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림과 울림 - 물리학자 김상욱이 바라본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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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을 읽고 생각해야지. 자존감이 핵 쪼그라 들었으니까. 폭풍을 뚫고, 10시 퇴근을 하면서 떠올린 것은 읽다만 김상욱의 물리책이었다. 우주를 생각하면 엄청 거대한 걸 생각하면, 비루한 하루가 아주아주 작게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책은 나를 양자 역학-작고작은 원자와 전자의 운동-으로 안내하였고...)

“(p.23) 138억년 전, 빛이 처음 생겨난 이후 우주는 팽창을 거듭했다. 빛은 점차 묽어지고 우주를 압도한 건 어둠이다. 어둠은 우주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으며, 어둠이 없는 비좁은 간극으로 가녀린 별빛이 달린다.”

어둠을 통과하고 있었다. 저저번주는 정말정말 극강 힘들었고 일주일에 두번 이틀 연속 눈물이 났고, 안되겠다 이대로 가다간 우울증이 돋을것 같아... 그래서 살짝 퇴사의 뜻을 내비쳤다가 잘해왔으니 좀더 버티라는 소리 듣고 ‘맞아 이시국에 답도 없지’ 급 철회했더란다. 그리고 저번주는 저저번주의 뜻을 내비친 댓가로 정말로 그럴거냐, 불편눈치가 보였고 (요즘은 모두가 퇴사를 원하므로 먼저하는 사람이 역적되는 암묵의 눈치게임 중이다...) 설상가상 월요일 부터 건물에 확진자가 생겨서 (한 층이 폐쇄되었지만 나는 정상 출근을 했다ㅠㅠ) 차라리 코로나에 걸리고 싶었다... (아프다는 구실로 회사를 그만둬도 후회없을 만큼 힘들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7월 중순부터였다. 뭔가 100% 다쓰고, 20% 더짜내는 느낌. 스트레스가 심해져서 잠을 설치자 업무하중이 더 심해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른이 되어서 좋은 점은 ‘무한한 가능성(젊음의 특권...?)’이라고 곱게 포장되는 실은 무지 하염없는 삶의 선택지가 정리된다는 거다. 이제 중년을 향해가는 어엿한 어른으로서! 내가 하는 선택은 대체적으로 사지선다형도 아니고 O 아니면 X의 문제인데, 예를들면 출근을 할건가 말건가. O. 이미 하기로 했으면 버스인가 지하철인가. (자가용 없음. 택시비 없음. 전세기는 당연히 없음) 환승2번 버스-지하철. 과 같은 것들. 보통의 나는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 사이에서만 고민한다.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으니까 안하고, 꼭 할 필요 없는 일이라면 해야만 하는 것들을 넘어서고 난 후에 한다.

이를테면 꼭 해야만 하는 출근 길에 그다지 내 인생에 필요는 없을 물리학 책을 읽는 달지. 현실과 밀접한 선택지에서 필요는 없지만 좋아하는 어떤 것을 끼워넣어 must를 변용하는 소소한 기쁨, 가능성 없는 으른의 삶, 나쁘지 않다. 책을 읽다 어떤 구절이 엄청 마음에 든다고 해서 뜬금없이 물리학자가 되겠어, 나사에 들어가겠어!! 가 아닌 응 그렇군 다음번에 해야하는 프로젝트는 루빅스 큐브를 이용해 보는 게 좋겠어, 김상욱 글이 좋은데 추석에는 알쓸신잡3를 봐볼까, 정도를 고민할 수 있는 건 정말 좋다. 만약 읽은 책에 압도되어 우주배경복사와 암흑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졌다면, 너무 힘들었을 거다. 암흑물질 너무 궁금한데 수포자가 이공계 대학 갈 수 있나요? 따위를 네이버에 묻고 있을 어린 나를 상상해본다. 다행이다, 증가하기만 한다는 엔트로피 덕에 내가 과거로 갈 수 없어서. 역시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 좋고, 선택지는 양자택일이 좋다.

“(p.112)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는 것은 결국 형태를 이루는 경우의 수가 작은 상황에서 많은 상황으로 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 ‘경우의 수’에 ‘엔트로피’라는 이상한 이름을 주면 열역한 제2법칙은 “엔트로피는 증가한다”라는 멋진 문장으로 바뀐다.”

OX의 문제로 다시 돌아와서. 나의 우울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회사에서 더 버틸건지, 확 도망칠건지. 일상에 어떤 사고(accident)가 끼어들지 않고서 4지선다형의 상황에 도달하는 건 드물다. 그런데 지속적인 업무압박에 불안해서 잠을 설치는 사고가 생겼다. 안그래도 불안한데, 피곤하니까 더 불안해졌고, 드디어 그만둬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는 순간 생각할 일이 사지선다가 되어 더 불안해져 버렸다. 도망친다면 그냥 막도망을 칠건지, 퇴로를 만들어 놓고 칠건지. 버틴다면 지금과 똑같이 버틸건지,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견디는 방법이 있기는 한지.

생각하면 생각이 많아지니까-, 난 아무 생각없이 ‘3.똑같이 버티기’를 기꺼이 해 볼 요량이었다. 3번을 살면 벅찬 일상 중에 아주 포~도~시 물리학 책(정말 나와는 아-무-상관없는 데 그래서 나를 자유롭게 하는)같은 걸 읽을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풍족하진 않지만 그 자유가 흔치 않아 더 달콤하게도 느껴졌더랬다. 그런데 정말 힘들다는 건, 읽을 시간이 생겨도 읽지 못한다는 것. 틈틈히 만들어놓은 일상의 숨쉴구멍들 틈으로 걱정과 불안들이 꽉 들어차서 숨쉬기가 더 어려워 진 다는 것.

그러고보면 도망치는 것은 정말 용기가 필요하고, 에너지가 필요하다. 내 인생에 몇번의 도망침(그만 버티기)들이 있었는 데. 돌이켜보니 도망을 결단할 때의 나는 진짜 용감했고, 될대로 되라지 나는 나를 믿어(!) 자존감도 있었고, 어떤 말들을 튕겨낼 수 있는 기운도 있었던 것 같다. 이번의 도망에 대한 불타오르는 욕구.....를 봉쇄(?)당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차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 ‘견딜만해서/견뎌야만해서’ 가 아니라 “그래도!!!그만두겠습니다!!”라는 말을 못.....해서 였다는 걸 깨달았다. 아 맞아. 생각해보니까. 난 그만한다는 말 되게 못하는 사람이었어. 그..그랬지. (되풀이 되는 버티기의 악몽이여)

왜 그만둔다는 말도 못하냐, 가슴을 치고 돌아와 도망의 선택지를 지웠다. OX의세계로 돌아 온 것이다. 주말에는 잠을 푹잤다. 움찔움찔 기미가 보이는 이내 찾아올 우울을 그냥 기다리기로했다. 모르지, 축 쳐져서 다니면 그냥 그만두라고 할지도? 도망의 권리마저 회사에게 넘겨버리자. 그렇게 맘을 먹었고 또 월요일이왔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업무압박도 야근도 가스라이팅도 여전한데, 그냥 정말로 괜찮아져 버린거다. 복잡한 생각을 안하게 되니 다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시간과 공간. 빛과 물질. 가장 큰것과 가장 작은 것. 최소작용의 원리와 양자역학. 중력의 법칙 같은 것들. 그렇게 안 읽히던 것들이 잘도 읽혔다. 모르는 데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나는 퇴근 후 제법 긴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집에와서 김상욱의 신간이 들어있는 책 택배상자를 뜯고, 고양이 발톱을 깎아주고, 355ml 맥주를 두캔 따라마셨다.

“(p.250) 물리는 한마디로 우주에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해준다. 우주는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뜻하지 않은 복잡성이 운동에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거기에 어떤 의도나 목적은 없다. 생명체는 정교한 분자화학기계에 불과하다. 초기에 어떤 조건이 주어졌는지는 우연이다. 하루가 24시간이거나 1년이 365일 인 것은 우연이다.”

물리를 좋아하기로 했다.
해야할 일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암 때고 도망가도 물리는 잡지 않을 거다.
못해도 상관없는 데, 의미마저 없다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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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09-05 08: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감상평을 넘어선 진정한 과학에세이에 감동했어요! 힘내시구요, 즐건 주말되십시요!

공쟝쟝 2020-09-05 09:08   좋아요 1 | URL
진정한 과학을 1도 모르는 에세이지만, 일상을 잊는데 물리는 제격이었습니다! 즐거운 주발 보내세요~!

초딩 2020-09-05 0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데도 알 것 같다
떨림과 울림 만큼 마음에 드는 제목입니다 ㅎㅎ

공쟝쟝 2020-09-05 09:11   좋아요 2 | URL
이 책의 제목이 제가 책을 집어드는 데 한몫했어요.. 역시 제목은 중요해~~~~~

2020-09-05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05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9-05 0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쟝님이 오랜만에 길고 길게 써줄 땐 늘 좋지만, 이렇게 힘들고 아프니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ㅠㅠ 아침부터 넘넘 슬픔...떨리고 울림...이 책 나도 봤는데 역시나 기억이 안 나요 ㅋㅋ그런데도 김상욱님 과학공부책 이 책 보고 야심차게 양자공부책까지 샀어!!! 무용한 것에 비비대는 삶...도망치는 기준은 도망치고도 뒤도 안 돌아보고 침도 그쪽으로 안 뱉고 후회없다! 하면 당장 그곳을 나오시구... 빈 주머니와 비우지 못하는 장바구니 등등으로 결국 작은 후회라도 할 거 같으면 존버하는 겁니다...그래서 저는 존버,...존덴버...존버거...주말 푹 쉬고 조금조금 나아지길.

공쟝쟝 2020-09-05 09:16   좋아요 1 | URL
좀 배워야 할 것들이 있어서 ㅠㅠㅠ 존저 존덴버 존버거.........
퇴로를 준비하고, 도망칠거야!!!!!!! 그땐 존버거도 읽을 겁니다.. 히히..

비연 2020-09-05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상욱님의 책을 또 사야 하나... 쟝쟝님이 물리에 관심을 가진다니 왜 이리 기쁜지.

공쟝쟝 2020-09-05 09:17   좋아요 1 | URL
독서 느무 좋아요. 과학책 애송이가 비연님께 의지하며, 아는 기쁨을 누려볼것입니다!

2020-09-05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3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2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2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IMF 키즈의 생애 - 안은별 인터뷰집
안은별 지음 / 코난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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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추석 이후부터 출근러가 되었다. 고작 8개월만에 나의 멘탈이 프리랜서 생활을 견디기엔 아직 나약하단 걸 깨달았다. 도저히 불안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이 없을 때는 굶어죽을까봐 걱정되었고, 일이 있을 때는 일이 너무 많이 밀려와서 해치울 걱정하느라 바빴다. 시간이 많기는 한데, 도저히 내 일상이 조절 안되더라...

사무실 그만두면 자유롭고 시간이 넘칠 줄 알았는 데, 복세편살 빈둥대고 게으르게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많은 시간을 불안해 하는 데에 다 쓴 듯.. 하아.. 내 멘탈무엇.. 😿

모르겠다, 모아둔 돈이 좀 있었으면 그 시간들이 덜 불안했으려나? 


*

어쨌든 일이 있는 날엔 일을 하면서 다음 일 수배하느라 불안하고, 그렇게 일 스케줄이 겹치면 무리하게 되니까 내 몸이 버텨줄까 불안하며, 일이 없을 때는 없으니까 또 불안했다. 한참 일없던 어느 날은 정말로 이대로 일이 없으면 나는 앞으로 어떡하나..... 걱정으로 잠이 안와서 뒤척이다 날을 샌 적도 있었다.😨

농노에서 노동자가 되는 것은 착취당할 자유라고... ㅋㅋㅋ 
그런데 imf이후의 한국 자본주의 산물인 나는 사회가 착취를 안해주니ㅋㅋㅋ 
농노도 노동자도 아닌 상태가 외롭고 버거워 불안해하느라 심리적 에너지를 다 사용하고 있더란다. 

물론 여러가지 프리랜서 노동자들의 책을 읽으며 멘탈을 잡아보려 초반엔 노력했다. 그러나 뭔가 읽을 수록 내가 아무 대책이 없이 때려쳤구나ㅠ싶어서 (하긴 대책 보다는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리고 역시 도망치기는 잘했다고 생각..후회는 없지만, 당장 월세가 넘나 걱정ㅠㅠㅠㅠ) 결국 열심히 잡코리아만 뒤지는 신세... 그걸 뒤질 수록 더 불안해졌다... 하지만 멈출수도 없었다. 그걸보며 불안해해야 뭐라도하는 것 같았으니까.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냥 나는 ‘불안’을 동력으로 인생을 굴리는 자였던 거다. 
막판에는 그냥 계속 이렇게 불안하기만 할까봐 그게 더 불안할 정도 였으니...


*

여튼 도저히 프리랜서 못하겠어!!!! 아무데나 받아주세요!!!회사에 뼈를 묻고 일하겠습니다!!! 모드로 구직. 요즘엔 새 직장, 새 업무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다. 다크서클이 더욱더 진해지고 있음.. 그래도 따박따박 월급 들어올 생각하니 지난달 대비 불안의 총량이 50%는 줄어든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실존적으로는 불안하며...(이 일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내 몸이 당분간은 버틸 수 있겠지?), 일이란 무엇이든 힘을 들여야 하는 거니깐(그래야 고용주가 돈을 주니깐..) 집에오면 녹초가 되어 잠든다... 
내 인생 너무 어려워...



출퇴근 오명가명 길바닥에 하루 두시간 반씩 버리기 아까워, 이북 읽기 중인데 (이전 사무실은 출퇴근 버스가 널럴했는 데, 요즘다니는 코스는 신도림역 거치는 마의 코스라... 도저히 종이책을 펼칠 수 없다..)ㅡ 하필 출근 첫주에 읽은 책이 IMF키즈의 생애였다. 


나 역시 아이엠에프 키드이고, 사는 게 참 생존 같고, 피곤하고, 나만 힘든가 다들 어찌 살고 있나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는 데.... ㅠㅠㅠㅠㅠㅠ 고작 일곱명 인터뷰인데도 .. 그냥 토닥토닥.. 다들 힘드셨쥬... 10대때는 아엠에프땜에 힘들고, 20대 내내 이명박그네랑 함께 보내느라 힘들고, 30대 됐는데 이룬게 아무것도 없는 데 일은 하기 싫죠... 힝... 어쩜좋니..... .... 우리 존재 홧팅이어요....ㅠㅠㅠ 쥬륵...


*

제일 와닿는 인터뷰이는 홍스시씨였다. 그냥 다 내 얘기 같았다. 그녀의 불안에 대한 문장이 참, 너무 내 마음 같았다. 안불안해 본적이 없어서 만약 불안하지 않는 상태면 그 상태가 끝날까봐 불안해할거라는 말... 일이 잘되서 대박이 나도 내 몸이 안 받쳐줄 것이 걱정된다는 말.... ㅠㅠㅠㅠ .....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살던 몇달동안 마음에 불안이 똬리를 틀고 앉아서 나갈 생각을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항상 친구처럼 지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잠을 안재울 정도로 커진 모습을 보니 별 것 아닌 걸로 치부해선 안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잡아먹힐지도 모르겠어. 아니 이미 잡아먹혀 살아왔나.. 일단은 내 안의 이 어마무시하게 큰 불안을 알아챈 것이 다행이다, 라고 생각한다. 다만 좀 많이 무서웠으니까, 해결을 좀 해봐야겠다... 앞으로는 요놈을 잘 탐구해볼 요량이다.

근데 내일 출근해야하는데 핸드폰으로 막 쓰다 보니 벌써 한시반... ㅠㅠ 퀭... 😴😴😴😴😴






진짜 아무 걱정이나 불안 없이 편안 하루를 느껴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 날이 오면 아마 그게 끝나는 것 때문에 또 불안해 할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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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가방 2019-10-14 0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전 공감되는 심리네요.
하던 일 그만두고 작은 일 하나 직접 시작했더니 그렇게 힘들지 몰랐다는..
새 직장생활 화이팅입니다

공쟝쟝 2019-10-14 07:45   좋아요 0 | URL
회사안은 전쟁터, 회사밖은 지옥이라는 말이생각나네요! 월요일 힘찬 하루 보내셔욥^.^

반유행열반인 2019-10-14 0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질적으로 불안이 높아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며 잠을 설치곤 합니다.
12년 a 공교육과정이 우리한테 체화한 게 뭐겠어요. 정해진 시간 요일에 특정 장소에 투신해야 보상 받고 아니면 박탈과 낙오라는 불안을 심어 그대로 이용하기 좋은 노동자로 만드는 것이었겠죠.
그래도 과감하게 프리랜서 도전도 해 보시고 다시 일자리도 구하셔서 자기 힘으로 사시는 일에 조금은 자부심을 느껴도 될 것 같습니다. 저는 (휴직 중이지만) 지금 일을 그만두면 대체 절 받아줄 일자리가 있기나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에겐 구원과 위안의 독서와 글쓰기가 있잖아요. 일터가 그 바탕(경제적으로든 스트레스의 반동으로 부추기든)이 되고 있는 부분도 있으니 건강 해치시지 않게, 받는 만큼만 쉬엄쉬엄(?)하셔요. 나중 걱정은 나중에. 화이팅.

공쟝쟝 2019-10-14 19:5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우리에겐 위안의 독서와 글쓰기와 다정한 알라딘 서재 마을이 있네요! 이번생이 아예 망하지 않은 포인트 ^^ 나중걱정은 나중에할게요, 따뜻한 댓글 고맙습니다!
 
자기만의 방 쏜살 문고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이민경 추천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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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의 방

그에겐 ‘자기만의 방‘이 있다. 땅콩을 떼긴 했지만 (ㅜㅜ) 어쨌든 수컷이고, 이름이 있긴 하지만 묘권침해의 우려가 있으므로, 편의상 ‘H군‘이라고 부르겠다.

H군에게는 자신의 방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철제 바스켓으로 구성된 수납함. 집사자매들이 원룸 살때 부터 사용한 유구한 전통을 가진 자주 입는 옷들을 쌓아두는 가구(?)이다. 매우 실용적이긴 하나 미관상 좋지는 않은... 철제 바스켓은 4단이었고, H는 아깽이 시절부터 세번째 칸에 들어가 있기를 즐겨했다. 물론(!) 거기에 쌓인 옷들을 다 배아래 깔고 말이다..

˝H야, 거기가 좋아?˝ 도통 안에서 나오지를 않아, 셋째 칸의 옷을 비우고 방석과 천 등을 깔아주었다. H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가 뿜어내는 검은 털들도 무성해졌다. 나머지 칸들이 털에 영향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바스켓에는 옷을 둘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3층을 제외한 나머지 칸에 책을 쌓아두고 잡동사니들을 수납하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귀여운 쿠션 하우스와 들어갈 수 있는 캣타워 등을 사줬지만, H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
아름답지 않은 철제 수납함.. 이사하면서 조금은 더 단정한 방을 위해 두고 올까도 싶었지만, 하루 종일 누워있던 H군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결국 가져왔지.

이번엔 책상 옆에 두고 (컴퓨터 하다가 마음이 내키면 바로 손을 뻗어 H를 쓰다듬을 수 있다. 방금도 쓰다듬었지롱~🤤) 쿠션을 깔아드렸다. 여전히 그는 3층만을 사용한다. 내가 있건 없건, 잘때건 놀때건, 거기서 지내는 편이고, 보통은 드러누워있으며, 때때로 네칸 전체를 흔들며 그루밍을 하신다. (H, 이젠 거기가 좁아보이는 데...) 지금도 자신만의 방에서 턱을 괴고 눈만 꿈뻑꿈뻑 사색 모드인데, 어떤 작품을 구상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니가 거기를 좋아하는 건 알겠따😸!!
*
그래도 나는 종종 상상하곤 해.
좁은 방안에서도 가장 어두운 수납칸에서 웅크리고 있는 네가 아닌,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잔디밭에 누워있는 너. 넓은 들판을 달리는 너, 나비를 잡으려 버둥거리는 너, 민들레 홀씨로 장난 치는 너를.




2. 나의 방

어릴 때는 대가족의 틈바구니에서, 내 책상도 없이 자랐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기숙사에서 지냈고, 고시원 생활을 1년 반 정도 했는데 그땐 관계중독이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같이 술마셔 줄 사람들을 찾아다녔지. 좁아터진 고시원을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 느꼈을 때 쯤 대학생이 된 동생과 함께 자취를 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자매님들과 함께 살았다. 원룸에서 투룸에서 쓰리룸으로.. 하지만 ‘나만의 방’이 생기진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진짜로 ‘자기만의 방’을 가진 것은 석달이 조금 안된 셈이다.
*
약 3년에 걸쳐 인맥의 90%정도를 다이어트했다. (나는 관계에서 내가 먼저 거리를 둔다는 가능성을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거절공포증이 심한 인간이었다.) 한번 정리하기 시작하니 정리들이 절실해졌다. 올해 들어 다니던 일도 그만두고, 오랜 연인과도 헤어지고, 마지막으로는 자매들과 살던 집에서도 독립한 상태다.

여기까지 적고나니 히키코모리 같아 보이지만, 인생에서 단 한번도 제대로 혼자였던 적이 없었으므로 지금이 너무 소중하다. 난생 처음 혼자 사는 기분은... 외로울 줄 알았는 데, 왜 이렇게 가뿐한 느낌이 들지? 허허...

겨우 월세 낼 만큼만 돈을 벌고, 재취업을 위한 교육을 받고, 일주일에 두번씩 요가도 가고, 날이 좋을 때는 산책도 한다. 집에 들어와 청소하고, 고양이 밥주고 똥치우고 털 빗어준뒤, 나를 위한 한끼를 열심히 차려내서 먹고 설거지하면 밤이 오고, 그러면 책 읽다가 잔다. 으어~ 하루가 너무 빠르다.
*
언젠가 이동진 작가가 팟캐스트에서 책을 본인처럼 많이 읽으려면 사람을 안만나면 된다고 했었다. 일을 때려치울 때는 분명히 실컷 책이나 보겠다고 별렀는데, 책만 보기엔 난 잠이 너무 많고(수면시간 만큼은 풍부히.. 확실히 피부가 좋아졌다), 분명히 인맥 다이어트를 했는데도 친구가 많..다.

거르고 걸렀는데도- 중고딩친구, 대학친구, 직장친구, 동네친구, 여타의 친구 친구 등등을 일주일에 한번씩만 만나도 일년이 금방 가네?🤔 이놈의 결혼식은 왜 이렇게 많은거며, 현대문명의 수혜로 인스타 친구와 서재 친구들에게도 좋아요 꼭꼭 눌러줘야 하는 바쁜인생..... ㅋㅋㅋ




3. 자기만의 방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기도 했고,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진짜 ‘나만의 방’이 생기기도 해서 기념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기 시작했다.

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 (현시가 연봉 4500으로 추정.. 넘나 아득하고요😰 이제 겨우 제 방이 생기긴 했는 데 본질은 건물주의 방이겠지요?.)
이미 백 여년 전 그것을 가져 본 여성의 글은 매우 진-했다.

*

“사색의 낚싯대”를 길게 늘어뜨리고 “사물이 그 자체로” 보일 때 까지 조심스럽게 기다리며 자신의 마음에 집중한 흔적이 역력한 책. 그래서 나도 집중해서 아주 천천히 몇번이고 되짚어가며 읽었고, 많은 문장에 두번 세번 밑줄을 그었다.

오래 전에 이 책에 도전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너무 의식의 흐름같고, 글이 종횡무진 정신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몇 페이지 못가서 읽지 못하고 덮었고, 고전은 역시 어렵나보다 단념했던 기억.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읽기도 한다고 했던가. 페미니즘과 관련된 책들을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고, 여성으로서의 나를 돌아보고 있으며, 읽고 쓰는 습관이 조금씩 들어가고, 이제서야 ‘겨우’ 혼자있을 수 있게 된(객관적 조건으로도, 정신적 상태로도) ‘2019년 5월의 나’를 책이 읽었다라고 하면 이것은 비약일까.

허풍을 조금 더 보태 ‘운명처럼’ 읽었다. 버지니아울프가 마치 백년 후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도 되는 것 처럼 느꼈다. 그녀가 조근조근 말해주었다.

*

#자기만의방 ,
어떻게든 너만의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 내라고.
쉽게 감정이입하고 더 쉽게 의존해버리곤 하는 너는 그들의 영향력에서 때때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누구도 침범 못하게 방문을 잠그고, 깊이 충분히 스스로에 대해 사색하라고. “서두를 필요”도 없고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할 필요”도 없다고. (28)
다만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 그것만이 중요한 일”이라고. (155)
그러기 위해서

#500파운드 ,
스스로를 먹이고 입히는 경제생활에서 절대 물러나지 말라고. 다른 어떤 조언과 도움보다 현실에서 물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먼저라고.

“매달릴 팔이 없으므로 홀로 나아가야”하는 네가
언젠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가 습성이 될때 까지
“준비해야한다”고.
진짜를, 리얼리티를 쓸 수 있는, 그런 ‘그녀’들이 세상에 출현해야 한다고. (165)

*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여유와 용기를 갖출 때 까지.
충분히 벌고, 충분히 혼자 있으며, 충분히 읽고, 충분히 사색하고, 충분히 쓰는 것.
그렇게 살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또 그런 여성을 우리 사회는 환대할 준비가 되었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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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5-28 1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달 저희 독서 모임 책이라 그런지
더 반갑네요.

솔출판사에서 요즘 버지니아 울프 전집
을 새로 내고 있던데... 아마 그 전에
나오진 않겠지요. 아쉽네요.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 쉽지 않은 명제네요.

공쟝쟝 2019-05-28 16:49   좋아요 1 | URL
이 책을 읽다니 고거참 좋은 독서모임이로군요.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누시길..!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기껏 마련하고도 스마트 폰을 떠나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위하여🥂🥂

블랙겟타 2019-05-28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냥이를 키우고 계셨군요 ㅎㅎ
쟝쟝님의 애정이 느껴집니다.
(ღゝ◡╹)ノ♡

저 같은 경우도 다행히 친구는 많지는 않지만(응?) 책만 보기엔 잠을 너무 좋아하구요... 그러는와중에 ‘성의 변증법’은 오구 있구요.. 방 안의 책은 쌓여만 가구요..이 글에서 소개해주신 ‘자기만의 방’ 장바구니에 넣어놨구요...
(*´⌓`*)..

공쟝쟝 2019-05-28 16:51   좋아요 2 | URL
으키키! 저 그거 알아요! 영원히 되풀이 되는 읽어야 하는데.. 읽고 싶은데.. 읽고 있는데.. 다른 책 읽고 싶어지는 독서연옥 ㅋㅋㅋ

독서괭 2019-05-28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냥이들은 참 희한한 장소를 좋아하죠^^; 저 수납장 계속 끼고 사셔야겠네요 ㅎㅎ H군 넘 잘생겼습니다😍

공쟝쟝 2019-05-28 19:48   좋아요 0 | URL
집사에겐 고양님 칭찬보다 행복한 건 없죠!! 잘생겼다는 말에 배시시 웃고 있답니다 ^_^

붕붕툐툐 2019-06-13 0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쟝님 집사님이시네용!! H군 넘 멋져요~(묘권을 지키기 위해 이름은 공개하지 않지만, 얼굴은 당당히 공개하겠다!! 잘생겼으니까!!ㅋㅋ)
쟝쟝님의 독립(?)을 축하드려요~ 책 좋아하는 사람 중에 친구 많은 사람 없다고 생각했는데, 쟝쟝님 말씀 들으니 그것도 편견인가봐요~~

공쟝쟝 2019-06-13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는 책을 안읽던 시절에 사귀어 두었어요 ㅋㅋㅋㅋ ㅋㅋㅋ 😝
 
정의를 밀어붙이는 사람
에노모토 히로아키 지음, 정지영 옮김 / 쌤앤파커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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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함무라비를 정주행하던 중이다. (임바른 판사님 얼굴 정주행하는 것 같기도.) 너무 신파적이지만 그 오글+진지함이 포인트인 드라마다. 매 회 어려운 길 가시면서 꿋꿋한 박차오름 판사가 순진하던 (-.-)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해 찡해하면서. 그리고 생각하지. 아, 나 민폐였구나. 심지어 민폐를 눈치도 못채는 순진한 민폐!!!

드라마에 아주 잠깐 정의, 그리고 그를 실현할 힘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이 있다. (아직 덜 봐서 추후 전개는 모름) 모처럼 힘, 정의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샐쭉 웃음이 났다. 부끄러움인지 쓴 웃음인지 웃으면서도 오묘했다.

불의를 참지 못하겠던 시절 나는 힘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내게 가장 부족한 것은 권력의지이기도 했다. 어쩜 매번 관계의 눈치를 보느라 힘을 느끼기도 전에 겁부터 집어먹었더랬지. 여튼 정의롭기엔 너무 쫄보였던 나와는 다르게 당당하게 정의롭고 가진 힘을 잘 활용하는 이들이 멋져보였다.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다. 함께 지내며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본 결과 적은 수의 훌륭한 이들을 제외하고 대개는 정의를 외치다 그 자신이 정의가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혹은 정의라는 큰 진영 안에서 헌신하느라 정작 자신을 돌보지 못하거나. 이도저도 아닌 나는 기가 쪽-빨려서는 점점 그들과 멀어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여러가지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든다.

나와 훌륭한 이들과 정의가 되어버린 이들의 심리적 차이점을 엿볼 수 있을까 싶어서 제목을 보자마자 엄청 읽겠노라 별렀건만- 빌려보길 다행.. ‘정의’에 대한 논의도 그를 밀어붙이는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분석도 없다.

책에서 말하는 ‘정의를 밀어붙이는 사람’이란 내가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야말로 ‘이상한 정의감’을 가진 사람들 ㅡ 악플러들 혹은 꼰대들, 주변에서 쉽게 만나는 (듣는)귀가 없는 사람들ㅡ이었다. 책에 나오는 용어로 정리하면 그들은 ‘인지복잡성’이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게 책의 간단한 내용이다.

쯥... 굳이 이 제목이 아니어도, 굳이 풍부한 일본사례들이 아니어도 이런 내용을 담은 책은 시중에 널렸다. 읽으면서 여기서 언급되는 사람들에게 과연 ‘정의’라는 단어를 붙여야 하나도 싶기도 했다. “자기 주장이 매우 강한 사람” 정도가 더 적당하지 않나.

뭐 내용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너무나도 젠더 영역에서 업데이트가 안된 학자의 글이었다는 것. 일본인 임을 감안해서 봐도 들고 있는 예시들이 쓸데 없이 후지다. 응? 정의고 뭐고 일단 저자 당신의 인지복잡성이 더 단순한 것 같으신데요?

누워서 폰으로 끄적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길게 썼는데.. 이렇게 길게 독후감 쓸 필요 없었지 싶지만... 빌리고 읽는 데 시간낭비한 것 같아서.. (보통 이런 책은 읽다 시간아까워서 덮는데 오늘 들고 나간 책 이거 한권이라거 읽을 게 없어 ㅠㅠㅠ 다 읽음)... 다른 사람은 저같은 실수를 하지 않길 바라는 정의로운 ㅋㅋ 마음에...

솔직히 별 아깝긴 한데...
제목을 저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댓글로 연예인 혼내는 것에 열올리는 이들의
심리구조가 궁금하신 분들에겐 훑을 만한 책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나름의 인지 복잡성을 가지고 별을 하나 달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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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na 2021-07-06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고르는데 도움 많이 됐어요. 고마워요.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 빈센트 반 고흐 전기, 혹은 그를 찾는 여행의 기록
프레데릭 파작 지음, 김병욱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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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람을 한면만 보고 멋대로 이상화하면 안된다. <반고흐, 영혼의 편지> 속에 나타난 고흐는 이상을 위해 자기 자신을 너무 몰아붙여 안쓰러운, 선량하고 미련한 사람이었으나. 프레데릭 파작이 쓴 전기 속에 나타난 고흐는 일종의 구원자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실패자이자, 세상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집요하게 자신을 완성하려는 괴팍한 고집쟁이 그 자체다. 게다가 연애는 드럽게 못하고, 무슨 사창가는 왤케 많이 다니는 거며, 평생 가난에 시달렸다면서.... 빈대생활 와중에 길에서 거둔 여자와 살림도 차리고, 그녀의 사생아‘들‘까지 거두어 갓난아이까지 키워내는 정녕 박애...주의자... (내 가족이었으면 진짜 뒷목 잡고 쓰러졌다.) 그를 후원해준 동생 테오에 대한 궁금증이 더 깊어짐. 부처의 환생인가.


라고 마구마구 화내며 적었지만,

읽으면서 ‘빈센트’라는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의 입체적 매력에 더 흠뻑 빠졌다. 파작의 유려한 문체도 한 몫 했지만, 고흐의 글들이 그의 생애와 함께 적절히 인용·배치되어 조금 더 깊이 이 인물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를테면 아래와 같은 문장들.

“(61) 처음에 사람들은 호기심에 이끌려 이 신참 전도사의 설교를 들으러 왔으나, 그의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오기를 망설인다. 그의 설교를 듣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욕설을 하는 일이 잦아진다. 금방 줄이 듬성듬성해진다. 빈센트는 이에 개의치 않고 더욱더 열심히 설교한다. 그는 정원의 오두막에서 자기로 결심한다. 그의 그런 자기 희생에 사람들이 불안해한다. 방의 안락함을 거부하고 밀짚 위에서 잠을 자는 이 ‘하느님의 미치광이’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누구이기에 빵과 쌀과 당밀만 먹고, 차가운 날씨에 맨발로 걷고, 포장용 천 조각만 걸친단 말인가?”

ㅎㅎㅎ
이런 부분이 딱 이 부분만 있지는 않아서, ‘이 인간 참 징하다!’ 고 감탄(!)했다. 그가 화가여서 다행이지만, 꼭 화가가 아니라도 뭐라도 되었을 것 같다.... 😨😨

다만 현실에서 이런 전도사를 보면 좀 무서울 것 같고, 이런 선생님을 보면 도망다닐 것 같으며, 그가 보험설계사나 뭐 비슷한 계통의 세일즈를 했다고 생각하면.... 후우... 화가여서.. 창작자여서 다행이다.. 😞 빈센트씨, 진로를 잘 설정하셨군요..

“(254) 형의 주머니에서 테오는 형이 쓴 편지 한 통을 발견한다. 편지는 다음과 같은 말들로 마무리된다. ‘글쎄, 내가 해야 하는 일, 난 거기에 내 인생을 걸었고, 그 일로 내 이성은 반쯤 망가져버렸어 - 그래, 좋아 -한데 내가 아는 한 너도 장사꾼 부류는 아냐. 그래서 내 생각엔 너도 마음을 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진정으로 인류와 더불어 행동하면서 말이야.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

광기와 맞닿아 있는 듯한 집요한 정열. 꾸준한 열심. 자신이 아는 만큼을 삶에 구현하려 했던 현실에서 만나기 진짜 힘든 사람. 그래서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겠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람에게는 생애를 통틀어 쓸 수 있는 일정량의 ‘생의 에너지’ 같은 것이 있어서, 짧은 시간 안에 압축적으로 그 에너지를 다 써버린 이들은 빠르게 세상을 떠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이를테면 고흐나 벌써 올해 30주기라는 기형도 같은. 그들의 시간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들 안에서는 매우 천천히 흘러서 ㅡ 고작 서른 몇 해 뿐 일지라도 남들이 평생 느낄 것을 다 느끼며, 순간순간을 강렬하게, 아주 밀도 있게 자기 몫을 다살고 간 것은 아닐까하고.

범인인 나는 밀도 있는 삶보다는 가늘고 길고 몸이 건강한 삶(!)을 꿈꾼다. 그러나 어떤 작품 속이든 혹은 역사 속 인물이든 고흐같은 삶에 눈을 떼지 못하게 되는 것을 보면 역시 인생이 한,번, 뿐인 것이 아쉽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욕심. 그 삶들이 탐나서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을 때가 많다. (엿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불러서 엄두는 안나는 듯?ㅋㅋ)

늦은 저녁 카페테리아, 압생트를 앞에 두고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에 대한 논쟁적 이야기를 끊임없이 횡설수설 하고 있을 사회성이 없어보이는 고흐를 상상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나는 그의 전혀 신경쓰지 않은 외모에 놀라지 않을 것이며, 따뜻한 시선으로 그 맥락없는 이야기를 채근하거나 비난하지 않으며 끝까지 들어주고 싶다. 물론 다음 날 눈뜬 빈센트는 취한 어제가 기억 안나겠지만, 그래도 다른 아침들보다는 후련한 마음 상태였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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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갑자기 미안하네...;;; 전날이 기억은 안나지만 기분만큼은 후련했던 20대의 숱한(!!!!)아침들.
아, 따뜻한 눈의 내 사람들아~ 이제와서 사과할게...미안. 난 고흐도 아니었는데.....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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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아! 광기 발작 이후의 차가운 평온을 말 해주는 그의 자화상, 무감동한 시선으로,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는 그의 그 귀 잘린 자화상 앞에서 나는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던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밭두렁 길에 잘린 밀밭,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하늘, 그리고 풍경의 거짓 정적에 흠집을 내는, 검은 십자가 같은 그 까마귀들은 또 얼마나 감동적 이었던가.
물론 나는 미술관들에서 그를 다시 보곤 했다. 그는 환한 빛 속으로 솟아올라, 언제나 곧장 나의 두 눈에 부딪히곤 했지만, 그러나 나는 그를 잊고 있었다.
그의 남프랑스 그림은 나의 숨을 멎게 하곤 했다. 그 많은 물감, 그 많은 색깔, 그 많은 태양이라니.

(50)
1878년 7월 5일, ㅡ너무 힘든 공부에 낙담한 빈센트는 에턴의 부모님 댁으로 돌아간다. 암스테르담에서 보낸 이 열다섯 달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기다. "내 인생 최악의 시기였다."
그는 자신을 실패한 설교자로, 아니 실패자 그 자체로 여긴다. 그런 감정이 그에게 소학교 시절의 불행들을 상기시키고, 자신의 실패를 곰곰이 되씹으며 그는 지독한 엄격주의자 프로테스탄트로 행동한다. 자신의 수치를 한입 가득 들이마시는 것이다.

(216)
이제 빈센트는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다. 그에겐 포도주잔이 거부된다. 그는 압생트에 만취하던 때를 기억한다. 그에게 생생한 색깔을 고취시킨 것은 바로 파리의 카페들에서 미친 듯이 마시던 알코올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림을 좀 더 칙칙하게 그리고 싶어"한다. 때때로 그는 창문의 쇠창살 앞에서 되씹는다. "무슨 짓을 해도, 돈 문제는 여전히 군대 앞의 적처럼 저기 있구나."

(255)
빈센트가 죽은 지 6개월 후, 1891년 1월 25일, 테오 반 고흐도 위트레흐트의 한 요양소에서 구금생활을 하다가 사망한다. 두 형제의 시신은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작은 공동묘지에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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