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찍찍 흘리고 책장정리 샷을 찍고 난 후부터 오한이 온 것을 시작으로 발열 몸살 인후통 기침 가래(비체ㅋㅋ) 초 스피드로 넓게 잡으면 3박 4일 짧게 잡으면 72시간을 아주 스피디 하고 강렬하게 코로나 바이러스와 몸이 만나 융합ㅋㅋㅋ하고 나니, 몸이 한결 가뿐하고 아주 상쾌하다. (아직 남은 비체들이 재채기로 튀어나오긴 하지만... 기침할 때 빼곤 안아프다) 한바탕 앓고 나니 가벼운 기분, 여러분 알아요?
대부분 잤고 깨어있을 동안에는 누워서 책 읽고 북플하고 다시 자고 약먹고 밥먹고 자고 (편했다 마음이) 일어나 밥먹고 약먹고 책읽다 잤다. 잠이 안오면 정희진의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를 읽었고, 읽으면서 아파서 좋았다. 정희진 샘의 가장 띵문이라면 ‘안다는 것은 상처 받는 것’ 아니겠나요? 코로나가 상처내고 있는 몸으로 정희진의 신간을 읽는 것이야 말로 진짜 앎에 가까워 지는 😮💨 무튼 ‘앎’의 다른 말은 아픔인 것을... 아픈 채로 알아가니까 죽을 것 같고 아주 좋았다.
“(19) 어떻게 하면 나를 붙잡고 있는 ‘아는 것’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지금 내게 필요한 시각은 무엇일까? 어떤 기존의 언어가 새로운 관점을 방해하고 있을까? 이 과정을 내 몸은 견딜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용기를 내서, 잠깐 각성하는, 쉬운 ‘부활’rebirth 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갱생’regeneration을 할 수 있을까.”
“(155) 융합은 사회가 요구하는 가로지르기이며 앎의 변화다. 여기서 필요한 태도는 아는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다른 입장에 대한 탐구력이다. 평생 확신해 왔던 자기 인식과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 새로운 진실에 맞닥뜨리는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간혹 지적이고 윤리적인 이들은 극심한 혼란을 겪고 '낭인'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변화 시키지 않는다.”
나를 붙잡고 있는 ‘아는 것’에서 탈출하는 앎.
“아는 것은 힘이다” 혹은 “세상은 아는 것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흔해 빠져 지구를 해치고 있는 세계 속에서 오랜 기간 나의 위치는 ... 나는 종종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하고 생각하게 될 때가 있는 데 (지금은 여자라서 다행이라고 안도하지만) ... 많이 가르칠 필요 없는, 너무 무식하지는 않은 적당히 알 것 들만 알면 되는 그런 계급, 계층의 여자애였고, 나 역시 그게 맞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공부란 걸 하고 싶다는 마음을 스스로가 알아차려 주지 못했다. (공부를 탁월히 잘했다면 조금 달랐으려나?) 내가 속한 세계에서 나의 포지션은 알아도 모르는 척이 미덕이었고, 아는 척은 비호감으로 찍히기 좋은 자질이었던 것 같다.
요 근래까지도 스스로 알고자 하는 용기를 과계몽이라면서 은근히 탓(물음표가 많은 나를 사람들은 속 시끄럽다며 좋아하지 않았다)했다. 몰랐으면 좋았을 걸… 하면서 운 적도 많다. 사실 대부분은 그 이유로 운다. 모르고 싶어... 엉엉... 하면서 운다. 무튼 살아오는 대부분 나는 내가 아는 것이 쓸 데가 없을까봐, 삶을 해칠까봐 두려웠다. 나는 너무 알고 싶은 데, 알수록 알면 알수록 외로워지니까. 내가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것 같으니까. 내가 속한 세계의 사람들과 헤어지거나 다르게 살 용기까진 없었으니까. 음. 뭐. 그랬다.
그래서 *나를 붙잡고 있는 ‘아는 것’* 이라는 문장은, 지식을 구하는 이들에게 태도의 전환의 촉구하는 이 문장이 주는 어떤 무거움은, ‘앎=권력’으로 작동하는 삶을 살아본 사람들에게 조금 더 와 닿는 종류의 것이지 않을까. 나처럼 최선을 다해서 아는 것을 겁내온 사람보다는? (지금은 지적 오만을 떠는 것이 목표로 바뀌었을 만큼... 다 아는 척하면서 와구 와구 씹어 먹고 싶은 지적 허영의 결정체가 나다. 쿄쿄.) 얼렁얼렁 공부 잘해져서 가까운 미래의 나는 *나를 붙잡고 있는 ‘아는 것’*이 무겁게 느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은 그냥 모든 앎이, 다 통째로 새로워서, 거진 무분별함.
어쨌든 (분야를 제도권 교육에서 배우는 일련의 것들로 한정한다면) 나의 지식은 그다지 공부를 하려 한다 거나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덕에 기성의 언어 오염이 덜 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즉 내가 가지고 있던 얄팍한 앎들이 그다지 깊지 않아, 나를 붙잡아 세우지 않았으므로 새로운 지식을 섭취/생산하기 위한 *기존 앎의 폐기*는 상대적으로는 수월한 부분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프게, 혹은 아파야 알게 되는 것들.
에 대해서라면 나도 좀 할 말이 없지는 않은 것이다.
세상에는 수월하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있고, 아프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대충 검색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는 백과사전 같은 정보들을 수월한 앎이라고 하고, 알았다고 느꼈던 것을 하나도 몰라지게 되어 버리는 순간을 아프게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하자. 후자는 지적인 희열이나 쾌감과는 조금 멀다. 그 모름(혹은 몰랐음) 속에서 반성을 할 때도 있고, 배신감에 치를 떨 때도 있고, 나의 순진함을 탓할 때도 있고, 하염없이 겸손해질 때도 있으며... 솔직히 말하자면 대부분 일상의 유지를 위해 합리화(부정)를 한다. 다시 말해 더는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알려면, 아는 걸 다 몰랐다는 걸 인정하고 처음부터 생각을 다시 생각해야하는 그런 앎을 섭취하는 것은 어쨌든 기운을 많이 써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기운도 없고 아프기도 싫어서 알기 싫었는데, 요즘엔 아프더라도 아는 쾌감을 알아버려서 (독학 변태의 탄생...) 뭔가 많이 바뀌어 가지고 지금의 난 모르고 싶은 것일 수록 어쭈? 더 알아봐?하는 식의 긁어파는 악취미를 갖게 된 것도 같은 데, 오늘 쓰고자 했던 것은 이것이 아니고. ㅋㅋㅋㅋㅋㅋㅋ
나에게 가장 아픈 앎을 가져다 준 첫 번째 책은 당연히 정희진이 쓴 <페미니즘의 도전>이었다. (뭐, 이에 관해서는 굳이 쓰지 않아도 다들 비슷하게 겪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인생에서 가장 외롭게 읽었던 책은 <정희진처럼 읽기>였다. 아니, 읽고 난 뒤에 가장 외로워져 버린 책 이려나. “그들은 단지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 것이다.”라는 문장 하나로 정희진은 가해자들을 이해하려는 나의 치열한 노력과 지난한 시도들을 가뿐히 중단 시켜버렸고, 난 덕분에 자유로워졌다. 이미 이별했지만 좀처럼 떠나오지 못하던 많은 것들과 더 단호하게 이별했고, 아주 가끔 인생이 무거워질 때 알 수 없는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는 것만 빼면 대체로 나 자신이 잘사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경험은 뭐랄까 체했을 때 손가락을 따기 전에 바늘 앞에서 느끼는 공포와 아픔 같은 거라서... 검은 피 좀 보고 나니까 트름 나오고 방구 뀌고 그럴 수 있게 되어서... 손 따는 거 이제 안 무섭다. 그러므로, 아프게 아는 맛을 두 번 알려주신 정희진 선생님.
그렇다 하더라도 <정희진처럼 읽기>를 읽을 때, 나는 외로웠다. 너무 너무 외로웠다. 소스라치게 외로웠다. 그 때 처음으로 진짜 외로움이 뭔지 알 것 같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이 책을 권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었고, 그 책의 문장들을 이야기한들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으며, 너무 너무 이 책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는 데, 이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단.한.명.도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방금 검색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거 읽고 쓴 독후감에 당시 모르는 사람1 알라딘 셀럽 다락방이 오셔서 홀로 외로이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감사했습니다. 푸하하 인생은 정말인지 예측불허) 세상에 정희진의 외로움과 나의 외로움만 존재하는 것 처럼도 느껴지는 외로운 독서였다. 독서의 외로움. 선생님 어쩌라고요. 그러니까 어쩌라고요. 나는 이걸 알고 이제 그냥 살면 되나요? 나는 너무 너무 외로웠지만 외롭더라도 정희진 처럼 읽어야 (어쨌든 이걸 아는 정희진은 살.고.는.있으니까) 다음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심오한가? 아무튼 난 심오했다. 살았고. 읽었다.
세 번째로 동급에 올려놓고 싶어진 이 책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는 읽으면서 진짜로 몸이 아팠다. 아프다는 건 감각 하나하나가 날 서는 것이라 약 없이 견뎠던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첫날 밤은 들숨과 날숨에도 세포가 공기에 쓸리는 것 같았다. 바이러스 덕에 내게 피부라는 얇은 막이 둘러쳐져 있어, 외부 세계와 분리되어 내부가 바깥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형체를 갖춘 채 공기와 접촉하고 있구나....를 알게 되었다. 세상과의 경계면을 고통을 통해 선연히 느끼다니(크으-) 이것이 바로 몸으로 깨우친 앎ㅋ이올시다.ㅋ
“(167) 한 가지 시각으로는 문제를 파악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다. 아니, ‘해결’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해결인가? 피해의 기억은 투쟁을 통해 재해석할 수 있지만,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나마 자기 갱신만이 해결에 가까울 뿐이다.”
“(171) 사회 변화는 지식의 재해석에서 시작한다. 재해석은 기존의 의미를 해체함으로써 의미를 생산, 확대, 다양화하는 과정이다. 크게 두가지 방식이 있따. 개념 내부의 차이를 드러내거나 개념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로서 융합이다.”
“(222) 객관성은 중립의 대명사다. 그래서 진리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너의 객관’이 ‘내겐 폭력’인 경우가 많다. 객관은 스스로 선재先在한다고 여겨지지만, *상황적 지식*은 지식이 만들어진 조건을 파고든다. 어떤 조건에서 우리의 인식이 만들어졌는가. 그 과정을 알아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모든 지식은 특정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만사에 적용되는 지식은 없다.”
아프게 알게 되는 앎. 머리로 수월하게 깨우치는 지식이 아니라 온몸으로 상황으로 삶으로 겪어가면서 배우게 되는 종류의 앎들. 기성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가 없어 내게 맞는 언어를 절박하게 찾다가 발견해내는 내 숨을 틔워주는 문장들.
이번에 앓으면서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먼저는 분별없는 인류로서 언제 한번은 바이러스와 융합·공존(?)해야 하는 데, 시의 적절 맞춤 하게 바이러스가 찾아와주셔서(?) 마음 편히 앓았기 때문이었고.
다음은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를 읽으면서 앓았기 때문인 건데.
읽으면서 이런 것들을 새삼 다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 년동안 정희진을 읽으면서 아프고 외롭던 시간을 지나, 그가 써내는 글들과 소개한 책들을 꾸준히 따라 읽고 쓴 덕에 획득하게 된 어떤 이해력과 언어가 지금의 나에게 있다는 것.
내가 글을 쓰게(공부하게) 하는 고통을 맛 보여준 삶의 경험들이 있다는 것. 걔네들은 이제 맞춤한 글자들만 발견하면 되겠다는 듯 자신들이 재해석 될 날(물론 나는 공부를 해야한닼ㅋ)을 기다리며 일종의 자원으로 고스란히 내 몸과 무의식에 남아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함께 읽고, 쓰며, 공부해 온 알라딘의 <여성주의 책 읽기>를 통해서 만난, 함께 ‘융합’을 이야기 해볼 수 있는 ‘도반’들이 있다는 것ㅠㅠㅠㅠㅠㅠㅠㅠ (<정희진 처럼 읽기>를 읽을 때 제가 얼마나 외로웠던가요........여러분......... 크흑흑흑 )
나는 그래서
웃으면서 ^^
앓았다고 합니다.
<페미니즘의 도전> 개정 증보판 머리말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26)이 모든 어려움을 돌파하는 데 여성주의 인식만큼 중요한 것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내 처지가 어떻든 간에, ‘지금, 여기의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양보의 결과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다. 그래도 나를 조금이라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방해하지는 않는 사람들에게, 단 한 사람일지도 나를 격려하는 사람에게, 그래도 변화한 ‘성 평등’의 현실 앞에, 이 체제에서도 세상과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살아가는 수 많은 성실한 사람들에게, 육체적․심리적 질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지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감사는 예절이나 긍정적 태도, 마인드 컨트롤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