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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잔혹사 - 한국 현대사의 가려진 이름들
홍석률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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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근현대사 책 중에 가장 재밌게 읽었던 책.
내일이면 4·19다. 4·19는 보통 ‘학생의거’로 불릴 만큼 학생들의 희생이 도드라진 항쟁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역사의 한 단면. 사실 마산 앞바다에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을 때, 가장 먼저 분개하고 모여들어 행동한 사람들은 우리의 어머니-중년여성-들이었다.


“현장에 있던 미국 공보원 지부장은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있는 군중들 중에는 학생만이 아니라 ‘아주 다양한 범위의 시민’들이 있었고, ‘여기에 참여한 중년 여성들의 숫자와 열기degree에 특별히 충격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p.200)”
“그런데 4월 혁명 직후 출간된 책들을 보면 2차 마산항쟁에서 여성들이 인상적인 역할을 했다고 언급한 경우가 거의 없다. 김주열의 시신을 보고 중년 여성들이 분개했고, 시위가 시작되자 ‘부녀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뒤를 뒤따랐다.’라는 언급정도가 있다.(p.201)”


저자 홍석률은 한 장의 사진 (4월 혁명 당시 할머니들의 데모장면)으로부터 시작해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구석자리에, 아주 작게,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듯이 서술된 여성들의 행적 (p.191)”을 찾는다. 아직 서슬퍼런 한국전쟁시기 학살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1960년 “리대통령 물러가라”는 직접적인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한 최초의 이들은 이 마산의 할머니들이었다.

“할머니 시위대가 마산경찰서 앞에 이르렀을 때 <동아일보>보도로는 약3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할머니들은 경찰과 몸싸움까지 하며 경찰서 안으로 밀려들어가 ‘고문경찰 잡아내라’‘살인경관 잡아내라’라고 외쳤다. 당시 새로 부임한 경찰서장이 할머니들을 만류하느라 눈물까지 흘리며 쩔쩔 맸다고 한다.… 마산의 할머니들이 경찰서 정문 앞에서 몸싸움을 하던 무렵인 4월 25일 오후 3시경 서울 시내 대학교수들이 당시 동숭동에 있는 서울대 교수회관에 모여들었다. 교수들은 이날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교수단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전국 각 대학교수단–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고 적혀있었다. 이승만 퇴진구호는 여기에 없었다. 교수단 시위대가 거리로 나오자 시민들이 급속이 몰려들면서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날 서울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다시 발생했다.(p.213)”

그렇다면 왜 한국 민주화의 역사 속에서 여성들의 투쟁은 지워지고 종종 축소되었을까?

“일단 여성들은 원천적으로 기록에서 배제된다. 어떤 일이 벌어진 후에 상대적으로 긴 시간이 경과하여 작성된 기록들은 이른바 원천적인 기록(1차 기록 또는 당대의 기록), 즉 사건 발행 후 아주 가까운 시점에서 작성된 기록을 바탕으로 그것을 선별하여 작성된다. 이러한 선택에 당연히 권력관계가 작용한다. 주변부 인물들의 기록은 어렵게 기록되어 있어도 선별되지 않는다. 부차적이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도 있는데, 사건이 진행되어 어떤 결과가 발생하면, 그 결과를 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거나, 그러했다고 주장하거나, 그렇게 인정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사실을 기록하고, 나머지 사람들의 활동은 부차화, 주변화 시킨다. 그러다 보니 여성을 비롯한 주변부의 인물들은 또 지워진다. (p.202)”

역사를 서술하는 이도, 항쟁을 통해 권력을 잡은이도 ‘남성’인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의도적 누락이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자기중심성이라고 할까. 그러나 이러한 역사서술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역사발 전의 유의미한 주체였던 다수의 사람들의 힘이 지워져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것은 기록되지 못한 이들이 자신의 힘을 믿지 못하게 함으로써 향후 역사발전 가능성마저 봉쇄한다는 데 있어, 어쩌면 악의적이다.

“주변부에 위치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기록되지 못하고 기억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저변의 잠재적 역량이, 결코 엘리트에 비해뒤지지 않는 다수의 역량이, 이 사회에서 발휘되지 못하거나, 발휘된다 하더라도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관심조차 끌지 못하며 가려지고 지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주변부의 약자를 기록하지 않는 역사는 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잠재적 역량을 실현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고 차별과 무시 속에서 소진시켜버린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역사발전의 가능성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제약하는 것이다.(p.220)”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적히지 않은 역사들의 ‘행간’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석률은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을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서술에서 부차화·주변화되면서 결국 “선거”때를 제외하고는 잘 보이지 않게 된 것이 현재 민주주의의 가장 잔혹한 측면이라며 책의 제목을 “민주주의잔혹사”라고 지었다.

마산의 할머니시위를 비롯해 최초의 민주노조였던 동일방직여성들의 투쟁 (그녀들에게 왜 하필 투척한 것이 ‘똥’이었는지), 빈민에 대한 탄압이자 ‘비국민’으로 간주되며 기본적인 인권도 없이 ‘청소‘당한 삼청교육대의 피해자들의 목소리 등 한국현대사의 기록되지 않은 역사들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부분은 힘이 없어서 적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너무 커서 적히지 않는 역사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정말 가려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불균등할 수밖에 없는 한미동맹의 구조, 그리고 그 구조에서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강한 영향력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힘이 작용할 때 사람들은 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수용하거나 순응하여 여기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도, 정면으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강하고 구조적인 힘이 작용한 부분은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거나 모호해지고, 소략해진다.(p.170)”

5·16쿠데타의 형식적 명분이었던 “정군운동”의 주체들의 시대인식을 꼬집는 부분인데, 장면내각에 대해서는 반발하려 했던 이들이 그 구조가 가능하게 하는 압도적인 힘-비대칭적 한미동맹관계 규정력-에는 오히려 철저히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힘’으로 인식조차 못할 정도의 ‘압도적인 힘’에 대해서도 당대의 역사가(혹은 엘리트)들은 필연인 것처럼 상정해 버려, 서술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꼭 역사만이 그럴까?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나?
박근혜는 옥살이를 해도 이재용은 풀려난다.
북핵에는 개거품을 물면서도 전세계에 가장 많은 핵을 보유한 미국의 핵에는 분노하지 않는다.
상업주의와 물신주의는 비아냥거리지만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다.
미투를 지지하고 성폭력에는 욕을 하지만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너의 잘못을 문제 삼으면서 잘못이 가능하게 하는 구조는 문제 삼지않고,
구조는 문제 삼으면서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하다.

가까운 것은 너무 가까워서
먼 것은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잘 본다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
역사를 읽는 다는 것. 역사의 행간을 읽는 다는 것.

우리들의 읽고 보는 능력이 조금은 더 평등해져야지, 민주주의의 ‘잔혹함’이 조금 덜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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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처는 해석이다.”

오랫동안 나는 마음의 상처에 천착했다. 그 상처의 본질은 무엇일까에 대해 사색했었다. 내게 가장 아픈 상처를 준 사람들. 그들은 공교롭게도 내가 가장 친밀하게 느끼고 있던 (혹은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 관계들이었다. 덧붙여, 그들은 나쁜 사람들도 아니었다. 의심할 바 없이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

어쩌면 정말로 치명적인 상처는 그 모순이었을지 모르겠다. 나를 상처 준 사람들이 하나같이 착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

그들이 나를 위해 했던 말은,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다. 그 진심과 선함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의지가 선하다고 하여 내가 아프지 않은 것 또한 아니다. 나의 아픔은 그 아픔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p.90)상처는 해석이지 그 자체로 폭력은 아니다. 어떤 행위이든 상처의 가능성이 있고, 동시에 어떤 행위이든 상처받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상처는 절대적인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이 날카로운 문장이 눈에 박혀서 한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책에서 설득하는 어떤 주의·주장과 상관없이. 텍스트가 박혀있는 문단의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받은 상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에 대한 물음표가 하루 내내 떠다녔다.
그것은 어쩌면, 더는 이 상처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다는.
‘이제 그 모든 과정들을 상처로 남겨두지 말자라는 마음 어딘가의 반영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착한/ 사람들.

상처는 해석된 것이기에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다. 사실 이미 악의가 없었던. 그들의 의도를 따져 묻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엄연히 내가 해석하는 방식이, 나를 상처 입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더는 아프고 싶지 않기에, 다른 방식의 해석을 - 그러니까, 다음의 삶을 도모해야 한다. 부디, 그러고 싶어졌다.

이 문장을 읽기 위해 이 책을 만났던 것일까..
가끔은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내 멋대로 해석해버린-) 어떤 한 줄의 글이 나를 살리는 것도 같다. 실은, 그 한 줄을 핑계 삼아서라도 살아가고 싶은 것일 테지만. 



2. 


책에 대한 평.

어느 순간부터 자주 등장하는 낯선 단어 ‘폴리아모리 Polyamory’가 궁금해서 읽었다. 폴리아모리적인 욕망이 향하는 것은 ‘여러 명’이라는 숫자가 아닌 어떤 ‘자유로움’에 가깝다는 것. ‘다자 간’연애보다는 ‘비독점’에 포인트를 맞추고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다자 연애’에만 집중하지 ‘비독점성’과는 상관없는 문어발식 사랑(ex. 나는 바람피워도 너는 절대 피지마~♬)은 폴리아모리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 (여러 사람을 소유하려는 모노아모리monoamory일 뿐)등을 배웠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방식이 이렇게나 다양하다는 것에 대해 놀랄 뿐이다. 처음의 설렘보다는 관계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안정감이 내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더 가깝기에- 일상을 계속해서 ‘변용’ 해야 하는 너무도 부지런한 그들의 사랑방식을 무리해서 납득하려 하거나,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을 갖기는 어려울 듯하다. 게으른 자에게 ‘폴리(여럿)는 물론 ‘아모리(사랑)도 피곤한 것. (더더군다나 난 사회성이 좋은 편도 아니라서 하나 이상은 너무 힘들 것 같다ㅠ_ㅠ) 다만, 이러한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니 덤덤하게 아, 그렇게도 존재할 수 있구나 인식하기로.

한편으로는 이미 파편화 된지 오래인 우리 사회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다양한 가족(혹은 관계 맺기) 형태에 대한 실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요즈음의 한국은 ‘가족’혹은 ‘가정’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면한 것 같다. 전통적인 개념의 가족이 더 이상 안전한 관계가 아니라면, 또 다른 관계를 찾아 나서야지.
요컨대, 필요한 것은 상상력. 그리고 용기. 실제 책에도 아래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p.104) 즉 우리는 폴리아모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노아모리만이 의식적인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모노아모리란, 우리가 한 사람만 사랑하기로 ‘선택‘한 그런 폴리아모리이다. 무한한 공동체의 배치를 상상할 수 있다. 당신이 어떤 배치 속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상상하고 실천하고 구성하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지인 몇몇에게 ‘폴리아모리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려 했지만, 입도 떼기 전에 제지 당했다. 생계도 피곤하다며... 사실, 그게 현실 인 것 같다. 

책을 덮고 잠시 모두가 폴리아모리스트인 세상을 생각해보았다. 역시나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빈약한 상상력 ㅠ.ㅠ)




(p.162)
실제로 대중의 욕망이 변화한 것이라면, 그 변화의 기제는 무엇일까. 사실 폴리아모리가 소개되는 시점부터 한국 사회는 가족과 공동체, 성과 사랑에 대해서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이해를 구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p.227)
우리 각자는 하나의 우주와 같다. 그러므로 가족이 된다는 것은, 둘 이상의 우주가 장기적으로 교차한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혼자서는 어느 정도 인력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더라도, 교차하는 순간 그 인력들은 복잡해지고, 별들은 충돌하고, 어떤 공간은 소멸하고, 결국 여러 심급의 카오스로 뻗어나간다. 카오스에 대해 우리는 불안을 느끼는 존재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해체된 카오스 속에서도 오히려 그 카오스 자체에 대해 일관된 긍정을 찾을 수 이는 것, 이것이 바로 폴리 아모리의 가족형태인 폴리피델리티가 꿈꾸는 상태일것이다.

(p.242)
폴리아모리는 윤리적인사랑이아니다. 횡단하는 사랑이며 그 자체로 자연의 사랑이다. 어차피 우리는 사랑하고 있고 사랑하게 되어있다. 올바른 사랑을 찾으러 형이상학을 맴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에게 마주한 강렬함을 그 자체로 기쁘게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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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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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회과학 서적은 앙상하다. 나는 개념으로 짜여 진 그 앙상한 느낌을 좋아한다. 저자 엄기호씨의 책은 사회과학 서적인데도 앙상하지 않다. 그의 글에는 촉감이 느껴진다. 살아있는 것 같다. 등장하는 사람들의 사례가, 그의 시선이 얽혀들어 분석되는 세상이 그렇다. 그는 학문과 생활이 따로 떨어져있지 않은 학자일 것이라 추측해본다. 이런 ‘지식인’이 아직있다는 것은 ‘위로’되는 일이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위로’를 가까스로 ‘박민규의 소설’에서 받았다는 본문 속 어느 학생의 예시처럼. 나는 그의 글에서 요즘 좀처럼 만나기 힘든 위로를 받았고 가능성을 보았다.

이 책은 촛불이 일어나기 전­ - 그러니까 박근혜정권의 통치 하에서 기획되고 집필되었을 것이다. 아주 먼 옛날의 일 같지만,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이야기다. 그 때의 우리는 암담했고, 무력했다. ‘싸그리 망해버려라‘ 많은 사람들의 정념을 엄기호는 ‘리셋‘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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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망치는 것이건 창조하는 것이건, 그 힘으로부터 배제되어 자신은 그저 무기력하게 자기 자리에 앉아있기만 한다고 느끼는 세상이다. 이런 근원적인 무기력감은 세계를 다루고 싶은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그 방식은 가난과 전쟁의 폐허에서 나라를 다시 만드는 ‘재건‘이 아니다. 그렇게 재건한 국가가 부정의하고 불평등하기에 체제의 전환을 꿈꾸는 ‘변혁‘도 아니다.
세계 자체를 원점으로 날려버리려는 ‘리셋 reset‘인 것이다. … 그것이 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유일하게 상상가능 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꿀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아예 현실을 날려버리는 것만이 유일하고 ‘즐거운’ 상상이 된다. … 이렇듯 가장 허무주의적인 것만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미 그 사회의 다른 모든 가능성이 봉쇄되었다는 뜻이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에 기인한 ‘과격한 무기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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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출간되지 마자 읽기 시작했고, 한번은 통독, 한번은 정리 분석하며 읽었고, 이 책만큼은 늦게라도 서평을 써야겠다 싶어 다시 읽었다. 처음에는 한국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인간의 유형 분석에 공감했고, 두 번째 읽을 때는 우리사회에 남은 가능성에 대해 곱씹었고(그 때는 촛불 직후였으므로)- 세 번째 읽고 난 지금은 리셋만큼이나 아득한 과제들이 겁이 난다.

불가능할 것 같은 정권교체를 이뤄낸 이 후에도, 나를 둘러싼 존재들의 배열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저건 아니지 싶은 것이 박근혜에서 김기춘에 대한 판결로, 여혐살인으로, 장군 부인의 갑질로 바뀐것 외에는. 여전히 나의 하루는 기운이 없고, 생계는 언제나 위태로우며, 일상은 벌여놓은 일로 가득차 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리셋‘만큼이나 과격한 변화를 원했던 것은 - 거대한 세상을 포함한 나 자신의 일상이 변화하길 바랬기 때문이리라. 아직 변화가 부족했다면, 남은 에너지를 그러모아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 게다. 다음의 싸움은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저자의 말대로 다시 ‘존엄‘과 ‘안전‘을 위한 투쟁, 그리고 투표소만을 넘어 모든 곳에서의 민주주의, 일상에서의 ‘존중‘과 ‘협력‘을 위한 각자의 결단과 노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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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6)
인간의 존엄이란 생물학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을 넘어 사회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을 의미한다. 사회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이의 삶을 내 삶의 동반자로 여긴다는 말이다. 그의 존엄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를 삶의 동반자로서, 공동세계의 일원으로서 존중한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그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나와 함께 공동세계를 짓고 있는 그의 활동, 그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이 된다. 그의 말을 묵살하고, 그의 활동을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사이로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파괴행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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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중학교 윤리 교과서 이후로는 들춰보지 않았을 - 평등, 존엄, 협력 과 같은- 우리가 다시 되짚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개념‘들을 꺼내어 현실과 대입하며 친절하게 서술하고 있다. ‘방귀보다 못한 말‘만 듣고 보다 ‘개념의 핵‘이 명징한 말들을 읽다보니 고개가 끄덕여지고 생각할 것이 많아졌다. 막연히 걱정이 되었던 촛불 이후의 투쟁- 불투명했던 다음 싸움의 과제들도, 책이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어서 덮고 나니 무언가를 마음먹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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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11-214)
1987년의 민주주의는 군사독재를 끝내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삶의 민주화에는 실패했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교복 입은 동료시민’이기보다는 여전히 ‘잡아야 하는’ 학생이었다. 여성들은 사회 진출을 보장받은 것처럼 보였지만 경제 위기 국면에서는 여전히 가장 먼저 해고를 당했다. 학교와 가정, 공장과 사무실, 우리의 일상 공간 앞에서 1987년의 민주주의는 멈췄다.

민주주의가 멈춘 곳에서 혐오와 폭력, 차별이 독버섯처럼 자랐다. 투표소에서만 평등한 사회에서 사람들의 존엄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성폭력, 비정규직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려먹고 한계 너머로 밀어붙이는 노동 착취, 끊임없이 모욕을 강요당하는 소위 갑질과 감정노동 등.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을 평등한 동료 시민으로 대하지 않는 민주화의 실패를 뼈저리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시작해야하는 지점이 여기다. 우리가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투표소에 표를 찍으러 갈 때만 ‘동료 시민’인 것이 아니다. 대의제 앞에서 멈춰버린 민주주의를 그 너머로 밀어붙여야 한다. 왕을 뽑고 그 왕에게 우리의 권리를 위임한 뒤 다시 삶의 자리에서는 노예로 내려오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다. 차라리 왕의 머리를 잘라버림으로써 왕의 부재 이후 발생하는 모든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이 민주주의다.

... 그러므로 박수는 일종의 서약이다. 내가 앞으로도 당신들의 말을 말로 인정하고 경청하겠다는 서약이 바로 박수다. 그 자리에서 청소년의 말이 들을 만하다고 박수를 친 사람이라면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길거리에서도 그들의 말을 역시 들을 만한 말로 대해야 한다. 그들을 ‘그날만’ 단지 동원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므로 박수를 친 자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앞으로도 내가 그들을 동료 시민으로 대할 것인지 아닌지 말이다.

만일 아니라면 그들을 동원의 대상, 즉 ‘쪽수’로만 여겼다는 것을 고백해야만 한다. 100만이라는 숫자를 채우는 하나의 ‘점’으로만 여겼다고 말이다. 내가 ‘점’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민주주의지만 상대가 나를 ‘점’으로 여기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파괴다. 민주주의는 동료 시민을 동원의 대상으로 여기는 순간부터 파괴되고 부패된다. 그것이 1987년 이후의 민주화가 우리에게 남긴 뼈아픈 교훈이다.

... 나는 우리 사회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협력과 존엄. 광장에서 점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기꺼이 점으로 협력하자. 그러나 광장에서 나란히 점으로 있던 다른 이의 얼굴을 기억하자. 그 얼굴이 가진 나와 평등한 존엄, 나와 평등한 목소리의 힘을 기억하자. 삶의 전 영역에 드리워진 히드라처럼 증식하는 왕의 목을 치자. 만약 내가 왕이라면 기꺼이 내 목을 치자. 그래서 삶의 전 영역에서 ‘동료 시민’으로 서로 만나자. 민주주의가 실패한 곳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
_

*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는 세번 다 울컥했다.
실패한 곳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믿어야 한다‘는 저자의 목소리가 구원 같았고, 힘을 주었다. 사실, 변화의 시간을 감각하는 속도가 너무 짧아서 도저히 ‘역사’가 가능한 것 같지 않은 우리 세대에게,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그의 요청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저자는 ‘시간을 이기고 변화를 보라’지만, 좀 더 긴- 시간 감각을 갖는 다는 것이 어떤 말인지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철저히 파편화된 세계,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휘발되어버리는 SNS속 숱한 정보의 폭격 속에서 일상이 너무 피로하기도 하고. 사실 무엇보다 ‘평등과 존엄-존중‘이라는 관계에 대해 ‘원‘체험이 애초에 없기 때문에. 살아보지 않아봐서 살 수가 없는.

하지만 알고 있다. - 이 책이 주문하는 것은,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어떤 결단을 해야한다는 것.
내가 왕이라면 기꺼이 내 목을 치자. 엄기호씨가 요청하는 것은 그러한 결단이고, 나는 오랫동안 그 결단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기다려왔는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서야 들리는 것일지도) 과연 나는 응답할 용기가 있는가? 꾸물꾸물 8개월이~~ 지나서야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잊어버리지나 말자 싶어서.

서평을 쓰면서 저자의 다음 책인 <공부공부>를 주문했다. 이 책에서 던진 과제들을 이행하는 데 개인이 어떤 노력을 기울 일 수 있는 가에 대한 대답을 주는 책이면 좋겠다.



나를 포함해 역사를 믿는다고 말하는 내 주변사람들을 보면 이들의 감정상태는 ‘조울증‘에 가깝다.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이 보이면 몹시 환호하고 열광한다. 그러다 다시 그 역사가 뒤로가는 것 같은 모습을 보면 끝없이 절망한다. 자기가 역사의 주인 이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역사의 변덕에 따라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끌려다닌다... 우리는 광장의 조증과 삶의 울증을 반복하고 있다. 삶의 울증이 심각할수록 현장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광장의 조증을 갈망한다.... 역사를 믿는다는 것은 이 조울증에서 벗어나 평상심을 회복하는 일이다. 절망보다 좀 더 긴 시간 감각을 가지고 삶의 현장을 보는 것, 광장의 찰나에 흥분하기 보다 좀 더 긴 시간감각을 가지고 광장을 보는 것, 이것이 역사를 믿는 사람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 P5

만능감에 젖은 존재가 모든 것을 자기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책하는 주체는 반대로 모든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돌린다. 유능한 신은 벌하고 무능한 신은 후회한다. 이 두주체에게는 도무지 ‘바깥‘이라는 것이 없다. 결국 모든 것을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를 자책하는 주체는 모든 것을 자기의 탓으로 돌린다. - P49

첫 번째로 냉소다. ... 실패가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상처를 덜 받는다. 냉소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겠다는 단단한 결심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냉소하는 사람들일수록 다른 사람들에게는 냉소를 통해 큰 상처를 준다는 점이다... 이들의 냉소는 협력에 대한 거부다.. 냉소적 주체는 그저 ‘잉여’가 아니라 공동세계를 파괴하는 괴물이기도 한 셈이다. - P27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우리가 터득해야 했던 것이 내가 살아남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기술‘이었다면, 지금 현재 우리가 터득하고 있는 것은 외면을 넘어 ‘타자-세계를 파괴하는 기술‘이다. ... 자기만 사랑하라는 명령에 따라 살지만 자기가 될 수 없는 시대다.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꿈이 무너지며 나타나는 이 무기력이 증오가 되어 타자와 세계를 파괴한다. 이 시대에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이 타자와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 P32

모욕과 무시가 만연하다보니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 존중의 경험이 없는 사회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무관심‘과 ‘무기력‘은 생존 전략이자 윤리적 선택이다. ... 왜이렇게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우리는 살아오면서 끔찍할 정도로 존중받아본 적이 없다. ... 존중에 대한 ‘원체험‘이 없다보니 무시를 당했을 때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방식도 잘 모른다.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체념하면서 분노할 뿐이다. 대신 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앞서말한 ‘소비자‘ 혹은 자신이 가진 조그마한 권력으로 온갖 방식을 동원해서 위세를 부리는 ‘갑질‘이다. ... 당연히 그것은 자신이 만나는 노동자의 존엄을 짓밟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 P115

돈을 주고 그 내용과 흐름을 소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어떤 기술도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이 놀이가 재밌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소비라로서의 평가만 가능하다. 어렸을 때부터 새로운 제안을 하는 협력의 기술이 아닌 평가, 즉 품형하는 기술만 늘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비자는 제안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대의 제안에 품평하는 존재다. 제안과 관련해서 그는 완전히 무능하다.
그러므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이 사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똑똑한 소비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상대의 말을 새로운 제안으로 돌려줄줄 아는 ‘협력의 기술자‘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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