 미국 청문회에 각각 화이자사 이사가 소환되어 화이자사가 이미 백신의 치명률이 코로나19 치명률의 30배도 넘는 3%인 걸 알면서도 대대적으로 유통 보급한 사실을 인정하기도 했다. 음모론이라는 것이 과연 인간의 몰이해와 선입견에서 나오는 가짜뉴스인지 아니면 대중의 알 권리와 눈을 가리려는 회피와 기만의 밈인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 음모론의 장만 제외하면 본서는 읽어볼 만한 저작이기도 하다. 다만 [‘라는 착각]이라는 제목이 불교철학의 무아론과 같은 주제에 관한 심층적 분석으로서 저술되었으리라는 기대가 충만한 분들이라면 다소 실망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심리학과 뇌과학 이전에 자아를 기억과 그 해석으로 보는 저자의 정의를 풀어낸 책이기 때문이다. 자아에 대한 좀 더 넓고 포괄적이면서 깊은 분석이 전제되지는 않았기에 다소 큰 아쉬움은 남는 책이다. 그렇지만 읽을 만한 책인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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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컨트롤러 - 누가 내 선택을 조종하는가?
김민식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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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분의 저작으로 저자는 인지심리학을 전공한 분이다.


제목이 [더 컨트롤러]라서 사회공학이나 다크아트 같은 심리통제 기술에 대한 책이리라 기대하기도 했다. 기대와는 달랐으나 내용 전반이 인생의 주체이면서 주도적이기만 하지는 않은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고 보다 자기주도적인 인물이 되기 위한 지식들을 전하고 있는 책이다.


인간의 논리적 취약성을 언급한 연구나 실례들이 간간히 등장하고 상당히 상식적이지 않은 인간의 속성과 실상을 전하고 있기도 하다.


주어지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을 말해주는 ‘정박효과’, 자기중심적으로 정보를 취합하는 ‘확증 편향’, 자기 소속과 집단만을 위하는 ‘내편 편향’을 소개하기도 한다. 또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문제 제기하듯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 외에는 무시하게 되는 ‘고릴라 효과’라고도 알려진 ‘무주의 맹시’를 언급하기도 한다. 뇌의 고장과 함께 합리적 판단을 할 인지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지적하고 기억의 불완전성을 이야기하기도 하며 인간의 속성과 실상이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기만 한 것도 아님을 주지시킨다.


저자의 말은 그렇기에 더 통제력을 갖추려 노력하고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지심리학을 근간으로 뇌과학과 논리학을 동반해 인간의 맹점을 논하며 그걸 보완하기 위해서도 주의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남기고 있다.


몇몇 부분에서는 상식이 된 소재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주제의식이 명확하고 서술이 이해가 쉬운 편이며 인간 심리의 맹점과 그 보완의 필요성을 주지하게 하는 저작으로 읽어볼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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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4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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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는 본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생물 진화는 이기적이라는 다윈의 정의를 따라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과 주제를 정했다고 한다. 다만 그의 설명을 들으며 수긍하려고 해도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의문이 거듭 솟아났다.

 

존재를 지속하기 위해 이기적 선택을 하며 유전자 분열과 생식을 통한 유전자의 계승을 위해 이기적 선택은 이어지며 세포 내에서의 협력도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판단에 의해서이며 부모, 형제, 자녀를 위한 희생도 유전자 계승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라는 도킨스의 해석은 일견 일리 있어 보이기도 했으나 완전히 납득이나 수긍이 가는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유전자의 이기적 선택이 절대적이었다면 지구 내 모든 생명체가 바닷가재처럼 반영구적으로 탈피만 하며 다시 태어난 것처럼 영생할 수 있는 존재로 진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보다 나은 진화를 위해 자기 존재만을 지속하는 게 아니라 세대를 거치며 진화하는 편이 나았으리라고 누가 답변한다 해도 그렇다면 왜 자기 존재 내에서는 영생하면서 유전자를 변이시켜가며 진화 가능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는냐는 의문이 생긴다. 이기적이고자만 한다면 영생과 유전자 변이가 자유로운 한 생에서의 무한 진화가 가능한 생명체로의 진화가 가장 타당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인다.

 

이기적이라기 보다는 유전자도 세포도 생명체도 집단을 형성하며 협력이 자신에게도 유리하단 걸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기성 이상의 원칙을 수립하고 지켜나가고 있다는 해석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싶다. 우리 인체 내의 장기와 같은 기관들 그리고 간세포, 심장세포, 골세포, 생식세포 같은 세포 단위도 자기 존속만 절대시하며 무한 증식하지 않는다. 물론 그러는 편이 자기 존속에 유리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자기 색깔 곧 자기 경계를 지키며 보다 큰 자신에게 공헌하는 것이 유리를 떠나 공의(공공이 따를 만한 정의)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명체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기희생을 하기도 한다. 늑대도 마멋도 작은 새들도, 개미나 벌도 그렇다. 물론 이 집단들에서는 도킨스의 말대로 유전자의 전승에 있어 이기적이라는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기르는 가축인 개의 경우에서 보듯 자기 유전자와 상관이 없는 주인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개들도 있으며 인간의 경우에는 가족이나 민족만이 아닌 국가, 이데올로기 같은 신념, 더 나아가 전혀 다른 민족의 개인을 위해 인류애적 차원이나 생명 존중 사상을 따르며 희생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생물학적인 이기성을 찾아볼 수 없다. 세포 역시도 수정되지 않은 난자와 정자가 유전자 계승을 위해 자기희생을 따른다는 논리도 가능하겠으나 이건 해석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보다 더 큰 순리와 거대한 원리에 순응하는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논리에 따라 사회화를 한다거나 공공의 합의를 도출할 때 대중을 설득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기적 유전자에서의 논리에 따라 자기에게도 이로우니 사회에 순응하라거나 대세를 따르라고 강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인간에게 더 큰 의미를 가져올 수 있는 해석이라면 유전자도 세포도 생명체도 결국에는 순리에 따라 자기의 색깔을 지키며 타자와 교류하고 때론 타자의 배려와 때론 타자에 대한 배려로 공존공영한다는 관점이 더 나은 것이지 않은가 싶다. 무한 이기주의는 암세포가 보여주는 전형성이다. 생명체를 유지 시켜주는 유전자와 세포는 이기성만이 아니라 더 커다란 자신을 위해 자기 경계를 지키며 그 경계 속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는 존재인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君君 臣臣 父父 子子의 논리가 유전자와 세포계에서 마저 진리라는 말이다. 각자가 자기 경계에서 자기 색깔을 지키면서 대를 위해 헌신하며 지속되는 것이 인간이 만든 사회만이 아니라 유전자이고 세포이고 생명체이고 자연계이고 세계이고 우주, 모든 차원의 대의라는 말이다. 이기성만을 근간이라고 여기는 서양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문화가 자기 나름으로 대중 포용적 타협의 가능성을 이론으로 풀어낸 것이 [이기적 유전자]일 수도 있겠으나 우주는 그보다 더 큰 순리가 근간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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