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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회화 ㅣ 파레시아 총서 1
마리본 세종 엮음, 미셸 푸코 외 지음, 오트르망.심세광.전혜리 옮김 / 그린비 / 2016년 1월
평점 :
길 양쪽에 하늘로 껑충 솟은 가로수가 쭉 늘어서 있다. 길 중앙에 개를 데리고 유유히 걸어가는 남자가 보인다. 나무 뒤에선 두 남녀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로수를 따라 눈길을 옮겨 본다.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 길의 끝에서 지평선과 만나 사라진다. 두 줄로 나란히 늘어선 나무가 수평선 위의 한 점에서 서로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점은 실제로 불가능한 점이다. 이 그림을 그린 호베마는 멀고 가까운 풍경의 느낌이 잘 드러나도록 원근법을 사용했다. 실제로 기찻길을 바라볼 때나 양쪽으로 늘어선 나무들을 볼 때면 나란한 두 선(평행선)이 만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화가들은 일찍부터 이런 사실을 알고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에 나타난 17세기 북유럽의 전원 풍경은 조용한 시골 마을의 가로수 길과 별다르지 않다. 시선이 자꾸 소실점에 머무르면 이 길을 직접 걷고 싶은 느낌이 피어난다.
실제처럼 보이고 깊이감이 느껴지지만, 사실은 만질 수 없는 평평한 종이일 뿐이다. 소실점과 원근법은 평면을 실제와 같이 똑같이 보이게 하는 일종의 눈속임이다. 원근법은 대상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기술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보는 눈인 동시에 그것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원근법이 본격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시각은 주체가 되어 유한한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산, 나무 같은 자연이 그림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신이 자연을 창조하듯 그림 속 세상을 창조한다. 신과 종교의 영역에서 탈피해 자연의 모습을 닮은 풍경화를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러나 세상을 좀 더 사실적으로 바라보자며 화가와 감상자가 맺은 하나의 약속에 불과하다. 이 회화의 약속을 인상주의 화가들이 과감하게 파기했다. 대상을 똑같이 모방하는 사실주의의 전통에 벗어나기 시작했다. 서양미술사를 논할 때 인상주의를 설명하는 대목에 으레 ‘빛의 과학적 분석’이 자리하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따라 변하는 물체의 색을 추구했다. 더 나아가서는 원근법에 근거한 오랜 회화의 약속을 뒤엎은 ‘평면성’의 자기반성이라는 개념의 덧칠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전통적 미술의 근간을 바꾸어놓은 혁명이었다. 이 미술 혁명의 선두주자가 에두아르 마네다. 마네는 명암법과 원근법이 사라진 평평한 평면 세계를 표현했다. 그가 작품을 선보일 때마다 관객들의 비난과 모욕이 쏟아졌다. 어떤 때는 관람객이 휘두르는 채찍질로부터 그림을 보호해야 할 정도였다.
마네는 1866년 『피리 부는 소년』을 살롱 전에 출품했으나 낙선하고 만다. 소년은 완벽한 구도로 화폭 한가운데 서 있다. 자세가 안정되었고, 좌우 균형 또한 문제없어 보인다. 그런데 살롱 심사위원들은 마네의 출품작을 기본이 부족한 그림으로 판단했다. 그 이유는 마네의 그림은 기존의 초상화와 다른 방식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마네는 배경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인물만 강조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림자 또한 생략했다. 인물만 남은 그림이 마치 사방이 하얀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처럼 느껴진다. 살롱 심사위원들은 마네의 의도적인 표현을 낯설어했다. 마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소설가 에밀 졸라는 그를 변호하기 위한 글을 신문에 기고한다. 그러나 마네를 향한 자신의 호감만 잔뜩 드러냈을 뿐, 마네 회화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마네에 대한 애정을 고작 신문지에 쏟아 부은 졸라의 변호가 소극적으로 느껴진다. 만일 졸라가 미셸 푸코만큼이나 그림 보는 눈이 조금만 더 예리했었더라면, 마네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한 권의 책이 탄생하였을 것이다. 생전에 졸라가 시도하지 못한 것을 푸코는 해냈다. 푸코는 튀니지에서 마네를 주제로 한 강연을 열었고, 죽기 전에 강연 내용을 정리한 원고를 준비하고 있었다. 비록 푸코 최후의 저서가 될 뻔했던 원고는 파기되어 사라졌지만, 강연 녹취록과 녹음테이프가 다행히 보존되었다.
푸코는 마네가 그림 그리는 방식이 ‘고약하고 신랄하며 짓궂다’고 말한다. 푸코의 설명에 따르면 마네는 원근법 없이도 감상자의 시선을 움직이게끔 하였다는 것이다. 『카페-콩세르의 구석』이라는 그림을 보자. 언뜻 보면 시끌벅적한 카페 내부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 그림에 감상자의 눈을 안심하게 하는 소실점이 없다. 즉 원근법이 무시된 그림이다. 인물의 구도가 산만하다. 손님이 주문한 맥주를 든 여종업원은 전방을 바라본다. 그 옆에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손님의 시선은 후방으로 향해 있다. 이들은 무엇을 향해 뚫어지라 쳐다보는 것일까. 마네는 감상자가 절대로 볼 수 없는 무엇인가를 숨겼다.
『카페-콩세르의 구석』보다 먼저 그려진 『화실에서의 점심식사』라는 그림도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세 명의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상황을 설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들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진행되고 있지 않다. 네 명의 시선은 서로 어긋나 있으며 각자 생각에 빠져 있다. 식사 분위기가 썩 즐겁지 않아 보인다. 감상자는 탁자에 기대어 앉아 정면에서 얼굴을 살짝 돌리면서 주시하는 남자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러면서 저 남자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마네는 감상자가 궁금한 광경을 잘라내 버렸다. 그다음에 광경의 조각을 태연하게 감추었다. 감상자의 시선을 그림 속 장면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감상자는 그림 속 인물이 향하는 시선을 쭉 따라가면서 그림에 드러나지 못한 비가시적인 대상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듯 마네는 의도적인 연출을 통해 감상자가 보고 싶은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성공한다. 반면 화가의 유희에 속아 넘어간 감상자는 화가가 감춘 것을 보려고 캔버스 주변이라도 돌고 싶은 심정이다. 철학 박사 다비드 마리는 푸코가 마네의 그림에서 감상자의 자유를 발견하여 감상자에게 되돌려 주는 데 성공했다고 분석했다. 마네는 감상자의 눈과 정서를 고정하는 원근법을 거부함으로써 감상자가 능동적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운동성을 부여했다. 그 대신 마네는 감상자가 어떤 방식이든지 간에 그림을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한다. 카롤 탈롱-위공은 감상자에게 그림의 해석을 요구하는 과거의 전략을 폐기한 마네가 ‘회화의 침묵’을 원한다고 말했다.
푸코는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은 미술사 지식이 부족하다고 고백했다. 그가 솔직하게 고백하길 잘했다. 사실 비가시적인 광경을 잘라내는 표현 방식은 마네를 비롯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했다. 이들은 일본의 채색목판화인 우키요에의 평면성에 영감을 얻어 사물을 보는 방식에 변화를 주었다. 푸코의 평가는 이미 미술 연구가들이 분석한 내용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래서 마네를 중심으로 한 인상주의 회화를 심도 있게 공부한 독자라면 푸코의 강연 내용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말과 사물》에서 보여준 박학다식한 논의가 펼쳐지는 푸코의 분석을 원했던 독자라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겠다. 원고가 없는 강연 녹취록의 한계다. 푸코는 독자가 더 알고 싶은 내용 모두 삭제해버렸다. 그 점이 무척 아쉽지만, 독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텍스트(혹은 그 속에 있는 마네의 그림)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푸코 스스로 ‘침묵’을 선택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