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부르는 지구 언어 - 소소하지만 위대한 50가지 인생의 순간
메건 헤이즈 지음, 엘레나 브릭센코바 그림, 최다인 옮김 / 애플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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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무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깊이 들 때가 많았다. 그래서 더더욱 행복심리학을 연구하고 있다는 저자가 쓴 본서에 관심이 갔다. 행복에 대한 전문가가 전하는 행복의 구성요소들은 무엇인지 들어보고 싶었다. 게다가 세계 각국 언어로 행복과 관련한 개념들을 전해 들으며 세계인들이 행복해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어떤 때 행복하고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지 배워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읽은 본서에서는 [1. 집과 환경 2. 공동체와 인간관계 3. 성품과 영혼 4. 기쁨과 영적 깨달음 5. 균형과 평온] 이렇게 다섯개의 분류로 행복의 요소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다섯 분류라지만 너무도 광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결국 관계, 사랑, 소속감, 여유와 세계관으로 감상의 폭이 좁혀졌다.  


사람과의 관계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세계와 자연과의 관계에서 안정감을 찾으며 세상와 자연, 사람 속에서 균형을 갖으며 평온을 찾는 내적 여유가 사람에게 행복을 느끼게 하는 거라는 감상이 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끝내 세계관의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예코타 (명사 스웨덴어) 1. 새벽에 자연으로 나가 첫 새소리를 듣는 것

일찍 일어난 새의 노랫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즐기는 '새벽 소풍"을 뜻하지만, 자연을 즐기는 마음을 포괄적으로 나타낸다.


스웬덴 사람들이 아침을 예코타로 시작한다면 황혼은 몽가타로 보낸다. 물 위에 길처럼 펼쳐지는 달그림자를 바라보는 시간이다. 몽가타는 왔다가 사라지는 자연의 신비가 자아내는 명상적 분위기와 동시에 스웨덴 사람들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자연에서 즐거움을 끌어내는 방식을 보여준다.


영어에는 애정을 담아 자연을 묘사하는 특이한 단어가 몇 가지 있다. 사이서리즘psithurism은 나무 사이로 속삭이는 바람 소리, 페트리커petrichor는 오랫동안 덥고 메마른 날씨가 계속되던 끝에 비가 내릴 때의 향긋한 흙냄새를 가리키는 명사이다. 네덜란드에는 바람 속을 상쾌하게 산책한다는 뜻의 동사 아위트바인이 있다. 캐나다에서는 이른 봄의 따스한 낮과 신선한 밤, 즉 단풍나무가 달콤한 수액을 만들어내기 딱 좋은 날씨를 가리킬 때 슈가웨더sugar-weather라는 매력적인 표현을 쓴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는 나뭇잎 사이로 아롱지는 햇빛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코모레비가 있다. 마지막으로 기막힌 경치와 청명한 날씨를 온몸으로 느끼는 황홀한 기분을 담은 아일랜드어 이브네스를 보면 우리 인간에게 최고의 연인은 바로 대자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연을 돌아보는 데서 부터 본서가 시작되는 것은 숨 쉴 여유를 다시 찾으라는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들 다수가 삶을 무채색으로 무향무취하게 만드는 갑갑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다. 그런 사람들에겐 자연을 돌아보는 것도 잠시의 여유를 찾아 만끽하는 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더욱이 코로나의 이 순간에 자연을 돌아보는 여유는 중요하지 않을까?


프라스토르 (명사 러시아어) 1. 탁 트인 곳, 드넓은 공간, 광활함 2. 자유

드넓은 평야를 향한 갈망을 담은 프라스토르는 인간이 외적 풍경을 내적 풍경과 연결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프라스토르와 밀접하게 관련된 단어로 영혼 또는 기백을 가리키는 러시아어 두샤가 있다. 끝이 없는 인간의 영혼, 즉 두샤는 프라스토르에서 자신의 외적 반영을 발견하며 내부와 외부가 조화를 이루는 순간 깊은 감동이 찾아온다. 

신기하게도 두샤의 내적 광활함 덕분에 인간은 작은 공간에서도, 이를테면 훌륭한 책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프라스토르를 맛볼 수 있다. 좁다랗고 사방이 막힌 방에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는 내면의 지평선을 넓히고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준다.


그리고 프라스토르라는 러시아어는 광활한 자연과 내적 자유를 연계해 마음의 자유를 찾고자 하는 노력과 기대, 발견이 담겨 있는 장이 아닌가 한다. 현실이 갑갑하고 답답한 순간에는 자연과 함께하던지 내적 자유를 찾아낼 수 있는 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리라 여겨졌다.


발타인잠카이트 (명사 독일어) 1 숲의 고독(숲에 홀로 있는 느낌)

발타인잠카이트는 울창한 숲의 고요한 그늘에 홀로 있다는 뜻이지만, 주로 낙관적인 삶의 고독을 가리킨다. 자연 속에서 느낄 수 있는 평온하고 정갈한 마음이다.


울창한 숲의 그늘에 홀로 있다는 뜻이라는 발타인잠카이트는 실존적 고독을 뜻하는 말로 여겨진다. 하지만 독일 사람들은 이 말에서 비관이나 냉소보다는 낙관적인 삶의 고독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홀로라는 것이 결코 암울하고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은 본래 홀로라는 깨우침을 안겨주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투랑아와이와이 (명사 마오리어)

1. 발 디딜 권리가 있는 장소

2. 혈연관계와 혈통에 따라 거주와 소유의 권리가 있는 장소


투랑아와이와이는 사람의 토대, 다시 말해 지리적이든 문화적이든 개인이 가장 소속감을 느끼고 자신이 뿌리내렸다고 느끼는 장소를 말한다. 투랑아와이와이는 자신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느끼는 곳, 강력한 행복의 원천을 가리킨다.

... 바깥 풍경과 내면의 풍경이 긴밀히 연결되는 방식을 명확히 보여준다.

자신이 속한 땅은 삶을 정면으로 마주할 힘을 부여한다. 

스페인어 커렌시아 또한 고향에 있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힘과 의지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터전에서 힘과 의지를 느낄 수 있다는 깨우침을 주는 말이 마오리어 투랑아와이와이와 스페인어 커렌시아다. 자신의 터전을 찾아 방랑하던 유대민족의 기록과 고향을 그리워 하는 옛노래들이 인간에게 자신의 터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고 있지 않나 싶다. 


휘넌 (동사 네덜란드어)

1. 남이 무언가를 갖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다

2. 다른 사람의 성공에서 만족감을 느끼다


... 휘넌은 받는 사람을 온종일 기분 좋게 만드는 친절을 가리킨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친절을 경험한 사람은 남에게도 친절을 베풀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한다.


페어슈테엔 (명사 독일어)

1. 이해 

2. 타인의 행동에 대한 깊은 공감, 또는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봄


페어슈테엔은 주어진 주제에 관해 타인이 왜 그런 의견을 품게 되었는지 더 깊이 생각해보는 개념(공감과도 꽤 비슷하다) 이다. 사람들은 사이좋게 지낼 때 가장 행복하고, 그러려면 진정으로 더 깊이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멜마스티아 (명사 파슈토어)

1.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고, 인종과 종교, 경제적 지위도 따지지 않고 모든 손님에게 보이는 호의와 깊은 경의 


이런 삶의 방식은 파슈툰왈리라고 불리며, 파슈툰족은 오늘날에도 가장 좋은 삶의 방식을 일러주는 이 관습을 따른다. 여기에는 정의, 자존감, 관용 같은 덕목뿐 아니라 복수(파슈툰왈리의 어두운 면에도 속한다)도 포함된다. 이 규범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특징은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차별하지 않고 넉넉한 환대를 베푸는 관습인 멜마스티아이다.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할 뿐 아니라 보호가 필요한 사람, 예를 들어 적을 피해 도망친 사람을 보호하는 이 관습은 파슈툰족에게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다.


칸이닌파 (동사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어(핀투핀족) 1. 안다 잡아주다


핀투핀족의 가치관이 깊이 뿌리내린 칸이닌파는 여러 맥락에서 다양하게 쓰인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의미는 '안는' 사람과 '안기는'사람 사이의 존중과 친밀함이라는 섬세한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실제로 칸이닌파는 전 세계 거의 모든 공동체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두 극단, 즉 개인의 독림과 집단의 소속감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의 균형을 가리킨다.


그리고 공감과 이해, 배려를 의미하는 언어들은 인간이 관계에서 얻는 위안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친절을 경험한 사람이 친절을 베풀 가능성이 크다는 심리학자들의 말은 다분히 상식적이면서도 의미하는 바가 큰 말이 아닌가 싶다. 친절만 경험했다거나 상처만 경험했다거나 하는 경우는 많지 않겠지만... 상처가 거듭된 사람에게서 호의를 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호의가 거듭되면 권리인줄 안다는 말이 있는 반면에 복수가 복수를 부른다는 말도 동시에 있다. 적절한 호의와 배려는 인간 사회에서 절실한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파삼 (명사 타밀어) 1. 애정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깊은 관계이다. 깊은 애정으로 묶인 관계를 뜻하는 타밀어 파삼은 산스크리트어로 '밧줄'을 뜻하는 파삼에서 유래되었다.

시바파(주로 이도 서부에서 널리 믿는 힌두교 종파)는 모든 영혼이 파삼으로 묶여있고, 모든 영혼과 그들을 묶는 강력한 힘인 파삼은 삼위일체를 이루는 위대한 존재 파티가 관장한다고 가르친다.


'밧줄로 꽁꽁 밧줄로 꽁꽁 단단히 묶어라 내사랑이 떠날 수 없게'라는 노래 가사가 떠오르던데 진짜 사랑을 뜻하는 타밀어는 밧줄이 기원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깊은 관계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 때문에 죽기도 하지만 사랑 때문에 살아나는 경우도 있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닐거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시바파에서는 모든 인류의 영혼이 파삼 즉 사랑으로 묶여 있다고 전승하고 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밀어내거나 시기하지 않고 사랑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는 의미 깊은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진정한 인류애를 강조하는 이야기이자 가르침이 아닐까?


이키가이 (명사 일본어) 1. 존재의 이유, 살아가는 목표와 보람

... '아침에 눈을 뜰 이유'라는 뜻의 일본어...

이것은 '삶' 또는 '살아 있음'을 뜻하는 이키와 '바라던 일의 실현'이라는 뜻을 가진 가이의 합성어이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만의 이키가이를 찾아내려면 영혼을 탐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프랑스어 레종 데트르(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와 비슷한 점이 많은 이키가이는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이상적인 목표, 다시 말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싶어지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를 강조한다.


존재의 이유, 살아가는 목표와 보람을 뜻하는 일본어와 프랑스어가 있다. 우리말로 하면 삶의의미 정도 일까? 삶의 의미를 찾았고 그걸 느끼며 살아가는 이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만족감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도 가장 커다란 행복의 요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삶이 의미를 잃고 역경 속에 허덕일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할까?


시수 (명사 핀란드어) 1. 의지력, 용기, 뚝심

시수에는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일지라도 용기를 가지고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정신이 담겨 있다.

... 그러므로 시수는 위기의 순간에 종종 발휘되는 의지력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지력은 외부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끌어올리는 것이다. 


우리말에서 비슷한 말을 찾자면 근성이 아닌가 싶다. 깡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보다는 근성이 의미가 더 비슷하지 않은가 싶다.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도 근성... 핀란드어로 시수를 통해 돌파해내야 하는 경우들이 있다. 살다보면 시수가 필요한 순간들이 닥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 근성으로 돌파하려다가 결국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결과만큼이나 역경에 대처하던 태도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 (명사 영어) 1. 다행스럽거나 기분 좋은 뜻밖의 우연 


...이렇게 운 좋은 손간은 신비로울 정도로 좋은 우연의 일치를 가리키는 세렌데페테에 속한다. 여기에는 어떤 일은 운명으로 정해져 있으며 어쩌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줬는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자기 운명은 자기 손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서양문화권에서 세렌디피티는 꼭 나쁜 일이 아니더라도 모든 상황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자신의 성공에든 실패에든 우리는 겸허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영어 단어가 세렌디피티이다. 기분좋은 뜻밖의 우연을 뜻한다는 이 말은 우연의 연속이 어쩌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줬는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고 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상황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깊은 통찰이 담겨 있는 말이 아닌가 싶다.


아요르나맛 (숙어 이누이트어(이눅티툿))

1. 어쩔 수 없거나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일을 차분하게 받아들임


아주 작은 사고부터 극단적인 비극에 이르기까지 아요르나맛은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쓸데없이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아요르나맛은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원주민 문화에서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무쌍함을 존중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리킨다. 


때로 우리는 결과를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기도문도 있지만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용기일 것이다.


케이프 (명사 터키어) 1. 여유롭고 평안하며 기분이 좋은 상태


...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여유를 즐기는 시간...

이스탄불에서 케이프는 대체로 조용하고 기쁨에 찬 휴식의 미학, 완전히 몰두한 평화로운 만족감을 가리킨다.

터키식 케이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든 활동을 멈추고 과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이 바로 지금 이곳을 즐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선사들이 그렇게나 강조하던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에 머물라'는 말을 삶에 대한 태도로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이 터키사람들이었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이다. 적극적으로 삶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프랑스인들의 '주아 드 비브르'라는 말도 인상 깊었지만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아니라 먼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저당 잡힌듯 살아간다면 삶의 즐거움이라는 의미도 퇴색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결국에는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가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토대가 아닌가 한다. 그런 의미에서 터키사람들은 진정으로 행복할 내적 토양을 갖춘 이들이 아닐까 싶고 닮고 싶은 부분이다. 


이 외에도 깊은 감상을 주는 대목들이 많았지만 익숙한 종교적 말씀이나 일상에서 늘 느끼는 말들을 제외했더니 이와 같은 감상이 남았다. 이 책에서는 50가지 행복언어를 단원으로 잡고 있지만 실제로는 80여가지에서 100가지에 이를 어휘들이 등장하는 것 같다. 책의 분량은 작지만 단숨에 읽기 보다 차분히 음미해가면서 느린 독서를 추천한다. 그리고 독서를 마치고 숙성의 기간을 거치면 내면에 행복한 삶 아니 그보다 더나아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하나의 맥락이 그려지는 듯한 분들도 많을 거라 생각된다. 내게 그랬듯이 말이다.


행복을 부르는 지구 언어 일부 발췌 → http://blog.yes24.com/document/14245159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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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기억한다 -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
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 제효영 옮김, 김현수 감수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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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트라우마 저작들을 읽고난 후 본서를 접했다. 정서를 울리는 실제 치유 사례들도 있고 트라우마의 작동과 기능을 뇌생리학적으로 상세히 풀어내어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저작들과의 차별성이라면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방법들이 명쾌히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The body keeps the score]라는 영어 제목을 의역해 [몸은 기억한다]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몸이 트라우마에 어떤 기능을 잃게 되고 어떤 기능이 악화되는지 등을 그리고 있기도 하고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우리의 뇌가 쉬고 있을 때 우리 자신의 몸을 감각하고 있는데 트라우마 상태일 때는 해리되어 우리 자신의 몸을 자각하고 있지 못함도 지적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트라우마의 많은 문제점들도 알아가야 할 바이겠지만 무엇보다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EMDR), 뉴로피드백 치료, 내적가족치료, 공동체가 함께하는 연극치료와 음악치료, 맛사지, 요가, 태극권, 무에타이, 무술, 춤 등의 치료가 얼마나 극적인 효과를 불러오는지가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트라우마도 치유의 길이 있는 거라는 것이 그것도 우리 자신의 몸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미있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진정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대목은 인상 깊으면서도 안타깝기도 했다. 의미있는 관계, 사람을 통한 치유라는 것이 바란다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그저 사람을 만난다고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안타까웠다.  

 

하지만 트라우마의 치유를 바란다면 또 가족이나 지인의 트라우마를 이해하기 위한 목적에서도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밑줄긋기 ☞ 

몸은 기억한다 / 베셀 반 데어 콜크 (2)

몸은 기억한다 / 베셀 반 데어 콜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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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8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8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죽으려고 했던 심리학자입니다 - 죽고 싶다는 생각은 어떻게 인간을 유혹하는가
제시 베링 지음, 공경희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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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살려고요. 살겠습니다" 2009년 초가을 나는 자살을 시도하던 무인모텔에서 도망쳐나와 잡아탄 택시 안에서 나를 만류하는 핸드폰 너머의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살겠습니다"를 외쳤지만... 자살을 시도하던 장소에서 도망쳐 나왔지만 나는 과연 진정으로 삶을 선택했던 것일까? 또 하나의 선택을 망쳐버리며 길고 지루한 우울의 늪과 같은 삶으로 다시 나를 던져넣은 것은 과연 살고 싶다는 의지의 발로였을까? 


그녀와 그 그리고 나는 수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자살 모의를 하느라 챗팅은 몇 주간 해왔지만 실물을 대면하는 건 서로가 처음이었다. 어쨋건 그렇게 수원역에서 만나 우리는 바로 계획대로 택시를 타고 무인 모텔로 향했다. 무인 모텔에서 시스템을 통해 방 두개를 대실하려했지만 무슨 일인지 카운터로 오라고 해서 카운터에서 사람을 통해 방 두개를 잡았다. 나는 무인모텔도 모텔도 당시에 처음 가보는 곳이었고 무인모텔이라기에 당연히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 카운터에서 접수를 하니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그렇게 그들과 나의 계획은 초반부터 빗나가는 느낌이었다. 모텔 방으로 들어서자 예상 보다 규모가 있었고 설비도 깔끔했다. 여자분이 자기 방에서 남자방 쪽으로 넘어왔고 그렇게 그들과 나는 발빠르게 문틈과 창틈 마다 꼼꼼하게 청테이프를 붙였다. 그리고 나서야 다들 앉아서 서로 자살을 선택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했다. 남자분은 사는 게 너무 어렵다고 살기가 힘들어서 자살을 선택했다고 이야기 했고 여자분은 자살한 남자 친구 이야기를 하며 그 이후 사는 것이 괴로워졌다고 했다. 하지만 남자분의 말은 그렇다해도 여자분의 말은 믿기가 어려웠다. 메신저로 채팅을 하며 이야기했던 그녀의 자살을 선택한 이유와 내용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연 중 둘 중 하나는 진실이거나 둘 다 진실이 아니거나 했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왜 이야기가 다르냐고 따져묻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도 사람은 타인과 자신을 기만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살아있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어졌고 사는 게 너무 가치없다고 여겨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남자분이 가지고 온 연탄난로(난로라고는 했지만 난로같이 부피가 크지 않고 연탄불을 지필 수 있게 만든 기구 같이 생겼다)에 연탄을 하나 넣고 욕실에서 번개탄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연탄난로와 연탄과 번개탄은 그 남자분이 구하기로 했다. 그분은 다 완벽히 준비하기는 했지만 연탄집게를 구하지 못해 고기집 집게를 가져왔다. 집게... 거기서 부터 일이 틀어진 거다. 집게로 번개탄을 집고 불을 붙이자 처음 불이 잘 붙지 않나 싶더니 뒤이어 불꽃이 일어 나며 불길이 치솟는데 번개탄이란게 그렇게 화력이 좋은지 몰랐다. 남자분이 집게에 잡힌 번개탄을 떨어뜨렸다. 욕실 바닥에서 불이 붙은 번개탄은 불길이 치솟으며 이미 집게의 높이를 불길이 넘어섰고 바라보고 있던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 물을 조금 뿌려 화력을 낮춰보기로 했다. 집게가 너무 달아오르면 연탄난로에 번개탄을 넣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물을 뿌린 번개탄의 불길은 잡히긴 했지만 번개탄이 완벽하게 불이 붙지는 못했다. 어쨋건 우리는 그걸 연탄난로에 넣고 연탄을 얹었다. 뭔가 일이 틀어지는 건가 싶기도 했고 함께 모여 만반의 준비는 다한 것 같은 애매한 심정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사전에 각자 약국을 돌며 사둔 수면유도제를 소주와 함께 여러알을 먹고 자리에 누웠다. 난 술은 먹기 싫었지만 술기운과 약기운이 섞이면 잠든 채 연탄가스로 고통없이 가게 된다는 말에 술과 함께 약을 먹었다. 약을 한웅큼을 먹었는데도 잠이 쉽게 들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다음날 아침이 되어 눈을 떴다. 여전히 살아있었고 제대로 불이 붙지 않은 번개탄과 연탄은 매캐한 냄새는 나기는 했지만 심각할 정도의 일산화탄소는 내뿜지 않았던 것 같다. 머리가 몹시 아프고 어지러웠지만 아무도 죽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일어난 내가 창틈에 붙인 청테이프를 대강 떼고는 창문을 열었다. 죽고는 싶었지만 일산화탄소로 뇌에 장애를 입고 장애자로 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도 일어났다. 우리는 밤이 오면 다시한번 시도하자며 각오를 다지고는 여자분이 자기 방으로 갔다. 그리고 남자분이 욕실로가 샤워를 하는 틈에 나는 도망나왔다. 내가 나가면 그들도 단둘이만 동반자살을 하지는 않을 것이란 걸 알았지만 나로선 애써 실행한 자살시도가 망쳐져버리고 죽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데 분개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거다.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국가에 속하는 대한민국에서 (2015년 인구 10만 명 중 24.1명) 동반자살은 전체 자살의 3분의 1 가량을 차지 한다.


위의 저자의 말보다도 2009년 당시에는 동반자살률이 더 높았을 것이다. 그해까지 영화배우 고 이은주, 가수 고 유니, 배우 고 최진실 등이 연이어 자살하며 대한민국 자살률이 최고로 치솟고 있었던 때니까. 당시까지만 해도 뉴스검색을 하기만 하면 자살기사가 이어지던 때였고 자살자들 대다수가 동반자살을 하던 때다. 


-자살 전염 증거에 '완수된' 자살만이 아니라 '시도된' 자살 비율을 포함하여 본다면, 언론의 자살 보도가 모방을 유도하는 것은 분명하다. 달리 말해 자살 보도가 늘 실제 자살을 증가시키지는 않지만, 자살 행위를 크게 증가시킨다. 


그리고 자살자들 보다도 더 많은 것은 자살시도자들이었을 것이다. 나만 해도 수원에 가기 전 이미 고 유니의 자살기사를 보고는 그녀처럼 옷장에서 목을 매는 시도를 해보기도 했으나 옷장에 앉아서 목을 맨다는 것은 기사내용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는 혼자서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당시 뉴스기사들을 보고는 동반자살을 기대하게 됐다. 당시 네이버에 죽고 싶다는 글을 지식인에 올리자 어느 여성이 메신저로 들어오라고 했고 거기서 자살을 왜 하고 싶은지 꼭 죽고 싶은지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다음메신저로 들어오라고 해서 다른 자살을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도록 해줬다. 며칠을 그들과 대화를 하다가 문득 처음 그들을 소개해준 그녀에게 "○○님은 왜 자살하지 않고 소개만 해주는 거냐?"고 묻자 그녀는 자신도 자살시도를 해봤지만 실패했고 아버지가 엄해서 그 이후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항변했다. 자살을 할 수 없어서 그녀는 자살 플랫폼 같은 역할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원에서 자살시도를 실패하고 도망쳐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다음 메신저에 들어갔으나 내가 망친 동반자살 모임의 사람들이 이미 그들에게 말을 했던지 모두 메신저상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즈음부터 네이버에서 자살을 하고 싶다던가 동반자살을 하자는 내용은 올릴 수 없도록 네이버 지식인 등록 검증이 강화되었다. 당시가 동반자살 사례와 동반자살 시도가 가장 엄청났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본서에 의하면 일본에서도 넷-지사츠라고 해서 동반자살이 심각하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은 연탄가스로 인한 자살이 대다수인데 대만 같은 경우는 숯불을 지펴 일산화탄소로 자살하는 경우가 유행했단다. 언제 즈음엔가엔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는 특정 화학성분을 이용한 흡입 자살도 붐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왜 자살하는 걸까? 저자는 VEN세포라는 뇌세포의 영향을 이야기 하고 있기도 하지만 명확히 그에 대해 답하지는 않고 있다. 왜 자살하느냐 보다는 어떻게 자살하고자 하는 심리에 까지 이르느냐를 몇 단계의 과정으로 풀어주고 있기는 하다. <1단계 역부족, 2단계 자신을 탓하기, 3단계 고도의 자기의식, 4단계 부정 정서, 5단계 인지의 붕괴, 6단계 탈억제>의 과정을 거쳐 자살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일견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자신부터가 자살욕구를 느꼈던 심리학자인 그이기에 공감할만하다고 여겨지는 이론을 제시한 것일 거다. 하지만 자살을 왜 할까 하는 의문은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이지 자살 충동에 휩싸인 사람에게는 별로 소용없는 이론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이나 지인이 자살한 사람에게는 그들의 행동이 왜 일어난 것일까하는 의문에 답은 줄 수 있어도 왜 죽어야만 했는지 다른 방법은 없었는지에 대한 대답도 될 수 없는 이론이다. 


자살을 시도 할 때는 모든 것이 의미를 잃는다. 극도의 고통 속으로 몰리기도 하지만 정작 자살을 결심하고 시도할 때는 오히려 고요해진다. 고요라기보다는 적막해진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자살을 시도하기 전까지 대부분 저자가 말하는 '삶이 천천히 한 방울씩 떨어지는' 지루한 시간의 지연 상태 속에 지내게 된다. 지루하다고는 말했지만 그건 달리 알맞은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루가 천년 같이 느껴지는 이런 현상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님도 언급한 적이 있다. 홀로코스트의 현장인 나치의 수용소에서의 일상을 말하며 언급한 부분이다. 죽음을 앞둔 상황 아니 그 죽음과 함께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하루가 천년 같은 현실을 겪는 것이다. 자살 시도를 앞둔 사람들은 삶이 죽음 같고 죽어야 살 것 같은 심정에 놓인다.


그러다보니 자살을 시도하며 다시 삶이 이어지는 것 같은 죽음이라는 새로운 삶의 선택에 반가운듯한 심정이 된다. 물론 이것은 사후에 대한 개인 마다의 관념의 차이에 따라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로선 죽음 이후의 지속을 믿기에 죽음이 이후 영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사후에 영면이라던가 의식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삶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을 선택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기독교 등의 종교에서는 자살을 악으로 치부한다.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는데 중세에 들어 심각해진 것이다. 


-성서에 자살에 대한 뚜렷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몇몇 명석한 신학자들은 이 독특한 빈자리를 발견했다. 예를 들어 1637년 스코틀랜드 출신 존 심이라는 열렬한 칼뱅파 사제는, "인간은 본래 자기 보존을 최우선으로 삼기에 자살은 너무도 끔찍한 일인지라, 그 행위 자체를 불가능하다고 봤는지 금지하는 법조차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드물게 성서 속 인물이 목숨을 끊는 경우 그런 짓을 했다고 심판받은 흔적은 없다. 예를 들면 유다(수치심과 예수를 배반한 후회로), 사울 왕(적에게 잡혀 강제로 다른 신을 섬기는 꼴을 피하려고), 삼손(그 과정에서 복수하느라 피리스티아 인들을 죽인) 등인데, 오히려 그들의 자살은 담담하게 묘사되고 죽는 방법은 일화의 교훈과 무관한 듯하다.


-5세기 초 아우구스티누스.. 그는 성서에 나온 제 6계명, 즉 '살인하지 말라'를 지목해 살인 대상에 타인만이 아니라 본인도 적용된다고 말했다. 1485년 자살 담론이 가열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 대전]에서 이 문제를 논했고, 이 책이 출판되면서 교회의 엄격한 자살 무관용 주의가 신앙의 상징이 되었다.


-영국에서 자살자의 재산은 왕에게 귀속되었다. 하지만 아퀴나스 시대에도 검시관이 non compos mentis(정신 이상) 상태라는 지옥 탈출 진단서를 주면 이 수모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1487년에서 1660년까지 자살자들은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이 기간에 총 1.6퍼센트만 '논 콤포스 멘티스' 판결을 받았고 나머지는 '펠로 데 세'(자살)였다.


-할라카(유대교 율법서)는 자살한 유대인은 유대식으로 매장할 자격이 없다고 규정한다.


-유대교와 기독교 경전들처럼 코란에 자살과 관련된 명료한 설명은 없지만, "불 켜진 초는 날이 밝을 때까지 타야 한다" 같은 시적인 암시가 나온다.



자살자는 지옥에 간다는 게 카톨릭에서는 상식적인 답변이다. 사울 왕이나 삼손도 지옥에 갔을 거냐고 묻고도 싶지만 그들에게도 예외는 있다고 하지 않나 미쳐서 죽었다면 지옥에 대한 면벌부가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정상적인 상태라고 한다면 죽음을 선택하는 비정상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은 모두가 미친 것 아니겠냐고 그러니 지옥에 갈 사람은 없는 거 아니겠냐고 한다면 카톨릭 사제들은 뭐라고 할지 모르겠다. 이젠 중세처럼 자살자들의 재산을 모두 왕에게 귀속하는 것도 아닐텐데 더 이상 자살자들을 악마화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싶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모든 대상이 자신을 과소평가하거나 비난한다고 믿는데서 시작해 자신의 고통만에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 자살 과정을 다룬 6단계 중 4단계까지의 이야기다. 과연 사람은 타인 보다 자신에게 더 주목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은 건 미 질병통제 예방센터의 2014년 발표를 보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미 질병통제 예방센터는 2014년 총기에 의한 자살은 총 2만 1,334건, 살인사건은 1만 945건이라고 발표했다. 


타인의 시선과 판단이 인간에게 왜 그리 중요할까도 싶지만 인간은 그럼에도 분노 보다도 절망에 더 민감한 존재가 아닌가 싶다. 타인을 해치는 사람의 두 배가 자신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예민한 인류에게 종교는 나름 살아가라고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에는 희망도 반, 절망도 반이 따른다. 종교가 있어서 자살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종교가 있어서 자살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종교와 자살의 관계는 복잡하다. 사후에 대한 믿음이 자살 결정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와 아니라는 증거가 다 있다. 통계는 종교가 자살 방지 완충제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연이은 연구에서 신자들은 비신자들보다 자살할 확률이나 자살할 생각이 현저히 낮았다.


-전반적으로 종교는 자살을 방지한다. 부인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구멍이 있다. 그것도 큼직한 구멍이. 몇몇 연구 결과를 보면, 신자들은 종교적 부담, 예를 들면 너무 큰 죄를 지어 용서받을 수 없다고 믿는 것 때문에 또래 비신자들보다 더 많이 자살한다.


종교적이 된다고 자살의 충동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자살은 과연 부정하고 기피해야만 하는 대상인가까지 본서는 담론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저자가 전면에 내세워 이야기 하고 있지는 않지만 로마시대의 남프랑스 지역의 노인인구에 대한 방대한 자살 용인과 장려의 사례나 그리스 스토아 학파의 자살에 대한 관점을 마무리에 가까워 풀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스토아 학파는 자살을 진보된 사상가의 빼어난 행위로 보았다. 세네카는 [줄에서 떨어질 적절한 때에 관하여]라는 담담한 제목의 글에서 "현자는 살 수 있는 만큼이 아니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만큼 산다"라고 썼다.


-1500년 이상 지나 프라니우스는 자살이 '최상의 혜택'이며 신들도 해내지 못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대조적으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 주제에 반감을 가졌던 듯, 자살이 인간을 동물 밑에 놓는 유일한 행위라고 말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기원전 20년 경 로마의 역사가, 도덕주의자)의 [기념할 만한 업적과 기록]에 나오는 구절... 마실리아인들(현 남프랑스 지역의 1세기 당시 주민들)이 완벽한 정신으로 생을 마감는 관습을 묘사... 아직 건강이 양호한 연로자들은 원로원에 생을 마감할 수 있는 허가를 요청해 황폐한 노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주로 독미나리가 혼합된 독극물이 주어졌다. 이 경우가 아니면 유의해서 보관하는 약물이었다.


-수많은 연구가 사회의 자살 수용과 자살률의 상관 관계를 파헤쳤다. 즉 신앙을 감안하더라도 자살을 개인의 권리나 선택으로 지지하는 국가에서 자살을 용납하지 않는 국가들보다 연간 자살 건수가 더 많다.


-수십 년 전 선동적인 반 정신의학자 토머스 사즈는 저서 [정신병의 신화]에서 자살 방지에, 혹은 자살하려는 이들을 강제 입원시켜 간섭하는 미국 전통에 반대하는 주장을 했다. 자살이 나쁘고 충동적인 결정이라 해도 "근본적으로 옳다"고 사즈는 말했다. 또 상담하고 오류를 깨닫게 도울 뿐, 우리의 의지를 자살하려는 이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즈는 1986년 [미국 심리학자]에 게재한 글에 이렇게 썼다. "'자살 방지'라는 표현 자체가 치료 만능 시대의 착오적인 표어다(...) 방지라는 표현은 특히 자살과 짝지어지면 강압을 의미한다."


-도덕론자라면 자살을 본래 잘못으로 인식해 무슨 수를 쓰든 막아야 한다고 느낀다. 자유론자는 정반대다. 사람은 살아야 할 사회적 의무가 없으며, 자유의사를 가진 인간으로서 선택지를 가늠해서 죽기로 결정한 사람을 강제로 살게 해선 안 된다고 본다.


자살은 포기일 수도 있지만 다른 선택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존엄사를 인정하는 국가들이 늘고 있는 것일테고... 자살을 방지해선 안된다 개인의 선택을 강압으로 막아서는 안된다는 논리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자살자가 묵었던 호텔비용은 삭감해야 한다고 까지하는 전염성 질병으로까지 자살을 몰고가는 심리도 변화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본서는 자살심리에 대해 자살전반에 대해 담론하고 있지만 학술서라고 보기보다는 에세이라고 여겨지는 책이다. 무겁기 보다는 자살 전반에 대한 생리학, 심리학, 사회학, 철학적 담론을 경쾌한 논조로 오가고 있다. 주제가 주제다 보니 이런 정도의 가벼움이 없었다면 너무 숙연한 저작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대중들이 가까이하기 쉬운 자살 관련 저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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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9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9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죽으려고 했던 심리학자입니다 - 죽고 싶다는 생각은 어떻게 인간을 유혹하는가
제시 베링 지음, 공경희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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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기 보다는 자살 전반에 대한 생리학, 심리학, 사회학, 철학적 담론을 경쾌한 논조로 오가고 있다. 주제가 주제다 보니 이런 정도의 가벼움이 없었다면 너무 숙연한 저작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대중들이 가까이하기 쉬운 자살 관련 저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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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 상처만 주는 가짜 자존감 나를 지키는 진짜 자존감
전미경 지음 / 지와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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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보다 세가지, 사심없는 관계의 경험과 멀티 아이덴티티, 나만의 시그니처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본서도 그렇지만 나로서는 후속작인 [솔직하게, 상처 주지 않게]에서 크게 느끼고 배운 바가 컸던 것 같다. 자존감에 상처가 있다면 본서와 본서의 참고문헌에서 배울바가 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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