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이 묘한 이유는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시의 어리석은 지도자들은 

그런 불가능성들이 가능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가능성들은 

현재의 모든 권력 구조와 물질의 분배를 

뒤집어엎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 월터 브루그만메시아의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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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논쟁 - 지옥에 관한 네 가지 성경적.신학적 견해 Spectrum 스펙트럼 시리즈 8
데니 버크 외 지음, 스탠리 N. 건드리 외 엮음, 김귀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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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문화와 종교 가운데 지옥과 비슷한 개념이 존재한다그만큼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공의의 문제를 중요한 것으로 여겨왔다는 증거일 것이다분명 이 세상은 사람들이 행한 선하고 악한 일들에 대한 응보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이는 사람들 마음 가운데 어떤 부분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면 그 다음에라도라는 생각.


     흔히 기독교의 지옥관도 이런 맥락에서만 이해되기도 한다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에 대한 충분한 처벌이 이루어지는 곳하지만 성경에는 생각만큼 이 주제에 관해 충분히 자세한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매우 단편적이고때로 상징적인 언급만 있을 뿐이니까이 쪽에 대한 설명이라면 불교나 무속신앙 쪽이 훨씬 자세한데(영화 신과 함께를 보라), 그 때문인지 저쪽의 지옥관을 그대로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여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물론 이 과정이 꼭 의식적인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이 책은 지옥에 관해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이 책에 기고한 네 명의 저자들은 모두 지옥이 실재한다는 것과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믿는 사람들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지옥에 관해 서로 크게 다른 관점을 보인다.


     먼저 데니 버크는 지옥이 영속적인 의식적 고통의 장소라고 본다그들이 영원한 고통 속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그들이 저지른 죄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또 그것은 악을 무던히 넘기실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의 결과다.


     존 G. 스택하우스 2세는 이와는 조금 다른 지옥관을 제안한다그 역시 지옥이 의식적인 고통을 당하는 장소라고 보지만그는 지옥의 고통이 영원하다는 점을 부정한다그에 따르면 지옥은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치르는 장소이지만그 대가를 치른 후에는 그 존재가 소멸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로빈 A. 패리는 한 발 더 나아가지옥에서의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며결국에는 그들 모두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도(심지어 인간의 악함도막을 수 없으며그분의 획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제리 L. 월스는 앞서의 주장들과는 조금 그 유형이 다른 내용을 전개하는데그가 집중하는 주제는 연옥이다기존의 가톨릭적 설명에서 연옥은구원에 이르기 위해 개인이 치러야 할 대가인 보속 개념과 연결된다면월스의 연옥은 생전에 이루지 못한 성화의 나머지 부분을 담당하기 위한 영역으로 제안된다.(그는 종교개혁자들의 편에 서서 이런 주장을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각각의 주장들 뒤에는 나머지 세 저자들의 논평이 간략하게 실려 있다개인적으로는 그 논평에 대해 다시 저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재 논평이 붙어 있었다면 더 흥미로웠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그러다보면 한도 끝도 없어질지 모르니까입장이 갈리는 상황에서서로의 입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설명하는 구성이 좋았다.


     네 편의 글에 대해 서로 논평을 하는 형식이 반복되는지라자연스럽게 각 저자들의 성격이 드러난다성경의 직접적 언급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버크나다른 어떤 주제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패리중재적 입장을 자주 취하는 스택하우스의 인상들 같은.


     개인적으로는 보수적인 신앙전통 안에서 자란지라 넷 중 버크에 의견에 심정적으로는 가까웠지만성경구절에 관한 그의 강조가 자칫 문자주의로 기우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물론 신학 이론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철저한 주석적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특정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구절을 누가 더 많이 찾느냐는 식은 아니니까.(그런 식으로라면 우리 모두는 안식교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반면 스택하우스나 패리의 주장이 좀 감상적으로 치우친다는 느낌이 자주 든다불쌍하고안타깝고사랑이 많고 하는 이야기들은 마음을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되지만우리의 감정이라는 건 너무 쉽게 바뀌는 법이니까.(반대편 입장에 설 때면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도 있다)


     보속이 아닌 성화의 관점으로 연옥을 설명하는 월스의 관점은 흥미롭다애초에 그걸 꼭 연옥이라고 부르지 않았더라면 일부의 반대는 좀 더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잠깐 든다.



     죽음과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해서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다만 우리는 조심스럽게 추측해 나갈 수 있을 따름이다그리고 여기에는 내가 속한 전통만이 아니라 다른 전통에 속한 이들의 이야기도 주의 깊게 들으며나의 관점이 가진 약점과 빈틈을 차근차근 메워가는 작업도 필수적일 것이다그런 차원에서 이런 책들을 읽어가며자신의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는 것도 유익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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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적한 시골마을의 젊은 교사 부부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사랑스러운 아내가 밤만 되면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버리는 것(빙의 뭐 비슷한 느낌). 사모님의 비밀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집에 창살을 만들고, 밤마다 문을 잠그기로 한다. 어느 날 아내만을 따로 둘 수 없었던 남편은 자신도 아내와 함께 창살 안으로 들어가기를 자청했고, 그날 밤 불이 나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이 사건을 수사하러 온 형구(조진웅)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만 좀처럼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어느 이상한 날 밤 독한 술에 취했다 깬 그는 자신의 신분은 물론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음을 깨닫는다. 형사로서의 그는 사라지고, 영화 초반의 교사가 되어 있던 것. 사라진 자신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니던 형구는, 어느 순간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이 질문은 비단 형구만이 아니라 영화 초반 교사 아내가 밤마다 모르는 사람이 되는 모습에도 언뜻 드러난다. 둘 다 외모는 그대로이지만 자신에 대한 기억이 전혀 달라지거나(교사 아내), 자신을 보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 완전히 달라지는(형사) 경험을 한다.

 

     ​사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건 경험과 그에 따른 기억들에 상당부분 의존하는데, 이 기억이라는 건 블록체인과 비슷해서, 나만이 아니라 나와 연관된 이들의 공통 기억에도 크게 의존한다. 꼭 영화 속 형구와 같은 상황이 아니라도, 우리는 아주 여렸을 적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을 부모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 듣고 우리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곤 하니까. 문제는 이 두 요소가 서로 딱 맞물리지 않을 경우인데, 영화 속 형구의 혼란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신의 기억과 주변인들의 기억이 맞물리지 않으면서 커져만 간다.

 

     ​물론 영화가 이런 질문들을 충분히 잘 풀어냈느냐는 좀 아쉬운 부분. 영화 초반에서 중반으로의 전환(교사 부부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에서 형사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부분)은 많이 갑작스럽고, 영화 종반부 형구와 초희의 대화 중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지는 부분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는 만들지만, 그 의미 자체는 불분명하다.

 

 

 

 

​     최근 개인주의와 맞물리면서 내가 누구인지는 오직 나 자신이 결정한다는 유의 가벼운 심리학이 유행하고 있다. 물론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마음가짐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니 다른 사람들 신경 쓰지 않고 내 멋대로 하겠다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태도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다 보면 결국 나에 대한 나의 인식과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인식 사이의 괴리가 생기게 될 테니까.

 

     배우로 더 알려진 장진영 감독의 첫 영화. 미숙한 부분도 보이지만, 나름 독특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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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장애를 가진 동물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동물들은 스스로를 측은하게 여기지 않는다.

- 사이 몽고메리, 엘리자베스 M. 토마스, 길들여진, 길들여지지 않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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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무슨 커다란 이야기가 펼쳐지는 건 아니지만, 전형적 일본의 시골 가족을 중심으로 소소하면서 감동적인 스토리가 그려질 거라고 예상했다. 비슷한 느낌의 다른 일본 영화들처럼. 하지만 이 영화는 완전히 그런 기대를 깨버린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게 뭐임?’이라는 생각이 계속 떠올랐으니까.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짝사랑하던 여학생을 떠나보내는 아들 하지메의 이마에서 기차가 조금씩 빠져나오고, 그 빈자리가 뻥 뚫려 있는 엽기적인 모습이 등장한다. (여기서 알아봤어야 했다.) 하지메의 어린 여동생인 사치코는 자신의 거대한 이미지 때문에 골치가 아픈 초등학생인데, 영화 중간중간 정말로 엄청나게 큰 사치코의 얼굴이 사치코를 바라보는 모습이 묘사된다. 설정상 그 모양은 오직 사치코 자신에게만 보는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여기에 약간 치매기가 있어 보이는 할아버지는 무슨 마임을 하는 것 같긴 한데, 어떤 캐릭터인지 알 수가 없고, 엄마 요시코나 외삼촌 아야노도 별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 영화.... 어떻게 보라는 거지.

 

     일단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야기에 논리가 있어야 뭐라고 평을 할 텐데.... 영화 속 캐릭터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가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있지만 서로 특별한 교류가 이어지지 않는다. 매우 적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각자의 고립된 생활을 이어나가는 식. 코미디를 표방하고 있지만, 기껏 사용하는 게 진지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똥이나 슬랩스틱이라면 그닥 공감이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할지도..

 

 

 

 

     영화보다 네이버의 영화 한줄평이 더 재미있다. ‘이런 영화를 만드는 건 분명 재주인 것 같다는 반어적 표현도 재미있지만, ‘산뜻하고 평화로운 어느 시골에서 자란 대마를 핀 것 같다, 작정하고 비꼬는 평도 재미있다. 정말 소위 약 빨고만든 영화 같으니까. 메시지도, 감동도, 비주얼도 볼 것이 별로 없었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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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하트 2020-06-27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너무 좋아서 감독의 다른 영화를 찾아보았지만 다른 작품들은 공감이 잘 안되더군요. ‘산뜻하고...대마를 핀 것 같다‘는 표현은 아마 최고의 상찬이 아닐까 싶습니다.^^

노란가방 2020-06-27 21:36   좋아요 0 | URL
오.. 그러셨군요. 감상은 충분히 다를 수 있지요.
사실 인물 하나하나가 당면하고 있는 일들은 나름 공감이 되는 면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큰 틀에선 너무 헐겁다는 느낌이 드네요.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