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리아 제국의 역사 - 국내 최초 출간! 페르시아와 로마보다 먼저 세계 제국의 시스템을 설계한 최초의 제국 ㅣ 더숲히스토리
야마다 시게오 지음, 박재영 옮김, 이희철 감수 / 더숲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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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숲출판사에서 내는 역사 시리즈의 최신간이다.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가 참 좋다. 지금까지 다섯 권이 나왔는데(아직 읽지 않은 네 번째 책도 곧 읽을 예정), 바빌론과 비잔티움(동로마제국), 히타이트와 무굴, 아시리아까지 고대 제국들의 역사를 차근차근 풀어낸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그야말로 꿀맛인 책들이다.


흥미로운 건 이 책까지 일본인 저자가 벌써 두 명이라는 점. 인문 역사 분야의 오랜 연구 전통이 있기 때문일까. 언젠가 우리나라 저자도 이런 책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아시리아는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도시국가의 형태로 등장했다. 메소포타미아 상류 지역을 중심으로 아수르, 니너베(니느웨), 아르벨라(이라크 아르빌) 등의 도시들이 초기 중심지다. 우리가 이들에 관한 내용을 알 수 있는 건 역시나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인데, 쐐기문자로 알려진 독특한 문자 체계로 점토판에 눌러 새겨 만든 문서는 종이나 나무와 달리 오랜 시간을 지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어 해독과정을 거쳐 연구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아시리아는 시대적 구분에 따라 고 왕국, 중왕국, 신왕국(아시리아 제국) 시대로 나뉘는데, “장막에 거하던 17인의 왕들” 같은 전설의 영역과 맞닿아 있는 족장 시대를 거쳐 중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영역국가로서 발돋움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래도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좀 더 잘 알려진 것은 신 아시리아 왕국, 아시리아 제국 시기다. 이스라엘의 북부 왕국을 멸망시켰던 디글랏 빌레셀(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도, 그 뒤를 잇는 살만에셀(살마네세르 5세), 산헤립(센나케리브), 엣살핫돈(에사르하돗)도 다 이 시기의 왕들이다. 그리고 책에서 저자가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아슈르바니팔도 개역성경에 “오스납발”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된다.


흔히 아시리아는 전쟁에 미친 나라, 패배한 나라의 포로를 끌고 와 영토 내 곳곳에 강제 이주를 시키고, 배반자에게는 잔혹한 처벌을 마다하지 않았던 야만적 집단처럼 여기는 고정관념이 있다. 하지만 고대에 존재했던 모든 제국은 다 그런 식으로 영토를 늘리고 영향력을 확대했다. 인구가 가장 중요한 국가적 자원인 시대에 강제이주는 일상적이었고,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과 반란을 진압한 후의 처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경각심을 주기 위한 잔혹한 형벌이 가해졌다.


저자는 아시리아에 나름 효과적인 행정조직도 있었고, (초기이기는 하지만) 대상 무역을 통해 부를 쌓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다양한 기록들(상당 수는 점술과 관련된 것이지만)이 증명하듯 학문적 전통도 있었음을 강조하려고 시도한다. 물론 그런 부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 저자도 인정하듯, 제국 시기의 아시리아는 끝없는 전쟁과 전리품으로 돌아가던 약탈경제에 가까웠고, 그나마 그 결과물도 지배층 위주로만 분배되어 제국에 속한 보통의 백성들에게 왕국의 운명 자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다가왔었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던 고대 아시리아 제국에 관한 좋은 모노그래프. 사실 이보다 더 상세한 내용들은 연구자가 아니면 딱히 필요 없지 않을까.





옥의 티라고 한다면, 감수의 글 부분에서 좀 보인다. 튀르키예에서 공부한 외교관 출신의 감수자는(저자로 쓴 책도 읽어봤다) 아시리아에 대한 기존의 왜곡돤 관점을 이 책이 어떻게 교정했는가 찬사를 보는 과정에서 성경을 언급한다. 이스라엘 북왕국을 아시리아가 멸망시켰기에 성경에는 아시리아에 대한 적개심이 남았고, 결과적으로 아시리아를 마치 괴물처럼 부정적으로만 묘사해, 이것이 서구 문화와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


그러나 아시리아의 잔혹성에 관한 연구는 근대의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잔혹한 처벌 부조에 기인한 바가 훨씬 더 크고, 성경의 아시리아는 강력한 제국이자 “하나님의 심판을 대리하는 존재”(하박국)로 묘사되기도 한다. 물론 멸망 이전에도 이 지역의 위기를 조성하던 아시리아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이 존재하긴 했으나(요나), 같은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런 아시리아 사람들(니느웨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선지자와 일종의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매우 자주 언급되지만, 성경의 기록은 실제 아시리아 역사와 매우 잘 조화가 되고 있으며, 오히려 가공의 인물들을 잔뜩 등장시킨 일부 그리스 작가들에 비해 근대적 발굴 이전에 아시리아에 관한 거의 유일하게 정확한 자료로서 인정받아야 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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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적 반시대성
오스 기니스 지음, 김형원 옮김 / 이레서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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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들렸던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명작을 발견했다. 오스 기니스의 책 중에 이런 게 있었구나 새삼 감탄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제목에 나온 “반시대성”이라는 단어가 이 책의 핵심 주제를 보여준다. 저자는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의 유행을 따라가기 바쁘다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시대의 조류를 거스르는 선지자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꽤나 보수적인 입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모든 종류의 현대적 적응(책에서는 이걸 ‘적합성’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잘 와 닿지 않는다)을 반대하는 건 아니다. 저자는 교회가 시대에 뒤떨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중심에 그리스도를 두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책이 나온 20년 전의 서구 교회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읽어야 할 것이다. 몇몇 초대형 교회들로 상징되는 성장주의, 부흥만능주의, 그리고 긍정심리학을 바탕으로 믿으면 뭐든 잘 될 것이라는 이단적 긍정신학이 두드러지던 시대였다. 저자는 그 시대를 이렇게 진단한다.


“스스로에 대한 치유적 관심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덮어 버리고, 영성이 신학을 대신하며, 종말의 도피주의가 일상의 제자도를 몰아내고, 마케팅이 선교를 축출하고, 여론조사 결과가 성경 주해에 대한 의존을 압도하며, 권력과 적합성에 대한 관심이 경건과 신실함에 대한 관심보다 두드러지며, 예배당을 재건하자는 말이 부흥을 위한 기도를 대체하고, 발흥하는 복음주의 하위문화의 재벌 왕국을 유지하려는 전력투구가 선교적 사역에 대한 복음주의의 특징적인 열정을 누르고 있다.”


저자는 “교회가 지금까지 속해 왔었던 모든 문화 중에서 현대 세계가 가장 강력하고, 가장 침투력이 강하고, 가장 압박이 심하며, 현대 세계는 교회 역사상 다른 모든 박해자보다 기독교의 순결함과 효율성에 가장 크게 손상을 입히고 있다”고 본다. 교회는 이 문화적 압박에 진작 굴복해버렸는데, 그 와중에서 자신들이 뭔가 대단한 전환을 이룬 것처럼 자화자찬하고 있다. 이전 시대의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할 일 목록을 버린 것이 무슨 엄청난 영적 성장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또, 저자는 이젠 설교 강단에서도 성경 본문에 대한 진지하고 충실한 주석보다, 온갖 종류의 (성경이 아닌 다른 영역의) 전문가들의 말이 권위 있게 인용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고 고발한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이 모든 가련한 항복의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사람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품이 있는데 (비용이나 접근 기회의 차이가 없다면) 굳이 가품을 선택할 사람은 없다. 교회가 열심히 따라가려고 하는 세속주의적 새로운 가르침은, 이미 세상에서 더 잘 가르치고, 안내하고, 판매하고 있다. 그 내용이 별반 다를 게 없다면, 굳이 이런저런 부담을 지면서 교회에 나와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지 않겠는가? 어쩌면 이즈음 서구의, 그리고 우리나라의 기독교 신자 수의 감소는 이런 영향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소명을 ‘벤처 사업’에 비유한다. 요 몇 년 동안 크리스천 창업가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운영에 관여하다 보니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스타트업의 성공률, 아니 생존률이 얼마나 낮은가 하는 부분이다. 보통 10년 안에 30% 내외만 ‘살아남는다’고 말한다. 그나마 폐업을 하지 않고 남은 스타트업도 사업이 잘 된다기보다는 그저 사업자등록을 취소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만큼 실패의 확률이 높은 게 사업이다.


저자는 어떤 상황에서는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세속주의의 물결이 이렇게 강하게 치고 들어오는 상황에서, 복음을 붙잡고 살아가도록 사람들을 격려하는 일은 인기가 없다. 그래서 그 길은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길이고, 유명세를 얻기 힘든 길이다. 실패를 하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 때로는 실패하는 게 옳은 선택인 때도 있다는 말이 퍽 위안이 된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우리가 유행에 좀 무뎌지고, 특히 “역사에 대한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상적인 지적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미래에 집착하면서, 이미 입증된 실수를 반복하는지...


작은 책이지만 강한 도전적 메시지가 인상적이다. 다만 책 초반 번역이 조금 난감한데, 예를 들면 ‘저항적 사고’가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문장으로 “이 사고는 한편으로 정합성을 추구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현세대와 잘 맞지 않는 기독교 메시지의 요소들에 대한 집요한 인식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사고방식이다”라고 하면 이게 무슨 뜻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후반으로 넘어가면서는 조금씩 나아지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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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는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해서만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스 기니스는 『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 6장에서 시민사회가 위로부터는 권력과 ‘전체주의적 관용’에 의해 억압되고, 아래로부터는 시민의 무책임과 진영논리, 정체성 정치에 의해 침식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
이번 영상에서는 시민사회를 위협하는 두 방향의 공격과 진보적 보편주의 및 다문화적 상대주의의 한계를 살펴봅니다. 또한 자신의 신앙에 충실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양심과 자유를 지켜 주는 ‘언약적 다원주의’가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에 어떤 길을 제시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일까요, 아니면 우리 종교만을 위한 특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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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9-24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랑가방님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노란가방 2026-09-26 10:4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카스피님도 연휴 잘 보내셨나요??
 


어머니 말씀처럼

사람이나 집이나 약간의 거리를 둬

통풍이 가능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인 듯싶다.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둔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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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기억 : 문화대혁명 시기의 티베트
체링 외세 지음, 윤승희 옮김 / 마르코폴로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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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기억을 몇 개 떠올리라면 우선은 600만 명의 유대인을(그 외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1,100만이라고) 정권 차원에서 학살한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있을 것이고, 스탈린이 저지른 대숙청(약 70만 명 살해)과 우크라이나 대기근(홀로도모르, 최소 400만 명 이상 희생)도 그 못지않은 사건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꼽자면 역시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이다. 10년간 이어진 이 광기의 운동으로 최소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아예 당 차원에서 기록을 삭제해서 정확한 수를 알 수가 없다) 간접적인 희생자를 포함하면 그 몇 배가 넘는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세 가지 참사의 공통점은 한 명의 지도자가 내린 멍청한 명령을 제대로 된 검토와 비판 없이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광범위하게 시행했다는 데 있다. 애초에 관련 분야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세 사람 은 각각 미술, 신학, 문학을 공부했다) 너무 나섰다.


그런데 차이점도 있다. 나치와 스탈린의 소련은 멸망하고 해체되었지만, 마오의 중국 공산당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 덕분에 그가 저지른 문화대혁명은 한 동안 비판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노선을 바꾸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그것을 공식적으로 언급하거나 하는 건 금지되어 있다(자칫 당에 대한 불신을 조장할 수 있으니).





이 책은 문화대혁명 당시 티베트 지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사진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저자의 아버지는 당시 인민해방군에서 선전 관련 일을 하는 장교로 복무 중이었고, 덕분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곳곳에서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 결과물들을 발견하고 이렇게 책으로 펴낸 것.(당연히 중국 공산당에서는 이 일을 좋게 보지 않았고, 덕분에 저자는 여권이 발급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문화대혁명은 티베트에서도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홍위병들은 티베트의 정신을 지워버리려 했다. 오래된 사원들은 파괴되거나 “인민을 위한” 공간으로 개조되었고, 그곳에서 생활하던 승려들은 강제로 끌려나와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환속해서 당의 지령을 따르는 꼭두각시 생활을 해야 했다.


비참한 모습으로 훼손되는 티베트의 문화유산들을 보고 있으면 안타까운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 그런데 저자는 단지 티베트인들을 피해자로만 묘사하지는 않는다. 본토에서 온 홍위병들뿐 아니라, 티베트에서 조직된 홍위병들, 그리고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개인적 영달을 꾀했던 티베트인들, 그 가운데는 특히나 악질적인 행동대장들도 있었다.


일단 그렇게 처절한 파괴의 시기가 지난 후엔 이제 정복자들 사이에서의 권력다툼, 내분이 벌어진다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티베트어로 걘록과 냠델이라고 불렸던 두 개의 파벌은 각자 무장단체까지 거느리면서 이전투구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또 적지 않은 티베트인들이 말려 들어가 피해를 입는다.





사실 잘 알지 못하는 티베트의 역사를 다루는 책인지라 이름부터가 생소하고,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누가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사람이 앞잡이였고... 하지만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데 그건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소설처럼 인물들의 행동과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야기 전체의 분위기와 흐름이 핵심이니까.


문화대혁명의 상징은 역시나 홍위병이다. 티베트에서 홍위병은 본토에서 넘어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티베트의 수많은 청소년들도 열성적인 홍위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뭐든 때려 부수는 것이 미덕으로 칭송받던 광기의 시기, 그 되바라진 아이들은 자신들이 뭔가 대단한 일이나 하는 것처럼 흥분에 빠져 장차 자신들이 딛고 살아야 하는 땅을 파괴했다.


사실 가장 선동당하기 쉬우면서, 한 번 빠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게 1, 20대이다. 이건 뭐 오늘날에도 매한가지. 퍽 우려스러운 부분인데,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들을 선동해서 불쏘시개로 쓰는 악질적인 인간은 어느 시대나 있기 마련이다. 쿠데타를 옹호하고, 법원까지 습격하게 만드는 이들이 또 무슨 짓을 못 할까.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홍위병들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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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9-21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혁당시 글쓰신 것처럼 중국인민들은 약100-200만명이 희생되었다고 하지요.하지만 모택동실각의 원인이 돤 대약진운동당시 공산당공식인정은 1650만명,학계추산은 약3500만명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