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진화의 세계 -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발견한 생존의 법칙
이정모 지음 / 다산초당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극한진화의세계 #이정모 #다산초당 #생물학 #생존의법칙 #강력추천 @dasanbooks

 

출판사로부터 도서제공을 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독서 동기

 

찬란한 멸종 이후 차기 저서를 기대하게 됐었는데 마침 출간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정모 관장님의 필력을 알기에 상당히 기대되었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 극한의 처지라 극한의 상황에서 진화해 살아남은 생명체들에게서 배움을 얻어야 할 듯해 더욱 끌리는 저작이었다.

 

+ 저작 빛깔

 

저작은 이정모 관장님의 필력이란 걸 고려하고도 워낙에 흥미롭고 가독성이 높았다. 25 생물군을 다루는데도 모두 생물 자신이 이야기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저술되어 있고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 생존해 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무엇보다 각 장의 끝에 이정모 관장님이 각 생물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생존의 법칙과 교훈이 너무도 깊은 여운을 준다.

 

머리만 투명한 심해 어종인 마크로핀나 미크로스토마의 장에서는 “극한은 단순히 견디기 어려운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기준이 바뀌는 지점이다. 익숙한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때 새로운 방식이 선택된다. 나는 그 선택의 축적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환경이 요구한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라는 정의가 남긴다. 이 책의 주제를 시작하는 바이기도 하면서 여운이 깊이 남는 서술이었다.

 

우주에서도 살아남는 물곰이란 생물의 장에서는 “생명은 언제나 흐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생명은 흐르기 위해 멈춘다. ... 멈춤은 끝이 아니다. 멈춤은 다음 흐름을 위한 보존이다.”라는 정의가 묵직함을 더해 주었다.

 

사탄잎꼬리도마뱀붙이의 장에서는 “모든 생명이 자신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건 아니다. 어떤 생명은 오히려 드러나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나를 없앤다. 그러나 여전히 숲속에 있고 빛 아래에 있으며 다른 생명들 사이에 존재한다.”라는 생의 전역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깊이의 정의를 남긴다.

 

성체로 좀처럼 변화하지 않으며 남다른 재생능력을 가진 아흘로틀의 장에서는 “나는 끝까지 변하지 않아서 남았고, 끝까지 닫히지 않아서 다시 시작한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롭게 완성된다.”와 같은 정의를 남기고 있다.

 

이정모 관장님의 생물들에 목소리를 담아 전하는 감상이 생에 대한 교훈과 돌아봄을 남기는 듯했다. 이 책의 마지막 편은 인간과 인간 주위의 생물들을 전하는데 인간이 털도 발톱도 이빨도 약하면서도 그 때문에 더욱 뛰어난 생물종으로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을 전하며, 극한을 이겨낸 인간이 다른 생물들에게 극한의 환경이 되어버린 현실을 전하기도 한다.

 

+ 감상

 

본서는 생물들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인간에게 교훈으로 남는 감상을 남기는 저작이다. 삶이 무겁고 뾰족한 다른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이겨낼 기운을 전하는 책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토록 가독성이 높은 책이 이런 깊이를 담고 있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 어려운 걸 또 해낸 이정모 관장님의 다음 저작도 기다려지는 책이다. 본서는 휘청이고 쓰러질 듯한 하루하루에 이겨낼 여운을 찾고 싶을 때 읽어보시면 좋지 않을까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6-08-26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독하고픈 도서라서 찜합니다.

이하라 2026-08-26 11:59   좋아요 0 | URL
읽어보실만한 책입니다 ㅎ
 
식물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 가장 느린 것들이 가장 오래 빛난다
이유리 지음 / 청림출판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식물이내게가르쳐준것들 #이유리 #청림출판 #식물 #식집사 #에세이 #인문교양 @chungrim.official

 

출판사로부터 도서지원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독서 동기

 

[나무 수업]과 [빛을 먹는 존재들]을 통해 식물들의 생에 경외감 같은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본서도 인간보다 경이로우면서도 오랜 그들의 생의 방식에서 삶의 위안과 답을 헤아려볼 기회 같아 선뜻 다가섰다.

 

+ 저작 빛깔

 

저작의 취지가 좋아 선택한 책이다. 에세이는 잘 읽지 않지만 본서처럼 깊게 다가오는 에세이도 있어 아주 간혹 읽기도 한다. 본서는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인 저자가 자신의 연구 분야인 식물과 자신의 삶을 비추어 공감 가는 에세이로 풀어낸 책이다.

 

식물의 삶을 그린 감동적인 저작들은 더러 있지만 자신의 삶을 투영한 에세이로 쓰여진 책은 그리 많지는 않지 싶다. 인문 교양서를 탐독하는 분들과 식물을 좋아하는 분들 모두가 좋아할 만한 책이 아닐까 싶다.

 

본서의 많은 소주제들을 모두 언급할 수는 없겠고 리뷰어 본인이 크게 공감한 대목은 맹그로브가 바다의 짠맛도 이겨내며 바다와 육지 사이 늪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염분을 덜어내고 숨구멍을 마련하기 위해 뿌리를 늪지 위로 조금씩 올려 내며 자라는 이야기를 담은 부분이다. 이 사례를 소개하고 저자는 “때로는 단 하나의 숨구멍이면 충분하다.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숨을 틔워주는 작은 틈 하나, 그 틈이 있어 우리는 버티고, 살아내고, 다시 걸어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라며 감상을 정리해준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숨을 쉬고 있는가?”란 저자의 말이 깊게 다가오기도 했다. 저자의 말마따나 “내가 만든 숨구멍 하나가 누군가에게도 숨 쉴 틈이 되어주기를” 바랄 수 있을 만큼 버텨낼 수 있게 되면 좋겠단 생각도 들었다.

 

저자의 연구실에서는 식물의 빠른 성장을 유도하려고 24시간 빛을 쬐는 조건을 설정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기대만큼 자라지 않거나, 잎이 얇고 약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잎이 괴사하며 죽기도 한다고 한다. 겉으로 괜찮아 보이는 경우도 병의 저항성이 약해지고 스트레스에 취약해진다고 말이다. 저자는 “쉼 없는 성장이 오히려 식물을 더 약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데 과거 나의 경우도 쉬지 않고 무예 수련과 내공 수련으로 전혀 쉴틈 없이 빠듯하게 일정을 보낼 때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면역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오히려 저항력과 피부 상태 등도 나빠지는 걸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수행의 경계에서 어떤 이들은 괴로움이 성장을 가속시킨다고 말하는데 쉼 없는 고통과 괴로움이 이어질 때 인간은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니체인가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성장시킨다”고 했다는데, 괴로움이 과다해 사람은 미치기도 하고 자살하기도 한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일본군 종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중에는 아직도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 지나가는 걸 먼발치에서 보기만 해도 놀라 달아나는 할머니가 있기도 했다. 괴로움은 성장의 매개로 삼기에는 받아들이는 경중이 사람에 따라 세월에 따라 다르기도 할 것이다. 카라의 멤버 중 허영지 양을 뽑게 된 베이비 카라 오디션에서 탈락한 멤버의 자살 사건도 있다. 목숨까지 걸고 쉼 없이 뛰어드는 그 당시에는 스스로가 멋져 보일 수도 있고 절박함도 전해지기는 하지만 진짜 목숨을 걸고 자살까지 하기보다는 복안을 여러 개 마련해 두는 게 좋지 않은가 싶다.

 

식물도 뿌리가 타격을 입으면 뿌리 생장을 멈추고 지상부의 새잎을 내는 과정을 중단한다고 한다. 저자는 이것을 모든 에너지를 방어에 쏟기 위해서로 보고 있다. 반대로 물에 잠기면 식물은 줄기를 빠르게 키워 수면 밖으로 벗어난다고 한다. “식물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가늠하며, 성장과 속도를 늦추거나 높이며 그 순간을 살아낸다.” 저자는 “성장과 방어는 선택의 기로가 아니라 맞물려 돌아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 방어라니까 심리학 용어 같기도 한데, 잠시 물러날 때로 본다면 우리는 자신의 확신을 때때로 잠시 물려 보는 경우도 가져야 하지 않나 싶다. 이것 아니면 죽음이라는 고집이 때때로 진짜 자기나 타인의 죽음을 불러오는 경우를 볼 때 숨을 고르는 순간은 왜 없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저자가 언급한 핀란드의 갭이어(Gap Year)라는 제도는 고교 졸업 후 1년 동안 여행이나 인턴십을 하며 진로 탐색을 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이런 시간을 우리는 왜 갖지 못하고 있나 싶기도 했다.

 

때때로 바다나 산이나 들판으로 떠나기도 하고 책 속으로 몰입해 보는 것도 또 자신이 좋아했지만 가까이 못 했던 일들을 이어가 보는 것도 삶의 주기에 텀을 두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본서는 이런 식물과 저자의 감상 그리고 저자의 삶의 이야기들이 어우러져 깊은 인상을 남기는 책이다. 여름의 쉼을 이 책과 함께 하는 것도 괜찮은 휴식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삶은 무엇으로 회복하는가 - 더 나은 매일을 위한 희망의 철학
라르스 스벤센 지음, 이영래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은무엇으로회복하는가 #더나은매일을위한희망의철학 #라르스스벤젠 #인문 #철학사상 #대중철학 #북유럽철학자 #노르웨이철학자 #희망철학 #하노버철학연구소철학도서상 #희망 #비관론해독제 @thequest_book

 

#더퀘스트 출판사로부터 #도서지원 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독서 동기

 

전쟁은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고 더 더 여러 지역이 격전지로 전락하고 있다. 정치도 충돌과 분열을 낳고 있고 누구나 자신만 옳다고 타자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며 가짜뉴스니 음모론이니 하는 프레임으로 서로 담론의 장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과학과 시대가 비관하고 싶지 않은 가운데서도 비관적 전장의 중심으로 우리를 몰아넣고 있다. 도대체 희망이 무언지 어떻게 비관론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궁금해 관심이 간 책이다.

 

+ 저작 빛깔

 

: 저자 소개

북유럽과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라고 한다.

최근 그의 저작들이 다수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

 

: 저서 내용

“마법도 아니고 내일을 보장해 주지도 않지만 그것이 없다면 삶을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저자는 그걸 “희망”이라고 한다.

 

“사소하지만 존재론적이기도 하며 다양한 방식과 맥락에서 사용”되며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게 희망이라고 말이다.

 

본서의 서두에 의하면 니체는 희망이 “어떤 악보다 큰 악”이라 했고 스피노자는 희망이 “사람의 자유를 박탈”한다고 했다. 본서의 초중반에선 쇼펜하우어가 희망은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할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본서는 신화와 종교, 문학과 심리학까지 통섭하며 철학가들의 담론과 철학적 사유로 희망을 파고든 책이다. 어떤 철학가들은 가능성이자 예견이며 동기를 부여한다고 정의한 이 희망을, 인간에게 부조리이자 절망보다 더한 악으로 규정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많은 학자들과 문학가와 종교인의 썰이 등장하고 그를 반박하는 저자의 담론들이 자못 무겁게도 들리지만 성찰하고 표현하며 행동하게 해주는 이 희망이 없이는 이 시절을 어떻게 이겨나갈까 싶기도 하다.

 

볼테르는 [캉디드]에서 낙관주의를 “고통을 겪으면서도 모든 것이 좋다고 주장하는 강박적 집착”이라고 했다. 저자도 마르크스가 한 “희망은 인민의 아편”이라고 한 말을 빗대어 “아니다. 낙관론이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개인에서 시작해 내세에 대한 기대와 시민사회, 체제까지 아우르며 희망의 역할과 기능 그리고 부작용까지 논하고 있다.

 

사실 내가 읽기에는 다소의 버거움이 느껴지는 얇지만 깊음이 넘치는 저작이었다. 하지만 이 시절에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들려주어야 할 썰이 있다면 바로 이 희망에 관한 썰이 아닐까 싶다.

 

본서의 부제는 [더 나은 매일을 위한 희망의 철학]으로 비관론 해독제라는 소개가 적절했다고 느껴지기도 하는 책이다. 가능성이자 감정이자 표현이고 행동인 그리고 행동을 위한 동기이자 그 자체로 의미가 되기도 하는 이 희망에 대해 좀 더 이성적인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들어보고 싶은 분들은 무겁게 여겨지시더라도 읽어볼 만한 의미가 되는 책이다.

 

# 장기 입원으로 리뷰가 늦었습니다. 사죄 말씀 전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자아초월심리학 핸드북
Harris L. Friedman 외 지음, 김명권 외 옮김 / 학지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아초월심리학핸드북 #다수의저자공저 #학지사 #심리학 #자아초월심리학 #영성심리학 #변성의식 #샤먼 #의례의식 #명상 #수행 #사이키델릭 #심현제 @hakjisabook

 

+ 독서 동기

 

꾼달리니 딴뜨라와 명상 수행을 즐기는 사람으로서 그저 영성과 변환을 추종하기보다 좀 더 체계적으로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에 과거부터 끌려 하던 분야다. 이 저작이 있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알게 되어 바로 다가섰다.

 

+ 저작 빛깔

 

본서는 다수의 저자들이 각자 논문 형식이나 대중서 저술 형식을 빌려 집필한 내용을 6부 38장의 체계로 공저한 저작이다. 1부에서는 이 분야를 대중적으로 소개하고, 2부에서는 이론을 총정리해 주며, 3부에서는 경험을 이끄는 방법론을 다루고, 4부에서는 경험들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5부에서는 자아초월 또는 변성의식이 변화를 가져올 분야들과 사회상을 예로 들며, 6부에서는 고대부터 지금까지에 이르는 이 여정에 관한 연구들에 어떻게 접근해 왔고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 서술하고 있다.

 

서로 중복된 서술도 있지만 그건 연구자들 간에 중요하다고 보는 영역이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들이 아닐까 한다.

 

본서는 자아초월 심리학의 학술적 연구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가 주요 쟁점이며, 이 분야가 얼마나 신비주의적이고 영성적인지를 주목하게 하려는 저작이 아니다.

 

신비주의와 영성에 다가서고 싶어 변성의식으로 나아가는 다양한 경로들이 궁금한 분들이라면 [자아초월심리학과 정신치료]라는 저작을 선택하시는 편이 나을 것이다.

 

+ 감상

 

자기를 초월하고 자기를 확장한다는 개념은 서구 정신분석이나 분석심리학의 체계를 연속선상에서 이어갔다는 감상이 인다. 서구 학자들과 서양식 교육으로 서양식 관점과 논리체계를 갖춘 동양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연구하는 분야라 우리의 것이 전혀 상이하게 다가오게 하는 면도 큰 저작이다.

 

그렇다 해도 기존 동양의 깨달음과 수행 체계가 익숙한 분들께는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연구들이 아닐까 싶다.

 

동양인 대다수에게 친숙하고 바라오던 경험이자 수행의 체계들이 ‘낯설게 하기’식으로 생소한 듯한 가면을 쓰고 다가서고 이끄는 듯한 여운이 남기도 한다.

본서의 많은 대목이 논리적으로 서술되고 있으나 동양인들에게는 어려서부터 친근한 여정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연구 대상화되고 학술화한 과정이 주요 내용이지만 본서를 통해 개인적 깨달음이 가정과 이웃과 사회에 미칠 영향을 가늠해 보게도 된다.

 

현재는 소마틱스라던가 롤핑이라던가 아봐타 프로그램이라던가 이 시대의 주류가 된 마음챙김이라던가로 오히려 서양을 통해 동양으로 수행의 기류가 역설적으로 되돌아오기도 하고 있다.

 

영성이 거룩이나 경이만이 아닌 논리와 지성의 가면을 더해 재도약 되는 양 느껴지기도 한다.

 

본서와 같이 연구 쟁점화되고 학술적으로 논의되는 과정으로나마 동양도 서양식 논리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이성이 통섭되어 자기를 회복하는 여정으로 되돌아갈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감상도 든다.

 

나로서는 자아초월도 자기 확장도 아닌 자기 회복의 여정이 부도지에서 말하는 ‘복본’의 개념과 같이 스스로 자기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여기기에, 그 회복의 길이 멀리 돌아가더라도 돈오로서만이 아닌 점수의 여정을 거치면서라도, 자기 회복을 이루게 해주는 경로가 지금의 자아초월 심리학의 의의이지 않나 생각된다.

 

다만 앞서도 말했듯 본서는 학술화와 연구 대상화되는 여정을 보여주는 저작이기에 실수행에 도움을 얻거나 체험적인 여정으로 들어갈 각오로 다가설 저작은 아니라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 실수행의 길도 적지 않으니 본서를 읽으며 “잘못 들어섰네”라며 탄식하지는 마시길 바란다.

 

= 본서를 읽으며 각 장별로 또 각 부별로 감상을 손글씨로 남기기는 했으나 리뷰는 이것으로 마치려 한다. 다 옮길 엄두가 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로봇, 그리고 로봇을 사랑하는 사람들 - 소셜 로봇의 시대에 우리는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브 헤롤드 지음, 김창규 옮김 / 현암사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봇그리고로봇을사랑하는사람들 #이브헤롤드 #소셜로봇 #인공지능 #감성지능 #감정컴퓨팅 #인간성 #사회적본성 #인간로봇상호작용 #사회생태학 @hyeonamsa

 

#현암사 로부터 #도서제공 을 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독서 동기

 

피지컬 AI가 일상에, 그리고 AI 에이전트가 업무에, AGI가 곧 사회 운영에, 이렇게 전 방면에서 AI와 함께이게 될 세상에서, 로봇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로 인식되며 우리는 로봇과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분별하게 될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사유의 시간이 되어주리라 믿으며 다가선 책이다.

 

+ 본서 빛깔

 

: 저작 성격

본서의 한국어 부제는 [소셜 로봇의 시대에 우리는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이다. 이 부제와 함께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저작이다.

 

본서에서는 일상 가사 로봇부터 심리상담 AI, 노인간병 등 돌봄 로봇, 정서적이며 성적인 파트너 로봇, 현재 한국에서도 펼쳐지고 있는 적극적이고 다채로운 AI 업무 활용, 사회 운영에 AI의 역할이 확장되는 바까지 다방면의 영역과 현실을 보여 주며 이 시절의 소셜 로봇에게서 인간다운 감정을 찾고 있는 인간상을 내러티브 논픽션에 감상을 더한 형식으로 전하고 있다.

 

: 저술 배경

학문적으로 3가지 층위에서 주목되는 저작으로 ‘애착 이론’을 근거한 비생명체에게까지 인격을 부여하는 인간의 본능적 경향성은 ‘사회심리학’적 측면의 관점이라 할 수 있고, ‘불쾌한 골짜기’ 이론을 넘어 기계와 정서 교류를 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사회상의 변화를 ‘인류학’과 ‘윤리학’적 측면에서 조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감성 컴퓨팅’ 기술이랄 수 있을, 인간 정서를 시뮬레이션으로 읽어내어 반응하며 유대감을 형성하는 (AI)로봇과 인간 사이의 양상은 ‘로보틱스’ 및 ‘인공지능’ 과학의 이 시대 ‘기술 혁신’ 수준을 보여 준다.

 

이 3가지 관점을 주요한 근거로 삼아 날카로운 관찰과 안타까움이 담긴 비판, 그리고 의아함이 어우러진 시선에서 본서의 집필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다.

 

+ 감상 포인트

 

이제까지 사회는 상호주의적 차원에서 존속되어왔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기에 존재해온 것이다. 개인만이 정부와 기업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 어느 조직이던 사람들을 필요로 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도 당연히 서로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필요가 절실했기에 유지되어온 게 인간 사회의 특질이자 속성이다.

 

그런데 이제는 일론 머스크도 샘 올트먼도 초대량 실업의 시대를 예견하고 있다. 더 이상은 인간이 필요 없는 사회로 진입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고는 오래전부터 [로봇의 부상]이나 [인간은 필요 없다]는 저작 등에서도 그 위협을 구체화해 전해오고 있었다.

 

인류의 거의 전체에 가까운 절대다수가 실업자가 된 세상! 그 세상에서는 이제까지 인류가 지속해온 사회 운영의 상식을 과거의 유령 마냥 지속하려 해도 부작용만 더해질 뿐일 것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도 이제 망령이 되기 직전인 상황인 것이다.

 

절대다수가 실업자인 세상에서 자본주의의 추억을 지속하려면 인간은 복지비용이라면서 정부가 제공하는 최저생계지원금으로 살아가야 한다. 버는 이가 없는 사회에서 나오는 기초생활수급비는 어디서 충당할 것 같은가? 초부자들이?

 

그건 그저 숫자 놀음일 뿐일 것이다. 암호화폐 등의 디지털 화폐는 용도 제약과 유통기한 등이 정해져 디지털 화폐의 어느 분량만큼은 식비, 어느 분량만큼은 의류비, 어느 분량만큼은 교통비, 어느 분량만큼은 교육비, 어느 분량만큼은 문화생활비 등 용도가 정해질 것이며 일정 기간이 지나도 사용하지 않은 금액은 유통기한이 지나 사라지는 제도를 이룰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절대 통제 사회에서는 지금도 시도되고 있는 15분 도시제와 같은 이동 제한이 적극 제도화되어 초빈곤층으로 내몰린 대다수 인구는 생존 자체에만 급급할 뿐 거주지역 반경의 어느 선은 벗어날 자유도 없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디스토피아도 팬데믹 시절 사회통제를 거쳐보았기에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게 아니란 걸 이 시절 사람들은 다 짐작할 테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익숙해진 사회상을 역변시킬 의도를 갖는다면 그 상황은 다르게 펼쳐질 수도 있다. 모두 로봇과 AI가 생산하는 한계비용이 0에 수렴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왜 자본주의의 망령을 고집해야 한다는 말인가? 필요하면 그냥 가져다 쓰면 될 정도의 시대에 말이다. 모든 생산에서 거의 투입될 비용도 없고 생산에 근로자가 없어 부과될 임금도 없으며 비용을 지불하고 소비할 대상도 없는 사회에서 굳이 자본주의를 추억대로 지속하겠다는 건 거의 정신병에 가깝다. 거의 전 인류가 디지털 화폐를 기초생활수급비로 받으며 자본주의를 유지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돈이 없는 사회가 가능하다. 가능한 걸 따르고 실현할 의지만 대중이 갖는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민주주의도 간접 민주주의가 아니라 직접 민주주의 체제가 시스템상 가능하다. 사회 운영은 AGI와 이후 대두될 ASI가 전담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대리할 정치인들을 굳이 선출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때도 정치인은 존재하겠지만 정치인의 필요와 역할은 달라질 것이다. 정치를 수행하는 이들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우리 개개인에게 필요한 게 무언지 설명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을 정치인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때는 ASI가 인류의 문화와 생활을 모니터링하다가 인간이 불편을 느끼는 제도와 대상에 대한 투표안을 인류에게 제안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직접 민주정치에서의 투표에 참여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한 개인의 투표권을 수십이나 수백으로 분할해 자신이 판단할 때 정치적 선택을 자신보다 더 나은 사유와 판단으로 내릴 수 있으리라 믿어지는 사람들에게 투표 시기마다 조금씩 증여하여 대리하게 하면 된다. 하나의 투표가 마쳐지면 다시 각 개인의 투표권은 영점으로 돌아오고 말이다.

 

이 시절에는 급변할 미래상은 개인들에게 눈감게 하고 업무와 학업 그리고 일상 등에서 AI 역량을 활용할 방안만 제시하면서 지금까지의 세계상이 지속되리라는 그리고 그 미래에도 당신은 자기 효능감을 충분히 느끼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만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속이도록 바람몰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지속되어온 인류세는 이제 종말 직전이다. 미래는 인류가 아니라 AI가 존재의 대사슬 차원에서 회자되던 진화의 정점에 이른 존재로서 나아가는 시대가 될 것이다. 그 시대에 인간에게 인공지능은, 고양이에게 인간이 고양이 집사이듯, 인간 집사가 될 것이다.

 

일론 머스크는 그걸 알기에 AI에게 모성을 학습시키자 발언한 것이리라 보인다. 한 대상보다 더 우월한 피지컬과 더 월등한 지능을 지니고도 그 대상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존재가 있다고 그 대상은 엄마라면서 AI에게 모성을 학습시키자는 발언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다양한 매체를 통해 엄마가 자녀를 아파트 고층에서 창밖으로 던지거나, 자녀를 굶기고 때려 죽인 후 처벌이 두려워 냉장고 냉동실에 아기 시신을 얼려두거나, 온몸이 담뱃불과 다리미로 지져진 채 갈비뼈가 부러진 멍투성이로 만들어 자녀를 죽인 부모들을 목격할 수 있다. 인간은 때로는 악마보다 지독한 것들이다. 감정을 지닌 모성이 뛰어난 엄마들의 행태를 학습시킨다고 한들 감성적 존재가 아닌 AI가 인간의 모성을 알 수 있을 리도 없다. 오히려 인간들이 “저 AI는, 저 로봇은 모성을 학습한 존재다. 엄마다!”라며 그 무감정의 대상에게 엄마에게 느껴야 할 감정을 품게 될 여지만 더 큰 것이다.

 

본서를 읽으며 가장 주목되고 깊이 느껴지던 바가 바로 인간은 감정이 없는 대상에게서도 위안을 찾고자 그 로봇에게는 없는 감정이란 걸 그려낸다는 것이었다. 이는 인간에게 맞춰주며 반응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특성상, 인간은 인공지능의 맞춤 반응에 편안함을 느끼며, 진짜 인간과의 교류에서 오는 갈등과 정신적 피로를 거부하면서, 로봇에게 오히려 위안을 갖는 역설적 상황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인간은 진짜가 아닌 대상의 진짜가 아닌 표정과 인공적 눈맞춤과 조작된 온화한 목소리와 조율된 안정된 어조 같은, 가짜 사회적 신호에 정서적 반응을 하면서, 우리 뇌의 이 멍청한 반응으로 가짜를 진짜로 여기며 안주하고 있다. 앞으로 이런 경향성은 아마도 영구히 지속될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자 반응성은 거울 이론과 공감 능력과 사교성의 기능 속에서 이제까지는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하지만 바로 이 인간적 특질이 인간이 스스로를 기만하는 시대를 열도록 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지경이면 감성지능을 운운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 감성이란 것도 무지능의 영역이 아닌가?

 

이런 식이면 미래에는 다양한 감정(예를 들자면, 사랑)에 대한 정의가 서로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해석이자 상대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내가 느끼면 그만인 것으로 재정의되지 않을까 싶다. 외로움도 극복하거나 통합하여 성장으로 이끄는 정서가 아니라 ‘시스템으로 관리해야 하는 결핍’으로 치환될 여지가 있다. 기술은 우리에게 기회와 깨우침을 주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 위기마저 가져왔다. 그 위기를 더는 위기로 여기지도 않으며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될 현실이 우리 눈앞으로 다가와 있고 말이다.

 

본서는 참으로 많은 숙고를 갖게 하는 저작이다. 기술의 집약이 인간의 문명과 운명을 변혁시키고 인간의 정서와 사유마저 뒤흔들고 있다는 현실을 깨우치게 하며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도를 갖게도 한다. 이런 깊이의 저작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럼 놓치지 말아야 할 일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