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상실에 대한 감정의 정당한 반응이다. 슬픈 기분이 들때,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돌아보는 일기를 쓴다. 찾아질 때도 있고, 못 찾기도 한다. 그것들과 내가 헤어졌구나, 그 시간과 내가 이별하는 중이구나, 인식하게 되면 슬픔이 황당하지 않다. 대상에 쏟았던 마음(리비도)을 다시 거둬들이는 시간을 가져야한다. 이별에 따르는 시원섭섭함과 분노, 안타까움 등 다채로운 감정이 섞인 슬픔을 공들여 느낀다. 주춤했던 일상이 다시 돌아오고, 또 힘내어 하루를 산다. 일련의 과정을 프로이트는 ‘애도’라고 했다.

슬픔의 원인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조금 곤란하지만 슬픈대로 내버려둔다. 많이 자고, 웅크려있는다. 슬픔도 몸의 반응이니까. 몸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떠나보내는 중 일 것이다. 그 부분에서 만큼은 머리보다 몸이 똑똑할 때가 많다.

사실, 진짜로 곤란한 것은 이별에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고, 잃어버렸다는 것 자체를 깨끗하게 잃어버린 경우다. 의식화되지 않은 상실. 강하게 부정당한 이별. 중요하지 않아서 잊은 것이 아니라, 너무 너무 중요해서 억압한 것이다. 상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인정한들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을 ‘우울’이라고 한다. 뒤에 ‘증’을 붙여 병리적 현상으로 다루기도 하지만 내 생각엔 우울 역시 감정의 정당한 반응이다. 어떻게 모든 것을 의식의 영역으로 다루나. 세상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부지기수 듯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애도되지 않은 상실은 당신의 무의식에 남아 어떻게든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좋은 영향일지 나쁜 영향일지는 살아봐야 안다. 삶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고 느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무의식이 잠궈둔 상처를 의식화하는 방법도 있다. 이 방법의 주의사항은 삶이 ‘다시’ 제대로 굴러가게 만들어주지 않으며, 삶의 방향 자체를 틀어버리기도 한다는 거다. 그러니 그냥 사는 것도 괜찮다. 상실을 거부한 채 무의식에 깊이 보관해 두는 것은 또 다른 방법이다. 아니, 모두가 그렇게 산다. 어떤 삶의 방향이든 살아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니까. 무의식이 의식화되지 않았다고 두려워 떨 필요는 없다. 어쨌든 우리의 무의식엔 의식으로 올라오면 안되는 것들이 몰래 살고 있다. 치명적인 이별, 너무 아픈 상처들, 일상이 불가능할 만큼 중요한 것, 감춰둔 공격성, 금지된 욕망 등등.



“(178) 우울증 환자들은 자기증오의 형태로 상실을 드러내는데, 프로이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구분을 시도한다. ‘애도에서 무의미하고 빈곤해지는 것은 세계인 반면, 우울증의 경우에는 자아 그 자신이다.’ 마치 자아의 일부가, 그것이 애착을 가졌던 대상과 함께 죽어 버린 것처럼 그 상실이 자아에게 떠넘겨지게 되는 것이다. (…) 프로이트는 식인 묘사에 등장할 만한 용어를 사용하여 우울증 환자가 대상을 다시 소생시키는 과정을 묘사하기도 한다. 대상의 상실에 뒤따르는 극단적인 동일시는 ‘내사內射・introjection’ 라고 하는데, 이는 자아가 은유적으로 상실된 대상을 먹어 자신 속으로 집어넣음으로써 자아 자신이 상실된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 <지그문트프로이트 컴플렉스>, 파멜라 트루슈웰


너무도 소중한 대상의 상실에 뒤따르는 대상에 대한 극단적인 동일시(우울증). 이별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그것을 내 안에 넣고 나 자신의 일부로 여기며 살겠다는 인간 심리의 기묘한 역동. 버틀러는 프로이트의 이 이론을 젠더에 가져와 푸코의 방식으로 전유한다. 결론 먼저 말하면, 욕망이 먼저 생긴 것이 아니다. 욕망은 금지의 효과다. 인과론을 뒤집으면서 그녀는 프로이트의 (논란 많은) 오이디푸스 이론을 비틀어 버리는 듯 다. 정신분석학이 오이디푸스 이론으로 효과적으로 금기하는 무의식은 근친애가 아니라 동성애다.

이른바 *‘우울증적 젠더 정체성/우울증적 이성애’*다. 

 
“(206) 동일시는 대상관계를 대체하는 상실의 결과이기 때문에, 젠더 동일시는 금지된 대상의 성이 하나의 금지로서 내면화되는 일종의 우울증이다. 이러한 금지는 분명하게 젠더화된 정체성과 이성애적 욕망의 법을 허가하고 또 규정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결은 근친상간의 금기를 통해, 또 하나 그 이전에 동성애에 대한 금기를 통해 젠더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아이의 최초 욕망은 부모를 향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아는 ‘근친상간 금기’ 때문에 부모를 향한 욕망을 포기해야한다. 금기에 대한 상실의 반응으로 동일시가 이루어진다. 상실한 대상을 자신에게 옮겨놓고 간직하는 우울증 환자처럼 아이는 처음 욕망한 부모를 동일시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아이는 부모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가? 프로이트는 이 대답을 선천적인 ‘성향(disposition 혹은 기질이라고 번역)’이라는 본질주의적인 용어로 비껴간다.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이것을 심문한다. “(207) ‘disposition’은 심리의 근원적인 성적 사실이 아니라, 에고 이상의 공모와 가치 전환의 행위 및 문화가 부과한, *법으로부터 생산된 효과*이다.” “(210) 결과적으로 법은 억압적인 기능을 행사하기보다는 스스로 자기 확장 전략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억압된 욕망을 착상해낸 것이다.” 즉, 유아의 최초 성향(disposition)은 금지의 ‘효과’로서 생겨난 것이다.

무엇을 금지했는가. 이성애적 근친상간 금기 전에 동성애 금기가 있었다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의식된 상실(근친상간 금기)은 슬퍼할 수 있지만, 의식조차 되지 않은 상실(동성애 금기)은 ‘우울증적 동일시’로 나타난다. 전 사회의 무의식적 동성애 금기로 인해 내가 금지당한 동성애적 욕망은 의식조차 되지 않은 채 내사(introjection)되어 나의 젠더/섹스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우울증적 동일시’가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사실 더 아름다운 것은 우울증적 동일시가 발생하는 ‘기입(incorporation)’에 관한 설명인 데, 문학동네 <젠더 트러블>의 조현준 역자님은 ‘incorporation’을 ‘합체’로 번역(ㅠ_ㅠ무슨 로보트 합체가 떠오른다. 사라살리의 버틀러 해설 번역은 기입으로 되어있다)하셔서 정작 본 책에서의 아름다움은 그 글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기입’은 *우울증적 동일시가 우리의 육체의 표면에 보관된다는 뜻*인데, 프로이트의 용어는 아니고 정신분석학자 에이브러햄과 토록의 개념을 버틀러가 가져온 것이다. <젠더트러블>을 인용하되 ‘합체’를 ‘기입’으로 바꿔서 써보겠다. 

“(214) 우울증을 통해 유지되는 동일시가 ‘기입’된 것이라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기입되는 공간은 어디에있는가? 문자 그대로 몸 안이 아니라면 아마도 그것은 몸 위에 있을 것이다. 몸 자체가 반드시 하나의 기입공간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그 표면적 의미와 몸 위에 말이다.” - <젠더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우울증은 내 몸에 ‘기입’된다. 꼭 젠더 정체성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더라도, 논리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 그러나 내가 잃어버린 것. 너무도 사랑해서 도저히 잃어버렸다고 인정할 수가 없는 것. 또는 애도 할 기회조차 박탈 당한채로 무의식 깊숙히 남겨진 그것들은 ‘암호화’되어 나의 몸에새겨 넣어진다(기입). 

사랑했지만 잃어버린 것들이 내 ‘몸’과 내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버틀러의 시각은 나 자신을 들여다 보게 한다. 받아들일 수 없었던 헤어짐. 때로는 거부했던 상실의 경험들. 도저히 잃고 싶지 않았던 사랑의 흔적들은 (프로이트식으로) 내 자아가 와구와구 다 먹어버려서 그것은 내 몸이 되어있다. 그 모든 우울증적 동일시의 흔적들이 곧 ‘나’ 였던 거구나… 일상을 살면서 마주했던 그 동안의 분열들이 조금은 수월하게 인정되고, 슬픔의 총체와도 같은 나 자신이 보인다. 자아를 잘 보듬어 안아 달래주고 싶다. 잃어버린 지난 사랑들을 여기 듯 내 몸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 

읽으면서 아름답다고 느꼈던 사라 살리의 책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을 가져온다. 물론 아래 글들도 <젠더 트러블>을 인용한 것이다. 다른 맛의 번역이 느껴진다. 버틀러의 ‘우울증적 젠더’를 조금은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04) 버틀러는 ‘젠더 정체성을 우울증적 구조로 보면, 동일시를 완성하는 수단으로 “기입”을 선택하는 것을 이해할 수있다’라고 말한다. ‘젠더 정체성은 상실을 거부하는 행위, 곧 잃어버린 대상 그 자체를 육체에 암호화하는 행위를 통해 완성될 것이다. … 기입은 말 그대로 상실을 육체 ‘위에’ 혹은 ‘안에’해석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육체라는 실체로 드러나게 되는데, 즉 육체가 “섹스”를 말 그대로 간직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반드시 포기해야만 하는 대상 리비도 집중의 저장소가 에고만은 아니다. 육체자체도 일종의 ‘무덤’(인용부호로 표시한 것에 주목하라.)이다. 그러나 상실된 욕망들은 결코 그 안에 묻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육체의 표면에 보존되어 우리의 섹스와 젠더 정체성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

“(105) *모든 고정된 젠더 정체성은 ‘우울증적’이다. 그것은 육체 위에 씌어진 최초의 금지된 욕망 위에 세워져있다.* 또한 버틀러가 단언하듯 젠더의 이 견고한 경계들은 타고난, 거부된, 미해결된 사랑의 상실을 감추고 있다. 우울증적 젠더로 고통(이것이 적합한단어라면)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버틀러는 우울증적 이성애를 ‘증후’라고 부르는데 이는 거기에 병리학적 요소가 있음을 암시한다) 이성애자들만이 아니다. 버틀러는 ‘도저히 존재할 법하지 않은 이성애자를 향한 동성애자의 욕망’은 우울증적으로 자신에게 기입되고 이렇게 그/그녀의 이성애적 욕망이 유지된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버틀러는 우리의 문화가 동성애처럼 이성애를 거부하지는 않으므로, 이성애적 우울증과 동성애적 우울증은 실제 동등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사라 살리


이것은 짚고가자. 버틀러에게 ‘젠더’가 구성된 것이듯 ‘섹스’도 구성물이며 ‘육체’ 역시 구성물이다. 이 모두가 안정적이고 고정된 개념들이 아니다. ‘육체(몸)’의 경우도 단지 ‘물질적’(물질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다)인 것으로 가정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어쨌든 여기까지 읽은 나는 버틀러와 푸코가 가닿는 ‘몸’에 대한 통찰이 궁금하다!!! (언젠가는 더 읽겠지…) 

버틀러는 고정되어 있는 본질주의적/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을 모두 푸코적 ‘담론’의 맥락에 위치시키면서 탈고정화시키고 해체하고 ‘구성’된 산물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푸코를 읽는 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번역이 아니라 이분법적 사고방식이었듯, 버틀러를 읽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고정된 실체를 상정해놓고 이해를 명확히 하려는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인 것 같다. 사라 살리가 버틀러를 ‘총명한 헤겔주의자’라고 표현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인가. telos 없는 부정의 부정의 부정의 변증법, 시작도 끝도 없는 과정으로서의 확실함을 비껴가는 논리 전개는 (번역어라 느낄 수 없지만) 난해하다는 그 자신의 문체를 통해 다른 형태의 사고 방식을 주문하는 것도 같다. 

어쨌든 
disposition의 경우 기질보다는 '성향'이 더 나았던 것 같고 
incorporation은 확실히 합체 보다는 '기입'이 
introjection은 내사나 내투사나 다 어려운 말이라서 ‘투사하고 간직한다’ 정도로 풀어쓴 것 같은 번역에 손을 더 들어주고 싶다. 
(그러나 번역의 문제라기 보다는 책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인용구는 <젠더트러블>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려웠던 번역들. 아아, 조금 슬프다. 
사라 살리의 104페이지 글과 비교 한번 해보시라.


젠더 정체성을 우울증의 구조로 볼 때,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방법으로 ‘합체’를 택한 것은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위에서 말한 도식에 따르면, 젠더 정체성은 자신을 몸에 암호화하고 사실상 살아있는 몸과 죽은 몸을 결정하는, 상실의 거부를 통해 설정될 것이다. 반은유적 활동으로서의 합체는 몸 위에 혹은 몸 안에 상실을 문자 그대로 새겨넣어서 몸의 사실성으로, 즉 몸이 문자적 진리로서 ‘성’을 갖게 되는 수단으로 나타난다. 주어진 성감 대에서의 쾌락과 욕망을 금지하거나 그 위치를 설정하는 행위야말로 몸의 표면을 가득 채운 일종의 젠더 특정우울증이다. 쾌락적 대상의 상실은 바로 그 쾌락과의 합체를 통해 해결되며, 그 결과 쾌락은 젠더 특정적인 법의 강제효과를 통해 결정되고 금지된다.
물론 근친상간 금기는 동성애 금기보다 더 포괄적이긴 하지만 이성애적 동일시가 설정되는 이성애적 근친상간 금기의 경우, 상실은 슬픔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동성애적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경우, 상실은 우울증적 구조를 통해 유지된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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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7-28 13:1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대단하다. 너무 아름다운 글이다. 아마 젠더 트러블을 위한 책들을 읽었기 때문일까요? 정말 대단한 글이에요. 존경합니다. 같은 책을 읽은게 맞나 싶어요.
책도 제대로 맞는 임자가 있다면 젠더 트러블의 임자는 쟝님이네요. 근사해요!!

공쟝쟝 2021-07-28 13:38   좋아요 2 | URL
쓰고 나니 빠진 문단 있어서 추가하느라 요 댓글 인자 봤네요 ㅋㅋㅋ 시간이 많아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한에서 가장 많이 이해하기 위한 독서들과 병행하는 중입니다. (저 헤겔 정신현상학 해설도 읽음요... 비트코인 책 만 본게 아니라고 ㅋㅋ) ‘수행성‘만 중심으로 다뤄지는 <젠더트러블>에 트러블을 일으키고 싶었습니다. 버틀러의 주체, 버틀러의 오이디푸스콤플렉스 비판을 꼭 기억해주세요... 물론 이 글은 제가 기억하려고 쓴 글이라고 보는게 옳겠다요 ㅋㅋ

잠자냥 2021-07-28 15:16   좋아요 2 | URL
다부장님 정말 같은 책 읽은 거 맞아요? :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농담입니다. 두 분 모두 짝짝짝.

다락방 2021-07-28 15:17   좋아요 2 | URL
저는 쟝님 페이퍼 읽으면서 ‘젠더 트러블이 이런 책이었어?‘ 하고 있습니다. ㅎㅎㅎㅎㅎ

공쟝쟝 2021-07-28 16:02   좋아요 2 | URL
아고 ㅋㅋ 몸둘바를 모루겄네요 ㅋㅋㅋ 하지만 전 아직 완독자가 아닙니다… (트러블이 계속 있는 한 주가 되고 있다..)

난티나무 2021-07-28 14: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 공쟝쟝님을 따라가는 게 맞았어요! 마침 어제 이 부분 읽고 아 뭐야 😤 @@ 이랬는데 이 글 보니 어렴풋이 아 그랬던 것이었던 것이었구나! 가 되네요!!!!!!
완전 멋져요 공쟝쟝님!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1-07-28 16:04   좋아요 1 | URL
절대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닌 것 같아요 ㅠㅡㅠ 제가 프로이트랑 푸코까진 어케 해보겠는데, 나머지 프랑스-독일놈들은… ㅠㅡㅠ 아아.. 슬프다..

잠자냥 2021-07-28 15: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 쟝쟝 언니 넘나 잘 쓴다. 이 어려운 책을 읽고 이토록 멋진 글이라니. 백수로 지내는 시간이 아깝지 않도다.

공쟝쟝 2021-07-28 16:05   좋아요 2 | URL
백수를 꼭 이렇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한 성찰 중입니다. 어제는 일할 때보다 의자에 더 오래 앉아있었다구요!!!!!!

잠자냥 2021-07-28 15: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쟝쟝 언니 사회과학 공부 좀 계속 해봐요... (진심으로 적극 권장합니다)

공쟝쟝 2021-07-28 16:24   좋아요 1 | URL
언젠 문학도 좀 읽으람서요… 😒

잠자냥 2021-07-28 16:59   좋아요 2 | URL
아니 뭐 그까이꺼 두 개 다 하세요.

단발머리 2021-07-28 17:37   좋아요 3 | URL
저 요즘에 왜케 잠자냥님 의견에 동의할 게 많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두 개 다 하세요, 쟝쟝님!!

단발머리 2021-07-28 17: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수를 짝! 짝짝짝! 기립박수를 칩니다!!! 출력해서 읽어야할 만큼 너무너무 좋은 글이에요. 대단합니다, 우리 똑똑이 친구!!!
근데 다 이해를 못하겠어요@@ 앞으로도 쟝쟝님이 계속 이렇게 <보충공부> 해 줘야하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전 아직 저기 위에, 우울증적 이성애까지 읽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사실 거기까지 읽어도 이해할 자신은 없구요ㅠㅠ)

무엇을 금지했는가. 이성애적 근친상간 금기 전에 동성애 금기가 있었다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의식된 상실(근친상간 금기)은 슬퍼할 수 있지만, 의식조차 되지 않은 상실(동성애 금기)은 ‘우울증적 동일시’로 나타난다. 전 사회의 무의식적 동성애 금기로 인해 내가 금지당한 동성애적 욕망은 의식조차 되지 않은 채 내사(introjection)되어 나의 젠더/섹스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애적 근친상간 금기 이전에 동성애 금지가 있었다는 주장을 이해를 못하겠어요. 아이의 최초 욕망은 사실, 부모가 아니라 엄마에게로 향하잖아요. 정확히는 주양육자겠죠. 여성이 양육을 하는 상황을 베이스로 두었을 때, 남아건 여아건 엄마를 욕망하고. 엄마를 욕망하던 남아는 근친상간 때문에 엄마를 포기하고 아빠를 이상화하고, 엄마를 욕망하던 여아는 엄마에게는 ‘그것‘이 없다는 걸 알고 아빠를 욕망하는 걸로. 그러니까 남아에게는 한 번의 절망이, 여아에게는 두 번의 절망이 있다는 걸 읽었던 것 같은데. 전 프로이트 이론을 잘 모르지만, 또 그것만으로 설명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근친상간 금기 같은 경우 레비-스트로스는 인류 문화의 시작점이라고 볼 정도로 중요하다고 판단하잖아요. 동성애의 경우, 그리스 로마의 경우와 비교해보아도 현재와 비슷한 즉 ‘차별‘의 대상이 되었던 건 인류 전체 역사를 볼 때 최근의 일이 아니었던가 싶구요. 제 의문은 근친상간 금지가 좀 더 근원적인 인간 욕망의 금지가 아니었을까 싶은 거죠. 모르겠는데 질문하다 보니 더 모르겠어요. 쟝쟝님이 알고 있으리라 믿고 나는 에헤라~~~

공쟝쟝 2021-07-28 19:13   좋아요 2 | URL
그쵸! 그것이 없었다! 남근선망! 팔루스!! 그것을 우리가 대차게 깨야하는데 (이리가레도 성본질주의를 넘어서지 못해 깨지못한) 그걸 버틀러가 푸코를 가져와서 깨버렸어요 ㅡ 제가 이해한 것들을 적어볼께용!

공쟝쟝 2021-07-28 19:13   좋아요 2 | URL
제가 이해한 건 최초의 욕망이 엄마가 아니고요, 욕망이 먼저가 아니고 금지가 먼저라는 거예요!! 푸코의 권력 작동 방식을 보면 권력은 금지하는 게 아니라 생산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끙끙대며 읽은 성의 역사를 떠올려보면요! 때로는 금지를 통해서 생산되기도(?)하죠. 권력이 담론를 통해 흐르는 방식. 아이는 욕망하기 전에 금지를 당하는 데요, 사회적으로 근친상간보다는 동성애적 욕망이 더 먼저 금지 당하니까요, 그런데 동성애적 욕망이란 말해지지도 않은 매우 무의식적인 거라서 (진짜 너무 심각한 억압 ㅋㅋㅋ) 아이는 그 상실을 애도하지 못해요. 우울증. 이 최초의 금지에 대한 억압은 동일시적으로 몸에 기입되는 거죠. 동성애적 욕망이 몸의 표면에 기입된다.

공쟝쟝 2021-07-28 18:39   좋아요 2 | URL
남근이 잇네 없네는 복잡하고 설명도 잘 안되지만, 버틀러의 전유를 가져오면 섹스는 구성된게 되고 젠더 정체성의 혼란들도 설명이 좀더 수월하죠. 이미 이성애문화가 자연스러운 사회에서 오이디푸스 근친상간적 금기는 애도 가능할지 몰라도 동성애에 대한 애도는 아예불가능하니 우울증적 동일시로 남을 수 밖에 없는데 ㅡ 프로이트는 넘나 이성애쥬의자라서 거기까지는 못내다 보고 그럼 최초의 욕망의 주체는 여성성/남성성 둘중 하나를 선택하는 가?에 그냥 본질주의적으로 기질/성향이다라고 말하고 남근 어쩌고 하게 되는 거죠… 근친애적 욕망이 부정당해서 동일시 하는 거다! 이렇게요. 근데 이 오이디~ 이론 자체가 이성애적 프레임안에서 작동하는 것이쥬(말하면서 내가 헤깔려요..)

공쟝쟝 2021-07-28 18:42   좋아요 2 | URL
제가 백번 엉성하게 설명한 것보다 조현준 역자님의 젠더 이야기 를 가져오는 게 좋겟어서! 찾아왓어요!!
“마지막은 인과론의 전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다는 인과론을 신봉해 왔고 그런 의미에서 원인의 본질적 동인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 왔습니다. 예컨대 정신분석학에서는 누구에게나 무의식적으로 근친애 욕망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금지하는 금기가 생겼고, 근친애 금기가 문명의 시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버틀러는 금지해야 할 근친애적 욕망이 정말로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욕망인지 의심합니다. 만약 근친애적 욕망이 인간의 본질적 욕망이라면 동성에게 욕망을 느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없거든요. 그렇다면 정신분석학은 근친애라는 이성애 욕망을 본질적 원인으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 때문에 문명의 금기가 생긴 것이 아니라 이성 간 사랑을 인간의 근원적 욕망으로 확정하려는 정신분석학의 욕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탄생시켰다는 것이지요.

-알라딘 eBook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 (조현준 지음) 중에서”

단발머리 2021-07-28 18:52   좋아요 2 | URL
우앗!! 쟝쟝님!!! 무슨 말인지 딱 알겠어요! 라고 댓글을 쓰고 싶지만 ㅎㅎㅎㅎ 아직도 모르는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문현답의 아름다운 향연. 앞으로도 많은 지도 편달 부탁해요^^

오디이푸스 콤플렉스 때문에 문명의 금기가 생긴 것이 아니라 이성 간 사랑을 인간의 근원적 욕망으로 확정하려는 정신분석학의 욕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탄생시켰다는 것이지요.

는 조현준님 말은 이해돼요. 버틀러의 주장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도, 쟝쟝님 댓글도 대략적으로는 이해되구요. 그런데도 앞으로 갈길 멀었어요 ㅠㅠㅠ 어쩔 ㅠㅠㅠ 완독하신 분 세 분이시던가요. 저는 아직 어쩔ㅠㅠㅠ 하는 사람...

공쟝쟝 2021-07-28 19:07   좋아요 2 | URL
ㅎㅎㅎ 저도 제가 이해한 것이 맞나 싶어요 ㅎㅎㅎ 누가 좀 알려줘.. 하지만 사랑했던 것이 몸에 기입된다는 생각이 너무 아룸다웠어요… 팔루스 선망이론보다 아름다웠으므로 거기에 손ㅋㅋㅋ 다만 순서적으로 왜 동성애적 금기가 먼저여야하는 가에 대해 버틀러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모든 건 주장일 뿐임을 우린 잊지 말아야합니다ㅋㅋ

- 사라살리 책 106페이지
동성애 금기가 근친상간 금기에 앞선다는 주장은, 젠더와 섹스의정체성이 금지에 대한 대응으로 형성된다는 버틀러의 논의에서 결정적이다. 버틀러는 젠더 또는 섹스를 선천적인 것으로 여기는 대신, ‘젠더 정체성은 금지가 내면화된 것이며, 이는 정체성이 형성적인 것임을 입증한다’(GT : 63) 고 주장한다. 여기서 버틀러가 말하는 금지는 동성애 금기이므로, 버틀러의 이론에서 모든 젠더 정체성은 최초의 금지된 동성애적 리비도 집중 또는 욕망에 기초해 있는 것이 명백하다. 만약 우울증이 실제의 또는 상상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며, 이성애적 젠더 정체성이 욕망의 동성애적 대상에 대한 최초의 상실을토대로 형성된다면, 이성애적 젠더 정체성은 우울증적인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발머리 2021-07-29 08:47   좋아요 1 | URL
아침에 일어나 찬찬히 다시 한 번 읽어보았어요.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흐흐흐흐흐흐.
너무 즐겁네요. 이론이 어떻게 몸을 입어가는지 찬찬히 읽어보려구요. 아직도 꽤 남아있는 트러블이 밉지가 않네요.
덥지만 좋은 날 되세요, 슨상님!!!!
 

솔직히 지금와서는 그 말이 그 말 같고 진부한 논의 처럼 보이지만 이 책이 세상에 나올 당시에는 진짜 획기적이었을 것 같다. 버틀러는 1990년 당시 교착상태에 있던 페니미즘 내부의 ‘정체성의 정치’를 <젠더 트러블>을 통해 ‘성별 정체성(젠더)’의 개념 자체를 흔들어버리면서 페미니즘 운동의 또 다른 돌파구를 연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체성의 정치’란 뭔가. 

| 위키백과 | 

정체성 정치는 전통적인 다양한 요소에 기반한 정당 정치나 드넓은 보편 정치에 속하지 않고 성별, 젠더, 종교, 장애, 민족, 인종, 성적지향, 문화 등 공유되는 *집단 정체성을 기반으로 배타적인 정치 동맹을 추구*하는 정치 운동이자 사상을 의미한다. 


내 생각에 이 정체성을 강조하면 전투성(자매들 모두 힘모아 가부장제 뚜까패기)은 참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정체성을 강조’하다 보면 내부에서의 갈등을 거칠게 봉합시켜버리거나 (cf. 백인-이성애-중산층 페미니즘은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해!!) 의도치 않게 여성을 본질화(여성-남성의 차이점을 강조하면서 모성애 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는 거다. 


또 여성 혹은 여성성을 남성의 반대항에 두는 것은 성별 이분법을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은연중에 이성애중심주의를 옹호한다. 이성애는 여남간의 위계질서를 만들고 고착시킨(반대로 여간의 위계질서를 고착화하기 위해 이성애가 동원될지도?)다는 비판은 버틀러 전에는 모니크 위티그가 거의 유일하게 주장한 듯하고... 어쨌든 우리의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통해 당시 페미니즘 논의 안의 ‘젠더’가 이성애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 동시에 ‘섹스’,‘젠더’ 개념의 불안정성을 드러내 보이며 “페미니즘의 정치성은 유지하면서 정체성은 전복하려(조현준)”는 시도를 했다.



“(91) 나는 페미니즘 주체에 전제된 보편성과 통일성이, 주체가 작동되는 담론의 구속력 때문에 상당히 훼손되었다고 주장하려 한다. 실로 이음새 없는 여성의 범주로 생각되는 *안정된 페미니즘의 주체를 어설프게 주장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여성 범주를 받아들이는 데 적잖은 거부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배타적인 영역은 심지어 그 구성이 해방의 목적으로 면밀히 검토되었다 하더라도 그 구성의 강압적이고 규제적인 결과를 드러낸다. *사실 페미니즘 내부의 파편화나, 페미니즘이 재현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페미니즘에 반대하게 되는 역설적 상황은 정체성의 정치학이 갖는 필연적인 한계를 시사한다.*” - <젠더트러블>


음. 그는 시도에서 끝내지 않았다. 당연히 !!전복...!! 이라는 어려운 것을 성공 시켜버린다. 

어떻게? 젠더 계보학을 통해 이분법을 해체하고 인과론을 뒤집으면서. 이렇게 짠. 👇🏻



[<젠더 트러블>의 역자인 조현준님이 친절하게 풀어써주신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속 젠더트러블의 구성]



음… 비타님이 요구하신대로 1500자로 줄일 수는 없어서, 아이패드를 이용하여 그려보았습니다. 잘 따라가 보세요. (오래걸렸다) 저 그림은 1500자 안되지 않을까? 🤭 (내 꼼수!!)


사실 보부아르가 처음에 사회문화적 성으로서 ‘젠더’를 강조한 것은 사회·문화를 바꿀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그것에 힌트를 얻어 생물학적 성(sex)가 바뀔수 없는 것이라면 젠더(gender)는 바뀔수 있는 것이라고 바라보며 이를 기반으로 논의를 전개했다. 그러다보니 섹스/젠더가 따로 놀기 시작했고 섹스는 ‘근본적인 무엇’이 되어버렸다. 버틀러는 그런 본질주의를 두고볼 수 없다. 그래서 <젠더트러블>을 썼다. 그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모두가 담론의 산물로서 섹스가 본질처럼 보이는 것은 지배 담론, 권력 작용의 결과물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부분은 푸코의 영향) 


“(97) 섹스가 불변의 특성을 지녔다는 것이 논쟁선상에 있다면 아마도 ‘섹스’라 불리는 이 문화적인 구성물은 젠더만큼이나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 될 것이다. 어쩌면 섹스는 언제나 이미 젠더였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섹스와 젠더는 전혀 구별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섹스도 젠더도 섹슈얼리티도 - 모두 ‘젠더’가 되었다.😫(맞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치자)

이제 남는 것은 그 ‘젠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는 건데 그것도 책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 젠더 정체성의 구성방식 : 패러디 / 수행성 / 반복ㆍ복종 / 우울증 

(각각 내용은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 깔끔하게 정리 되어있음ㅎㅎㅎ )



우리의 ‘섹스/젠더’ 혹은 ‘정체성’은 정말로 고정된 것이 아닌 불안정한 것이 되어린 것이다. 젠더는 사회적 구성물이며 부유하는 인공물이다. 이것이 뭐시냐면 바로 버틀러가 열어제낀 ㅋㅋㅋ 바로 *여성없는 여성주의*의 탄생이다!! ㅋㅋㅋ 


버틀러로 인해 ‘정체성의 정치’로 시작되었던 페미니즘은 그렇게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놀랍게도 “페미니즘의 도전(!)” 이었나보다. (물론 어디까지나 버틀러의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현실에서 이 논쟁/운동은 치열한 진행형이다. 다만, 이렇게 훌륭하게 교차하고 반목하고 종횡무진한 페미니즘 공부는 즐겁지 않은가?)


우리의 정희진 슨상님의 페미니즘의 도전 개정증보판 머리말을 가져와본다.



“(19-20) *젠더를 ‘여성 문제’로만 인식하게 되면*, 성별은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라 마치 종합 일간지의 스포츠, 연예, 노동, 환경, 정치, 경제, 생활, 패션같은 분야처럼 *사회의 한 분야*로 간주되고, 피해 여성의 규모가 클경우에만 ‘사회 문제’가 된다.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 젠더가 다루어지는 작동 방식*이다. 젠더가 사회 문제 중에 하나이거나 우연히 발생한 부수적 피해 내지 부산물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젠더는 계급처럼 사회와 인간을 형성하는 가장 강력한 재료 중 하나며, 사회 문제를 재구성하고 재창조하는 가장 힘 있는 조물주다. 기존 사회는 이런 인식에 무지하고, 인식한다고 해도 최대한 그 영향력을 외면하려고 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를 당파성, 실천과 같은 철학의 근본 개념을 바꾼 역사상 첫 번째 세계관으로 인식하기보다 ‘노동자의 불만’ 정도로 폄하하는 것과 같다. 젠더를 남녀 간 갈등이 아니라 여성(소수자, 타자……)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사회 구성 원리나 재창조 원칙으로 인식한다면 *젠더는 이슈나 소재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이 된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처럼 ‘노동자’를 중심으로 구체적 경계를 설정하기보다 *모든 경계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유*라는 점에서 더 ‘모호’하고 맥락적이며 복잡하기 때문에 정의하기 어렵다.”

“(45) 인류는 남녀 간의 성차, 차별, 폭력이 생물학적인 것인지 사회 문화적 결과인지, 물질적 토대가 결정적인지 언어(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인지를 놓고 오랫동안 논쟁해왔지만, 내가 보기엔 이러한 논란은 진부하다. 페미니즘 사상의 발달은 이미 이러한 이분법 뛰어넘었고 ‘해결’했다.” - <페미니즘의 도전>


그렇다. 주디스 버틀러는 트러블을 트러블로 해결해버린 것이다. "(83)따라서 나는 트러블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떻게 최고의 트러블을 일으킬 것인지, 또 그렇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인지가 중요한 과제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와. 천재다. 당신. 최고의 트러블 메이커...  


덧, 현재 진도 150페이지. 파트 1까지 읽었어여!! 이틀 쉴께염ㅋㅋ 제가 공부하면서 읽어가는 내용이긴 한 데 혹시 틀린부분 바로잡을 부분 있으면 댓글로 잘 알려주세요~ (소심)


따라서 나는 트러블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떻게 최고의 트러블을 일으킬 것인지, 또 그렇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인지가 중요한 과제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 P83

섹스는 언제나 이미 젠더였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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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7-16 07: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옴마 글자라도 갖고 싶다... 넘나 므찐 필기네요 저는 푸코 권력 거리는 서문에서 두 번 관둬서 ㅋㅋ친절한 구조화다...

공쟝쟝 2021-07-16 09:18   좋아요 2 | URL
쉽게 읽는 젠더이야기 거의 그대로 정리한거예여!!!

다락방 2021-07-16 0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 사라는거죠? 오케 오케!!

공쟝쟝 2021-07-16 09:22   좋아요 1 | URL
빙고! 딩동댕! 와. 저의 의도 바로 찾아내는 깊은 안목에 박수를 짝짝!
다만 저 ‘정체성의 정치‘ 이야기는 <젠더트러블>읽으면서 제가 추가한 부분입니다. 페미니즘 안에서 해결 안되던 논쟁들이<젠더트러블>을 만나 뭔가 쌀가마니 툭 터지듯 탁 열리는 지점. 저는 그것이 기뻤습니다.

단발머리 2021-07-16 0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진심 짱으로 사랑합니다, 쟝쟝님!!!!!!!!!!고맙기는 하지만 그 마음은 자랑스러운 마음에 미치지 못합니다.
나만의 똑똑이 친구는 드디어 버틀러 함정에 빠진 모든 이들에게 한 줄기 빛으로!! 크흐!!!
읽고 나서 나중에 자세히 댓글쓸께요. 아직 모르는 게 많아요! 😘😘😘

공쟝쟝 2021-07-16 09:24   좋아요 1 | URL
우리는 버틀러를 위해 꼭 헤겔까지 읽을 필요는 없었다... ㅋㅋㅋㅋㅋㅋ 우리에겐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가 있다!!! 우리집 앞 도서관 만세!

단발머리 2021-07-16 09: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근데 진짜 노트 정리 실화인가요? 🤭🤭🤭

다락방 2021-07-16 09:15   좋아요 3 | URL
근데 저는 저렇게 노트정리 보는게 더 이해가 안돼요. 글로 밑에 써주는 게 더 좋으네요. 왜 저런거 이해 못하겠지 ㅠㅠ

단발머리 2021-07-16 09:18   좋아요 2 | URL
저도 이해 안 되요, 사실! 근데 노트 정리는 너무 이쁘고! 펜 색상도 이쁘고요 ㅎㅎ
결론만 기억하려고요. 섹스는 언제나 젠더였다.

공쟝쟝 2021-07-16 09:29   좋아요 1 | URL
버틀러 : 난 페미니즘을 구하기 위해 젠더에 트러블을 일으킬거야!!
... 막 설명함 ....
버틀러 : 그리고 트러블을 일으켰어! 이제 젠더는 섹스야!!!
사람들 : 웅성웅성
페미니즘 : 여러분 이제 저는 여성주의읜 동시에 여성주의를 넘어서는 여성주의가 된 것입니다
정희진 : 이 모든 페미니즘을 즐기자!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을 가장 실천하는 거! 오라 페미니즘의 세계관으로!.

잠자냥 2021-07-16 1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아 우리 공자님. 대박이다.... 공자왈- 저 아이패드 저거 실화입니까?

잠자냥 2021-07-16 10:10   좋아요 2 | URL
근데 사실 저도 다부장님 처럼 노트정리 보는 게 더 이해는 안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7-16 10:23   좋아요 3 | URL
동지여!!!!!!!!!!!!!!!!

공쟝쟝 2021-07-16 10:28   좋아요 2 | URL
아니 이 긴글 텍스트 중독자들앜ㅋㅋㅋㅋㅋ 아우 보람없어!!!! ㅋㅋㅋㅋ 정말인지 보람없고 좋아 ❤️❤️❤️❤️ 우리를 짧게 줄이기 세계에서 해방하라!!!!

잠자냥 2021-07-16 10: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근데 어떡해요 공자쟝쟝님 저도 공자자냥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랑 나랑 공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신은 잔인함이라는 세상의 바다 한가운데
친절이라는 섬의 가치를 믿는 사람

그리고 그 섬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

친절은 언어 능력과 같아서,
연습하면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친절에는 전염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진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친절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친절을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공자처럼요.

공쟝쟝 2021-07-16 11:35   좋아요 2 | URL
(파닥파닥 호들갑을 떨며) 우리는 공자쟝쟝 공자자냥 !!!!! 친절한 공자매!!!! ㅋㅋㅋ 왠지 공부도 잘할거 같고 공사도 다망해질거 같고 공히 공공연히 공통의 공자들을 알아보고 싶어진다!!

수이 2021-07-16 1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폰으로 읽기 힘들어 놋북 켜고 노려보면서 읽는 중입니다. 우리 천재 고생하셨습니다! 이해는 저의 몫으로 남겨 놓는 걸로 😉

공쟝쟝 2021-07-16 11:38   좋아요 1 | URL
이해를 돕기위해 그림을 그렸으나ㅠ그림은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지만 글씨는 이쁘다라는 댓글 들 속에 빛나는 비타님의 댓글덕에 아주 흐뭇합니다!!!! 푸하하하!! 이건 비타님을 위해 만든 1500자 내외의 그림이었던 거죠😍

유수 2021-07-16 15: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 선좋아요!! 선물개박수!! 후정독은 밤에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쟝쟝님!!!!!

공쟝쟝 2021-07-16 19:33   좋아요 1 | URL
유수님 말대로 저자가 잘생겨서 어려워도 밉지가 않은 책ㅋㅋ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7-9월 도서 안내, 그리고 기록

책은 언제나 자신의 관점에서 재구성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원천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책 자체를 완전히 해설해줄 것을 요구하는 방식은, 책에 나온 언어를 규정하고 알게 해주는 근원이 된다. 물론 그런 해설이 종결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결코 없다. 
 - <젠더트러블> 초판 서문 79페이지


주디스 버틀러의 말대로 책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팎을 아우르며 이어져 있다. 


책의 원천이 되는 책들을 읽어두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 나온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소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떤 책이 낯선재료로 조리되어 속에 얹히더라도 역시 읽어두는 게 좋은 것은, 그러니까 때때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단 눈으로라도 읽어놓는 것을 권하는 이유는, 어차피 "해설이 종결되리라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의 책들은 내가 이해한만큼을 열어 보여줄테고, 또 나는 남은 여분의 이해를 위해 이어지는 책들을 읽어가겠지. 혹시라도 이 책에 대한 거의 완전에 가까운 인식에 닿게 되는 날, 그날이 바로 그 책이 내게서 만큼은 흥미를 다한 죽은 책이 될테니 이제는 읽기 어려운 책이 몇년 전 처럼 많이 겁나지는 않는다. 


서문을 읽으면서 약간의 당혹감과 또 약간의 흥분에 휩싸였는 데, 내가 지난한 <여성주의 책 함께 읽기>의 과정을 통해서 이 책을 어느 정도 이해할수는 있을 만큼의 독서 근육이단련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그리고 오래 전부터 나 자신도 놀랄만큼 후기 구조주의자들을(-_-;;;;) 이미 좋아하고 있었다는 지점을 발견하게 되서다.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그들의 방식으로 읽고 말하고 생각하는데에 이미 포섭되어 있었다? 아아. 당혹스럽다.


버틀러의 이런 문장들에 엄청 동의한다. 


(p.61) 게다가 문법이나 문체는 둘 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못하다. 지적 화술을 지배하는 법칙을 배운다는 것은 *규범화된 언어를 주입당한다는 뜻이고, 그에 순응하지 않은 대가는 가독성 자체의 상실*이 된다.  

(p.63) 나는 또한 배제당한 삶의 폭력성의 실상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삶'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하며, 그런 삶의 유폐 상태는 삶의 중지나 유예된 사형선고를 의미한다. (…) 이러한 탈자연화의 글쓰기는 단순히 언어와 유희하려는 욕망에서 행해지거나, (…) 극적인 익살극을 지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기 위한 욕망, 삶이 가능해지도록 만들려는 욕망, 그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욕망에서 행해진 것이다.

(p.69) 나는 후기구조주의(…), 그것은 '나'라는 것이 유효한 언어로 표현되기 어렵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런 '나'는 부분적으로 언어 속에서 인칭의 가능성을 지배하는 문법의 결과이다. 나는 나를 구성하는 언어 바깥에 있지 않지만 그런 '나'를 가능하게 만드는 언어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해하기로 그것은 자기 표현의 결속이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당신에게 나의 가능성을 만들어주는 문법을 떠나서는 당신이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이다. 문법을 투명한 것으로 간주하면 인식 가능성을 설정하고 해체하는 바로 그 언어의 국면에 관심을 집중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설명한 대로 그것은 나 자신의 프로젝트를 좌절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까다롭게 굴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 없이는 어떤 '나'도 나타날 수 없는 어떤 문제에 관심을 모으려는 것뿐이다. (…) 언어 안에서 '나'의 불투명성을 이해하려는 노력(…)  


허허..😂. 저 글들을 또 내 맘대로 거칠게 정리하면, 목 넘김이 좋은 진부하고 자연스러운 언어의 사용과 글들은 사회가 환영하는 문법들 속에 있는 언어이므로 소화하기 수월하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사회가 배제하는 이들의 말과 글은 부담스럽고 괴이하다. 그것들은 때때로 난해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내 안에 사회가 소외시키고 있는 어떤 것들이 있고 그것을 말하고 쓰고자 한다면, 아마 그 언어들은 괴상하고 혼란스러운 모양일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와 소통하고 싶어 그것을 사회화된 글로 다듬는다면?! (사회화에 성공하면 소수자의 글쓰기가 아닐테고, 그러나 사회가 배제하는 것들을 지적해야는 겠으니) 그 어려운 소수자-지식인의 줄타기로서의 몸부림이 버틀러 식의 어떤 난해한 글쓰기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 같다는~~ 정도로 풀어쓰고, 이해를 돕기 위해(?) 가져 와보는 다음의 문단(참고로 아래 에세이의 저자는 주디스 버틀러의 충실한 역자기이도 하다).





그들은 다시 살기 위해, 제대로 살기 위해, 계속 살기 위해, "주어진 말이 아니라 찾아내야만 하는 말"(모리스 블랑쇼)을 발굴하려고 한다. 그것은 첫 번째 말이기에 터무니 없고, 들릴 수 없는 말이기에 미친 것이고, 삶으로 충만할 말이기에 쾌락이고, 가난한 말이기에 맑다. "A는 A"라고 하는 사회적 언어는 살아 있는 존재들을 위한 말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 죽은 말이다. 죽은 말 속에서 사는 사람은 얼마나 많이 아플까. 아니 그것은 모욕이다. *나의 유일무이한 느낌과 경험, 삶을 위한 말은 남들도 쓰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 지금까지 나의 말은 장황하고 뒤죽박죽이었다. 나의 말, 결함이 많은 말, 말 같지 않은 말을 알아들으려고 계속 여기에 머물렀다면, 이제 당신은 당신의 동의를 구하길 거부하면서 어쩌면 당신을 공격할 수도 있는 다음의 문장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불구의 삶, 사랑의 말> 89~90페이지.


저자가 이후에 인용해온 글은 모리스 블랑쇼의 글들로 블랑쇼는 누구냐면 우리의 미셸 푸코가 탐독했다던 문학평론가 되시겠다.ㅋㅋㅋ 나는 지난 달에 신나서 블랑쇼의 책을 사고 한문단 읽고 바로 책장 꼭대기 층 맨 오른쪽에 박아 두었다. 단 한 줄도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살아생전 은둔자셨다고 하니, 본인의 책이 유폐당한 들 제자리를 찾았구나 싶을 거다 생각한다. 어쨌든 난해하기로 유명한 버틀러의 글쓰기가 이러저러저러이러한 근거에 의한 글쓰기였다면, 조금은 읽어보마 싶어지지 않을까, 하는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러분. 너무 겁내지 마. 주디스버틀러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닌 것 같아.) 


렇다 하더라도 어렵기는 분명한 책이라서 나역시 가까스로 읽어나가겠지만, 

그래도 이 책 <젠더트러블>을 읽으면서 기뻤던 것은 이미 함께 읽어둔 책들이 있어 든든했기 때문! 

(우리 개 멋짐 뿜뿜 🥰)



- 먼저 읽었기를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던 책 - 





























모두 알라딘 서재안의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멤버들과 함께 읽었거나, 읽다보니 목록이 겹쳐진 책들이다.  위의 세권은 함께 읽지 않았으면 절대 완독 못했을 책이었다. 이 글이 함께 읽기의 아름다움으로 끝맺어진다면 좋았으련만...그러나 문제는... 이 책이라는 잔혹한 뫼비우스의 띠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의 나를 이런 가당치도 않은 장바구니 보관함으로 인도하고 있다. (끔찍한 혼종 같아 보이지만 나름 내적 일관성이 있는 도전 목록이다) 푸하하하하하하!!!


게일루빈이랑 맥키넌 꼭 읽어야겠고, 이리가레 크리스테바 너무 읽고 싶어졌고, 그러려면 프랑스 현대철학이랑 현상학, 실존주의, 여타등등 좀 더 알고 싶고... 으아앙!!! 😭 나 부양 고양이 있는 가장인데, 언제 다 읽노..  미쳐따. 이와중에 기본소득 - 사회주의 - 젠더분업화 - 가사노동 - 등등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으아아// .... 



- 버틀러를 만나 장마 때 개천 불어나듯 불어나고 있는 나의 알라딘 장바구니 - 


































책들이 막 다 한권에 삼만원 넘는것도 있고.

문제는 저 책들을 집에 꽂아둘 데가 없고. 저놈의 책들 이고 지고 2년마다 이사다닐 생각을 하면 으어어. 

책도 사고 집도사야 하니까 아무래도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주식... 주식으론 부족해... 그래... 코인... 펀드...!!!!...중얼중얼...

그렇다! 나는 신자유주의 페미니스트!!다!!!!!



미니즘 책 읽기로 시작하여 어느덧 채콴자(책환자)가 되어버린 이의 결론은 부동산. 자본의 자기증식보다 더 빠르고 심각한 욕망의 도서목록 증식. 제가 하고 있는 이 말같지도 않은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요? 너무 어렵게 느껴지신다고요? 이것은 문체 스타일의 문제로 근대가 채 포섭하지 못한 사회화되지 않고 남은 잔여물이 마저 사회화되기 위한 몸부림.

책은 언제나 자신의 관점에서 재구성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원천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책 자체를 완전히 해설해줄 것을 요구하는 방식은, 책에 나온 언어를 규정하고 알게 해주는 근원이 된다. 물론 그런 해설이 종결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결코 없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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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7-06 14: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으악 저런 문장들을 읽고 동의하시다니 ㅜㅜ 전 뭔소린가 싶습니다..(먼산)

공쟝쟝 2021-07-06 15:11   좋아요 4 | URL
저 개정판 서문은... 책이 어렵다는 비판에 직면하여... 자기가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을 고칠 생각이 전혀 없다는 합리화의 문장인듯 하옵니다.

난티나무 2021-07-06 15: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쟝쟝님 존경합니다. 많이!!

공쟝쟝 2021-07-06 15:28   좋아요 2 | URL
우리 함께 읽다보면 자기 자신을 존경하고 있는 모습을 1년안에 발견하실 겁니다. 나만믿어요. 함께하자!!

다락방 2021-07-06 15: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젠더트러블 읽는 동안 쟝님 페이퍼 여러번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기 살구칵테일 저거 나 있다? 있기만 해요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1-07-06 15:29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버틀러 안좋아한다고 ㅋㅋㅋ해놓고 버틀러 옹호하고 있고…. 푸코 싫다고 하면서 푸코 구글링하고 있고…. ㅋㅋㅋㅋㅋ 클났어 우씨…

유부만두 2021-07-07 10: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채콴자 365호 인사 전합니다. 앗, 제가 0을 두개 빼먹…

공쟝쟝 2021-07-07 10:28   좋아요 1 | URL
🙇🏻‍♀️아니 이런 365호라니 높은 기수!!! 저는 4865호입니다!! 슨배님!

syo 2021-07-07 11: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겁나 똑똑이!

공쟝쟝 2021-07-07 16:47   좋아요 1 | URL
시끄럽지만 그와즁에 똑똑함이 바로 내 코어!

잠자냥 2021-07-07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채콴자 이거 너무 좋네요. 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1-07-07 16:48   좋아요 2 | URL
그쵸 ㅋㅋㅋ 이거 유행어로 밀어봐야지 !!! 채콴자!!!! 알라딘 채콴자들~~~

단발머리 2021-07-13 15: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냥 내 생각이에요. 쟝쟝님 열씸히 부지런히 버틀러 읽게 해놓고, 천천히 쟝쟝님 페이퍼 따라 읽으면서 버틀러 정리해야겠어요.
방법은 그거 하나뿐이에요! from 아직 버틀러 시작 안 한 1인

난티나무 2021-07-13 16:48   좋아요 3 | URL
어쩜, 제가 한 생각과 꼭 같습니다. 저도 공쟝쟝님 페이퍼 따라 갈려구요.

공쟝쟝 2021-07-13 17:52   좋아요 2 | URL
오늘치 버틀러는 다 읽었고 (젠더트러블 집어던지고 버틀러 해설서 읽음ㅋㅋㅋ) 저는 어쩐지 그리워진 여혐문청 스팅고를 만나러 소피의 선택을 펴봅니다…

유수 2021-07-14 2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쟝쟝님 이 글은 일단 참말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먼저 읽었기를 다행인 책 저는 아무것도 안읽었으니까. 나에게 우쭈쭈…! 저는 구월부터 하는 젠더트러블 공부모임을 신청했습니다. 그러니까 칠월에 글자만 구경할거예요 글자만..

공쟝쟝 2021-07-14 22:1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글자 구경!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꾸준히 해야하는 것! 그러다보면 나의 자산이 되는 것! 걍 읽기 ㅋㅋㅋ 함께 읽으면 글자만 읽어도 신납니다🤗

건수하 2023-03-20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해서 일 거의 안하고 서재에서 놀았더니 마음이 급해서 안 읽혀요...
마음이 안 급해도 잘 안 읽힐 것 같긴 한데 ㅋㅋ

(출근해서 다시 읽었어요)
 
메리, 마리아, 마틸다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75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메리 셸리 지음, 이나경 옮김 / 한국문화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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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리>

메리가 사랑한 사람들이 다 죽은 게 아니라, 메리는 죽을 사람들에게만 사랑을 느낀 것이다. 오늘날의 임상심리학 도움을 받았더라면 그녀의 죽음까지는 막을 수 있었을 것 같은 데. 아, 딱한 메리. 그렇지만 병약 (중요 💫별표)소년 스타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녀가 “(p.15) 동정심의 노예”라는 사실에 일단 호감을 느꼈고(허영심의 노예, 성욕의 노예, 이기심의 노예 보단 낫지 않아요? 호호)… 동정심이 일면 상냥해지는 그녀의 모습에 뜨끔해지고 말았는 데(낫고 말고가 어딨냐. 노예 안 하면 되지. -_-;;) ….

“(p.18) 그러다 메리는 앤이 아프거나 불행한 탓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면 상냥한 마음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와 마음을 채우는 바람에 온갖 상념은 밀려났다. 이런 식으로 어머니의 질병과 친구의 불행, 자신의 불안으로 인해, 메리의 감수성은 자극을 받았고, 또한 발휘되었다.”

가족안에서 돕는 역할이 기대되는 방식으로 양육되고, 또 사회 전체가 ‘미덕’이라는 명분으로 칭송하며 그 모습을 강요한다면. 그가 아무리 독립적이고 사색적인 성향을 타고났다 한들, 어쩌면 그 독립성과 사색이 바탕이되어 되려 더 지독하게 헌신하는 형태로 ‘자아 실현’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메리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형질의 마음을 앓아본 적 있는 나는 책을 읽다 말고 그런 생각을 했고, 노트에는 이런 문장을 적어 놓았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나는 무가치한 사람이 되는가?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에 대한 생각 해보기’

만약에 방탄소년단 말대로 ‘선한 영향력’이라는 게 있다면은 그것은 ‘영향력 없음’에 가까울 걸?이라는 주장까지하게 된 내가 오랫동안 포기하지 못했던 것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다. 항상 필요하다는 요청 앞에서 모질지 못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조직에 헌신하길 기꺼워했다. 내가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쓰는게 참 헤펐다. 

필요한 사람 혹은 도움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의 이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무력감? 영향력? 뭐 이 정도까지 사색을 진전시켜보다가 이내 그만두고 만다. 이 문제는 내 마음 안에서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다. 그러니까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된 나 자신에게 더는 무가치함을 느끼지 않는다. 아, 나는 한 뼘 자라난 것 같다. 뿌듯해. 흐흐.

“(p.49) 여인들은 메리처럼 지각 있는 사람이 그렇게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고,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둥, 시시한 말로 평범한 위로를 시작했지만 메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메리는 손을 내저으며, 견딜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앤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제게는 다른 친구가 없어요. 앤을 잃는다면, 제게 세상은 사막과도 같을 거예요.” “친구가 없다니.” 모두 함께 되물었다. “남편이 있잖아요?” 

이 부분은 페미니즘의 대모 울스턴크래프트 님의 블랙 코미디적 연출이 돋보여서 가져와봄. ㅋㅋㅋ

“(p.65) 사랑할 사람을 갖는 것에 익숙한 메리는 애정을 쏟을 상대에게 마음을 주지 못하면 외로웠고, 위로받을 수 없었다.”

아. 그러게 말이다. 왜 우리는 사랑할 사람을 갖는 것에 익숙한 걸까. 왜 우리는 애정을 쏟을 대상을 필요로 하나. 인간은 정말로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가. 메리야 말로 자신의 넘치는 애정을 쏟기 위해, 대상들을 이용한 것이 아닐까. 메리의 상냥한 동점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죽어야만(?) 하는 그들은 어쩌란 말인가. 

예전에 가까운 지인들에게 종종 (임시적) 탈연애를 권하곤 했었는 데, 쉬지 않고 애정을 쏟을 대상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에게 차라리 덕질을 하라고 권했다. 눈을 떠!! 그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할 사람이 필요한 너의 환상이야!!!! 제발!!!! 그 지인들은 연애도 하고 덕질까지 함께 했다. (뭐랄까.. 어떤 의미로는 굉장히 현명하다!!!) 쓰다보니 결혼해서 잘들 사는 지 모르겠넴ㅋㅋㅋㅋㅋ 

덕질도 사흘 이상은 하지 못하는 저는 애정을 쏟는 대신 애정의 조건에 대해 분석해 봅니다. 아아, 그저께 읽은 책에서 이런 문장이 나오더라고요?

“(p.156) 연애 감정도 결국에는 어느 정도 구성되는 것이다. 사랑은 특정 조건이 갖춰지면 발동되는 ‘부호화된 감상’ 일 수 있다. 문화는 감정 경험을 조직화하고 해석하는 틀이다. 우리 사회의 높은 연애 농도는 어떤 관계든 조금만 친밀하거나 만남이 잦으면 금방 로맨틱하게 버무려버린다. - 이진송,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아무튼,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라는 노희경 시인의 시는 부분적으로만 옳다.
당신의 남는 사랑력에 대상들을 이용하지 말지어다.

그리고 울스턴 크래프트는 알고 있다.

“(p.99) 그때까지도 메리는 체념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헛된 희망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2. <마리아>

“(p.127) 여성이 겪는 고난은 억압받는 인류의 고난과 마찬가지로 억압하는 이들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일 수도 있다.”

라는 멋진 서문으로 시작하는 소설 <마리아>는 등장하는 모든 여성인물들의 고난이 너무 켜켜해…. 숨 막혔다. 아이쒸, 진짜 18세기 여자의 일생… 소설로 읽으니 더 처참했다. 당연히 마리아 보다는 제미마의 이야기를 유심히 읽었고, 종종 계급 문제를 등한시 했다고 비판받는 울스턴크래프트는 깊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p.185-6) 
“어떻게 자유를, 그리고 윤리 향상을 옹호한다고 하면서 작가들이 가난이 악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어요.”
마리아가 껴들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가난의 독특한 행복에 관해 설명하기도 하잖아요. 그 행복이라고 해봐야 사람이 양식도 제대로 벌 수 없다면, 그저 동물처럼 아무것도 안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정신은 작은 방에 갇힐 수밖에 없겠죠. 그리고 그 방을 지키는 데 정신이 팔려서 밖으로 나다니며 향상을 추구할 시간도 없고요. 날마다. 힘겨운 노동을 하지 않으면 죽는 사람들에게, 지식을 주는 책은 닫혀있어요. 그리고 사색이나 정보에 자극받는 호기심은 썩고 있는 무지의 호수에서는 움직이는 일이 드물어요.
제미마가 대답했다. “제가 지켜본 바로는 가난한 이들은 우연히 생겨난 편견에 고집스럽게 집착해 더 나아질 수가 없어요. 그들은 어느 정도 사고하거나 반성할 시간이 없어요. 모든 방면에서 충족감을 주는 유일한 근거가 되는 행동의 원칙을 세울 만큼 정신을 단련시키지도 못하고요.””

2021년의 대한민국. 가장 페미니즘이 필요한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 파고들지 못하는 이유일 수도 있고. 요즘 나의 페미니즘 공부가 주춤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꾸 어딘가 갸웃거리게 되는 지점들에는 분명 계급의 문제가 있다. 
나를 다른 이들의 자리에 세워보려는 생각. 그 생각을 해볼 수 있는 마음의 여력, 시간, 결국 돈, 그러니까 자유.

“(p.220) 사실 우리가 사귄 첫해 동안에 조지는 내 마음에 조금도 들지 않았어. 하지만 그는 종종 나와 의견이 같았고, 내 감정과 같은 감정을 가졌지. 그리고 달리 애정을 가질 상대가 없었으니 나는 숙부의 제안을 기쁘게 들었단다. 하지만 연인을 얻기보다는 자유를 얻을 생각이었지. 겉으로는 내 행복을 간절히 바라는 척, 조지가 내게 당시의 괴로운 상황에서 벗어나라고 재촉했을 때, 내 가슴은 감사로 벅차올랐단다. ”

자유를 얻기 위해 선택하는 게 결혼이라니…. 근데 페미니즘을 알기 전에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요? 지금도 많이 그렇게들 생각하지 않나요? 솔직히 원가족 보다 나은 가족을 만들게 되면 조금은 더 자유로워지는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는 살아봐야 안다는 점에서 어쨌든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결혼’이라는 거대한 가부장제의 사기극을 울스턴 머모님께서 무려 1788년에 소설로 써서 낱낱이 이미 밝혀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녀가 얼마나 결혼을 싫어했는지는 소설 <메리>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는 데, “(p.121) 메리는 장가도 시집도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ㅋㅋㅋ 앍ㅋㅋㅋㅋ 주인공이 죽으면서 마지막 대사가 천국엔 결혼이 없다고 하는게 실화냐고 ㅋㅋㅋ

읽기에 좀 더 즐거운 번역을 가져와 본다.

“(p.40) 두 번째 저작인 소설 「메리(Mary, A Fiction,1788)는 자전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고드윈의 평가처럼 사건은 별로 없으며, 폭력적인 아버지와 약한 어머니에게서 보살핌을 받지 못한 딸이 강한 여성으로 성장하면서 절친한 친구와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성장기 가정환경과 파니 블러드와의 관계가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여주인공 메리는 친구 앤이 죽은 다음 결혼을 하기는 하지만, 결국 자신도 약해져 가는 건강상태 속에서 “결혼하는 일도 없고 결혼당하는 일도 없는 별세계”(that world where there is neither marrying, nor giving in marriage)로 가게 되리라고 예상한다. 이 우울한 서술 속에는 당시의 결혼제도에 대한 울스턴크래프트의 회의적인 태도가 드러나 있다” -한정숙, 여성주의 고전을 읽다


3. <마틸다>

읽기 전에 <프랑켄슈타인>을 읽은 감동이 아직 덜 빠져서 기대했는 데, 재미없었다. 음… 메리 셸리가 도전적인 천재 작가라는 건 잘 알겠다. 아… 뭐랄까 급진적인데 안 급진적이야…ㅋㅋㅋ 작가님 무슨 말하고 싶으셨을까요? 제가 그 뜻을 아직 헤아리지 못하겠나이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의 짬바가 느껴지는 이 아름다운 문단은 적어 놓도록 할게요.

“(p.393) 나는 나 자신에게, 후회와 사라진 희망만을 영영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고독한 존재에게 몰입했다.
내 삶은 할 일도 없고, 쓸모도 없는 삶이었다. 그랬다. 하지만 폭풍이 지나간 뒤 쓰러진 백합은 일어나서 전처럼 꽃을 피운다고는 말하지 말라. 내 심장은 죽음의 상처로부터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와 다르게 살 수는 없었다. 종종 겉보기에는 고요했지만, 절망과 우울이 찾아왔다. 그 어떤 것도 흩어놓거나 극복할 수 없는 어둠이었다. 삶이 싫었고, 아름다움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발작적으로 나를 거의 소멸하곤 했다. 아무리 평온 한때라도, 단 한순간도 죽음을 달라고 기도하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무로 기꺼이 변화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틸다여, 본인 소유의 오두막도 있고 도망친 그곳에서 마저 하녀가 있어서 그래요… 
하녀 없었으면 할 일 많았을 걸요? (뾰족하게 튀어나오는 비뚤어진 마음…ㅋㅋㅋ)

책 읽고, 알라디너가 추천해주신 ‘메리 셸리-프랑켄슈타인의 탄생’ 영화도 봤다.
영화는 책으로 읽게 된 메리 셸리에 대한 정보… 딱 그 정도? 그저 그랬다.


***

아휴. 5월의 도서를 끝냈다! 6월의 도서를 읽기 전에 독후감 써서 다행이다..
사실, 3월 4월 책들이 훨씬 재밌었는 데… 역시 글은 너무 잘 쓰고 싶어 하면 못쓴다.
앞으로도 막쓰자…;;;;; 응? 일단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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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5-31 14: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고 며칠은 끙끙대야 써지는데 일단 쓰자 하고 써도 나중에 다 고치게 되요.^^;;

이 책 리뷰가 계속 올라오는데 언제 읽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공쟝쟝 2021-05-31 18:52   좋아요 3 | URL
전 읽고 독후활동을 꼭 하자라고 마음은 먹는데, 다음책 빨리 읽고 싶어져서 ㅠㅠㅠ 미루다가.. 하하하하하… 메모는 많이 하는 데, 쓰는 양은 항상 처참… ㅋㅋ 하지만 다음달엔 다시 태어날거야!

다락방 2021-05-31 14:4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ㅋㅋ 마틸다 읽고 저도 그생각했어요. 뭐여..세상하고 등져도 하녀 있고 돈 걱정 없고.. 라고요 ㅋㅋㅋㅋㅋ

5월 책 완독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렇게 리뷰 적느라 또 고생하셨고요. 우리 6월달에는 재미진 책으로(제발) 만나요! 그래서 열심히 열심히 쓰도록 합시다. 여성주의 책읽기 만세, 만세!!

공쟝쟝 2021-05-31 18:54   좋아요 3 | URL
ㅋㅋ 앍ㅋㅋ ㅋㅋㅋ ㅋㅋㅋㅋㅋ 그쵸 ㅋㅋㅋ 하녀?? 읭??? 역시 ㅋㅋ 우리들의 킬링포인트ㅋㅋㅋㅋ
6월의 책아 기다려라!!!! 난 6월에 새롭게 태어난다!!

미미 2021-05-31 14: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틸다>요기조기에서 <프랑켄슈타인>의 느낌을 감지하고 신기했어요! 이것도 가수들의 ‘지문‘같은 작가만의 색깔인지 동일 작가란걸 몰랐어도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기‘라도 내 색깔좀 갖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됨요. 다음달도 파이팅입니다~^^♡

공쟝쟝 2021-05-31 18:57   좋아요 4 | URL
일기라도 내 색깔 갖고 싶다!는 말 공감이요. 저만 쓸 수 있는 독후감 쓰려다가 언제나 못쓰고 말아버리지만…. 일단 쓰는 것 부터 해보아요!! 🥳 힘내자 힘 🥳

붕붕툐툐 2021-05-31 2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왕~ 완독 축하드려요! 그냥 막 써도 잘쓰실 거면서~😉
6월엔 진짜 나로 다시 태어나기!ㅎㅎ

공쟝쟝 2021-06-01 08:38   좋아요 0 | URL
태어났다!!!!

난티나무 2021-06-02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는 동안 많이 삐딱했었습니다.ㅎㅎㅎ

공쟝쟝 2021-06-03 14:25   좋아요 0 | URL
그런다니깐요 ㅋㅋㅋㅋ 내 밥그릇 내가 치우는게 페미니즘인데.. 하녀라니.. 하녀라니...
전 돈벌기 힘들고 육아 힘들어서 베이비시터 가사도우미 도움받는 것 찬성하는 데...
그래도... 할일이 없다니..없다니.. 할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없을 수 있지.. 없.... 그치만.... 암튼 마틸다 좀 그랬어...
해설 읽으면서 그럴 수도? 그랬지만 별로였...

공쟝쟝 2021-06-03 14:27   좋아요 0 | URL
라고 쓰면서 갑자기 든 생각인 데, 현재시점에서 놓고보면 ‘마틸다‘가 일종의 우울증이나 기분전환장애를 앓고 있었다고 치면 또 하녀나 조력자의 도움을 받는 것도 퍼뜩 이해가 되네요 ^^? 하아.. 정말 저란 사람.. 여자에게 무한히 관대한 매력적인 사람 ㅋㅋ

난티나무 2021-06-03 14:46   좋아요 1 | URL
돈 안 벌어도 되고 육아도 안 하는 여자가 가사도우미 쓰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순수한 질문임...^^
아 그래서 저 이 책 알라딘서 인쇄불량 반품 받아준대서 그냥 반품할까 교환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입니다. ㅎㅎㅎ
공쟝쟝님 = 매력적인 사람!!! 완전 !!!!

공쟝쟝 2022-03-12 01:52   좋아요 0 | URL
여성 가사도우미에게 월급 500주면 쌉 가능! 더 비싸게 주면 쌉쌉 가능! 내가 그 집 가서 일함.

공쟝쟝 2021-06-03 15:04   좋아요 0 | URL
일단 돌봄노동이랑 가사노동 등에 대한 가치가 너무 평가 절하되어있는 것도 문제예여. 뭐랄까 가치 재평가해서 돈이 확 올라가면... 평균임금보다 많이요! 가사노동, 남자 주부, 남자 베이비시터 많이 생겨날거라고 생각해요. 부작용? 생각 안해요 ㅋㅋ 일단 도입해보고 ㅋㅋ

난티나무 2021-06-03 16:46   좋아요 0 | URL
도입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내가 그 집 가서 일함‘ ㅋㅋㅋㅋ
 

동생이 차곡차곡 모은 스타벅스 쿠폰(?)으로 타다준 2020년의 몰스킨 일기장이 4/5는 채워져있지 않은 고로(작년에 거의 못씀) 2021년의 일기를 2020년 일기장 빈칸에 색깔이 다른 펜으로 적는 중이다(종이를 아껴쓰는 착한 사람입니다). 가끔 작년의 일기를 읽으며 어제처럼 생생한 느낌을 받곤하는 데... 2020년 4월 29일의 나는 맥주에 안주로 고로케를 세개 먹었다. 


“고로케 세개는 느끼하다. 과유불급. 두개에서 딱 끊어야 한다. 내일부터 연휴다. 나는 맥주 책 영화 그리고 또 맥주 책 영화… 상상만으로도 행복하잖아. 너무 좋잖아!! 행복은 정말 언어가 없나보다. 쓸말이 없다. 그냥 어. 음. 행복하다.”

휴일. 맥주. 책. 영화. 네가지 조합으로 언어마저 잃은 행복감을 느끼던 나를 떠올리니… 오, 역시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이 바뀌는 법. 요즘은 매일 매일이 휴일인데 영화는 볼 생각이 안들고, 책은 슬슬 지겨워지고, 맥주는(!) 주말 말고는 안마신다!! (고도 적응형 알코홀릭에서 벗어나려 미세한 노력 중) 매일 매일 행복하긴 하지만 은은한 행복이라서… 고작 3일 연휴로 격렬한 행복함을 압축해서 느끼는 당시의 일기를 보니… 작년의 내가 너무 짠해😭 (정말 고생 많았다 과거의 나여) 어쨌든 일년이 흘렀고, 그 사이에 동네 고로케 집은 문을 닫았다. 코로나19의 영향이 컸겠지만, 생각해보니 그 후로 난 고로케를 사먹지 않았던 것 같아, 친절했던 주인 아주머니 죄송해요. 자주자주 조금씩 사먹는 거였는 데, 무식하게 간식을 배불리 먹고 질려서 잊고 지내버렸… 😢 모처럼 생각나서 찾았다가 문닫은 게 어찌나 안타깝던지. 겨우 1년, 쉽게(그러나 분명히 매우 어려웠을)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잠깐의 애도를.

***

또 이런 메모도 있다.

“나는 대체로 슬프고 아주 가끔 행복하다. 인생뭘까.
눈물 사이로 비치는 빛.”

작년 초봄에 술을 마시며 친구에게 이렇게나(!) 시적인 말을 해줬던 것도 떠올랐다. 당시 N번째의 시험과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스트레스로 졸도를 해버린 썰을 풀며 인생뭘까 진지하게 묻던 그를 나는 쉽게 위로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다. 스스로도 이 악문 채 하루들을 버텨내고 있었고, 친구의 상황도 나 못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만했으면 그만두라는 말은 말이 쉬운말이라서 친구에게도 나에게도 할 수가 없었다. 때로는 견뎌야 하는 시기들도 있었고, 결국은 그만두는 결론을 내더라도 내가 나에게 지는 느낌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는 게 우리가 하는 위로의 암묵적 룰이었다.

솔직히 정말 너무너무 힘든거야. 맨날 욕먹고 야근하고 야근해도 다 못하고. 집에 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자꾸 서러워서 눈물이 터지는 겨. 알지? 나 잘우는 거. 어느 날 또 평소처럼 아 존나 힘들다 쓰바 엉엉 울고 싶다 이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차올랐는 데, 춥기도하고 차마 눈물을 떨구기가 싫어서, 눈에 힘 꽉 주고 그렁그렁 한채로 걸었다? 근데 가로등 빛이 반짝 반짝. 그래서 울락 말락 하는 와중에 그 생각이 들더라. 어, 이쁘다. 하나만 하지. 슬프려면 슬프고 이쁠려면 이쁘고. 근데 슬픈 와중에 이쁘니까. 좀 살거 같았어. 그러니까, 인생은. 인생은 원래 대체로 슬픈건데- 눈물 꽉 찬 그 와중에 뭔가 가로등 빛 같은게 눈물이 뿌연대로 보이고, 그게 보이는 나는 울다 말다 울면서 빛 번지는, 찰나, 엉? 이러면서 콧물을 막 먹으면서 그 와중에 또 이쁘다 이러고 있는 나한테 피식 웃어주는 거. 상황은 눈물나도 나한테 내가 웃어주는 건 할 수 있으니까. 그래. 오오. 근데 이거 내가 말해놓고 보니 그럴듯 한데? 나중에 써먹을테다. 앗싸. 킵킵.

일년 넘게 지난 시점에서 써먹기 위해 적어둔 두줄짜리 메모 발견하고 그날의 불행배틀 술자리를 생생하게 떠올려버렸다ㅋㅋㅋ. 그러고 보면, 기억… 뭘까? 작년에 먹은 세번째 고로케의 느끼함은 기억이 나는 데, 무엇 때문에 눈물이 날 정도로 그렇게 힘들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난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게 맞는 거겠지? 그런데 또 울면서 봤던 가로등의 반짝임은 어제 본 것처럼 잊히지가 않고.

무튼 아주 진심으로 그 이야기를 했다. 인생 밤길에 울다가 만난 가로등 빛 같다고. 엄청 슬픈데 또 슬퍼야만 보이는 것도 있는 것 같다고. 너나 나나 지독히도 의미를 찾아야하는 의미주의자인데 힘들고 슬픈 것 자체도 언젠가는 교훈이 되겠지..? (눈치) 알아, 위로 안되는 거. 나도 위로 안돼. 미안해 ㅜㅜ 위로 안돼서.. ㅜㅜ.. 그냥.. 힘든게 꼭 힘들기만 한건 아니라능.... 인생 단짠단짠... 내 인생 짠짠짠짠짠단짠... 니 인생은 짠짠짜라자라자짠짠짠단짠짠짠.. 뭐...? 술이나 마시라고? 알았어. (한숨) 취하자! 짠!! 이렇게 아마도 우리는 재빠르게 술이나 마시고 헤어졌을 것이다.

나는 그 날의 위로에 대해서 생각한다. 친구는 아마 잊었을거다. 나도 저 두줄을 써놓지 않았다면, 저걸 꺼내서 다시 읽을 기회가 없었다면, 기억하지 못했을게 틀림없다. 어떻게든 친구를 위로해보고 싶은 마음에 아무말대잔치처럼 말로 꺼내 표현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내가 보았던 가로등 빛의 웃픈 반짝임 역시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 거다. 이 글의 시작은 어디일까? 가로등? 메모? 아니, 위로. 더 정확하게는 좋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와 진심이었던 내 마음. 덕분에 글이 보존시켜 줄 것들은, 얻어걸린, 웃펐던 겨울의 가로등.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무상한 것, 슬픈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 불편한 것들을 일상에서 만나고 언어화 시키지 않은 채로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담아둔다.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느꼈던 것들을 더 생생한 언어로 말하게 될 때가 있다. 입 밖으로 꺼내고 난 후에서야 안다. 내가 그것들을 그런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구나 하고. 


잊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기장에 휘갈기듯 적어놓거나, 스마트폰 메모 어플에 메모해둔다. 짤막짤막한 단상들로 이루어진 메모와 문장들에 기대어 요즘의 나는 제법 긴 글을 쓴다. 썼던 글들을 읽어보면 그 느낌들을 온전하게 복구시킬 수는 없지만, 얼추 비슷하게 클라우딩 되어 있구나 싶어진다. 요 몇년간 그런 식으로 글을 써왔다(기억이 맺히는 방식으로의). 기억해 둠직한 시간들을 후루룩 쓴 복사본(노트들과 메모장에)으로 잔뜩 가지고 있는 편이다. 예전 일기는 더는 당하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고발 리포트 느낌이 강했으나, 요즘의 일기는 행복해지는 방법에 관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아, 요즘의 나는 행복의 순간에 오래오래 머무르고 싶어하는 구나.

***

반대의 경우에도 쓴다. 어떤 대화의 순간이(좋고 싫고와는 별개로) 인상적이었다면, 집에 돌아오는 길부터 때때로 길게는 한달 까지도 내 안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말들이 빼곡히 쌓인다. 대화의 상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나자신에게 되짚어 물어 보아야할 질문들이라는 걸 알게된다. 나는 또 그 질문들을 메모해둔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질문 자체를 해석하는 글을 써본다. 이 경우는 쓰면서 점점 더 명료해지는 편이다. 쓰지 않았다면 기분이나 인상으로 휘발되어버릴. 글로 적어 내리다보면 열에 일곱은 엇비슷한 내용임을 알게된다. 나 자신이 결론일테니 결국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이 쪽의 글 이란 쓰는 과정 자체가 즐거워서 시간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즐겁다. 비슷한 방식으로 서재에 독후감을 쓴다. 어떤 책이나 문장을 만나고 왜 거기서 눈길이 멈추었는지 나에게 거듭 물어보면서 떠오르는 심상들을 적어보는 것이다.

기억 - 사람 - 질문 - 해석 - 글 - 기억 - 사람 - 질문 - 해석 - 글

치킨을 먹기위해 만난 독서가들은 소설 읽기에 각자의 포인트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포인트를 듣는 것은 너무 즐거웠다. 각자들의 포인트를 훔쳐서 그런 기분으로, 그런 눈🥺을 하고서 읽고 싶어졌다. 아마 나는 또 내 멋대로 오독하겠지만, 오독과 오독 사이에서 확인되는 서로의 다름이 언제나 기꺼웠던 것은 우리, 책에 대해서 만큼은 진심이니까. 진심은 통한다. 아아, 상투적인 표현이라 서글프다... 상투적 ‘진심 통함’이 아니라 각자의 진심들이 있으면, 달라도 어딘가는 통해서 그 다름이 더 사랑스럽다는 그런 이야기다. ... (아, 이역시 상투적이야.. 지울까?)

몇개 째의 닭 조각을 삼키고 배가 부를 때 쯤엔 구관이 명관, 간장맛이 나는 순살 치킨은 역시 교촌이 최고인 듯 하며 속으로 궁시렁댔다. 톨스토이도 도스트도예프스키도 읽지 않았지만 여전히 읽을 생각이 없는 게 전혀 부끄럽지 않은 나는 오로지 최은영에 대한 팬심으로 “소설가는 맘 속에 하고 싶은 어떤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 같아여!!!” 라고.. 말해.. 버렸다. 톨스토이와 쿤데라와 제임스 설터와 줌파 라히리(이름도 어렵네) 사이에 갑분 최은영 던지기!!! (작가님 미안. 그래도 나에겐 톨스토이보다 당신이야…) 저는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읽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데, 이게 문학시간에 배운 주제찾기 이런 학습효과 일지도 모르겠지만(쭈굴), 어쨌든 제가 좋아서 비명 지르는 소설은 제가 하고 싶었던 나 자신도 모르는 어떤 이야기를 정확하게 표현해 주는 소설이예요. 그래서 저는 최은영이 짱이예요. <내게 무해한 사람> 짱....😫 내가 전하는 소설 읽기 포인트에 한 이웃은 자기도 그런식으로 좋아하는 소설가가 있는 것 같다고 동조했고 다른 이웃은 신기해했(던 것 같)다. 뭐, 나는 항상 그래왔듯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그런 방식으로 소설을 읽고 있었구나, 하고 알아차려버렸고. 어쩐지 최은영까이면 내가 까인것 같더라니…. 엉엉, 그런데 내 마음 같은 최은영 작가님 다음 소설 언제나와요…? 


나의 자랑스러운 책에 미친(?) 이웃들은 자연스럽게 ‘쓰는 사람’으로서 읽게 되는 지점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 시작했는 데, 맙소사 그 이야기들도 너무 신기했다. 저렇게(방식) 읽으니까 그렇게(양) 읽을 수 있었구나. 우리 자주 만나요. 저랑 많이 놀아주세요!!! 우리집에서 비록 1시간 45분 걸리지만 저 자주 놀러올수 있어여!!😤

전두엽과 측두엽에서 이 사람들을 붙잡아!!라는 신호를 보내는 게 느껴졌다. 그래 언제까지 내 뇌를 알콜과 맛있는 것으로만 행복하게 할 수는 없지. 좋아하는 걸로 대화하는 거 너무 좋잖아!! (명랑한 은둔자 2달째.. 사람 그리웠구나 나..) 엄청 행복해하며 이야기 듣다가 나는 그다지 ‘쓰는 정체성’을 가지고 글을 바라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되서 적잖이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쓰지? 이런 글을 쓰고 싶다!’ 는 물론 있었지만(cf. 정희진, 푸코, 양효실, 정성일, 보부아르, 엄기호, 김혜리, 신형철 - 대부분 에세이 or 사회과학, 순서는 애정도 순서)… 이것은 사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하지? 나도 이렇게 생각해보고 싶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뇌에 즐거운 자극을 주는 이웃들로 부터 파생되기 시작한 질문 하나.
쓴다.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쓰는 사람’으로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이 여기에 닿자 조금 소름이 끼쳤고, 어렴풋이 그것은 굉장한 자기학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와, 시기심과, 비교와, 약간의 안도와, 결국은 또 질투와, 자기부정과, 시샘과, 질투와, 또 질투로, 점철된!!!!!!! 똑똑. 여보세요들. 많은 작가님들? 혹은 작가지망생, 예비 창작자님들아..? 당신들의 속 안에 어떤 독한 것이 앙금처럼 맺혀있을지내 모르겠으나.. 인생이 뭐냐면요.. 아아, 그것은 눈물 사이로 비치는 빛이라오. 독기 뺄려면 많이 우세요.. 토닥토닥.. (또... 슬퍼짐.. 아, 그 인생 살지도 않았는 데, 생각만으로도 너무 슬퍼😭)

***

난 다행스럽게도 나를 알기 위해서만 쓴다. 썼던. 것. 같다.
내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 서른 살 이후 부터는 더 그랬다.
질문을 조금 더 파고 들어가보자. 내가 쓰는 중심 이유가 나를 알기 위해서였다면, 나는 왜 이토록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일까. 본격 일기쓰기 만4년, 오늘에 와서야 슬쩍 대답해봐야겠다.

오랫동안 자신을 없애 나를 먹이는 헌신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라난 나는 성인이 된 후 사랑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을 어렵사리 폐기처분하면서, 사랑하지 않고-존재하고-싶다 생각했다.

‘사랑=(인어공주처럼)물거품이 되는 것.’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내게 체화된 사랑의 능력이란 게 그런 거였다. (바란다, 내게 인이 박힌 일종의 고정관념을 남을 생을 다써서라도 바꿀 수 있다면.)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있고’ 싶었다. 어떻게 ‘있을’ 것인가? 이제와 끼워맞춰보는 것이지만 나는 내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 때마다 몰래 일기를 썼다. 나는 왜 이모냥일까로 점철된, 대체로 사랑하는 게 힘들고 슬퍼서 쓰는 글이었다. 어쨌든 글을 쓰고 있을 때라도 가장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또한 나는 기억하고 싶었다. 그 기억이 생생할 수록 적어도 당시의 나는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기억을 글로, 글을 기억으로 남겼다. 그렇게 해두면 물거품처럼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있고 싶었다. 내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최근에 울컥한 아이유 노래 가사처럼) ‘겨우 내가 되려고’ 써왔다는 사실을 느끼는 지금, 안도한다.

나를 ‘있는’ 존재로서 자명하게 대하는 것이, 아주 오랫동안 나에게 큰 과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요즘들어 공부하는 페미니즘과도 매우 맞닿아있는 것이라 앞으로는 의식적으로라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질끈 마음 먹어 본다. 이는 스타일을 구축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사라지고 싶지 않다, 존재하고 싶다’는 몸부림에 가까운 것이지만.


이 글은 <메두사의 웃음> 때문에 썼다. 드디어 페미니스트들의 인용글로만 접하던 엘렌 식수를 만나버렸다. 통째로 밑줄을 다 그어서 그냥 안 긋는 게 낫지 않을까? 거듭 읽고 싶었고 문득 쓰고 싶었다. 끝없는 분열을 쓰면서도 명료해지길 원해 부끄러워하던 내 과거의 글쓰기가 사랑스러워지려했다. 나는 불분명한 채로, (알수없음)의 괄호 속에 묶어놓고, ~인 것 같다로 언어의 끝을 애매하게 흐리면서, 아직은 잘 모르겠다로 판단을 유보시키더라도 글을 써보기로 한다.

묶어두지 않은 채로 쓰기. 존재하기 위해 쓰기. 나 자신을 쓰기. 내 몸을 쓰기.
이미 쓰고 있었지만, 쓰는 사람이 되기.

















“(19) 그대 자신을 글로 써라, 그대 육체의 목소리가 들리게 해야만 한다. 그러면 무의식의 거대한 자원이 분출할 것이다. … 글을 쓴다는 것은 행위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여성에게 자기 고유의 힘에 접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여성과 그 성, 여성과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존재와의 탈-검열화된 관계를 ‘실현’시킬 것이다. 탈-검열화된 관계는 여성에게 여성의 행복, 여성의 기쁨, 여성의 기관들, 봉해진 채로 유지되어 왔던 여성의 거대한 육체적 영역을 되돌려줄 것이다. 또한 글을 쓰는 행위는 여성은 죄인이라는(여자는 매번 모든 것에 대해 유죄이다. 욕망을 가져서 죄, 욕망을 갖지 않아도 죄, 냉담한 죄, 너무 ‘뜨거우’ 죄, 동시에 둘 다가 아닌 죄, 지나치게 어머니인 죄, 충분히 어머니이지 않은 죄, 자식을 둔 죄, 자식을 갖지 못한 죄, 먹을 것을 먹인 죄, 먹이지 않은 죄…) 늘 똑같은 자리만 마련되어 있는 초자아화된 구조에서 여성을 끄집어 내 줄 것이다. ... 반이성적인 무기를 벼루어 가지기 위해 글을 쓰기. 모든 상징 체계 속에서, 모든 정치적 절차 속에서 여성 마음대로, 여성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이해 관계자, 전수자가 되기 위해 글을 쓰기.” - <메두사의 웃음/출구>, 엘렌식수 -

“(443)엘렌식수는 여성들에게 그들 자신들을, 즉 생각할 수 없는 것/생각되지 않는 것을 글로 표현할 것을 촉구했다. 엘렌식수가 여성 자신의 것이라고 확인한 그러한 종류의 글쓰기(표시하기, 낙서하기, 휘갈겨 쓰기, 메모하기)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항상 변화하는 강을 연상시키는 움직임을 내포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엘렌 식수가 남성과 연관시킨 글쓰기는 이른바 축적된 인류의 지혜를 총망라한다. 남성적 글쓰기는 사회의 공식적 승인 도장을 받았기 때문에 너무나 큰 책임을 지고 있어서 변화하거나 이동할 수 없다. -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로즈마리 퍼트넘 통 외-”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자신을 아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에서 나를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어떤 대상과의 동일시인 정체성(正體性, identity), 누구나 지니고 있지만 드러내지 않거나 부정되는 당파성(partiality, 당파성은 영어 표현 그대로 부분성이다). 끝없이 변화하는 과정적 주체로서 유목성,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위치성(positioning), 글과 글쓴이와 독자 사이의 사회정치적 맥락 상황, 흔히 성찰로 번역되는 재귀성……. 이 책을 읽으면서 위의 개념들을 떠올리면 가성비 높은 독서가 될 것이다.
내가 알고 싶은 나, 내가 추구하는 나는 협상과 성찰의 산물이지 외부의 규정이어서는 안 되므로/아니므로 우리는 늘 생각의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글은 그 과정의 산물이다.” -알라딘 eBook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정희진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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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1-04-27 12: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쓰기의 시작지점에서 이 수준이라면 1년쯤 뒤에는 거장 되겠네?

공쟝쟝 2021-04-27 12:30   좋아요 2 | URL
이웃님의 읽는 스타일을 들어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 스타일이란 무엇인가. 글쓰기란 무엇인가.

새파랑 2021-04-27 12: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왠만한 에세이 보다 더 재미있고 잘 쓰신 것 같아요 ㅎㅎ
무엇보다 최은영 작가님에 관심이 가네요 ^^

공쟝쟝 2021-04-27 13:09   좋아요 3 | URL
ㅠㅠ 저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읽을 수가 없을 정도로 과몰입...하기 때문에 아주 조심히 읽고 또 가끔 그리워 빼들어 한 줄만 읽고 덮어요.... 정말 제게는 유해한 최은영님... 사랑합니다.. (댓글에다 대고 또 고백해...)

단발머리 2021-04-27 13: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무 일 없이 누워서 읽다가 벌떡 일어나 앉아서 마무리했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작은 메모, 기록들, 짧은 일기, 긴 일기, 핸드폰 속까지 삭삭 뒤져서 ‘쓰는‘ 쟝쟝님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전해주세요. 진지한 독자, 집중해서 듣는 쟝쟝님의 독자가 될께요!!!

공쟝쟝 2021-04-27 13:12   좋아요 2 | URL
단발님...................... 최고다....... 제가 방사형으로 쏟아낸 이 글에서 제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뭔지 제대로 캐치해버리시다니 ㅜㅜ 나 이런 독자 가진 쓰는 사람인거야??? (행복해서 운다) ....... 맞아요. 저. 흩어져있는 그 것들 표현인지도 몰랐던 그 부스러기들이 식수가 말하는 여성의 글쓰기였다는 거 보고 심장이 짜릿해서 이거 썼어요...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덥썩... 단발님 사랑해 ㅜㅜ

단발머리 2021-04-27 14:35   좋아요 3 | URL
아이러브유! 😍😍😍😍😍😍😍😍😍😍😍😍😍😍

모나리자 2021-04-27 14: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년부터(뒤늦게)ㅎ 정희진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인용하신 문장을 보니 책에서 느꼈던 그분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공쟝쟝 2021-04-28 18:49   좋아요 2 | URL
정희진슨샌님을 좋아하신다면, 모나리자님은 인생의 단짠을 즐길줄 아시는 분이라 생각되옵니다. 절절하게 함께 읽어요!!

라파엘 2021-04-27 15:1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는 제가 보고 배워야 할 분들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저도 ‘쓰는 사람으로서 읽는다‘는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으면 좋겠네요. 좋은 글을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공쟝쟝 2021-04-28 18:56   좋아요 2 | URL
라파엘님 반갑습니다. 알라딘 서재라는 곳이 주는 독특한 매력이 있지 않나요? 사실 책벌레라는 종족은 한반에 많아야 두명 정도였던 희귀종족이기도 해서... 저는 이 날까지 책읽는 친구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거든요.. 뒤늦게 알게된 이곳은 읽고 또 쓰는 것에 너무 진심이고 독려해주는 분위기가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붕붕툐툐 2021-04-27 22: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출판은 언제 하시는 거예요? 그거죠? 그거 맞죠? 책 낼려고 회사 그만 두신 거잖아요~🙆

공쟝쟝 2021-04-28 18:58   좋아요 2 | URL
이제 진심으로 써보려고 하는 새싹에게 책이라니....(하지만 어마어마한 칭찬이라 몸둘바를 모르겠다) 😝 회사는 힘들어서 그만 둔거예요. 오늘도 알차게 놀았답니당!!! 깔깔

scott 2021-04-27 23: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장쟝님
고로케 3개 이상 먹는 1人

일단 요기에
공장쟝님 출간 예정작
예약 축하 꽃다발 놓고감
 〃∩ ∧_∧
 ⊂⌒( ・ω・)
  \_ っ💐c

공쟝쟝 2021-04-28 19:00   좋아요 2 | URL
얽, 고양이가 꽃을 놓고 갔네? 두리번 두리번~ 줍줍!! 🪴화분에 심어서 잘 키워봐야지 ^^

수이 2021-04-28 1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멋진 이 사람들. 치킨 먹으면서 어떻게 그런 심오한 이야기를 마구 나눌 수 있었던 거죠. 아 치킨 모임 못간 1인은 웁니다. 쟝쟝님 흥분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아침이야. 은둔 생활 당분간 지속하면서 다음번 치킨 모임에는 꼭 불러주셔요.

공쟝쟝 2021-04-28 19:01   좋아요 1 | URL
은둔생활 중인데 왜 또 이번주만 약속 세개 됐지?.... ( 저 은둔 지겨워 졌나봐요... 악.. 앙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