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 무렵의 나는 <제2의 성>을 읽고 있었다. 난 보부아르가 증말 좋다. 하지만 뭐랄까… 보부아르 보단 한나 아렌트가 쫌 더 좋은데 사실 그녀의 단독자 스탠스 때문인 것 같다. 한나 아렌트를 페미니즘으로 독해할 능력은 1도 없고, 여튼 보부아르와 아렌트 이 두 머모님을 이렇게 양쪽에 든대하게 올려두고…  (순위를 매길 수는 없는 대사상가) 현 시점에서 젤로 좋은 페미니스트 사상가를 꼽아보고 싶어서.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분명히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읽을 때는 이리가레에 끌렸는 데, 이리가레 넘나 어려워가지고…
아… 그리고 파이어 스톤도 나(의 급진적인 뇌구조)랑 뭔가 통할 거 같은 데, 또 넘나 어려워가지고… 못 읽음.
언젠가는 그들이 열릴 것이다. 이 독서를 멈추지 말자.


여하튼 현시점(2022년 9월) 에서 내가 사랑하는 페미니스트들 정리해둬야지!!!

1군
크리스테바 (생각하면 짜릿할 정도로 좋음) = 거다 러너 (사이다 먹은 듯 속 시원해서 좋음) = 에바 일루즈 (사는 데 필요한 소금 같아서 좋음)

2군
도나 해러웨이 (신박해서 좋음) = 마리아로사 달라코스따 (성별 분업으로 패기 좋음) = 실비아 페데리치 (난 이탈리아 페미들도 참 좋드라ㅋㅋ) = 주디스 버틀러 (아름다워서 좋음)

3군
이리가레 (포부가 좋음) = 필리스 체슬러 (메시지가 좋음. 요즘 카불… 페이퍼 보면서 더 좋아짐…ㅜㅜ) = 엘렌 식수 좋음(흑… 이분 없었음 글 안썼다) = 마리아 미즈(몰랐음 모르지만 알고는 안 좋아하기 힘든 페미니스트 아닌가?!)

N군 : 아직 못 읽었지만 좋아하게 될 게 틀림 없는 페미니스트 사상가들
오드리 로드(너무 좋을까 걱정스러움, 이분을 좋아하는 페미니스트들 글 다 좋앗음)/ 파이어스톤 (처음부터 영혼이 통한다고 생각했음, 어쩌면 내 마음 속 1위임ㅋㅋㅋ 그저 어려워서 못 읽었을 뿐임ㅋㅋㅋ)/ 사라 아메드(최근에 호기심 급격히 돋음. 감정, 정동 연구 관해서 계속 언급됨. 곧 읽어보마 싶음) / 로지 브라이도티(아… 열린 상처라니요, ㅠ_ㅠ)/ 캐런 버라드 (빌런에 빗대서 죄송한데 타노스 급이실듯ㅋㅋㅋ 일론 머스크 대항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기대 중입니다, 제가 ㅋㅋ )

순위는 언제든 지 바뀔 수 있는 데… 현 시점에서는 줄리아 크리스테바, 거다 러너, 에바 일루즈 입니다!!!! 여기저기 안 들쑤시고 이 세 분만 좀 공략해도 될텐데… 내가 너무 문란한 독서가라서 미안해요 온냐들… 
암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페미니즘 너무 재밌다… 진짜 너무

혹시 주말에 심심한 이웃님들아~
당신의 원 픽 최 애 페미니스트는?!?!




댓글(18) 먼댓글(1) 좋아요(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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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렌트를 페미니즘적으로 독해할 깜냥은 안된다고 썼지만…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2-09-27 23:43 
    어쩐지 찜찜하다. 왜냐면 내가 한나 아렌트를 좋아하는 데에는 페미니즘 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물론 한나 아렌트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이 철학이 아닌 것인가? (나는 명백히 철학이며 가장 선진적인 사상이라 생각하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철학이 아니라고 한국대표 남철학자가 후려치더라. 게을러 게을러 ㅉㅉ 아직도 그러시나?)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이건 그냥 내 뇌피셜 힌트인데. 도나 해러웨이!!! 이렇
 
 
난티나무 2022-09-24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윈픽! 그 어려운 것을 요구하시다니! ㅎㅎㅎ
저는 아직 원픽할 만큼의 책을 읽지 못했기에…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꼽지 않겠습니꽈? 그래서 못 꼽음 ㅠㅠ
그냥 저 할래요. 가장 확실한 페미니스트. 말 뿐이라 하더라도. 윈픽 페미니스트,라고 물으셨지 학자페미니스트라고 묻지 않으셨으니 ㅋㅋㅋㅋㅋㅋㅋ 첫 댓글로 망쳐놓고 도망가는 이 기분 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9-24 16:08   좋아요 0 | URL
그럼 나도 원픽…. 페이퍼 수정할 까요? ㅋㅋ 일루즈 옆에?ㅋㅋㅋㅋㅋ 난티나무 (곧 사상가되실 것 같아서 미리 좋음)

난티나무 2022-09-24 16:14   좋아요 1 | URL
아 나 일루즈 읽어야 하는데…@@ 크리스테바 이리가레도… 뭐 나머지도 마찬가지…네요? ㅋㅋㅋ 책을 읽자!!!!!
사상가는 쟝쟝님에게 더 잘 어울리는 수식어!!!!
(제 댓글은 장난으로 그냥 넘겨주심 감사하겠슴돠 여러분..^^;;)

공쟝쟝 2022-09-25 13:0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맞아요, 일단 읽자!!! 근데 진짜 너무 좋음ㅋㅋㅋ 공부하는 거 행복해 ㅋㅋㅋㅋ 아 페미니즘 진짜 너무 너무 좋네요 ㅋㅋㅋㅋㅋ 저는 사상가보다는 실천가 ㅋㅋ

단발머리 2022-09-24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조 보부아르, 거다 러너, 에이드리언 리치
C조 필리스 체슬러, 케이트 밀렛, 마리아로사 달라코스타, 벨 훅스, 마리아 미즈
A조 정희진 정희진 정희진 정희진 정희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9-25 09:41   좋아요 0 | URL
아…. 이런 정희진은 0군 입니다!!! 당연히!!! 제가 외국 페미 사대주의에 빠져가지고 ㅋㅋㅋㅋㅋ 정희진이 저에겐 0-0 맞심더!!!! 보부아르!! 아렌트와 같은 선상 ㅋㅋㅋㅋㅋ!!! 선생님 없이는 페미 못했죠 ㅠㅠㅠㅠㅠ

공쟝쟝 2022-09-25 09:53   좋아요 0 | URL
그나저나 단발머리님 b조에 거다 러너 방가워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필리스 체슬러도 단발님 덕분에 넘 좋아요 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2-09-25 12:34   좋아요 1 | URL
거다 러너 내 슨상님이야 ㅋㅋㅋ내가 마니아 1위다 보부아르도 정희진도 ㅋㅌ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2-09-25 12:40   좋아요 1 | URL
근데 나는 아렌트 선생님은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아직도 결정 못 함ㅋㅋㅋㅋ미결이당 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9-25 13:02   좋아요 0 | URL
ㅋㅋㅋ 사유하는 태도 만큼은 누구보다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요!!ㅋㅋㅋ 좀 더 페미니즘 적으로 독해할 필요있겠지만 깜냥은 안되고 ㅋㅋㅋ 뭐랄까 거다 러너가 지적한 추상화 작업을 제대로 해내신 분…!!? 저 공부 더해볼 꺼예요!! ㅋㅋㅋ

바람돌이 2022-09-25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 좋지만 그래도 아직 원픽을 정할만큼 읽은게 없어서...... 외국의 페미니스트학자들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좋기도 하지만 아직 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고해서요.
다만 정희진 샘은 그냥 0순위 원픽입니다. ^^

공쟝쟝 2022-09-25 15:03   좋아요 2 | URL
한국 여성들에게 정희진 샘은 축복이죠… 정희진 샘 덕분에 이 모든 여성 사상가들을 알게되었으므로 제 마음속 0순위역시 희진샘이 맞습니다..ㅋㅋ

잠자냥 2022-09-27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 잠자냥이요.

바람돌이 2022-09-27 13:24   좋아요 1 | URL
동의합니다

잠자냥 2022-09-27 13:2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9-27 13:33   좋아요 1 | URL
그럼 나도…

잠자냥 2022-09-27 13:49   좋아요 0 | URL
쟝쟝/ 다부장 아니고?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9-27 14:57   좋아요 0 | URL
이분법을 거부한다. 잠자냥 다부장 그들은 내게와서 공쟝쟝이되었다...
 

0.

쟝님이 논문을 썼다면 꼭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요? 라고 김예란의 글(행복을 향한 그녀들의 움직임 : 디지털 페미니즘의 정동)을 읽던 친구가 메시지를 보냈었다. 과연? 두구두구두구 아마도 그렇다. 미셸 푸코, 사라 아메드, 로지 브라이도티, 주디스 버틀러에 바디우까지 저자가 인용해 온 학자들을 내가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알고 싶은, 읽고 싶은 사람들이다. 즉, 집에 책만 쌓여있다. (읽겠다는 약속, 미래에의 의지, 살아야 하는 이유, 초조함의 원인… 여타 등등)



1.


언젠가 내게 주제가 있다면 그건 고통에서 삶을 건져 올려 다시 복구하는 방법이라고 했었다. 어쨌든 어떤 시간들을 무사히 빠져나와 지금과 그때의 나 자신에게 골똘해질 수록 상처받고 아픈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냥 삶이 구동되는 방식이라서 나의 경우 내 상처를 보편성을 획득한 어떤 언어와 개념들로 상대화시켜서 아픔을 방어해보려는 전략을 취하게 된 것도 같다. 


사회학은 사회를 다루는 학문일테고, 물론 체스판의 말을 두듯 분석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기 문제가 되는 그걸 연구의 방법으로 자신까지 포함해서 분석하는 건… 좀 멋지다. 그렇게 살지 않았을 수 없었던 그 사람들의 태도가 보이면 좋다. 읽고 이해해보려 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식의 치유?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읽지 않은 채로 쌓여가는 책들을 보면 요즘엔 좀 많이 초조하긴 하다. 그렇지만 나는 또 내 삶을 잘 돌보면서 나를 생산하고 재생산할 의무가 있다고 맘을 다잡는다. 가끔 그걸 도외시 한 채로 책 속에만 들어 앉아있고 싶을 때 난 눈물이 나는 것 같다. 그건 좀 슬픈 것이고 슬픈 것은 울면 빠져나간다. 아, 술은 마시지 말자 라고 생각한다. 마취 없이 애도하기.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때때로 나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처럼 느낄 때가 있다. 



2.


“막연한 물음들을 가진 채로 행복에 대한 희원을 품으면서 행복에 대한 앎을 시도 한다. … 나의 행복의 ‘윤리’는 그 가치 판단과 의미 설정이 주체가 자신과 육체적·정신적으로 맺는 관계 안에서 제기, 생성, 추진되고, 주체가 자신을 실행하는 규칙 및 방법 역시 자아의 실천 속에서 형성됨을 주장한 *푸코의 윤리학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김예란은 행복에 대한 앎을 시도하기 위해 푸코의 윤리학을 가져온다. 


“행복의 윤리적 주체는 이미 규범으로 정해지거나 주어진 것과 연관되는 동시에 다른 행복을 욕망하고 그 실현을 위해 고투하는 과정 안에서 형성된다.” 그렇다면 나도 행복하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나의 ‘행복’은 “심히 오염된”, “남용되는 통속적인 행복 개념과 단절”되어야 한다. 시장이 환영하는 상품의 형태여서는 안된다. 쉽게 소비하고 휘발 시킬 수 있는 것이어서도 안된다. 종교나 정치 혹은 제도가 수월하게 약속하는 것과도 같을 수 없다는 건 이제는 제법 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 모든 행복 담론의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아, 저 말은 못 들어 주겠어… 빻은 세계와 물리적으로 단절되기 위해 방구석에 들어 앉았다가… 스마트 폰에 중독되어 버리는 그런 드릅게 취약하고 평범한 인간이다. 저자의 말대로 일련의 행복장치들로부터 나의 ‘행복’을 발명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 그 과정. 그렇다면 나는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등장하는 ‘미투’하는 그녀들. 그녀들 역시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읽는 사람이 남자면 모르겠지만 여자면 안다. 나는 알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데… 그래도 이렇게 말해 놓고 안알랴줌~! 이러면 너무 치사하니까 쫌 써드리면, 그건 내가 맨날 맨날 강조하는 ‘몸’ 때문이다. 이 놈의 몸… 마이 바디… 비루한… 코로나 후유증, 요통, 복통, 생리통, 위염, 장염으로 고통 받는 너무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곧바로 죽겠는 내. 몸. 뚱. 아. 리… (인정하자, 이젠 방탕하게 살 수 없는 몸이 되었어…)



3.


하필이면 나는 한국에서, 여자 몸으로 태어나서, 현 시대를 살아버린 것이다. 그토록 모르고저 모르고저 모르고저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이는 미투에 대한 이해와 동감은 원천적으로 ‘몸’에서 비롯함을 의미한다. 너무나 자명하게도, 미투에서 말해지고 미투를 말하는 것은 바로 몸 그 자체이며 더욱이 그 몸은 폭력과 혐오로 고통 받은 몸이다. 상처 입은 몸들의 발언으로 미투를 이해할 때, 우리는 말과 몸이 상호 결합된 차원에서 공통적으로 지니는 취약성과, 나아가 그들이 공통적으로 발하는 전복적인 정치성을 깨달을 수 있다.” 


이 글이 좋다. 아주 많이 이해 할 수 있다. 물론 ‘전복적인 정치성’에 대해 실눈 먼저 떠지는 몸인 것도 나지만… 그래도 이상주의자 답게 한껏 낭만화해서 “아니, 왜 저 난리래, 여자들 왜 유난이야?”라는 말에 대항해 떠들어 볼 수 있는 어떤 직관이 내게 있는 것 같다. 나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여성들의 몸 반응에 나의 소망을 약간 섞어서 저자가 쓴 단어에 형광펜을 긋는다. 임계점. 


그렇다. 임계치라는 것이 있다. 5천 년 넘도록 당연했던 페미사이드(여성 살해)를 더 이상 당연시 할 수가 없는, 이렇게는 못 살겠는, 두고는 못 보겠는, 내 몸이 못 견디는 임계치라는 게 있다. 모르고저하면 모를 수 있는 메일 바디를 지닌 사람들과 다르게 스마트 폰으로 연결되어서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어버리는 시절에 여성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신당역 스토킹 살해범’ 사건을 조금만 알게 된다면 또 죽었구나, 몸이 덜덜 떨리는 분노와 함께 한껏 비참해지는 무력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세상은 다 그런 거야. 원래 여자로 태어났으니까, 섹스 안해주면 죽을 수 밖에 없어”라는 온 사회의 협박 속에서 살기위해 단단히 더 코르셋을 씌우고 내재에 스스로를 가두는 여자들도 많겠지만. 그런 식의 통치 방법을 능란하게 다루면서 여자들에게 입닥치라고 유난 떨지 말라고 윽박 지르는 게 한국의 정치 현실이고 우세한 목소리처럼 보이지만. 니들이 그러든지 말든지 난리를 피우고 유난을 떠는 것을 안 하면 안되는 몸을 가진 여자들도 있는 것이다. 그녀들 모두를 한번에 없앨 수는 없겠지. 우리는 계속 난리를 칠 거고, 세상은 시끄러워지겠고 암탉이 울었으니 망하겠지. (누구 좋으라고 이딴 세상을 유지 시키나) 그게 버틀러가 말하는 ‘전복적인 정치성’인가?


“이 점에서 몸은 취약성과 행위성을 모두 지니며 “할 수 있음doing”과 “당함being done to”의 상충적 층위들이 한 몸에 얽혀 있다(Butler, 2004: 21-23). 아울러 주체의 취약성은 말의 차원에 있어서도 작동한다. 우리는 무엇에 대해 말할 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말로써 하고, 말은 그 자체가 효과를 발생 시킨다. 몸과 말이 서로 구성하고 작용한다는 점에서, “말하기란 그 자체가 육체적 행위”이다(Butler, 1997: 10)

그렇다면 중요한 점은 이처럼 부득이하고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을 수 없는’ 몸이, ‘홀로’로서가 아니라, ‘함께’로서 무엇을 말하고 행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있다. 누군가의 폭력에 의해 상처 입은 몸은 다른 상처 입은 몸을 위해 애도하고 연민할 수 있다. 타인을 위한 진실한 “슬픔”은 가장 단단하고 격렬한 지지이며 사랑과 연대를 건설하기 위한 행동으로 강화될 수 있다. 이 같은 “육화된 관계성embodied relations”으로부터 현재의 경계를 넘어서 다른 세계를 꿈꾸고 바라는 대담한 “환상”이 생성될 수 있으며, 그 환상에 집합적이고 현실적인 노력이 더해질 때 사회변혁적인 운동력으로 실체화될 수 있다(Butler, 2004: 28).”


내가 겪었던. 미투에 감응할 수 밖에 없는. 그 말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고통과 혐오에 쩌든 여성의 몸, 그것도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비참한 몸’ 에 대해서는 오늘의 페이퍼에는 쓸 수 없을 것 같다. 투 비 컨티뉴 ㅋㅋㅋ (걔 중에 약한 걸로 가장 나 답게 가장 풍자와 해학을 섞어서 써주겠다!!!!! 여하튼 어떠한 수련(?)의 결과로 이제 나는 제법 강해져서 어떤 상처들은 유머와 조롱으로 방어할 수 있어졌다 ㅋㅋㅋㅋ)



4.


음… 나는 푸코를 읽어야 할 이유를 스스로 좀 알고 있다고 보는 편인 데… 이 논문을 읽으면서 조금 더 명확해졌다. 결국 나는 푸코가 제안한 ‘권력’ 개념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올 수 밖에 없는 푸코의 ‘윤리학’이 궁금했던 것 같다. 얼마 전에 써뒀던 글이 있어서 좀 더 다듬어 붙여 넣기 해본다. 


나는 나를 잘 살고 싶었다. 가까이있는 사람들에게서 배워보려고 했더니 자꾸 인생이 이상한 길로 빠졌다. 그래서 사람들이랑 연을 끊고, 틈틈이 책을 읽었다. (문학은 아니었다ㅠㅠ) 나는 아들러식의 목적론(자기계발서)이나 프로이트식의 인과론(심리학)으로 충분해지지 않았을 때, 푸코를 읽다가 뭔가를 알 것 같았다. 내가 이해하는 게 맞나? 더 읽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어려웠다. 그것을 읽기 위해 읽어야 할 것들이 있다고 느껴졌다. 


어쨌든 푸코가 하는 이야기를 내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정리하면 인간의 삶이 복잡해져 더 이상은 권력의 개념을 빼앗아 가져올 수 있는(소유하거나 쟁취할 수 있는 종류의)것으로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거다. 권력이라는 것은 어떤 ‘장’안에서 중력처럼 내 몸 전체에 작용한다는 것. 어떤 상황에 맞닥 뜨렸을 때, 우리는 생각하던 방식으로 생각하는 데에 길들여져 있어 인과 관계를 찾지만(물론 그것은 중요하다!), 현실은 대체로 역학 관계라는 것. 내 몸—그(들)의 몸에 작용하는. (그러니 주로 인간에게 왜를 따져 묻기 전에 그가 어떤 힘과 힘들 사이에 위치해있는 지를 보면 그 사람을 좀 더 제대로 볼 수 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의 가끔은 소름끼쳤던 이면에 대해…)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내 몸 전체를 침범하는 신자유주의-미소지니-능력주의-여타 등등을 어떻게 무력화 시킬건 가. (모두 한꺼번에 무력화 시키려면 죽으면 되는 데, 당장은 죽을 수가 없으니까… 어디까지는 적응하고 어디까지는 반항해볼 건가.) 내 언어로 말하면 나를 다 내어주지 않은 채 나를 어디까지 보존할 건가. 훼손되어 버린 나를 어느 수준까지 복구 시킬 것인가. 그러나 나는 그 장안에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완전히 그것들을 무력화 시킬 수는 없지. 방법이 있을까? … 


… 당장은 모르니까 푸코를 읽어야 한다.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내 시간과 가용한 자원이 활용하는 하에서. 그걸 읽고, 그걸로 써보는 거. 그리고 그걸 고민했다는 흔적들을 남겨두는 거. 훗날의 내가 이걸 보면서 기특해 하도록. 너는 니 삶을 통째로 그것들에게 다 내어주지는 않았어. 내가 그걸 끊임없이 따져 묻는 사람이라 나는 외롭지만, 안 할 수는 없다. 나는. 그런 몸이 되어 버렸으니까. 


음… 나는 그런 훈련을 하고 있다. 조금은 더 혹독하게 읽고 쓰는 훈련. 아직은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그런 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녁에 읽을 수 있을 만큼 낮 동안 무리하지 않고 일하고… (주경야독ㅋㅋㅋ)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쓰고. 나를 포섭하려드는 말들(그것은 내가 읽는 것들도 포함된다)에 나를 홀랑 다 맡겨버리지 않게 내 말과 내 해석과 나만의 각주를 다는 훈련. 미래의 나를 위해 물음표를 남겨두고, 또 미래의 내가 대답할 수 있었으면. 


현 시점에서 나에게 이상형이 있다면(음… 그건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 자신에게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 그것으로 오로지 그것으로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 


삶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 (그렇다… 고백한다… 나는 푸코를 좋아한다… 그는 나를 좋아할 리가 없는 데… 억울하다… 그래서 이 고백은 오늘만 하고 말 것이다 ㅋㅋㅋㅋ)


나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될까. 

당연히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나여, 50살에 만나자.



요컨대 행복의 윤리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수동성, 나아가 주어진 상황을 긍정하면서도 그에 지치지 않고 또 하나의 도약을 시도하는 용기, 이러한 받아들임과 행함의 반복을 거듭하는 충실한 인내와 격렬한 운동성에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음이라는 이 상태, 이 상태가 지속되도록 하는 온갖 노력, 이 찰나의 사건들은 모두 행복의 가능성에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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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09-20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직 읽기 전 ㅋㅋㅋㅋ 책 링크 좀 ㅋㅋㅋㅋ 해주세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2-09-20 11:2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도 일단 하트 누름 아직 읽기 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9-20 11:32   좋아요 0 | URL
앗 죄송합니다!! ㅋㅋㅋㅋㅋㅋ 또 긁붙에 집중하느라 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2-09-2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아직도 책을 안 넣으셨네요. 책 좀!!!! 넣으시고요.

정희진 선생님 강의 갔을 때, 정확히 주제가 생각은 안 나고요. 아무튼 그 말도 맥락에는 없던 말이었는데요.
여성들(구체적으로 여성 노인)만의 책읽기 플러스 여행 모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밑에서 다섯번째 문단의 물음에 대한 답을, 저도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전에는 열심히 일해야겠지만요. 일을, 밥 먹을 정도로 하면서, 남은 시간에 전투적으로 읽기와 쓰기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많은 시간 여행하기를.... 꿈꿔봅니다. 푸코 공부 마치면 연락 좀 주세요, 번호는 010-***1-**1*입니다.

공쟝쟝 2022-09-20 11:50   좋아요 0 | URL
아, 밥돌리느라 책을... ㅋㅋㅋㅋㅋㅋㅋ 안넣었네 방금 넣었습니다..

공쟝쟝 2022-09-20 12: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러려면 체력도 좀 보완을 해야하고요, 여행을 갈 수 있을 정도의 돈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친구!!를 사귀어야하겠지용?ㅋㅋㅋ 할일이 많습니다.
질문을 멈추지 않으면서 명랑하게 잘 살기!! 푸코 공부는 당분간 마칠 수 없습니다… 그는 나와함께 갈 동반자… 대머리…

수이 2022-09-20 1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계속 쉰 이야기 하셔서 쟝쟝님 쉰 진짜 어떨지 궁금합니다 ㅋㅋㅋ

공쟝쟝 2022-09-20 12:00   좋아요 1 | URL
그러려면 일단 비타와 러브레터를 많이 써야합니다…ㅋㅋㅋ

단발머리 2022-09-20 12:05   좋아요 1 | URL
얼레리꼴레리 💕💕💕

초원 2022-09-20 12: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치지 않도록 혹은 지치도록 글을 쓰는 공쟝쟝 님을 떠올리게 하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쉰을 준비하는 모습도 좋아보입니다. 그걸 못해 여즉 헤매고 있는 사람이라 꼭 성공하시길 바라며 ....읽은 흔적 한번 남겨봅니다.

공쟝쟝 2022-09-20 15:1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초원님, (방금 서재 컨닝하고 왔어요!) 헤매시다뇨. 이미 그렇게 살고 계신 분 아니신가요? 그렇다면 이미 성공하신 분!
알라딘 서재에서 무얼하냐는 글을 보았습니다...... 이건 걸 합니다....... 읽지 않고 글만 써 대는 세상에 읽은 티를 내는 짓(찡긋-) 돈안되는 나의 물음표를 소중하게 여겨줄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 (샤라랑~)

다락방 2022-09-20 13: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옳지, 잘 읽는다, 잘 읽고 잘 쓴다. 이 책 읽고 쓸 거 많을 것 같지요? 후훗. 좋은 책은 사람을 글 쓰게 만든다..

공쟝쟝 2022-09-20 15:17   좋아요 0 | URL
아.................... 살기 싫다가도 살고 싶어지는 ................공부의 기쁨이여라... ㅜㅜ

책읽는나무 2022-09-20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코 얘기 나왔을 때 밑줄 그으면서 저도 공쟝님 생각했어요. 저는 글이 알듯말듯 어려워서 공쟝님께 설명해 달라고 물어보려다...ㅋㅋㅋ 한 번 기다려보자!!!
기다렸는데..역시!!^^
근데 공쟝님의 글도 제겐 좀 어렵네요?ㅋㅋㅋ
근데 공쟝님의 사유는 조금 읽혀서 푸코 책이 더 궁금해지긴 합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하면서요^^
앞으로 좀 더 푸코에 대해서 계속 써 주세요.
공부 좀 더 하고, 좀 더 많이 친근해졌을 때...
그때 푸코를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더 친근하게 만들어 주세요~ㅋㅋ

공쟝쟝 2022-09-20 17:38   좋아요 1 | URL
푸코 하면 쟝쟝 떠올리는 어떤 시냅스를 구조화해버린 나다 🤣🤣🤣🤣🤣 푸코 너 알라딘에서는 나땜에 유명하다 아냐 모르냐?

난티나무 2022-09-20 2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오 지금 당장 푸코 책을 펼치고 싶은 마음 들게 하는 글!!!!!!!

공쟝쟝 2022-09-21 10:32   좋아요 0 | URL
읽는다고 읽는 것이 아니랑께요... 그거슨 글씨.. 그저 글씨일 뿐...

난티나무 2022-09-23 18:53   좋아요 1 | URL
저 푸코 책 펼쳤어요!!!! 당장은 아니고 담날이었지만 어쨌든 이 글이 기폭제가 되엇따!!!!
심지어 읽었어요!!!! ㅋㅋㅋ 이거 뭐야 심지어 읽었어요 라니 ㅋㅋㅋㅋ
와 근데 푸코… 세 글자가 떠오르더라고요. 말 장 난 …. ㅎㅎㅎ 장난 아니구나….

공쟝쟝 2022-09-23 20:02   좋아요 0 | URL
천재 난티님 만의 푸코 해석법 기다리겠습니다😝

2022-12-08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09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임신중지 -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 Philos Feminism 8
에리카 밀러 지음, 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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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내가 어디까지 아는 지는 써봐야 안다고 했다. 이번 독후감은 책을 펼치지 않고 내가 어디까지 아는지를 써보자. 감정 각본, 생명 정치 + 선택… 키워드는 이 정도인데 아마 다 못쓸 것이다. 


지금은 휴머니즘(의 오용)을 비웃는 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람을 소중하게 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냐고? 그건 사람의 마음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거다. 자, 여기까지는 하나 마나 한 소리. 그렇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가. 당연히 단백질로 이루어져있다. 즉 마음은 따로 떼내어진 심장이나 두뇌가 아니라 몸이다. 경험에 대한 몸의 반응이다. 내 마음은 내 몸이다. 내 마음을 속이지 않으려면, 내 몸의 반응을 잘 살펴야 한다. (물론 의식하고 속일 수는 있다. 그건 기술이지.) 어쨌든 내 마음을 가장 잘 속이는 것은 나 자신이고 나를 가장 소중하게 대하지 않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 자신이다. 


당연히 내 몸은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내 생각은 내 몸의 일부인 뇌의 특정 부분을 조금 운영하는 작용일 뿐이지만 (뇌과학은 나의 뇌의 대부분이 ‘생각’이 아니라 뇌 자신을 포함한 신체를 운용하는 것으로 그 기능을 사용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이성과 생각이란 그 과정에서의 부산물일 뿐이다.) 오만하게도 우리는 내 생각이 내 몸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자기계발서가 신화라는 증거다. 그러나 나는 자기 계발서 좋아함). 여하튼. 내 마음과 내 몸이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 처럼 내 이성과 감정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근대가 임의적으로 설정해둔 이분법이다. 대개 언어로 하는 생각(이성)을 몸의 말(감정)보다 우위에 두는 것은 어쩌면 부단히 극복해야하는 습관적 사고방식이다. 


다시 돌아가서. “나는 네가 소중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냥 말로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감정*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책에서는 사라 아메드 등의 정의를 인용하지만 오늘은 찾아보지 않고 내가 아는 만큼만 써보기로 했으니까 ㅋㅋㅋㅋ) 나에게 *감정*이란 내가 거쳐온 모든 경험들을 체현하고 있는 내 온 몸이 무의식까지 포함하여 순간적으로 상황을 해색해낸 반응이다. 나의 생각은 지식의 섭취 분량과 종류에 따라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생각 역시 감정의 일부이지만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나의 감정이다. 내 몸은, 내 몸을 타고 흐르는, 내 감정은 고유하다. 중요하다. 소중하다. 


나는 내 몸을 내 감정을 나 스스로를 소중히 대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 내게 그것은 ‘노력’해야하는 종류의 것이다. 


말하는 사람의 몸(얼굴과 표정)을 알 수 없는 가상공간 속의 언어들은 그것이 언어(글씨)일 뿐이라서 의식적으로 기만할 수 있기에 위험하다. 자신의 감정을 잘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그 스스로를 포함해 모든 것을 속이는 글을 쓸 수도 있다. (👉🏻 이것은 그냥. 내가 글을 쓰면서 해보는 생각이다.) 그런데 나는 나를 알기 위해서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글들을 올려두는 것이 가끔 나를 대단히 취약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느끼고, 그러면서 한편으로 내가 믿고 안도하는 것은 내가 쓴 글을 제대로 읽는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을 거라는 거다ㅋㅋㅋ 나는 글을 통해서 상대방을 추측해보고 파악해 보려고 하는 것을 이제 제법 멈췄다. 그러니까 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읽을 뿐. 내가 그런 것 처럼. 또 믿는 것 하나는 2022년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글을 읽지 않는다는 것. 


내가 나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는 것의 밀도를 높여갈 수록 타인을 소중하게 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진다. 물론 너의 몸은 다른 모습의 다른 삶을 살아온 나와는 다른 물질적인 실체이겠지만, 원리는 같다. 내 감정을 소중하게 대하고, 내 감정만큼 너의 감정을 소중하게 대하는 것이다. 십계명에 나와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어쨌든 ‘네 이웃을’ 앞에 ‘네 몸과 같이’ 이므로 나는 내 몸을 더 잘 돌볼 필요가 있다. 그런 윤리로 세상을 대하려면 어쩌면 은둔생활이 필수고, 박애보다는 편애가 편하여… 나는 이렇게 된 것인가.



1.


임신중지. 부제가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다. 당연히 감정에 관심이 많은 나는 이 책에서 ‘감정 각본’이라는 말이 매우 흥미로웠다. 재생산에 얽힌 인간들의 감정이란 말이지🤔 나의 흥미는 제외하고 또 이 역시 내가 이해한 만큼만 써보자. 


번역자는 낙태를 ‘임신중지’라고 번역했다. (난 임신중단 쪽이 좀 더 좋은 것 같다) ‘낙태’라는 언어가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가 유발하는 감정들을 떨쳐내기 위함이었음을 짐작해본다. 아주 건조하게 말하면 ‘임신’이란 이성애 삽입 섹스의 결과로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정자를 여성의 몸에 넣은 남성을 제외한 타인들이 더군다나 국가가 거기에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만약 국가가 내가 임신의 결과로 낳은 아이를 약 95%정도 책임지고 돌본다면, 나 역시도 그런 국가의 돌봄의 산물이라면 예외다. (국가에 가족을 대입해서 넣어보자. 이것이 한국 사회의 웃픈 현실이다.) 


여성의 재생산을 통제-관리하는 대상으로 만들어 ‘효율/합리적’으로 국가를 운영해야한다고 믿는 가부장주의적 무의식을 저변에 깔아둔 사회는 ‘낙태’에 대한 어떤 특정한 이미지를 유포하고, 임신중지 여성들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특정한 감정을 느껴야할 것 같은 상황에 몰린다. (/법- 규범/ 이부분은 잘 모르겠다 건너 뛰기/ 수치감. 대략 규범에서 벗어난 개인이 스스로에게 느끼는 어떤 감정인데. 이것도 기억 안남. 건너 뜀.) 



2.


임신중지에 대해 ‘수치주기’를 하는 사회 속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임신중지 경험에 대해 침묵한다. 내 생각에 사회가 세팅한 수치감을 느끼게 되는 것 보다는 ‘수치주기’에 따르는 작용으로 ‘침묵’의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 더 문제적인 듯 하다. 임신중지는 여성의 1/3이 경험하는 일상적인 일인데도 당사자 여성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문제는 ‘임시중지법’의 논쟁이 오고가는 공적 담론이 펼쳐지는 자리인데(이 책은 주로 오스트레일리아 의회의 토론이 인용되는 데 재밌고 빡친다. 토니 애벗 입을 때리고 싶다. 역시 젠더는 정치의 최종 심급이 맞다), 이 법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절반인 남자를 설득해야한다. 임신을 경험할 일도 경험할 수도 없는 세상의 절반 남자(…국가 역시 남자들이 만들었다)들은 여성들의 임신중지 경험에 대해 지들 입맛에 맛는 감정만 을 취사 선택한다. 


그들에게 임신중단을 좋아하는 여성은 없다. 기구한 팔자 때문에 (미래 혹은 현재의) ‘좋은’ 엄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임신 중단을 선택하는 애통한 여성!!만이 있을 뿐. 그리고 그런 연민과 동정에의 호소는 힘이 세서 실제로 법을 통과시키는 데 중요한 작용을 했다. 임신중단이 공적인 자리에서 논의될 때 사용해 온 이 전략들은 ‘모성’이라는 (남자들이 원하는) 여성성이라는 프레임 자체를 더욱더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즉, 임신중지법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선택한 동정과 연민에의 호소는 역설적으로 여성의 임신중단을 더욱더 수치스럽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어떤. 감정 각본,의 강화. 권력(자본)은 이제 법과 처벌이 아닌 내면화된 규범과 담론으로 인간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감정을 전염시키는 것, 감정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 특정한 감정 만을 지지적으로 수용하는 것, 감정(몸)을 이성(생각)과 분리시키는 것은 중요해진다. 



3.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그 일들은, 그것에 대해 개별의 몸들이 느끼고 감각하는 감정은, 그 남자들이 말하고 받아들이는 그것과 같은 것인가? (물론 감정은 사회의 작동 방식과 따로 떨어져 갈 수 없지만, 동시에 개인의 고유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아니라고 본다. 아니, 확실히 아니다! 아니다. 아니라는 걸 말해야 하고 더 많이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남자들은 자기들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감정을 호소하는 말을 하는 여자들의 입을 틀어막고 싶겠지만. 뭐 어쩔 수 없다. 살려면 말해야 함.  


하여 지난 날 고통을 강조하며 연민에 호소하는 방식을 전략으로 선택한 임신중단의 ‘감정’ 정치란 양날의 검이 되고만 것이다. 임신중지만 그러겠나. 나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나의 고통을 전시하는 전략. 가시적인 성공은 쉽지만 재빨리 나의 힘을 제대로 갖추지 않으면, 더 거센 후폭풍이 반드시 따른다. 아니나 다를까 몇달 전 미국의 임신중지 법인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 되었다. 명백히 퇴행이지만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그러게 *연민*이란 얼마나 주기도, 거두기도 쉬운 감정인지. 나는 연민의 대상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숭배나 추앙의 대상도.)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는 좀 연민한다. 약한 주제에 도움도 구할 줄 모르는 이렇게 생겨먹은 몸으로 사는 것은 좀 짜증스러운 일이다. 나는 도움을 좀 구할 줄 알아야 해.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 해야해. 어떻게? 모르겠다. 노력하자. 


아무튼 일이 이렇게 진행되어 가까스로 성취한 법도 폐지되고 이러는 걸 보니 그런 생각도 든다. 동정심으로 안먹히면 원칙은 하나 인가. 결국 힘 결국 힘? 결국? 여자들아 어떻게 힘을 가질래? 


(그러니까 이 ‘감정의 정치’라는 것 말이다. 고통마저도 취사 ‘선택’하는 이 ‘정치적인’ 감정에 대한 ‘정치적인’ 판단 말이다. 여기에 대한 공부를 더 해야할 것 같다. 감정도 공부해야하고 정치도 공부해야하고 생명권력도 공부해야함. 읽을 것- 사라 아메드, 한나 아렌트, 미셸 푸코. 한숨… 그런데 왜? 안해도 된다. 누가 시킨적 없다. 하지 말자.ㅋㅋㅋㅋ 하지만 50살의 나한테 약속했는 뎅 ㅜ_ㅜ, 울프 선생님?)



4.


대부분의 나라에서 임신중지는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되었고. 그 권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여성 자신의 안녕과 신체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페미니즘적 담론은 실종 되고 말았다. 그렇게 임신중단을 ‘선택’한다는 것이 마치 모성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처럼 등치된 채 (정말 각자 좋을대로의 해석 아닌가)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것은 마치 현대의 여성들이 자기가 스스로 모성을 ‘선택’ 한 것처럼 여겨져보이게 한다.  


- 여: 나 혼자 낳았니? 나만 낳았어? / 남:네가 원해서 낳았잖아! 내가 강제로 낳자고 했니? 

그러나 그것은 정말 ‘선택’인가? 선택일까. 선택. 


- Girls can do anything!

선택. 소녀들이 정말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 페미니즘의 끝인가? 아니다. 절대. 그것은 시작일 수 있으나 그대로 두면 백래시된다. 


임신중단을 둘러싼 ‘선택’이라는 수사 뒤에 숨겨져 있는 감정의 각본들을 추적한 책이다. 생각할 것 들이 많다. 

이 책의 마지막은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함의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끝난다. 


“(250) *선택*에 특정한 감정을 섞으면, 엄격하고 규범적인 정체성(모성으로서의 여성성)이 자유라는 환영으로 희석된다. 오늘 날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무언가를 규제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주체가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비쳐야한다. 그래야 규제가 유지된다. 이 책에서 보았듯, 반임신중지 운동 역시 ‘정보를 갖춘’ 선택이라든지 ‘진정한 선택’을 옹호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런 정책의 목표는 (물론 이게 바로 그 효과이기도 한데) 여성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즉 오히려 *여성이 나중에 후회할 선택을 하지 않게끔 방지하는 정책*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4B란, *선택*이라는 프레임 자체를 넘어설 수 없는 젊은 여자들이 *임신중단*을 *선택*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이성애를 포기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내가 4B인가? 아니다. 나는 비자발적 어쩌다 보니 4B인 것이다. ㅋㅋㅋㅋ 절대 이 프레임을 낙후시키기 위한 대의적 실천이 아니다. 그냥 이렇게 생겨 먹어버린 실존적 선택임. 나는 선택의 프레임에 포섭되지 않은 존재다, 으하하하하! (짠내난다,,,)

 

현 시점에서 나의 결론은 이렇다. 나의 고.유.한. 감정을 소중하게 대하자. 미디어와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감정들에 쉽게 전염되지 말자. 나 자신한테 잘 물어봐주자. 이거 니 감정 맞아? 아, 유튜브 끊어야하나. 아, 넷플릭스 끊어야하나. 그러나 나는 세속의 인간. ㅋㅋㅋㅋ 별 수 없다. 희진샘이 알려주신대로 시간내서 공부나 하자. 하지만 오늘은 이거 쓰고 일 해야 함. 내일은 유튜브 만들고.. 쩜쩜... 응... 내 연휴 다갔네? 근데... 다 쓰고 나니 역시 내가 천재인 것 같다. 정말 나만 몰랐네? 또 나만 몰랐어 ㅋㅋㅋㅋ



덧, 

* 바뀌면 좋겠는 번역들: 임신중단 주체의 탈자연화? / 모성적 무아성 규범? / 태아적 모성… 태아적 모성… 

* 책 읽는 도중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최초 여성총리였던 줄리아 길라드의 임기기간을 다룬 <강력한 여성 지도자>라는 영화 (https://pedia.watcha.com/ko-KR/contents/m5QAwJJ)를 보고 왔는 데, 거기에서 토니 애벗이 나온다. (저메인 그리어도 나오는 데… 내가 아는 그 저메인 그리어 맞는 것 같은 데… 저메인 그리어 좀 이상함.) 줄리아 길라드로 여성혐오 정치하는 수준이 아주 이준석이 보고 배운 것 같았는 데, 그 자식 결국 총리되었다. 딸 셋을 가진 아빠라면서 아주 입으로 자꾸 똥을 싸는 데, 이 책에서도 임신중지에 관한 그지 같은 똥을 많이 싸 놓았다. 아주 나쁜 새끼다. 아스팔트에 얼굴 문대고 싶다. 이렇게 욕을 해줘야 내 감정이 좋아질 것 같다. 푸하하. 

선택으로 환원된 정치는 근본적으로 개별화돼 있다. 그런 정치가 참조하기도 하고 생산하기도 하는 자율적 주체란 허구일 뿐이다.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한, 자발적인 선택의 주체는 철저하게 여성화된 가사노동과 재생산노동에 완전히 의존하며, 이로써 유지된다. ‘여성이 그런 노동을 하는 이유는 스스로 선택했고, 거기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라는 가정을 되풀이 하는 와중에 경제적/정치적/사회경제적 맥락은 제거된다. - P250

오늘날 선택의 주체는, 이를테면 여성이 무한한 선택지를 가졌고, 행복의 대상인 아이에게로 향하기 마련이며, 따라서 그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모성을 선택한다고 하는 식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여기서 그 주체는 여성의 재생산적 신체라는 차원에서, 선택에 깃든 긴장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균형은 꺠지기 쉽다. ‘자율성‘과 ‘선택‘이 있는 곳에 ‘제약조건‘과 ‘의존‘이 있다. 개인의 선택은 정치적이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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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의 종(種)의 복수를 위해 글을 쓰겠어.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3-05-06 21:06 
    1.아니 에르노의 데뷔작인 <빈 옷장>을 읽으려다가 또 실패했다. 작가의 낙태 경험으로 시작하는 책의 첫 페이지는 자궁에 막대기를 집어넣는 묘사가 있다. 에르노의 <사건>을 온 얼굴을 찌푸리면서 읽어버리고 다시는 읽지 않고 싶다 냅다 내던졌던 기억이 난다. 독서 경험은 강렬해서 그걸 지우고자 <레벤느망>(은 <사건>을 영화한 작품이다)을 꾸역꾸역 다 보았는데… 그 이미지들은 더 괴로웠다. 프랑스 영화는 역시 좀
  2. ‘젠더’가 다른 사회적 문제를 은폐하는 데 동원되는 현실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3-12-18 18:01 
    어제는 정희진처럼 쓰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5권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를 재독했다. 작년에 읽을 때는 ‘공부’에 대한 의미를 재의미화하는 부분에 꽂혀서 읽었는 데, 이번에는 논쟁의 구도나 지식의 전제 같은 부분들이 눈에 더 많이 들어왔다. 차피 또 읽을 거라서 독후감을 쓸까 말까 하다가 이번에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부분을 좀 적어두고자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생님이 줄곧 주장해오신 여성혐오라는 단어를 미소지니misogyny로 바꿔
 
 
청아 2022-09-10 16: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출산률 세계에서 최하위라는데 이것이야말로 거짓없는 몸의 반응이겠죠? 이준석 같은 자들이 힘을 갖게 될수록 그래프는 가파르게 치고 내려가겠죠. 그리고 원래 천재는 자기가 천재인거 모르더라구요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9-10 16:38   좋아요 2 | URL
이 감정에 진심인 한녀들아! 사랑한다! ㅋㅋㅋㅋㅋ 아무리 미디어가 슈돌같은 거 틀어줘도 꿋꿋해라 ㅋㅋㅋㅋㅋ
하지만 현실에서는 조금 복잡한게 ㅋㅋㅋ 재생산에 진심인 이민자(난민과 인종문제관한 책을 우리 곧 읽게 되나요?)들이 있죠. 실제로 한국청년들이 원룸에서 코인으로 채굴하는 동안 외국인 노동자들이 저임금의 육체노동 많이하고, 돌봄노동도 여성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하고요. 선진국의 난민 인종문제가 더는 한국에서도 남 일이 아닌 것 같음. 우리의 공부 더 심오해져야합니다! 미미도반님 ㅋㅋㅋ!!
(앗, 그럼 나 좀 천재인거 당분간 모른척 할게요 속닥속닥…)

등롱 2022-09-10 21: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태아적 모성!!! ㅋㅋㅋㅋㅋ 번역 바뀌면 좋겠는 용어들 적극 동의합니다 ㅎㅎㅎ

자기 자신의 감정과 언어를 알아가려면 그조차 공부를 해야하는 존재가 약자라니… 슬프지만 그래도 답은 독서와 공부네요, 하지만 공부는 힘들어도 재밌으니까…!
전 이 나이가 되면 이제 스스로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네요. 아직도 알아가고 공부해야할 게 너무 많아요!

공쟝쟝 2022-09-10 23:02   좋아요 1 | URL
앗! 등롱님의 댓글과도 상통하는 공부하는 기쁨에 대한 페이퍼들을 방금 제가 올렸네요?!?!!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를 돌보는 공부하는 약자가 가능성이고 상상력이지 않을까.
저 역시 제가 이나이 먹고 이렇게 머리털 뜯어가면서 책읽고 있을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고 나니 그렇게 해야만 사는 게 사는 것 같고 그렇습니다 ^^

얄라알라 2022-09-11 16:52   좋아요 2 | URL
저도 태아적 모성 원어가 궁금해서 찾아보았어요 .저는 실은 fetal이 훨씬 익숙한데 저자는 foetal motherhood라 쓰더라고요.
그런데 달리 번역한다면 어떤 용어가 가능할까요? 등롱님께서는 혹시 생각해보신 표현이 있으신지.. 조심스럽게 여쭈어봅니다^^

등롱 2022-09-12 12:05   좋아요 2 | URL
저는 아직 너무 잘 몰라서 표현은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뭐뭐 적이라는 표현보다 더 적당한 단어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개념 번역이라는 게 정의와 맥락 모두를 아울러야하니 어렵긴 하지만요… 원어를 찾아볼 생각은 못했는데 얄라알라님 덕분에 원어를 알았네요!

공쟝쟝 2022-09-12 14:37   좋아요 2 | URL
제가 영어를 못해서 ㅋㅋㅋ ‘태아에 대한 모성‘(대체 그것이 있다는 것이냐? 왜?ㅋㅋㅋ) 정도로 번역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물론 말이 좀 길어지긴 하겠지만요. 아니면 왜 그렇게 번역했는 지라도 일러주면 좋았을 듯하고요. 하지만 저는 역자님을 매우 애정합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언어를 쓰는 공부가 될 수 밖에 없네요 페미니즘은.)
임신중지도. 임신중단!이 뭔가 제 어감상 더 좋더라고요. 임신한 상태를 중단 시키는 거니까. 중지는 좀 더 어렵게 느껴지게 해요. 암튼, 너무 좋은 책이라 번역이 더 안타깝네요 ㅜㅜ 우리는 참 좋은 독자들이다.

얄라알라 2022-09-11 1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 3장 다 읽고, 막상 적으려니, 공쟝쟝님처럼 자신의 언어로 좌르르 자신감 넘치게 쓸 수 없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써봐야 하는 건 가 봐요. 제가 진짜 이해했는지...

<임신 중지>를 꼼꼼하게 다시 읽고 있으니, 어느 때보다 공쟝쟝님의 이번 페이퍼 내용이 쏙쏙 박힙니다. 읽지 않은 책을 다른 분이 쓴 리뷰로 읽는 것과, 내가 시간 들여서 고민해가며 읽은 책을 다른 공부마니아분께서 쓰신 글 읽는 게, 천지차이입니다.

즐거워요. 오늘 <임신중지>로 리뷰를 올려주신 공쟝쟝님, 감사드립니다!!!!

공쟝쟝 2022-09-12 14:39   좋아요 1 | URL
저 공부 마니아?!? ㅋㅋㅋㅋㅋㅋ
얄라님, 저도 고심해서 읽은 책을 공들여서 쓴 리뷰와 독후감을 볼 때 되게 뿌듯하고 좋아서 알라딘을 참 좋아해요!!!
내 언어로 써보는 것(올해들어서 엄두내기 시작한 듯)은 제가 공부를 꾸준히 해왔다는 증거인 것 도 같아서 기쁩니다.

얄라알라 2022-09-11 1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고 저도 공감백입니다.

˝나는 글을 통해서 상대방을 추측해보고 파악해 보려고 하는 것을 이제 제법 멈췄다. 그러니까 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읽을 뿐.˝- 공쟝쟝님 9월 10일 페이퍼에서 뽑은 문장들!!

공쟝쟝 2022-09-12 14:40   좋아요 1 | URL
수줍어서 도망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09-14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빌려놨는데.. ‘태아적 모성‘?? 대체 뭔가요? ㅎㅎ
감정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말씀 맞는 것 같습니다. 약간 결이 다를 수도 있지만 <당신이 옳다>도 생각나네요. 그 감정이 어떤 것이든 느끼는 것이라면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친절한 비댓 링크 타고 왔습니다 ㅋㅋㅋ

공쟝쟝 2022-09-14 17:38   좋아요 0 | URL
ㅋㅋㅋ 여자들이 태아에 모성을 느낀다나봐요ㅋㅋㅋㅋ 남자들은 정자에 부성 느끼나봄 ㅋㅋㅋㅋ
앗,감정말구 선택요 ㅋㅋ 선택은 정치적입니다! 그리고 선택을 선택하는 주체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선택에 의미부여하지 맙시다 ㅋㅋㅋ
 

땀찍찍 흘리고 책장정리 샷을 찍고 난 후부터 오한이 온 것을 시작으로 발열 몸살 인후통 기침 가래(비체ㅋㅋ) 초 스피드로 넓게 잡으면 3박 4일 짧게 잡으면 72시간을 아주 스피디 하고 강렬하게 코로나 바이러스와 몸이 만나 융합ㅋㅋㅋ하고 나니, 몸이 한결 가뿐하고 아주 상쾌하다. (아직 남은 비체들이 재채기로 튀어나오긴 하지만... 기침할 때 빼곤 안아프다) 한바탕 앓고 나니 가벼운 기분, 여러분 알아요?

 

대부분 잤고 깨어있을 동안에는 누워서 책 읽고 북플하고 다시 자고 약먹고 밥먹고 자고 (편했다 마음이) 일어나 밥먹고 약먹고 책읽다 잤다. 잠이 안오면 정희진의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를 읽었고, 읽으면서 아파서 좋았다. 정희진 샘의 가장 띵문이라면 안다는 것은 상처 받는 것’ 아니겠나요? 코로나가 상처내고 있는 몸으로 정희진의 신간을 읽는 것이야 말로 진짜 앎에 가까워 지는 😮‍💨 무튼 ’의 다른 말은 아픔인 것을... 아픈 채로 알아가니까 죽을 것 같고 아주 좋았다.

 

“(19) 어떻게 하면 나를 붙잡고 있는 아는 것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지금 내게 필요한 시각은 무엇일까? 어떤 기존의 언어가 새로운 관점을 방해하고 있을까? 이 과정을 내 몸은 견딜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용기를 내서, 잠깐 각성하는, 쉬운 부활’rebirth 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갱생’regeneration을 할 수 있을까.”

“(155) 융합은 사회가 요구하는 가로지르기이며 앎의 변화다. 여기서 필요한 태도는 아는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다른 입장에 대한 탐구력이다. 평생 확신해 왔던 자기 인식과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 새로운 진실에 맞닥뜨리는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간혹 지적이고 윤리적인 이들은 극심한 혼란을 겪고 '낭인'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변화 시키지 않는다.


나를 붙잡고 있는 아는 것에서 탈출하는 앎.

 

아는 것은 힘이다혹은 세상은 아는 것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흔해 빠져 지구를 해치고 있는 세계 속에서 오랜 기간 나의 위치는 ... 나는 종종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하고 생각하게 될 때가 있는 데 (지금은 여자라서 다행이라고 안도하지만) ... 많이 가르칠 필요 없는, 너무 무식하지는 않은 적당히 알 것 들만 알면 되는 그런 계급, 계층의 여자애였고, 나 역시 그게 맞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공부란 걸 하고 싶다는 마음을 스스로가 알아차려 주지 못했다. (공부를 탁월히 잘했다면 조금 달랐으려나?내가 속한 세계에서 나의 포지션은 알아도 모르는 척이 미덕이었고, 아는 척은 비호감으로 찍히기 좋은 자질이었던 것 같다.

 

요 근래까지도 스스로 알고자 하는 용기를 과계몽이라면서 은근히 탓(물음표가 많은 나를 사람들은 속 시끄럽다며 좋아하지 않았다)했다. 몰랐으면 좋았을 걸하면서 운 적도 많다. 사실 대부분은 그 이유로 운다. 모르고 싶어... 엉엉... 하면서 운다. 무튼 살아오는 대부분 나는 내가 아는 것이 쓸 데가 없을까봐, 삶을 해칠까봐 두려웠다. 나는 너무 알고 싶은 데, 알수록 알면 알수록 외로워지니까. 내가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것 같으니까. 내가 속한 세계의 사람들과 헤어지거나 다르게 살 용기까진 없었으니까. 음. 뭐. 그랬다.

 

그래서 *나를 붙잡고 있는 아는 것이라는 문장은, 지식을 구하는 이들에게 태도의 전환의 촉구하는 이 문장이 주는 어떤 무거움은, =권력으로 작동하는 삶을 살아본 사람들에게 조금 더 와 닿는 종류의 것이지 않을까. 나처럼 최선을 다해서 아는 것을 겁내온 사람보다는? (지금은 지적 오만을 떠는 것이 목표로 바뀌었을 만큼... 다 아는 척하면서 와구 와구 씹어 먹고 싶은 지적 허영의 결정체가 나다. 쿄쿄.) 얼렁얼렁 공부 잘해져서 가까운 미래의 나는 *나를 붙잡고 있는 아는 것’*이 무겁게 느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은 그냥 모든 앎이, 다 통째로 새로워서, 거진 무분별함.

 

어쨌든 (분야를 제도권 교육에서 배우는 일련의 것들로 한정한다면) 나의 지식은 그다지 공부를 하려 한다 거나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덕에 기성의 언어 오염이 덜 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즉 내가 가지고 있던 얄팍한 앎들이 그다지 깊지 않아, 나를 붙잡아 세우지 않았으므로 새로운 지식을 섭취/생산하기 위한 *기존 앎의 폐기*는 상대적으로는 수월한 부분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프게, 혹은 아파야 알게 되는 것들.

에 대해서라면 나도 좀 할 말이 없지는 않은 것이다.

 

세상에는 수월하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있고, 아프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대충 검색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는 백과사전 같은 정보들을 수월한 앎이라고 하고, 알았다고 느꼈던 것을 하나도 몰라지게 되어 버리는 순간을 아프게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하자후자는 지적인 희열이나 쾌감과는 조금 멀다. 그 모름(혹은 몰랐음) 속에서 반성을 할 때도 있고, 배신감에 치를 떨 때도 있고, 나의 순진함을 탓할 때도 있고, 하염없이 겸손해질 때도 있으며... 솔직히 말하자면 대부분 일상의 유지를 위해 합리화(부정)를 한다. 다시 말해 더는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알려면, 아는 걸 다 몰랐다는 걸 인정하고 처음부터 생각을 다시 생각해야하는 그런 앎을 섭취하는 것은 어쨌든 기운을 많이 써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기운도 없고 아프기도 싫어서 알기 싫었는데, 요즘엔 아프더라도 아는 쾌감을 알아버려서 (독학 변태의 탄생...) 뭔가 많이 바뀌어 가지고 지금의 난 모르고 싶은 것일 수록 어쭈? 더 알아봐?하는 식의 긁어파는 악취미를 갖게 된 것도 같은 데, 오늘 쓰고자 했던 것은 이것이 아니고. ㅋㅋㅋㅋㅋㅋㅋ 

 


나에게 가장 아픈 앎을 가져다 준 첫 번째 책은 당연히 정희진이 쓴 <페미니즘의 도전>이었다. (뭐, 이에 관해서는 굳이 쓰지 않아도 다들 비슷하게 겪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인생에서 가장 외롭게 읽었던 책은 <정희진처럼 읽기>였다. 아니, 읽고 난 뒤에 가장 외로워져 버린 책 이려나.그들은 단지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 것이다.”라는 문장 하나로 정희진은 가해자들을 이해하려는 나의 치열한 노력과 지난한 시도들을 가뿐히 중단 시켜버렸고, 난 덕분에 자유로워졌다. 이미 이별했지만 좀처럼 떠나오지 못하던 많은 것들과 더 단호하게 이별했고, 아주 가끔 인생이 무거워질 때 알 수 없는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는 것만 빼면 대체로 나 자신이 잘사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경험은 뭐랄까 체했을 때 손가락을 따기 전에 바늘 앞에서 느끼는 공포와 아픔 같은 거라서... 검은 피 좀 보고 나니까 트름 나오고 방구 뀌고 그럴 수 있게 되어서... 손 따는 거 이제 안 무섭다. 그러므로, 아프게 아는 맛을 두 번 알려주신 정희진 선생님.

 

그렇다 하더라도 <정희진처럼 읽기>를 읽을 때, 나는 외로웠다. 너무 너무 외로웠다. 소스라치게 외로웠다. 그 때 처음으로 진짜 외로움이 뭔지 알 것 같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이 책을 권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었고, 그 책의 문장들을 이야기한들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으며, 너무 너무 이 책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는 데, 이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단.한.명.도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방금 검색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거 읽고 쓴 독후감에 당시 모르는 사람1 알라딘 셀럽 다락방이 오셔서 홀로 외로이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감사했습니다. 푸하하 인생은 정말인지 예측불허) 세상에 정희진의 외로움과 나의 외로움만 존재하는 것 처럼도 느껴지는 외로운 독서였다. 독서의 외로움. 선생님 어쩌라고요. 그러니까 어쩌라고요. 나는 이걸 알고 이제 그냥 살면 되나요? 나는 너무 너무 외로웠지만 외롭더라도 정희진 처럼 읽어야 (어쨌든 이걸 아는 정희진은 살.고.는.있으니까) 다음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심오한가? 아무튼 난 심오했다. 살았고. 읽었다.  

 


세 번째로 동급에 올려놓고 싶어진 이 책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는 읽으면서 진짜로 몸이 아팠다. 아프다는 건 감각 하나하나가 날 서는 것이라 약 없이 견뎠던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첫날 밤은 들숨과 날숨에도 세포가 공기에 쓸리는 것 같았다. 바이러스 덕에 내게 피부라는 얇은 막이 둘러쳐져 있어, 외부 세계와 분리되어 내부가 바깥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형체를 갖춘 채 공기와 접촉하고 있구나....를 알게 되었다. 세상과의 경계면을 고통을 통해 선연히 느끼다니(크으-) 이것이 바로 몸으로 깨우친 앎ㅋ이올시다.ㅋ


 “(167) 한 가지 시각으로는 문제를 파악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다. 아니, ‘해결’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해결인가? 피해의 기억은 투쟁을 통해 재해석할 수 있지만,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나마 자기 갱신만이 해결에 가까울 뿐이다.

“(171) 사회 변화는 지식의 재해석에서 시작한다. 재해석은 기존의 의미를 해체함으로써 의미를 생산, 확대, 다양화하는 과정이다. 크게 두가지 방식이 있따. 개념 내부의 차이를 드러내거나 개념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로서 융합이다.

“(222) 객관성은 중립의 대명사다. 그래서 진리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너의 객관’이 ‘내겐 폭력’인 경우가 많다. 객관은 스스로 선재先在한다고 여겨지지만, *상황적 지식*은 지식이 만들어진 조건을 파고든다. 어떤 조건에서 우리의 인식이 만들어졌는가. 그 과정을 알아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모든 지식은 특정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만사에 적용되는 지식은 없다.

아프게 알게 되는 앎. 머리로 수월하게 깨우치는 지식이 아니라 온몸으로 상황으로 삶으로 겪어가면서 배우게 되는 종류의 앎들. 기성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가 없어 내게 맞는 언어를 절박하게 찾다가 발견해내는 내 숨을 틔워주는 문장들.

 

이번에 앓으면서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먼저는 분별없는 인류로서 언제 한번은 바이러스와 융합·공존(?)해야 하는 데, 시의 적절 맞춤 하게 바이러스가 찾아와주셔서(?) 마음 편히 앓았기 때문이었고


다음은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를 읽으면서 앓았기 때문인 건데.

읽으면서 이런 것들을 새삼 다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 년동안 정희진을 읽으면서 아프고 외롭던 시간을 지나, 그가 써내는 글들과 소개한 책들을 꾸준히 따라 읽고 쓴 덕에 획득하게 된 어떤 이해력과 언어가 지금의 나에게 있다는 것.


내가 글을 쓰게(공부하게) 하는 고통을 맛 보여준 삶의 경험들이 있다는 것. 걔네들은 이제 맞춤한 글자들만 발견하면 되겠다는 듯 자신들이 재해석 될 날(물론 나는 공부를 해야한닼ㅋ)을 기다리며 일종의 자원으로 고스란히 내 몸과 무의식에 남아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함께 읽고, 쓰며, 공부해 온 알라딘의 <여성주의 책 읽기>를 통해서 만난함께 융합을 이야기 해볼 수 있는 도반들이 있다는 것ㅠㅠㅠㅠㅠㅠㅠㅠ (<정희진 처럼 읽기>를 읽을 때 제가 얼마나 외로웠던가요........여러분......... 크흑흑흑 )

 

나는 그래서

웃으면서 ^^

앓았다고 합니다.

 

<페미니즘의 도전> 개정 증보판 머리말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26)이 모든 어려움을 돌파하는 데 여성주의 인식만큼 중요한 것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내 처지가 어떻든 간에, ‘지금, 여기의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양보의 결과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다. 그래도 나를 조금이라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방해하지는 않는 사람들에게, 단 한 사람일지도 나를 격려하는 사람에게, 그래도 변화한 성 평등의 현실 앞에, 이 체제에서도 세상과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살아가는 수 많은 성실한 사람들에게, 육체적심리적 질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지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감사는 예절이나 긍정적 태도, 마인드 컨트롤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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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2-08-14 10: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에궁 쟝님 이제 나아지셨다니 다행이지만 고생 많으셨어요. 몸에 좋은 것 좀 챙겨드시고 쉬엄쉬엄 읽으세요 ^^

저는 <페미니즘의 도전>보다 <정희진처럼 읽기>를 먼저 읽었는데 제 책읽기에 한 전환점이 되었어요 :)

이번 책 얼른 읽고 싶네요 (라고 말만 며칠째)

공쟝쟝 2022-08-14 10:34   좋아요 3 | URL
자가격리 심심해요 ㅠㅠ 그래도 병(?)이어서 아푸니까 난잡하고 게걸스럽게 읽기는 중단 중입니다 ㅋㅋㅋ
<정.읽>이 수하님께도 전환점이었다니, 아아 좋아요, 좋네요 🥲 희진샘 자기 글 읽는 독자 적을 거라고 겸손하시지만 독자 가성비(?)만큼은 정말 최고이신 복받으신 분.
놀라울 정도로 이젠 외롭지만 외롭지 않아요.

라파엘 2022-08-14 12: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쟝님의 서재는 전체 글들이 마치 한 편의 성장서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ㅎㅎ
몸도 마음도 건강이 나아지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후유증이 없도록, 무리하지 마시고 평안한 시간 보내시길 바라요 😊

공쟝쟝 2022-08-15 20:22   좋아요 1 | URL
마흔이 다 되어가는 데... 여전히 성장 중 인 게 좀 남사스럽긴 합니다만 ^^;; 난 나니까~

바람돌이 2022-08-14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 삶과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엎은 경험이 대학입학 광주 이영희선생님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였어요. 쟝쟝님에 비하면 올드하죠. ㅎㅎ
이 때의 경험은 기존의 내 삶과 가치관과 앎의 체계 전체를 부정하는것이어서 충격이 장난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 때의 경험은 이후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는 걸 좀 더 쉽게 할수 있게 했달까 그런게 좀 있는거 같아요. 어쨌든 그 이후로도 쭉 이어진 다른 생각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 온 것이고 앞으로도 그러할테고요.
쟝쟝님 나아간다고 자만하지 마시고 휴유증도 있어요. 저는 코로나 낫고 난 이후 한동안 체력 저하로 허덕였습니다. 우리 정신만큼 몸도 소중하니까 아껴주자고요. ^^

공쟝쟝 2022-08-15 20:27   좋아요 1 | URL
전환시대의 논리....는 80년대 책 아닌가요?.... (바람돌이님 연배가?;;;?) 하하 저도 대학 시절에 빨갱빨갱한 처음보고 참 많이 놀라고 그랬는 데요, 그래도 그건 머리로만 충격이었는 지 그렇게까지 막 외롭고 힘들고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거덩요.(사실은 나 이만큼 똑똑한 사람이야~ 이러면서 즐겼던 것 같기도 해요...) 물론 과거에 목숨 걸고 읽던 분들 만큼은 아녔겠지만, 페미니즘 책읽기는 읽기 시작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관계와 사랑에 대한 개념을 다 땅에 처박아야한다는 걸 직관적으로 느끼게 되는 그런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체력 저하라... 전 미각 상실로 인한 입맛 저하 ㅜㅜ... 꾸역꾸역 챙겨먹긴 합니다만.. 확실히..ㅣㅣㅣ 후유증 후유증 명심하겠습니다 ^^

잠자냥 2022-08-14 13: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만 자를 넘어 이 만자 이상 긴 글 쓴 걸 보니 몸이 아픈 건 다 나았군요?! 자, 이제 공부를 위해 아파봅시다요. 융합하는 공부로 아픈 몸을 겪고 변태의 과정으로 고고!

공쟝쟝 2022-08-15 20:28   좋아요 1 | URL
변태 변태 변태합시다. 비 또 쏟아지려는 모양예요. 자냥 남은 휴일 잘 쉬시고 내일도 무사 출근 하소서!

persona 2022-08-14 13: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헐… 조금 더 충분히 쉬셔서 비체들과 완전히 이별하시길 바랄게요. 고생하셨어요!

공쟝쟝 2022-08-15 20:30   좋아요 1 | URL
네, 오늘까진 남들 쉬는 것 처럼 거의 쉬면서 슬렁슬렁 일했습니다. 완전이별 하고 미각과 후각이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ㅜㅜㅜ 일단 저도 걸렸다능.. 펄손아님 아직이죠?ㅠㅠ 끝까지 살아남아라!

persona 2022-08-15 20:35   좋아요 1 | URL
에고… 얼른 후각과 미각이 돌아오길 바랄게요. 파이팅이요!
저는 코로나보다도 요즘 계속 더위먹고 아무거나 주워먹고 토하고 설사하고 자고의 연속입니다. ㅋㅋㅋ 매해 어떻게 역대급 더위를 갱신하는지 목에만 땀띠 났었는데 올해는 온 몸 땀띠예요.

공쟝쟝 2022-08-15 20:48   좋아요 0 | URL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저도 여름은 체력적으로 항상 힘들었던 것 같아요 ㅜㅜㅜ 자면서 더 지치는? ㅋㅋㅋㅋㅋ 큰물 피해라도 좀 피해가시기를...ㅜㅜ 힝..ㅜㅜ 물 많이 마셔요... 더위 그만먹구 ㅠㅠㅠ

persona 2022-08-15 20:50   좋아요 1 | URL
입추도 지났고 조금만 지나면 더 괜찮아지겠죠. 열대야 줄어든 건 다행인 것 같아요. ㅎㅎ 여튼 힘냅시다. 잘 먹고 잘 자고요. 파이팅!!

단발머리 2022-08-14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해석은 기존의 의미를 해체함으로써 의미를 생산, 확대, 다양화하는 과정. 창조로서의 융합(171쪽)

... 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오히려 더 아련하게 무언가, 무엇인가 멀어지는 걸 느낍니다. 오래오래, 쟝님의 도반이 되고 싶어요.
코로나 후에 몸이 가벼워진다는 내 말, 맞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도 다 나을 때까지 무리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2-08-15 20:35   좋아요 0 | URL
확실한 건 이 책에서 ‘융합‘이라는 단어 만큼은 희진샘이 확실히 재해석 해체 해버리시고, 의미를 생산해버리고 다양화해버리시고, 창조로서 융합해버리신 듯 해요 ㅋㅋㅋ
읽는 건 어떻게든 독서 목록들 베껴가며 따라 읽어볼 수 있겠는 데, 사유나- 쓰기- 만큼은 아아, 희진 샘이 아무리 엑기스 쏙쏙 뽑아 일케 잘 알려주셔도 따라서 도전해 볼 엄두조차 내지지 않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예요. 오래오래 제 도반이 되어주실거죠?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미리미리 감사합니다🙏🙏

등롱 2022-08-15 00: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코로나 얼른 완전한 쾌유하시기를 빕니다!
정희진처럼 읽기 저도 정말 외롭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요 ^^ 왜 그리 독서의 기록도 외롭고 쓸쓸하고 저도 그렇게 혼자서 나누지도 못하고 읽었는지 모르겠어요.
요새 계속해서 북플 타임라인에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가 올라오는데 저도 어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쟝쟝 2022-08-15 20:45   좋아요 2 | URL
여성주의 읽기의 숨은 새멤버 등롱님! 역시도 외롭게 읽으셨구나 ㅜ,,ㅠ 아... 정말............ 외로워서 몸에 발진생길 거 같은 외로움이었........... 그러게요 왜 그렇게 혼자서 나누지도 못하고........... ㅜㅜ ㅜㅜㅜ ... 그런데........ 그렇잖아요 ㅜㅜㅜㅜㅜ 그냥 나눌 수가 없는 게 ... 그거 읽고 외로워지는 것 보다, 그거 나눠보려다가 하나도 나눌 수가 없다는 것을 느꼈을 때의 그 괴로움이 ㅠㅠㅠㅠㅠ 어떤 상처는 개별적이고 내밀하고 너무너무 난해한 거라서 드러내 보이는 것이나 나누는 것 조차도 상상이 가지 않는 경우가 있기도 하죠 ㅜㅜ 뭐 전 이제 인생 자체가 그런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서 읽어보세요. 상처에는 마데카솔 보다 역시 공부가 짱 입니다.

등롱 2022-08-17 17:48   좋아요 1 | URL
바로 사러 갑니다 ㅎㅎㅎㅎㅎ 상처에는 마데카솔보다 공부가 짱! 이거 명언이에요!!!

그레이스 2022-08-15 1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제 괜찮으신지...
속히 나아지시길!

공쟝쟝 2022-08-15 20:46   좋아요 1 | URL
네 너무 괜찮은 데. 제가 사랑하는 커피 냄새를 맡을 수가 없어요 ㅜ_ㅜ
그것만 빼면 속히 다 나아버렸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입니다...^^

시에나 2022-09-16 1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희진 처럼 읽기를 처음 읽고 바로 정희진 선생님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게 되었지요. 저는 그 책 읽고 일주일 아팠어요. ㅠㅠ 모든 문장이 어찌나 저를 난도질하던지....


공쟝쟝 2022-09-16 17:19   좋아요 0 | URL
마이 아프셨쥬?.... 전 정희진샘을 한번도 미워한 적이 없지만 ㅜ_ㅜ (선생님을 미워할 수는 없쥬. 오로지 아프게 알 뿐.)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수 있습니다. 난도질.... 세상이 난도질한 상처에 빨간약 발라주신 분.. 정 희 진.... 저는.. 좀 마니 쓰립디다...ㅋㅋ (ㅋㅋㅋ)
 
가부장제의 창조
거다 러너 지음, 강세영 옮김 / 당대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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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한한 것은 없다. 모든 것에는 끝이있다. 인간의 종말을 믿는다. 

세상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관념은 언어일 뿐이다. 언어는 물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세는 없다. 환생도 없다. 지옥도 천국도 연옥도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종교가 없다.


현 시점의 나에게 가장 유해한 사상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상이 무엇이든) 메시아니즘이다. 이는 무력한 인간일 수록 취약하게 작용하는 사상이라 세상이 혼란할 수록 창궐한다. 정치인의 모습이든 사이비 교주이든 연예인이든 기업가든 이념이든 기술이든 연인의 모습을 하든 간에… 구원자는 멸종할 때까지 재림할 것이다. 인간은 애초에 무력하기 때문이다. 


그 무력함을 통째로 끌어안아버린 채 삶을 도모하는 신앙적 행운은 내게 오지 않았고, 이제와서 인간의 무력함을 알았습니다, 투항하기에 나는 너무 질문이 많다. 신이 있고 없고는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신이 있건 말건 지금 내가 잘 사는 게 내게 중요한 문제다. 잘 사는 것. 그것은 중요하다. 그냥 얻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어쩌면 유신론자들보다 무신론자들에게 훨씬 중요하다.


고통은 지속되지 않는다. 내 생각에 고통의 경험을 되새기고 반복하는 것이 고통의 속성이다. 그래서 고통은 나쁘다. 똑같이 행복은 지속되지 않는다. 언제나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현실을 잊는 자극에 중독된 사람이다. 대체로 행복은 현실과 딱 붙어있는 안녕에 가까운 담담한 상태고, 우리가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종류의 감각과 감정은 행복이 아니다. 그건 취해있는 것. 도피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자에게 행복은 어려운 것이다. 도취를 행복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 현실 직시… 나는 이 단어를 스스로에게 읽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왜? 내가 이상주의자여서다. 

현실 도피… 그게 내 취미다. 그거 없이 못산다. 그래서 *현실 직시* 해야한다. 수시로 안해주면 ‘잘사는 일’과 멀어지더라.


난 현실에 없는 것, 좋은 것,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상정해두기를 좋아한다. 그걸 마음 속 벽 같은 데에 액자 같은 데에 걸어놓고 째려본다. 그러면 내가 어쩐지 그렇게까지 허접한 인간은 아니라는 위안이 든다. 점점 덥고 습해지는 날씨까지 포함해 매일은 현실과의 악전고투다. 달걀하나를 부쳐먹으려고 해도 치열한 (달걀 살 돈을 벌어야하고, 유정란 무정란 부터 닭이 어떻게 컸는지, 몇개를 살 건지, 얼마짜리를 사야 가장 합리적인건지, 사러 온 김에 다른 간식 더 살건지…) 협상을 해야하며, 내가 걱정한다고 해도 아무 영향이 없는 사건 사고들은 수시로 터져나와 휴대폰 알람을 울려대고, 아무리 은둔 생활을 즐긴대도 반면교사가 되어주는 빌런 같은 인간들은 도처에서 출몰한다. 


사니까. 살아가야하니까. 

나는 현대의 도시에 사는 독신 여성이니까ㅋㅋㅋㅋ 



2.


함께, 살아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현대의 도시녀성인 나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내 어깨를 무례하게 치고 가는 놈도, 일 다끝났는 데 결제 안해놓고 잠수 타는 거래처 이사 놈도, 친구랑 소주를 마시는 데 괜히 궁시렁대며 시비를 터는 놈도, 달리기하다 (자주) 마주치는 노상방뇨 놈도, 한남의 사회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나라의 우두머리가 된 서울대 출신의 굥도… 삶에서 마주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그런데, 왜, 가만히 있는 나를 열받게 이들은 다 중년의 남자인가… 그것이 현실이다. 아, 아무리 함께 안살아보려고 노력을 해보아도… 마주침 그것은 불가항력이다. ㅠㅠ


저것들은 좀비야. 무감각한 표정으로(이젠 징그럽지도 않다), 급소를 푸욱 쑤셔서 으드득 돌려서 후벼파 무찌르고 내 갈길을 가자! 라고 해도 숨돌릴 틈이 생겨 그것들이 내게 묻혀 놓은 흔적들을 들춰보면 어김없이 손톱자국 이빨자국이. 난 어디까지 감염된 걸까. 역시 이 세계를 살고 있는 내가 바로 절비(ㅋㅋㅋ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 참조)로 구나. 


현실과의 악전고투 속에서 ‘나 자신이 되는 일’—이것은 나 자신을 잃지 않는 일일 수도 있겠다. 아니다. 어느 정도는 잃어버린 나 자신을 인정하고, 그래도 어디까지는 복구하는 일이다. 원상복구는 어렵다. 꼬매고 찢어진 누더기 같은 흉터들 사이로 돋은 새살을 보면서 오, 인생 좀 살아본 자의 스크라치하며 피식대는 것일 수도 있고. 남의 쭉 찢어져서 잘 아문 근사한 흉터를 보면서 오, 저 정도는 아니지 내적인 안도하며 감상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고—은 내가 걸어둔 이상주의 액자를 한번씩 쳐다보는 거다. 야, 너 안까먹었지? 하는 거. 나는 그렇게 살고 싶고, 이렇게 삶을 설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던 중요한 텍스트가 있다.


좀 읽은 지 오래된 인용문을 가져와본다. 다시 읽으면 20대의 나 처럼 좋을란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학시절의 내가 참 좋아했던 책의 한 구절 이다.

“(59) 오늘의 사학에서는 종말관을 가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같이 인생관이 아주 물질적으로 되어버린 사람에게는 세계의 끝이 온다는 말은 견뎌내지 못하는 사상이다. 그들은 보이는 이 세계 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명을 구원하는 것은 이 사상일 것이다. 그 이유는 인류의 사상은 순간적인 조건 보다 영원한 미래에 의해 규정될 때 가장 원대성을 띠고 건전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가까운 언덕보다 저 무한한 거리의 별이 도리어 확실한 목표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심판은 역사 사실로는 영원히 안 올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믿음으로써만 역사를 바른 방향으로 끌 수 있다. *별을 바라보고 가도가도 별이 있는 곳에는 가지지 않는다해서 별은 거짓이란 말은 되지 않는다.* 가도가도 잡히지 않기 때문에 참이요, 지도 목표가 될 수 있다.

*실현되는 것이 이상이 아니라, 영원히 실현 안 되는 것이 이상이다.* 실현되는 이상은 실현되는 그 순간 죽어버리나 실현되지 않는 이상은 현실적으로 안 되기 때문에 뜻으로는 순간마다, 또 영원히 계속되어 실현이 되면서 이끌어가는 산 이상이다. *종말관은 인류 역사를 이끄는 정신적 항성이다.* (중략) 그러나 만일 그날이 없다면 이 무한히 계속될 고통의 운명에서 누가 능히 견뎌낼까? 종말이 온다는 말은 도리어 인류에게 희망을 약속한다. 더구나 그날이 예측할 수 없이 온다는 데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날이 온다. 언제 올지 모르게 도둑같이 온다. 이것을 믿는 데 역사 추진의 힘이 있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내 이상한 종말관에는 아마 함석헌 옹이있었나보다. (근데 이 책도 여혐심해가지고 아주ㅋㅋㅋㅋ 한국의 역사를 갈보의 역사에 비벼버리면서 갈보 왜 나쁘냐 꼭 필요하다 하는데 님아 그러니까 제발 제일 낮은 자리에 여자 할당하는 짓을 멈춰 제발. 너는 남자로 태어나서 갈보 못하잖아.) 종교 없는 내가 메시아니즘은 경계하면서도 종말론은 좋아하는 이유를 이 책에서 발견해 버림 ㅋㅋㅋㅋ


암튼 종말론 이야기 할건 아니고, 이상주의의 현실성에 대해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여성의 역사적인 종속의 기원을 다루고 있는 책 <가부장제의 창조>를 꼼꼼히 읽으면서 계속 저 구절을 떠올렸다. *별을 바라보고 가도가도 별이 있는 곳에는 가지지 않는다해서 별은 거짓이란 말은 되지 않는다.*


이상주의자인 내가 현실에서 극단적으로 아무리 추구해봤자 놈들이 걱정하는 페미니즘 유토피아는 도래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가진 이상(별) 자체를 조정 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을 현실주의 혹은 현실적이지 않다, 현실 정치에서는… 라는 말로 무모하다고 하는 것이 정말 맞나? 근래에는 이런 물음표들로 좀 구체화되었고 같은 주제로 친구와 운동장을 수십바퀴 돌면서, 모처럼의 책 모임에서는 아주 핏대까지 올려가면서, 떠들었던 것 같다. 별 수 없네, 난 아직도 이상주의네. 


그래서? 



3.


나는 내가 별 수 없는 이상주의자인 게 좋다. 그런 성향이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좀비가 되어서 남의 살점을 씹어먹는 것에 대해 쾌감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채워지지 않은 허기를 해소하고자 애썼을 거다. 나는 허기 해소만이 목적인 텅-빈-인간들을 싫어하고 (어쩌다 그들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내 알바 아니나) 순간순간 쉽고 수월하게 그렇게 하고 싶었을 때, 신앙이 없으면서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던 이유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 현실에서 발견할 수 없거나 어려운 것’들을 내 머릿 속에 어떤 언어/이념 적인 형태로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나는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건, 나한테, 있다. 


현실은 이념이 되고 이념은 현실이된다. 그건 얽혀있고, 시간 속에서 변화한다. 위치에 맞게 다르게 해석되고. 사람에 맞게 다르게 도달한다. 나의 지나친 비약과 언어유희 같은 일반화, 오해를 살만한 거친 단어 선택은 좀 더 좋은 것, 좀 더 이상적인 것을 향한 글쓰기다. 그것은 그냥 글쓰기이지만, 또 그냥인 것만은 아니어서 조금 더 조금 더더 하면서 써보는 용기를 낸다. 언제나 용기를 내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쓰지 않으면 모른다. 나한테 그런 좋은 것을 추구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지. 


그걸 발견해서 나의 정신없는 자아에 이상한 관점들을 또 하나 추가한다. 걔들은 섞일 것이고 내 세계는 한번 더 혼돈의 카오스가 되고. 그런데 나는 정리를 잘하는 사람. 거기에 맞는 언어와 글씨를 또 찾고. 써보고. 나를 부정하고 또 나를 인정하고. 푸하하하. 과정 그 자체는 방법이며 목적이다. 


“(30) 지배의 우산이 제거되고 개념 정의가 여성과 남성에게 공유되었을 때 역사쓰기는 어떤 모습일까? *과거를 평가절하하고 범주들을 뒤집어 엎고 질서를 혼란으로 대체하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단지 자유로운 하늘 아래로 나가설 것이다. 하늘이 어떻게 변하며 별은 어떻게 떠오르고 달은 어떻게 도는가를 관찰할 것이고, 세상의 모습과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 속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설명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아마 더욱 큰 풍요로움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류의 잣대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임을 안다. *남성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중심이다*. ..... 어쩌면 이전에 두 가지 배역이라는 부담을 져왔던 사람이 이제 더 자유롭게 순수한 존재의 즐거움을 연기하고 경험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직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세상의 먼 변방까지 항해했던 탐험가들처럼, 우리는 우리가 발견하게 될 것을 설명해야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시작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과정 그 자체는 방법이며 목적이다.*”



4. 


사실 페미니즘 정치…까지는 잘 모르겠다. 나 하나를 이 정도의 페미니스트로 만드는 거 그거 하나도 엄청난 고통(과 희열)을 수반하는 지난한 과정들이었기 때문에. 아, 나는 그냥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이구나… 를 아는 것 만으로도 이토록 훌륭하게 똑똑해져 버렸는 데ㅋㅋㅋㅋ 이걸 막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하려고 생각하는 순간 막…막… 어후… 막막해. 역시… 못할 거 같다. 그냥 하던대로 열심히 알라딘에서 여성주의 책읽기 열심히 해야지. 


내게 성경 책은 없지만 페미니즘을 계속한다면 (아마 계속 하지 않을까?) 이 책을 성경처럼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버려서는 안되는 여성주의적 원칙들을 아주 확고하게 쥐고 있는 책이다. 특히 마지막 장이 그랬다. 이상, 별, 항성. 그러니까 그건 좀 움직이면 안되고 확고해야 하것 같다… 그걸 확고하게 설정해서 딱 박아 놓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 어느 정도의 현실적 타협은 해야하지만 ‘페미니즘’의 본질 자체를 바꿔버려서는 안될 것 같다.


“(396)우리는 반드시, 최소한 당분간은 여성중심적(woman-centered)이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가능한 한 가부장적 사고를 떠나야 한다.”


백래시. 분리주의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던 일부 강단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라고 말하면서 어느 순간 페미니즘적 원칙을 져버린 것 같다. 일전에 모 교수의 주디스 버틀러 강연을 들으면서 했던 생각이다. 응? 저게 페미니즘이라고? 


요즘엔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라니… 그건 페미니즘일 수 있나? 대선을 거치면서 나의 그런 생각은 소위 진보 진영의 페미니스트 학자 집단들이 하는 (…ㅜ_ㅜ 정희진 까지도…) 말들을 듣고 보면서 점점 더 혼란해 졌는 데… “(394)제 각기 머릿 속에 최소한 한 명의 간직된 훌륭한 남성들”을 두고 있어서 그러신 지… 오로지 독학으로 독서로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나는, 종종, 저게 왜, 페미니즘인건지 당최… 모르겠는 상황들이 현실에서 펼쳐지니까… 그래서 내가 하는 공부가 페미니즘 맞아요? 이럴 때가 있었는 데… 그 분들이 하시는 게, 되려 페미니즘적이지 않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좀 했다.


아무튼, 이 책에서 배운 몇가지 기준들을 원칙삼아 많이 배운 지식인 여성 페미니스트 교수라고해서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지 말 것이며, 이 책이 필요없어지는 날까지는 이 책에서 정리해준 페미니즘적 원칙들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396)가부장적 사고의 바깥으로 나가기가 의미하는 것은, 사고(thought)의 모든 알려진 체계를 향해 회의적이 되는 것이며, 모든 가정들과 서열짓는 가치와 정의들에 대해 비판적이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것, 여성의 경험을 신뢰함으로써 누군가의 진술을 검증하기. 그런 경험은 대체로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거나 무시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지식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자신 속에 깊숙이 들어 앉아있는 저항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페미니즘이 내게는 비교적 건강한 메시아니즘으로 작용해왔던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무력한 이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부여 잡은 사상(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ㅋㅋㅋ)이긴 한데, 이게 안내하는 길이 더 혼탁하고 더 엉망진창이고 세상에 끈질기게 남아 실낱 같은 안전을 담보하는 마지막 구원 담론(낭만적 연애…와 가족…)마저 걷어차버리는 그런 사상이었던 거라… 난 부득불 나 자신을 더 굳걷히 부여잡을 수 밖에 없었고, 뭔가 ㅋㅋㅋㅋ 졸라 멘탈이 강해짐 ㅋㅋㅋㅋ


나. 여성인 나. 일하는 여성인 나. 좋은 학벌과 번듯한 직장이 없는 주제에 감히 결혼도 하지 않으려는 나. 심지어 돈을 버는 것에도 썩 진심이 아닌 나(노력을 안한 것은 아니었다 진쉼~;;;), 로맨스에 휴머니즘 마저 비웃고, 세상을 따돌리는 아싸가 되어 은둔생활을 하는 와중에… 이렇게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고 나도 아무도 안 사랑하는 채로 늙어가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했는 데 이미 그 상태라는 것을 알아버려서 아… 이 상태를 유지하면 되는 거구나를 제대로 깨달아 버린 나는 믿을 것은 나 자신 밖에 없다!!! 라는 현실 직시를 하고 페미니즘을 뼈 아프게 섭취하며, 아무도 안사랑해주면 나나 나를 사랑하자! 아주 건강하고 자립적인 존재로 재탄생해 버림😩


“(391)역사적으로, 생각하는 여성들은 즐거움·일상성·즉시성을 가지고서 한 여성의 삶을 사는 것과, 생각하기 위해 한 남성의 삶을 사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교육받은 수세대의 여성들이 한 선택의 대가는 잔혹하고 컸다. 다른 여성들은 의도적으로 혼자 살거나 혹은 다른 여성들과함께 삶으로써 성성별체계(sex-gender system) 바깥에 사는 것을 선택했다. 여성들의 사고에서 가장 중요한 진보 중 일부는,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위한 개인적 투쟁이 자신의 의식 속에 녹아든 여성들에 의해 우리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런 여성들은 대부분의 역사적 시간 동안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도록 강요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일탈적‘인 사람으로간주되었으며, 그 때문에 그들의 경험은 다른 사람들에게 일반화되기가 어렵고, 또 영향을 미치거나 인정을 받기도 어려웠다. 왜 체계 건설자 중에 여성은 없는가? 그 이유는, 자신의 자기(self)가 일반칭 (generic)에서배제되어 있을 때 그 사람은 보편적인 것들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추상적 사고의 구축이라는 인간적 사업에서 여성을 배제함으로써 생긴 사회적 비용은 한번도 계산된 적이 없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취해진 행동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명명하고,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우리가 그 사업에 참여했던 방식을 설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생각하는여성들에게 그 비용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강간이 우리를 겁에 질리게 하고 우리를 종속상태에 머물러 있게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는 것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또한, 비록 고의는 아니었지만, 우리가 우리의 정신에 대한 강간(rape of our minds)에 참여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페미니즘. 나 자신이 되는 것. 나 자신의 경험을 신뢰하는 것. 나 자신을 구하는 내가 되는 것. 나의 섹슈얼리티가 아닌 나의 노동으로 나를 생산하고 나를 재생산하는 것. 적은 임금이나마 노동을 하는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그것만 해도 되었던 남자들이 만든 역사와 문자와 철학을 시간내서 공부하면서 조롱하는 것. 나의 가부장적 사고(남자 못잃어)에 대해서 비판적 검토를 계속하는 것. 그게 어쩔 수 없는 나라면 나를 조롱하는 것. 여자들이 쓴 글을 읽는 것. 여자들을 독려하는 것. 여자들을 사랑하는 것. 나를 사랑하는 것. 생각하는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것. 나의 경험을 신뢰하기 위해 노력하는 내 글을 쓰는 것. 나는 물리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이제 더 이상은 소수가 아니라는 것을 힘으로 삼는 것. 인류의 절반 여성으로서의 나의 추상적 사고를 구축하는 것.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내게 남은 질문은… 인류 재생산이네…? (응?) 

매달 피를 흘리는 나는 재생산을 포기 했을까? 아니, 어쩌면, 아니? 어쩌면. 어쨌든. 아마도 포기한 것 같은 데… 내가 가장 사랑했던 존재는 엄마였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비혼을 마음 먹으면서도 끝끝내 포기 안되던 것이 엄마가 되는 거였던 거 같다. (어쩌면 엄마가 되고 싶어서 결혼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삶에 결정적인 것이 될 중요한 결단은 상황이 닥쳐야 내려지는 것이라서 아마도 나는 결단을 내리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재생산. 하지 않겠지. 



5.


그러니 현 시점에서의 나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살면… 내 세계는 끝난다. 내 대에서 완벽히. 기후위기든 핵폭탄이든 인류는 멸종할테지만 (여기에 더 좋은 세상으로 가자라는 상상력으로의 이상주의는 절대로 발동하지 않는 데…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보겠다…) 이렇게 되면 그런 인류의 종말과도 정말로 나 자신과는 상관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미래는 알 수 없으므로 당장 내일이 나 자신이라는 유한한 종족이 끝나는 날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런 폐색이 짙은 세계관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요? 라고 물어보면 대답은 간단하다.

무슨 소리!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은 명랑하게 삽니다.😉


여자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명랑한 일인지 일단 살아보겠습니다.

살다가 이토록 똑똑한 내가 너무 싫고 힘들어서 미춰버리면 그건 다 여성 종속 5천년의 가부장제 탓ㅋㅋㅋㅋㅋ

내가 졸라 잘살고 엄청 근사하면 해질 수록 그건 페미니즘 탓 ㅋㅋㅋㅋ

남자를 잘못만나서 망하는 여자는 많지만 남자를 안만나서 망하는 여자는 없다.

내가 망하면 그건 남자 탓 내가 안망하면 그건 여자 탓.


나는 나자신이라는 신을 명랑하고 건강하고 심각하게 주조하는 지적 오만을 지속해볼 생각입니다. ^^


“(397) 가부장적 전통 속에서 훈련된 사고인 우리 자신의 사고에 대해 비판적이 되기. 결국, 그것은 지적 용기, 즉 혼자 우뚝 설 수 있는 용기, 우리에게 닿는 것보다 더 멀리 뻗으려는 용기, 실패를 감수하는 용기를 발달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사고하는 여성에게 가장 큰 도전은 안전과 승인을 추구하는 욕망으로부터 그 모든 것 중에 가장 ‘비여성적인’ 자질 —세계를 다시 질서짓는 권리가 스스로에게 있음을 주장하는 최상의 자기 과신인 지적 오만—로 옮겨가려는 도전이다. 신을 만드는 자의 자기과신, 남성 체계건설자들의 과신으로.”


덧, 남들은 메소포타미아가 힘들었다는 데... 난 정말 기독교의 성경을 몰라서 힘들었다...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정말 잼난 책이었음. 강추강추! 별 열개! 

‘가부장제의 성립’ 기간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대략 기원전 3100년부터 기원전 600년까지 약2500년에 걸쳐 전개된 과정이다.

😉 그리고 그것은 5000년 째 현재 진행형이다. - P22

시작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과정 그 자체는 방법이며 목적이다.

😉 과정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주는 활력. - P31

그래서 우리의 탐색은 가부장적 체계의 역사에 대한 탐색이 된다. 남성지배체계에 역사성을 부여하는 것과, 그 기능과 양상이 시간에 감에 따라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과 뚜렷하게 결별하는 것이다. 이 전통은 가부장제를 비 역사적이고 영원하며 눈에 보이지 않고 불변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것을 신비화 하였다.

😉 가부장제는 인간이 ‘창조‘한 거다. 그건 그러니까 ‘폐기‘할 수 있다. 물론 그걸 만든 성이 폐기할 순 없고, 여성들이 교육받고 글자를 익힐 기회를 가질 때까지 견고했다... 지금도 정신 못차린다ㅋㅋㅋ 폐기는 여자가 한다. - P56

산업사회라는 대담한 신세계를 출범시킨 현대 남성들이 오염이나 생태계에 대한 영향과 관련된 결과들을 알지 못했던 것만큼이나,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도 그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과정과 결과에 대한 인식이 발달할 수 있었던 시점이 되었을 때는 이미 그 과정을 멈추기에 너무 늦었다. 적어도 여성들에게는.

😉 모든 악행은 악한 의도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지... ㅋㅋㅋ 이제 그만 망쳐 ㅋㅋㅋ 비켜 ㅋㅋㅋ - P90

그러므로 사유 재산의 첫번째 전유는 재생산자인 여성의 노동력에대한 전유로 구성되어 있다.

😉 그렇다.
- P91

그 경험은 노예제가 발명되기 이전에 남성들에게 주어졌던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 집단의 여성들을 종속시켰던 경험이다.
*여성억압은 노예제보다 먼저 일어나 노예제를 가능하게 만든다.*

😉 이 책의 핵심 문장이다. - P139

그 태동기부터 고대 국가는 가부장적 가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가족의 질서정연한 기능과 공적 영역에서의 질서를 등치시켰다. 가부장적 가족을 공적 공동체라는 건강한 유기체의 기초적 건축블록, 즉 세포에 비유한 것은 메소포타미아법에서 최초로 표출되었다. 그것은 3천년에 걸쳐 이데올로기와 실천 속에서끊임없이 강화되어 왔다.

😉 국가는 시작부터 가부장적 가족제에 의존했다. 그래서... 국가는? 여성에게 조국은 없다ㅋㅋ 기본 소득 도입하면 생각해 볼게... - P211

여성에 대한 성적 규제는 계급형성의 기초이며, 국가를 떠받치고 있는 토대 중 하나이다.

😉 남자는 계급으로 분할되어 있다. 여자는 섹슈얼리티와 계급으로 분할되어 있다. 그런데 그 계급은 여성의 성적 규제를 하지 않았으면 만들어 질 수가 없었다. - P249

만일 우리가 뱀을 다산 여신의 오랜 상징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유일신 사상을 확립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조건이다. 그것은 언약 속에서 울려퍼지고, 재차 단언될 것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을 것이며 다산 여신은 악이기 때문에 내던져지고 죄의 상징 그 자체가 될 것이다.

😉 아. 뱀이. 뱀이.. 뱀이다아... 응...? - P341

창세기에서 유일신 사상의 발달은 추상적 사고의 경향과 보편적으로 타당한 상징의 정의라는 면에서 인류의 엄청난 진보였다. 이 진보가 가부장제를 강화시키고 지지하는 사회구조와 조건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역사의 비극적 재난이다. 따라서 상징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 자체는 여성을 주변화하는 형식 속에서 일어났다.

😉 난 좀 추상적인 사고하길 좋아하는 편이라 그런 사고는 남자들이 하는 거다라고 말할까봐 걱정했는 데, 여자도 안시켜줘서 그렇지 잘한다고 해서 아주 기분 좋았음 ㅋㅋㅋ - P342

이성애 주의자 페미니스트들도 역시 여러 시대에 걸쳐 여성들과의 우정에서, 선택한 독신생활에서, 혹은 사랑과 성의 분리에서 힘을 얻었다. *사고하는 남자들 중 누구도 생각하는 대가로 자신의 자아 정의와 사랑에서 위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

😉 여성의 자아를 강화해주는 사람은 다른 여성 밖에 없다는 거 너무 맞는 말이고... 남자들은 생각과 공부하는 것의 댓가로 자신의 정의와 사랑에서 위협 받아본 적 없다는 것도 너무... 와 너무 억울하다... 나 여자애가 공부잘해서 뭐할거냐 라는 말 들으면서 컸는데. 틀린 말이란 거 알면서도 아주 잘하지는 못하니까 공부는 내 길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던거 좀 화남... - P394

가부장제 체계는 역사적인 구성물인 만큼, 그것에는 시작이 있고 끝도 있을 것이다. 가부장제의 시간은 그 경로를 따라 거의 끝나가고 있는것 같다—가부장제는 더 이상 남성들 혹은 여성들의 욕구에 봉사하지못하며, 군사주의 · 위계 그리고 인종주의와의 뗄 수 없는 연관성 속에서 지구상에 있는 생명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가, 어떤 종류의 구조가 우리가 아직 알수 없는 사회조직의 대안적 형태를 위한 토대가 될 것인가? 우리는 전에없던 변형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무엇인가로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 이미 너무 망해서 더 망할 수 가 없는 페미니즘 하기 참 좋은 시대입니다. -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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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7-07 08: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단 이 책이 쟝님께 쟝님만의 성경이 된다는 것이 너무 뿌듯합니다. 제가 쓴 책도 아닌데 왜... 아무튼 뿌듯하고요.

이 리뷰를 읽다가 생각나는 걸 좀 적어볼게요. 우선, ‘구원자는 멸종할 때까지 재림할 것이다. 인간은 애초에 무력하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에 대해서요. 저는 믿는자에게는 그 힘이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게 무엇이든요.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힘은 작용할 것이고 사주팔자를 믿는다면 사주팔자의 힘은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여기엔 어떤 전제가 있느냐, 그 어떤 힘, 인간보다 더 큰 힘,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믿게 하는 힘, 그 전에 존재해야 하는것은 ‘인간의 믿음‘, ‘믿는 존재인 인간‘ 이라는 것이죠. 제가 최근에 엔도 슈사쿠의 <침묵> 을 읽으면서 이 생각을 더 확고히 하게 됐습니다. 고통당할 때 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라고 작가는 묻고 결국 신은 늘 우리와 함께 있었다, 라고 말하지만,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믿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죠. 정말로 신이 있느냐 보다 우선하는 것은 신이 있다고 믿는 혹은 없다고 믿는 인간이요. 이건 아마도 제가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쟝님이 적어주신 말, 그러니까 인간은 애초에 무력하므로 구원자는 계속 나타날 것이다, 라는 것은 바로 저의 이런 생각과 같은 흐름이라고 봅니다.


저는 정희진 쌤의 강연에 갔다가 ‘워마드는 페미니즘이 아니에요‘ 라는 말을 듣고 크게 실망을 했었어요. 그리고 제가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 하고나서 ‘너는 페미니스트니까‘ 라며 저에게 어떤 기질, 성향(자신들이 바라는) 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됐고요. 이 과정에서 나를 어떤 단어로 정체화하고 정의내리고 감별하는 것은 나에게 쓸모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행동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타낸다고 했잖아요? 저는 제가 믿는 바를 행동으로 보이자, 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행동이 어떤 효과를 봤으면 좋겠고요. 그런데 효과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극단적이어야 합니다. 부드러운 말로 설득하는 것은, 특히나 페미니즘에 있어서 아무 효과를 주지 못해요. 묵살되는 언어가 될 뿐이지요. 그런점에서 저는 모든 여성들이 극단적인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불가하겠지요. 우리는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가도록 합시다.


재생산에 대해서라면, 저는 또 한번 깨달았어요. 쟝님의 리뷰를 읽으면서요.
저는 엄마를 사랑하고 조카들을 사랑하지만, 제가 재생산을 함으로써 저만 바라보는 존재가 생긴다는 것, 제가 무한히 사랑하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또 저를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는 존재를 만든다는 것은, 역시 제가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라는 것을요. 저는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고 의지도 없다는 생각이 쟝님의 리뷰를 읽으면서 새삼 듭니다.


아무튼, 읽고 씁시다!!

공쟝쟝 2022-07-07 09:43   좋아요 3 | URL
제게 페미 성경을 쥐어주시다니ㅋㅋㅋ 아주 꼭 마음에 들었습니다. 페미니즘이 너무 방대하고 훌륭하고 최신식의 사상이라 그 안에서 복잡해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데, 그러다 보면 영판 다른 소리를 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여성주의자가 여성주의를 버린다?ㅋㅋㅋ 그냥 말 좋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성주의 하다 만 거 아닐까요?) 근데 이것 저것 다 좋을대로 떠든 뒤에 자기가 하는 게 페미니즘이라고 하는 건 좀 싫기도 하고, 기준이 좀 애매했거든요. (무언가로 정체화하는 것의 위험성과는 별개로 최소한의 기준이 있어야 하는 데 그것의 근거 마저 회의 하게 하는 게 페미니즘 특유의 급진성이긴 하지만^^)

최근에 서재 안에서 나의 페미니즘 모먼트와 관련된 글을 읽으면서 왜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페미니즘 적 원칙들은 명확해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페미되신 선생님들의 페미니즘은 제가 알 수가 없고, 저는 넷상의 혐오표현(일베)들과 불법 촬영물 이슈가 각성 계기 였거든요. 가부장제의 창조도 거슬러 올라가서 여성의 종속에 대해 다루잖아요? 여성 종속의 모먼트! 그걸 추적한 대단한 책이었다 생각합니다! (강간… 이 있었겠더라고요… 강간이…) 생각하는 여성들에게 정신적 강간을 저질러왔을지도 모르겠다고 적힌 부분에서 저는 그토록 제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고 내 생각을 말하는 것에 조심스러워했던 과거들이 좀 떠올랐구요…. “(394)사고하는 남자들 중 누구도 생각하는 대가로 자신의 자아 정의와 사랑에서 위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음. 그렇대요. 이거 너무 충격적인 문장예요. 여자들 한테 너무 슬프고... 뚫린 입이라고 말을 막하면서 여자들이 말막하면 어떻게 그런 말을… 이러면서 자아에 상처입는 남자들을 많이 봤는 데... 징징대지 마라 진짜 경고한다 내가ㅋㅋㅋㅋ

믿음에 관해서라면… 저는 침묵을 꼭 읽어본 후 믿음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무언가를 믿어요. (걍 나 자신에 대한 다짐일 수도 있어요….) 종교인의 그것과는 뭐가 다른지 같은 지 잘 모르겠지만 단발님이랑 대화하다 보면, 아… 꼭 신을 믿지 않는 내가 나로 살기 위해서 만들어낸 방법들이 종교적 차원에서는 구축이 이미 되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좀 있었어요. 그것이 맞건 말건 조금 더 ‘건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에 대해 함석헌 옹의 글을 읽으면서 좀 끄덕끄덕 했고요. 칸트처럼 수확을 기대하지 않고 씨앗을 뿌리는? ㅋㅋㅋㅋ

재생산… 이건 제가 좀 더 생각하겠습니다. (생각을 피해온 것일지도?) 이젠 삼십대 중반 넘어서 난자 얼리는 것도 별 가망이 없고…. 뭐 점점 더 못하는 노산의 나이가 되어가고 있어서 몇 번의 유혹만 더 물리치면 자연스럽게 포기할 거 같은 데 ^^ (엉?) 하지만 다락방님이 조카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모습이 제게 참 귀감이 됩니다? … 저는 꼭 조카 아니더라도 인류애 회복하여 사랑하고 싶고요… 내 애는 안 키우지만 키우고 싶은 사람들 잘 키우라고 매달 모단체에 후원합니다…ㅋㅋㅋㅋ

그러니 애 안낳아본 여자에 대한 혐오를 멈춰라!

건수하 2022-07-07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91쪽에 나와있는 문장이 무척 가슴에 와 닿네요..

아직 2장까지밖에 못 읽었는데, 얼른 마저 읽고 싶습니다.
다 읽고 다시 와서 쟝님 글 읽을래요.

저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안했던 사람이었는데요, 엄마가 되고 나니 그게 참 힘들지만 의미가 있는 그러나 강요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엄마가 된다는게 어떤 건지도 잘 모르면서도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알았다면 저는 절대 엄마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이런 말할 때마다 아이에게 미안하지만)

공쟝쟝 2022-07-07 15:33   좋아요 1 | URL
우린 같은 여성이라서 서로를 십분 이해하지만, 또 그래서 무조건 다 같아!라고 묶기엔 너무도 다른 경험들을 하고 다른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러니 더 힘을 내어서 떠들고 읽고 쓰고 또 떠들고 논쟁하고 그러다가 지치면 쉬고 또 힘나면 나는 대로 읽고 쉬고해야한단 걸 한번 더 생각하게 하는 댓글예요!
저는 낳지 않은 / 낳아서 길러보고 싶었던 / 하지만 존재조차 하지 않게 만들어버린 / 없는, 없을, 없앤 / 미안해 할필요 없는 원래부터 없었던 제 아이를 생각하면서 좀 더 좋은 사람이 되야겠다라고 맘 먹어 볼게요. (뭔가 심오한 댓글이 되었다)

거리의화가 2022-07-07 13: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른 것보다 대학 때 읽으신 책 보고 흠칫했네요ㅎㅎ 저 책 일단 한국통사 하면 손에 꼽히는 책이라 읽자 해서 구입은 해뒀는데 손이 안갑니다^^; 그걸 무려 대학 때 읽으셨다니 아후~ 대단~! 역사책 읽다보면 특히 여혐 등 보기 싫은 장면들을 마주하게 되어서 괴로울 때가 많아요. 제대로 읽자 생각하며 비판적으로 읽기 중입니다!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지 말기~ 태도는 역사책 읽기에도 유용한 것 같습니다.

재생산은 하지 않으니 저도 제 대에서 삶이 끝나겠네요. 끝나는 삶까지 열심히 살아야겠어요. 그리고 비혼주의자 쟝쟝님 응원합니다!

공쟝쟝 2022-07-07 15:40   좋아요 3 | URL
대학때 읽는 책들은 인생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 같아요. 함석헌 옹의 저 책은… 한학기 수업 교재라서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거화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제가 숨겨진 현대사 덕훕니다. (응?)ㅋㅋ 알라딘은 페미되고 부터 시작했고… 이제 맛 없어서 역사 안읽지만..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법률가들>은 아주 수작였습니다… (응?) 추천드려요.

비혼/주의/까지는 아니지만… 결혼 제도에 대해서는 (특히 한국의 며느라기~문화에 대해서는) 살짝 건네다 본 것 만으로도 치를 떨었습니다. 여자가 여자를 미워하게 만드는 최전선에 고부관계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이대로라면 인류 재생산과 마찬가지로 비혼에 안착하게 될 것 같고요. 그런데 제가 한번도 제가 설계한대로 인생이 굴러간 적이 없어가지고, 단정짓지는 않습니다 ㅋㅋㅋㅋㅋ 네 뭐 그러합니다… 제가 이나이 먹고 유튜브를 만들고 있을거라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므로 ㅋㅋㅋㅋ 일단 끝나는 삶까지는 우리 열심히 살아요 ^^ 화이팅!

거리의화가 2022-07-07 17:11   좋아요 2 | URL
엇 쟝쟝님 이렇게 더 알아갑니다ㅎㅎㅎ <법률가들> 책은 못 읽어봤는데 참고해볼게요 고부관계 쉽지 않죠 그나마 저는 시월드 참 편하게 지나가는구나 생각합니다 시어머니가 안 계시고 시할머니만 계셔서^^;
미래는 알 수 없으니 예단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재미난 게 인생이고^^

독서괭 2022-07-07 17: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메소포타미아보다 성경이 힘들었다, 저요! 저도 성경을 몰라서.. 함무라비법전이 더 익숙한 것만 같은 느낌? ㅋㅋㅋ
긴 글 읽다보니 앞부분에서 하고 싶었던 말 까먹고.. 음..
아 인용해주신 30쪽 저도 넘 좋았어요! 그리고 *별을 바라보고 가도가도 별이 있는 곳에는 가지지 않는다해서 별은 거짓이란 말은 되지 않는다.* 이 문장 참 좋네요. 다 쓸데없어, 하는 체념적 현실주의와 반대로군요? 이상적 현실주의? 현실적 이상주의? 전 별보다 새우깡 찾으며 가는 사람 같지만.. 쿨럭.. 약간 다른 얘기긴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괴테의 구절이 생각납니다.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든 바르다˝
앞으로도 쟝쟝님의 읽고 생각하고 쓰기를 응원합니다~^^

공쟝쟝 2022-07-08 11:26   좋아요 1 | URL
저 였나 제 mbti였나 모르겠는 데 저를 설명한 표현 중에 ‘현실주의자 인 척 하는 이상주의자‘ 라는 표현이 있었어요. 끄덕끄덕 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현실의 새우깡엔 별 관심이 없어요. 그러나 언제나 진짜 행복은 새우깡 먹을 때 느껴지는 것 같다요 ㅋㅋㅋ

독서괭 2022-07-08 11:31   좋아요 1 | URL
별을 바라보면서도 새우깡 먹을 수 있어요! 쟝쟝님 옆에는 입에 새우깡 갖다 넣어주는 분들이 계시니 문제 없습니다 ㅋㅋㅋㅋ

공쟝쟝 2022-07-08 11:3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입천장까질까봐 소주도 부어주는 분들… 사랑합니다…💕

책읽는나무 2022-07-10 1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좋은 글을 이제 읽었네요^^
지난 번에 분명 뉴스레터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공쟝님의 글을 읽은 기억이 없더군요.
안 읽었어~ 안 읽었어~ㅋㅋㅋ
‘현실주의자인 척 하는 이상주의자‘ 인 공쟝님!!
진짜 맞는 말 같은데요?
저는 그게 참 건강하게 다가옵니다.
늘 공쟝님의 글은 읽고 나면 건강해지는 기분이에요. 현실을 직시하지만, 멘탈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는 믿음직스런 부분들이 있어요.
저도 작년부터 여성주의 책을 계속 읽게 되는 이유는 좀 더 올바른 자아를 확립하고 싶어서..라는 욕구가 큰 것 같아요.
이 사람 말, 저 사람 말들을 듣다 보면 좀 혼란스러울 때가 많은데 중심을 잡으려면 아무래도 지식이 많아야 겠구나! 싶더군요.
공쟝님은 중심을 빨리 잡아가고 계신 듯!!^^
재생산은 여자 인생의 행복과 연결 된다는 것은 저도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반반인 것 같습니다. 제 곁에 결혼은 했지만 재생산 하지 않고 살아가는 친구가 있거든요. 보고 있음 또 막 부럽기도 하고..ㅋㅋㅋ
요즘 결혼하는 조카들도 재생산 하지 않는 부부들이 늘어나고 있어 이젠 당연하게 받아 들이게 되면서...재생산이 꼭 의무일 필요는 없구나! 생각하게 되었죠.
삶이 확 바뀌게 되는 것 같아요.
재생산에 대한 제 생각은 그래요ㅋㅋㅋ

공쟝쟝 2022-07-10 22:13   좋아요 1 | URL
자아 확립. 여성에게 여성주의는 좋은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읽은 거의 모든 것은 여성이 아닌 남성들 혹은 남성언어의 훈련에 익숙해진 여성들이 쓴 글들이기 때문이죠. 때로는 가장 많이 읽은 여성이 가장 앞장서서 여성을 혐오하는 글을 쓰는 것을 우리는 보기도 하고요. 나의 위치를 선명하게 인식하고 내가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목소리가 진짜 내 목소리를 심문하는 글을 쓰면서 나의 언어를 발명하는 것. 우리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생산에 관련해서도 더 많은 이야기와 담론들이 필요하구요 ^^... 생식/번식ㅋㅋ에 관해서는 별로 할말이 없고... 다른 소리 같지만 나무님의 훌륭하고 건강하고 먹음직스러운 상차림이라는 재생산 노동들이 저는 근사한 재능이라고 생각하고 부럽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