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상실에 대한 감정의 정당한 반응이다. 슬픈 기분이 들때,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돌아보는 일기를 쓴다. 찾아질 때도 있고, 못 찾기도 한다. 그것들과 내가 헤어졌구나, 그 시간과 내가 이별하는 중이구나, 인식하게 되면 슬픔이 황당하지 않다. 대상에 쏟았던 마음(리비도)을 다시 거둬들이는 시간을 가져야한다. 이별에 따르는 시원섭섭함과 분노, 안타까움 등 다채로운 감정이 섞인 슬픔을 공들여 느낀다. 주춤했던 일상이 다시 돌아오고, 또 힘내어 하루를 산다. 일련의 과정을 프로이트는 ‘애도’라고 했다.

슬픔의 원인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조금 곤란하지만 슬픈대로 내버려둔다. 많이 자고, 웅크려있는다. 슬픔도 몸의 반응이니까. 몸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떠나보내는 중 일 것이다. 그 부분에서 만큼은 머리보다 몸이 똑똑할 때가 많다.

사실, 진짜로 곤란한 것은 이별에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고, 잃어버렸다는 것 자체를 깨끗하게 잃어버린 경우다. 의식화되지 않은 상실. 강하게 부정당한 이별. 중요하지 않아서 잊은 것이 아니라, 너무 너무 중요해서 억압한 것이다. 상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인정한들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을 ‘우울’이라고 한다. 뒤에 ‘증’을 붙여 병리적 현상으로 다루기도 하지만 내 생각엔 우울 역시 감정의 정당한 반응이다. 어떻게 모든 것을 의식의 영역으로 다루나. 세상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부지기수 듯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애도되지 않은 상실은 당신의 무의식에 남아 어떻게든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좋은 영향일지 나쁜 영향일지는 살아봐야 안다. 삶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고 느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무의식이 잠궈둔 상처를 의식화하는 방법도 있다. 이 방법의 주의사항은 삶이 ‘다시’ 제대로 굴러가게 만들어주지 않으며, 삶의 방향 자체를 틀어버리기도 한다는 거다. 그러니 그냥 사는 것도 괜찮다. 상실을 거부한 채 무의식에 깊이 보관해 두는 것은 또 다른 방법이다. 아니, 모두가 그렇게 산다. 어떤 삶의 방향이든 살아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니까. 무의식이 의식화되지 않았다고 두려워 떨 필요는 없다. 어쨌든 우리의 무의식엔 의식으로 올라오면 안되는 것들이 몰래 살고 있다. 치명적인 이별, 너무 아픈 상처들, 일상이 불가능할 만큼 중요한 것, 감춰둔 공격성, 금지된 욕망 등등.



“(178) 우울증 환자들은 자기증오의 형태로 상실을 드러내는데, 프로이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구분을 시도한다. ‘애도에서 무의미하고 빈곤해지는 것은 세계인 반면, 우울증의 경우에는 자아 그 자신이다.’ 마치 자아의 일부가, 그것이 애착을 가졌던 대상과 함께 죽어 버린 것처럼 그 상실이 자아에게 떠넘겨지게 되는 것이다. (…) 프로이트는 식인 묘사에 등장할 만한 용어를 사용하여 우울증 환자가 대상을 다시 소생시키는 과정을 묘사하기도 한다. 대상의 상실에 뒤따르는 극단적인 동일시는 ‘내사內射・introjection’ 라고 하는데, 이는 자아가 은유적으로 상실된 대상을 먹어 자신 속으로 집어넣음으로써 자아 자신이 상실된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 <지그문트프로이트 컴플렉스>, 파멜라 트루슈웰


너무도 소중한 대상의 상실에 뒤따르는 대상에 대한 극단적인 동일시(우울증). 이별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그것을 내 안에 넣고 나 자신의 일부로 여기며 살겠다는 인간 심리의 기묘한 역동. 버틀러는 프로이트의 이 이론을 젠더에 가져와 푸코의 방식으로 전유한다. 결론 먼저 말하면, 욕망이 먼저 생긴 것이 아니다. 욕망은 금지의 효과다. 인과론을 뒤집으면서 그녀는 프로이트의 (논란 많은) 오이디푸스 이론을 비틀어 버린다. 정신분석학이 오이디푸스 이론으로 효과적으로 금기하는 무의식은 근친애가 아니라 동성애다.

이른바 *‘우울증적 젠더 정체성/우울증적 이성애’*다. 

 
“(206) 동일시는 대상관계를 대체하는 상실의 결과이기 때문에, 젠더 동일시는 금지된 대상의 성이 하나의 금지로서 내면화되는 일종의 우울증이다. 이러한 금지는 분명하게 젠더화된 정체성과 이성애적 욕망의 법을 허가하고 또 규정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결은 근친상간의 금기를 통해, 또 하나 그 이전에 동성애에 대한 금기를 통해 젠더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아이의 최초 욕망은 부모를 향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아는 ‘근친상간 금기’ 때문에 부모를 향한 욕망을 포기해야한다. 금기에 대한 상실의 반응으로 동일시가 이루어진다. 상실한 대상을 자신에게 옮겨놓고 간직하는 우울증 환자처럼 아이는 처음 욕망한 부모를 동일시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아이는 부모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가? 프로이트는 이 대답을 선천적인 ‘성향(disposition 혹은 기질이라고 번역)’이라는 본질주의적인 용어로 비껴간다.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이것을 심문한다. “(207) ‘disposition’은 심리의 근원적인 성적 사실이 아니라, 에고 이상의 공모와 가치 전환의 행위 및 문화가 부과한, *법으로부터 생산된 효과*이다.” “(210) 결과적으로 법은 억압적인 기능을 행사하기보다는 스스로 자기 확장 전략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억압된 욕망을 착상해낸 것이다.” 즉, 유아의 최초 성향(disposition)은 금지의 ‘효과’로서 생겨난 것이다.

무엇을 금지했는가. 이성애적 근친상간 금기 전에 동성애 금기가 있었다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의식된 상실(근친상간 금기)은 슬퍼할 수 있지만, 의식조차 되지 않은 상실(동성애 금기)은 ‘우울증적 동일시’로 나타난다. 전 사회의 무의식적 동성애 금기로 인해 내가 금지당한 동성애적 욕망은 의식조차 되지 않은 채 내사(introjection)되어 나의 젠더/섹스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우울증적 동일시’가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사실 더 아름다운 것은 우울증적 동일시가 발생하는 ‘기입(incorporation)’에 관한 설명인 데, 문학동네 <젠더 트러블>의 조현준 역자님은 ‘incorporation’을 ‘합체’로 번역(ㅠ_ㅠ무슨 로보트 합체가 떠오른다. 사라살리의 버틀러 해설 번역은 기입으로 되어있다)하셔서 정작 본 책에서의 아름다움은 그 글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기입’은 *우울증적 동일시가 우리의 육체의 표면에 보관된다는 뜻*인데, 프로이트의 용어는 아니고 정신분석학자 에이브러햄과 토록의 개념을 버틀러가 가져온 것이다. <젠더트러블>을 인용하되 ‘합체’를 ‘기입’으로 바꿔서 써보겠다. 

“(214) 우울증을 통해 유지되는 동일시가 ‘기입’된 것이라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기입되는 공간은 어디에있는가? 문자 그대로 몸 안이 아니라면 아마도 그것은 몸 위에 있을 것이다. 몸 자체가 반드시 하나의 기입공간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그 표면적 의미와 몸 위에 말이다.” - <젠더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우울증은 내 몸에 ‘기입’된다. 꼭 젠더 정체성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더라도, 논리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 그러나 내가 잃어버린 것. 너무도 사랑해서 도저히 잃어버렸다고 인정할 수가 없는 것. 또는 애도 할 기회조차 박탈 당한채로 무의식 깊숙히 남겨진 그것들은 ‘암호화’되어 나의 몸에새겨 넣어진다(기입). 

사랑했지만 잃어버린 것들이 내 ‘몸’과 내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버틀러의 시각은 나 자신을 들여다 보게 한다. 받아들일 수 없었던 헤어짐. 때로는 거부했던 상실의 경험들. 도저히 잃고 싶지 않았던 사랑의 흔적들은 (프로이트식으로) 내 자아가 와구와구 다 먹어버려서 그것은 내 몸이 되어있다. 그 모든 우울증적 동일시의 흔적들이 곧 ‘나’ 였던 거구나… 일상을 살면서 마주했던 그 동안의 분열들이 조금은 수월하게 인정되고, 슬픔의 총체와도 같은 나 자신이 보인다. 자아를 잘 보듬어 안아 달래주고 싶다. 잃어버린 지난 사랑들을 여기 듯 내 몸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 

읽으면서 아름답다고 느꼈던 사라 살리의 책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을 가져온다. 물론 아래 글들도 <젠더 트러블>을 인용한 것이다. 다른 맛의 번역이 느껴진다. 버틀러의 ‘우울증적 젠더’를 조금은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04) 버틀러는 ‘젠더 정체성을 우울증적 구조로 보면, 동일시를 완성하는 수단으로 “기입”을 선택하는 것을 이해할 수있다’라고 말한다. ‘젠더 정체성은 상실을 거부하는 행위, 곧 잃어버린 대상 그 자체를 육체에 암호화하는 행위를 통해 완성될 것이다. … 기입은 말 그대로 상실을 육체 ‘위에’ 혹은 ‘안에’해석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육체라는 실체로 드러나게 되는데, 즉 육체가 “섹스”를 말 그대로 간직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반드시 포기해야만 하는 대상 리비도 집중의 저장소가 에고만은 아니다. 육체자체도 일종의 ‘무덤’(인용부호로 표시한 것에 주목하라.)이다. 그러나 상실된 욕망들은 결코 그 안에 묻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육체의 표면에 보존되어 우리의 섹스와 젠더 정체성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

“(105) *모든 고정된 젠더 정체성은 ‘우울증적’이다. 그것은 육체 위에 씌어진 최초의 금지된 욕망 위에 세워져있다.* 또한 버틀러가 단언하듯 젠더의 이 견고한 경계들은 타고난, 거부된, 미해결된 사랑의 상실을 감추고 있다. 우울증적 젠더로 고통(이것이 적합한단어라면)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버틀러는 우울증적 이성애를 ‘증후’라고 부르는데 이는 거기에 병리학적 요소가 있음을 암시한다) 이성애자들만이 아니다. 버틀러는 ‘도저히 존재할 법하지 않은 이성애자를 향한 동성애자의 욕망’은 우울증적으로 자신에게 기입되고 이렇게 그/그녀의 이성애적 욕망이 유지된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버틀러는 우리의 문화가 동성애처럼 이성애를 거부하지는 않으므로, 이성애적 우울증과 동성애적 우울증은 실제 동등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사라 살리


이것은 짚고가자. 버틀러에게 ‘젠더’가 구성된 것이듯 ‘섹스’도 구성물이며 ‘육체’ 역시 구성물이다. 이 모두가 안정적이고 고정된 개념들이 아니다. ‘육체(몸)’의 경우도 단지 ‘물질적’(물질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다)인 것으로 가정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어쨌든 여기까지 읽은 나는 버틀러와 푸코가 가닿는 ‘몸’에 대한 통찰이 궁금하다!!! (언젠가는 더 읽겠지…) 

버틀러는 고정되어 있는 본질주의적/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을 모두 푸코적 ‘담론’의 맥락에 위치시키면서 탈고정화시키고 해체하고 ‘구성’된 산물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푸코를 읽는 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번역이 아니라 이분법적 사고방식이었듯, 버틀러를 읽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고정된 실체를 상정해놓고 이해를 명확히 하려는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인 것 같다. 사라 살리가 버틀러를 ‘총명한 헤겔주의자’라고 표현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인가. telos 없는 부정의 부정의 부정의 변증법, 시작도 끝도 없는 과정으로서의 확실함을 비껴가는 논리 전개는 (번역어라 느낄 수 없지만) 난해하다는 그 자신의 문체를 통해 다른 형태의 사고 방식을 주문하는 것도 같다. 

어쨌든 
disposition의 경우 기질보다는 '성향'이 더 나았던 것 같고 
incorporation은 확실히 합체 보다는 '기입'이 
introjection은 내사나 내투사나 다 어려운 말이라서 ‘투사하고 간직한다’ 정도로 풀어쓴 것 같은 번역에 손을 더 들어주고 싶다. 
(그러나 번역의 문제라기 보다는 책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인용구는 <젠더트러블>에서는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려웠던 번역들. 아아, 조금 슬프다. 
사라 살리의 104페이지 글과 비교 한번 해보시라.


젠더 정체성을 우울증의 구조로 볼 때,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방법으로 ‘합체’를 택한 것은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위에서 말한 도식에 따르면, 젠더 정체성은 자신을 몸에 암호화하고 사실상 살아있는 몸과 죽은 몸을 결정하는, 상실의 거부를 통해 설정될 것이다. 반은유적 활동으로서의 합체는 몸 위에 혹은 몸 안에 상실을 문자 그대로 새겨넣어서 몸의 사실성으로, 즉 몸이 문자적 진리로서 ‘성’을 갖게 되는 수단으로 나타난다. 주어진 성감 대에서의 쾌락과 욕망을 금지하거나 그 위치를 설정하는 행위야말로 몸의 표면을 가득 채운 일종의 젠더 특정우울증이다. 쾌락적 대상의 상실은 바로 그 쾌락과의 합체를 통해 해결되며, 그 결과 쾌락은 젠더 특정적인 법의 강제효과를 통해 결정되고 금지된다.
물론 근친상간 금기는 동성애 금기보다 더 포괄적이긴 하지만 이성애적 동일시가 설정되는 이성애적 근친상간 금기의 경우, 상실은 슬픔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동성애적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경우, 상실은 우울증적 구조를 통해 유지된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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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7-28 13:1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대단하다. 너무 아름다운 글이다. 아마 젠더 트러블을 위한 책들을 읽었기 때문일까요? 정말 대단한 글이에요. 존경합니다. 같은 책을 읽은게 맞나 싶어요.
책도 제대로 맞는 임자가 있다면 젠더 트러블의 임자는 쟝님이네요. 근사해요!!

공쟝쟝 2021-07-28 13:38   좋아요 2 | URL
쓰고 나니 빠진 문단 있어서 추가하느라 요 댓글 인자 봤네요 ㅋㅋㅋ 시간이 많아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한에서 가장 많이 이해하기 위한 독서들과 병행하는 중입니다. (저 헤겔 정신현상학 해설도 읽음요... 비트코인 책 만 본게 아니라고 ㅋㅋ) ‘수행성‘만 중심으로 다뤄지는 <젠더트러블>에 트러블을 일으키고 싶었습니다. 버틀러의 주체, 버틀러의 오이디푸스콤플렉스 비판을 꼭 기억해주세요... 물론 이 글은 제가 기억하려고 쓴 글이라고 보는게 옳겠다요 ㅋㅋ

잠자냥 2021-07-28 15:16   좋아요 2 | URL
다부장님 정말 같은 책 읽은 거 맞아요? :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농담입니다. 두 분 모두 짝짝짝.

다락방 2021-07-28 15:17   좋아요 2 | URL
저는 쟝님 페이퍼 읽으면서 ‘젠더 트러블이 이런 책이었어?‘ 하고 있습니다. ㅎㅎㅎㅎㅎ

공쟝쟝 2021-07-28 16:02   좋아요 2 | URL
아고 ㅋㅋ 몸둘바를 모루겄네요 ㅋㅋㅋ 하지만 전 아직 완독자가 아닙니다… (트러블이 계속 있는 한 주가 되고 있다..)

난티나무 2021-07-28 14: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 공쟝쟝님을 따라가는 게 맞았어요! 마침 어제 이 부분 읽고 아 뭐야 😤 @@ 이랬는데 이 글 보니 어렴풋이 아 그랬던 것이었던 것이었구나! 가 되네요!!!!!!
완전 멋져요 공쟝쟝님!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1-07-28 16:04   좋아요 1 | URL
절대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닌 것 같아요 ㅠㅡㅠ 제가 프로이트랑 푸코까진 어케 해보겠는데, 나머지 프랑스-독일놈들은… ㅠㅡㅠ 아아.. 슬프다..

잠자냥 2021-07-28 15: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 쟝쟝 언니 넘나 잘 쓴다. 이 어려운 책을 읽고 이토록 멋진 글이라니. 백수로 지내는 시간이 아깝지 않도다.

공쟝쟝 2021-07-28 16:05   좋아요 2 | URL
백수를 꼭 이렇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한 성찰 중입니다. 어제는 일할 때보다 의자에 더 오래 앉아있었다구요!!!!!!

잠자냥 2021-07-28 15: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쟝쟝 언니 사회과학 공부 좀 계속 해봐요... (진심으로 적극 권장합니다)

공쟝쟝 2021-07-28 16:24   좋아요 1 | URL
언젠 문학도 좀 읽으람서요… 😒

잠자냥 2021-07-28 16:59   좋아요 2 | URL
아니 뭐 그까이꺼 두 개 다 하세요.

단발머리 2021-07-28 17:37   좋아요 3 | URL
저 요즘에 왜케 잠자냥님 의견에 동의할 게 많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두 개 다 하세요, 쟝쟝님!!

단발머리 2021-07-28 17: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수를 짝! 짝짝짝! 기립박수를 칩니다!!! 출력해서 읽어야할 만큼 너무너무 좋은 글이에요. 대단합니다, 우리 똑똑이 친구!!!
근데 다 이해를 못하겠어요@@ 앞으로도 쟝쟝님이 계속 이렇게 <보충공부> 해 줘야하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전 아직 저기 위에, 우울증적 이성애까지 읽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사실 거기까지 읽어도 이해할 자신은 없구요ㅠㅠ)

무엇을 금지했는가. 이성애적 근친상간 금기 전에 동성애 금기가 있었다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의식된 상실(근친상간 금기)은 슬퍼할 수 있지만, 의식조차 되지 않은 상실(동성애 금기)은 ‘우울증적 동일시’로 나타난다. 전 사회의 무의식적 동성애 금기로 인해 내가 금지당한 동성애적 욕망은 의식조차 되지 않은 채 내사(introjection)되어 나의 젠더/섹스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애적 근친상간 금기 이전에 동성애 금지가 있었다는 주장을 이해를 못하겠어요. 아이의 최초 욕망은 사실, 부모가 아니라 엄마에게로 향하잖아요. 정확히는 주양육자겠죠. 여성이 양육을 하는 상황을 베이스로 두었을 때, 남아건 여아건 엄마를 욕망하고. 엄마를 욕망하던 남아는 근친상간 때문에 엄마를 포기하고 아빠를 이상화하고, 엄마를 욕망하던 여아는 엄마에게는 ‘그것‘이 없다는 걸 알고 아빠를 욕망하는 걸로. 그러니까 남아에게는 한 번의 절망이, 여아에게는 두 번의 절망이 있다는 걸 읽었던 것 같은데. 전 프로이트 이론을 잘 모르지만, 또 그것만으로 설명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근친상간 금기 같은 경우 레비-스트로스는 인류 문화의 시작점이라고 볼 정도로 중요하다고 판단하잖아요. 동성애의 경우, 그리스 로마의 경우와 비교해보아도 현재와 비슷한 즉 ‘차별‘의 대상이 되었던 건 인류 전체 역사를 볼 때 최근의 일이 아니었던가 싶구요. 제 의문은 근친상간 금지가 좀 더 근원적인 인간 욕망의 금지가 아니었을까 싶은 거죠. 모르겠는데 질문하다 보니 더 모르겠어요. 쟝쟝님이 알고 있으리라 믿고 나는 에헤라~~~

공쟝쟝 2021-07-28 19:13   좋아요 2 | URL
그쵸! 그것이 없었다! 남근선망! 팔루스!! 그것을 우리가 대차게 깨야하는데 (이리가레도 성본질주의를 넘어서지 못해 깨지못한) 그걸 버틀러가 푸코를 가져와서 깨버렸어요 ㅡ 제가 이해한 것들을 적어볼께용!

공쟝쟝 2021-07-28 19:13   좋아요 2 | URL
제가 이해한 건 최초의 욕망이 엄마가 아니고요, 욕망이 먼저가 아니고 금지가 먼저라는 거예요!! 푸코의 권력 작동 방식을 보면 권력은 금지하는 게 아니라 생산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끙끙대며 읽은 성의 역사를 떠올려보면요! 때로는 금지를 통해서 생산되기도(?)하죠. 권력이 담론를 통해 흐르는 방식. 아이는 욕망하기 전에 금지를 당하는 데요, 사회적으로 근친상간보다는 동성애적 욕망이 더 먼저 금지 당하니까요, 그런데 동성애적 욕망이란 말해지지도 않은 매우 무의식적인 거라서 (진짜 너무 심각한 억압 ㅋㅋㅋ) 아이는 그 상실을 애도하지 못해요. 우울증. 이 최초의 금지에 대한 억압은 동일시적으로 몸에 기입되는 거죠. 동성애적 욕망이 몸의 표면에 기입된다.

공쟝쟝 2021-07-28 18:39   좋아요 2 | URL
남근이 잇네 없네는 복잡하고 설명도 잘 안되지만, 버틀러의 전유를 가져오면 섹스는 구성된게 되고 젠더 정체성의 혼란들도 설명이 좀더 수월하죠. 이미 이성애문화가 자연스러운 사회에서 오이디푸스 근친상간적 금기는 애도 가능할지 몰라도 동성애에 대한 애도는 아예불가능하니 우울증적 동일시로 남을 수 밖에 없는데 ㅡ 프로이트는 넘나 이성애쥬의자라서 거기까지는 못내다 보고 그럼 최초의 욕망의 주체는 여성성/남성성 둘중 하나를 선택하는 가?에 그냥 본질주의적으로 기질/성향이다라고 말하고 남근 어쩌고 하게 되는 거죠… 근친애적 욕망이 부정당해서 동일시 하는 거다! 이렇게요. 근데 이 오이디~ 이론 자체가 이성애적 프레임안에서 작동하는 것이쥬(말하면서 내가 헤깔려요..)

공쟝쟝 2021-07-28 18:42   좋아요 2 | URL
제가 백번 엉성하게 설명한 것보다 조현준 역자님의 젠더 이야기 를 가져오는 게 좋겟어서! 찾아왓어요!!
“마지막은 인과론의 전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다는 인과론을 신봉해 왔고 그런 의미에서 원인의 본질적 동인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 왔습니다. 예컨대 정신분석학에서는 누구에게나 무의식적으로 근친애 욕망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금지하는 금기가 생겼고, 근친애 금기가 문명의 시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버틀러는 금지해야 할 근친애적 욕망이 정말로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욕망인지 의심합니다. 만약 근친애적 욕망이 인간의 본질적 욕망이라면 동성에게 욕망을 느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없거든요. 그렇다면 정신분석학은 근친애라는 이성애 욕망을 본질적 원인으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 때문에 문명의 금기가 생긴 것이 아니라 이성 간 사랑을 인간의 근원적 욕망으로 확정하려는 정신분석학의 욕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탄생시켰다는 것이지요.

-알라딘 eBook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 (조현준 지음) 중에서”

단발머리 2021-07-28 18:52   좋아요 2 | URL
우앗!! 쟝쟝님!!! 무슨 말인지 딱 알겠어요! 라고 댓글을 쓰고 싶지만 ㅎㅎㅎㅎ 아직도 모르는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문현답의 아름다운 향연. 앞으로도 많은 지도 편달 부탁해요^^

오디이푸스 콤플렉스 때문에 문명의 금기가 생긴 것이 아니라 이성 간 사랑을 인간의 근원적 욕망으로 확정하려는 정신분석학의 욕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탄생시켰다는 것이지요.

는 조현준님 말은 이해돼요. 버틀러의 주장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도, 쟝쟝님 댓글도 대략적으로는 이해되구요. 그런데도 앞으로 갈길 멀었어요 ㅠㅠㅠ 어쩔 ㅠㅠㅠ 완독하신 분 세 분이시던가요. 저는 아직 어쩔ㅠㅠㅠ 하는 사람...

공쟝쟝 2021-07-28 19:07   좋아요 2 | URL
ㅎㅎㅎ 저도 제가 이해한 것이 맞나 싶어요 ㅎㅎㅎ 누가 좀 알려줘.. 하지만 사랑했던 것이 몸에 기입된다는 생각이 너무 아룸다웠어요… 팔루스 선망이론보다 아름다웠으므로 거기에 손ㅋㅋㅋ 다만 순서적으로 왜 동성애적 금기가 먼저여야하는 가에 대해 버틀러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모든 건 주장일 뿐임을 우린 잊지 말아야합니다ㅋㅋ

- 사라살리 책 106페이지
동성애 금기가 근친상간 금기에 앞선다는 주장은, 젠더와 섹스의정체성이 금지에 대한 대응으로 형성된다는 버틀러의 논의에서 결정적이다. 버틀러는 젠더 또는 섹스를 선천적인 것으로 여기는 대신, ‘젠더 정체성은 금지가 내면화된 것이며, 이는 정체성이 형성적인 것임을 입증한다’(GT : 63) 고 주장한다. 여기서 버틀러가 말하는 금지는 동성애 금기이므로, 버틀러의 이론에서 모든 젠더 정체성은 최초의 금지된 동성애적 리비도 집중 또는 욕망에 기초해 있는 것이 명백하다. 만약 우울증이 실제의 또는 상상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며, 이성애적 젠더 정체성이 욕망의 동성애적 대상에 대한 최초의 상실을토대로 형성된다면, 이성애적 젠더 정체성은 우울증적인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발머리 2021-07-29 08:47   좋아요 1 | URL
아침에 일어나 찬찬히 다시 한 번 읽어보았어요.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흐흐흐흐흐흐.
너무 즐겁네요. 이론이 어떻게 몸을 입어가는지 찬찬히 읽어보려구요. 아직도 꽤 남아있는 트러블이 밉지가 않네요.
덥지만 좋은 날 되세요, 슨상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