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겠습니다 - 일본군 위안부가 된 남한과 북한의 여성들
이토 다카시 지음, 안해룡.이은 옮김 / 알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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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이상한 단체’가 있다. 그들은 소녀상 철거를 주장한다. ‘이상한 단체’의 대표는 지난달 부산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 옆에 쓰레기더미를 쌓아 놓고 간 사람이다. ‘이상한 단체’의 정체는 소녀상 설치에 반대하는 ‘진실국민단체’이다. 진실국민단체 회원들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세력들이 소녀상 설치를 추진한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소녀상 옆에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흉상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70대 노인은 일본과의 우익을 증진하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소녀상을 훼손하려고 시도했다. 이처럼 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극우단체의 과격한 행동이 도를 넘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이 20여 년간 이어온 투쟁은 2015년 12월 28일의 ‘졸속’ 한 · 일 위안부 합의로 빛이 바랬다. 박근혜 정부는 억울한 희생자들을 부끄러운 과거 역사의 한 부산물로만 간주, 은폐와 망각의 세월 속에 묶어 두려는 어리석음을 범해 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금도 한국 땅은 물론 북한, 중국, 필리핀 전역에 종군위안부로 일제에 끌려갔던 피해 할머니들이 한 많은 사연을 널리 알리지 못한 채 불치의 병으로 혹은 가난으로 고통과 시련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여성들을 ‘종군위안부(comfort women)’로 지칭했다. 그러나 피해 할머니들이 겪은 참담한 상황을 고려하면 ‘종군위안부 할머니’는 정확한 용어가 아니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한국, 북한 등 아시아 등지를 답사하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난 사진작가 이토 다카시(伊藤孝司)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연행된 여성을 ‘일본군 전용 성노예 피해자(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로 부르고 있다.

 

 

지금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종군위안부’라는 단어는 군 위안소에서 여성들이 받았던 피해 실태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피해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종군’한 것이 아니다. 장기간 감금하고 집단으로 강간한 행위를 ‘위안’이라고 부를 수 없다. 정확히 표현하면 ‘일본군 전용 성노예’이다. (14쪽)

 

 

일본 정부 관리들은 자신들이 만든 위안부 제도에 따라 한국과 중국, 필리핀 등지로부터 20만여 명의 여자들을 강제 또는 감언이설로 끌고 가 아시아 점령지역 주둔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로 삼았다. 성노예 피해 여성들은 좁고 불결한 방에 하루 스무 명이 넘는 남성을 상대해야 했다. 탈출하다 잡혀 고문을 당했고, 많은 피해 여성들이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생존자들도 평생 지을 수 없는 정신적 · 육체적 상처를 입었다. ‘성노예’라는 강한 어감 때문에 이토 다카시가 사용하는 명칭이 부정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과거의 부끄러운 행위의 의도를 어떻게든 축소하려고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을 고집한다. ‘종군’과 ‘위안’이라는 단어는 피해 여성들이 군인들에게 자발적으로 ‘성적 위안’을 제공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명확한 단어 사용이 필요하다.

 

 

 

 

 

명칭을 보다 알기 쉽게 전달하려고 간략하게 ‘성노예’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성노예’ 명칭을 사용되는 것에 반대한다. 명칭이 길어도 ‘일본군 전용 성노예 피해자’ 혹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라고 정확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극우세력들은 전 세계 인류사를 통틀어 여성이 전쟁에 성노예로 동원된 역사의 전례가 있기 때문에 일본에만 ‘야만적인 범죄 국가’로 덮어씌우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특정 과거를 회피하기 위해 더 오래된 과거까지 들먹이는 그들의 논거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일본이 만들어낸 위안부는 인류사상 전례가 드문 전쟁범죄 행위였다. 이토 다카시도 ‘대규모로 여성을 군대 전용의 성노예로 만든 국가는 일본뿐’(14쪽)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극우단체는 일본과의 외교적 친선 관계를 조성하기 위해 소녀상 철거를 시도하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충분히 받았다고 믿는다. 심지어 일본군이 여성을 강제로 동원한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 문제를 지엽적으로 인식하는 그들의 태도는 ‘인류사에 남은 범죄’를 덮는 일본 정부를 돕는 형태다.

 

 

 

 

이토 다카시는 20년 넘게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을 취재하면서 그분들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들었다. 그의 눈은 ‘역사의 상처가 만든 흉터’를 바라봤고, 귀는 반세기 동안 과거의 틀에 영영 갇힐 뻔했던 할머니들의 처절한 목소리를 하나하나 흘리지 않고 담아냈다. 그의 사진은 너무나 생생하고 섬뜩하기까지 하다. 꽃다운 나이 씻기지 않을 상처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보는 독자의 가슴에 멍울지게 한다. 《기억하겠습니다》는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를 좀 더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 아니다. 1991년 처음으로 종군위안부의 비인도적 행태를 고발한 故 김학순 할머니의 유언처럼 《기억하겠습니다》는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위안부)을 역사에 남겨 두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바로 극우세력의 잘못된 시각이 오늘날 일본 정부가 보여 주고 있는 오만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무지로 무장한 극우세력의 태도는 은폐와 발뺌으로 일관해 온 가해자 일본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에 앞서 어쩌면 무관심과 망각으로 이를 방조해 온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에게 그 책임을 되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이 진심으로 과거를 반성시키려는 최소한의 노력마저 게을리 한 채 ‘과거 청산=합의금’으로 인식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기억하겠습니다》는 우리 사회가 처한 슬픈 현실이 어떤지 알려준다. 왜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을 잊어서는 안 되는가를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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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30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4-30 15:54   좋아요 4 | URL
이번에 당선된 대통령은 박근혜와 최순실이 같이 싼 빅똥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다만 힘센 남자라고 자랑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똥 치우는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겨울호랑이 2017-05-01 13: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우리가 일본군에 의한 피해도 지속적으로 요구해야겠지만, 베트남전에서 우리의 잘못에 대한 사과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잘못에 대한 사과가 선행되어야 국제적으로도 우리의 요구가 보다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질 것 같습니다..

cyrus 2017-05-01 13:40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코피노 문제도 장기적인 관심이 필요한데, 너무 쉽게 잊혀집니다.

stella.K 2017-04-30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작년 말인가?
소녀상을 지키는 기륵한 젊은이들이 있더군.
젊은이들 자기 밖에 모르고 스펙 쌓는데만 열 올린다고
하지만 그런 젊은이들도 있어.
심성정인가? 대통령되면 위안부 재협상 할 거라고 하던는 것 같은데
누가 대통령이 됐든 정말 이 문제는 다시 생각해 봐야한다고 봐.

cyrus 2017-05-01 13:42   좋아요 0 | URL
소녀상을 지키는 분들은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워요. 그들은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잖아요. 적극적인 행동은 못하더라도 ‘위안부 할머니‘ 명칭이 부정적인 이유 정도는 알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해요.

오쌩 2017-04-30 2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시오노 나나미의 망언에 분노한적이 있었어요. 누가 위안부라고 이름 붙였는지 모르지만 참 상냥한 이름이라는 소리에, 과연 인간은 반성이 가능한 동물인가 생각했었죠.

다음 정부는 정말 할일이 많겠네요...

cyrus 2017-05-01 13:45   좋아요 0 | URL
저도 ‘위안부 할머니‘ 명칭을 안 쓰려고 해요. 쓰쓰이 야스타카의 망언이 공개되자마자 그의 책을 절판시킨 출판사들이 있는 반면에 여전히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펴내는 한길사의 행보를 보면 아이러니합니다.
 
솔직한 식품 - 식품학자가 말하는 과학적으로 먹고 살기
이한승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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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사람, 특히 다이어트에 신경 쓰는 사람들은 건강에 대한 속설에 지나치게 매달린다. 그들이 믿는 속설 가운데는 잘못된 것이 적지 않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다이어트’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1,000여 건의 ‘성공 다이어트’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운동과 금식 등을 꾸준히 실천하면 체중을 줄일 수 있다. 단기간에 체중을 많이 줄이기 위해 체질에 맞지 않은 다이어트 법을 실천하면 당장 체지방을 줄일 수는 있지만, 또 다른 질병이 생길 수 있다. 체지방 관리와 건강한 식생활을 동시에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채식 다이어트가 유행하고 있다. 채식 다이어트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육류를 아예 먹지 않고, 채식과 과일 위주의 식단을 마련한다. 채식 다이어트가 전립선암을 예방 또는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하지만 채식 다이어트에 우려를 내비치는 전문가들도 있다. 채식 위주의 식단이 육식에 편중됐던 과거의 식습관을 돌아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만, ‘건강을 위한 식습관의 정석’으로 정착되는 것은 곤란하다. 채식만을 고집하면 골다공증이나 빈혈, 성장 불량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적당한 양의 육류와 유가공 제품을 섭취해야 균형 잡힌 영양소를 섭취한다.

 

우리는 무수히 쏟아지는 건강 의학 정보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 건강과 의료,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에 관한 정보가 차고 넘친다. 지상파, 공중파, 심지어 종편 방송까지 건강 의학 정보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특히 인터넷에는 광고성 정보들이 무분별하게 범람하고 있다. 인터넷 광고 또는 홈쇼핑 광고를 믿고 건강기능식품을 사는 경우가 있다. 건강기능식품이 ‘의약품’이 아닌 ‘식품’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건강기능식품 광고를 접한다. 이런 광고들은 소비자들을 현혹한다. 건강기능식품이 병을 고치는 데 도움을 주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소개한다. 건강기능식품이 ‘의약품’이 아니라서 부작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식사 한 끼에도 영양의 조화를 고려해야 하듯 건강기능식품도 잘못 먹으면 조화를 깨트리게 된다. 건강기능식품은 치료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솔직한 식품》은 우리가 많이 접했을 법한 대중매체의 건강 의학 정보들의 허와 실을 알려준다. 건강 의학 정보들은 건강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게 하는 데는 크게 기여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건강 의학 정보의 효능만 돋보이고 부작용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물론, 방송에 출연하는 ‘쇼 닥터(Show Doctor)’들이 건강 의학 정보에 대한 부작용, 그리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까지 알려주고 있다. 문제는 의학 전문가 혹은 비 의학 전문가들이 자신의 사례를 바탕으로 도출된 의학 정보를 마치 검증된 지식인 것처럼 단정해서 소개하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불확실한 정보를 아전인수 격으로 받아들인다.

 

90년대 중반에 우리 농산물에 향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우리 몸엔 우리 음식이 최고’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강조한 ‘신토불이(身土不二) 음식’이 유행한 적이 있다. 요즘은 ‘신토불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지만, 지금도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자란 재료로 만들어진 음식이 건강이 좋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 김치와 된장은 건강에 유익한 발효식품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김치와 된장은 염분 함량이 높다. 김치와 된장을 과다 섭취하면 고혈압을 유발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김치와 된장을 거의 매일 섭취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위암 발병률은 세계 1위이다. 과도한 염분 섭취가 위암 발병의 원인이다.

 

‘신토불이 음식’ 사랑과 반대로 외국에서 나오는 건강한 음식을 애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건강에 관심 많은 우리 어머니가 이런 유형에 속한다. 어머니는 처음에 블루베리의 효능을 알고 나서 블루베리를 먹기 시작했다. 몇 달 뒤에는 블루베리보다 항산화 효과가 높은 아사히 베리에 관심을 보였다. 최근에 어머니는 블루베리, 아사히 베리보다 훨씬 좋은 열매가 아로니아라고 말한다. 서구에서 나는 음식의 효능 또는 그곳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의학 정보가 과학적으로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저자는 서구의 건강 식문화가 우리나라에 검증 없이 유통되고, 일반인들이 쉽게 맹신하는 상황을 ‘영양학 사대주의’가 낳은 문제점으로 본다.

 

저자는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건강 의학 정보의 단점을 조목조목 알려준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참고문헌들도 따로 정리했다.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나누어질 것이다. 어떤 독자는 책에 소개된 정보 대부분이 이미 아는 내용이라고 느낄 수 있을 테고, 또 다른 독자는 저자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의 부제를 ‘과학적으로 먹고살기’라고 정했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적’은 무슨 의미일까?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책 153쪽에 나오는 저자의 말이 ‘과학적으로 먹고살기’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어느 쪽에도 편향적이지 않은 중립적 견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다. 객관적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있으나 100퍼센트 객관적인 사람은 없다. 나도 이 책의 내용이 모두 객관적이라거나 중립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정보를 대할 때 반대 입장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보다 정확하고 과학적인 정보가 있는지를 탐색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미덕이다. 특히 식품처럼 정보편향이 심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153쪽)

 

저자는 솔직하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책도 무조건 믿지 믿어선 안 된다는 의미의 당부를 간접적으로 밝힌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덮을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어디선가 우리의 상식을 뒤집어버리는 새로운 건강 의학 정보가 밝혀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믿고 있던 의학 상식은 폐기되어야 한다. 아직도 우리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낡은 의학 상식은 해로운 도끼가 되어 우리 몸을 찍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과학을 공부해야 한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에 속아서 건강을 망치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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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4-27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 닥터 하니 느닷없이 신해철 의사 생각납니다그려.. 그 인간... 참, 티븨 나와 설레발 많이 치더니...

cyrus 2017-04-27 23:13   좋아요 0 | URL
문제 일으킨 의사들은 자격 박탈해야 합니다.

2017-04-27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4-27 23:14   좋아요 0 | URL
이 책에도 다이어트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으로 욕구를 줄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음식을 덜 먹어야 합니다. ^^;;

감은빛 2017-04-27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마다 다 체질이 다르니,
어떤 건강 상식이나 과학적인 정보도 다 맞을 수 없겠지요.
누군가에게는 잘 들어맞는 정보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안 맞을 수 있구요.

언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담담한 평, 잘 읽었어요!

cyrus 2017-04-27 23:19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감은빛님. 요즘도 운동 꾸준히 하고 계시죠?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적용되는 건강법은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체질에 맞는 건강법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틈에 2017-04-29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는 대표적 분야가 건강 의료인 것 같아요... 완전 상반되는 주장이 각자 전문가란 이름으로 매체를 타고 있으니...

cyrus 2017-04-30 15:05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어떤 의견이든 다 알아보고 비교해봐야 합니다. 무조건 한쪽 입장이 옳은 건 아니니까요.

페크pek0501 2017-05-02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편식하지 않고 음식 골고루 먹기, 를 건강한 식습관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cyrus 2017-05-02 13:27   좋아요 1 | URL
가장 고치기 힘든 식습관이 편식과 덜 먹는 것입니다. 저는 두 가지 식습관을 피하려고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인간을 정신과 신체로 구분하고 정신만을 강조했던 이성 중심의 근대적 도그마(dogma)에서 벗어나려는 취지에서 생겨났다. 사람의 몸이 행위예술로 불리는 퍼포먼스(performance)의 표현물로 자주 등장하게 된 배경도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에 있다. 오늘날의 대량소비문화는 인간의 이성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몸에서만 확실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고 자아도 거기에서 찾아야 한다. 여성의 신체가 퍼포먼스의 단골 메뉴가 되는 것도 그런 현상과 무관치 않다. 여성이 더 이상 소외되고, 착취되고, 지배되는 대상이 아니라는 페미니즘 담론까지 퍼포먼스에 내포되어 있다.

 

 

 

 

 

 

 

 

 

 

 

 

 

 

 

 

 

 

 

 

 

 

 

 

 

 

 

 

* 진동선 《현대사진가론》(태학원, 1998)

* 강태희 《현대미술의 또다른 지평》(시공사, 2000)

* 소피아 포카 《포스트페미니즘》(김영사, 2001)

* 정윤희 《젠더 몸 미술》(알렙, 2014)

 

 

신디 셔먼(Cindy Sherman)은 일찍이 여성의 신체에 주목한 사진작가이다. 특히 여성의 정체성을 욕망과 쾌락, 사랑과 고통, 소외와 고립 등의 측면에 집중 조명해 왔다. 이 같은 작업으로 역사적, 문화적 특수성 속에서 여성이 처한 억압 상황을 표출하는 것이 그녀의 관심사였다. 셔먼은 원래 순수 미술을 전공했다. 그녀는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사진을 이용한 퍼포먼스에 관심이 많았다.

 

셔먼은 1970년대 중반 이후 30여 년간 사진을 발표했다. 이 작가의 모델은 늘 작가 자신이다. 그녀는 자신을 옛 명화 속 모델이나 영화배우 또는 주부처럼 정교하게 분장하고 치장해 촬영, 배우 겸 연출자처럼 여성을 재현한 500여 점의 사진을 발표해왔다. 사진의 작품명은 ‘무제(Untitled)’ 혹은 ‘무제 필름 스틸(Untitled Film Still)’이며 각각의 작품에 일련번호가 있다. 『무제 필름 스틸』 연작은 작가 자신이 직접 영화 속의 배우처럼 자세를 취한 것이다. 셔먼은 할리우드나 산업 광고에 의해 묘사된 여성의 정체성을 차용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 과정에서 정형화된 성 역할과 성적 이미지의 사회화에 미디어의 영향이 어떤지를 탐구하고 있다.

 

 

 

『무제 필름 스틸 #21』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금발머리 여배우로 직접 분장해 자신의 모습을 촬영한 작품이다. 이 작품 뒷면에 ‘City Girl’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무제 필름 스틸 #21』을 1분 동안 가만히 주시하면 케이트 잠브레노(Kate Zambrano)의 소설에 등장하는 ‘Green Girl’의 얼굴이 떠오른다.

 

 

 

 

 

 

 

 

 

 

 

 

 

 

 

*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

*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 출구》(동문선, 2004)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의 저자 록산 게이(Roxane Gay)는 여성성을 연기하는 여성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케이트 잠브레노의 소설 《Green Girl》(국내 미번역)을 언급한다. ‘Green Girl’은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햄릿》의 대사에 나오는 단어인데, ‘어리고 순수한 여자’를 뜻한다. 잠브레노의 《Green Girl》은 사회 속에 억압받는 여성이 연기하는 수동적 여성성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기차 안에서도, 패션쇼에서도 그들은 의식한다. 남자들은 언제나 여자들을 쳐다본다. 언제나 그 끈적한 눈길로 여자들을 쳐다보고 있다. 쇼핑은 하지만 물건은 사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생활은 어렵다. 가끔 그녀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잠브레노의 《Green Girl》 중에서,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 191쪽)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남성중심 문화가 만든 규범 아래서 행동을 반복하면서 젠더 정체성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즉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된 존재가 여성의 정체성을 수행(performance)하고 있다.

 

 

 

 

 

 

여성적 역할을 반복적으로 수행할수록 전통적 여성성이 강화된다. 그러면 자신의 시선으로 ‘나’를 평가하기보다는 주위 시선으로 ‘나’를 평가한다. 대대적인 억압의 시선이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 여성의 신체는 억압당한다. 남성 중심적 사회가 원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따라가려는 노력은 ‘아름다운 여성’이 되기 위한 고통스러운 수행이다. 엘렌 식수(Helene Cixous)는 여성 직접 여성성을 텍스트 안에 집어넣는 ‘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eminine)’를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로 보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제 필름 스틸』 연작은 셔먼 자신을 사진 안에 집어넣은 작품이다. 그 속에는 셔먼은 ‘여성’이라는 불안정한 정체성을 연기하는 개인을 연기한다. 여성성을 연기하는 개인을 통해 왜곡된 여성상 이면에 가려진 정신의 그늘과 신체의 피곤까지 담아내며 과연 여성의 실제 모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억압되어 왔던 여성의 신체를 드러내는 셔먼의 사진 작업은 아름답고 용감한 일이다. 그녀의 『역사 인물화』 연작은 여성 신체를 신비화하며 재현하는 남성 중심의 예술에 반기를 든 작품이다. 『무제 #230』은 어디선가 본 듯 친숙한 여성의 누드이다. 이 작품은 라파엘로(Raphael)의 『라 포르나리나(La fornarina)』를 패러디(parody)했다. 패러디는 원작을 똑같이 모방하는 수준에 그쳐선 안 된다. 그 원작에 드러나지 않았거나 은폐된 문제점을 폭로해야 한다. 라파엘로의 그림 속 여성의 왼팔에는 ‘우르비노의 라파엘로(Raphael Urbinas)’라는 이름이 새겨진 팔찌가 채워져 있다. 셔먼은 ‘제빵사의 딸’이자 ‘화가 라파엘로의 애인’으로만 알려진 ‘이름 없는’ 여성으로 분장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분장하지 않았다. 자세만 똑같이 흉내 낼 뿐 지극히 현실적인 피부와 신체를 가진 작가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의 신체는 처진 가슴과 볼록해진 배를 가진 임산부의 신체에 가깝다. 그래서 관객은 그 사진에서 눈요깃거리에서 해방하여 거짓이나 왜곡 없는 ‘그저 벗고 있는 몸’으로 바라본다.

 

 

 

 

 

『무제 #250』은 남성 관객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 준 누드 사진을 전복한 작품이다. 셔먼은 과장된 신체 묘사를 통해 여성에게 향했던 남성 중심의 관음증적 시선에 저항한다. 늙은 모델은 에로틱하기보다는 도발적인 표정이다. 남성 관객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예술이라는 이름 뒤로 은폐된 남성의 성적 욕망을 콕 짚어낸다.

 

 

 

 

 

 

 

 

 

 

 

 

 

 

 

 

포르노는 전시의 대상이 된 벌거벗은 삶이다. 포르노는 에로스의 적수다.

포르노는 성애 자체를 파괴한다.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65쪽)

 

포르노(porno)는 여성의 신체를 박제하여 전시의 대상으로 만든 영상이다. 포르노 속 여성은 ‘사람’이 아니다. 이름도, 표현도 없는 오로지 노골적인 성애를 드러내도록 수행하는 박제된 대상이다. 셔먼은 오랫동안 여성의 몸에 입혀진 사회적 억압의 관습을 과감히 벗은 채 몸만이 아닌 ‘사람’을 찍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있어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은 단순히 모방에 불과한 박제의 대상이 아니다. 그녀의 사진은 다시 살아 꿈틀거린다. 그녀의 작업이 과감할수록 사진을 보는 관객들은 사진 속 인물이 분장한 작가가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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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6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26 1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7-04-27 02:23   좋아요 1 | URL
그, 글케 생각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님의 깊은 마음에 경배합니다.
 
‘성’스러운 국민 -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근대 국가의 법과 과학 RICH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총서 5
홍양희 엮음,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젠더연구팀 기획 / 서해문집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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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소설 《주홍 글자》의 주인공 헤스터 프린(Hester Prynne)은 간통을 했다는 벌로 가슴에 ‘A’ 낙인을 가슴에 달고 살아야 했다. 헤스터와 딤스데일(Dimmesdale) 목사의 사랑은 청교도적 윤리관에서 보면 부도덕한 감정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작품에서 청교도 사회 속 가부장제의 비정함을 읽을 수 있다. 헤스터가 처한 상황에 잘 나타난 것처럼 간통죄의 처벌은 원래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간통죄의 핵심은 간통한 기혼 여성을 처벌하는 것에 있다. 이는 가부장제의 잔재라고도 할 수 있다. 간통죄의 부활을 원하는 지지자들은 결혼의 정조와 가정의 건강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부부간의 외도를 법적으로 막는 간통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간통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다. 그러나 간통은 윤리적 비난의 대상이지 국가가 개입해 형벌로 다스려야 할 일이 아니다.

 

《‘성’스러운 국민》은 법이 공평무사한 이상적 세계 안에서 세워지고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한 권력 현실 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필자들은 여성 또는 성 소수자(Queer)의 차별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권력 분배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지를 근대 국가의 법적 · 제도적 장치에서 주목한다. 국가는 권력을 발휘하여 ‘개인’을 ‘국민’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을 국민으로 재편하기 위해 ‘모성’과 ‘현모양처’라는 기준에 제시된다. 이 두 가지 기준은 여성의 모성애를 미화하고,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반면 기혼 여성의 간통은 ‘모성’과 ‘현모양처’에 어긋나는 음란한 범죄 행위로 규정된다. 식민지 시기의 간통죄는 가부장적 권력관계 속에서 구성된 것이다.

 

국민국가 중심의 안보 체제는 한 국가 내 여성의 위치를 ‘보호받는 국민’으로 정의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국방의 의무를 짊어져야 할 남성과 그들이 지켜주는 여성이라는 젠더 이분법(gender binary)이 형성된다. 국가가 생산하는 젠더 이분법이 극우 논리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금,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우리 국민은 병역 의무에 대해 매우 단호하다. 현행 병역법상 동성애자도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한다. 성적 지향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나 대체복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현행법 체계에서 예외적으로 동성애자가 군 생활을 피할 수 있다. 신체검사에서 ’부적격자’로 인정되는 것뿐이다. 성전환 시술을 받아 일반 남성과 현저히 다른 신체를 갖거나 ‘성주체성 장애’로 판정받는 방법이 있다. ‘건강한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라는 병역 의무의 견고한 전제는 성 소수자의 차별을 제도화한다.

 

기득권의 유지 및 재생산 도구로서 법은 무수히 많은 불의와 억압을 낳았다. 이러한 법적 통제에는 성적 · 사회적 차별이 깔렸으며 여성과 성 소수자는 그 과정에서 가장 가차 없이 그 불명예를 그대로 안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 남북 분단의 혼란스런 한복판에 서 있는 바람에 가부장제가 고착된 식민지 법제 일부를 이식받았다. 그러므로 여성의 삶을 통제하는 국가주의의 문제점을 성찰할 기회가 마련되지 못했다. 그런 장이 되기 위해서 여성주의 접근으로 식민지 과거청산을 시도함으로써 보다 나은 젠더 정의를 실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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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와 공작 사이언스 클래식 31
헬레나 크로닌 지음, 홍승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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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수컷은 화려하면서도 거추장스러운 꼬리를 가지고 있다. 꼬리의 화려함 때문에 천적의 눈에 잘 띄어 잡아먹힐 확률이 높다. 그래도 공작 수컷은 꼬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모든 정력과 에너지를 화려한 꼬리 치장에 들이고 그 치장을 바탕으로 가장 화려한 수컷이 가장 많은 암컷과 교미할 수 있다. 수컷의 화려함은 과시의 상징이기 이전에 유전자의 우수성을 알려주는 신호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언제나 생존 가능한 숫자보다 많은 수의 후손을 생산한다. 강하고 건강한 개체만이 종족을 보존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동물은 자신의 유전자를 많이 퍼트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과시한다.

 

공작의 화려한 꼬리는 ‘성 선택(sexual selection)’의 결과다. 암컷의 주목을 받아 짝짓기 확률을 높이는 이익이 꼬리로 인해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손실보다 크기 때문이다. 수컷 공작의 화려한 꼬리에서 착안한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성 선택 이론은 진화생물학자들에게 정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처음에는 입증되지 못한 하나의 가정에 불과했다. 다윈은 수컷 공작의 특정 꼬리 외모를 선호하는 암컷 공작의 취향이 ‘심미적 요인’ 때문으로 추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앨프리드 월리스(Alfred Wallace)는 다윈의 성 선택 이론을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암컷 공작이 단순히 꼬리에 대한 취향만으로 수컷을 고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암컷 공작은 수컷 공작의 꼬리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수컷 공작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여 교미 여부를 판단한다.

 

만약 월리스의 협력이 없었다면 다윈은 진화론을 끝내 세상에 내놓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월리스는 말년에 창조론에 경도되면서 다윈의 그늘에 가려 잊혀졌다. 그렇지만 헬레나 크로닌(Helena Cronin)은 성 선택 이론에 대한 논쟁의 역사를 정리한 《개미와 공작》에서 성 선택 이론을 거부한 월리스를 재평가한다.

 

 

인정하건대 지금까지 나는 월리스를 한때 다윈의 성 선택 이론을 거부했으며 암컷의 선택이라는 바로 그 아이디어에 확고하게 반대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제 그 인상을 바꿔야 하는 시간이 됐다. 그의 모든 항변에도, 월리스는 암컷 선택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그가 실제로 한 행동은 암컷 선택에 대한 다윈의 견해에 열심히 반대하면서 대안 이론인 ‘좋은 감각’ 견해를 제시한 것이었다. (298쪽)

 

 

암컷 공작의 ‘좋은 감각’은 아름다운 수컷 공작 꼬리를 선호하는 ‘좋은 취향’과 다른 의미이다. 조금 더 생각하면 성 선택 이론에도 허점이 있다. 순록의 거대한 뿔 역시 성 선택의 결과다. 수컷 순록들은 멋진 뿔을 암컷 순록 앞에서 자랑하며 구애 경쟁을 펼친다. 그런데 수컷 순록의 뿔을 선호하는 존재가 암컷 순록만 있을까. 인간도 순록의 뿔을 좋아한다. 아주 화려한 뿔을 가진 수컷 순록은 사냥감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되면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손실이 암컷의 주목을 받아 짝짓기 확률을 높이는 이익보다 커질 수 있다. 그리고 순록은 그 어느 동물보다 기후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기후 변화로 인한 지구온난화는 순록의 생존 조건을 더욱 혹독하게 만든다. 날씨가 따뜻해서 빙하의 결빙과 해동 주기가 변화되고, 먹이를 찾기 위한 순록 떼의 이동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눈보다 비가 더 많이 내리게 되면, 순록이 뜯어 먹을 풀들이 얼어 죽는다. 먹을거리마저 사라지니까 순록의 몸집이 점점 줄어들게 되고, 먹이를 구하기 힘든 겨울에 순록이 굶어 죽는 일이 발생한다.[참고] 개체 수 관리를 위한 정책적 노력으로 순록 개체 수를 늘릴 수 있지만, 먹을 것을 두고 벌어지는 순록의 생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암컷 순록은 화려한 뿔을 가진 수컷이 아닌 건강 상태가 양호한 몸집이 큰 수컷과의 교미를 원할 것이다.

 

종의 생존 경쟁이 치열하다고 해서 진화 자체가 이기적이며 냉혹하다고 볼 수 없다. ‘혈연 선택(Kin Selection)’ 등으로 풀이되는 호혜적 이타주의가 아직도 우리를 지탱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성 곤충이 보이는 협동 모습은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다윈은 이러한 측면에서 생식적으로 불임이면서도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해 무한 희생하는 일개미에 대한 경외심에 대해 일찍이 기술한 바 있다. 개체의 이익을 포기하면서 집단의 이익을 위해 협동하는 집단만이 살아남는 것 또한 진화의 섭리다. 그런데 다윈의 추종자들은 인간을 포함한 종들은 번식을 향한 냉엄한 경쟁에서 비롯됐다고 해석했다. 이렇다 보니 생존경쟁에서 이긴 자만이,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자만이 살아남는다고 주장한 ‘사회진화론’을 다윈의 진화론으로 오해하는 상황이 생긴다.

 

 

 

 

[참고] <순록, 숫자는 늘지만 몸집은 점점 작아진다…이유는?> (서울신문, 2016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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