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들은 그 어려움과 난해함이 충분히 설득되기도 한다. (물론 정말 좀 심하다. 나를 향해서 쓰지 않았구나…라는 느낌을 받을 때의 소외감은 뭐 앞으로의 읽기로 계속 지적 갱신해야 할 몫일 테지만) 어렵게 쓰려고 한 게 아니라, 어떤 생각의 습관적 구조(벌랜트 식으로 말하면 이해의 감각중추…? 그것은 개개인의 위치성마다 또 다르고 비슷하게 만들어져 왔을 테다)를 바꾸기 위해서 이기도 할 테니까. 물론. 그 구조를 바꿔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제안의 대상 독자는 아마도 동료 연구자들일 테니, 나는 아니다. (이래갖고 신자유주의한테 이기겠어? 이러니까 발리지 이 사람들아! 하는 불만은 과연 잦아들 것인가.) 그러나. 내게 읽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2차적 글로 몇 번 접했지만 아직 정동 이론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모른다는 것에 대해 예전처럼 짜증을 느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읽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불편한 편안함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떤 텍스트(말 그대로의 문자라기보다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심상을 포함한 일종의 유동적인 무언가로서 일련의 표현들…이라는 의미로의 텍스트)를 추적하고 하나하나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 의해서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을 완전히 모르게 되어버리고… 그 밀도 높은 과정을 간접 체험하는 (이건 독자가 누리는 특권이다ㅋㅋㅋ) 사유의 그 두꺼움. 그 무게. 그 부피가. “(31) 삶에 매여있다는 것의 복잡한 의미”와 공명할 때.
정말 잘 읽어내고 싶다. 정말로 잘 읽어내고 싶다. 인간이 미련한 존재라는 것. 인간이 하염없이 미련한 존재라는 것에 대해. 연민이 끓어넘치다가도. 그 미련이. 그 미련 때문에 결국 미련을 가차 없이 힐난하고 비난해서라도 상황을 해체해버리고 싶을 때. 불쑥. 그 싶음.의 두터움.을 파고들고 헤집어본 사람들에 의해서. 실은 안 해도 되는걸. 그걸 해야만 하겠던 그 또 다른 의미의 미련함.
그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이 미련한 흔적의 글씨들이 내 안에 있는 신산한 공격성을 겸허한 고요함으로 바꿔 놓는다.
그러니까. 나는. 너무너무너무나 무력한 나는. 글씨라도.
어쩔 수 없이. 기도하듯이. 읽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삶을 견뎌야 하니까. 낙관… 하고 싶은 것일까나.
지구상에 환상 없이 제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언제나 그것은 껴든다. 그러니 누군가의 환상을 비웃을 수가 없다. 패배. 착각. 시련. 암담. 환상. 뭐 다른 거 다 끌어당겨서. 엉망진창이라도 삶은 삶이다. 나는 허우적댄다. 잊기 위해 읽을 수 있다는 환상에 몰두한다. 이다음의 환상과 이다음의 낙관으로 안내받고 싶다. 낙관이 잔인한 게 아니라 삶이 잔인하다는 걸 우리 모두는 사실 안다.
#로랜벌랜트 #정동이론 #잔인한낙관 #서론 #어렵습니다
27 환상의 마모 이 책은 어떤 환상의 마모, 즉 집단적으로 이해관계가 투자된 삶, 좋은 삶의 마모에 관한 책이다. 어떻게 살 수 있는가와는 점점 더 무관하게 그런 환상이 —청사진이 바래면서— 더욱 판타즘적인 것이 되었기에, 생존의 리듬, 체화된 그 정동적 리듬에서 도출된 정동의 리얼리즘을 활용하면서 새로이 등장하는 일단의 미학적 관습에서 좋은 삶이라는 환상의 마모가 드러난다. 나는, 답보 상태 혹은 과도기적 순간들을 열심히 아카이브로 구성해 삶의 유지[지속이]라는 환상의 상실에 적응하는 표본적인 사례들을 제시하고, 우연성의 느낌이 증가하는 가운데에서 잘 산다는 것이 어떤 조건을 수반하는지를 탐구한다. - P27
31 낙관 내 책에서 낙관이란 병리학의 지도가 아니라, 현재를 조직하는 여러 애착심을 수반하는 사회적 관계이다. 낙관은 세계-구축이라는 행위에 결부된 쾌락을 지향하지만, 그 행위는 미래에 몰두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포타미아누와 마찬가지로 나는 삶에 매여 있다는 것의 복잡한 의미를 살펴본다. 잔인한 관계를 수반한다고 판명될 때조차도, 낙관의 부정적 특성을 어떤 도착, 상해, 실수의 증상이나 어두운 진실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낙관은, 양가적으로, 불균등하게, 앞뒤가 맞지 않게 펼쳐지면서도 삶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교섭으로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장면이다. - P31
33 신자유주의라는 교수법적 용어 이 책은 구조적 인과관계와 얽힌 주체성의 힘을 관찰하지만, 잔인한 낙관의 대상을 나쁘고 억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잔인한 낙관의 주체들을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불평등의 상징적 증상으로 만드는 징후적 독서의 폐쇄성은 피하고자 한다. 그래서 나는 가령, 여러 구조적 세력이 어떻게 국지적으로 구체화되는지에 관심을 갖는 비평가들이 종종 교수법적 용어 "신자유주의"를 사용할 때, 마치 그것이 일관된 의도를 가지고 신자유주의 이해관계에 봉사한 주체들을 생산하는 개념, 세계를 동질화하는 주권적 개념인 것처럼 만들어버린다는 점을, 그래서 그렇게 볼 경우 주체의 단독적 행위는 개인적이고 효과적이고 자유롭게 의도된 것으로 보이기만 할 뿐, 실제로는 강력하고 비개인적인 여러 세력들의 효과에 불과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 P33
그러나 동시에 그런 비평가들이 상정하는 단독성이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개인은 온전히 주권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자신을 완전히 포화시킬 수는 없는 세계를 항해하면서 그 세계를 재구조화하는 일에 몰두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이 변증법적인 설명은, 현재 속에서 계속 살아가기의 물질적 장면들인 애착심, 자기 지속, 삶의 재생산 사이의 매끈하지 않은 역학관계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바로 여기서 ‘정동성affectivity’의 개념화가 빛을 발할 수 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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