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부터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의 삶과 작품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인상주의 미술을 다시 공부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고전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 현대미술까지 서양미술의 큰 흐름을 톺아보면서 ‘주제 서평’을 쓸 계획을 세웠다.

 

 

 

 

 

 

 

 

 

 

 

 

 

 

 

 

 

 

* 아르망 푸로 《인상주의의 숨은 꽃, 모리조》 (글항아리, 2009)

 

 

 

이 글이 서양미술을 주제로 한 첫 번째 주제 서평이 되지 싶다. 이 글의 주제이자 주인공은 베르트 모리조다. 오늘날 인상주의는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미술사조 중 하나가 되었다. 인상주의 미술에 대한 태동과 흐름을 친절하게 설명한 책들이 많다. 또 인상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생애와 업적을 조명한 책들도 있다. 그런데 이 책 중에 베르트 모리조를 비중 있게 다룬 것이 별로 없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출간된 모든 인상주의 미술 관련 책 중에 베르트 모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선별했다.

 

 

 

 

 

 

 

 

 

 

 

 

 

 

 

 

 

 

 

 

 

 

 

 

 

 

 

 

 

 

 

* 김광우 《마네와 모네 : 인상주의의 거장들》 (미술문화, 2017)

* 루이 피에라르 《이해받지 못한 사람, 마네》 (글항아리, 2009)

* 스테파노 추피 《마네 : 전통에 반기를 든 근대의 화가》 (마로니에북스, 2009)

* 자비에르 질 네레 《에두아르 마네》 (마로니에북스, 2006)

* 프랑수아즈 카생 《마네 : 이미지가 그리는 진실》 (시공사, 1998)

 

 

 

마네(Manet)와 모리조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인상주의 미술을 소개하는 책이나 글을 보게 되면 마네의 이름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비록 마네는 인상주의 화가 그룹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다. 모리조 역시 마네의 영향을 받은 인상주의 화가 중 한 명이다. 마네를 빼놓고 인상주의 미술에 접근한다는 것은 근대미술의 시작점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리조를 만나기 전에 인상주의 화가들이 왜 자신들과 거리를 둔 마네를 위대한 화가로 치켜세우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 [절판] 줄리 마네 《인상주의, 빛나는 색채의 나날들》 (다빈치, 2002)

 

 

 

모리조는 마네의 친동생 외젠 마네(Eugene Manet)와 결혼하여 외동딸 줄리 마네(Julie-Manet)를 낳았다. 줄리 마네는 어렸을 때부터 인상주의 화가와 문인들 사이에서 자랐다. 그녀를 따뜻하게 보살펴준 사람들이 드가(Edgar De Gas), 르누아르(Renoir),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Mallarme) 등이다. 특히 말라르메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리의 대부(代父)가 되어 그녀를 친자식같이 보살폈다. 《인상주의, 빛나는 색채의 나날들》은 1893년부터 1899년까지 기록된 줄리의 일기를 선별하여 편집한 책이다. 아버지 외젠이 세상을 떠난 지 일 년 후에 줄리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삼촌인 마네는 줄리가 일기를 쓰기 시작하기 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열다섯 살의 줄리가 쓴 일기를 보면 어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심리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모리조 역시 1895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줄리는 어머니의 부재에서 느껴지는 슬픈 감정들을 일기에 꾹꾹 담았다.

 

의외로 이 책의 독자 평점이 낮다. 물론, 나도 이 책에 ‘별 세 개’를 주었다. 수수하고 담백한 문체가 이 책의 특징이다. 자질구레한 일상을 기록한 내용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 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리조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전여전(母傳女傳)’이라고 줄리도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고, 모리조와 르누아르에게 그림을 배운 적이 있다. 줄리는 자신만의 관점으로 어머니가 남긴 그림들을 살펴보면서 느낀 감정을 일기장에 기록했다. 이 책에 모리조의 그림 도판이 많아서 좋다. 모리조의 그림 대부분은 외젠 마네와 줄리를 묘사한 것들이 많다. 줄리의 모습을 담은 모리조의 그림들을 보면 가슴 뭉클하다. 유일한 혈육인 딸을 향한 어머니의 애틋한 시선이 느껴진다.

 

 

 

 

 

 

 

 

 

 

 

 

 

 

 

 

 

* 제프리 마이어스 《인상주의자 연인들》 (마음산책, 2007)

 

 

 

《인상주의 연인들》 ‘마네-모리조’, ‘드가-메리 커샛’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다룬 책이다. 이 책은 마네와 모리조를 단순히 ‘스승과 제자’ 관계로 보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이 과감하다. 제프리 마이어스(Jeffrey Meyers)는 모리조가 언니 에드마에게 보낸 편지와 마네가 그린 초상화를 근거로 모리조가 마네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랑했다고 주장한다.

 

 

 

 

 

 

마네의 화실에 드나들었던 두 명의 여성이 있었는데 모리조와 에바 곤살레스(Eva Gonzalez)다. 마네는 두 사람에게 미술을 가르쳤는데 모리조는 그림 그리는 에바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그뿐만 아니라 마네의 부인을 험담하기도 했다. 저자는 모리조가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마네로부터 인정받길 원했으며 그의 영향력 안에서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주장한다. 모리조는 마네와 더욱 가까이 지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네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그 ‘충고’가 바로 마네의 동생과 결혼한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제프리 마이어스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고 싶지 않다. 모리조의 편지 구절을 근거로 마네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분석한 주장들이 과대 해석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점은 모리조의 그림에 대한 저자의 품평이다.

 

 

섬세하고 난해한 모리조의 작품은 페미니즘 평론가들에 의해서만 과대평가되었고, 나머지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과소평가되었다. 역사적인 맥락이나 극적 긴장, 서사적 의미 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그녀의 작품이 마네의 작품보다 더 심했다. 또한 그녀의 작품은 그림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보게끔 보는 이들을 자극하지 않는다.

 

 

제프리 마이어스가 모리조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의심스럽다. 모리조는 부르주아 계급의 일상생활, 특히 가족을 주제로 많은 그림들을 그렸다. 화가의 가족 또는 지인의 모습을 담은 그림에서 ‘역사적 맥락’, ‘극적 긴장’, ‘서사적 의미’를 왜 찾아야하는가? 제프리 마이어스의 심미안은 인상주의 미술과 동떨어져 있다. 그가 역사적 맥락, 서사적 의미가 결여되지 않은 그림을 보고 싶어 한다면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그린 고전주의 역사화를 추천하겠다.

 

 

 

 

 

 

 

 

 

 

 

 

 

 

 

 

 

 

 

* 프랜시스 보르젤로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아트북스, 2017)

* [절판] 주디 시카고, 에드워드 루시-스미스 여성과 미술(아트북스, 2006)

* 크리스티나 하베를리크, 이리 디아나 마초니 여성예술가(해냄, 2003)

 

 

 

페미니즘 평론가들이 모리조를 과대평가를 한다는 의견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페미니즘 미술은 미술관에서 여성의 지위가 미약한 원인과 여성 미술가가 남성 미술가에 비해 경력을 쌓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남성 미술가들만 주목하고 여성 미술가들을 소외하는 미술 평론계에 반발하기 위해 나선 것이 페미니즘 미술이다. 모리조는 인상주의 회화 그룹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당당히 지킨 화가이다. 그런 그녀를 과소평가한 사람들이 누구인가? 남성 중심 사회 속에 권위를 떨친 미술 평론가들 아닌가?

 

 

 

 

 

 

Trivia

 

 

 

 

 

 

 

 

 

 

 

 

 

 

 

 

존 리월드(John Rewald)인상주의의 역사(까치, 2006)는 인상주의 미술에 관한 책의 고전이다. 줄리 마네는 이 책에 있는 모리조에 관한 잘못된 내용을 알려주었으며 존 리월드는 개정판에 줄리의 의견을 반영했다. 그런데 이 책을 번역한 정진국 씨는 베르트 모리조의 둘째 언니 에드마를 동생이라고 잘못 썼다. 베르트 모리조는 모리조 집안의 세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정진국 씨는 2009년에 나온 인상주의의 숨은 꽃, 모리조를 번역했다. 이 책에서는 에드마를 언니라고 올바르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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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1 2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1-12 10:05   좋아요 0 | URL
책마다 이름 표기명이 달라요. 어떤 책은 ‘모리소’라고 하거든요. ^^
 
인상주의의 숨은 꽃, 모리조 예술가의 삶과 진실 6
아르망 푸로 지음, 정진국 옮김 / 글항아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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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또 다른 대표작이다. 마네는 이 그림을 죽을 때까지 자기 화실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그림 왼쪽에 있는 여인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이 이름을 꼭 기억해두시라. 그녀는 인상주의 화가 그룹의 당당한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아르망 푸로(Armand Fourreau)인상주의의 숨은 꽃, 모리조(글항아리, 2009)는 남성 중심의 19세기에 여성이란 장벽을 이겨내고 예술혼을 불태워 인상파 최초의 여류화가로 거듭난 베르트 모리조의 인생과 예술을 정리한 평전이다. 이 책의 저자는 모리조의 가족들을 만나 육성 증언을 채집했고, 공개된 적이 없는 모리조의 습작을 발굴하여 소개했다.

     

모리조는 로코코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의 증손녀였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음악과 미술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그녀의 둘째 언니 에드마 모리조(Edma Morisot)도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다. 자매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옛 거장의 작품을 모사하며 그림 공부를 했다. 자매는 화가가 지녀야 할 자질을 충분히 갖추었다. 특히 베르트의 마음에는 화가가 되겠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자매는 조제프 기샤르(Joseph Guichard), 카미유 코로(Camille Corot)의 제자가 되었으나 베르트는 스승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낭만주의 회화를 선호한 기샤르는 자연을 묘사하는 그림을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코로는 정확한 묘사를 강조했다. 베르트는 스승의 그림을 모사하거나 화실에서 그림 그리는 일이 자신의 열망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리조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명작을 모사하던 중 마네를 만나 그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녀는 마네의 동생과 결혼하면서 자주 마네의 작품 모델이 되기도 했다. 마네는 인상주의 회화 그룹의 전시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화가들과 강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모리조는 마네 주변에 모이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자연스럽게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그녀는 1874년 제1회부터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까지 그림을 출품했다. 인상주의 전시회보다 살롱 전에 더 관심이 있었던 마네는 모리조가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하는 것을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모리조는 마네의 충고를 거절했고 오히려 그에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하도록 권유했다. 만약 그녀가 마네의 설득을 받아들였다면 인상주의 회화 그룹은 남성 화가들의 모임이 되었을 것이다.

 

인상주의의 숨은 꽃, 모리조의 부록은 인상주의 회화 그룹을 열렬히 지지한 미술평론가 테오도르 뒤레(Theodore Duret)의 글이다. 이 글은 <인상주의 화가의 역사>에 수록된 베르트 모리조편을 완역한 것이다. 뒤레는 모리조, 모네(Monet), 시슬레(Sisley), 르누아르(Renoir), 피사로(Pissarro)충분한 독창성을 발전시킨 인상주의자의 정회원이라고 평가했다. 모리조는 자신의 딸 리 마네(Julie-Manet)의 성장 과정을 그림에 담았다. 그녀가 즐겨 그린 그림의 주제는 가족이다. 모리조의 그림들은 남녀 역할이 비교적 엄격했던 시대 속에 살아간 여성의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모리조는 살롱 전에 여섯 번이나 입선할 정도로 쟁쟁한 실력을 갖춘 화가였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부터 그녀의 존재감은 잊혔다. ‘인상주의자의 정회원에 그녀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모리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엉뚱하게도 마네가 있다. 마네는 인상주의 회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선구자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는 인상주의 전시회에 단 한 번도 그림을 출품한 적이 없었으므로 인상주의자의 정회원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남성 중심의 평가는 모리조의 실력을 외면했다. 모리조는 주도적으로 새로운 시대 미술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동참했으나 여성화가라는 이유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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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씽킹 - 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위대함은 어디서 오는가?
가리 카스파로프 지음, 박세연 옮김, 믹 그린가드 정리 / 어크로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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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를 들썩이게 만든 세기의 바둑 대결이 펼쳐진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2016년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의 대국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는 알파고의 승리(5전 4승 1패)로 끝났다. 이세돌 9단은 단 1승만을 거둬 아쉬움을 남겼지만, 이 1승은 알파고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배를 안겨준 유일한 공식전 1승이었다. 인간 대 인공지능의 대결은 늘 흥미로운 관심사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1997년. 세계가 경악했던 대결이 펼쳐졌다. 당시 러시아 출신 체스 세계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Garry Kasparov)IBM 슈퍼컴퓨터 ‘딥 블루(Deep Blue)’와의 체스 시합에서 6전 1승 3무 2패로 패했다. 카스파로프는 체스 역사상 최고 선수라는 평까지 얻었던 만큼 인간의 두뇌를 대표하는 선수로 손색이 없다. 그런 그가 슈퍼컴퓨터와의 대결에서 패해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그 이전까지 대부분의 전문가는 십 년 안에 체스에서 컴퓨터가 인간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컴퓨터의 빠른 계산능력을 고려해도 인간의 지적 수준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딥 블루의 승리 소식이 워낙 강렬했던 탓일까. 지금도 전 세계 사람들은 카스파로프를 컴퓨터와의 체스 대결에서 속절없이 무너진 체스 챔피언으로 기억한다. 대부분 사람은 1997년 딥 블루가 승리한 카스파로프와의 체스 시합이 인간과 인공지능이 처음으로 맞붙은 공식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카스파로프와 딥 블루는 이미 1996년에 6차에 걸쳐 진행되는 체스 시합을 했다. 이 경기는 4승 2패로 카스파로프가 이겼다. 1996년과 1997년 기록을 통틀어 본다면, 카스파로프는 딥 블루와의 체스 시합에서 최초로 승리를 거둔 체스 선수이다.

 

세기의 체스 명승부 이후 카스파로프는 새로운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현재 그는 자신을 절망에 빠뜨리게 했던 인공지능을 연구하고 있다. 여전히 카스파로프를 ‘딥 블루에게 패배한 체스 챔피언’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그가 ‘적과 동침’ 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 연구가’로서 카스파로프가 쓴 《딥 씽킹》(어크로스, 2017)을 읽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카스파로프는 인공지능을 인간을 위협하는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이 책에서 인공지능의 발전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내다보고 있다.

 

《딥 씽킹》은 인공지능의 본질에 가까이 접한 인간이라면 쓸 수 있는 책이다. 카스파로프는 1997년 체스 시합을 회고하면서 인간과 인공지능 간의 관계를 모색한다.

 

 

“이길 수 없다면 함께하라.”라는 말도 있듯, 나는 컴퓨터와 함께 체스 실험을 계속해나가고 싶었다. 나는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인간과 기계가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면 어떨까? (10쪽)

 

 

책의 서문에서 카스파로프는 컴퓨터와의 체스 시합을 ‘실험’이라고 표현했다. 이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체스 챔피언 시절 카스파로프라면 컴퓨터와의 체스 시합을 ‘게임’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카스파로프는 두 차례 진행된 딥 블루와의 체스 시합에서 승리하고픈 열망이 강했다. 그는 패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딥 블루 이후에 개발된 슈퍼컴퓨터와 인간의 체스 시합을 ‘인간과 인공지능 모두의 발전을 위한 과학적 연구’라고 생각한다. 체스와 인공지능은 서로 연관성이 깊다. 체스는 직관과 창조성을 발휘하도록 요구하는 놀이다. 그래서 체스는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가 실현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실험용 놀이’다. 컴퓨터 개발에 관여한 공학자 대부분이 체스를 즐겨 했고, 앨런 튜링(Alan Turing)이 알고리즘을 계산하는 체스 프로그램을 발명했다.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의 바둑 대결에 패배한 이후로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등장에 반감을 보이는 여론이 많아졌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할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도 나왔다. 그러나 카스파로프는 앞으로 인공지능이 삶의 질을 크게 향상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일자리보다 인공지능 활용 방안을 더 중요하게 본다. 정부가 인공지능 기술력이 향상되는 변화의 흐름을 제쳐두고 일자리를 지키는 현실적인 문제에 치중하게 되면 인공지능 기술의 활용성을 높일 기회를 놓친다. 카스파로프가 정부에게 전하는 제언은 깊이 새겨들을 만하다.

 

카스파로프는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이 인류 발전의 한 단계라고 믿는다. 그의 주장을 믿든 안 믿든 간에 확실한 것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IT기술, 산업, 네트워크 등을 융합한 인공지능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카스파로프는 인공지능을 무비판적으로 예찬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등장을 경계한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 속도가 인간이 감당하기 어렵게 되는 시점이 오는데 이를 ‘특이점(singularity)’이라 한다. 인간이 특이점을 예견하고 미리 준비하면 인공지능 기술을 주도적으로 활용하는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변화를 피할 수 없다. 변화를 즐기지 못하더라도 변화에 대한 욕구를 계속 자극해야 한다.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변화하게 될 미래를 예측(걱정)하기보다는 다가올 미래에 대비할 수 있도록 착실하게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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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1-10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파고는 우리에게 많은 놀라움과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때는 그랬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게 될 것 같아요. 그게 언제쯤 될지는 잘 모르지만요.
cyrus님, 오늘 많이 춥네요. 따뜻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cyrus 2018-01-11 11:49   좋아요 0 | URL
알파고보다 더 뛰어난 인공지능 컴퓨터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랄 거예요. 그리고 미래를 걱정할 것입니다.. ^^;;

2018-01-10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1-11 11:52   좋아요 1 | URL
인간의 욕망이 인공지능에 반영되어 있어서 이제 ‘인간 대 인공지능’ 대결 구도는 무의미해졌어요. 국내 언론은 인공지능 관련 소식을 전할 때마다 이런 프레임을 계속 써먹을 거예요. 언론이 인간과 인공지능이 서로 맞붙는 상황을 계속 강조하면 현실성 떨어지는 인공지능 비관론만 생길 뿐입니다.

이하라 2018-01-10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측은 너나없이 할테지만 대비란 것은 쉽사리 나오지않을 것 같아 걱정이네요. 스티븐호킹박사도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류에게 위협이 될거라는 말을 했었다던데... 대비책을 마련해 줄 인물들이 있겠거니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알수없는 내일이 두렵기도 해요TT

cyrus 2018-01-11 12:01   좋아요 1 | URL
요즘 들어서 인공지능,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진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걱정이 됩니다. 예측을 했으면 거기에 따른 국가적 차원의 대비가 필요한데 너무 조용합니다. 정부와 기업이 착실히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페크pek0501 2018-01-11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기계와 싸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기계와 합병할 것이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결혼이다.˝ - 유발 하라리, <호모데우스>에서.
전쟁이 아니라 결혼이라면 두려울 게 없겠습니다.

cyrus 2018-01-11 12:16   좋아요 1 | URL
인간과 기계가 합병하는 미래가 온다 해도 전쟁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현재까지는 첨단 무기를 사용하는 전쟁이 ‘인간 대 인간’이라면 호모 데우스의 미래에 펼쳐지게 될 전쟁은 ‘기계 대 기계’일 것 같습니다.. ^^;;
 

 

 

생텍쥐페리(Saint Exupery, 애칭 생텍스’). 그는 하늘을 나는 멋진 미치광이[1]였다. 열두 살에 처음 비행기를 탄 이래 그는 자신의 삶을 하늘에서 떼어 놓지 못했다. 생텍스는 일상에서 철저히 탈출하는 걸 바랐고 비행에서 그걸 찾은 것이다. 그에게 글쓰기는 체험의 결과를 기록하는 행위다. 따라서 생텍스의 글은 철저하게 체험되었고 소설적 허구를 초월했다.

 

 

 

 

 

 

 

 

 

 

 

 

 

 

 

 

 

 

 

 

 

*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마카롱 에디션, 펭귄클래식코리아, 2015)

* 생텍쥐페리 네 안에 살해된 어린 모차르트가 있다(에프, 2017)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는 생텍스식 글쓰기, 즉 체험의 결과를 기록하는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생텍스는 무수한 별들 사이를 떠돌면서 대지의 모습을 보았다. 그 대지 위에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투명한 관계의 끈을 보았다. 생텍스를 비행 경험을 통해 인류애에 눈을 뜬다. 오늘날에도 꾸준히 인용되고 있는 인간의 대지속 문장은 생텍스 자신의 체험에서 얻은 명징한 결론이다.

 

 

우리 외부에 있는 공동의 목적에 의해서 형제들과 이어질 때, 오직 그때에만 우리는 숨을 쉴 수가 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임을. 동료란 도달해야 할 같은 정상을 향하여 한 줄에 묶여 있을 때에만 동료이다. [2]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은 동반자적 사랑 또는 정신적 사랑(platonic love)’을 강조하고 싶을 때 이 문장을 인용한다. 나도 사랑을 주제로 글을 썼을 때 이 문장을 인용한 적이 있다. 7년 전에 쓴 글[3]을 다시 읽어보니 부끄럽구먼. 그런데 이 문장에서 말하는 사랑은 이성 간의 정신적 사랑을 의미하지 않는다. 앞에서 인간의 대지에서 인용한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생텍스가 생각한 사랑동료애. ‘사랑을 확장하여 해석하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인류애로 볼 수 있다. 생텍스는 서구 문명의 파괴적 성향을 감지했고 인간의 대지에서 생텍스의 전쟁 비판적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왜 우리는 타인을 미워하는가? 우리는 서로 굳게 결속되어 있다. 같은 별에 사는 이웃이고 한 배를 탄 선원이다. 새로운 통합을 이루기 위해 문명이 서로 대립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문명이 서로를 잡아먹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4]

 

 

생텍스는 지상에 놓인 삶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 늘 하늘로 날아올라 탈출했다. 그렇지만 그는 하늘을 나는 동안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싶어 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탯줄’, 즉 연대감이다. 생텍스는 서로를 결속해주는 완벽한 소통의 모습을 동료 비행사와의 관계에서 찾았다. 인간의 대지에 등장하는 는 생텍스 본인이다. ‘는 우편물을 비행기에 실은 채 유럽과 남미를 오가는 업무를 맡는다. 실제로 생텍스는 야간에 우편비행기를 모는 일을 했다. 비행사는 생사를 오가는 직업이다. 악천후 속에 비행 업무를 수행하다가 사막에 추락하는 일이 다반사다. 운이 따르지 않으면 비행사가 실종하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의 대지는 생텍스를 포함한 우편업무 담당 비행사들의 경험이 반영된 소설이다. 그래서 동료 비행사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심리 상태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앙리 기요메(Henri Guillaumet)는 생텍스가 믿고 의지했던 동료 비행사이자 친구이다. 1930년 기요메가 비행 중 안데스 산맥에서 실종했을 때 그를 찾으러 나선 구조대 중 한 명이 생텍스였다. 실종된 지 일주일 만에 기요메는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기요메의 구출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기뻐했던 사람이 생텍스였다. 생텍스는 기적에 가까운 친구의 체험을 재구성하여 인간의 대지에 기록했다. 생텍스는 기요메를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혹독한 상황 속에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위대한 인물로 그렸다. 그러나 기요메는 1940년 비행 도중에 격추되어 사망했다. 친구의 부고를 확인한 생텍스는 진정한 우정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 나탈리 데 발리에르 생텍쥐페리 : 지상의 어린 왕자(시공사, 2000)

* 생텍쥐페리 야간 비행/ 남방 우편기(펭귄클래식코리아, 2008)

 

 

 

인간의 대지는 소설보다는 산문에 더 가깝다. 텍스의 생애, 그리고 그와 동료 비행사들과 끈끈한 관계를 모르고 인간의 대지를 읽으면 글 속에 숨어 있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의미를 찾아내기 어렵다. 따라서 인간의 대지뿐만 아니라 작가의 비행 경험이 반영된 야간 비행, 남방 우편기를 읽기 위해선 생텍스가 누군지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다. 그동안 생텍스는 비행사 겸 소설가’, ‘어린 왕자의 작가로만 알려졌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가 왜 하늘과 비행기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생텍스는 하늘을 나는 휴머니스트였다. 위험한 비행길 속에서도 휴머니즘을 잃지 않는 생텍스 같은 비행사들에게 호모 아이테리우스(Homo Aetherius, 하늘의 인간)’라고 붙여주고 싶다. ‘하늘을 나는 멋진 미치광이들보다 더 잘 어울리는 별칭이다.

 

 

 

 

 

 

[1] 나탈리 데 발리에르 생텍쥐페리 : 지상의 어린 왕자102

[2] 생텍쥐페리, 허희정 역 인간의 대지200

[3] [공감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 2010106

http://blog.aladin.co.kr/haesung/4197568

[4] 생텍쥐페리, 허희정 역 인간의 대지20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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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0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1-10 17:22   좋아요 0 | URL
옛날에는 생텍쥐페리의 죽음에 대해서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었어요. 자살설, 사고로 인한 추락설, 격추설 등이 있었어요. 최근에 생텍쥐페리의 비행기가 독일 비행기에 격추되었다는 정설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실제로 그의 비행기를 격추했다는 독일 비행사의 증언도 있어요.

겨울호랑이 2018-01-10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모 아이테리우스. 별명은 좀 재미있어야 하는데 너무 멋진 별칭 아닌가요? ㅋㅋ^^:

cyrus 2018-01-10 17:23   좋아요 1 | URL
그런가요? 저는 ‘아이테리우스’가 길어 보여서 조금 마음에 안 듭니다. 발음이 입에 착 달라붙지도 않고요.. ^^;;

oren 2018-01-10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에 처음 갔을 때 묵었던 파리 근교의 어느 호텔 로비에서 ‘생텍쥐페리가 직접 몰았던 비행기‘가 전시되어 있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생텍쥐페리와 앙리 기요메의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 속의 비행기와 모습이 흡사하더군요. 마침 궁금해서 뉴스를 찾아 보니, 2차대전때 행방불명되었던 ‘생텍쥐페리가 몰던 비행기‘의 잔해가 발견되었다고 나오네요.

cyrus 2018-01-10 17:28   좋아요 1 | URL
<생택쥐페리 : 지상의 어린 왕자>에 앙리 기요메와 생텍쥐페리가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어요. 책에 나온 사진이 바로 제 블로그에 올린 사진입니다. 독일 비행사가 생텍쥐페리의 비행기를 정찰 군용기로 인식해서 격추했다고 합니다. 독일 비행사는 자신의 요격 사실을 며칠 후에 알았다고 하더군요. 아이러니하게도 독일 비행사는 생텍쥐페리의 소설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은 질문들 - 우리에게 필요한 페미니즘 성교육
페기 오렌스타인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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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밖에서 놀다가 다쳤으면 병원에 가면 된다. 자녀가 큰 잘못을 저질렀으면 부모는 자녀에게 올바르지 않은 행동이 무엇인지 가르치면 된다. 이것이 자녀를 위한 부모의 역할이다. 그런데 자녀가 인터넷을 하다 음란물이나 성인 화상채팅앱을 본다면? 불법 유해정보에 노출된 청소년들의 피해가 늘어나도 대부분 부모는 ‘내 아이는 안 그러겠지.’라는 생각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는다. 십대 딸을 둔 저널리스트 페기 오렌스타인은 다르다. 그녀는 내 아이뿐만 아니라 모든 평범한 아이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성범죄를 저지른 청소년들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한 것인 줄 모른다. 청소년 집단 성폭행 사건의 장본인 중 A군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학생이다. 가해 학생 A군의 부모는 아들이 잘 자랄 거라 믿었다. A군은 부모님이 집에 없는 시간에 거의 음란물을 보면서 지냈다. 그를 포함한 다섯 명의 친구들은 음란물에서 본 장면을 따라 하고 싶었다. 그들은 여학생을 조용한 장소로 불러내 집단으로 성폭행했다. 경찰에 끌려간 뒤에도 A군은 죄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부모는 A군에게 성폭행이 세상에서 나쁜 일이라고 꾸짖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청소년들의 인터넷 음란물 접촉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스마트폰 채팅앱이다. 성인 인증 없이 청소년들도 접속하는 채팅앱은 불법 성매매의 온상이 되고 있다. 시대가 변할수록 인터넷 보급률과 소셜 미디어 이용자 수는 급증하고 있다. 십 년 전 청소년들은 컴퓨터로 음란물을 접하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아주 손쉽게 음란물을 접한다. 페기 오렌스타인은 시대 변화에 맞는 새로운 성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미국인이 처음 성생활을 시작하는 연령대는 15세에서 20세 사이다. 페기 오렌스타인은 십 대부터 이십 대 여성 70명을 심층 인터뷰하면서 청소년이 경험하는 성문화의 심각성을 확인한다. 미국 십 대 청소년들은 가벼운 만남을 추구하는 ‘훅업(hook-up) 문화’에 빠져 있고, 스마트폰으로 외설적인 메시지나 음란 사진을 주고 받는 ‘섹스팅(sexting)’을 통해 이성을 만난다. 외모 가꾸기에 관심이 많은 십 대 소녀들은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여 자신의 ‘핫(Hot) 한’ 면모를 보여주려고 한다. 또래 이성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섹시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소녀들은 자신의 외모, 몸무게 등에 지나치게 신경 쓴다. 페기 오렌스타인은 외모를 보여주고 확인할 수 있는 소셜 미디어와 섹스 코드로 청소년을 사로잡는 대중문화를 십 대 소녀들의 몸을 성적 대상화로 전락하게 만드는 사회적 원인으로 지적한다.

 

미국 청소년들은 임신 위험성이 낮은 오럴 섹스를 선호한다. 그런데 성에 잘못 눈뜬 남학생들은 자신의 쾌락을 충족하기 위해 여학생에게 오럴 섹스를 하자고 제안한다. 여학생은 상대 이성의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찝찝한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삽입이 없는 오럴 섹스가 어째서 ‘첫 경험’이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럴 섹스도 ‘성생활’의 일부이며 남녀 모두 만족스러운 성 생활을 하려면 서로 마음이 일치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청소년의 오럴 섹스는 남녀 간의 애정이나 화합과 무관하며 남학생이 주도하는 반강제적 성행위다. 그리고 ‘찝찝한 첫 경험’을 겪은 여학생은 남성이 주도하는 성행위에 수동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페기 오렌스타인은 ‘섹스’와 ‘성생활’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부모, 특히 아버지들은 아들이 이성 교제를 막 시작했거나 음란물을 본 사실을 알아차리면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우리 아들,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구나. 대견해!”, “너도 야동을 보다니 요 녀석 다 컸구먼.” 이러한 아버지들의 반응에는 ‘남성이 이성을 만나고, 성에 눈을 떠야 어른이 된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욕과 쾌락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반면 딸이 이성 교제를 잘못해서 본의 아니게 임신을 하면 부모는 딸을 꾸짖는다. 여학생을 임신시킨 아들을 둔 부모들은 사건의 책임을 여학생에게 전가한다. 성폭행 피해자가 된 여학생은 주변으로부터 배척당한다. 사람들은 야한 옷을 입거나 남성을 유혹하게끔 대화를 하는 여성의 행동이 성폭행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착각한다. 이러한 잘못된 통념 때문에 성폭행 가해 남학생에 대한 법적 처벌이 미미해지고, 성폭행 피해 여학생은 ‘걸레’, ‘창녀’ 소리를 듣는다.

 

페기 오렌스타인은 부모야말로 바람직한 성행위가 무엇인지 가르칠 수 있는 최고의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대부분 부모는 자녀의 성적 욕구를 이해하고 확인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부끄러워하면 지는 거다. 부모는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나타나게 될 몸의 변화와 남녀 모두 만족하는 첫 경험이 건강한 성생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녀에게 알려줘야 한다. 부모는 자녀가 올바른 방향으로 성에 눈뜰 수 있도록 늘 지켜보고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방비한 상태의 자녀는 편견과 위험이 도사리는 성문화에 빠져든다.

 

아이가 이성 친구를 만나 첫 경험을 했는지, ‘원 나잇 스탠드’와 ‘데이트 강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이에게 물어보는 것은 부모와 자녀 모두 부끄럽게 만드는, 민망한 질문이 절대로 아니다. 어떤 독자는 이 책을 ‘자극적인 언어만 난무한 섹스 보고서’라고 했다. 이 책을 읽고도 저자의 성교육 방식이 낯 뜨겁다고 생각한 독자들이 꽤 있다면 심각한 일이다. 그들은 구시대적 성교육에 익숙해져 있다. 여전히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구시대적 성교육을 배우고 있으며 그걸 배우면서 자란 부모는 성에 관련된 현실적 문제를 만나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섹스와 피임만 가르쳐주는 성교육이 전부가 아니다. 성 평등, 동성애, 데이트 강간 등 현실적이고 다양한 정보를 가르쳐야 한다. 성교육은 아이만 배우는 과목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어른들도 배워야 한다. 성교육도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성교육 지도 방식에 주도적으로 피드백해줄 수 있는 학문이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 성교육’은 아이, 어른 모두를 위한 교양 과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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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9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1-10 11:4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섹스에 따른 책임 의식을 자녀에게 알려주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이 정도 말은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하라 2018-01-09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트위터에서 어느 뉴스기사로 봤는데 서울 어느지역 고교에서 청소년 피임문제로 콘돔을 나눠 주기로 했다더라구요. 이젠 청소년 성문제도 동서양의 차가 없어진 것 같아요. 야동도 하나의 사회문제가 된지 오래이고 그와 동시에 성문화의 동서양의 차가 사라지고 문명 간의 차이가 점점 더 사라져가는 것 같네요.

cyrus 2018-01-10 11:44   좋아요 0 | URL
청소년들이 스스로 섹스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게 된다면 콘돔을 착용하는 방법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전 세계가 소셜미디어에 익숙해지니까 청소년 성문화와 성 문제의 동서양 차이가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나온 ‘훅업 문화’와 ‘섹스팅’은 우리나라 ‘원 나잇 스탠드’와 ‘성인 채팅’과 비슷했습니다.

stella.K 2018-01-09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책 읽었구나.
뭐 나름 좋긴 했는데 사례가 너무 많아서
나중엔 어질어질하더군.
그런데 정말 필요한 말도 많이했어. 그지?^^

cyrus 2018-01-10 11:46   좋아요 0 | URL
네. 부모로서 자녀에게 해주고 싶은 저자의 말이 인상 깊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