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지금와서는 그 말이 그 말 같고 진부한 논의 처럼 보이지만 이 책이 세상에 나올 당시에는 진짜 획기적이었을 것 같다. 버틀러는 1990년 당시 교착상태에 있던 페니미즘 내부의 ‘정체성의 정치’를 <젠더 트러블>을 통해 ‘성별 정체성(젠더)’의 개념 자체를 흔들어버리면서 페미니즘 운동의 또 다른 돌파구를 연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체성의 정치’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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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정치는 전통적인 다양한 요소에 기반한 정당 정치나 드넓은 보편 정치에 속하지 않고 성별, 젠더, 종교, 장애, 민족, 인종, 성적지향, 문화 등 공유되는 *집단 정체성을 기반으로 배타적인 정치 동맹을 추구*하는 정치 운동이자 사상을 의미한다.
내 생각에 이 정체성을 강조하면 전투성(자매들 모두 힘모아 가부장제 뚜까패기)은 참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정체성을 강조’하다 보면 내부에서의 갈등을 거칠게 봉합시켜버리거나 (cf. 백인-이성애-중산층 페미니즘은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해!!) 의도치 않게 여성을 본질화(여성-남성의 차이점을 강조하면서 모성애 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는 거다.
또 여성 혹은 여성성을 남성의 반대항에 두는 것은 성별 이분법을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은연중에 이성애중심주의를 옹호한다. 이성애는 여남간의 위계질서를 만들고 고착시킨(반대로 여간의 위계질서를 고착화하기 위해 이성애가 동원될지도?)다는 비판은 버틀러 전에는 모니크 위티그가 거의 유일하게 주장한 듯하고... 어쨌든 우리의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통해 당시 페미니즘 논의 안의 ‘젠더’가 이성애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 동시에 ‘섹스’,‘젠더’ 개념의 불안정성을 드러내 보이며 “페미니즘의 정치성은 유지하면서 정체성은 전복하려(조현준)”는 시도를 했다.
“(91) 나는 페미니즘 주체에 전제된 보편성과 통일성이, 주체가 작동되는 담론의 구속력 때문에 상당히 훼손되었다고 주장하려 한다. 실로 이음새 없는 여성의 범주로 생각되는 *안정된 페미니즘의 주체를 어설프게 주장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여성 범주를 받아들이는 데 적잖은 거부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배타적인 영역은 심지어 그 구성이 해방의 목적으로 면밀히 검토되었다 하더라도 그 구성의 강압적이고 규제적인 결과를 드러낸다. *사실 페미니즘 내부의 파편화나, 페미니즘이 재현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페미니즘에 반대하게 되는 역설적 상황은 정체성의 정치학이 갖는 필연적인 한계를 시사한다.*” - <젠더트러블>
음. 그는 시도에서 끝내지 않았다. 당연히 !!전복...!! 이라는 어려운 것을 성공 시켜버린다.
어떻게? 젠더 계보학을 통해 이분법을 해체하고 인과론을 뒤집으면서. 이렇게 짠. 👇🏻
[<젠더 트러블>의 역자인 조현준님이 친절하게 풀어써주신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속 젠더트러블의 구성]
음… 비타님이 요구하신대로 1500자로 줄일 수는 없어서, 아이패드를 이용하여 그려보았습니다. 잘 따라가 보세요. (오래걸렸다) 저 그림은 1500자 안되지 않을까? 🤭 (내 꼼수!!)
사실 보부아르가 처음에 사회문화적 성으로서 ‘젠더’를 강조한 것은 사회·문화를 바꿀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그것에 힌트를 얻어 생물학적 성(sex)가 바뀔수 없는 것이라면 젠더(gender)는 바뀔수 있는 것이라고 바라보며 이를 기반으로 논의를 전개했다. 그러다보니 섹스/젠더가 따로 놀기 시작했고 섹스는 ‘근본적인 무엇’이 되어버렸다. 버틀러는 그런 본질주의를 두고볼 수 없다. 그래서 <젠더트러블>을 썼다. 그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모두가 담론의 산물로서 섹스가 본질처럼 보이는 것은 지배 담론, 권력 작용의 결과물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부분은 푸코의 영향)
“(97) 섹스가 불변의 특성을 지녔다는 것이 논쟁선상에 있다면 아마도 ‘섹스’라 불리는 이 문화적인 구성물은 젠더만큼이나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 될 것이다. 어쩌면 섹스는 언제나 이미 젠더였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섹스와 젠더는 전혀 구별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섹스도 젠더도 섹슈얼리티도 - 모두 ‘젠더’가 되었다.😫(맞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치자)
이제 남는 것은 그 ‘젠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는 건데 그것도 책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 젠더 정체성의 구성방식 : 패러디 / 수행성 / 반복ㆍ복종 / 우울증
(각각 내용은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 깔끔하게 정리 되어있음ㅎㅎㅎ )
우리의 ‘섹스/젠더’ 혹은 ‘정체성’은 정말로 고정된 것이 아닌 불안정한 것이 되어린 것이다. 젠더는 “사회적 구성물이며 부유하는 인공물”이다. 이것이 뭐시냐면 바로 버틀러가 열어제낀 ㅋㅋㅋ 바로 *여성없는 여성주의*의 탄생이다!! ㅋㅋㅋ
버틀러로 인해 ‘정체성의 정치’로 시작되었던 페미니즘은 그렇게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놀랍게도 “페미니즘의 도전(!)” 이었나보다. (물론 어디까지나 버틀러의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현실에서 이 논쟁/운동은 치열한 진행형이다. 다만, 이렇게 훌륭하게 교차하고 반목하고 종횡무진한 페미니즘 공부는 즐겁지 않은가?)
우리의 정희진 슨상님의 페미니즘의 도전 개정증보판 머리말을 가져와본다.
“(19-20) *젠더를 ‘여성 문제’로만 인식하게 되면*, 성별은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라 마치 종합 일간지의 스포츠, 연예, 노동, 환경, 정치, 경제, 생활, 패션같은 분야처럼 *사회의 한 분야*로 간주되고, 피해 여성의 규모가 클경우에만 ‘사회 문제’가 된다.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 젠더가 다루어지는 작동 방식*이다. 젠더가 사회 문제 중에 하나이거나 우연히 발생한 부수적 피해 내지 부산물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젠더는 계급처럼 사회와 인간을 형성하는 가장 강력한 재료 중 하나며, 사회 문제를 재구성하고 재창조하는 가장 힘 있는 조물주다. 기존 사회는 이런 인식에 무지하고, 인식한다고 해도 최대한 그 영향력을 외면하려고 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를 당파성, 실천과 같은 철학의 근본 개념을 바꾼 역사상 첫 번째 세계관으로 인식하기보다 ‘노동자의 불만’ 정도로 폄하하는 것과 같다. 젠더를 남녀 간 갈등이 아니라 여성(소수자, 타자……)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사회 구성 원리나 재창조 원칙으로 인식한다면 *젠더는 이슈나 소재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이 된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처럼 ‘노동자’를 중심으로 구체적 경계를 설정하기보다 *모든 경계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유*라는 점에서 더 ‘모호’하고 맥락적이며 복잡하기 때문에 정의하기 어렵다.”
“(45) 인류는 남녀 간의 성차, 차별, 폭력이 생물학적인 것인지 사회 문화적 결과인지, 물질적 토대가 결정적인지 언어(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인지를 놓고 오랫동안 논쟁해왔지만, 내가 보기엔 이러한 논란은 진부하다. 페미니즘 사상의 발달은 이미 이러한 이분법 뛰어넘었고 ‘해결’했다.” - <페미니즘의 도전>
그렇다. 주디스 버틀러는 트러블을 트러블로 해결해버린 것이다. "(83)따라서 나는 트러블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떻게 최고의 트러블을 일으킬 것인지, 또 그렇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인지가 중요한 과제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와. 천재다. 당신. 최고의 트러블 메이커...
덧, 현재 진도 150페이지. 파트 1까지 읽었어여!! 이틀 쉴께염ㅋㅋ 제가 공부하면서 읽어가는 내용이긴 한 데 혹시 틀린부분 바로잡을 부분 있으면 댓글로 잘 알려주세요~ (소심)
따라서 나는 트러블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떻게 최고의 트러블을 일으킬 것인지, 또 그렇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인지가 중요한 과제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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