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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의 숨은 꽃, 모리조 ㅣ 예술가의 삶과 진실 6
아르망 푸로 지음, 정진국 옮김 / 글항아리 / 2009년 9월
평점 :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8/0111/pimg_7365531661815715.png)
「발코니」는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또 다른 대표작이다. 마네는 이 그림을 죽을 때까지 자기 화실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그림 왼쪽에 있는 여인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다. 이 이름을 꼭 기억해두시라. 그녀는 인상주의 화가 그룹의 당당한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아르망 푸로(Armand Fourreau)의 《인상주의의 숨은 꽃, 모리조》(글항아리, 2009)는 남성 중심의 19세기에 여성이란 장벽을 이겨내고 예술혼을 불태워 인상파 최초의 여류화가로 거듭난 베르트 모리조의 인생과 예술을 정리한 평전이다. 이 책의 저자는 모리조의 가족들을 만나 육성 증언을 채집했고, 공개된 적이 없는 모리조의 습작을 발굴하여 소개했다.
모리조는 로코코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의 증손녀였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음악과 미술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그녀의 둘째 언니 에드마 모리조(Edma Morisot)도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다. 자매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옛 거장의 작품을 모사하며 그림 공부를 했다. 자매는 화가가 지녀야 할 자질을 충분히 갖추었다. 특히 베르트의 마음에는 화가가 되겠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자매는 조제프 기샤르(Joseph Guichard), 카미유 코로(Camille Corot)의 제자가 되었으나 베르트는 스승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낭만주의 회화를 선호한 기샤르는 자연을 묘사하는 그림을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코로는 정확한 묘사를 강조했다. 베르트는 스승의 그림을 모사하거나 화실에서 그림 그리는 일이 자신의 열망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리조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명작을 모사하던 중 마네를 만나 그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녀는 마네의 동생과 결혼하면서 자주 마네의 작품 모델이 되기도 했다. 마네는 인상주의 회화 그룹의 전시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화가들과 강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모리조는 마네 주변에 모이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자연스럽게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그녀는 1874년 제1회부터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까지 그림을 출품했다. 인상주의 전시회보다 살롱 전에 더 관심이 있었던 마네는 모리조가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하는 것을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모리조는 마네의 충고를 거절했고 오히려 그에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하도록 권유했다. 만약 그녀가 마네의 설득을 받아들였다면 인상주의 회화 그룹은 남성 화가들의 모임이 되었을 것이다.
《인상주의의 숨은 꽃, 모리조》의 부록은 인상주의 회화 그룹을 열렬히 지지한 미술평론가 테오도르 뒤레(Theodore Duret)의 글이다. 이 글은 <인상주의 화가의 역사>에 수록된 ‘베르트 모리조’ 편을 완역한 것이다. 뒤레는 모리조, 모네(Monet), 시슬레(Sisley), 르누아르(Renoir), 피사로(Pissarro)를 ‘충분한 독창성을 발전시킨 인상주의자의 정회원’이라고 평가했다. 모리조는 자신의 딸 줄리 마네(Julie-Manet)의 성장 과정을 그림에 담았다. 그녀가 즐겨 그린 그림의 주제는 ‘가족’이다. 모리조의 그림들은 남녀 역할이 비교적 엄격했던 시대 속에 살아간 여성의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모리조는 살롱 전에 여섯 번이나 입선할 정도로 쟁쟁한 실력을 갖춘 화가였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부터 그녀의 존재감은 잊혔다. ‘인상주의자의 정회원’에 그녀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모리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엉뚱하게도 마네가 있다. 마네는 인상주의 회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선구자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는 인상주의 전시회에 단 한 번도 그림을 출품한 적이 없었으므로 ‘인상주의자의 정회원’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남성 중심의 평가는 모리조의 실력을 외면했다. 모리조는 주도적으로 새로운 시대 미술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동참했으나 ‘여성화가’라는 이유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