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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노르 빠라도

나를 가봉하고 재단하여 짤라낸 자투리거나 실밥이었다
가브리엘 마르께스, 루신, 가와바다 야스나리, 입센,
테드 휴즈도 세이머스 히니도, 토마스 하디도 귄터 그라스도
서머셋 모음도 내 청춘을 만들고 난 실밥이었다
숙, 영, 민 그 이름도 내 젊은 날을 만들고 난 실밥이었다
뒷문 가에 봄비처럼 서성이며 울다 간
이름이었다 실밥이었다
흐린 날 걷던 소나무 숲도 내 가슴 안쪽에 은하수로 흘러간
그리움도 실밥이거나 자투리였다

아버지 어머니도 나의 실밥이었다
먼 훗날 나마저 우주를 가봉하고 재단하며 버린
실밥이란 걸 깨닫기 전까지
나를 스쳐가는 모든 것을 나는 실밥이라 명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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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이 한번 피고 

지는 사이

눈꽃을 한번 바라보다

눈길을 가만히 거두는 

사이

옷에 물이 들었다

저녁이 작은 숨소리를 내고 

지나가고

눈꽃

흰 가시가 

저녁빛을 조금씩 찢어 

세상 모든 모서리가 서서히 

허물어지려 했다 

눈꽃은 반짝이며 잠잠히 

상처를 나에게 내밀어 

보여주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았는데도 

저녁이 왔다 

슬프지도 않게 조금씩 

조금씩 

저녁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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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1-23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군요. 반복해 읽어야겠어요, ^^

이하라 2021-01-23 14:39   좋아요 1 | URL
목격을 고백하는 듯한데 표현이 너무 아름답더군요. 저도 몇 번이나 다시 읽었습니다.^^
 

공중空中이란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공중이라는 

말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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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선화를 들고 찾아가야 했을까. 

사흘 후에 세상 떠난 사람 손을 잡고 돌아온 날 밤 나의 잠은 길고 멀기만 했다. 갈색으로 타들어간 그의 손은 체온이 낮았다.

 

한 사람이 떠나고 난 후에도 나는 살아간다. 

 

이윽고 사막에서 충격과 공포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바그다드의 밤하늘은 불꽃놀이가 아름답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아이들이 울부짖는다. 식탁에 둘러앉은 미국의 지도자들은 인육을 빵처럼 삼키고 웃는다. 

 

나는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음식을 삼키려고 자꾸만 침을 삼킨다. 오래된 병이다. 식도염일까. 병원에 가야한다. 

 

외출에서 돌아와 스테인리스 개수대에 빠져 있는 양파를 건져 올린다. 물컵에 넣는다. 

 

암세포가 번져 갈색으로 타들어간 사람의 손이 보인다. 내 집은 오늘도 어둡다. 어느새 무성해진 양파줄기들. 햇빛을 못 본 양파는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 채 기력이 다했다.

 

미군 병사가 머리에 총구멍이 난 채 쓰러져 있다. 포로가 된 이라크 병사들은 올가미에 묶인 두 손을 벌벌 떨고 있다. 아이를 밴 여인이 폭탄을 품에 안고 미군 병사에게 다가가고 있다. 두 팔을 잃어버린 이라크 인형이 눈물을 흘린다. 바그다드를 저주하는 신의 목소리는 금속 파편이 되어 지상으로 낙하한다. 

 

불면증 속에서 나의 도시들은 차례로 함락되어 간다. 뜨거운 모래 폭풍에 내 팔과 다리는 잘려나간다. 심장은 증발해 버린다. 

 

물 한 줌에 제 생명을 남김없이 피워 올린 양파는 이제 뿌리부터 썩어 들어갈 차례다. 푸른곰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는데 가슴 언저리가 막혀버리는 이 병은 어디서 온 걸까. 광둥일까. 상하이일까. 워싱턴일까. 

 

커튼을 친 나의 벙커는 어둡다. 야전 침대에 피로한 몸을 눕히고 오늘의 전황을 수신한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사람. 암세포가 묻어나는 가쁜 숨결을 목구멍에 쏘이고도 나는 그대로 살아 있다. 

 

나쁜 꿈일 뿐이겠지.

이 바람은. 이 전염병은. 이 잔인한 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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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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