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생이 온다 - 간단함, 병맛, 솔직함으로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임홍택 지음 / 웨일북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 시절 ‘수련회’에 가서 기합을 받았다. 빨간 모자를 쓴 조교들이 무섭게 다그쳐댔다. 터질 것 같은 허벅지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저녁에는 촛불을 켜고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MT를 갔다. 선배들은 멤버십 트레이닝이라고 했다. 그런데 편한 옷을 입고 ‘해쳐모이’라고 하는 거다.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앉았다 일어났다, 좌로굴러 우로굴러 했다. 그래도 대학교인데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열외’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 때문에 한번 더 기합을 받게 되는 건 민폐같았다. 입이 댓발 나와 기꺼이 기합을 받지 못해 ‘열외’가 된 동기가 있다며 쪼그려앉아 뛰기 횟수가 늘어났을 땐 솔직히 짜증나기도 했다. 나 역시 내 몸을 겨우겨우 통제하고 있었으면서 그랬다. 그렇게 다 같이 고난을 겪고 나니 끈끈해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랬다.

그랬다. 그랬는데. 그런데. 그러한데. 지금은 그때가 무섭다. 몸서리 쳐지도록. 그 시절의 그들이 무섭다. 정확히는 그것을 ‘견딘’ 내가 무섭다. 그런 경험들이 축적되어 있는 내 몸이 무서운 것 같기도 하다.

“(11)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임모 씨와 최모 씨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꼰대’라는 존재다. 임모 씨 곁에 ‘명문대 나와서 기껏 준비하는 게 9급 공무원’이라며 무책임한 참견을 하는 꼰대가 있다면, 최모 씨 곁에는 ‘네깟 게 뭘 안다고’라며 그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꼰대가 있다...1990년대생들은 그들이 자라온 학교와 주변에서 이러한 ‘꼰대질’ 속에 살아왔고, 이제는 사회인이 되어 직장의 꼰대들과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 이 책은 1990년대생들이 이 ‘꼰대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방식을 취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꼰대의 세상은 어떻게 이들을 받아들여야 할지 답을 찾고자 한다.”

내가 일하는 곳에서 느끼는 일상적 불합리에 대해 90년대 생인 동생은 ‘극혐’이라며 “당장 때려치우라”고 했다.

나는 참아 왔고, 견딜 수 있었고, 떠나지 못했고, 싸우지도 못했다. 싸우는 사람들이 어떻게 내쳐지는 지 봐오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달리 참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믿었고, 그래서 참을만 하다고 여겼을 지도 모르겠다.

또 엄마가 늘상 말했으니까. “남의 호주머니의 돈 빼먹기가 제일 어려운거다.” 나를 다그치는 관리자 사람도 그랬다. “사회생활이 원래 다 그런거야.”

이 정도면 괜찮은 처우라고도 생각했다. 정확히는 여기마저 그만두면 정말 영영 사회생활을 못하는 낙오자(열외)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일갔다 오면 잠만 쿨쿨 자는 무기력한 저녁들이 꽤 오래 지속된다고 느꼈을 때, 들어온지 한 달 만에 (역시) 90년대생인 동료가 “절레절레, 노답”이라며 사무실을 그만 두었다. 아. 그냥 그만두지는 않았다. “여기가 무슨 대단한 데인줄 아느냐, 사람이 떠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등등 주옥같은 명언을 사무실 최고의 꼰대 상사에게 투하하고 떠났다. 속이 다 시원했다.

그러나.. 폭격이 지나가고 난 뒤.. 남은 나는 그 꼰대를 달랬다. (그날 집에서 혼술을 취할때 까지 마셨다...괴로워서..) 이내 새로운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가 또 떴다. 누군가가 새로 오는 것을 반갑게 맞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구하는 김에 한명 더 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반년 정도 고민했던 말을 겨우겨우 했다. “저도 이제 그만두겠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들었던 생각은 하나다. 나도 일조하고 있었구나. 수직적이고 부당한 조직 안의 문화를 그냥 참고, 견디고, 그만두지도 않으면서. 이것들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구나. 그렇게 기성세대가 되어가고 있었구나. 나. 이미 낡았구나.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했는 데- 견딜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득권’이라는 뜻인 걸까나.

*

그래서. 이 책이 위로가 되었다.

아직 무엇도 가지지 않았고, 이 세상에 기여한 바도 없으며, 그리하여 이 “모순이 내 것이 아닌” 90년생들이 (그것이 병맛과 솔직함과 간단함일 지라도) 자신들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와 세상에 인입되고 있다는 것에.

“(155) 90년대생들은 회사에 대한 충성이 곧 나의 성장이라는 공식을 배격한다. 새로운 세대는 ‘회사에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는 인터넷상의 ‘직장 계명’에 동의하고, 이를 넘어서 충성의 대상이 ‘회사’여야 할 이유가 있냐고 반문한다.”
“(156) 과거 70년대 생과 그 이전 세대에게 충성심이라는 것은 단연 회사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90년대생에게 충성심은 단연 자기 자신과 본인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충성의 대상이 다르고 그 의미도 다르니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90년대생들을 위한 조직 문화 개선 방안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충성도에 회사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느냐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157) 앞서 말했듯이, 90년대생들은 IMF 직격탄을 맞은 70년대생들과 상시 구조조정의 가능성을 가져왔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 쑥대밭이 되었던 80년대생들의 모습을 보고 자라왔다.”


‘회사가 싫다’ ‘퇴사가 좋다’류의 책들이 너무 많이 나오고 은근히 조장되는 분위기를 걱정하는 글을 본적이 있다. 이 책을 보고 나서는 그 걱정이 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부양가족이 없고 아직 젊다면 적극적으로 이직하고 퇴사하고 때려쳤으면 싶어졌다. 소위 회사라는 곳이 사람을 마치 티슈처럼 사람을 뽑아쓰고 버리는 거 지금까지 계속해서 봐왔으니까. 버려지기 전에 먼저 버리는 게 왜 나쁜가. 그렇게라도 답답한 이 시스템에 균열을 내야하는 것 아닐까. 그 균열을 견딜 수 없다면 기성세대와 회사들이 제대로 변화해야 하는 거지.

*

‘열외’를 인정하지 못하는 몸의 기억을 가지고
‘그래도 어떻게 얻은 일자리인데’라는 을의 감수성을 꾹 내면화한
80년대생인 내가 애매하게 타협했던 것들이
우리 모두를 더는 해치지 않도록
새세대들에게는 절대로 이어지지 않도록

그러니까 이 책의 멋진 표지처럼 90년생들이 그들만의 스타일로 착착착 전진하기를 바란다. 
난 눈 흘기지 않고, 기꺼이 내 무언가를 내놓을 용의도 있으며, 박수치고 응원할거다. 진심!!!

적고 보니 어쩐지 나의 퇴사일대기네.
90년대 생들 만세!



(116)
90년대 생들에게 솔직함이란 기존 세대의 솔직함과는 그 범위가 다르다. 그들에게 솔직함이란 자신의 솔직함뿐 아니라 남들의 솔직함도 포함한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예를 들어 본인들을 고용한 기업이라든가 소비재를 파는 기업들에게서 솔직함이 보이지 않는다면 인정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169)
"본인에게 주어진 휴가를 다 쓰지 않고 휴가를 다녀오지 않은 것이 마치 더 일을 열심히 한 듯이 으스대는 선배들을 볼 때면 얼간이같이 느껴져요. 내 휴가를 내가 사용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요. 얼마 전에 팀장님이 지나가는 말로 ‘휴가가 너무 잦은 거 아닌가?’라고 하는데 기분이 안 좋았죠. 지적하려면 업무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180)
영화 <신과 함께>의 원작자로 유명한 웹툰 작가 주호민 씨는 본인의 2008년작 <무한동력>의 명대사로 꼽혔던 "죽기 직전에 못 먹은 밥이 생각나겠는가, 아니면 못 이룬 꿈이 생각나겠는가?"가 이제는 부끄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꿈이 꼭 없어도 되는데 너무 꿈을 강요한 건 아니었을까?"라고 말이다. 새로운 세대는 꿈을 쫓으라는 기성세대의 충고가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음을 경험을 통해 깨닫고 있다.

(213)
몇 년 전, 한 대기업은 ‘역멘토링’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다.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겸비한 경영진이나 선배들이 1대1로 신입 사원에게 진솔한 지도와 조언을 해준다는 ‘멘토링’ 프로그램을 반대로 차용한 것이다. 쉽게 말해서 대표 신입 사원들이 본인이 속한 조직의 임원에게 역으로 본인의 진솔한 조언을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두 달도 가지 못해 폐지되었다. 회사에서 내세운 표면적인 폐지 사유는 ‘임원이 참여할 시간이 아직은 부족해서’였지만, 실제로는 ‘너무도 솔직한 신입사원의 의견을 임원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서’였다.

한 부서에서는 근무한 지 1년이 되는 사원이 임원에게 "상무님은 회의 시간에 본인의 의견만 말하고, 반대되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답정너 스타일입니다. 부서 회의도 강압적이어서 부서원들이 솔직한 의견을 제시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음에 벌어진 일은 그리 놀랍지 않다. 솔직한 역멘토링에 얼굴이 굳어진 임원이 관리자에게 신입 사원 교육을 똑바로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제도의 취지는 무색하게 되었다. 이런 사달이 난 이유는 프로그램의 설계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이에 참여하는 경영진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며, 참여를 할 진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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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9-01-29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다시 그런 불합리한 상황에 들어가게 된다면, 다시는 침묵하지 않을 거예요

공쟝쟝 2019-01-29 17:26   좋아요 0 | URL
암요. 그래야지요. ^_^
침묵하고 싶어서 침묵했던 적도 있지만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저 자신의 언어가 없었던 것도 같아요. 그리고 말보다 이미 몸이... 알아서...
대개의 불합리는 압도적이라 인식도 잘 안되었던듯. 우리 꼭 기회(?)가 생긴다면 제대로 말할 수 있도록 해요~
 
선망국의 시간 - 당신은 지금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나요?
조한혜정 지음 / 사이행성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169)삶을 일구려 노력할 수록 삶이 파괴”되는 것 같은 느낌. 따뜻하고 넉넉하고 싶은 데 자꾸만 삐죽거리는 마음.

그만 두었다. 이미 많이 그만두었는 데, 또! 그만뒀다. 작은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사내정치(?)랄까, 아니 어쩔 수 없이 ‘을’의 위치에서 감당해야하는 감정노동이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피곤해져서 잠들어버리기 일쑤였으니까.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기까지 내가 사회 부적응자인 것은 아닌가 백번을 자문해봤다. 아. 적응 못했구나. 그런데 더는 적응할 에너지가 없다...ㅜ_ㅜ

이젠 일이 없으면 꼼짝없이 반백수 상태에 놓이게 되는 말이 좋은 프리랜서다. 제발 올해는 아무 일이나 막 받지는 말자고 다짐은 하는데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때려치우고 나니 더 때려치우고 싶다. 그밖의 나를 둘러싼 여러가지들을 문제들로부터. 도망쳤나? 아니다. 적절한 때에 그만두는 것도 용기라고 동생이 말해주었다. 물론 겁은 난다... 나만 이 모양인건 아니겠지? 굶어 죽지는 않겠지? 이대로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늙어가진 않겠지? 지레 겁먹어서 하는 걱정과 불안들.

선망국의 시간을 다시 읽는다.

“(31) 지금,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 아래서 압살당한 기성세대나 고삐 풀린 자본이 명령하는 무한 경쟁 프로젝트에서 살아남은 젊은 세대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좀 다른 시간, 쉬어가는 시간, 서로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는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족끼리도 서로의 존재가 ‘슬픔’이 되는 시간을 벗어나는 것, 서로에게 “그간 살아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불가능할까요? 제대로 생각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이제 모두 휴가를 떠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맞네. 조한혜정 선생님의 조언대로 쉼의 시간, 휴가다운 휴가를 나한테 선물하자. 아주 열심히 달려온 편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쉰 것도 아닌 것 같아서.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곧 제주로 떠난다. 비록 일주일이 채안되는 시간이지만, 그냥 - 그냥 인채로 여행이라는 걸 해보기로. 혼자 훌쩍~ 떠나보는 여행은 처음이니까. 한 이틀은 아주 아주 푹- 쉬고, 많이 걸으면서 자꾸 자책으로 빠지는 성찰이라는 것도 좀 더 긍정적으로 해보리라. 그리고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고. 위로와 격려도 받고.

부디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걱정으로만 뒤척이던 스스로에게 “수고했다”라고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117) ‘근대의 미래’ 다음에 올 텅 빈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저항이 나/우리 스스로가 평화로워지는 유일한 길이기에 ‘자기애의 이름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멈추고 싶다. 회복되고 싶다. 이미 다 그만뒀지만 더더 많이 그만둬버리고 싶다.
그렇게 다 때려쳐도 나는 망하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알고 싶다.
그리고 진심으로 ‘걱정’이 아닌 ‘위로’를 건네고 싶다.
조건없고, 우러나오는 “수고했다”는 말을.
나 뿐만이 아닌 모두에게.


(104)
답답한 건 그런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충분히 이야기를 할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그 시간을 못견디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론을 말해봐"하는 사람이 하나 있으면 그 단위는 아무 가닥도 못잡은 채로 목소리 큰 사람에게 끌려다니다가 허탈하게 끝나고 맙니다.

(224)
나는 좋은 사회란 사람들 얼굴에 화기가 돌고 홀아버지가 아이 하나를 잘 키워내는 사회라 생각한다.

(238)
정치의 시작은 만남이다. 적대의 촛불은 소통과 상생의 촛불로 진화할 수 있을까?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고 만나는 것, 자백이 아니라 고백이 하고 싶어지는 자리, 도움을 청하고 의논하는 약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시민정치의 승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가면 좋겠다.

(244)
그는 섣부른 대안을 찾아 나서지 않고 파국 속에 던져지는 것, 현실의 고통과 비참을 마주하는 것, ‘무너지는 마음’을 바라볼 것을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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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15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5년 넘게 일해오면서 일년 정도를 쉬었는데 그때도 정말 불안해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었네요.
뒤돌아보면 또 어떻게든 일을 하게 되어 있고 굶지는 않고 있으니 쉴 기회가 생겼을 때 잘 쉬어둘걸.. 그런 후회가 들더라구요.
쟝쟝님은 저같이 후회하지 않게 주어진 아니 선택한 재충전과 쉼의 시간 제대로 누리시길 바랄게요. ^^

2019-01-15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인의 탄생 - 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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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4명 중에 3명을 괴롭혔으나, 정작 나는 전혀 괴롭지 않았던 읽쓰연의 네 번째 책. 치즈 곱창을 먹으면서 모임의 H는 물었다, “언니, 대체 이거 왜 읽자고 한 거예요?” 소주로 입을 헹구면서 대답했지.

“(네가 저번에 읽자고 한) 민족주의 책 읽고.. 한국인과 한국의 민족주의가 궁금해져서 검색해봤는데, 이게 제일 괜찮을 거 같아서.” 라 말했는 데, 뭔가 분위기가 싸했다. 그러니까 ...... 두께도 두께지만, 너무 재미도, 의미도 없다는 책에 대한 반응들.

뭐라고????!!!!!!!!!즈엉말?????????? 😳😳
나는... 재/밌/었/는/데????????????????
🤯🤯개충격🤭

H는 말을 이었다. “정희진 샘이 책 고르는 기준이 있는데 백인, 중산층, 지식인, 남성이 쓴 책은 일단 거른대요. 이 책은 심지어 서/울/대 교수고 ‘노’학자예요. 어떻게 보면 주류중의 주류?! 그래서 언니가 이 책을 골랐다는 것부터가 좀 놀랐어요.”

정희진 머모님의 그 기준은 나도 알고 있었다. 실생활에서 적용해봐야겠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음음. 보자, 좋아하는 저자의 책을 고르고, 사고 싶은 책을 사고..... 읽던 것을 읽고.. 그러고 보면 스무살 이후 내가 익숙하게 읽어온 책들이라는 건. 대부분. 남성 / (고학력의) 지식인 / 전문가-중산층 ... 뚜뚜뚜...

집에 있는 책장을 살펴봤다. 최근에 사들이기 시작한 페미니즘 책들 말고는 다들 ..... 뚜..뚜..뚜... 정말, 내가 열심히(?) 사모은 저자들일수록 더욱더.. 뚜....뚜...뚜..

그 날, 책장을 살핀 후 머릿 속을 생각했다. 헹굴 수 있다면 좀 흐르는 물에 헹구고 싶었다. 그리고 내 몸을 생각했다. 내 몸이 겪어온 서른 몇 해 동안, 당연히 체득해온 인간을 대하는 태도와, 자연스럽게 흡수해왔던 윤리들을. 그것들은 모조리 누구의 것이었을까? 누구의 입맛에 맞게 살아왔던 걸까.

그러니까, 정체성. ....
한국인의.. 아니 그 이전의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

책 이야기를 하자. 난 재밌었다.
‘한국인’이라고 하면서 ‘근대’를 그것도 ‘소설’을 톺아봤다는 방식 자체가 신선하다고 여겼다. 저자가 ‘오월의 사회과학’이라는 책을 집필했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국가는 없는 데 민족의식이 싹트던 시절 조선인들은 무엇을 욕망했을까.. 궁금해하며 소설이 반영하는 당대의 사람살이를 추측해본 독서경험이었다. 저자가 구한말의 시기를 ‘홉스적 자연상태’ 쯤으로 추상화해서 논지를 전개했던 부분도 흥미로웠고, 인용된 전/신/근대 소설들을 읽는 만으로도 것도 즐거움~

망국으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근대,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은 누구보다 ‘강한 조선인’을 열망했고, 문인과 지식인들은 그 모델을 발굴하기 위해 고군분투 했으며, 이러저러한 과정을 통해 ‘망한’‘헬조선’인들은 해방 이후 ‘무엇과도 싸울 준비가 된’‘한국인’으로 거듭나 있었다는 결론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임꺽정과 반지성주의를 연결한 부분도 좋았다.

물론 ‘작품을 선정한 기준이 뭘까?’‘아,여성작가는 1도 없네’‘이광수 너무 미화하셨네, 일제강점기 최애 시인 윤동주도 분석해주세요!’정도의 불만은 있었지만, 아주 작은 불만이어서 걸끄럽지 않았다. 아마, 같이 읽는 모임이 아니었다면, 후편인 <한국인의 발견>을 마저 읽으려 했을 것이다.

*



하지만 난 친구들과 함께 읽어버렸고, 그들의 평을 듣고 책을 읽을 때보다 더 세게 머리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지금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를 읽고 있다. <문학을~>의 부제는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 문학사’이다.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신소설은 ‘여성적인 장르’이다(p.21)” 이 글은 신소설을 통해 근대초기에 여성을 둘러싼 담론의 변화를 추적한다.

반면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아보자는 <한국인의 탄생>은 신소설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신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주체성, 자의식, 개성 등을 갖추지 못한 여성들이었다. 이처럼 피동적이고 내용이 전혀 없는 껍데기만 있는 ‘여성피해자’들이 바로 우리 역사에서 나타난 최초의 근대인의 모습이었다.(p.79)”

두권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주제의식은 다르다. 한 문장만 따로 떼서 평면적으로 놓고 비교할 수도 없다. 신소설의 여성주인공들을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의 영역은 내 그릇을 벗어난다.

다만, 음.
내가 적는 이 글은 다른 무엇도 아니고 ‘내 정체성’에 관한 내용이니까.

*

‘정체성’이라는 것은 어떤 집단에 대한 동일시 일 것이다.
내가 동일시하고 소속감을 느끼고 있는 집단을 살펴본다. 1차적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의 경우 민족단위의) ‘국가’일 테고 그래서 난 이 책을 집어 들었을 것이다. 한국인.
인생의 대부분은 ‘학생’으로 지냈고, 지금은 자기 먹을 밥은 자기가 버는 노동자다. 전라도출신 서울시민, 장녀, N포세대. 이념의 스펙트럼으로 따지면 진보로. 민주당과 녹색당과 민중당 어디쯤에 있는 것 같은데, 어디에 서야할지 몰라서 정당활동은 안한다.
읽어온 책만 놓고 보면 586 아재들의 뇌를 장착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놀라게 했다.

내가 ‘동일시’하는 집단, 혹은 정체성에 ‘여성’이라는 카테고리가 추가된 것이 아주 최근래의 일이라는 사실이.

난 얼짱녀도, 된장녀도, 그렇다고 메갈/워마드도 아니었으므로. 그 흔한 OO녀라는 멸칭들이 붇는 ‘여성’들에는 동일시를 할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은 정말 여혐민국이었고, 그 안에서 살아온 나에게 ‘여성성’은 언제나 ‘연약함’으로 상징되는 극복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책 부제의 말마따나 강한 인간이 되고 싶었는데, 남자가 아니니까 그건 좀 불가능 했던 것 같고 씩씩하고 또 싹싹하다는 수식어 정도에 만족.

혐오, 혐오, 혐오.
내안 남겨진 가부장제의 시각을 직면할 때 마다 소름이 끼친다. 심지어는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 믿은 책읽기나 공부조차 그것들을 내면화하는 과정이었다.

*

그날의 모임은 이렇게 끝났다.
이 책은 ‘한국(지식인 남성)인의 탄생’에서 괄호를 과감하게 삭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쓴 ‘한국인’에 대한 책쯤으로 여기자고. “한국인=기본값이 성인 남성!!?”이건 아니지 않느냐고.

저자가 일반화해서 ‘한국인’이라 언급한 인물들에 나(나의 어머니/할머니/아버지)는 없었다. ‘그래도 2013년에 나온 책이었으므로, 감안해주면 안될까’ 소심하게 의견을 피력해 보았지만, 독서 모임 친구들은 ‘시대에 맞게 지식인이면 더 업데이트’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게요.......
최정운 선생님, 업데이트들 하셔야겠어요........
그리고..... 나는 책 고르는 수준을 좀 더 업데이트......

요즘 읽고 쓰면서 되게 많이 반성하는 데, 독서라는 행위가 가진 속성이 ‘반성’인건지, 나이가 많이 먹어서 그런 건지.. 김중혁 작가가 했던 말마따나 초딩때 쓰던, 언제나 반성으로 끝나는 일기의 습성이 남은 건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남겨두려고 쓴다. 업데이트, 동기화.




(50)
‘사랑’이라는 말이나 관념을 가지고 있는 민족은 흔하지 않다. 서구의 ‘사랑’과 꼭 같지는 않지만, 우리의 전통문화에도 ‘사랑’이라는 말과 개념이 있다. 흥미롭게도 우리를 제외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비슷한 말은 있지만 남자와 여자 간의 성관계를 포함하는 특별한 관계와 감정으로서 정확히 대응되는 개념은 거의 없다. 한자의 ‘애愛’도 고전의 용례에서는 ‘아끼는 마음’, 예를 들어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었다. 일본에서 근대 이전에 많이 등장하는 ‘이로色’라는 말은 게이샤나 유녀들과의 관계를 이르는 말로 우리 문화나 서구 문화에서의 사랑, love와는 아주 다른 뜻이었다. .... 그러나 몇가지 중요한 특징중 상대방에 대한 욕망, 각별한 감성, 상대에 대한 배타적 정의와 의리, 그리고 특정한 ‘사랑’의 관계에 대한 결의 등은 공통적이다.

(73)
신소설은 서양식 소설을 흉내 내기 위해 시작된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일차적으로 당시에 우리 조선 말고는 어디에도 없는 희한한 이야깃거리가 나타났기 때문에 시작된 예술 장르였는 지 모른다.

(132)
근대 사회 또는 근대성이란 다양한 얼굴을 갖지만, 한반도에서는 중세가 망가지고 흩어진 파편들로서의 개인들이 근대로 나타났다. 그곳은 지옥같은 ‘정글’이었으며 거기에서 처음 발견된 근대의 생명체는 속 빈 넝마 인형 같은, 인물성이 부정된 ‘피해자여성’들 뿐이었다. 그러나 몇년 후 그 지옥의 정글에서 자라난 생명체, 즉 한국인은 생명력 그 자체였다. 생존의 대가survivalist로서의 최초의한국 근대인, 특히 여성은 누가 창조한 인위적인 피조물이 아니라 그 지옥같은 자연에서 살아남고 진화한 최적fittest의 생명체였다. 그들은 말하자면 인물성이 부정된 껍데기 밖에 없던 피해자에서 그런 존재성이 다시 부정되어 진화한 강한 자의식과 개성을 갖춘 강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나타난 고독한 남성 투사는 가족생활에 무책임하며 능력 없고, 사회정치적 행위의 합리성은 전혀 갖추지 못한 채 이 모든 것에 자존심을 앞세우는 그런 인물이었다.

(255)
1910년대에 나타난 초기 민족주의자의 두 초상의 공통점은그들은 그들의 정체의 형식을 채울 내용(內容)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 민족을 위해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요건을 갖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조건의 부재(不在)의 아쉬움을 아프게 느끼고 있었다....무엇이 없음(不在)을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그것을 욕망하고 있다는 것 이다.우리의 초기 민족주의자들은 욕망의 화신이었다.

(426)
1933년 이광수의 『유정이 발표되자 강한 조선인을 만드는비결(秘訣)이 드디어 공표되었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으로 욕망과이성의 갈등이 시작되고 두 힘 사이에 상승 작용이 일어난다. 그리고 두 힘을 최대한으로 확대시켜 그 사람을 죽게 한다. 그러면 그 죽은 이의 영혼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과 주변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것이고, 그들은 끝까지 싸우는 불멸의 전사가 된다. 이것이 바로 그비결이었다..... 1930년대 중반이 되면 조선에서 사랑의 의미는 전적으로 변화하였다. 사랑은 행복을 위하여 이성과 행복한 교제를 하는, 그런 일이 아니었다. 사랑은 뜨겁게 그러나 끝없이 자제해야 하는 일이며, 이는 행복한 삶을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강한 인간, 강한 의지로 끝없이 참고 이루는 인간을 만드는 더욱 진지한 일이었다. 사랑은 고통스럽지만 보람 있고 생산적인 일이었다.

(486-7)
공통적으로 ‘민중’이라는 말은 ‘백성 민(民)’에 ‘무리 중(衆)’을 합하여 ‘국가에 속하는 수많은 군중들, 큰 무리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쓰였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지혜라기보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밀어붙이는 힘, 엄청난 규모의 물리적 완력에 초점이 맞추어진 말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백만민중(百萬民衆)’이라는 쓰임새는 단적으로 많은 사람이라는 군중의 규모에 착안한 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중’이란 ‘정치적 의미를 갖는 육체적 힘으로 구성된 수많은 군중들’ 정도의 뜻으로 만들어진 말이며 그렇게 쓰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 전까지는 ‘민중’이라는 말은 서서히 정치적 혁명적 의미의 작은 조각들이 그 안에 모여들고 쌓여가는 과정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점점 시간이 갈수록 민중이라는 말은 혁명을 생각하던 사람들, 나아가서 혁명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511)
전통적인 영웅이 고결한 존재였다면 임꺽정이 대표하는 우리이 그대 영웅은 누구나 부러워하고 질투할 수 있는 ‘관능적 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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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스페셜 에디션, 양장)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2017년 5월
평점 :
품절


이상주의자였던 고흐에게 사랑하는 동생은 돈(현실)에 대한 인식을 끊임없이 환기 시켜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림을 추구하면 따라올 수 밖에 없는 자신의 경제적 무능이, 뒷바라지하는 동생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만들고 종래에는 그의 마음을 황폐하게 했을 것이다. 


고흐가 조금 더 뻔뻔한 류의 자의식 과잉의 혹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자기‘만‘너무 중요한 인간이었더라면 미쳐버릴 일은 없었을 것이고, 동생(테오)에게 당연한 듯 요구했을 것이며, 그랬다면 테오가 미쳤을 지도 모르겠다.
부인의 식모살이로 번 돈을 사업으로 날리는 인간, 누나가 여공으로 뒷바라지 해서 공부시켜놨더니 지가 잘나서 명문대(?)갔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어쩐지 예시에서 젠더가 강조되는 것은 요즘 읽는 책들 영향탓),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의 남모르는 희생과 헌신을 너무도 당연히 여기는 이기적인 인간들 (나포함) 세상에 꽤 많잖아.

˝(47)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리는 일에 대해 네가 반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신 나도 가능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마.˝

하지만 이 인간은 정말 끊임없이 미안해 했고, 미안해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매번 최선을 다해서 생의 에너지를 다 소진시켜 버린듯 하다. 고흐는 너무 착하고 동생을 사랑했고, 동생 테오도 너무 착하고 고흐를 사랑했다. 이 형제들의 삶은 서로 너무 사랑해서 생긴 파국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

˝돈이 없구나, 돈 때문에 미안하구나, 돈을 좀 보내다오, 언젠가는 네게 돈을 부탁하지 않고 싶은데, 돈이 없구나˝가 슴슴이 베인 그의 편지. 먼저 서울에 취직한 죄로 3년 정도 경제적으로 신세졌던 동생이 생각나서 많이 괴로웠다.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정말 정말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그 마음. 미련하고 안쓰럽고, 또 이해되기도 하고 해서. 결국엔 세상에 지고, 미쳐가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많이 울었다.


˝(243) 나는 단순하지만 지속적이고 결정적인 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왰다. 그런데 이제는 이미 패배한 싸움을 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 성격의 나약함이 문제인지도 모르지.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자책감만 남았다. 발작이 일어난 동안 그토록 소리를 많이 지른 까닭도 그 때문이겠지. 나 자신을 지키고 싶은데 지킬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자신이 선택한 어려운 길, 돌아보지 않음,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까지 완벽해야한다는 강박. 그리고 현실적인 이유로 중도반단한 (돈과 명성에 그림을 파는) 이들에 대한 분노. 그 분노는 자기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와 현실과의 타협을 튕겨냈을 것이다.

아, 미련한 사람.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
책을 읽으면서 그 미련한 열정을 응원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고흐가 미치지 않으려면 무용한 응원보다는 부자 후원자가 필요했겠지!? 성격상 멋진 후견인이 나타나도 미안해서 (고갱 등 더 고생하는 화가들) 더 자신을 질책하며 몰아붙였을 것 같지만. (넘 깨끗해서, 영원히 고통받는 영혼ㅠㅠㅠ)

*

종종 타인의 우직한 신앙과 신념을 비웃기도 하고, 그것에 옳고 그름을 가져다 대려하는 나의 편협이 조금 비루하게 느껴졌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 모든 것을 내어주고 하나를 취하여 붙잡는 이들이 못나 보일때가 있다. 어쩌면 부러운 걸지도.
모든 열정을 낭만화할 필요는 없지만 고흐같은 낭만적 열정가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응원할 수있는 마음을 남겨둬야지.

*

덧, 젊고 열정있는 예술가, 창작자들게 사회적 보장과 지원을 해주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85)
여전히 흡족해 할 수 없었다. 기억 속에는 낮에 본 장관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도저히 그 그림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장면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107)
나는 개로 남아있을 것이고, 가난할 것이고, 화가가 될 것이다. 또 나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169)
오늘 아침, 꽃이 핀 자두나무가 있는 과수원을 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멋진 바람이 불어오더니 다른 곳에서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을 보았다. 그럴대면 작고 하얀 꽃잎들이 햇빛을 받아 불꽃처럼 반짝이곤 한다.
그 자면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순간순간 땅이 진동하는 걸 바라볼 각오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 이 하얀색 화면에는파란색과 라일락색, 노란색이 많이 있다. 하늘은 하얗고 파랗다.

(174)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220)테오
형은 내게 빚진 돈 얘기를 하면서 내게 갚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내가 형에게 원하는 것은 형이 아무런 근심 없이 지내는 거야. 내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건 맞아. 우리 둘 다 가진 게 별로 없으니 너무 많은 짐을 지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 하지만 그 정도만 염두에 둔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지낼 수 있을 거야. 아무것도 팔지 않더라도 말이지.
...하지만 그 많은 그림을 한점당 100프랑으로 계산하는 건 이해할 수가 없어. 그 그림이 100프랑씩에팔리기를 바란다면 그건 아무 가치가 없다는 말이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이 지긋지긋한 사회는 그걸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 편이거든. 하지만 이사실을 알고 있다면 우리도 사회가 하는 대로 하면서 이렇게 말하자고, 우리도 그거 필요 없다고 말이야.
...형이 너무 힘들게 일해 와서 마치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할 때면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를 거야.
다른 무엇보다 난 그게 사실이라고 믿지 않아. 실제로 형은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것도 이 땅의 위대한 사람들처럼 품위 있게. 물론 형이 지나치게 곤궁하게 살아왔다고 느끼지 않도록,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빵을 갖지 못해아프게 되는 일이 없도록 적절하게 내게 미리 경고를 해주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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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데 집중도가 좀 필요하긴 하지만 몹시 재미있게 읽고 있는 책.
근래의 헬(탈)조선 담론과 청년들의 높은 자살이 오버랩되어 혼자 피식거리다가 가져와 본다.
_
때는 구한말, 망하기 초직전의 조선, 지금의 헬조선이 아닌 진정한 헬이나 다름없던 대혼란의 시기. “신소설” 이라는 근대소설이라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전근대 소설이라고도 할 수 없는 괴랄한 소설 문학이 등장한다.

저자는 보통은 “문학적 수준이 결여된 낮은 작품”들로 이해되는 이 소설들이 어쩌면 “조선 말고는 어디에도 없는 희한한 이야깃거리가 나타났기 때문에 시작된 예술장르였는지 모른다.(p.73)”라는 관점을 건넨다. 개연성이라고는 없는 사건들, 도통 정상을 찾아보기 힘든 등장 인물, 그리고 그들의 엽기적인 행동들. 신소설에 나타나는 천태만상은 픽션이 아닌 당시의 조선사회의 진짜 모습이었고, 조선의 20세기 첫 10년은 “홉스적 자연상태”에 가까웠다는 추측.

붕괴된 사회, 분해된 개인. 등쳐먹고 살거나, 죽지 못해 살거나, 그렇게 생존이 목적이 되는 인간들만이 보이는 세상.
그 시절을 살아본 적도 제대로 공부해본 적도 없지만,
난 문득 2010년대의 초반을 떠올리게 된다. 그때의 우리들이 자살을 하거나 탈조선을 외쳤던 것 처럼 구한말의 조선인들도 “최고의 선택은 한반도를 떠나는 것 특히 유학이었고, 그다음은 자신의 개화된 의지를 증명하는 자살(p.132)”이라고 생각했었나보다.

두가지 선택지 조차 가능하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세상을 떠날 수 없는 이들-은 거의 삶을 포기한 채로 악행에 서슴없어지거나, 세상을 닮지 않기 위해 자기를 걸어 잠구고 겨우 자기 하나 정도를 지키는 것에 집중하는 “‘에고 과대증, ‘독불장군’의 비사회적 인물(p.132)”이 되어갔다고 한다. 뭐지 이 뼈때리는 인간 군상들에 대한 전형?!?! 1900년인데.. 100년동안 뭐한거니 우리..

그런 인물들을 만들어내고 그런 인물들이 만들어간 조선은 ^결국^ 망했다!!! !!! !!!!! 정말로 역사는 되풀이 되는 건가. 한번은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희극이겠지? 희극일거야. 희극으로...


“(p.124-6)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에 신소설에 등장하는 최고의 해결책은 한반도를 떠나는 것이었다. (...) 우리 민족에게 한반도를 떠나는 꿈은 이때 공식화 되었고 아직도 해외 유학의 열정은 뜨겁기만 하다. 우리민족의 디아스포라 diaspora는 이미 1870년을 전후해서 시작되었고 (...) 이런 현실에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이 자살을 시도하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유교사회에서 자살은 부모에 대한 최악의 죄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자살이란 갑오경장 이후에 개인의 권리와 자유라는 관념이 등장한 이후에 ‘개화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목숨이란 ‘자기의 것’이라는 생각은 갑오년 이전에는 불가능 한 것이었다. (...) 하지만 평소에 존엄성과 적극성을 증명하지 못하던 여성들이 마지막 단 한번 만이라도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행위가 강물에 뛰어드는 자살이었다. 이 내면의 극적인 꿈틀댐이 바로 신소설이 보여주는 이 시대 여성들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신소설에서 여주인공의 자살은 한반도에서 여성들이 깨어나는 몸부림이었다.”

“(p.132-3)
한반도에는 영웅, 주인공이 먼저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의 배경이 될 현실로서의 자연상태가 먼저 나타나있었다. 근대 사회 또는 근대성이란 다양한 얼굴을 갖지만, 한반도에서는 중세가 망가지고 흩어진 파편들로서의 개인들이 근대로 나타났다. 그곳은 지옥같은 ‘정글’이었으며 거기에서 처음 발견된 근대의 생명체는 속 빈 넝마 인형 같은, 인물성이 부정된 ‘피해자 여성’들 뿐이었다. 그러나 몇년 후 그 지옥의 정글에서 자라난 생명체, 즉 한국인은 생명력 그 자체였다. 생존의 대가survivalist로서의 최초의 한국 근대인, 특히 여성은 누가 창조한 인위적인 피조물이 아니라 그 지옥같은 자연에서 살아남고 진화한 최적fittest의 생명체였다. 그들은 말하자면 인물성이 부정된 껍데기 밖에 없던 피해자에서 그런 존재성이 다시 부정되어 진화한 강한 자의식과 개성을 갖춘 강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나타난 고독한 남성 투사는 가족생활에 무책임하며 능력 없고, 사회정치적 행위의 합리성은 전혀 갖추지 못한 채 이 모든 것에 자존심을 앞세우는 그런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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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조선,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우리 한국인은 태어났다!해방 한국, 한국인은 무엇과도 싸울 준비가 되어있었다!” 라는 부제에 걸맞게 이 예뻐할 수 없는 신소설 속 인물들이 망한 조선에서 어떻게 진화하는 지 더 읽어나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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