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 선택을 선택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는데요?
대상화와 아렌트, 그리고 꽃바구니
글자랑 가까이 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 물리적으로...

1.


아니 에르노의 데뷔작인 <빈 옷장>을 읽으려다가 또 실패했다. 작가의 낙태 경험으로 시작하는 책의 첫 페이지는 자궁에 막대기를 집어넣는 묘사가 있다. 에르노의 <사건>을 온 얼굴을 찌푸리면서 읽어버리고 다시는 읽지 않고 싶다 냅다 내던졌던 기억이 난다. 독서 경험은 강렬해서 그걸 지우고자 <레벤느망>(은 <사건>을 영화한 작품이다)을 꾸역꾸역 다 보았는데… 그 이미지들은 더 괴로웠다. 프랑스 영화는 역시 좀 지독한 데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생리통이 심한 편이고, 이것은 28일 주기로 반복되며 나이가 들면서는 pms까지 생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pms가 심해지면서 생리통은 좀 줄었다) 무슨 말이냐면 28일 중 8일은 이 종(種)의 유지를 위한 까닭으로 몸이 아프다는 거다. 결혼은 하기 싫은 데 좀처럼 출산에 대한 욕망(…) 혹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무의식 속에 새겨진 소명(…)은 내려놓기가 힘들었다. 


결혼해도 절대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지독한 반출산파 친구가 걷다 말고 물었다. “넌 대체 왜 애가 낳고 싶은데?” 이젠 정말 몰라져버렸는데, 지금 당장 떠오르는 말 해도 돼? 해봐. 생리한 게 너무 아까워. 뭐 하러 이렇게까지 아팠나. 친구는 넌 진짜 진지한 또라이야라고 말해서 같이 웃었다. 나도 안 할래, 엄마. 때려치우자.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닌 것 같음. 그러면 생리는 왜 하는 걸까. 아 생리하기 싫다. 또 진지해져서 미레나 가격을 검색하다가 관뒀다. 생긴 대로 살자. 좀.  


아니 에르노의 책들. 임신 중단이 불법이던 시절에 있었던 상식적이지 않은 시술에 대한 묘사들을 읽으면서 자동적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자궁벽을 득득 긁어내는 것 같은 익숙한 생리통의 느낌이다. 감각적인 글은 어떤 감각을 활성화시킨다. 오늘 나의 몸 상태는 이런 책을 소화하기에는 좀 지쳐있다. 


내겐 임신중단과 출산의 경험이 없고 둘 다 생리통보다는 고통스럽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할 뿐. 다만 임신 중단의 경험을 읽는 것이 출산보다 심적으로 더 괴로운 것은 그것은 말 그대로 몸에 새겨진 ‘수치’이니까. 그냥 내 몸에서 일어난 일일뿐인데도 사회는 그것을 ‘수치’로 여기니까.

사회 속에서 사는 나는 신경 써서 스스로를 의식하지 않으면 사회의 시선(언어)으로 나를 바라보게 마련이다. 나를 인정하기 위해서. 나를 ‘수치’로 느끼지 않기 위해서. 아니 에르노는 언어를 만들기로 했다. 경험을 소설로 썼다. “(20)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질 때, 그것은 정치적”이다. 그녀는 글을 썼고. 말할 수 없는 것을 썼다. 글로 복수를 했다. 이처럼 우아한 복수. 그리고 이토록 치열한 복수. 





아니 에르노~! 멋지다~! 아니 에르노~! (연진아 멋지다 박연진 버전으로 읽어주세요)






2.


아니 에르노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을 출력해서 읽었다. 누워서 읽다가, 자세 고쳐서 앉아서 읽다가, 마지막에는 울고 말았다. 


“(21) 오로지 *그 대상이 되는 이들만 느끼는 계급과 (혹은) 종(種), 성(性)의 내면화된 지배관계*라는 사회적으로 말할 수 없는 사실을  분명하게 할 때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의 해방 가능성 또한 드러납니다. 언어, 모든 언어가 가지고 있는 관점과 가치를 제거하면서 현실 세계를 해독하는 것, 이는 기존의 질서를 뒤집고 위계를 뒤엎는 일입니다.”

나는 아니 에르노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녀가 쓴 글에 빚을 지고 있었다. 무지무지 똑똑한 여성들의 용감한 읽고 쓰기 덕분에. 현시점의 나는 정확하게 안다. 임신중단은 수치의 경험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어떤 여성도 임신 중단을 스스로의 수치로 여겨서는 안 된다. 수치스러워해야 하는 것은 여성의 ‘일반적인 경험’을 ‘말할 수 없는 수치’로 묶어둔, 노예제보다 먼저 태어나 아직도 죽지 않은 5천 년 여성억압을 여전히 자행하고 있는 인간 종(種) 전체다. (관련 페이퍼 링크 <임신중지>https://blog.aladin.co.kr/jyang0202/13918760)


어떤 사회의 지배원리는 말 그대로 ‘내면화’되어 있어 의식하기 어렵다. 그것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침묵이 딸려오며, 사실은 힘이 없어 가치가 되지 않기에 다뤄지지조차 않는다. 대상이 되어본 사람들에겐 언제나 언어가 충분하지 않다. 언어와 몸의 불일치. 언어는. 


그중에서도 특히 ‘글’은 오랫동안 언어가 없는 이들을 대상화할 수 있는 위치에서 독점되어 생산되어온 지배 질서 자체이며 권력이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들은 감히 글을 썼고, 문학을 공부하던 스무 살의 아니 에르노도 빅토르 위고를 읽다 말고 글을 썼다. 어느 책에도 낙태는 없었으니까. 그녀가 읽어온 모든 글에는 지금 내 자궁을 헤집고 있는 낙태 기구가 묘사되어 있지 않았다. 


1959년 아니 에르노는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읽었다고 한다. 

2019년에 나는 <제2의 성>을 읽었다. 

그리고 2023년의 나는 아니 에르노를 읽는다. 


글을 읽는다. 여자인 내가. 

글을 읽는다. 여자가 쓴 글을. 



3.


“(11)어떤 글쓰기를 선택해야 하는지 자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언어를 더는 말하지 않는 이민자들 그리고 더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회 계층을 이동한 자들은 다른 단어들로 생각하고 표현합니다. 그들 모두 부수적인 장애물들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일종의 딜레마이지요. 그들은 실제로 습득한 언어이자 지배의 언어, 그들이 배워서 숙달한 언어이자 문학 작품 속에서 경탄한 언어로 글을 쓰는 일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더 나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언어로 자신들의 출신 세계를, 일상과 일, 사회에서 차지한 자리를 말하는 감정과 단어들로 이루어진 *첫 번째 세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쓸 수 없다고 느낍니다. …  ”

아니 에르노는 스스로를 계급 이탈자(그녀의 언어로 말하면 ‘내부에서 이동한 자’)로 여긴 듯하다. (연설문을 읽고 알게 된 사실이다) 그녀에게 글과 문학은 노동 계급인 부모님으로 상징되는 “(9)스스로가 속한 사회계층과 무의식적으로 대립”되는 것이었다. 공감했다. 


이 역시 내가 조금은 늦게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어떤 균열 지점인데, ‘내면화’의 문제와 연결되었다는 걸 조금씩 인식하고 있다. 다만 나는 내 계급의 이탈자는 아니다. 계급은 여전히 나의 발목을 꼭 붙들고 쉽게 놓아주질 않으며(ㅋㅋㅋ) 상승의 의지가 이제 더는 없고...ㅋㅋㅋ 내게 보다 직접적으로 와닿는 문제는 여성임과 동시에 지역 이동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나라는 지역 자체가 계급이다.) 


지방에서 서울로 이동한 내게 대도시의 인간관계 문법은 이국의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낯선 것들이었다. 어디에 있든 뭔가 계속 부적절한 느낌이었고,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서 술을 마셨다. 완벽한 서울 말씨를 구사하면서 거리감을 눈치껏 조율하고 내가 취약한 종류의 인간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썼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다 힘들었다. 그냥 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서울 사람들. 혹은 서울에 잘 적응한 사람들. 너무 멍청해보여서도 또 지나치게 똑똑해 보여서도 안되는 방식으로 내가 잘 보여야 하는 사람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건가? 내가 이상해 보이면 어쩌지?를 스스로 묻게 하는… 그리고 이제 나는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없을 만큼 딱 그만큼만 변해버렸고, 더 잘 변하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게 되면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도통 모르겠는 나의 ‘첫 번째 세계’에 대해 골똘해 진다.


곰곰 생각해 보면 유년 시절의 연장인. 

나의. 첫 번째. 세계에 대해서. 

...


쓰는 것은 고사하고 말하는 것부터가 힘들다. 아주 웃기고 희화화해서 말하게 되거나 이해하기 쉬운 클리셰 범벅의 향수를 섞어 미화하게 된다. 그리워하고 좋은 점을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낭만화하고, 그래서 좋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부분을 전체화하는 내부 고발자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거의 문법과 관계들이 내게 상처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상처가 전부는 아니었고, 사실 정말 상처는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무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들이지만. 당연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정말 모를 것이다. 그 모름을 폭력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나는 내 적응못함을 더 이상은 탓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세상이 그런 것들로 조밀하게 짜여 있다는 게 보인다는 것이 내겐 중요하다. 


어떤 세계를 오롯이 간직한 채 건강하게 분리되고 싶다는 욕망은 이런 바쁜 시절에는 헛된 욕망인 걸까. 

차라리 긴박한 단절을 권하는 빠른 적응력의 친구들까지도 현시점의 내겐 불가해한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4. 


페미니즘 책(어려운 사회학 용어로 되어 있다)을 읽으면서는 탈근대의 시절을 살면서 전근대적인 감정을 느끼고 싶어 하는 내가 이상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아, 그럴 필요조차 없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페미니즘은 근대를 벗어난다고 하고, 젠더에서 시작되어 젠더를 해체해버렸다고 하는 데, 아무래도 나는 유교걸(전근대인ㅋㅋㅋ)이라 대체 이걸 왜 읽어야 하나 싶은(다 읽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상태에서 가장 어려웠던 건 ‘포스트모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였다. 그냥 글자에 붙어있는 개념 말고. 나 스스로에게 말이다. 


이번에 푸코 강의를 들으면서 좀 더 알 것도 같아진 것은. 포스트모던은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어쩌면 공간의 개념에 더 가깝고 차라리 인식의 개념이라는 것? 선명함과 명료함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의 언어(지배의 언어)에 포획되지 않는. 어쩌면 근대적인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결코 안되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기성의 언어 안에는 아직 없는. 


그래서 언어를 가져야 하는. 근대의 방식으로 근대의 입장에서 포섭되어 해석되지 않는/없는/안되는 모든 것들. 포스트모던적인 것들. (정희진 선생님의 공부 팟캐스트를 5월호 들으면서 더 확실해졌다! https://www.podbbang.com/magazines/1785996/issues/3377)


그러니 페미물 먹은 유교걸인 나는 전근대에서 온 철모르는 버그가 아니라 아니라 존재 자체가 포스트모던 일 수밖에 없었던 건데. 세상에나 그런 나를 대변(?)한다는 포스트모던 관련 글들은 너무 어렵고요? 이걸 또 쉽게 쉽게 모던적으로 쓰려고 하니까 내가 모던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써지겠냐… (라고 비껴갈 생각하지 뫗!!! 그냥 난 이해를 못 해서 못쓰는 게 아닐까?) 어쨌든 이 정도 수준에서 거칠게 이해했다고 써 놓으면 좀 쪽팔리지만 이 정도 알았으면 많이 안거 아닌가!!!??ㅋㅋ하고 뿌듯해하는 중였는 데… 


천재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의 이 연설문은 정확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여성에게 읽고 쓰기가 왜 필요한지. 계속해서 나빠질 것이 자명한 이 세계에서 폭력을 견디기가 버거운 사람들은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그 힌트를 쉽고 간명하고 아름답게 말해주고 계신다. 

“(15) 글쓰기에 대한 성찰 없이 어떻게 삶을 성찰할 수 있을까요? 글쓰기가 존재들과 사물들에 대해 경탄하거나 내면화하면서 재현한 것들을 강화하는지 혹은 어지럽히는지, 스스로 묻지 않고 삶을 성찰할 수 있을까요? … *독자가 문화적인 특권자일 때, 그는 실제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책의 인물과 관련해 우월하고 거만한 위치를 점유*했습니다. 그러니까 시작은 이런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늘 이야기하고 싶었던 *내 아버지를 바라보던, 참기 힘들었을지 모를, 그리고 스스로 배신이라고 느꼈던 그 시선*을 피하고자. (…중략) 실재와 실재가 전한 감각을 동시에 포함한 단어들을 찾는 것은 오늘날까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글을 쓰면서 느끼는 변함없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


이런 깊디깊은 사유에서 나온 것이 에르노의 소설이었다. 어쩐지 뭔가 지나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계속 읽게 되더이다. 이것은 역시 똑알똑친!! 나는 나도 모르게 알아보고 만 것이다. 아니 에르노의 세계 최고 똑똑함을. 



5.


마지막은 내가 눈물 한 방울 또르륵 흘린 연설문의 끝 부분이다.  

“(25) 그 약속에서, 나의 조상들에게서, 노동에 지쳐 일찍 생을 마감한 남자와 여자들에게서 나는 충분한 힘과 분노를 얻었습니다. 그 힘과 분노는 문학에, 다양한 목소리의 총체 속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하고야 말겠다는 욕망과 야심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제공하고, 문학에 맞서 반항하고 문학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비롯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바로 그 문학 속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여성이자 

계급 탈주자로서의 

나의 목소리를 

언제나 해방의 장(場)으로 

소개되는 그곳, 

문학 속에 

기입하기 위해서.”


계급 탈주자. 

건너간 곳에서 건너온 곳을 쓰는 마음.

눈치 챘겠지만 내 눈물은 당연히 집에 계시는 부모님이 생각나서다ㅋㅋㅋ  (지겨운 K-장녀 감성)


에… 그러니까… 뭐, 아니 에르노에게는 탈주해버린 뒤의 부모님에 대한 시선이었겠지만… 

나에게 가족이란? 허허. 사실 나 역시 부모님과 대화를 할 수가 없어진지는 너무도 오래… 뭐, 그건 어느 집이건, 다 그러겠지만. 


우리 집의 경우 좀 유별나긴 하다. 그 대화가 필요해 딱 그느낌. 테레비 보고 말없이 밥만 먹음. 가아끔 “말하면 싸우니까” 말하지 않는다가 원칙일 정도. 그래서 ‘말 = 싸움’으로 정리된다. 그게 우리 집의 문법(?)이다. 평소에는 말을 안 하다가 말을 하려면 끝이 없어지니까… 생존 소통만 함. 아니면, 그냥 나는 말할 테니 너는 들어라! 이런 식의 소통… 강제된 소통이 다임. 


그렇다고 사랑이 없는가? 또 그건 아니다… 나는 이 간극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뭐 그리고 표현할 생각도 이 글을 읽기까지는 딱히 안 해 봤…. 여튼 공감했다는 거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한테. 


문제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언어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되는 내 인식인데. 

그래서 내가 부모님과는 다르게 말 혹은 글 어쩌면 내 언어를 갖게 된다고 해서 우리가 소통에 능해지는 가?… 

아닌 것 같다. 되려… 생존 소통만 하는 부모님이 소통을 더 잘하시는 것 같다. 이심전심. 이렇게 되면 결국 언어는 무엇인가…로 빠지게 되는 데. (이것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문제의식 인걸로 난 알고있닼ㅋㅋㅋ 그리고 내 철학자 테스트는 후기비트겐 95인가 그럼ㅋㅋ) 


그러니까. 이제 막 읽고 쓰기에 재미를 붙인 나는 나의 언어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은 겁이났던 것이다. 좋지 않은 글, 내가 싫어하는 글을 쓰게 될까 봐인 줄 알았는데… 글을 쓰는 것은 (요 블로그에 거칠게 내놓는 게 다라고 하더라도) 언어가 없던 과거의 세상과 정말로 완전히 이별하는 일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계급의 탈주라고까지 말을 할 순 없지만… 어떤 것을 쓸 수 있는가/없는가의 이동. 그건 확실히 어떤 이동인 것 같다. 그리고 변화 인 거겠지. 


책 읽고 글 쓰는 건 여기서 만나는 세상과 재밌는 대화를 나누는 건 지금의 내게 너무 즐겁고 기쁜 일이지만. 그럴수록 책을 단 한 줄도 읽지 않는. 이제는 각자의 폰에 유튜브만 보는 엄마 아빠와는 멀어지는 것일까. 뭐 사실 이미 멀어져있었기에 별 상관이 없는데. 바로 그래서. 자신의 종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하고 그걸 어떻게든 써내버린 아니 에르노가 진짜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동한 곳에서도 자신의 경험을 잊지 않는 것…. 대상화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든 그 간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소설에 ‘나는’을 쓰는. 기억을 파헤쳐 ‘감각’을 쓰는 방식의. 음. 곱씹을 수록 감동적이네.🥺


시골에는 비가 많이 내리는 모양이다. 오늘은 동생 생일이라서 가족 단톡방에 생일 축하 메시지가 올라온다. 은퇴 이후 잠시 잡았던 택시 운전대마저 놓아버리고 생애 최초로 길고 긴 휴식을 하는 아빠의 우울과 (엄마는 겨울내내 아빠가 잠만 자고 넷플릭스만 보는 것이 우울증이 온 건가 걱정하신다) 수년 간의 지친 투병을 가까스로 수습하고 생애 최초로 생계부양자가 된 엄마(요즘 엄마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등하굣길을 지도하는 간단한 알바로 두 식구의 생활비를 간신히 벌고 계신다)의 대조되는 활기를 떠올린다. 


삶에 책에서 인용한 문장은 단 한 줄도 참고하지 않은 채 오로지 노동으로만 나와 동생들을 키워낸 사람들. 자아보다는 자신의 역할에 오로지 충실했던 사람들. 덕분에 삶이 무겁고 어려웠었다. 반동처럼 반항처럼, 아니 그 사람들의 방식으로는 이제 올바르게도 선하게도 살 수 없는 시절이라 막다른 길에 몰려 나는 책을 읽기로 한 것 같다. 그러다보니 선명한 자의식을 가진 여자들이 복수를 다짐하면서 써낸 글을 읽는 날도 왔다. 이토록 우아하고 섬세하게 화낼 수 있구나. 어쩌면 이 복수 말고 진짜 복수는 없는 것 같기도. 


세상의 모든 권위에 일단 실눈 뜨고 조롱할 태세를 갖춘 몹쓸 심보를 장착하게 되버린 나지만… 

당분간 노벨 문학상 만큼은 인정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이 종에게 남은 건 결국 문학인겐가. 하고 말게 되는 그런 연설문. 




덧붙임 

유수님의 페이퍼에서 아니 에르노의 노벨문학상 연설문을 가져왔다. 이 좋은 글을 읽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머지 않은 시일에 땡스투로 화답하겠습니다 연설문 링크는 여기 https://drive.google.com/file/d/1uKBrby1z6d3hMrqoXQ3iqpggCWK52lU4/view


그리고 여러분 꼭 이 연설문 읽어봐주세요. *공짜입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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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종의 복수를 가능케 한, 텍스트로서의 <사건>
    from 편독의 나래 2023-05-11 12:52 
    <사건>의 모든 텍스트는 ”첫번째 세계“의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단절되는 “사건”이다. ”그 언어로 자신들의 출신 세계를, 일상과 일, 사회에서 차지한 자리를 말하는 감정과 단어들로 일어진 첫 번째 세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쓸 수 없다고 느낍니다.(…)하지만 글을 다시 쓰려는 순간, 이 작품들은 내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잘 쓰는 것‘, 아름다운 문장, 내가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바로 그런 문장과 단절해야만 했습니다.“(노벨 문학상
 
 
시에나 2023-05-07 01: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헉 이 글 너무 좋아요. 무엇보다 공쟝쟝님이 드디어 에르노와 접선하신 거 같아서... 넘 기쁩니다!! 제가 말했잖아요. 에르노의 계급탈주자의 글과는 통하는게 있을 거라구요!! 저는 <얼어붙은 여자> 읽고 충격 받아서...초기작부터 쭉 읽엇는데.. 진짜 에르노는 자기 계급성을 문제화한 책들이 찐입니다!!

공쟝쟝 2023-05-07 10:03   좋아요 4 | URL
접선은 오래 전에 했는 데, 초기 작품과 문제의식은 시에나님 덕분에 알게되었어요. 무엇보다 저는 역시 에세이나 산문파인게 이 연설문이 ㅋㅋㅋ 책보다 더 좋았습니다 😫

2023-05-07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7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난티나무 2023-05-07 19: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 나중에 또 읽으러 와야지!!!!!!! ❤️🧡💛💚🩵💙💜

공쟝쟝 2023-05-08 09:19   좋아요 0 | URL
프랑스... ..좋겠다 난티님...

난티나무 2023-05-09 05:04   좋아요 1 | URL
어뜨케, 에르노 책 한 권 보내드려요? 샬랄라 불어판으로다가? 💝

공쟝쟝 2023-05-09 10:22   좋아요 0 | URL
아니오… 날 그곳에 데려가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 푸,랑,쑤!!! ㅋㅋㅋㅋ 아니 에르노랑 친구 못해요? 난티님 ㅋㅋㅋ 아니 에르노랑 친구해주세요!!!

난티나무 2023-05-11 17:03   좋아요 1 | URL
빠리에서 또 접선합시다. 그러나 에르노… 친구… 넘사벽… ㅋㅋㅋ 여행이나 오세욧

2023-05-08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9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9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3-05-09 13:18   좋아요 1 | URL
그쵸? 저는 생리통이 좀 심해서 쉬고 싶다하니까 생리통 없어지려면 남자랑 많이 자야된다면서 자기랑 자자고 했던 알바사장이 생각나네요. ............ 나 스무살이었는데 그 때..... (갑자기?) 생리통이랑 남자랑 자는 거(대체 이 개새끼가 뭘안다고 나한테 이런 말을 한걸까요. 니가 여자 몸에 대해 뭘알아 뭘아냐고 이 미친새끼얔ㅋㅋ 갑자기 또 빡도네..) 랑 출산이랑.... 다 상관 없는 거 같죠? 저 역시 나이들면서 체질이 좀 바뀌는 까닭인가 합니다.

여성의 몸은 그 복잡성에 비해서 이야기되지도 않았고, 의학 및 표준화된 많은 제도와 기술들이 복잡하지 않은 남자의 몸을 기준으로 셋팅이 되어있으니 아무리 여성 상위시대라고 거짓말 같은 프레임을 들이대봤자 여성은 상대적으로 소수자라고 생각하고 페미니즘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이 댓글은 공개로 하겠어요ㅋㅋㅋ 내가 봐도 잘써서 ㅋㅋㅋ )

글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헤헷.
˝피흘리며 학업, 시험, 업무˝를 감당해 내는, 육아와 돌봄 재생산 노동까지 해내는 여자의 몸.
대단하고 사랑스럽습니다. 너무 열심히 살지 말자고 말하고 싶지만 나도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 할말은 없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