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매일이거나 며칠에 한번 꼴로 한동안 수행에 도움이 될 법한 내용을 떠오르는데로 또 몇몇 저작물을 인용하고 해당 부분을 수행과 관련지은 내용들에 대해 정리하려 한다. 각 저작물의 페이지 여백마다 기록해 두었던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경우는 몰라도 기억나는대로 적는 것은 모든 정리가 끝나는 날 체계를 갖추어 다시한번 정리할테니 두서없더라도 이해를 바랍니다^^
우선 수행이란 무엇일까? 수행이 과연 무엇이기에 수행이란 걸 하여야 하나? 하는 의문에 대해 나 스스로 답을 찾으려 노력했던 바를 정리하며 시작하려 한다.
수행을 왜 하여야 하냐고 누가 묻는다면 아마도 이리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수행은 잃어버린 또 잊고지낸 진정한 자신을 회복하는 길이기에 사람이라면 당연히 걸어야 할 길이지 않을까?
우선 성경의 한 구절로 시작하려 한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 (중략)...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기 01:26]
창세기의 이 구절을 근거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해당 구절에서 이르는 형상과 모양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QT 라이프성경에서 해당 어휘의 해석부분을 보면 형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형태'라, 모양에 대해서는 '추상적인 유사성'을 가르킨다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육신과 정신을 합친 全人이 곧 하나님과 같이 지음 받은 것임을 암시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해당 어휘의 히브리어 원어 해석도 모르니 단지 QT라이프성경의 이 해석만을 근거로 보자면, 신학에서는 구체적인 형태와 추상적인 유사성을 육체와 정신이라 해석하고 있다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헌데 형상과 모양을 그저 구체적인 형태에서 '구체적인'에 주목하고 추상적인 유사성에서 '추상적인'에 주목해서 '구체적인 건 육체고 추상적인 건 정신이다'라고만 단정짓고 마는 건 지나친 단순화가 아닌가 싶다.
형상과 모양은 단순히 외양만을 말한다기 보다는 구조와 상태를 이르기 위해 선택된 어휘가 아닐까?
왜 구조와 상태란 표현으로 설명하고자 하는가를 이르기 위해 다시 한번 성경의 구절을 더해 보아야 할 것 같다.
...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아리예 카플란의 [성경과 명상]에 의하면 생기生氣로 번역된 히브리어 Neshamah는 숨을 뜻하는 히브리어 Neshimah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생령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Nefesh는 휴식을 뜻하는 히브리어 어근 Nafash에서 온 것이라 한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의 혼'이자 숨이 불어넣어져 '살아있는 영혼'이 된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네페쉬의 어원인 어근이 나파쉬라는 것에서 의미를 확장하자면 그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상태는 '하나님의 영(숨)이 휴식'하고 있는 상태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해를 위해 [성경과 명상]에서 '카발리스트들은 혼의 3단계를 나타내는 단어가 있다'고 이르는 아리예 카플란의 말에 주목해 보자. 카발리스트들은 혼의 3단계를 나타내는 단어가 있다고 하는데, Nefesh, Ruach, Neshamah 이 3단계이다. 이것이 이르는 혼의 3가지 수준에 대해 카발라 성자 이삭 루리아는 유리공예가가 파이프를 불어 뜨거운 유리덩어리로 유리용기를 만드는 과정을 비유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유리공예가는 하나님이고 파이프의 끝에서 만들어지는 유리용기는 사람을 비유한다. 유리공예가가 파이프에 입을 대고 숨(Neshimah, 네샤마의 어원)을 불어넣으면 숨은 파이프의 끝에 있는 유리용기에 가닿기까지 파이프를 통과하는 바람(Ruach)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숨은 유리용기에 들어가 공예가의 목적한 바대로 유리용기를 만들고 휴식(Nafash, 네페쉬의 어원)하게 된다.-루아흐는 성령(그외 바람,혼,영)을 뜻하는 히브리어이다-
즉, 창세기에서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구절들을 근거 삼자면 사람은 구조적으로 하나님의 부분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숨이자 영이 물질차원의 껍데기 속에 잠시 휴식하고 있는 상태가 사람'이며 또한 '하나님 영의 부분인 것이 사람'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구조로서는 '하나님을 닮게 창조되어 있는 하나님의 부분'이며 위상적으로는 '하나님을 담고 있는 상태'를 가르켜 사람이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러니 형상과 모양이 그저 이건 육체고 이건 정신이다라고만 단순화해 정의하고 말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구조와 상태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닮게 그(그녀)의 구조대로 창조되어있으니 어떠한 구속도 한계도 없이 하나님과 같은 자유를 구현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카발라 관련 저작들이나 서양신비주의에서 유태교 신화를 언급한 관련 저작들 마다 한결같이 인용하는 아담카드몬에 대해 주목해야 할듯 싶다. 이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대한 QT라이프 성경의 해설을 이르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육신과 정신을 합친 全人이 곧 하나님과 같이 지음 받은 것임을 암시한다'라는 내용을 짚었었다. 여기서의 '전인全人' 곧, '온전한 사람'이 카발라와 유태교 전승에서 말하는 '아담카드몬'이다. '아담카드몬'이 뜻하는 것은 실락하기전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의 최초 사람을 가르키는 것이다. '실락하기전의 아담'(아담카드몬)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이니 '온전한 사람'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취하고 (즉, 이것과 저것이라는 분별을 취하게 되며 그러한 분별 속에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 받아들이게 되고나서 부터) 실락하여 인간으로서의 구속과 한계를 경험해야 하는 '불완전한 인간인 아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한 '결박과 제한, 한계'를 안게 된 '아담'과 구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인 실락 이전의 온전한 사람을 '아담카드몬'이란 표현으로 이르는 것이다.
'온전한 사람'을 달리 칭하자면 '참사람'이라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사람을 한자로 옮겨보면 眞人이다. 도교에서 이르는 바로 그 진인 말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겪어야 하는 내적 외적 모든 구속과 한계를 초월한 존재를 아마도 참사람이라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이미 실락 이전의 존재를 아담카드몬이라 한다고 했으니 사실 참사람이 되는 것은 초월이라기 보다는 우리 자신을 회복하는 것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니 부도지에서는 본디 자신으로 돌아간다하여 복본復本이라 하지 않나?
-즉, 우리의 본디 그대로는 하나님을 담고 있고 하나님을 닮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본디 그대로의 사람은 구속도 한계도 없어야 할 것이다. 구속과 한계를 벗어나는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임을 성경을 통해 부연설명하자면, 축복과 저주, 죄에 대한 히브리어 뜻과 어원에서 부터 접근해야 할 것 같다.
창세기 1:26 부터 1:28 까지가 모두 중요하겠지만 특히 1:28에 주목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닮은 구조로 자신을 담은 상태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나서 가장 먼저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이 축복하다는 내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바라크'라고 하며 뜻은 '축복하다', '무릎꿇다' 라고 한다. 이와 반대 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아라르'인데 이는 '저주하다'라는 뜻으로 거의 '결박과 제한, 한계'를 뜻하는 어휘들과 자주 같이 쓰인다고 하여 축복하다는 뜻의 '바라크'는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 히브리어학자들의 말씀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말을 이어가기 전에 또하나 '죄'를 뜻하는 히브리어를 보자. '죄'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헤트'로서 이 단어는 '라흐티'라는 동사와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어휘라고 한다. '라흐티'는 '목표물을 놓쳐 빗나가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이 축복(바라크), 저주(아라르), 죄(헤트) 세가지 개념에서 사람과 삶과 삶을 통해 알아가야 하는 것 그리고 끝내 회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미를 확장해 보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 하실 때 이미 '자신의 구조를 닮고 자신을 담은 상태'로 지으셨다고 언급했고 창조 이후 가장 먼저 사람을 축복하셨음을 위에 창세기 각 구절을 기재해 주목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축복하셨음은 하나님의 구조와 상태 대로의 사람 그대로가 이미 자유와 해방 그 자체였음을 말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본다해도 아주 빗나간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이후 동방의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두시고는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가운데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음에 그 중)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런 단하나의 금기라면 언젠가는 깨지고 말 금기였지 않은가? 모든 제약이 없는 중에 단하나의 제약을 주고 나면 그건 언젠가는 깨질 수 밖에 없는 악마적인 유혹이라 생각된다. 부부로서의 모든 역할은 다하며 살아가겠지만 동침만은 절대 안된다는 배우자와 뭐가 다른가? 그런 악마적인 제약이라면 그러겠다고 받아들이고 나서도 조만간에 깨지고 말 금기다. 이 깨지는 것이 당연스러운 금기를 깨었던 행위가 '죄'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이 죄로 인해 아담 이후의 인류가 죄인이 되어 살아왔다. 그런 '죄'의 계승이라는 천형을 가엾이 여기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자 독생자인 예수님을 보내셔서 '인류에게 계승되어오던 죄'를 대속케 하셨다는 것이 기독교적 해석이다.
헌데 과연 '죄'이기만 한 것인가? 그 '죄' 라 상징되는 한 장면으로 인하여 인간은 분별하게 되었고 아마도 환희의 세계에서 갈등이 충만한 세계로 내몰려서는 수고로움과 갈등 속에서 그러한 갈등을 중재하고 수고로움을 줄이고자 하는 노력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과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관습, 도덕, 법률, 철학, 과학, 심리학, 종교, 예술, 수행 등등 제도와 문화로서 발전하게 된 것이 아닌가? 이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실 때 부터 사람에게 제도와 문화를 발전시키는 이러한 여정을 완수하라 사명을 주신 것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선악과를 통해 분별하게 된 그것을 왜 죄라 하는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취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하와에게 잉태하고 수고하고 출산할 것이며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이 널 다스릴 것이라 하셨고 아담에게는 수고하여야 먹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하시면서 사망할 것이라 선언하셨다. 마지막 선언은 거의 저주와도 같은데 이것은 축복(바라크)이라는 자유와 해방 상태에서 저주(아라르)라는 결박과 제한과 한계의 상태로 위상이 변화한 것을 이르는 것이다. 그러한 위상 변이랄까 상전이랄까는 죄(헤트)라는 선악과를 먹는 행위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은 목표물을 놓쳐 빗나간 것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렇듯 목표물을 놓치고 빗나가고만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대로인 것이라 생각한다. 인류는 이후 갈등 속에서 성장해 왔고 환희의 세계를 벗어나 살아왔지만 환희의 세계와 그보다 더한 천국을 꿈꾸고도 살아왔다. 갈등과 천국도 함께 공존시킬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바라신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계획하신 것은 인간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신 것이다. '다스리다(지배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르두'는 문맥에 따라 '혹독한 훈련', '영향력', '통달'이란 뜻으로도 쓰인다고 성경 히브리어학자들은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조를 닮고 자신을 담은 상태'로 창조하신 '온전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에 대한 비밀을 혹독한 훈련을 거쳐 깨닫고 그에 대해 통달하여 정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바라셨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인 것이라 본다해도 빗나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유전공학의 발달로 게놈프로젝트를 인간이 완료한 것이 그것을 실천하는 첫걸음이 아닌가 싶다.)
이제까지 우리는 갈등 속에서 갈등을 중재하려는 노력으로 수고로움을 통해 걸어왔다. 이젠 결박과 제한, 한계를 부숴버리고서 다시 자유와 해방을 향해야 한다. 그것이 너희 안에 천국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내 우리 각자가 내 안의 천국으로 향하고 이 세계에서 서로와 함께 천국을 구현해내기 위한 첫걸음일 것이다. 분별의 길로 들어선 것이 죄가 아니라 다시 환희의 세계로 천국으로 향하려 하지 않고 천국을 이 세계에 구현해내려 노력하지 않는 그것이 목표물을 놓쳐 빗나가는 것이고 죄 그 자체일 것이다.
사람의 삶이란 그 놓쳐버렸던 목표물을 다시 향하는 과정인 것이여야 한다. 사람으로서 삶의 목표는 그 여정을 통해 본디 그대로의 스스로를 되찾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 사람이 삶을 통해 앎을 쌓아가는 까닭일 것이다. 하나님의 구조를 닮은 사람, 하나님의 부분을 담은 사람이기에 그러한 진정한 사람... 참사람을 회복해야 하는 존재 그것이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본디 그대로의 사람 그 자체(아담카드몬:참사람)를 대변하는 존재를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없을까? 누구나 예상하듯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예수님께서 계시다. 하지만 그분은 이미 태초부터 말씀으로 존재하셨고 하나님의 독생자, 성삼위일체로 상징되듯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분 아닌가? 그렇다면 그분께서 보여주신 모든 구속과 한계를 초월한 역사하심을 평범한 사람이 감히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면 너무 과한 바램이지 않은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저 신앙하고 따를뿐... 닮아가고자 한다해도 그와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한다면 불경하다 참람되다 이리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과연 '또다른 아담카드몬'이라 해석되리만치 예수님과 같은 초월적 경지를 보여준 이가 성경에서 등장한 적이 없는걸까? 아니다. 분명코 있으니 바로 구약성경 열왕기에 등장하는 엘리야다. 엘리야 역시 예수님께서 그러셨듯 죽은자를 부활시켰고(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 역시 죽은자를 부활시켰었다)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은 파괴적인 힘을 행사하기도 했다. 게다가 살아있는 채로 하나님께서 데려간 몇 안되는 이들 중 한명이다.
성경 외에도 인도의 '르쉬'나 '싯다', 그외 인도의 여러 종교 마다 다른 명칭으로 불리우는 깨달은 이들 그리고 중국 한국 도가의 도사나 진인들이 보여주는 초월적 모습들이 모두 창조된 본디 스스로를 되찾은 인물들의 본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본디 그대로의 스스로를 되찾는다면 물질차원에서의 구속과 한계에 굴하지 않게 됨을 대중에게 증거하기 위해 스스로를 드러낸 것이지 않은가?
-수행의 목적이 특이공능 또는 초능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아니다. 우선순위가 무엇이든 증득한 것은 어떻게든 드러나 보이게 되어있다. 그러니 수행의 과정에서 구속과 한계에 더이상 머물러 있지 않음을 보이는 이들을 예로 든 것이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사람이 구속과 한계 속에 휘둘리다 끝내 순환 속에 휩쓸려 어디로든 가고야 마는 그런 속박된 존재만이 아님에 안도할 수 있다. 그들처럼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 참사람이 되고자 열망하고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걸어야 할 수행의 과정을 우리는 대략적으로 어떠한 과정이라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성경적으로는 창세기 2:09 에 의하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에덴동산 가운데 함께 있었다. 그러나 창세기 2:16 ~ 2:17 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선악과이다. 즉, '선악과'를 맛보기 이전까지는 생명나무의 열매는 애초엔 금기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취하고 난 이후에야 아담에게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19>고 하셨다. '선악과' 라는 분별을 짓게 만드는 매개체를 거치기 전까지는 영생도 가능했어야 한다는 관점이 무리는 아니란 말이다. 사람이 분별 짓게 되고 나서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생을 꺼려하셨고<창 3:22>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창 3:24> 하셨다.
이런 관점에서 카발라는 세피로트에 생명나무의 길을 더불어 논하며 이것을 멜카바 명상 등의 백마법 체계의 존재 의의라고도 한다. 그런 관점으로 수행에 창세기의 창조와 실락을 대입시켜 보면 분별 짓는 행위(저주,죄,결박과 제한과 한계)를 그치고 다시 에덴(축복,자유,해방)으로 향하는 것이 수행의 의의라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의식의 변화(변성의식) 즉, 사마디를 수행의 여정에서 관건으로 삼는 라자요가계열에서 주목해야 할 입장이다.
그리고 인체 자체가 에덴이며 생명나무의 길은 인체에 갖추어져 있으니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상징되는 장애들을 관통해버리고 생명나무의 길을 통과해 결실을 취하여야 한다는 것은 쿤달리니요가계열에서 주목해야 할 관점일 것이다. 성경에서 이에 대한 근거를 찾자면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빌립보서 3:21>을 들 수 있을 것이다.
仙道에서라면 性을 주력하는 수행이라면 전자를 命을 주력하는 수행이라면 후자를 수행의 의의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부도지의 내용을 대입하면 포도 열매를 통해 五味를 알게 되고 본성을 잃었으니 復本해야 한다는 관점과 같다. 포도 열매는 성경에서의 '선악과'와 마찬가지로 분별을 짓게 하는 매개체이며 다섯가지 맛은 분별 짓는 관성에 빠져 그로 인하여 외부의 대상들에 현혹되어 살고 있음을 상징한다. 즉, 진정한 본성(불가에서 말하는 自性)을 향하지 못하고 있는 인류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다. 복본해야 한다는 것은 그러니 수행의 길이... 자신의 본디 그대로를 되찾는 것(復本)이 인류의 가장 큰 목표라는 것을 상징하는 말인 것이다.
이러한 스스로를 되찾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수행이며 그래서 끝내 참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 그것을 위해 바로 우리에게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 이후 계속 이어가겠지만 신앙인들 중 일부 어떤 분들께서 수행을 성경에서 이르는 금기시하는 것들과 연관지어 생각할까 하는 걱정에 덧붙이는데 수행이란 정의가 아우르는 대개의 수행체계는 하나님께 향하는 기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기도에 대해서는 맨 마지막에 수행에 대해 결론 지으며 마무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