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림과 울림 - 물리학자 김상욱이 바라본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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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을 읽고 생각해야지. 자존감이 핵 쪼그라 들었으니까. 폭풍을 뚫고, 10시 퇴근을 하면서 떠올린 것은 읽다만 김상욱의 물리책이었다. 우주를 생각하면 엄청 거대한 걸 생각하면, 비루한 하루가 아주아주 작게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책은 나를 양자 역학-작고작은 원자와 전자의 운동-으로 안내하였고...)

“(p.23) 138억년 전, 빛이 처음 생겨난 이후 우주는 팽창을 거듭했다. 빛은 점차 묽어지고 우주를 압도한 건 어둠이다. 어둠은 우주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으며, 어둠이 없는 비좁은 간극으로 가녀린 별빛이 달린다.”

어둠을 통과하고 있었다. 저저번주는 정말정말 극강 힘들었고 일주일에 두번 이틀 연속 눈물이 났고, 안되겠다 이대로 가다간 우울증이 돋을것 같아... 그래서 살짝 퇴사의 뜻을 내비쳤다가 잘해왔으니 좀더 버티라는 소리 듣고 ‘맞아 이시국에 답도 없지’ 급 철회했더란다. 그리고 저번주는 저저번주의 뜻을 내비친 댓가로 정말로 그럴거냐, 불편눈치가 보였고 (요즘은 모두가 퇴사를 원하므로 먼저하는 사람이 역적되는 암묵의 눈치게임 중이다...) 설상가상 월요일 부터 건물에 확진자가 생겨서 (한 층이 폐쇄되었지만 나는 정상 출근을 했다ㅠㅠ) 차라리 코로나에 걸리고 싶었다... (아프다는 구실로 회사를 그만둬도 후회없을 만큼 힘들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7월 중순부터였다. 뭔가 100% 다쓰고, 20% 더짜내는 느낌. 스트레스가 심해져서 잠을 설치자 업무하중이 더 심해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른이 되어서 좋은 점은 ‘무한한 가능성(젊음의 특권...?)’이라고 곱게 포장되는 실은 무지 하염없는 삶의 선택지가 정리된다는 거다. 이제 중년을 향해가는 어엿한 어른으로서! 내가 하는 선택은 대체적으로 사지선다형도 아니고 O 아니면 X의 문제인데, 예를들면 출근을 할건가 말건가. O. 이미 하기로 했으면 버스인가 지하철인가. (자가용 없음. 택시비 없음. 전세기는 당연히 없음) 환승2번 버스-지하철. 과 같은 것들. 보통의 나는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 사이에서만 고민한다.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으니까 안하고, 꼭 할 필요 없는 일이라면 해야만 하는 것들을 넘어서고 난 후에 한다.

이를테면 꼭 해야만 하는 출근 길에 그다지 내 인생에 필요는 없을 물리학 책을 읽는 달지. 현실과 밀접한 선택지에서 필요는 없지만 좋아하는 어떤 것을 끼워넣어 must를 변용하는 소소한 기쁨, 가능성 없는 으른의 삶, 나쁘지 않다. 책을 읽다 어떤 구절이 엄청 마음에 든다고 해서 뜬금없이 물리학자가 되겠어, 나사에 들어가겠어!! 가 아닌 응 그렇군 다음번에 해야하는 프로젝트는 루빅스 큐브를 이용해 보는 게 좋겠어, 김상욱 글이 좋은데 추석에는 알쓸신잡3를 봐볼까, 정도를 고민할 수 있는 건 정말 좋다. 만약 읽은 책에 압도되어 우주배경복사와 암흑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졌다면, 너무 힘들었을 거다. 암흑물질 너무 궁금한데 수포자가 이공계 대학 갈 수 있나요? 따위를 네이버에 묻고 있을 어린 나를 상상해본다. 다행이다, 증가하기만 한다는 엔트로피 덕에 내가 과거로 갈 수 없어서. 역시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 좋고, 선택지는 양자택일이 좋다.

“(p.112)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는 것은 결국 형태를 이루는 경우의 수가 작은 상황에서 많은 상황으로 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 ‘경우의 수’에 ‘엔트로피’라는 이상한 이름을 주면 열역한 제2법칙은 “엔트로피는 증가한다”라는 멋진 문장으로 바뀐다.”

OX의 문제로 다시 돌아와서. 나의 우울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회사에서 더 버틸건지, 확 도망칠건지. 일상에 어떤 사고(accident)가 끼어들지 않고서 4지선다형의 상황에 도달하는 건 드물다. 그런데 지속적인 업무압박에 불안해서 잠을 설치는 사고가 생겼다. 안그래도 불안한데, 피곤하니까 더 불안해졌고, 드디어 그만둬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는 순간 생각할 일이 사지선다가 되어 더 불안해져 버렸다. 도망친다면 그냥 막도망을 칠건지, 퇴로를 만들어 놓고 칠건지. 버틴다면 지금과 똑같이 버틸건지,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견디는 방법이 있기는 한지.

생각하면 생각이 많아지니까-, 난 아무 생각없이 ‘3.똑같이 버티기’를 기꺼이 해 볼 요량이었다. 3번을 살면 벅찬 일상 중에 아주 포~도~시 물리학 책(정말 나와는 아-무-상관없는 데 그래서 나를 자유롭게 하는)같은 걸 읽을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풍족하진 않지만 그 자유가 흔치 않아 더 달콤하게도 느껴졌더랬다. 그런데 정말 힘들다는 건, 읽을 시간이 생겨도 읽지 못한다는 것. 틈틈히 만들어놓은 일상의 숨쉴구멍들 틈으로 걱정과 불안들이 꽉 들어차서 숨쉬기가 더 어려워 진 다는 것.

그러고보면 도망치는 것은 정말 용기가 필요하고, 에너지가 필요하다. 내 인생에 몇번의 도망침(그만 버티기)들이 있었는 데. 돌이켜보니 도망을 결단할 때의 나는 진짜 용감했고, 될대로 되라지 나는 나를 믿어(!) 자존감도 있었고, 어떤 말들을 튕겨낼 수 있는 기운도 있었던 것 같다. 이번의 도망에 대한 불타오르는 욕구.....를 봉쇄(?)당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차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 ‘견딜만해서/견뎌야만해서’ 가 아니라 “그래도!!!그만두겠습니다!!”라는 말을 못.....해서 였다는 걸 깨달았다. 아 맞아. 생각해보니까. 난 그만한다는 말 되게 못하는 사람이었어. 그..그랬지. (되풀이 되는 버티기의 악몽이여)

왜 그만둔다는 말도 못하냐, 가슴을 치고 돌아와 도망의 선택지를 지웠다. OX의세계로 돌아 온 것이다. 주말에는 잠을 푹잤다. 움찔움찔 기미가 보이는 이내 찾아올 우울을 그냥 기다리기로했다. 모르지, 축 쳐져서 다니면 그냥 그만두라고 할지도? 도망의 권리마저 회사에게 넘겨버리자. 그렇게 맘을 먹었고 또 월요일이왔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업무압박도 야근도 가스라이팅도 여전한데, 그냥 정말로 괜찮아져 버린거다. 복잡한 생각을 안하게 되니 다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시간과 공간. 빛과 물질. 가장 큰것과 가장 작은 것. 최소작용의 원리와 양자역학. 중력의 법칙 같은 것들. 그렇게 안 읽히던 것들이 잘도 읽혔다. 모르는 데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나는 퇴근 후 제법 긴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집에와서 김상욱의 신간이 들어있는 책 택배상자를 뜯고, 고양이 발톱을 깎아주고, 355ml 맥주를 두캔 따라마셨다.

“(p.250) 물리는 한마디로 우주에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해준다. 우주는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뜻하지 않은 복잡성이 운동에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거기에 어떤 의도나 목적은 없다. 생명체는 정교한 분자화학기계에 불과하다. 초기에 어떤 조건이 주어졌는지는 우연이다. 하루가 24시간이거나 1년이 365일 인 것은 우연이다.”

물리를 좋아하기로 했다.
해야할 일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암 때고 도망가도 물리는 잡지 않을 거다.
못해도 상관없는 데, 의미마저 없다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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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09-05 08: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감상평을 넘어선 진정한 과학에세이에 감동했어요! 힘내시구요, 즐건 주말되십시요!

공쟝쟝 2020-09-05 09:08   좋아요 1 | URL
진정한 과학을 1도 모르는 에세이지만, 일상을 잊는데 물리는 제격이었습니다! 즐거운 주발 보내세요~!

초딩 2020-09-05 0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데도 알 것 같다
떨림과 울림 만큼 마음에 드는 제목입니다 ㅎㅎ

공쟝쟝 2020-09-05 09:11   좋아요 2 | URL
이 책의 제목이 제가 책을 집어드는 데 한몫했어요.. 역시 제목은 중요해~~~~~

2020-09-05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05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9-05 0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쟝님이 오랜만에 길고 길게 써줄 땐 늘 좋지만, 이렇게 힘들고 아프니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ㅠㅠ 아침부터 넘넘 슬픔...떨리고 울림...이 책 나도 봤는데 역시나 기억이 안 나요 ㅋㅋ그런데도 김상욱님 과학공부책 이 책 보고 야심차게 양자공부책까지 샀어!!! 무용한 것에 비비대는 삶...도망치는 기준은 도망치고도 뒤도 안 돌아보고 침도 그쪽으로 안 뱉고 후회없다! 하면 당장 그곳을 나오시구... 빈 주머니와 비우지 못하는 장바구니 등등으로 결국 작은 후회라도 할 거 같으면 존버하는 겁니다...그래서 저는 존버,...존덴버...존버거...주말 푹 쉬고 조금조금 나아지길.

공쟝쟝 2020-09-05 09:16   좋아요 1 | URL
좀 배워야 할 것들이 있어서 ㅠㅠㅠ 존저 존덴버 존버거.........
퇴로를 준비하고, 도망칠거야!!!!!!! 그땐 존버거도 읽을 겁니다.. 히히..

비연 2020-09-05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상욱님의 책을 또 사야 하나... 쟝쟝님이 물리에 관심을 가진다니 왜 이리 기쁜지.

공쟝쟝 2020-09-05 09:17   좋아요 1 | URL
독서 느무 좋아요. 과학책 애송이가 비연님께 의지하며, 아는 기쁨을 누려볼것입니다!

2020-09-05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3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2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2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