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쏜살 문고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이민경 추천 / 민음사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그의 방

그에겐 ‘자기만의 방‘이 있다. 땅콩을 떼긴 했지만 (ㅜㅜ) 어쨌든 수컷이고, 이름이 있긴 하지만 묘권침해의 우려가 있으므로, 편의상 ‘H군‘이라고 부르겠다.

H군에게는 자신의 방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철제 바스켓으로 구성된 수납함. 집사자매들이 원룸 살때 부터 사용한 유구한 전통을 가진 자주 입는 옷들을 쌓아두는 가구(?)이다. 매우 실용적이긴 하나 미관상 좋지는 않은... 철제 바스켓은 4단이었고, H는 아깽이 시절부터 세번째 칸에 들어가 있기를 즐겨했다. 물론(!) 거기에 쌓인 옷들을 다 배아래 깔고 말이다..

˝H야, 거기가 좋아?˝ 도통 안에서 나오지를 않아, 셋째 칸의 옷을 비우고 방석과 천 등을 깔아주었다. H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가 뿜어내는 검은 털들도 무성해졌다. 나머지 칸들이 털에 영향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바스켓에는 옷을 둘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3층을 제외한 나머지 칸에 책을 쌓아두고 잡동사니들을 수납하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귀여운 쿠션 하우스와 들어갈 수 있는 캣타워 등을 사줬지만, H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
아름답지 않은 철제 수납함.. 이사하면서 조금은 더 단정한 방을 위해 두고 올까도 싶었지만, 하루 종일 누워있던 H군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결국 가져왔지.

이번엔 책상 옆에 두고 (컴퓨터 하다가 마음이 내키면 바로 손을 뻗어 H를 쓰다듬을 수 있다. 방금도 쓰다듬었지롱~🤤) 쿠션을 깔아드렸다. 여전히 그는 3층만을 사용한다. 내가 있건 없건, 잘때건 놀때건, 거기서 지내는 편이고, 보통은 드러누워있으며, 때때로 네칸 전체를 흔들며 그루밍을 하신다. (H, 이젠 거기가 좁아보이는 데...) 지금도 자신만의 방에서 턱을 괴고 눈만 꿈뻑꿈뻑 사색 모드인데, 어떤 작품을 구상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니가 거기를 좋아하는 건 알겠따😸!!
*
그래도 나는 종종 상상하곤 해.
좁은 방안에서도 가장 어두운 수납칸에서 웅크리고 있는 네가 아닌,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잔디밭에 누워있는 너. 넓은 들판을 달리는 너, 나비를 잡으려 버둥거리는 너, 민들레 홀씨로 장난 치는 너를.




2. 나의 방

어릴 때는 대가족의 틈바구니에서, 내 책상도 없이 자랐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기숙사에서 지냈고, 고시원 생활을 1년 반 정도 했는데 그땐 관계중독이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같이 술마셔 줄 사람들을 찾아다녔지. 좁아터진 고시원을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 느꼈을 때 쯤 대학생이 된 동생과 함께 자취를 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자매님들과 함께 살았다. 원룸에서 투룸에서 쓰리룸으로.. 하지만 ‘나만의 방’이 생기진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진짜로 ‘자기만의 방’을 가진 것은 석달이 조금 안된 셈이다.
*
약 3년에 걸쳐 인맥의 90%정도를 다이어트했다. (나는 관계에서 내가 먼저 거리를 둔다는 가능성을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거절공포증이 심한 인간이었다.) 한번 정리하기 시작하니 정리들이 절실해졌다. 올해 들어 다니던 일도 그만두고, 오랜 연인과도 헤어지고, 마지막으로는 자매들과 살던 집에서도 독립한 상태다.

여기까지 적고나니 히키코모리 같아 보이지만, 인생에서 단 한번도 제대로 혼자였던 적이 없었으므로 지금이 너무 소중하다. 난생 처음 혼자 사는 기분은... 외로울 줄 알았는 데, 왜 이렇게 가뿐한 느낌이 들지? 허허...

겨우 월세 낼 만큼만 돈을 벌고, 재취업을 위한 교육을 받고, 일주일에 두번씩 요가도 가고, 날이 좋을 때는 산책도 한다. 집에 들어와 청소하고, 고양이 밥주고 똥치우고 털 빗어준뒤, 나를 위한 한끼를 열심히 차려내서 먹고 설거지하면 밤이 오고, 그러면 책 읽다가 잔다. 으어~ 하루가 너무 빠르다.
*
언젠가 이동진 작가가 팟캐스트에서 책을 본인처럼 많이 읽으려면 사람을 안만나면 된다고 했었다. 일을 때려치울 때는 분명히 실컷 책이나 보겠다고 별렀는데, 책만 보기엔 난 잠이 너무 많고(수면시간 만큼은 풍부히.. 확실히 피부가 좋아졌다), 분명히 인맥 다이어트를 했는데도 친구가 많..다.

거르고 걸렀는데도- 중고딩친구, 대학친구, 직장친구, 동네친구, 여타의 친구 친구 등등을 일주일에 한번씩만 만나도 일년이 금방 가네?🤔 이놈의 결혼식은 왜 이렇게 많은거며, 현대문명의 수혜로 인스타 친구와 서재 친구들에게도 좋아요 꼭꼭 눌러줘야 하는 바쁜인생..... ㅋㅋㅋ




3. 자기만의 방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기도 했고,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진짜 ‘나만의 방’이 생기기도 해서 기념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기 시작했다.

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 (현시가 연봉 4500으로 추정.. 넘나 아득하고요😰 이제 겨우 제 방이 생기긴 했는 데 본질은 건물주의 방이겠지요?.)
이미 백 여년 전 그것을 가져 본 여성의 글은 매우 진-했다.

*

“사색의 낚싯대”를 길게 늘어뜨리고 “사물이 그 자체로” 보일 때 까지 조심스럽게 기다리며 자신의 마음에 집중한 흔적이 역력한 책. 그래서 나도 집중해서 아주 천천히 몇번이고 되짚어가며 읽었고, 많은 문장에 두번 세번 밑줄을 그었다.

오래 전에 이 책에 도전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너무 의식의 흐름같고, 글이 종횡무진 정신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몇 페이지 못가서 읽지 못하고 덮었고, 고전은 역시 어렵나보다 단념했던 기억.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읽기도 한다고 했던가. 페미니즘과 관련된 책들을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고, 여성으로서의 나를 돌아보고 있으며, 읽고 쓰는 습관이 조금씩 들어가고, 이제서야 ‘겨우’ 혼자있을 수 있게 된(객관적 조건으로도, 정신적 상태로도) ‘2019년 5월의 나’를 책이 읽었다라고 하면 이것은 비약일까.

허풍을 조금 더 보태 ‘운명처럼’ 읽었다. 버지니아울프가 마치 백년 후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도 되는 것 처럼 느꼈다. 그녀가 조근조근 말해주었다.

*

#자기만의방 ,
어떻게든 너만의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 내라고.
쉽게 감정이입하고 더 쉽게 의존해버리곤 하는 너는 그들의 영향력에서 때때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누구도 침범 못하게 방문을 잠그고, 깊이 충분히 스스로에 대해 사색하라고. “서두를 필요”도 없고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할 필요”도 없다고. (28)
다만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 그것만이 중요한 일”이라고. (155)
그러기 위해서

#500파운드 ,
스스로를 먹이고 입히는 경제생활에서 절대 물러나지 말라고. 다른 어떤 조언과 도움보다 현실에서 물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먼저라고.

“매달릴 팔이 없으므로 홀로 나아가야”하는 네가
언젠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가 습성이 될때 까지
“준비해야한다”고.
진짜를, 리얼리티를 쓸 수 있는, 그런 ‘그녀’들이 세상에 출현해야 한다고. (165)

*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여유와 용기를 갖출 때 까지.
충분히 벌고, 충분히 혼자 있으며, 충분히 읽고, 충분히 사색하고, 충분히 쓰는 것.
그렇게 살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또 그런 여성을 우리 사회는 환대할 준비가 되었는 가.





댓글(8) 먼댓글(0) 좋아요(5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5-28 1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달 저희 독서 모임 책이라 그런지
더 반갑네요.

솔출판사에서 요즘 버지니아 울프 전집
을 새로 내고 있던데... 아마 그 전에
나오진 않겠지요. 아쉽네요.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 쉽지 않은 명제네요.

공쟝쟝 2019-05-28 16:49   좋아요 1 | URL
이 책을 읽다니 고거참 좋은 독서모임이로군요.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누시길..!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기껏 마련하고도 스마트 폰을 떠나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위하여🥂🥂

블랙겟타 2019-05-28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냥이를 키우고 계셨군요 ㅎㅎ
쟝쟝님의 애정이 느껴집니다.
(ღゝ◡╹)ノ♡

저 같은 경우도 다행히 친구는 많지는 않지만(응?) 책만 보기엔 잠을 너무 좋아하구요... 그러는와중에 ‘성의 변증법’은 오구 있구요.. 방 안의 책은 쌓여만 가구요..이 글에서 소개해주신 ‘자기만의 방’ 장바구니에 넣어놨구요...
(*´⌓`*)..

공쟝쟝 2019-05-28 16:51   좋아요 2 | URL
으키키! 저 그거 알아요! 영원히 되풀이 되는 읽어야 하는데.. 읽고 싶은데.. 읽고 있는데.. 다른 책 읽고 싶어지는 독서연옥 ㅋㅋㅋ

독서괭 2019-05-28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냥이들은 참 희한한 장소를 좋아하죠^^; 저 수납장 계속 끼고 사셔야겠네요 ㅎㅎ H군 넘 잘생겼습니다😍

공쟝쟝 2019-05-28 19:48   좋아요 0 | URL
집사에겐 고양님 칭찬보다 행복한 건 없죠!! 잘생겼다는 말에 배시시 웃고 있답니다 ^_^

붕붕툐툐 2019-06-13 0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쟝님 집사님이시네용!! H군 넘 멋져요~(묘권을 지키기 위해 이름은 공개하지 않지만, 얼굴은 당당히 공개하겠다!! 잘생겼으니까!!ㅋㅋ)
쟝쟝님의 독립(?)을 축하드려요~ 책 좋아하는 사람 중에 친구 많은 사람 없다고 생각했는데, 쟝쟝님 말씀 들으니 그것도 편견인가봐요~~

공쟝쟝 2019-06-13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는 책을 안읽던 시절에 사귀어 두었어요 ㅋㅋㅋㅋ ㅋ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