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자의 정신 (양장) IVP 모던 클래식스 2
도로시 L. 세이어스 지음, 강주헌 옮김 / IVP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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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도로시 세이어즈는 옥스퍼드에서 최초로 학위를 받은 여성들 중 한 명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 사회는 극심한 인력부족에 시달렸고, 대학에서도 그때까지 허용하지 않았던 여성에 대한 학위 수여를 결정하게 된 것이라는 사정이 있었다. 물론 세이어즈는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학위를 받은 것은 아니고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는데, 당시 그를 가르쳤던 교수들 중 한 명이 바로 C. S. 루이스였다. 루이스는 이후에도 제자이자 동료로서 세이어즈의 오랜 교류를 한다.


세이어즈는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다. 출판사 편집자이기도 했고,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주목받는 건 작가로서의 그녀의 업적이다. 양차 대전 전후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추리소설계에서도 나름 유명한 인물이었고(체스터턴도 브라운 신부 시리즈로 유명세를 얻은 걸 보면 확실히 그 시절 추리소설이 인기이긴 했나 보다. 루이스는?), 나중에는 희곡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유독 그녀가 주목을 받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잘 담아 녹여낸 작품들을 썼기 때문이다. 드러내 놓고 기독교 교리를 옹호하기 보다는 문학 작품 속에 그 내용을 녹여내는 방식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 “창조자의 정신”은 꽤 이례적인 책이었던 듯하다. 이제까지의 작품 활동과 달리 이번에는 기독교 교리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책을 썼다는 반응이 있었나 보다.


하지만 머리말에서 작가는 극구 그런 관점을 거부하면서, 자신이 책을 쓴 것은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드러내며 기독교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기독교가 진술하고 있는 교리들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기 위해서였다고 강조한다. 이런 주석 작업이 필요하게 된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사실의 진술과 개인적인 감정 표현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작가가 여기에서 시도한 작업은 요컨대 기독교 신앙은 그저 개인적인 생각과 감정에 관한 이해라고 보는 자유주의적 견해를 반박하면서, 정통 교리(특히 삼위일체에 관한)가 일상 언어를 통해서도 충분히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다.


이 책이 흥미로운 건, 이 작업을 저자의 직업이기도 한 작가와의 유비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떠올릴 때 그와 비슷한 현실 세계 속 무엇과 비교하면서 작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데, 가장 비슷한 것이 바로 창조적인 예술가들의 작업(주로 시인이나 작가 같은)이라는 것이다. 창조라는 작업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인데, 예술가들이 하는 일(특히 시인과 작가들이)이 바로 그런 일이라는 의미에서다. 그런 의미에서 책 제목인 “창조자의 정신”은 하나님과 예술가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다.


책 전반에 걸쳐서 삼위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을 예술가에 비견해 설명하는 내용이 가득하다. 이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비록 삼위일체가 우리의 논리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그 존재 양식과 기능하는 과정은 충분히 일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다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를 범신론으로 설명하려는 오류에 관해서 “창조적 정신이 작품들을 하나씩 생산해 내지만 창조적 정친이 곧 작품 하나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작가와 그가 쓴 책이 곧 동일한 것은 아님을 보여주며 빠져나간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속성을 예술가의 작업으로 빗댄 부분이 인상적이다. 창조와 예술 사이의 공통점에 관해서는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서도 발견되는데, 나니아의 세계는 아슬란의 노래로 창조되는 장면이 그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을 정말로 좋아했는데, 세이어즈는 이 부분을 이 책에서 좀 더 설명적으로, 하지만 그러면서도 문학적으로 잘 그려낸다.


확실히 루이스가 인정했던 작가다운 글솜씨인데다, 논지를 전개하는 방식에서 루이스의 향기도 살짝 묻어 나와서 읽는 시간이 즐거웠다. 20세기 초중반 영국에선 루이스와 톨킨과 체스터턴과 세이어즈도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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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려는 의미 있는 노력이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는 이들은

자신들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옳고 당연하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에게도 그 방식을 따를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기 십상입니다.


로완 윌리엄스,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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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란 수괴의 대통령직 박탈 선고. 

당연한 일이었고, 다행인 일이지만, ​ 

여전히 윤신론자들의 발악이 걱정이다. 

처음부터 이들은 논리적인 대화가 안 됐으니까. ​


또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한국 교회의 무지성과 개념없음은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잠시 기쁨을 누리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리 삶을 짓누르는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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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4-04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법재판관이 말하기도 했습니다만,
서로 ‘존중‘하는 말을 쓸 일입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5312272?rc=N&ntype=RANKING

‘윤신론자들의 발악‘이라는 말이란
‘혐오표현‘입니다.

아무리 윤씨와 여러 무리가 얼뜬 짓을 했더라도
‘발악‘이라는 낱말은 안 써야 하지 않을까요?
바로 이런 혐오발언인 ‘발악‘을 자꾸 쓰기에
다시금 나라가 쪼개지고 맙니다.

그리고 ‘전광훈과 추종자‘라고 해야지,
˝한국 교회의 무지성과 개념없음˝은
알맞지 않은 말입니다.

저는 무교입니다만,
제가 아는 목사나 신자나 교회는
모두 탄핵을 찬성했습니다.

어떤 얼뜬 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집단을 통째로 ‘무지성‘과 ‘개념없음‘이라 말하는 일이야말로
또다시 ‘차별-분열‘을 부추기는 혐오발언일 뿐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와 뜻이 다른 사람˝을
그저 그대로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하며
문제를 풀어가려는 마음이 아닌,
이런 혐오발언을 멈추지 않을 적에는
계엄 우두머리를 탄핵했더라도
미움불씨는 오히려 더 번질 수 있습니다.

윤씨한테 붙이는 ‘수괴‘라는 말은
지난날 박정희와 전두환이 민주화운동을 깎아내리며 쓴 말이기도 한데
‘수괴‘ 같은 말도 삼갈 줄 알아야지 싶습니다.

노란가방 2025-04-05 00:28   좋아요 1 | URL
언제나 점잖게 논평하는 위치에 있을 수 있으면 참 좋은 일이겠지요.

수괴는 법률 용어입니다. 2020년 형법에서는 ‘우두머리‘로 개정되긴 했으나, 여전히 군형법에서는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박정희가 썼든, 이토 히로부미가 썼든, 수괴라는 단어가 애초에 비문이 아닌 법률 용어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사용하지 못할 법은 없지요.

요새는 그저 ‘내가 듣기에 기분 나쁜 용어‘에다가 ‘혐오‘라는 딱지를 붙이는 사상경찰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일본에선 그렇게 부른다네요) 그런 식으로 말을 옥좨는 것 또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의사표시와 사상의 표현을 임의로 제한하려는 굉장히 전제주의적 태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참고로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제 블로그에 와서 지난 몇 달 간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던 사람들도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죠. 저는 모든 기독교인들에 대해 비난하는 게 아니었고, ˝윤신론자˝라고 부른 윤석렬의 광적인 추종자들을, 그리고 이즈음 온갖 언론에 도배되는 두 명의 사기꾼 목사들과 그 추종자들의 지성없음과 무논리에 대해 비판했을 뿐입니다.

무지성과 개넘없음이라는 단어가 불편하신 이유가, 전부가 그렇지 않고, 정말로 그런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라면, 굉장히 형식논리를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 같습니다만, 우리의 일상언어에서 그런 식의 과도한 형식논리 찾기로 의사소통이 되기는 할 지 살짝 의문입니다. 제가 무슨 법정 선고 요지서를 쓰는 것도 아니고(그런 경우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 오해가 없도록 써야겠지요),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을 끄적이는 곳에, 제 경험과 느낌을 썼을 뿐이거든요. (이 경우 문맥을 정확히 설명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요구하는 건 과도하다고 느껴지네요)
 


교회가 독재정권이나 전제정권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의 처사에 침묵하는 것이

과연 교회가 중립적으로 순수하게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일까?


- 구스타보 구띠에레즈, 『해방신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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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면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성공적으로 부과되었다.

그들은 가장 명백한 실제적 침해도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요구되는 그 심각함을 결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차릴 만큼

대중적 사건들에 관심이 충분히 없었기 때문이다.

이해의 부족으로 그들은 여전히 제정신인 채였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였고,

받아들인 것은 해가 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마치 옥수수 낱알이 소화되지 않고도 새의 몸속을 통과하는 것처럼,

뒤에 잔여물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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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4-02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중국을 보면 게속 1984가 생각나더군요

노란가방 2025-04-02 09:40   좋아요 0 | URL
뭐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온갖 음모론에 빠져서 아무리 설명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위에서, 앞에서 선동하는 대로 따라만 하는 사람들이 수만 명 그 이상이니까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