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 독점계약 번역 개정판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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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폄(褒貶)이란 잘한 일은 칭찬하되 못한 일은 나무라는 것이다. 역사를 배움으로써 다시는 시행착오를 거듭하지 않도록 나아갈 바를 제시해 준다. 시간의 변화에 따른 역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현재의 의미를 파악하고, 미래를 예견하는데 기본 토대가 되는 역사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역사학에 대한 편견이 역사학의 포폄 정신을 가로막고 있다. 역사학은 ‘과거 지향적’이라는 믿음이다. 인류가 살아온 모든 삶의 활동을 연구하는 학문이 역사학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강화되면 역사는 이미 완료된 고정불변의 실체가 된다. 기록으로 완성된 역사의 내용은 정설로 남게 되고, 이후 지속적인 연구 가능성의 여지가 없어진다.

 

역사교과서에 정리된 역사는 이미 그것을 저술한 학자들이 연구한 것이니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이건 역사학을 죽이는 일이다. 이러다 보니 역사학은 ‘죽은 학문’이 되었다. 정부와 여당은 국정교과서 논리를 강행하려고 현행 교과서가 패배주의를 가르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역사학 위기’ 담론의 정치적 배경이다. 역설적으로 역사에 간섭하는 지배집단이 역사학을 죽이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찾으면서 힘을 잃어버린 역사를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재창조해 권력을 강화한다.

 

뉴라이트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들이 갑자기 역사를 이용하는 목적은 세계 불황으로 인해 잔뜩 움츠러든 시장경제체제의 기를 펴기 위해서다. 뉴라이트도 시장경제의 약점을 목격했다. 그래서 국정교과서를 통해 시장경제의 약점을 은폐하고, 성장발전의 긍정성을 강조하고 싶어 한다. 자신에게 친숙한 과거를 고정불변한 소유물로 보는 자유경제원의 반쪽짜리 역사관은 현실에 대한 실천적·비판적 개입이 사라져버린 역사학의 죽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역사학의 임무를 모르는 사람은 에드워드 카가 반대하는 인간의 부류다. 집단세력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위인을 역사 밖으로 놓아두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이승만, 박정희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유령을 소환함으로써 국민에게 그들을 찬양하고 사랑하자고 전도한다. 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상한 명령’이다. 역사 밖의 위인은 역사가의 비판적 개입을 피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위인을 ‘최고 존엄’으로 격상시킨다. 북한에 있는 일이 실제로 남한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시장경제에 대한 간섭을 반대하던 뉴라이트는 위대한 권력자의 힘을 빌려 역사를 간섭한다. 그리고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입장을 반 정권세력으로 규정한다. 뉴라이트가 논하는 역사는 그들만을 위한 헛된 로맨스에 불과하다. 자유경제원은 자유주의를 가장한 엘리트 집단일 뿐이다. 그들의 역사 남용을 내버려둘수록 ‘저항적 지식인(intellectual dissident)’의 존재가 희미해진다.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카는 나아가 “역사는 하나의 과학이며 동시에 진보의 과정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렇지만 카의 명제는 우리나라에서만 힘을 크게 뻗치지 못하고 있다. 애석하게도 우리나라 역사학은 카가 지향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과거에 대한 해석이 수정되고 발전되기는커녕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역사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다. 역사를 남용하는 정부와 엘리트 집단은 현재와 과거의 대화를 끊고 있다. 국정교과서 논리를 밀어붙이면서 역사학의 숨통마저 끊으려고 한다. 정부와 뉴라이트는 ‘이승만, 박정희, 국정교과서’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학뿐만 사회 전체가 아주 불행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과거를 너무 사랑할수록 미래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한 발 내딛는 추진력을 잃어버린다.

 

 

 

 

 

역사는 지배세력을 만족시켜주는 박제품이 아니다. 과거에 벌어졌던 상황이 후대에 의해 끊임없이 재평가되어야지 역사학이 살아 숨 쉴 수 있다. 지배세력 이데올로기와 손잡은 역사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즉, 올바른 사실을 가지지 못하고 일부러 눈 감는 지식인은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다. 그들이 생각하는 역사학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카는 ‘과거의 죽은 손’에서 자신을 해방하자고 강조했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현재를 비춰야 할 역사의 거울이 과거의 죽은 자들에게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다. 과연 우리 사회와 역사학은 언제 이승만과 박정희의 죽은 손에서 해방될 것인가. 가까스로 과거에 해방되더라도 앞으로 펼쳐지게 될 상황이 너무 어둡다. 국정교과서라는 책의 감옥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역사 밖으로 나온 이승만과 박정희의 살아있는 유령이 책의 감옥 내부를 떠돌아다닌다. 그들은 빅 브라더처럼 역사와 그 역사를 바라보는 국민의 눈을 감시한다. 현재와 과거의 진정한 대화가 점점 불가능해진다.

 

 

 

※ 서평대회 이벤트에 응모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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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4-21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번 공감!~

cyrus 2016-04-23 11:2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04-2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별점 만점이 아니라서 섭섭합니다. 흑 ㅠ
제 인생 최고의 책인데요. ㅎㅎ

cyrus 2016-04-23 11:24   좋아요 0 | URL
문체가 조금 더 매끄러웠으면 별 다섯 개였습니다. ^^

페크pek0501 2016-04-22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으로 유명한 책에 대한 서평을 쓰셨군요. 제가 존경하는 책입니다.
저도 이런 책은 별점에 만점을 주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에 꽤 충격을 받았던 책이었어요.
앞으로 신간에 갖는 관심을 줄이고 고전과 현대 책의 비율이 고칠현삼은 아니더라도 5대 5가 되도록 읽어야겠습니다.

cyrus 2016-04-23 11:27   좋아요 0 | URL
제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냥 ‘카가 말한 역사란 이런 거구나’하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최근에 개정판으로 다시 읽어보니까 전에 읽은 느낌과 완전히 달랐어요. 역사의 기본 개념을 잊고 있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yamoo 2016-04-23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의 이 책을 저는 3번 정도 읽었는데, 지금까지 리뷰를 쓸 생각을 못했네요. 언젠가는 리뷰를 써야 할 거 같습니다~

서평대회 열심히 응모하시는 군요~ 좋은 결과 있기를 바라겠습니다..ㅎㅎ

cyrus 2016-04-25 15:00   좋아요 0 | URL
서평대회는 복불복이죠. ㅎㅎㅎ
 

 

 

 

 

 

대구에서 개최하는 행사입니다. 대구에 거주하시는 분이라면 내일 한 번 들려보셨으면 합니다. 김영하 작가의 친필 사인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저는 알뜰도서 교환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합니다. 참여 방법은 간단합니다. 집에 있는 책을 가져오면 1인당 3권까지 원하는 책을 교환해준답니다. 저는 알라딘 서점에 매입 불가능한 책을 처리할 생각입니다.

 

교환전에 비치될 책이 공무원, 기관 단체 등에서 기증받은 것입니다. 그 권수가 삼천여 권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이 행사를 이번에 처음 알게 돼서 교환전에 비치되는 책의 상태와 종류가 어느 정도인지 잘 모릅니다. 운이 좋으면 알짜배기 책을 찾을 수 있겠죠.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감 또한 더욱 큽니다. 왠지 어린이, 청소년용 책이 가장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알짜배기 책이 없으면 헌책방에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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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4-2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뿔싸..근무시간이니 ㄷㄷㄷㄷㄷ

cyrus 2016-04-21 16:41   좋아요 1 | URL
저는 야간 근무라서 오전에 교보문고에 들리고, 행사에 가보려고 합니다. 주말에 행사를 진행하지 않은 점이 아쉬워요. 주말에 행사하면 사람이 많이 올 텐데 말이죠.

alummii 2016-04-21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에서 좋은 행사를 하는 구요!^^ 도서교환전 이런 거 우리동네에선 본적없어요 ㅋ

cyrus 2016-04-21 16:42   좋아요 0 | URL
제가 사는 동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공도서관이 보존서고를 개방해서 책을 무료로 주는 행사를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보존서고에 상태가 멀쩡한 책이 꽤 있거든요. ^^

yureka01 2016-04-21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주말이라면 당장..ㅎㅎㅎㅎ맞습니다..아쉽네요..주중이라서 ㄷㄷㄷㄷ

레삭매냐 2016-04-21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행사 마음에 듭니다 :> 저희 동네에서도 주말마다 헌책마당을 연다고 하는데 주말마다 비가 계속 와서 취소되고 있네요. 참가해 보고 싶네요.

cyrus 2016-04-21 16:50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 그 동네가 어딥니까? 부럽습니다. ^^

레삭매냐 2016-04-21 16:53   좋아요 0 | URL
책나라 군포입니다. 올재 클래식 생각나서 교보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이미 다 팔렸네요. 아쉽네요.

cyrus 2016-04-21 16:58   좋아요 0 | URL
벌써 팔렸군요... 저는 내일 교보문고 개장하자마자 들어가서 살려고요.

붉은돼지 2016-04-21 17:00   좋아요 1 | URL
저는 11시에 교보사이트에서 구입했어요. ㅎㅎㅎㅎ

페크pek0501 2016-04-22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까지군요. 대구 친구에게 알려 줘야겠어요.

cyrus 2016-04-23 11:28   좋아요 0 | URL
오늘 같은 책의 날, 특히 주말에 행사를 열었으면 사람이 많이 왔을 거예요. ^^
 

 

 

 

 

 

 

 

 

 

 

 

 

 

 

 

 

 

 

 

이 도서목록은 《보는 눈의 여덟 가지 얼굴》(글항아리, 2015)의 참고 문헌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 책과 관련없는 이야기

 

원래는 ‘마이리스트’ 형식으로 목록을 작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작성된 마이리스트가 북플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참고 문헌 목록을 ‘마이페이퍼’ 형식으로 쓰려고 합니다. 마이리스트는 독자가 읽고 싶거나 관심 있는 책을 골라서 목록으로 만들 수 있는 기능입니다. 어떤 특정 주제를 정해서 주제와 관련된 책들을 모아놓을 수 있다는 점이 마이리스트의 매력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마이리스트 서비스의 존재가 예전만큼이나 못한 상태입니다. 북플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마이리스트’ 작성을 하지 않아도 언제든지 관심 있는 책을 고를 수 있게 됐어요. ‘읽고 싶어요’ 하나만 누르면 끝이에요. 새롭고 간편한 서비스 기능이 등장할수록 기존의 서비스를 사용하는 빈도가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지금도 마이리스트를 작성하는 회원이 많습니다. 그러나 북플 이용자들은 마이리스트를 보지 못합니다. 북플로 가입한 초보 회원은 마이리스트 기능이 무엇인지 잘 모를 겁니다. 몇 년 지나고 나면 마이리스트 기능이 사라지는 예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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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6-04-21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머스 핀천 책을 다룬 논문을 읽다가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샀는데 고이 모셔 두고 있습니다.

cyrus 2016-04-21 16:55   좋아요 1 | URL
혹시 래삭매냐님도 핀천의 소설을 읽으려다가 관련 논문을 읽으신 거예요? 이번 달 달궁 독서모임 책이 어떤 건지 봤습니다. 저는 <브이를 찾아서> 1장만 읽은 상태입니다. 채널예스 ‘출판사 탐방’ 민음사 특집 글에서 본 건데 올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출간 예정작으로 <브이를 찾아서>가 언급되었더군요. 올해는 꼭 나오겠지요? ^^;;

http://ch.yes24.com/Article/View/30077

레삭매냐 2016-04-21 17:03   좋아요 1 | URL
하하하 당근입니다. 일단 책을 읽긴 했는데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구요. 논문도 읽긴 했는데 아리까리합니다. <브이>가 나온다고 하니 또 사서 소장해야겠네요 :>

syo 2016-04-21 1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었는데, 읽을 때는 좋다좋다 읽었는데, 두 달도 채 안됐는데, 왜 아무 기억도 안나는 걸까요.......ㅠ

cyrus 2016-04-21 21:16   좋아요 1 | URL
어떤 챕터는 이해하기 쉬웠는데, 라캉이 언급되는 챕터는 조금 어려웠어요. 챕터마다 난이도가 달랐어요. ^^
 
마네의 회화 파레시아 총서 1
마리본 세종 엮음, 미셸 푸코 외 지음, 오트르망.심세광.전혜리 옮김 / 그린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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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양쪽에 하늘로 껑충 솟은 가로수가 쭉 늘어서 있다. 길 중앙에 개를 데리고 유유히 걸어가는 남자가 보인다. 나무 뒤에선 두 남녀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로수를 따라 눈길을 옮겨 본다.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 길의 끝에서 지평선과 만나 사라진다. 두 줄로 나란히 늘어선 나무가 수평선 위의 한 점에서 서로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점은 실제로 불가능한 점이다. 이 그림을 그린 호베마는 멀고 가까운 풍경의 느낌이 잘 드러나도록 원근법을 사용했다. 실제로 기찻길을 바라볼 때나 양쪽으로 늘어선 나무들을 볼 때면 나란한 두 선(평행선)이 만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화가들은 일찍부터 이런 사실을 알고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에 나타난 17세기 북유럽의 전원 풍경은 조용한 시골 마을의 가로수 길과 별다르지 않다. 시선이 자꾸 소실점에 머무르면 이 길을 직접 걷고 싶은 느낌이 피어난다.

 

실제처럼 보이고 깊이감이 느껴지지만, 사실은 만질 수 없는 평평한 종이일 뿐이다. 소실점과 원근법은 평면을 실제와 같이 똑같이 보이게 하는 일종의 눈속임이다. 원근법은 대상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기술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보는 눈인 동시에 그것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원근법이 본격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시각은 주체가 되어 유한한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산, 나무 같은 자연이 그림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신이 자연을 창조하듯 그림 속 세상을 창조한다. 신과 종교의 영역에서 탈피해 자연의 모습을 닮은 풍경화를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러나 세상을 좀 더 사실적으로 바라보자며 화가와 감상자가 맺은 하나의 약속에 불과하다. 이 회화의 약속을 인상주의 화가들이 과감하게 파기했다. 대상을 똑같이 모방하는 사실주의의 전통에 벗어나기 시작했다. 서양미술사를 논할 때 인상주의를 설명하는 대목에 으레 ‘빛의 과학적 분석’이 자리하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따라 변하는 물체의 색을 추구했다. 더 나아가서는 원근법에 근거한 오랜 회화의 약속을 뒤엎은 ‘평면성’의 자기반성이라는 개념의 덧칠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전통적 미술의 근간을 바꾸어놓은 혁명이었다. 이 미술 혁명의 선두주자가 에두아르 마네다. 마네는 명암법과 원근법이 사라진 평평한 평면 세계를 표현했다. 그가 작품을 선보일 때마다 관객들의 비난과 모욕이 쏟아졌다. 어떤 때는 관람객이 휘두르는 채찍질로부터 그림을 보호해야 할 정도였다.

 

 

 

 

 

마네는 1866년 『피리 부는 소년』을 살롱 전에 출품했으나 낙선하고 만다. 소년은 완벽한 구도로 화폭 한가운데 서 있다. 자세가 안정되었고, 좌우 균형 또한 문제없어 보인다. 그런데 살롱 심사위원들은 마네의 출품작을 기본이 부족한 그림으로 판단했다. 그 이유는 마네의 그림은 기존의 초상화와 다른 방식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마네는 배경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인물만 강조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림자 또한 생략했다. 인물만 남은 그림이 마치 사방이 하얀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처럼 느껴진다. 살롱 심사위원들은 마네의 의도적인 표현을 낯설어했다. 마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소설가 에밀 졸라는 그를 변호하기 위한 글을 신문에 기고한다. 그러나 마네를 향한 자신의 호감만 잔뜩 드러냈을 뿐, 마네 회화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마네에 대한 애정을 고작 신문지에 쏟아 부은 졸라의 변호가 소극적으로 느껴진다. 만일 졸라가 미셸 푸코만큼이나 그림 보는 눈이 조금만 더 예리했었더라면, 마네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한 권의 책이 탄생하였을 것이다. 생전에 졸라가 시도하지 못한 것을 푸코는 해냈다. 푸코는 튀니지에서 마네를 주제로 한 강연을 열었고, 죽기 전에 강연 내용을 정리한 원고를 준비하고 있었다. 비록 푸코 최후의 저서가 될 뻔했던 원고는 파기되어 사라졌지만, 강연 녹취록과 녹음테이프가 다행히 보존되었다.

 

 

 

 

 

푸코는 마네가 그림 그리는 방식이 ‘고약하고 신랄하며 짓궂다’고 말한다. 푸코의 설명에 따르면 마네는 원근법 없이도 감상자의 시선을 움직이게끔 하였다는 것이다. 『카페-콩세르의 구석』이라는 그림을 보자. 언뜻 보면 시끌벅적한 카페 내부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 그림에 감상자의 눈을 안심하게 하는 소실점이 없다. 즉 원근법이 무시된 그림이다. 인물의 구도가 산만하다. 손님이 주문한 맥주를 든 여종업원은 전방을 바라본다. 그 옆에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손님의 시선은 후방으로 향해 있다. 이들은 무엇을 향해 뚫어지라 쳐다보는 것일까. 마네는 감상자가 절대로 볼 수 없는 무엇인가를 숨겼다.

 

 

 

 

 

『카페-콩세르의 구석』보다 먼저 그려진 『화실에서의 점심식사』라는 그림도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세 명의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상황을 설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들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진행되고 있지 않다. 네 명의 시선은 서로 어긋나 있으며 각자 생각에 빠져 있다. 식사 분위기가 썩 즐겁지 않아 보인다. 감상자는 탁자에 기대어 앉아 정면에서 얼굴을 살짝 돌리면서 주시하는 남자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러면서 저 남자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마네는 감상자가 궁금한 광경을 잘라내 버렸다. 그다음에 광경의 조각을 태연하게 감추었다. 감상자의 시선을 그림 속 장면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감상자는 그림 속 인물이 향하는 시선을 쭉 따라가면서 그림에 드러나지 못한 비가시적인 대상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듯 마네는 의도적인 연출을 통해 감상자가 보고 싶은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성공한다. 반면 화가의 유희에 속아 넘어간 감상자는 화가가 감춘 것을 보려고 캔버스 주변이라도 돌고 싶은 심정이다. 철학 박사 다비드 마리는 푸코가 마네의 그림에서 감상자의 자유를 발견하여 감상자에게 되돌려 주는 데 성공했다고 분석했다. 마네는 감상자의 눈과 정서를 고정하는 원근법을 거부함으로써 감상자가 능동적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운동성을 부여했다. 그 대신 마네는 감상자가 어떤 방식이든지 간에 그림을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한다. 카롤 탈롱-위공은 감상자에게 그림의 해석을 요구하는 과거의 전략을 폐기한 마네가 ‘회화의 침묵’을 원한다고 말했다.

 

푸코는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은 미술사 지식이 부족하다고 고백했다. 그가 솔직하게 고백하길 잘했다. 사실 비가시적인 광경을 잘라내는 표현 방식은 마네를 비롯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했다. 이들은 일본의 채색목판화인 우키요에의 평면성에 영감을 얻어 사물을 보는 방식에 변화를 주었다. 푸코의 평가는 이미 미술 연구가들이 분석한 내용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래서 마네를 중심으로 한 인상주의 회화를 심도 있게 공부한 독자라면 푸코의 강연 내용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말과 사물》에서 보여준 박학다식한 논의가 펼쳐지는 푸코의 분석을 원했던 독자라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겠다. 원고가 없는 강연 녹취록의 한계다. 푸코는 독자가 더 알고 싶은 내용 모두 삭제해버렸다. 그 점이 무척 아쉽지만, 독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텍스트(혹은 그 속에 있는 마네의 그림)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푸코 스스로 ‘침묵’을 선택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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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0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4-21 15:23   좋아요 1 | URL
예전에 님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세테를 지적한 글을 썼던 날 기억합니다. 에밀 졸라, 보들레르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동시대 화가들의 재능을 눈여겨보면서 항상 그들의 편에 서서 전통과 맞서 싸웠으니까요.

페크pek0501 2016-04-22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원근법이 느껴지는 풍경이 좋던데요.
역시 예술가는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걸 싫어하는군요...

cyrus 2016-04-23 11:30   좋아요 0 | URL
원근법이 사람의 심리를 안정시켜줍니다. 그래서 원근법을 무시한 그림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과거에 익숙한 사람들이 크게 놀랐었죠. ^^
 
지하철 시의 논란에 부쳐.....

 

 

 

 

 

고등학생 때 국어 문제집을 풀다가 만난 시다. 시의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 같이는」. ‘궁그는’은 ‘구르다’의 전라도 방언이다. 시인은 물방울이 토란잎에 동그랗게 구르는 장면을 귀엽게 표현했다. 그런데 내가 본 그 문장은 시가 아니었다. 객관식 문제의 예시 문항이었다. 네모난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신세였다. 문제의 답을 찾느라 시에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제집을 덮는 순간, 문장은 영원히 탈출하지 못한다. 나는 문제집에 갇힌 문장을 구출했다. 생기 잃은 문장을 공책 칸에 옮겼다. 그러니까, 그때였다. 시가 날 찾아온 것은.1)

 

 

 

 

 

투명한 지하철 스크린도어 벽 속에 갇혀 있는 시다. 이 시의 제목도 예사롭지 않다. 「목련꽃 브라자」.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목련꽃 브라자」는 시가 아니라고 한다. 심지어 이 시를 얼른 빼라고 화를 낸다. 여성 속옷을 지칭한 ‘브라자’와 사춘기 소녀의 가슴을 비유한 ‘목련꽃’이라는 표현이 문제였다. 시를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브라자’와 ‘목련꽃’이 들어간 구절이 민망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이 두 단어 때문에 감흥이 완전히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시는 점점 생기를 잃었다. 문자라는 육신만이 쓸쓸하게 남은 송장이 된다.

 

앞의 시는 무기력한 감성을 소생하는 시로 부활했다. 반면 뒤에 소개된 시는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 쓸쓸히 죽어간다. 서로 정반대의 운명에 처한 두 편의 시를 만든 사람이 누굴까. 사실 두 편 모두 한 사람이 썼다. 시인의 이름은 복효근이다. 복효근 시인은 1991년에 정식으로 등단했다. 그가 쓴 세 편의 시는 중고등학생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사람들은 시인의 이름을 모르지만, 학창 시절을 겪었다면 한 번쯤 그의 시를 만나봤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에 「목련꽃 브라자」 선정성 논란 소식을 접했을 때 「목련꽃 브라자」가 아마추어 시인이 쓴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오늘 이웃의 글을 보다가 「목련꽃 브라자」 원작자를 확인했다. 시를 많이 읽지 않은 나 자신이 무척 부끄러웠다. 스크린도어에 적힌 「목련꽃 브라자」의 원작자 실명이 공개되지 않았다면, 나는 「목련꽃 브라자」를 수준 미달의 시라고 끝까지 믿었을 것이다.

 

「목련꽃 브라자」가 정말 수준이 떨어진 시인지 직접 판단하지 않겠다. 다만, 이 시 하나만 가지고 시인의 창작 능력을 폄하하는 상황이 씁쓸하다. 시인이 오래 살아서 죽을 때까지 펜을 놓지 않으면 100편이 넘는 수의 시를 남긴다. 만약에 스무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서 여든 살에 죽을 때까지 딱 천 편의 시를 남겼다고 가정하자. 사람들은 다작한 시인의 왕성한 작품 활동을 칭찬한다. 그렇지만 천 편의 시 모두 결점 없이 완벽한 예술성을 갖춘 작품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이 즐겨 읽는 애송시로 등극하면 그건 시인의 대표작이 된다. 그러나 그 이외에 다른 시는 대표작에 2% 부족한 그저 그런 작품으로 남게 된다. 대체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보는 눈이 정확하다. 작가들은 오랜 시간 투자해서 열심히 썼던 글에 미흡한 점이 발견되면 혹독하게 평가한다.

 

소설을 쓰든 시를 쓰든 죽을 때까지 글을 쓰는 사람들은 독자들이 실망하는 실패작을 남긴다. 작가도 사람인지라 무조건 좋은 작품만 쓰는 일이 불가능하다. 「목련꽃 브라자」는 모든 독자에게 공감을 주지 못한 실패작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시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소수의 독자를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시 한 편에 모두 달려들어서 설왕설래해봤자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이번 기회에 싸움을 멈추고 다른 시인의 작품을 읽어보는 게 어떨까. 그래야 시인의 진가뿐만 아니라 시 읽기의 매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시는 시집으로 읽어야 제맛이다.

 

 

 

주 1)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시작되는 문장을 변주했음. 원본은 ‘그러니까 그 나이였다. 시가 날 찾아온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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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0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4-20 20:42   좋아요 1 | URL
언론은 사소한 일을 괜히 크게 부풀려서 자극적인 뉴스로 만들려고 해요. 사실 작년에도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있는 시에 대한 시민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소개한 뉴스를 본 적이 있어요. 유명 시인이 쓴 시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고 스크린도어에 소개했으면 시민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해요. 분명 시가 잘 썼는지 못 썼는지 따졌을 겁니다.

syo 2016-04-20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네요.

에, 사람마다 독법도 느낀바도 다를테니 어떤 이의 평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구조적으로 이런 건 좀 있다고 봐요.

부족한 제 눈에는 저 목련꽃 브라자에 나오는 ˝우리 선혜˝가 화자의 딸로 보이는데요,
풋풋하지만 한 명의 여성으로 잘 자라고 있는 딸을 보는 대견함을, 그러니까 뭐 공부를 잘 하거나 착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어엿한 여성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대견한 딸을 그리는 시라고 읽었거든요.

근데 많은 사람들 눈에 그냥 사춘기 여성을 보는 어떤 중년 남성의 성적 시선만이 포착되는 것에는 일종의 사회적, 성적 편견이 작동한 부분도 있다고 봐요.

완전히 적절한 예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만약 완전히 같은 제재로 화자가 할머니고 대상이 사춘기 남자 아이가 된다면 -우리한테 다소 익숙한 `내 새끼 고추 잘 익었나 보자` 라는 식이랄까요?- 여하튼 그런 구도로 시가 나왔더라도 지금 저 시를 반대하는 사람 전부가 그대로 반대를 했을까요?

cyrus 2016-04-20 20:54   좋아요 0 | URL
syo님이 논란의 원인을 아주 정확하게 설명해주셨군요. syo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syo님이 사례로 든 할머니의 농담은 예전에는 웃고 넘어가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못하죠. 복효근 시인의 시도 가벼운 유머를 염두에 두면서 썼는데, 반대로 사람들은 불편하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만일 시에 ‘내 새끼 고추 잘 익었나 보자’라는 구절이 들어있었으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요즘 성 범죄, 성추행, 성희롱 사건 빈도가 높아지니까 성을 주제로 한 대화나 언어적 표현을 쉽게 하지 못해요. 사람들은 여전히 시는 밝고 순화된 언어로 이루어진 글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복효근 시인의 표현이 낯설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